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물로 살펴본 5?18 광주시민항쟁5?18 광주시민항쟁에서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요소 중의 하나는 ‘유인물’이다. 유인물을 작성한 계층은 시민들과 계엄군 혹은 정부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시민들이 작성한 유인물의 특징에는 첫째, 시민들이 앞으로 민주화 운동을 할 때 지향해야 할 방향과 임무를 설정해 놓고, 모이는 장소, 시간 등을 공지한다는 것이다. 둘째,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면서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셋째, 지성인, 희생자 가족, 국민, 종교인, 언론인, 국군에게 보내는 글이 있다. 넷째, 시민계급 내에서도 계엄군에 대한 내용과, 무기 소지에 대한 의견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시민의 유인물에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청자로 가정하고 있는 대상의 범위가 넓어지고, 무기에 대한 입장이 차이가 벌어진다.계엄군 및 정부의 유인물 종류에는 담화문, 경고문, 특별 성명 등이 있다. 유인물에서 그들은 광주시민항쟁의 결정적 원인을 고정간첩과 불순분자, 깡패들의 선동으로 규정짓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이성과 애국심을 갖고 질서를 회복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계엄군의 폭력을 부득이한 것으로 변명함으로써 그들의 부당한 폭력에 대한 책임 외면과 억지 정당성 부여를 한다. 또한 표면적으로만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일시적인 회유책으로 대화의 원칙을 사용했다.또한 그들은 폭도라는 이름 아래 광주를 대한민국에서 고립시키고, 그 안에서도 시민들간에 타자화, 이질화를 조장했다.광주시민항쟁에서 시민들의 유인물은 이전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대항의식의 시작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한 기존의 대중매체들이 제공해 줄 수 없었던 진실을 보여주었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하나의 목표로 결집시켜 이끌어갔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Ⅰ. 머리말지난 20여년 동안 5?18 광주시민항쟁을 소재로 한 연구가 여러 가지 각도로 이루어져 왔다.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5?18 광주시민항쟁 기간에 배부된 유인물을 통해 그 운동을 새롭게 조아볼 수 있다.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계엄령 철폐, 과도 정부는 민주 인사로 교체하고, 전두환을 처단하라는 것, 김대중 등 민주인사를 석방하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인물에서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염원으로 온 시민이 하나 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내용은 계엄군이 배부한 유인물에서도 나타나는데 전자와 후자는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언급되었다. 시민들이 주장한 것은 민주화를 위한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하였고 계엄군과 정부에서 언급한 것은 나라의 안위를 위해 시위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애국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정부와 언론에 대해 진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주장이 반복되어 나온다.두 번째로, 계엄군의 끔찍한 만행을 알리면서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군인들이 잔인하게 노약자와 젊은이들을 죽이는 모습,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난자하여 죽이는 모습, 산모의 배를 갈라 죽이는 모습 등을 묘사하고,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언급한다. 그 당시에 시민들은 언론과, 정부의 허위 보도로 단지 유언비어, 소문인줄만 알았던 이러한 소식들이 유인물이라는 매체를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되면서 더욱 격분하여 운동에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다음으로 유인물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우선, 지성인, 희생자 가족, 국민, 종교인, 언론인, 국군 등에게 보내는 글에도 그 대상에 차이를 둔 것을 알 수 있다. 지성인들에게는 이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지 말고 동참할 것을 주장하고, 희생자 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 종교인들에게는 무장투쟁의 불가피성을 토로하며, 모든 종교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특히 전국적인 종교인들의 궐기를 바란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겠다. 언론인들에게는 사실 그대로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당시 언론에서는 진실을 은폐하고 검열을 통해 결국은 정부의 입장만을 표명한 것을 알완강히 거부하고 나섰다.) 이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점점 청자로 가정하고 있는 대상이 광주 주민에서, 전남, 전국으로 넓혀진다. 19일부터 등장한 성명서, 호소문에서도 광주 시내에서 살포되던 것이 나중에는 도내 심지어 전라북도까지 배포되어 전주시민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1일부터 전남도민까지 확장되어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24일에는 전국의 시민들까지 확장되었다. 여기에서 광주, 전남 시민들은 이 광주시민항쟁이 광주 시민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 국민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다.시민들 내에서도 집단별로 나뉘어 각자의 집단적 특성을 보이는 유인물이 배부되었다. 먼저 학생들의 유인물에서는 유난히 느낌표와 감탄사가 많이 사용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또 다른 유인물과 비교해서 더욱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근로자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함께 노동자 권익을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이 같은 요구는 자신들이 열악한 노동 구조 내에서 비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피력하며 이제는 노동 3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요구 외에도 광주시민항쟁으로 야기된 그들의 현실적인 생존권의 문제에 대해 토로하고 있기도 하다. 물자공급에 있어서 자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모든 공장들이 휴업을 할 경우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받음을 우려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물자 공급을 위해서 본분을 다하고 일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유인물 상에서 종교인들 중에 특히 기독교인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학생이나, 근로자의 유인물에서는 궐기하고 끝까지 투쟁하는 직접적인 행동의 동참을 선동하고 있는 반면, 종교인들은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광주시민항쟁을 하나님의 정의와 자유를 위한 의로운 투쟁으로 정의하고, 전반적으로 기독교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적인 해석이란 성서를 인용해서 현재의 상황을 그려한다. 이것은 다분히 시대상황과 맞물려 국가를 강조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내포하는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내용은 대통령 최규하의 5월 18일자 특별성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책임한 경거망동으로 왜곡하고 국가의 중대한 위기상황을 들어 보이지 않게 탄압하고 있다. 세 번째로 계엄군의 폭력을 부득이한 것으로 변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폭도들이 치안유지를 어렵게 하고 있으므로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으며),폭도들의 횡포가 계속 가열되어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국군이 소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당한 폭력에 대한 책임 외면과 억지 정당성 부여로 보인다. 또한 네 번째로는 현지 기자들의 사태보도 허용에 관한 것이다. 겉으로는 ‘개성 있는 보도를 하도록 풀겠다’는 등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광주 사태에 대한 실상을 ‘형식상’ 필요하다는 검열을 통해 철저히 차단했으며, 자신들의 입장만을 옹호하는 언론조작을 했다는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섯 번째로는 대화로 모든 문제를 해결 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볼 때, 먼저 폭력을 행사했던 집단인 계엄군이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며, 그 이후에 모든 문제를 대화로 해결했는지도 의문이다. 결국 그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대화’는 실제적인 해결책으로 이용되지 못했으며, 빠르게 사회를 진정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회유책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더군다나 수습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고, 그 무엇도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장해제와 시위 중단이라는 명령이 거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특히 우리는 이 유인물들을 통해 계엄군 및 정부의 실체에 대해 이해 할 수 있었다. 이 학살들을 정당화 하고 대중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내세웠던 이데올로기와 논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은 국가주의적, 지역주의적, 반”들과 광주 시민이 등치되는 식의 결과를 만들어내는데에 일조했다.계엄군, 신군부의 유인물은 광주사태의 상황 악화를 진정시키고 광주시민들에게 경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에 근거 하지 않은 진실의 왜곡으로 시민들을 자극하고 오히려 혐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Ⅳ. 유인물의 의의(시민들)지금까지 유인물을 통해 광주시민항쟁을 고찰해 보았다. 이번에는 역으로 광주시민항쟁 속에 유인물의 의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광주시민항쟁에서 유인물이 처음 등장하게 된 때는 19일이다. 그 전까지는 일방적인 계엄군의 탄압이 이루어졌지만 이 때부터는 시민들이 응전을 시작했다. 결국 이 유인물의 등장은 광주시민항쟁의 새로운 국면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시민들의 역도전의 선고장인 것이다.) 이런 대항의식은 주체 세력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유인물을 만들면서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제시될 수 있게 된 것이다.)또한 기본적으로 기존의 대중매체들이 줄 수 없었던 진실의 실상을 담고 있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5월 19일까지도 방송이나 TV 모두 광주사태에 대한 일체 언급이 없었고, 신문조차도 검열을 통과해야만 발간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정부의 입장만을 담은 신문이 발간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뒤에도 모든 진실이 삭제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신문보다는 유인물을 더 신뢰했다.)그리고 이 유인물은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을 하나의 목표로 결집시켰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학생 하나가 연설을 하며 유인물을 낭독했을 때 시민들의 분위기가 한층 상승했고 군중은 삽시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유인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소문으로만 듣고 있던 상황들을 매체를 통해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것이 시민들을 응집시키는 성과를 이루어 냈던 것이다. 특히 이 유인물 속에 쓰인 언어에는 상징적 언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것이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 본 영화와 이데올로기헐리우드 전쟁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 있다. 보통 사상 또는 이데올로기적 대립 아니면 전쟁영웅을 통한 위대함이 지금까지의 헐리우드 전쟁 영화이다. 2001년 개봉한‘진주만’의 경우 미국 영웅주의의 표본적인 영화이다.‘인디펜던스 데이’,‘아마겟돈’의 경우도 미국의 세상의 중심이며 지상 최고의 나라라는 생각이 놓여있다.헐리우드 전쟁 영화는 우선 그 제작비 면에서부터 규모가 상당하다. 영화가 전 세계를 타겟으로 만들어지므로 감독이 의도한 영화 속 이데올로기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한 선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을 만능 해결사로 앞세운 ‘미국주의’ 영화들은 미국인이 아닌 관객에게 거부감을 안겨준다. ‘제 2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고 일컫어 지는 우리나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제목에서부터 ‘태극기’라는 다분히 한국적인 이미지를 내걸고 있지만, 그렇다고 태극기가 한국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같은 민족끼리 싸웠다고 한국을 홍보하는 영화도 물론 아니다. 우리 국군의 용맹함을 뽐낸 의도가 보이는 것 또한 아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제2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고 칭하여 지는 이유는 단지 남북전쟁 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배경으로 형재애에 대한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헐리우드 전쟁 영화 중 대작이라고 일컫어질 만한 영화이다. 종 제작비 6,500만 달러가 투입되었고,) 제작 시스템이나 영화 관련 산업이 가장 뛰어나다는 미국 헐리우드의 막대한 자본력이 만들어낸 산업)이라 볼 수 있다. 흥행의 귀재란 칭호를 얻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응집력 있는 영화이고, 전쟁 영화를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여 관객의 심금을 울린 영화이다.그러한 소위 성공한 헐리우드 전쟁영화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대해 어떤이들은 성공을 보장하는 미국식 정의에 야합한 스필버그의 미국식 휴머니즘 영화라고 비판한다. 물론 이 영화 이전에 나온 수많은 부류의 영화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반박에 나도 어느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타난 이데올로기를 단지 ‘성조기를 앞세운 미국주의’,‘미국식 휴머니즘’ 이라는 우리 시각의 타이틀로 단정 짓기에는 미흡하다.우선 이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밀러 대위(톰 행크스)와 대원들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그들은 3형제가 전사하고, 적진에서 실종된 남은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 아들 라이언(맷 데이먼) 일병을 위한 미 행정부의 특별 임무를 맡게 된다. 단 한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덟명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한명을 구하기 위해 다수가 죽어야 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물음은 관객에게도 가장 핵심적인 논의 사항이며,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제기된다.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기에 ‘라이언 일병’의 생명만을 위한 명령은 분명히 모순 된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전장으로 향하게 한 것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가슴속에 있는 인간애와 가족애다. 전쟁터에 참전하는 군인이 명분은 여지껏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었다. 영화 ‘영웅’에서처럼 자신의 희생이 국가와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위한 일에 기여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받치겠다는 식의 흔한 스토리였다. 하지만 이 영화의 차별성은 결국 ‘소를 위한 대의 희생’ 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목숨에 ‘대’와 ‘소’를 구분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결론이다.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면 타인의 목숨 또한 소중하다는 것은 어느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고, 대원들이 라이언을 위해 적진에 뛰어든 것은 단지 ‘라이언’의 목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가족애’때문이었던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을 해보면 자신들도 전쟁터에 나와있는 군인 중 한명으로써, 결국은 누구나 같은 선택을 하게되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도 자신들의 가족은 누구보다 값진 존재이게에 그들은 자신을 희생하여 ‘라이언’이란 이름 모를 젊은이의 가족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라이언’은 ‘전 미국인의 아들’로 치환되었다.) 일종의 ‘대리 만족’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으로써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명의 목숨을 위하여 여덟명의 희생을 전제한 이 모순된 임무는, 어찌보면 미국이란 국가가 인간의 본능적 속성-가족애-을 이용한 셈이다.여기에서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드러난다. 바로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다. 미국 국가는 밀러 대위에게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내렸고 그 임무는 밀러 대위로써는 거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군대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 임무가 인간의 가족애 인간애라는 착한 본성을 건들인 요구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로써 미국 국가는 국가의 정당성을 얻는다.‘국가는 개개인을 위한 이 정도까지의 배려를 해준다’는 논리로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의 정당성을 부여 한다. 또 링컨 대통령의 편지 내용을 보면, 전쟁으로 희생된 군인들을 국가의 은인으로 표현했고,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로써 미국 국민이라면 전쟁이란 특수 상황에 참여해야 한다는 식의 애국주의, 국가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그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영웅주의’이다. 다른 전쟁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영웅주의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극단적으로 ‘영웅주의’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는 단 한명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전우애-궁극적으로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영웅’이라고 불리울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우선 밀러 대위는 통솔력을 발휘하여 대원들을 이끈다. 강압적 명령식이 아니라 설득을 통하여 그들을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끔 유도한다. 그는 전쟁에 의해 많이 변화한 인물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괴로워하고 자책감도 밀려온다. 그가 갈수록 손을 심하게 떠는 것이 그러한 것을 잘 설명해준다. 귀향 명령을 받고도 전장을 떠나지 않은 라이언 일병 또한 애국주의, 정의, 그리고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극단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마지막에 밀러 대위가 라이언에게 “라이언, 잘 살게나”라고 하는 부분은 결국 임무를 수행한 즉 휴머니즘이 한 생명을 지킨 결과임을 보여준다.
FORMALIST CRITICISM문학에서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 중심의 접근을 연구를 말한다.Rene Wellek 과 Austin Warren 의 저서 ?Theory of Literature?에서 형식주의 비평은 문학 자체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형식론자들은 시나 소설에서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작가의 생애를 기록하는 것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문학 텍스트에 나타난 본질적인 특징에 의해서 지시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문학 작업이라고 본다. 그 특징은 텍스트 그 자체를 이루는 요소들이다.이 비평은 엄격하게 작품을 작품 그대로의 상태에서 이해·평가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시나 소설을 분석할 때,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삶이나 그것이 쓰여진 역사적인 환경보다는 텍스트의 단어에 초첨을 둔다. 형식주의 비평은 텍스트의 형식적인 특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에를 들면 스타일, 구조, 표현, 어조, 장르등과 같은 것이다. 시를 대상으로 의도적 오류와 감정적오류를 배제한 상태에서 작품의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의미론에 입각한 단어·비유·이미지 ·상징 등을 주로 고찰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특징들은 그러나 항상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형식주의 비평에서 문학 텍스트는 단어 사이의 관계라든지 의미의 세부가 지니는 의의, 각각의 요소들과 전체가 갖는 상관 관계를 파악하는 데 힘쓰기 때문이다. Robert Penn Warren은 시는 어떠한 특별한 요소를 가지고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과계의 정립과 구조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했다.close reading은 텍스트안의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구성되어 독자들에게 효과를 준다. 형식론자들은 문학 작업의 각각의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구성요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그렇게 때문에 형식주의 비평은 형식과 내용이 따로 의미적으로 불리 될수 없다고 주장한다. 형식과 내용의 완전한 상호 의존은 문학 텍스트를 구성한다. 우리가 주제나 그것을 의미를 알기 쉽게 바꾸어 해석하려고 할 때 우리는 문학의 미학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 형식주의 비판 이론이다."The Formalist Critic"에서 Cleanth Brooks는 형식주의 비평을 말한다. 문학 형식주의 비평은 은 개개의 작품을 면밀히 읽어 내며, 작품의 전체적인 통일과 의미를 분명히 밝히려는 가운데 낱말의 뉘앙스, 수사적 비유, 의미 등을 꼼꼼하게 훑어본다. 형식주의 비평은 문학비평을 사회배경, 사상사, 정치 사회적 영향의 연구와 분리하며, 이 같은 외적 문제로부터 떼어 내고 문학적 대상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따라서 형식주의 비평가들은 문학에 대한 독자수용적 설명을 지양하고 형식적인 설명을 하려고 시도했다. 또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 전체의 맥락과 관련해서 텍스트의 낱말에 관심을 모은다. 각각의 낱말은 특유한 맥락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며 그 맥락에서의 위치에 따라서 낱말의 의미가 달라진다. Brooks는 문학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다. 문학은 상호 관계의 유기적 조직체로 취급할 것이지, 특질이 그 안의 어떤 요소에 개별적으로 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 안에서 각 요소가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 내는 유기적 기능을 중요시한 것이다. 구조를 중요시하고서 구조를 보고 문학작업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했다. "Form is meaning" 이라는 구절이 형식주의 비평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한다.
다채널 다매체 시대가 갖는 사회 문화적 함의요즘은 미디어가 빠른 속도로 발달해서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다. 사회도 점점 거대화하여 이제는 현대인들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미디어를 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 속속 등장한 미디어만 보더라도, 케이블 TV, 위성 방송과 위성 통신, 휴대 전화, 인터넷, 위성폰 DMB 까지...숨이 찰 정도이다.이러한 맥락에서 미디어 학자 맥루한 (McLuhan)이 "미디어는 메시지다.(Medium is message.)"라고 말한 구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미디어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를 내포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들도 옷이 날개라는 말을 하듯이 맥루한의 말은 메시지가 포장된 미디어도 수신자에게 주는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어떠한 매체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의미와 전달력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미디어 이용 행태 또는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미디어의 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오늘날 정보 사회가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경구는 단지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맥루한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리이다.‘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개념은 미디어 메시지의 내용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들의 방식을 연구한 보통의 커뮤니케이 같은 메시지라고 하더라도 얼굴을 맞대고 직접 말하는 것과 신문에 나오는 것, 그리고 TV로 방송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결국 매체가 다르면 메시지도 달라지고 수용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미디어는 곧 메시지라는 명제와 더불어 맥루한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의 구분이다, 모든 매체를 그것이 전달하는 정보의 정세도와 수용자의 참여도에 따라 쿨(cool) 미디어와 핫(hot) 미디어로 구분한다. 라디오와 같은 '핫 미디어'와 전화 같은 '쿨 미디어' 또는 영화 같은 ‘핫 미디어’와 TV같은 ‘쿨 미디어’ 등 미디어 결정론적 입장을 취한다. 맥루한은 인간이 그 감각기관을 전면적으로 움직여서 능동적인 전체인식을 행하는 상황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감각기관의 전면적 동원이 보다 가능하고 전체적 인식에 가까운 미디어를 쿨 미디어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맥루한은 텔레비젼을 시청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행위보다 능동적인 것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책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읽기만 하여도 다 소화할 수 있지만, 움직이고 명멸하는 텔레비젼은 가만히 있으면 이해할 수가 없으며 그 과정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텔레비젼은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미디어로서, 피동적인 태도에 머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다.여기서 내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과연 웹 사이트는 cool한가? 하는 것이다.맥루한이 예언한 미래의 매체 중 지금의 사회를 급속도로 바꾸는데 중요한 미디어는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수많은 가상의 섬이 거미줄처럼 엉켜서 정보를 제공하는 수단인데, 인터넷 중독증, 비인간적인 갖가지 행태, 비이성적인 사회범죄의 수단등으로 인해 인간의 주체가 참여하지 못하는 Hot한 미디어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웹 사이트를 통해 어떤 감각이 어떻게 반응하여 어떤 결과를 내게되는 그 이전에 인간의 다양한 감각의 경험으로 인해 디지털 신호와 정보를 눈 앞에 있는 것으로 확장하는 과정은 분명 Cool한 미디어라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충실한 애국 매체-미국의 언론‘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언론에 빗대어 표현해 보자면 ‘언론은 총보다 무섭다’는 말로 정의하고 싶다. 언론이 무엇을 보도하고, 무엇을 보도하지 않는지, 그리고 무엇을 어떤 입장에서 보고하고 논평하는지에 따라 그 폐해가 어쩌면 잘못된 권력 행사보다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나찌는 총과 칼로 사람들을 위협했지만, 현대 사회는 이제 언론이 대중들의 의사표현을 가로막고 있다.우리 나라는 권력 구조가 재편성되거나 권력이 교체되는 동안 정부의 언론 통제 유형이 바뀌어 왔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부의 불가피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정치 권력을 통한 언론 통제의 예를 언론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었다고 ‘보여지는’ 미국 언론의 이라크 전쟁 보도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정치 권력이 언론을 통제하는 형태는-먼저, 강압적인 제재에 의존하는 언론 통제 방식, 또정부가 자유적으로 언론에 대한 유인, 강압을 모두 최소화하는 방식, 그 다음으로 강도 높은 유인책과 권력을 항시적으로 사용하는 ‘국가 흡수적 언론통제’ 방식, 마지막으로 은밀한 유인책을 통해 언론에 힘을 행사하는 포섭적인 방식이 있다.제 5공화국 시기에는 ‘국가 흡수적’언론 통제 상황으로 언론인들의 자율성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언론에 대한 통제는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이루어졌다. 이처럼, 우리는 ‘언론 탄압’ 하면 3공화국이나 5공화국 등장 무렵 신문보도 내용을 중앙 정보부가 통제해, 신문가사 중간에 흰 공간이 뚫려있거나 글 중간을 그은 표시가 있는 것으로 연상한다. 또, 언론 탄압은 언제나 정부가 주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지난 김대중 정권 시절 신문사들이 ‘언론 자유’를 내새워 세무 조사를 반대했듯이 군사 정권 사절을 겪은 한국인들의 기억의 연상 작용에 호소한 것이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오늘날 권력은 언론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지 않는다. 대부분 언론이 알아서 ‘기는것’이다.전쟁 중의 국가는 군인과 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적은 열세이고 아군은 승리하고 있다고 계속 선전한다. 시청자들에게 이라크에서 미군이 몇 명 죽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현실감이 없게 느껴진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부시가 연설을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는 이야기나, 오스트레일리아 국회에서 부시가 창피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신문 한 귀퉁이에 조그마하게 언급될 뿐이고, 텔레비전에는 길어야 10-20초, 혹은 아예 보도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대다수 미국인들은 세상이 모두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다.언론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국가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개념과 정의가 그래도 전달되면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나 개념을 완전히 눌러버리는 사회-오직 정부와 큰 언론사들에 의해 진실을 토론하지 않는 사회가 지금 전쟁중인 미국이다.과거 북한 유치원생들이 찍은 영상물에서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답답해했던 것은 수없이 반복주입한 전체주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압적 권력의 전체주의는 우리가 옳지 못하다고 느끼면서도, 언론의 학습에 의해 똑같은 사회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는 우리 모두가 별 생각이 없다.2003년 미 국방부는 되도록 이라크전의 미국을 호의적으로 그리도록 6백 여명의 취재기자와 사진 기자를 전투부대에 배속시켜 직접 전쟁을 취재하도록 했다. 그렇게보면, 이라크 전쟁을 보도하는 데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 방송사 못지 않다. 미국 미디어는 사적 소유인데 행동은 마치 국영미디어처럼 한다. 신문의 논설이나 칼럼에는 이라크 점령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글이 간혹 실리기도 하지만 미국 언론의 보도는 매우 편향적이다.근본적인 미국 언론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미국 언론은 ‘상업 언론’에 지배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국 행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언론 자유의 정신과 시장 경쟁의 원칙이 지켜지도록 하는 선에서만 언론의 소유구조나 내용을 통제함으로써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미국 언론사의 소유 집중 현상이 심화되면서 언론을 통해 기존의 지배적 가치가 재생산 되는 상황이다.미국 언론의 무비판적인 애국주의는 언론 기업의 집중, 재벌화, 시장독점, 상업주의의 결과이다. 공영 방송은 영국 BBC가 상대적으로 객관적 보도를 하는데, 기업방송인 미국 매체들이 왜 그토록 편향된 보도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언론의 상업성 탓에 독자와 시청자들의 실질적 선택권은 계속 제한되고 있다.이렇게 언론 기업들이 국가, 정부 편향적인 보도를 하는 이유에는 미국 사람들의 애국심 또는 ‘전쟁에 이겨야 한다’ 는 정서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잇지만 더 큰 이유는 언론이 ‘광고주’의 요구에 더 큰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이다. 공익성을 가진 매체는 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역할을 하지만 상업매체는 돈벌이가 되는 내용을 보도한다. 상업미디어가 정부의 전쟁정책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것은 우선 정부에 협조하고, 광고주인 기업주에게 협조하는 것이 돈벌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공정보도를 해봐야 이윤을 얻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