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기의 겸직과 중복직』에 대한 고찰-박용운, 2007,「고려시기의 兼職과 重複職에 대한 논의와 권력구조」를 중심으로역사교육전공Ⅰ. 머리말고려의 국정운영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던 직위는 재신·추밀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들 직위는 단독직으로 존재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다른 직위와 한 묶음이 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직위 중 어느 것이 본직이고 어느 것이 본직에 대한 겸직 내지 중복직이었느냐 하는 문제가 커다란 과제로 대두되었다. 여기서는 그간 여러 논자가 밝혀온 견해를 정리하며 문제점을 살펴보고 그에 따르는 논거들을 사례를 통해 재검토하고자 하며 그 바탕 위에서 권력구조 문제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Ⅱ. 兼職과 重複職에 대한 諸家의 견해와 그 문제점고려시기의 겸직과 중복직에 대한 논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갈래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재신·추밀이 주로 함께 지니는 복야·상서 등이 본직이고 재신·추밀직은 겸직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반대로 재신·추밀직이 본직 내지 중복직이고 복야·상서 등은 겸직 내지 중복직이라는 주장이다.먼저 전자의 견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변태섭, 최정환, 이정훈, 박재우 등이 여기에 속한다.변태섭은 재신직에 있어 문하시중과 여러 평장사는 단독직으로 기능하였으나 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는 겸직으로 존재하였다는 논지를 정립했다. 그는 참지정사가, 당제에서는 타관으로서 재상직에 있게 하는 ‘假以他名’에 불과했으나 고려에서는 종2품의 엄연한 관직명이라고 보았다. 또한 당제의 영향을 받아 상서와 복야가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정당문학·지문학성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고 이해했다. 추밀직에 대해서는 추밀이 본직이고 상서 등이 겸직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박용운은 그의 연구에서 참지정사가 당나라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의 관직이었다고 하면서도 왜 당에서와 유사하게 겸직이 되었으며, 고려 특유의 정당문학 역시 그처럼 운영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쉽다고 평했다.최정환은 祿俸制에 대해 깊은 연구를 진행한 토지와 현물인 녹봉을 모두 지급받는 직위가 본직이고, 그렇지 않은 직위는 겸직이라고 규정하였다. 《고려사》권78, 식화지1, 田制 田柴科祿에 정리된 목종 원년(998)전시과와 문종 30년(1076)에 경정된 양반전시과를 보게 되면, 재신의 경우 문하시중과 평장사·참지정사만이 올라와 있다. 따라서 정당문학과 지문하성사, 추밀 7직 모두가 겸직으로 운영되었다고 보았다. 단, 참지정사는 예외로 분류하여 실무 재신·추밀 가운데 문하시중·평장사를 제외한 모든 재추직을 겸직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그는 실제 사례에서 재신과 추밀을 막론하고 단독직으로 보이는 기사가 눈에 띄는 경우 기록상의 생략일 뿐 모두 본직이 따로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박용운이 참지정사를 겸직으로 이해한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자, 박재우는 「참지정사는 실제 사례에서는 복야, 상서 등의 겸직으로 운용되었지만 본직처럼 전시과와 녹봉을 지급받고 있어 모순이 생긴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참지정사의 경우 당에서 오랫동안 재상이었고 송에서도 재상에 버금가는 지위였으므로 당송제도를 채용한 고려에서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시중이나 평장사처럼 전시과와 녹봉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해설을 곁들였고 박용운은 이를 두고 ‘막연한 해명에 그쳤다’고 평했다. 그 후 박재우는 참지정사가 겸직이라는 주장을 고수하면서 「이들 제도가 당송제도를 채용했다는 것과 인사 임용의 실제 형태를 중시하고 경제적 대가의 지급은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하여...」라는 이유를 언급했다. 그러나 박용운은 당송과는 달리 중서문하성 재신직의 하나로 설치되었던 참지정사와 고려 특유의 재신직인 정당문학 등을 무작정 당송에서와 유사한 원리로 파악해도 좋을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그렇다면, 위와 같은 갈래에 대하여 또 다른 갈래, 즉 재신·추밀직 모두를 본직 내지 중복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이러한 논지를 밝힌 연구자로는 장동익과 이진한, 박용운 등이 있다.장동익은 한 관원이 두 직위 이상을 지니고 있는 사례들을 조사, 분석하면서다.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관직의 하나로서 각각 일정한 위치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부류는 역시 각 기구에 소속해 있으면서 품계를 지니고 있는 단독직·독립직이었다. 이들은 독립직으로서 단독으로 임명되기도 하고 겸직들을 함께 부여받기도 하였으며, 또 다른 독립직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 예로 「조의대부로 刑部尙書(정3품)·兼善慶付詹事(정3품)·尙書左僕射(종2품)」을 지닌 李軾 등이 그러하며 이러한 경우는 상대되는 직위 사이에 하나가 본직, 다른 하나가 겸직이 아니라 양자가 동일한 독립직으로서 중복 내지 중첩하여 帶有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박용운은 재신·추밀직 역시 같은 원리에 입각하고 있어, 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 추밀 7직 또한 평장사 등과 같은 단독직·독립직이었다고 보았고 재추직이 많이 대유했던 복야와 6부상서 등은 재추의 본직이 아니라 독립직이었다는 것이다. 단,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정당문학·지문하성사는 어찌하여 전시과와 녹봉조의 규정에서 빠졌으며 추밀직의 일부도 문종 30년의 녹봉 규정에서 빠졌다가 인종 경정 때에 전체가 사라진 연유에 대한 해답은 내놓지 못해 약점이 되고 있다.Ⅲ. 宰樞의 兼職과 重複職에 대한 논의의 내용 검토박재우는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와 정당문학·지문하성사 등의 재신직과 중추원의 추밀7직은 모두 겸직으로서 상서와 복야 등이 그 본직이었다고 이해하였고, 박용운은 재신·추밀직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독립직으로서 이들 역시 본직·중복직으로 기능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각각의 전제 하에 자료를 해석하면서 의견이 부딪히기도 하고 때로는 설왕설래하기도 하였다. 이 장은 박용운의 논지에 대한 박재우의 반박과 다시 그에 대한 박용운의 반론을 싣고 있다.박용운은 참지정사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중서문하성의 독립된 관직의 하나로 백관지에 명시되어 있을 뿐더러, 그것이 어떤 타관의 겸임직이라는 근거 또한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박재우는 백관지에 품계가 명시된 독립된서 ‘余如故’를 제외하고 설명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해 박재우는 「박용운은 ‘余如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지문하성사의 역임자 를 작성할 때도 ‘余如故’ 부분은 누락시켜 자료 해석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고 비판하였다. 이익주에 이어 제기된 박재우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박용운은 자료의 취급에 부주의하여 해석에 오류를 범했다고 자평하였다. 그러나 박재우가 말한 ‘심각한’ 문제를 연구의 결론과 결부시킨다면 이는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비록 해석상 몇몇 오류가 있었고 또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 등으로 그런 사례가 얼마 더 추가되더라도 결코 대세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어떤 원리를 추정하고 그 추정을 전제로 하여 해석한 결과를 가지고 결론을 도출하는 게 문제라며 박재우의 논지를 에둘러 부정했다. 그러면서 이의 논거를, 먼저 참지정사가 본직임을 말해주는 자료에서 찾았다. 《東文選》卷26, 制誥에는 여러 사람을 책봉하거나 임명하는 敎書·官誥·磨制 등이 실려 있다. 이중 김창에 대해서는 「특별히 金紫光祿大夫·守司空·政堂文學·尙書左僕射·集賢殿大學士·判工部事·太子少保를 제수한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李子晟, 宋恂의 경우도 그와 같은 서술을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위에서 보듯, ‘餘如故’ 등의 설명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 받은 직위가 전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 본직은 참지정사 외에 달리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주목할 만한 자료는 참지정사와 정당문학·지문하성사가 判尙書吏部事를 겸임하여 首相·?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판이부사는 문하시중이나 반차가 높은 평장사가 겸임하여 수상의 직임을 수행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경우에 따라 참지정사 등도 그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로 의종조 尙書左僕射·參知政事로 權判吏部事에 임명된 이인실 등이 있다. 그는 이 경우 참지정사 등이 본직인 이부상서 등의 겸직으로 존재하면서 수상에 재임했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다고 설명했다. 참지정사 등은 재신의 일원으로서 절대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근대적인 의미의 입법권과 사법권·행정권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국왕의 권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라 기술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의 운영권은 국왕과 신료에게 공유되어 있었고 그 수행과정에서 때로는 양자 사이에 견해가 맞지 않아 대립하는 수도 있어 국왕권의 제약 내지 제한의 문제가 대두할 수 있다고 보았다.두 번째로 중앙과 지방의 각 관서와 관원들이 대체적으로 각종 국정을 제각각 국왕에게 直奏하고 국왕으로부터 하달을 받아 시행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박용운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찬동을 하면서도, 한나라의 국정을 담당하는 상하의 모든 관서·인원이 따로 국왕을 상대하여 상주하고 윤허를 얻는 것이 가능했을 지는 회의적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따라서 그는 국정이 두 가지 방식, 즉 박재우가 언급한 체계와 또 다른 체계로 이루어졌을 거라 짐작했다. 후자는 일상 업무의 주된 방식으로, 중앙부서들 사이에 일정한 계통이 있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일을 보았을 거라 생각되며 중심관서는 역시 6부였다고 이해하였다.세 번째는 중요한 국정들이 상서6부에서 중서문하성을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주되는 체제였던 만큼 6부상서와 재추의 결합도 합리적인 국정의결과 국가 행정의 원만한 시행을 위한 것이었으며, 재신의 6부판사제 역시 같은 성격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박용운은 이에 대해,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중서문하성의 재신들은 법제에 의해 상서6부의 판사직을 겸직하여 그 기구를 직접적인 통할 하에 두고 있었으므로 왕권은 오히려 제약을 받았다는 입장이다. 6부의 직주라 하지만 그 6부는 재추 통할 하에 있으므로 6부판사제에 한층 중요성을 두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것이다.다음은 네번째로, 재추의 임용에 국왕의 재량이 크게 작용하였고 또 그 때에 상서 등 본직의 지위가 기준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재추의 임용에 국왕의 재량이 크게 작용했다는 근거에 대해서, 박재우는 승진을 희망하는 후보군의 숫자가 몇 배 많았다는 점, 재추직 임.
당과 고려의 재상제도역사교육전공목차Ⅰ. 머리말Ⅱ. 당과 고려의 재상제도 고찰Ⅲ. 당과 고려의 재상제도의 운영원리Ⅳ. 맺음말Ⅰ. 머리말재상이란 백관의 우두머리로서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만민을 다스리는 직책을 통칭하여 부르는 것으로서 재상이라는 관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재상제도는 진 도왕 2년에 승선관을 둔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후 한 성제 수화 원년에 어사대부 하무의 건의에 따라 대사마?대사공?승선의 3공으로 재상을 삼게 되었다. 이후 동한 영제 때에 상서가, 위문제는 중서가, 북제에는 문하의 권위가 높아져 재상으로서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는 한?위에서 북제로 이어지는 제도를 계승하여 상서성?중서성?문하성의 삼성을 중심으로 재상제를 실시하였다. 당은 수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상서령?중서령?시중의 삼성장관(재상)으로 국정을 논의하게 하였다. 당은 초기에 3성의 장관인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령을 재상이라 하였으나, 이후 복야가 상서성의 장관이 되어 시중?중서령과 더불어 재상이라 칭하기도 했으며, 참지정사와 중서문하평장사를 재상이라 하였다.고려는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성종 원년에 처음으로 내사문하성과 어사도성 및 6관을 설치하였다. 내사성은 수에서 당 초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당의 전형적인 명칭이 아니었고 내사문하성의 관직도 대개 당제를 수용한 것이었으나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 14년에 당제를 대폭 수용하면서 어사도성과 6관을 상서도성과 6부로 개칭하였고, 내사문하성은 문종 15년에 비로소 중서문하성으로 개칭하며 관제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려에서는 시중, 평장사, 참지정사, 정당문학, 지문하성사의 5재를 재신?성재?진재라 하였다.이렇듯, 고려의 관제가 당의 영향으로 정립되면서 재상제도에 있어서도 당과 유사성과 차이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 글은 당과 고려의 재상제도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먼저 각각 재상의 명칭 및 변천을 파악하고 그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 미진하나마 짚어본 후, 다음 장에서는 당과 고라도 또한 그러하였다. 오직 삼공, 삼경, 중서령은 그렇지 않았는데,라고 하여 중서령을 제외하고 상서좌우복야와 시중 및 타관으로서 가호로 재상에 등용되는 모든 이들에게 同三品을 붙여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대는 태종대와 마찬가지로 삼성장관 외의 타관으로 재상을 임명하였는데 이적의 지정사를 비롯하여 모두 3명의 참지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삼품으로 재상을 삼았다. 즉 고종대 재상은 재상의 수가 태종대 보다 더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고조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던 상서복야는 점차 그 지위가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왕의 조칙을 받들어 조칙을 담당하던 중서성 중서령의 권한이 높아진 것이다. 그 결과 고종말 영순 2년 7월에는 문하성에 두었던 재상협의기구 정사당을 중서성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중서성이 왕언을 조칙하고 황제의 유조를 받들어 황제를 보좌하는 임무를 부여받는 황제 보좌기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며 황권 강화를 향한 제도 정비가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당 중엽에는 재상제도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천보연간에 이르면 참지정사, 참예조정 등의 명칭을 첨가하여 재상 직을 수행하던 관행이 점차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동중서문하삼품’의 직함을 가지고 재상이 되었을 경우 더이상 실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다만 ‘동중서문하평장사’는 그 사용 빈도가 점점 많아져서 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를 붙여야 비로소 진정한 재상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에 이른다. 또한 당초 재상의 반열에 들었던 좌우복야는 개원이후가 되면 재상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안록산이 절도사의 직을 가지고 재상을 겸직하려 하였을 때, 양국충의 반대에 부딪힌 것도 이러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즉 “현종은 마침내 좌우 복야 벼슬을 첨가하는 관행을 멈추었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 시기 복야 벼슬은 이미 재상으로 대우받지 못했음을 알려준다.둘째, 당 중엽이후 재상의 수가 줄어들고 재상의 맡은 바 임무가 엄중해지기 시작하였다. 당초의 재상들의 근시관으로 황제의 좌우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살피는 직이었다. 성종대 설치된 이후 처음 이 관직에 오른 사람은 최승로로 성종 7년 10월에 문하수시중이 되었다. 문하시중의 임명은 꾸준히 나타나고 있으나 때로는 공석일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평장사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평장사에 대해서는 『고려사』백관지에 성종 원년부터 내사시랑평장사와 문하시랑평장사가 단일 관직으로서 내사문하성 소속의 관직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현종 때까지 문하시랑이나 내사시랑과 자동적으로 결합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희는 성종12년에 내사시랑이 되었다가 성종13년에 비로소 평장사가 되었고 또 장영은 현종 12년 6월에 상서좌복야 동내사문하평장사가 되어 복야로서 동내사문하평장사를 겸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후에 문하시랑, 중서시랑만 붙여 당과 달리 하나의 관직명으로 운영하였다. 이들의 서열은 내사시랑, 문하시랑 순이었다. 내사시랑이 문하시랑보다 우위에 있었고 내사령 역시 문하성보다 중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들 서열은 후에 문하시랑이 내사시랑의 우위로 바뀌게 된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목종조로 보기도 하고 현종조로 보기도 한다. 내사령이 증직이나 명예직으로 되자, 내사시랑도 문하시랑 하위로 되었고 따라서 문하시중이 내사문하성의 최고 관직으로 되고 문하시랑직도 동반상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장사의 서열은 성종대 내사시랑 문하시랑 순이었지만, 목종대에는 문하시랑 내사시랑으로 서열의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참지정사는 정사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진 관직인데, 『고려사』백관지를 보면 목종 대에 설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성종대에 임명된 예가 나타난다. 즉 최량과 한언공이 참지정사로 되었다. 이런 예를 통해 볼 때, 참지정사는 이미 목종 이전인 성종대에 임명되었다. 당에서 참지정사는 평장사와 같이 타관으로 재상의 역할을 위해 띠는 관직이었다. 반면 고려에서는 재상직의 타관명이 아닌 종2품의 재신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량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 했는데 당초에는 재상인 시중이 문하성에서 정사를 보고 이곳을 정사당이라 했으나 개원 11년에 중서령 張設이 정사당을 고쳐 중서문하라 한 것은 당초 삼성의 실무 권력이 문하성시중에서 중서성의 중서령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에서도 당제도에 따라 정사당을 別置하였다. 『고려도경』에 중서성과 문하성의 청사가 분리되어 있고, 왕부의 내부에 대신들이 일을 보는 ‘의정지당’(정사당)이 별도로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최정환은 이와 같은 사료를 두고 ‘중서’를 ‘의정지당’이라 하여 중서성에 비정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정사당을 지칭한 것이라고 보았다. 宰樞와 省郎 등이 정사에 참여하는 중서성과 재신들로 구성되는 정사당과는 서로 구별이 된다고 본 것이다. 정리하면, 당에서는 중서성의 권한이 높아지면서 정사당이 중서문하라 지칭되었고 고려에서는 정사당이 곧 중서성이라는 견해와 따로 설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넷째, 겸직제의 운영과 관련하여 유사성과 차이점을 알아보려고 한다. 당에서는 3성 장관이외 재상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상서령뿐 아니라 중서령과 시중도 공석일 때가 많았는데, 지위의 중요성으로 인해 함부로 임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타관이 동중서문하평장사와 참지정사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재상의 역할을 하였다. 고려에서도 평장사 등, 참지정사의 직함이 재상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당에서 참지정사는 타관으로 재상의 역할을 위해 띠는 ‘가이타명’이었지만 고려에서는 재상직의 타관명이 아닌 종2품의 재신직이었다. 참지정사가 송대는 부재상으로 기능해 고려의 참지정사가 송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최량 등 참지정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고려의 참지정사는 당과 유사하게 타관겸직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재신 단독직이라면 송에서와 같이 재상의 관직이었다고 보여 고려에서 두 가지 면을 지닌 관직이라고 할 수 있다.Ⅲ. 당과 고려의 재상제도의 운영원리Ⅱ장에서 소략하나마 재상직의 겸직제 운영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려에서 아닌가 생각된다」는 해설을 곁들였고 박용운은 이를 두고 ‘막연한 해명에 그쳤다’고 평했다. 그 후 박재우는 참지정사가 겸직이라는 주장을 고수하면서 「이들 제도가 당송제도를 채용했다는 것과 인사 임용의 실제 형태를 중시하고 경제적 대가의 지급은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하여...」라는 이유를 언급했다. 그러나 박용운은 당송과는 달리 중서문하성 재신직의 하나로 설치되었던 참지정사와 고려 특유의 재신직인 정당문학 등을 무작정 당송에서와 유사한 원리로 파악해도 좋을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한편,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갈래 중 후자에 위치하고 있는 연구자인 박용운은 《고려사》권76·77, 백관지1·2에 열거되어 있는 각 관서의 조직에 대한 설명과 사례를 검토한 후 관직을 세 종류로 분류했다. 그 하나가 백관지의 설명 중 겸직임이 명시되어 있는 경우이다. 三司判事나 吏部 등 6部의 判事 및 翰林院判事를 「宰臣兼之」라고 했거나, 吏部에 있어서 지부사를 「他官兼之」라고 한 사례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부류는 백관지에는 겸직임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로 그와 같이 운영된 것이라 알려진 직위들이다. 3師·3公職과 한림원의 翰林學士承旨 이하 직위 및 보문각의 學士·直學士·諸館殿 즉 文德殿·延英殿·水文殿·集賢殿 등의 대학사·학사 등 직위, 동궁관인 太師·太傳·太保·少師·少傳·少保와 그 이하 직위 등이다. 아울러 본품행두도 겸직으로 밝혀져 있다.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관직의 하나로서 각각 일정한 위치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부류는 역시 각 기구에 소속해 있으면서 품계를 지니고 있는 단독직·독립직이었다. 이들은 독립직으로서 단독으로 임명되기도 하고 겸직들을 함께 부여받기도 하였으며, 또 다른 독립직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 예로 「조의대부로 刑部尙書(정3품)·兼善慶付詹事(정3품)·尙書左僕射(종2품)」을 지닌 李軾 등이 그러하며 이러한 경우는 상대되는 직위 사이에 하나가 본직, 다른 하나가 겸직이 아니라 양자가 동일한 독립직.
의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서술역사교육전공* 목차1. 머리말2.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현황3. 의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서술 분석⑴ 단원 분석⑵ 내용 분석4. 의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서술 방안5. 맺음말1. 머리말지난 2007년 개정교육과정에 의해 도입되어 올해부터 교육현장에서 시행되고 있는 는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 낯선 과목)이다. 또한, 역사학계와 교육계가 과목 신설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둘러싼 역사분쟁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 역사분쟁 등 동아시아 역사 인식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한·중·일의 민간차원에서 꾸준한 노력)이 있었고, 고교 선택과목으로서 신설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글에서는 총 6개의 대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내용 중 대단원Ⅱ. 인구 이동과 문화의 교류-4.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선택하여 기왕의 연구현황을 살펴보고, 2종의 서술을 분석하고, 더 나아가 그 서술의 개선방안에 대한 고민까지 해 보고자 한다.2.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현황동아시아 국제 관계와 관련된 연구는 일본학계에서 1960년대 이후부터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역사가는 니시지마 사다오로 그는 ‘책봉체제’를 통해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일본·월남 등을 ‘동아시아 세계’라는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하나의 역사세계로 묶어 설명하였다. 니시지마 사다오는 ‘책봉체제’를 주요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는 고대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동아시아 세계’가 책봉을 매개로 ‘군신관계’, ‘위계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니시지마는 중국적 책봉체제가 완성된 것이 당왕조 시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책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존재한다. 즉, 진한대의 흉노와 같이 중국 왕조에 대항한 이민족과 당과 돌궐의 부자관제질서를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도 문제점이 있다. 바로 당과 일본의 조공관계에 대해서는 설명이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은 견당사를 통해 당과 무역을 실시했다. 여기서 실질적인 책봉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학계의 조공책봉체제 시각에서 일본은 동아시아 질서에서 제외된 지역이 된다. 또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와 일본과의 관계 등과 같이 중국왕조를 제외한 동아시아 주변국들 사이의 관계도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학계의 조공책봉체제도 결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주의적 역사인식의 한계를 내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중국학계에서는 호리 토시카즈의 ‘기미체제’와 상당히 유사한 시각으로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다. 『동아사』에서는 기미통치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고대 중국 왕조와 주변의 관계에 대해 책봉에만 국한하지 않고, 서역도호와 같은 관리기구를 설피하는 경우, 동북지역의 군현을 설치하여 관리하는 경우 등 다양한 형태의 지배방식을 설정하여 기미통치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미부주와 내지의 일반부주를 모두 중앙정부에 예속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호리의 주장과 다르다. 중국학계에서는 다른 주변국들이 중화제국 질서에 편입된 이유를 정치적으로 조공과 책봉을 통해 국가안보와 내치외교의 자주 공간을 보장받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주변국의 지배자는 유교 문명권의 중심인 중국의 천자로부터 책봉 받음으로써 지배권의 정당성을 보증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경제적으로 조공책봉은 당시 국제교역관계였고, 이 체제 속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변국들이 자발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주변국들 사이의 연구는 일본과 한국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동아시아 주변국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니시지마 사다오와 호리 토시카즈는 왜와 백제, 왜와 신라 사이의 조공관계를 근거로 당시 왜를 중심으로 한 ‘소책봉체제’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민두기는 히 이루어졌다.한편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가 이 시기 중국에 전래되어 이른바 중국불교가 성립되었으며 이것이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에 전해졌다. 유교는 춘추시대 말기에 출현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정착되었으며 불교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에 전해졌다. 율령도 춘추시대 말기에 출현하여 전국시대에 전제군주제의 법제적 장치로서 체제가 갖추어지고 한 대에 유교적 예제가 가미되어 독특한 중국법이 성립하였으며 역시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에 전해졌다. 이로써 중원과 한반도, 일본, 베트남은 한자, 불교, 유교, 율령을 공유하는 동아시아문화권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 동아시아 각 왕조는 서로 군과 신을 칭하는 위계적인 형식의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이것이 조공책봉체제였다. 특히 중원의 왕조가 책봉하고 책봉을 받는 왕조는 중원 왕조에게 조공을 하는 형식의 외교관계가 국제질서의 기본 틀이었다.)교학사와 천재교육의 단원구성의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단원교학사천재교육대단원Ⅱ. 인구 이동과 문화의 교류중단원4.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4. 국제관계와 외교활동소단원조공 · 책봉 관계의 전개다원적 국제 관계의 형성소주제서로를 인정하고 교류하다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형식자국 중심의 실리 외교를 구사하다다원적 외교의 전개수·당 제국과 유목 민족당 대의 동아시아동아시아의 다양한 교류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단원구성교학사와 천재교육의 단원구성을 살펴보면 약간 다른 점을 알 수 있다.조공책봉체제에 대해 각각 4개와 3개의 소주제를 배치하였으며 교학사는 소단원을 두어, 대단원-중단원-소단원-소주제의 구성형식을 취했다.⑵ 내용 분석교학사와 천재교육의 내용서술의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구분교학사천재교육분량6면8면내용요소1. 조공책봉 관계의 개념-한 대 조공책봉관계 출현, 조공책봉관계의 실제내용(한반도, 일본 열도와는 문화교류, 유목민족과는 물자의 교환)조공책봉 외의 대외관계2. 4~6세기 자국 중심의 실리외교-남북조 국가들의 이이제이 정책-중원왕요청하는 장면, 흉노의 금관, 명대의 세계지도, 5세기경의 동아시아(지도), 돌궐비, 7세기 전반의 동아시아(지도), 광개토대왕릉비문, 금인, 예빈도, 조공의 절차(만화)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서술의 분량은 교학사가 6면, 천재교육이 8면으로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학사가 6면 전체를 내용서술에 할애한 반면, 천재교육은 내용서술은 4면에 그치고 2면을 읽기 자료(고구려의 자주 외교, 동아시아 외교의 승부사, 김춘추)에 할당하였으며 나머지 2면을 주제탐구(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조공책봉 관계의 실상 확인)에 할애하였다.내용요소에 대해 살펴보면, 대체로 조공책봉관계의 개념에 대해서는 입장이 비슷하다. 조공책봉관계가 한 대에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 조공책봉관계가 국가 간 상황과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 형식적인 외교의 틀에 불과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개념정리를 시작으로 시기별로 각국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조공책봉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교과서의 오랜 콤플렉스)를 극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흉노와 서역 등의 관계를, 교학사에서는 조공책봉 외적인 관계로 처리한 반면, 천재교육에서는 조공책봉의 다양한 형태 중의 하나로 포함하여 설명한 점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또, 한 이후 조공책봉 제도의 전개에 대해, 교학사는 4~6세기 남북조의 왕조와 한반도의 실리외교, 6~8세기 수·당과 유목민족, 7~9세기 당 대 동아시아의 교류라는 세 가지 소주제를 두었으나 같은 중단원에서 천재교육은 5~6세기 다원적 외교와 7~8세기 당을 중심으로 조공책봉관계가 정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담았다.남북조와 한반도의 실리적 또는 다원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두 교과서의 서술이 비슷하나 7세기 이후의 서술에 대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첫째, 유목민족(돌궐, 위구르, 토번 등)과 중원왕조에 대한 서술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이다. 교학사는 유목민족과 중원왕조의 관계에 대한 소주제를 따로 두고 이들의 경제적 관계에시아를 설명함에 있어서 조공책봉관계의 정치적 측면만을 소략히 다룰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가 조공의 교류적 측면에 입각하여 견당사 등이 주축이 된 문화교류에 대해 언급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이러한 면을 고려하여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서술의 내용요소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영역내용요소Ⅱ. 인구 이동과 문화의 교류4.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1. 조공·책봉관계o 조공·책봉관계의 출현-한대 조공책봉이 주변국가와 교류하는 외교의 틀이 됨)-흉노 및 서역과는 경제적 목적으로 조공 활용o 조공·책봉관계의 전개(4~6세기)-고구려·중국의 남북조·유연 등 다원적인 세력관계(광개토대왕비를 통해 본 고구려 전성기)-삼국(고구려·백제·신라)과 중국 남북조의 다중외교2. 중원왕조와 주변국간의 관계(7~9세기)o 당과 유목민족과의 군사·경제관계-당이 돌궐 등 유목민족에게 비단 지급-안사의 난 이후 유목민족의 위협은 대부분 비단으로 대처 (회흘과의 견마무역 등)o 당과 삼국 및 발해·일본의 문화관계-경제 교류는 빈약해서 지급되는 비단은 적음-당 제국의 번영과 동아시아 교류: 견당사, 견신라사, 견발해사 등-조공·책봉 등 형식적 외교관계 외에 각국의 다면적 접촉두 개의 소단원을 두고 각각 2개의 소주제를 배치하였다. 조공·책봉관계에서는 조공·책봉관계가 한 대 출현한 것임을 밝히고, 4~6세기 삼국과 남북조의 다원적 외교관계를 통해 조공·책봉관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파악해 보고자 한다. 특히 당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관계는 극히 의례적인 외교 형식이었고 각국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을 명시한다.7~9세기 중원왕조와 주변국간의 관계에서는 두 가지 경향성이 드러나는데, 하나는 중원왕조와 유목민족 국가들 사이의 군사·경제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중원왕조와 한반도의 삼국 및 발해·일본 사이의 문화관계이다. 전자의 예로 당 전기 돌궐 등 유목국가의 군주들에게 많은 비단이 지급되는 사례를 들고, 안사의 난 이후 당조가 일방적으로 압박받는 상황이 오면서 회흘과의 견마무역 등으로 유목민족에
고등학교 『한국사』의 ‘대원군의 대외정책’ 서술 분석2012.04.02역사교육전공목차1. 머리말2. 2009 개정 교육과정의『한국사』교과서3. ‘대원군의 대외정책’에 관한 연구동향 및 교과서 서술의 변천4. 고등학교 『한국사』의 ‘대원군의 대외정책’ 서술 분석5. 맺음말1. 머리말역사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계의 연구 동향에 따라 새롭게 쓰여지게 된다. 역사교과서는 당대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역사교육전문가들의 숙고와 토론을 통해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원군의 대외정책’ 의 경우도 시기에 따라 교과서 서술이 달라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쇄국정책’에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용어를 변경한 것이나 교육과정별로 서술위치가 달라짐은 교과서 편찬 당시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본고는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의 ‘대원군의 대외정책’ 서술이 어떠한가를 분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2009 개정교육과정의 『한국사』교과서에 대해 소략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이후 ‘대원군의 대외정책’에 관한 학계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교과서 서술의 변천과 함께 살펴보면서 최종적으로 6종의 고등학교 『한국사』의 ‘대원군의 대외정책’ 서술을 7차『한국 근·현대사』교과서와 비교 분석, 또는 각각의 교과서와 비교하는 방법을 취하고자 한다.2. 2009 개정 교육과정의『한국사』교과서현행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는 2011년 3월부터 학교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한국사』교과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역사교육 강화’가 핵심요소였던 2007 교육과정의 정신이 흐려지고 역사과의 위상이 손상되는 난맥상)을 겪으며 탄생하게 되었다.2009 교육과정에서 나타난 역사교육과정의 변화는 첫째, 중·고등학교의 학교급간 계열성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2007교육과정은 대강화)와 자율화의 원리를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2009교육과정이 급조되면서 교과서 또한 심의를 통과한 뒤 대한 재평가의 여지를 남겼다.팔레는 대원군이 실용주의적이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원군이 외교정책에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국내문제를 다룰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난을 진압하고 지방관을 처벌하며 제도를 바꾸는 등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단호한 대외정책이 성공한 것을 서양의 침략이 미약했고 또한 그들이 조선에 대해 무관심했던 덕분이라고 보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행동이 근시안적이었다고 보았다.)80년대 들어 성대경의 연구는 대원군의 ‘鎖國洋夷’정책을 봉건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해 위정척사사상에 의거하여 전개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특히 19세기 중엽의 역사적 과제가 자본주의 열강의 침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면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능동적으로 적응해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를 전진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민족역량도 키워내지 못한 대원군 정권을 ‘보수반동’적이라고 평가하였다.)1990년대에는 19세기 정치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면서 대원군 집권기의 정치사적 관심이 제고되었다. 그동안의 쇄국-개국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대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대원군의 대외정책의 배경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연구들이 등장했다.1990년대 중반 이후 이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해 온 연갑수는 대원군의 대외정책이 ‘부국강병’의 기조를 바탕으로 다양한 요인과 결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던 조선 사회에서 부국강병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한국사에 새로운 시대(근대)의 징표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국가정책의 노선이 고종 친정 이후에도 계승되었다고 보아, 대원군 정권과 이후 정권과의 정책을 필요이상으로 단절시켜 인식하게 만든 ‘쇄국’)의 개념을 비판하였다.)2000년대 들어 김병우는 주로 내정을 중심으로 대원군의 통치정책을 고찰하였는데 특히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인 이유와 다양한 내정개력, 국방력 강화정책 등을의 개혁과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강경 대응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흥선 대원군의 개혁이 당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한계도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다.)7차 교육과정 해설)과 비교해 보면 왕권강화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개혁을 추구하였다는 평가가 곁들여졌고, ‘격퇴’와 같이 전쟁 결과가 조선의 승리로 귀결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용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강경 대응’이라는 용어로 대체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4. 고등학교 『한국사』의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서술 분석6종으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의 대원군 대외정책 관련 서술 구성을 간단히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9개정 교육과정 『한국사』교과서의 대원군 대외정책 관련 서술 개요구분삼화출판사지학사법문사분량4면3.5면5면단원구성)통상수교를 거부하자양요가 일어나다흥선대원군의 정책흥선대원군의 개혁과통상수교 거부정책통상 수교 거부정책과 양요통상 수교 거부정책과 양요프랑스군을 물리치다미국군을 물리치다천주교박해병인양요와 오페르트도굴사건제너럴셔먼호와 신미양요통상수교거부정책병인양요신미양요와 척화비건립서술순서병인박해-병인양요-제너럴셔먼호사건-오페르트도굴사건-신미양요병인박해-병인양요-오페르트도굴사건-제너럴셔먼호-신미양요병인박해-병인양요-제너럴셔먼호사건-오페르트도굴사건-신미양요사료(본문)벨로네 공사가 청국 통리기무아문에 보낸 통고서, 그리피스의『은자의 나라 한국』양이보국책 유시사료(탐구활동)『고종실록』에 실린 오페르트서신,『병인양난록』, 『신미양요 참전 군인 헐버트 가스펠 참전 기록』,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병인박해를 둘러싼 각국의 견해,『헌종실록』에 실린 이양선출현 기록, 『김옥균전』에 실린 오경석의 현실개탄벨로네 공사가 청국 통리기무아문에 보낸 통고서, 조선방어 사령부가 프랑스 함대 사령관에게 주는 반박격문, 오페르트서신, 영종 첨사의 회신, 앨버트 가스텔사진 및 삽화척화비, 절두산 성지와 병인박해 기록화, 연표, 병인양요·신미양요도 및 삽화, 복원된 외규장각 사진. 특히 동북아시아로 세력을 뻗쳐오는 러시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러시아 남하에 대비하여 대원군은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를 이용하여 프랑스를 끌어들이려 하였다. 대원군에 반대하고 있던 세력들은 이를 빌미로 대원군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아무리 대원군이라 해도 성리학적 질서에 어긋나는 천주교를 인정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 무렵 천주교는 1801년 신유박해 뒤 교세를 확장하여 신자가 2만 명이 넘었다. 그럴수록 통상수교에 대한 반대 여론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더욱 강하게 일어났다. 베이징 함락 소식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때마침 프랑스와 교섭도 제대로 되지 않자 조선 정부는 1866년 봄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탄압으로 천주교 신자 8,000명과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당했다.)먼저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는 서술이 천재와 지학사에 명시되어 있다. 미래에서는 도입부인 주제열기에서 대원군이 천주교에 친밀하였던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기도 하였다.)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선교사를 통해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서술은 6종 모두가 동일하다. 눈에 띄는 서술은 삼화의 내용이다. 대원군이 대외정세에 아둔하지 않은 점을 명시했고, 병인박해 이전 대원군의 정치적 위기국면)에 대해 암시하는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해서는 배가 불탄 것이 미국 상선의 횡포에 대한 평양 군민들의 정당방위였음을 강조한 기존 교과서의 논지를 이어받고 있다. 특이할 만한 서술은 당시 평안도 관찰사인 박규수에 대한 부분이다. 6종 중 법문사만 그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은 채 간략히 서술하였다. 또 삼화의 서술에는 우리의 전통적 ‘柔遠之義’가 첨가되어 있다....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서양 선박의 내항과 통상 요구는 국법에 어긋난다며 이를 거부하였지만, 양식과 땔감은 제공하였다...)병인양요에라 한국』,신미양요 때 미군으로 참전한 앨버트 가스텔의 기록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 비상교육은 2면을 강화도 지도 및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장으로 할애하여 그 밖의 강화도 문화유산을 조사해보고, 강화도 답사 계획서를 만들어 보도록 제시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5. 맺음말본고에서는 미흡하지만, 6종의 고등학교 『한국사』의 ‘대원군의 대외정책’ 서술을 분석해 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2009 교육과정의 『한국사』에 대해 알아보고 ‘대원군의 대외정책’에 관한 연구동향 및 교과서 서술의 변천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계의 연구 동향 및 집필자의 역사인식이 교과서 서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는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 점이 사실이나, 적어도 ‘대원군의 대외정책’ 서술 분야에 있어서는 최근 학계의 연구동향을 반영하고 여러 자료를 보충 삽입하는 등 이전 7차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에 비해 진일보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참고문헌*1. 교과서 및 교육과학기술부 자료이인석 외, 『한국사』, 삼화출판사, 2011.도면회 외, 『한국사』, 비상교육, 2011.최준채 외, 『한국사』, 법문사, 2011.정재정 외, 『한국사』, (주)지학사, 2011.주진오 외, 『한국사』, 천재교육, 2011.한철호 외, 『한국사』, (주)미래엔 컬처그룹, 2011.교육과학기술부, 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 해설 사회, 1997.교육과학기술부, 2009 개정 고등학교 교육과정 해설 역사, 20102. 단행본강상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 논형, 2008.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연갑수, 『고종대 정치변동 연구』, 일지사, 2008.성대경, 『한국사 37 : 서세동점과 문호개방』국사편찬위원회, 2000.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2001.김병우, 『대원4.
이주노동자 가정 자녀를 위한 다문화교육정책 방안지금 한국은 빠른 속도로 다문화 사회화되고 있으며 ‘다문화주의’는 우리사회에서 하나의 문화코드처럼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 담론이 이주자들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다문화주의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의 목소리는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다문화가정’의 한 범주를 담당하는 이주노동자(합법적이거나 비합법적인)가정은 점점 많아지고 장기체류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다문화교육정책은 이들의 욕구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주노동자 가정의 자녀들이 처한 교육적 어려움을 살펴보고 다문화교육정책의 현황과 문제점을 짚어본 후 다문화와 다문화교육정책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이주노동자 자녀들이 겪는 어려움을 개인차원와 기관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먼저 가장 심각하게 겪는 개인적인 문제가 바로 ‘한국어’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결혼이민자 가정 자녀들이 모국어로써의 한국어를 배우는데 반해 외국어로써의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자연히 언어소통이 자유롭지 않아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자신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도 야기된다.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단일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외국인, 특히 아시아계 민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풍토 속에서 이주노동자 자녀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기관 차원에서 볼 때 가정과 학교, 지원기관 간의 연계가 부족하여 정보공유가 원활하지 않는 것도 문제점이다. 이주노동자 가정 자녀들의 신분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원 기관의 지원 수준에도 한계가 있다. 정부는 이주노동자 자녀의 교육확대에 공적 지원을 하고 있지만 지원 활동은 자원봉사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자원봉사의 체계적인 인력 확보 기반이 마련되어있지 않아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이주노동자 자녀와의 신뢰 관계 형성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우리나라의 다문화교육정책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주관 하에 크게 교육 수요자의 변화에 따른 맞춤형 교육, 학습능력 향상을 위한 수요자 중심의 교육확대 그리고 글로벌 인재육성의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시행되고 있다. 정책과제별 세부사업 내용에는 다문화 가정 지원을 위한 부처별 협력체제 구축, 지역사회의 다문화가정 지원협력 체제 구축 및 지원, 학교의 다문화가정 자녀 지원기능 강화, 다문화 가정 자녀 교육을 위한 교사의 역량강화, 교육과정 및 교과서에 다문화교육 요소 반영, 대학생 멘토링 사업을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 확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다문화교육정책은 합법적 체류 및 이주를 기준으로 하는 외국인 정책과 상호 충돌한다. 다문화교육정책에서는 이주노동자 중 불법체류자 자녀도 의무교육 대상으로 삼지만 불법체류자인 부모가 이민국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하는 경우 자녀의 교육을 지속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문화교육정책에서는 이처럼 여러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는데 이 외에도 첫째, 접근방법의 문제가 발생한다. 다수자의 입장에서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교육이 갖는 한계, 언어소통의 문제로 인한 단편적인 경험과 실습을 통한 한계, 상식적이고 단편적인 문화의 접근에만 치우친다는 한계점이 노출된다. 둘째, 일회성의 문제이다. 다문화교육이 중앙정부를 비롯한 관련단체들에 의해 일회성 행사나 이벤트에 그치고 있다.특히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이해교육이 미흡하다. 셋째, 다문화교육의 교육주체와 대상자의 문제이다. 교육의 주체가 전문기관이 아닌 이주민 지원단체인 경우, 이주노동자가 아닌 현장 실무자의 시각에서 실시되는 경우, 또 다문화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대안이 준비되지 못한 문제도 발생된다. 넷째, 무엇이 다문화교육인지에 대한 혼란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한국 문화교육, 세계화 교육, 국제 이해 교육이 다문화 교육과 동일시되고 있다. 다섯째, 다문화가정의 개념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이주노동자 가정의 자녀들의 경우 결혼이민자 가정의 자녀들과는 여러모로 복잡한 교육적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한 범주에서 다루고 있어 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섯째, 다문화교육을 추진하는 정부 부처 간 경쟁 및 상호견제와 중복투자 등 혼란을 빚고 있다. 일곱째, 그나마도 이러한 다문화교육정책의 지원이 합법적인 외국인이나 결혼이민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앞으로 우리나라의 다문화는 우리의 현실과 맥락에 맞는 한국적 다문화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주노동자, 결혼 이민자 외에도 새터민, 재중 동포, 재중앙아시아 동포 등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특수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다문화 설계가 필요하다. 또 다문화는 기본적 인권보장과 소수자 보호 대책을 마련한 후 숙련 기능 인력의 장기체류를 허용하며 이민자의 주류 사회 참여기회를 확대하는 등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법적으로는 불법체류자이지만 실제로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자 우리사회의 구성원인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현실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인권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교육과 의료 같은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점진적으로 합법적 테두리로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한다. 이와 발맞추어 나아갈 다문화교육정책에 대해 제언하면, 우선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실시하는 다문화이해교육의 프로그램의 내용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교육기회를 확장해야 한다. 서구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을 보더라도 초기에는 이주민의 현지사회 적응 중심으로 정책적 지원을 집중했다면 후기에는 사회 일반의 다문화감수성 및 인권의식, 반 편견의식 제고, 시민성교육으로 정책방향을 선회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일상의 생활문화 속에서 바람직한 다문화사회의 시민의식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다문화교육정책이 수요자인 학생들의 입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추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문화가정의 자녀를 더 세분화하여 각 부류별 생활실태를 조사하고 그러한 기초조사를 토대로 한 교육정책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문화 교육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다문화 가정의 빈곤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정책이 동반되어야 한다. 부모의 소득수준이 자녀의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적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는 정보화교육, 직업교육 등을 늘려야 한다. 셋째. 다문화교육정책은 일방적으로 다문화가정의 자녀에게 한국어나 한국문화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그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문화나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국사회 역시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넷째, 다양한 민간 교육기관이나 시민단체들이 시민교육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다문화 시민교육은 체험과 실천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만큼 이를 추진하는 민간단체를 육성하고 지역단위의 문화 사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