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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삼국사기에 대한 진실
    『삼국사기』1. 『삼국사기』의 편찬사 및 구성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인종 23년)경에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이다. 중국의 정사체인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되어 있다.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는 전 9책 50권이며, 종이의 질은 한지이다. 그리고 가로 22.4㎝, 세로 31.5㎝ 크기로 장마다 9행 18자로 짜여져 있고, 자체와 판식이 완연히 다른 3종의 판이 혼합되어 있다.보물 제722호로 지정된 『삼국사기』「권44∼50」는 13세기 후기에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삼국사기』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크기는 가로 19.5㎝, 세로 25㎝이고, 상태가 좋지 못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 완전한 것은『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이 책의 2질(帙)뿐이다. 이 책을 통해 중종대 간본(刊本)의 잘못된 글자와 빠져 있는 글자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원판이 이미 닳아서 복구가 불가능한 곳이 있고, 글자가 잘못되어 있거나 빠져 있는 등의 결점이 있기는 하나 현재로선 가장 완전한 것이다.보물 제723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국사기』「권1∼50」책을 간행한 경위는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의『삼국유사』중간에 밝힌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우리나라의 『삼국본사(三國本史)』와 『유사(遺事)』 두 책이 다른 데서는 간행된 적이 없고 본부(경주부)에 판이 있기는 하지만 오래되어 판이 망가져 한 줄에 겨우 4∼5자 밖에는 알아볼 수 없다 ’고 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책의 크기는 가로 20.7㎝, 세로 30.2㎝이며, 원판이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곳, 잘못된 글자, 빠져 있는 글자 등의 결점은 있지만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함께 현재까지는 가장 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책은 1174년(명종 4년)에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보내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년)경으로 추정되며 소련과학원 동방연구소 레닌그라드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미전되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보이나 전해지는 판이 없어 그 자세한 여부는 알 수 없다.『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 이온문(李溫文), 허홍재(許洪材), 서안정(徐安貞), 박동계(朴東桂), 이황중(李黃中), 최우보(崔祐甫), 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찬 보조자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 어느 정도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內侍), 간관(諫官: 諫議大夫, 起居注)출신이어서 이들의 현실비판의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이 책은 이들 편찬자의 독단적인 서술이 아니라,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郎世記)』, 『계림잡전(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진서(晋書)』, 『위서(魏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2. 『삼국사기』의 편찬『삼국사기』의 편찬에 소요된 기간은 적어도 인종 20년(1142) 이후부터 시작되어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친 인종 23사를 기술한 것은 청말까지 없었고, 오직 1990년대 이후의 역사적 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역사가 우리나라 역사임을 명백하게 천명하고 있으며, 고구려본기를 서술하고 있음이 바로 그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셋째는 광종조에 과거제도가 실시된 후 응시자인 우리나라 학자들이 읽은 책은 중국의 5경과 제자백가, 그리고 중국의 역대 사서였으며,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자의식이다. 더구나 고려 예종 대, 인종 대에는 송나라 학문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송, 여진, 고려의 외교 관계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학자가 외국 것을 잘 알면서 자기 것도 잘 알아야 한다는 점은 나라를 경영하는 군주의 인식이었을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지식인에게도 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넷째는 『구삼국사』는 문장이 졸렬하고 빠진 것이 많아 정치의 교훈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정치적 교훈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3. 『삼국사기』의 서술『삼국사기』는 형식상으로 보면 본문과 부주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고, 크게 역사적 사실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만 붙인 ‘논왈(論曰)’로 시작되는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 사론을 논찬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논과 찬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에 10측, 고구려본기에 7측, 백제본기에 6측, 열전에 8측 등 모두 31측의 논찬이 있다. 그 내용은 대개 예법준칙,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이 중심이 되지만 그러한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견지하면서도 우리 현실과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 그것은 내물왕의 동성취처(同姓娶妻)나 혁거세의 왕후동반순행을 옹호한 점이나, 신라 3보(寶)와 할고지효(割股之孝)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한데 나타나 있다.본문은 사실의 기록인 직서법과 대화체의 문장이 섞여 있다. 대화체의 문장은 역사 내용을 더욱 생동감 있고, 현장현이다.’라고 해서 전부 왕이라는 용어로 바꾼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독특한 문화나 용어조차 원래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가고 천명하면서 그대로 살리고 있는 것이다.또한 『삼국사기』의 서술에는 고려조 국왕의 이름자를 사용하지 못하는 피휘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피휘법은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조처로서 사용되었으며 조선 중종 때에 판각된 정덕본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이러한 『삼국사기』의 서술 특징을 살펴보면,첫째, 이 책은 처음부터 삼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았으며, 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파악하였다. 말하자면 1세기부터 삼국이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므로,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보지 않았으며, 역사변천을 발전사관으로 파악하여 신라, 고려의 교체(交替)를 당위성으로 설명하고 있다.둘째, 이 책은 역사내용을 하늘과 땅 사이의 관념적 사고를 통하여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사내용을 추출시켰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왕의 정치행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셋째, 이 책은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에 편찬 당시의 현실비판을 특정한 과거사실인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내분과 결부시켜 지도층의 분열과, 폭압자의 최후를 역사의 필요성으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김부식은 묘청(妙淸)일파의 패배나 견훤, 궁예의 멸망을 통일에 대한 분열의 응징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넷째, 이 책은 강렬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래 『삼국사기』의 사대성에 대한 반론으로서 우리나라 현실과 독자성을 강조한 김부식의 사론에서 엿볼 수 있었다. 끝으로 이 책은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영웅주의사관이 아니라, 고대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은 물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공적인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희생하는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려는 것이었다.4.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1) 부정적 평가『삼국사기』에 대한 부정적서는 당연한 입장이었다. 즉, 김부식은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대한 사론에서도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통적 문화 체질과 거리가 먼 모방적이고 사대적인 유교 사관에 입각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전통문화의 빈곤화요 축소화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삼국유사에는 그런 대로 향가(鄕歌)가 수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전혀 실려 있지 않다. 그리고 중국 측과의 외교관계 기사는 거의 조공기사이다. 이는 김부식이 사대(事大)를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하는 각도에서 처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두 번째로 신라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삼국 중에서 신라에 특히 치중되어 있음이 일찍이 지적되어왔다. 신라 중심적인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형식적인 양의 차이이다. 본기(本紀)에서는 별반의 불균형이 없으나 지(志)에 들어서서는 제사(祭祀), 거복(車服),옥사(屋舍)등 모두가 신라의 서술이 월등히 많고 지리지(地理志)에서는 고구려의 전역이 수록되지 않고 일부만 수록되어 있다. 또 열전(列傳)에 실린 인물 수는 신라인이 40명, 고구려인이 8명, 백제인이 3명이다. 고구려인 중에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전기는 전적으로 중국의 사적에서 따온 것이고 온달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본기(本紀)에 나온 것을 열전 형식으로 재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백제인 중에서 도미처(都彌妻)의 전만 새로이 수록된 것이다. 사론을 통해서도 신라 중심적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풍속과 제도에 관한 사론은 신라의 것에만 있다. 즉, 삼국의 풍속과 제도 중에서 특히 신라의 것을 중시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에 관한 사론은 모두 폄론(貶論) 밖에 없다.한편, 『삼국사기』는 『구삼국사』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고려 초에 저술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구삼국사』는 고려 건국에 대한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술에서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는 것보다 후삼국을 통일하였다는 것을 강조했을.
    인문/어학| 2006.03.14| 6페이지| 1,000원| 조회(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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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역사]서안사변과 장학량 평가A좋아요
    ※목차1. 머리말2. 서안사건 이전의 중국의 상황1)일본의 동북침략과 동북군의 철수2)‘6차초공전’의 강행과 장학량의 반발3. 서안사건의 발생과 전개4. 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과 중국에 미친 영향1)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2)서안사건이 중국현대사에 미친 영향5. 맺음말1. 머리말1936년 12월 12일 중국 서안에서는 중국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 발생하였다. ‘서안사건(西安事件)’ 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중국은 제 2차 국공합작을 하게 됨으로써 근본적으로 중국이 불과 13년 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공산화되는 계기가 되었다.이는 한국현대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중국과는 달리 조선은 일본제국주의 하에 내전은 없었지만,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대립으로 분산적으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때 ‘정우회선언’ 이후 민족주의 좌파와 조선공산당은 민족협동통일전선을 취하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 유사하게 서안사건 이후에도 국?공 관계가 원만해져서 제 2차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서안사변은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서안사건은 중국 동북군의 사령관인 장학량이 국민당의 총통인 장개석을 감금하고 항일전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 일종의 군사 쿠데타였다. 장개석은 결국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 항전할 것을 선언하게 되었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묵시적인 방관 속에 대륙침략을 추진하던 일본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서안사변을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하고 본론에서는 ‘서안사건 이전의 중국의 상황’ 을 통해 서안사건이 일어나기 전 1930년대 초?중반의 상황과 만주사변을 중심으로 장학량의 동북군의 노선을 바꾸게 된 동기를 알아보고, ‘서안사건의 발생과 전개’에서는 사건의 발생 배경을, ‘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과 중국에 미친 영향’에서는 「안내양외」와 「양외안내」를 둘러싼 팽팽한 대결과 각자의 이익을 해결책을 찾았다. 따라서 1920년대 일본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더 적극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일본에게 중국은 무한히 넓은 해외시장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꿈꾸던 세계정복을 위해서도 일본은 반드시 중국 특히 만주의 자원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일본은 만주에 있어서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1906년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부속사업으로 철도 경영이외에 광업?해운업?전업 등을 관리하였다. 즉 회사의 가면을 쓰고 정부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며 정부를 대신하여 남만주를 경영하는 침략 기관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만주 침략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여러 사건을 일으키며 기회만을 엿보던 일본은 결국 9?18 사변이라 불리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1931년 일본 관동군은 심양 유조구 부근의 남만철도를 공격하고, 부근의 중국군이 공격하였다는 핑계로 19일 새벽 심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장춘, 사평, 무순, 안동 등 20여개 성을 공격하여 일주일내에 요녕과 길림 두 성을 차지하였다. 장개석은 동북군의 장학량에게 절대 싸우지 말 것을 명령하였고, 결국 19만의 동북군은 산해관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1932년 2월 5일 일본은 찰합이성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동북삼성(東北三省)이 완전히 점령되었다.당시 안내양외 정책을 취하고 있던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반장운동(反蔣運動)을 평정해야 했고, 또한 내전-초공전(剿共戰)-에 바쁠 때였다. 즉, 먼저 공산당과 홍군을 격멸하고 그런 다음 항일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장학량의 동북군은 저항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만주사변의 실패 이후 항일운동이 거세지면서 장학량과 동북군대는 국민들에게 ‘부저항(不抵抗)장군과 군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며 수모를 당하였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면서도 국민정부에 충성하던 장학량의 동북군대였지만, 국민들의 항일운동이 거세지면서, 그리고 계속되는 국민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안내양외」 정책에 반발하게 하고 있었고 적극적인 항일전을 촉구하면서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갔다. 민중 들이 생각하는 것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힘을 합하여 일치항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당시 중국 민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한 적절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장개석의 국민당은 이를 묵살하고 안내양외 정책을 꾸준히 추구하였다.결국 중국 국민은 국민정부의 부저항주의(不抵抗主義)를 매국행위로 비난하였고, 더 나아가 반정부적 색채까지 띄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국민의 항일 운동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제를 전복할 위험이 있다고 여기고 탄압하였다. 국민들은 이러한 국민당의 행위에 분노하는 동시에 공산당의 항일정책에 공감하며 그들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공산당은 본격적으로 그들의 일치항일 정책을 통하여 국민의 호응을 얻으면서 세력 확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한편 만주 사변에서 패한 이후 장학량은 1935년 여름 6차 초공의 임무를 띠고 서북초공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서안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홍군과의 전쟁을 시작한 장학량의 동북군은 그러나 109, 110사단이 크게 패하여 두 장군이 전사하게 되었다. 장학량은 곧 양개 사단의 보충을 국민정부에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두 사단의 번호마저 취소당하게 되었다. 만주 사변에서부터 장개석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내 보이던 장학량도 이러한 국민정부의 태도에는 크게 마음이 상했다.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항일을 꿈꾸던 장학량은 전국적인 항일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는 국민정부의 안내양외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항일을 이룩할 사람은 장개석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쫓던 장학량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정책에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동시에 공산당의 항일정책에 강하게 이끌리기 시작하였다,공산당도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추진하여 가는 초기 과정에서 그 대상을 장개석에게 두지 않고 장학량에게 두었다. 특히 공산당은 동북군에 대한 선전공세를 펴기 위하여 1936년 1월 정치국 안에 백군공작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당시 백군 공작의 중요 방 8개월 뒤에 벌어질 ‘서안사건’의 발단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3. 서안사건의 발발과 전개1935년 이래로 서안에 주둔해 있던 장학량은 1936년 1월말 동북대 학생들이 서안에 찾아온 이래 항일의 여론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9월에는 북부중국에서 모여든 학생 370명을 훈련시켜 학병대를 조직하였고 동북군 안에서는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 때 장학량의 동북군이 서안에 오기 전 이미 주둔해 있던 양호성(楊虎城)의 서북군도 동북군의 항일 여론에 뜻을 같이 하였다. 1936년 전반기에는 공산당과 정전을 맺고 공산당원이 서안에 주재하면서 동북군과 서북군의 개조를 도와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이와 같이 장학량이 항일에의 의지를 강화하고 있었지만 장개석은 당시 활발하게 대두된 일치항일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안내양외의 방침을 고수하였다. 1936년 10월 하순에는 직접 서안으로 와서 장학량과 양호성에게 초공작전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신속히 섬서북쪽으로 진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관동군이 내몽고를 독립시키려는 공작의 일환으로 수원성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부대를 이끌고 수원성으로 가서 중국군을 돕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거부하고 공산군 토벌을 요구하였다. 또한 11월 23일에는 상해에서 전국적인 항일구국운동에 활동하던 구국회의 7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다음날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이들의 석방을 호소하고 12월 3일에 장개석과 만났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초공의 중지와 중공과 함께 항일할 것과 구국회의 7명의 석방, 일본의 수원성 공격에 대하여 일부 군대를 수원전선에 배치하지 않으면 항일의식으로 격앙된 군대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건의하였다.그러나 이와 같은 건의는 모두 묵살되었다. 급기야 장개석은 총공격 준비를 갖추고 다음날 서안으로 와서 장학량에게 공산군 토벌을 하든지 아니면 동북군, 서북군이 각각 복건, 안휘성으로 이동하라고 요구하였다. 동북군, 서북군 가운데에서 항일의 여론이 높아져 장학량의 요구에 따라 주은래를 파견하여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였다. 구국연합회는 장개석의 석방과 중앙정부 지도하의 항일전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을 석방하여 그의 지도하에 항일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여론을 배경으로 장학량, 양호성, 공산당과 국민정부 간에 협상이 벌어져 내전정지와 항일,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개조 등을 포함한 협정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25일 장개석이 석방되고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타결되었다. 이로 인해 내전의 정지와 일치항일이 약속되자 그 동안 항일을 요구해왔던 대다수 국민들은 안도하였다. 약속대로 내전이 정지되고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지속적인 정식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몇 차례 회담이 열리던 중 1937년 7월에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둘러 합의를 보고 9월 23일 제2차 국공합작을 공식 선언하였다.4. 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과 중국현대사에 미친 영향1)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장개석은 장학량과 양호성의 8개 조건을 승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에는 장학량과의 대화도 거절하여 장개석과의 협상은 불가능하였고, 사변이 수습될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송자문과 송미령이 장개석을 대신하여 협상에 나서고, 공산당 역시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로 태도를 전환하였으며 대중의 여론에 힘을 얻어 장학량, 양호성과 남경정부의 송자문과 송미령, 공산당의 주은래 사이에 사변의 해결을 위한 협상이 수차례 이루어졌다. 장개석이 장학량과 양호성을 정식교섭상대가 될 수 없는 부하로밖에 인정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공산당과 남경정부간의 직접교섭이었지만 6개 항목의 협정이 성립되었고, 이로써 25일 장개석이 석방되고 서안사변은 평화적 타협으로 귀결되었다.서안사건의 평화적 해결은 전민족의 입장에서 '일치항일'을 희구하는 대다수 중국민중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장개석이 공산당의 협상책임자인 주은래에게 내전의 중지를 약속한 것을 계기로 내전의 기본적인 정지와 국?공간의 지속적인 정식회담의 길을 터주었다.장개석이 남경으로 돌아온 후 약 1개월 여 간했다.
    인문/어학| 2005.12.30| 6페이지| 1,500원| 조회(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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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굿바이 레닌-새빨간 거짓말의 사랑
    “굿바이, 레닌!” -새빨간 거짓말의 사랑영화 포스터에도 있는 문구인 ‘새빨간 거짓말의 사랑’의 부제를 붙인 이유는 이 영화가 알렉스의 엄마를 위한 지상최대의 거짓말프로젝트를 통해 잔잔한 감동과 가족애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난 후 이 문구가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굿바이, 레닌!’은 거짓말로 현대사를 간단하면서도 그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비록 그 대상이 한 명이고, 눈물겹도록 안타깝긴 하지만 그 정도면 성공적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그 과정은 나로 하여금 아슬아슬한 거짓말을 하는 주인공 ‘알렉스’가 너무 애처로운 나머지 급기야 답답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지만 때로는 재미를 가져다주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위해 만든 뉴스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의 미소에서 잔잔한 감동과 주인공의 순진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었다.동독의 열혈 공산당원이자 교사인 크리스티아네는 베를린 장벽 제거를 주장하는 시위대에서 아들 알렉스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 충격을 받고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8개월 후, 그녀는 사회주의 동독이 이미 사라진 통일 독일 하에서 의식을 되찾게 된다. 아들 알렉스는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머니는 심장이 약해져 조금의 충격이라도 받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엄마를 위한 아들의 지상최대 거짓말 프로젝트가 시작된다.처음엔 엄마의 방을 동독 시절의 분위기로 꾸미고 소년들을 매수해 엄마가 좋아하는 동독 시절 노래를 불러드리는 정도에서 차차 서방의 문물에 어머니가 노출되는 돌발적 사건들이 터져 나오게 되자 일은 걷잡을 수 없게 커진다. 창밖에 걸린 코카콜라 대형 현수막을 해명하기 위해 사실 코카콜라가 동독의 발명품이라는 기막힌 거짓말로 시작하여 급기야는 자본주의의 몰락으로 서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동독으로 망명하고 있다는 뉴스를 만들어 보여주기에 이른다. 영화가 시작하고 그럭저럭한 내레이션에 우울한 분위기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던 나에게 이러한 코카콜라에 대한 뉴스와 같은 기발한 영상과 택시 기사가 된 동독 최초의 우주 비행사, 버거킹 점원이 된 누나의 이야기 등 거짓말을 더 돋보이게 하는 사실적인 에피소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끌어당겨 주었다. 또한 크리스티아네와 헬기에 달려 지나가는 레닌동상과의 만남에서는 아들 알렉스의 거짓말도 막이 내리는구나하는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인자해 보이는 레닌의 미소를 실어 나르는 헬리콥터의 굉음 속에서 묻어나오는 클로즈업된 크리스티아네의 영상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이러한 재미있고 아이러니한 것은 알렉스의 기지와 거짓말이 순간순간을 모면해 나가기 위한 임기응변이었지만 그것은 묘하게 엄마가 그토록 원한 사회주의의 이상적 완성이라는 대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또한 크리스티아네의 풍자적인 ‘건전한 비판’을 받아 적는 이웃집 아줌마의 눈물과 웃음, 그리고 알코올중독에 빠진 교장선생의 비틀거리는 연설은 자신과 크리스티아네를 삶을 향한 애처롭고 쓸쓸한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독후감/창작| 2005.12.30| 1페이지| 1,000원| 조회(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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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교양]독일의 선거공영제-유리돔의 비밀을 보고
    ‘독일의 선거공영제-유리돔의 비밀’‘독일 국회의사당 위에 왜 유리돔을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라는 다큐멘터리는 독일의 총리 선거와 스웨덴의 선거를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선거를 보면서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다른 그들의 선거문화를 볼 수 있다. 즉, 이 영상물을 통해 독일 선거문화의 특징을 제시하고, 독일의 총리 선거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나라의 선거에 커다란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그 중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선거 자체에 대한 개념의 차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와 정치가 아직까지 정당인들만의 축제라는 생각과 함께 매번 선거일에 투표를 강요해야만 하는 국민들에게는 그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무관심하고 귀찮은 일로 간주되지만, 독일에서는 선거가 마치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맥주 축제나 경마장 등 다양한 곳에서 정당의 정책을 홍보하고 가족 모두가 참여하고 즐기고 있었으며, 어려운 당의 정책에 대해서도 후보의 일방적인 연설이 아니라 사회자에 의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었다. 후보들은 당의 정책을 개인이 아니라 정당을 선전하여 정당과 시민들 간의 연대감을 형성하였다. 또한 정당을 바뀌지 않고 대를 이은 당원들이 많았고, 이러한 당원들은 또한 순수 자원봉사자들이라는 점에서 당원들의 적극성과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도 이러한 점을 본받아야 될 것 같다. 그리고 지역감정에 따른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타 정당에 대해 야유와 비판을 보내면서도 민중들은 서로 반응하지 않고 폭력사태로 발전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사를 존중할 줄 안다.또한 독일에서는 TV토론, 정치 광고를 통한 미디어 선거운동과 정당의 지원을 통해 검은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선거공영제의 보편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거공영제의 장점이 바로 정당과 큰 기부금의 연결을 끊는 것이다. 미디어 선거운동을 통해 선거비용이 줄어듦으로써 부정부패가 감소하고 기부금으로부터 독립하여 정치가 가능해졌고, 후보자와 유권자는 건전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또한 후보자와 당원들은 정책 설명회에서 음식을 판매하는 등 여러 가지의 건전한 방법으로 선거 자금을 보충하였고, 개인적인 돈보다는 당비와 기부금으로 선거유세가 행해질 수가 있었다. 따라서 당은 검은 돈이나 일부 압력단체의 영향을 벗어나 당의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당이 받은 기부금은 그 기부 내역을 인터넷으로 공개함으로써 선거비리를 없애고 선거에 있어서 자금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고, 사후 감시체제에서 좀 더 나아가고자 하였다.
    독후감/창작| 2005.12.30| 1페이지| 1,000원| 조회(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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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역사]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의 근원적 발견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의 근원적 발견-韓 ?日 양국간의 근본적인 역사인식의 차이와 극복방안-≪ 목 차 ≫1. 머리말2. 일본 역사교과서 서술방향의 흐름과 우리정부의 대응1)일본의 역사교과서 서술방향의 흐름2)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따른 우리 정부의 대응과정3. 韓ㆍ日간의 역사인식과 그에 따른 역사서술의 차이4.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역사인식의 재정립5. 맺음말1. 머리말최근 한일관계의 악화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파동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꾸준히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로써는 납득할 수 없는 주장들을 펴 오고 있다. 정부는 최초의 미온적 태도에서 국민여론에 떠밀려 강경론으로 전환하였고 대다수 국민들은 아직도 감정적 대응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론은 불난 집에 부채질 격으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미시안적 관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제라는 것이 주어지면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그 근본적 원인을 묻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문제들의 주체인 일본은 이러한 문제의 제기와 주장에 앞서 상당한 학문적 역량을 축척하였다. 내부적으로 축척된 역량이 이제 본격적으로 대외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의 대응은 한국인 특유의 냄비근성으로 표현될만할 감정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본문에서는 일본교과서 왜곡의 흐름과 이러한 왜곡의 원인을 한일 양국의 근본적 역사인식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이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2.일본 역사교과서 서술방향의 흐름과 우리 정부의 대응1)일본의 역사교과서 서술방향의 흐름일본은 전후 탈 군국주의적인 관점에서 역사교과서를 집필하였다. 한 예로 동경교육대 명예교수인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는 교과서 집필에 대한 독립성을 얻기 위해 1965년 6월에 국가배상 청구소송인 제1차 교과서 소송을, 1967년 6월에 검정처분을 취소하는 소송인 제2차 교과서 소송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하 있게 되었다.그러나 집권 자민당과 우익세력은 앞서 서술된 역사서술을 지나친 자학사관이라 혹평하며 역사교과서 서술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당시 일본의 법무상이었던 오쿠노 세이츠케같은 사람은 “현재의 교과서는 나라를 사랑하자라는 말을 버리고 있다 등 대단히 큰 문제가 있다.”고 발언하였다. 정치현장에서의 이와 같은 교과서 공격에 대해 우익 언론과 경제계도 호응하면서 역사교과서 서술은 그들의 기본적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서술되게 되었다.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에 앞서 당시 일본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살펴보자.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인 자민당은 1980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자민당의 압승은 일본 내 양심적 진보세력들의 목소리를 줄어들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의 일본은 엄청난 경제적 성과를 보이며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섬으로써 이에 따른 경제적 혜택을 입은 일반국민들 또한 집권자민당의 세력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보수주의적 집권 자민당의 사관이 역사서술에 있어 반영되었던 것이다.처음 교과서 논쟁은 일본 내 교육문제의 차원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이 논쟁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면서 논쟁은 교육문제의 차원에서 정치문제의 차원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논쟁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는 국내의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일본은 2001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에서 발간한 역사 교과서에서 주변국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향으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이 문제를 국가 간의 역사분쟁으로까지 확대시켰다. 다행히 주변국들의 압력과 일본 내 양심세력들의 노력으로 새역모의 교과서는 극히 저조한 채택률을 보였으나 올해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채택운동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주변국들의 우려와 불신을 낳았다.새역모의 역사교과서는 語不成說이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왜곡된 부분이 많다. 과연 교과서를 집필한 역사학자들의 사관이 과거 군국주의 일본의 남아 지금 일본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흐름은 바로 이러한 침략세력의 재탄생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2)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따른 우리 정부의 대응과정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진행됨에 따라 우리 정부도 대응책을 세우고 대처해 나갔다. 그러나 1982년 7월 20일경까지도 한국사회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정부는 일본에 교과서 시정을 요구하겠다고 언급하는 수준이었고, 국회는 문교공보위원회의 소집을 검토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학계에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더구나 국내언론 특파원 보고나 사설 등을 통해 비중 있게 다루기는 했지만, 간간이 보도하는 정도에 그쳤다.이러한 무반응의 원인은 당시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극도로 혼란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정부는 일본의 경협자금이 절실하던 때였고 혼란한 경제와 사회는 국민여론을 교과서 왜곡 문제로 가져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했다.그렇게 미온적이던 정부가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1982년 7월 23일 마쓰노 유키야스 일본 국토청 장관이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예를 들어 한일합병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어 있지만 한국의 당시 국내정세 등도 있어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한 발언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이 일본의 교과서 기술 내용에 관해 주문을 달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내정간섭이 된다고 생각하므로 그 같은 것은 의연한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오가와 헤이지 문부상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마쓰노 장관의 ‘한일병합’과 내정간섭에 관한 발언은 7월 24일자 국내 언론에 보도되어 국민의 반일 감정을 크게 고무시켰다. 더구나 일본 정부가 교과서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한 데 반해, 중국과 소련의 항의에는 즉각 반응을 보이며 한국 측의 비판에 우월감을 갖고 침묵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일반의 항의행위에서 그동안 정부의 대응과정에 대해 행동으로 비판하는 모습은 없었다. 모든 잘못이 일본에 있는 것으로 치부되었다.이러한 국민여론의 악화로 당시 정부는 일본에 어쩔 수 없이 항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교과서 왜곡의 내용과 실상이 국민 앞에 드러나게 된다.교과서 왜곡 사건이 다시 붉어진 2000년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과거사를 왜곡, 축소하는 역사교과서는 미래지향적 양국관계 발전은 물론 일본 스스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입장을 일본에게 전달하였다. 국회도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에 항의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는 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공개되지 않은 채 조용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언론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긴 했으나 정부의 대응책은 함구한 채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촉매역할만을 담당했다. 이러한 반일감정은 곧 대규모 시위와 극단적 감정표출로 이어져 결국 정부의 노선도 어쩔 수 없이 예전보다는 강경해 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 다시 붉어진 교과서 왜곡 문제도 이러한 흐름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대일 강경 수위가 예전에 비해서 약간 높아졌다는 것 밖에는 차이가 없는 듯하다.3. 韓ㆍ日간의 역사인식과 그에 따른 역사서술의 차이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은 전후 꾸준한 군국주의로의 회귀노선을 걸어왔으며 이는 역사교과서 왜곡이라는 부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역사왜곡의 근본적 원인은 일본과 한국의 역사인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주체들은 그들의 역사인식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나름대로의 역사인식의 틀 안에서 이러한 왜곡이 계속되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과 우리나라의 역사인식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겠다.일본은 2차 대전의 패배 후 군국주의를 포기한 듯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엄청난 경제발전을 것이다.새역모 교과서의 바탕이 되고 있는 사관은 이러한 군국주의 식민사관이다. 이는 역사서술에 있어서 어떠한 가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어떠한 가치란 그들이 과거 누렸던 영화 즉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말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과거 일본이 누렸던 부와 힘을 그들은 다시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연구와 서술에 있어 상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치 우선적 역사서술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과거 일본이 경험했던 전쟁의 참담한 결과도 이러한 사관이 국가와 대중을 지배한데서 발생한 것이다.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해방이후 역사서술의 주된 방향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흘러왔다.광복을 통해 과거 식민지 시대를 함께 했던 민족의 공감대가 대대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비록 광복 후 혼란한 사회적 상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소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민족주의가 이용되기는 했으나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교과서의 역사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민족주의는 반일 민족주의로 굳어졌고 이는 일본의 군국주의 식민사관과 물과 기름처럼 조화될 수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붉어질 때 마다 감정의 수위를 높이며 대응할 수 밖 에 없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쓴 우리의 교과서도 일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왜곡된 교과서일 수밖에 없다. 지나친 우리민족 제일주의와 민족 우수성의 강조는 일본의 입장에서 지나친 국수주의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자신들의 주장을 이러한 반사효과로 인해 어느 정도 뒷받침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일본의 역사교과서왜곡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한국과 일본은 근본적인 역사인식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지금의 교과서 문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 인식이 어떠한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가치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의 역사인식은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우선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른 역사정립
    인문/어학| 2005.12.30| 6페이지| 1,500원| 조회(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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