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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당재건운동-이재유를 중심으로
    서론 화학과 김은영본론 행정학과 김미현Ⅰ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해산, 그 이후 재건 활동Ⅱ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과 혁명적 대중조직 운동《 이재유 그룹》1. 이재유, 운동의 시작2. 이재유 그룹의 형성과 그 활동(1). 경성트로이카시기(1기)①노동운동②학생운동③출판물 간행 활동(2). 경성재건그룹시기(2기)①경성재건그룹의 형성② 출판활동③평가(3). 경성준비그룹시기(3기)3.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와 한계Ⅲ 일제 전시 파쇼 체제하에서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937년-1945년)Ⅳ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의의결론 -마치며서론 - 들어가며1929년~45년의 17년간에 걸쳐 전개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전개과정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당재건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유기적 일부임과 이재유 그룹의 대한 자세한 활동 사항을 알아보고자 한다.Ⅰ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해산, 재건 활동조선공산당 창립 이전에 여러 공산주의 그룹들은(화요파?서울파등) 당 창당을 최우선적 조직 과제로 설정했다. 그 결과 화요파?북풍회파?상해파 공산주의자 그룹들은 공산당 결서에 합의하여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제1차 당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과 당외 서울파 공산주의 간의 분쟁, 조선공산당 내에서 북성회파와 화요파간의 분쟁, 당의 연합반대파와 조선공산당간의 분쟁 등이 나타났다.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을 승인한 것을 계기로 이러한 분파주의적 성향을 청산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것으로서는 불충분한 것이었고 오히려 이러한 통일운동 과정에서 엠엘파와 서울상해파가 형성되어 각 그룹간의 대립이 심화되어갔다.) 이렇듯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 안과 밖에서 서로 다른 3차 당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사실상 그 세력들 간에 결합의 여지를 거의 상실하였다고 본다.1928년 말 코민테른은 6차 대회를 통해 ‘조선의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12월테제)를 발표하는데 이는 사실상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12월테제는 당시의 식민지 조선이 한 뒤 혁명적 대중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선발된 정예 분자로 각지에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주안점은 혁명적 대중 조직을 강화하는 데 두어졌다. 그리고 많은 활동가들이 “도처에 혁명의 씨앗, 곧 조직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생산 현장으로 들어갔다.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당 재건 준비 조직과는 달리 재건될 당의 정치적, 조직적 주도권을 갖는 조직이 아니었다. 이 조직의 일차적인 과제는 직접적인 당 재건이 아니라 대중 운동을 활성화하고 대중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데 있었다. 대중에 대한 지도를 통해 전위적 활동가를 육성한 후, 일정 정도 조직 역량이 성숙했을 때 당 재건운동의 한 부분으로 전환되는 과도적인 정치 조직이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이었던 것이다.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여러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당 재건의 가능성이 성숙했다고 판단되는 시기에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이들 그룹의 대표자 회의나 열성자 대회(또는 전국적 정치 신문 발간) 등의 방식으로 당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콤그룹(안동콤그룹 등), 그룹(경성재건그룹, 조공재건경성준비그룹, 경성공자주의자그룹 등), 공산주의자협의회(영주군공산주의자협의회,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등), 위원회(강릉공작위원회, 삼척노농공작위원회 등), 협의회(경성노농협의회, 고성사회운동자협의회 등), 동맹(함북공산주의자동맹, 웅기열성자협의동맹, 목포공산주의자동맹, 지도전위동맹, 영동적우동맹, 온성노농동맹 등), 당(울진공작당), 트로이카(경성트로이카) 등 다양한 명칭의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이 전국 각지에서 결성되었다. 이들 그룹은 다른 그룹과의 공동 투쟁 및 통일을 모색했다. 나아가 혁명적 대중 조직의 강화라는 방침에 따라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결과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적 토대와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배출되었다.이러한 조직 노선의 변화와 함께 생산 현 성원으로 되었으며 그 뒤에 몇몇을 포섭하여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 다섯 사람에 의해 상부 트로이카가 형성되었다. 이재유를 최고 책임자로 하여 안병춘은 영등포의 금속부문을, 이현상은 동대문 바깥 공장 일대의 섬유부문을, 변홍대는 용산 일대의 화학부문을 담당하기로 하였으며 최소복은 남자 중등학교를 담당하는 식으로 각자 역할 분담을 하여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①노동운동노동운동에서 이재유가 상정한 기본적 운동방식은 각 공장 내에 직장별로 그룹을 결성하여 노동자의 일상적 불만을 대중적 파업투쟁으로 지도하면서 아래로부터 혁명적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점차 상부조직으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산업별, 지역별로 구분하여 노동자층에 견고한 조직을 만든 뒤 혁명적 의식이 고양된 우량분자를 획득하여 당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 당재건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그들의 조직 방법은 각 공장에 3~5인의 노동자에 의한 공장그룹을 만들어 이를 지역적으로 통제하면서 산업별 원칙을 따른 전국적 조직을 결성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혁명적 노조 조직에서 공장그룹은 공장분회를, 지역적 통제는 지구조직을 결성하고 더 나아가 산업별에 따른 전국노동조합조직을 지향하였다.이들은 공장 내에서의 대중적 선전 활동?공장뉴스의 발행 등으로 노동대중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의식수준의 향상과 실천투쟁의 전술을 숙달시키는 것을 활동방침으로 삼았다.이재유 그룹은 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주도하였다. 편창제사, 중앙상공회사, 소화제사,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회사, 서울고무회사, 종연방적회사 경성제사공장,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등의 파업이 그 대표적인 보기로 들 수 있다.)1993년 9월 무렵 이같은 파업투쟁이 전개되면서 운동의 고조기를 맞이하지만 경찰에 많은 단서가 잡히고 조직원이 계속적으로 검거되면서 1934년 1월, 이재유의 검거와 동시에 조직은 일단 와해된다.②학생운동노동 운동 뿐만 아니라 이재유 그룹은 학생운동 또한 중시하였는데 그의 운동 시작다가 경성재건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10명에 달하여 경성재건그룹은 상당한 정도로 이전의 조직을 다시 복원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다른 계열에서의 운동자도 가담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트로이카시기보다 다른 계열에서 운동자를 충당하는 비율이 높아짐을 보이는 한편, 3기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데 이는 파벌이 극복되는 양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트로이카시기의 운동이 공장 내에서 노동대중과 일정한 결합이 있었다고 한다면 대중적 기반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34년 11월 무렵에 실질적으로 운동이 전개되어 1935년 1월에 검거되기까지 불과 2달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으므로 운동자금 조달과 운동자 구원 등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고, 그 성격은 투쟁이 아닌 독서회나 토론?조사활동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3) 경성준비그룹시기(3기)① 경성준비그룹 형성과 운동지침1935년 1월. 이재유는 농부로, 이관술은 달걀행상 장수로 변장하고 이재민으로 가장하여 오늘날 창동인 양주군 공덕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재유는 경찰의 탄압과 추격으로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생활권의 제약으로 그를 대신하여 움직일 오르그가 필요했다. 또한 궁극적으로 당재건을 위해 서울에 그 기반을 둬야 했으므로 오르그는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이재유는 출판물을 간행하고 오르그를 통한 경영 내의 활동 협의, 운동자금 제공의 임무를 맡았고, 중심적 오르그에게는 팸플릿 배포와 운동자 획득, 경영 내에서의 직접적인 활동을 맡겼다.1936년 3월 하순. 이재유는 서구원?최호극을 만나게 되고, 이들은 중심적인 오르그로 활동하게 된다. 서구원은 현장에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는 권영태 그룹과 제휴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재유는 이를 받아들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지방협의회’라는 통일기관 결성을 제안하는 팸플릿을 작성하여 권영태그룹에 보냈으나 이재유그룹을 분파주의로 규정하고 통일 제안을 거부하였다.권영태 그룹과의 제휴에 실패한 이재유텔리층을 포섭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반파쇼인민전선’에 대한 이재유의 생각은 그가 옥중에 있을 당시에 쓴 「조선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를 통해서 잘 나타난다. 전반기에 그가 혁명의 수행방도로 ‘좌익전선’운동과 무장봉기를 내세웠으나 후반기에는 노농대중층에 기초를 둔 진정한 볼세비키당을 재건할 것과 반제반파쇼전선을 확고히 수립해야한다고 해 ‘좌익전선’운동과 반제반파쇼전선=‘민족혁명전선’운동의 동시적 전개를 제시했던 것이다.)3.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와 한계그 활동 영역이 서울이라는 지역에 한정되어 진행되었으나 이재유 그룹의 활동 영역은 이 시기 다른 그룹에 비해 그 폭넓은 활동 영역과 대중 기반을 가졌다. 지도적인 당이나 준비조직이 없는 조선에서는 오로지 국제적인 조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타 그룹들이 국제적 조직과의 관계를 통해 ‘정통성’확보에 주력하였던 반면에 비합법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을 일관되게 그리고 이 그룹만큼 뚜렷하게 활약한 운동가들은 없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공산주의자로서 일정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그가 활동한 지역이 서울로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점과 그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지나친 애착으로 인해 운동이 다소 느려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한편, 이애숙씨는 이재유 그룹의 운동을 평가하면서 한계점 또한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부르주아 계급의 내부적인 편차를 무시한 민족부르주아지의 ‘반일적인 부분’을 혁명의 동력으로 인정하지 않은 점, 좌파만의 결집에만 주력한 점, 비합법적 영역에 치중한 활동 전개를 들고 있다.Ⅲ 일제 전시 파쇼 체제하에서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937년-1945년)종전에는 이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을 암흑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1937년 이후에도 새로운 방침에 입각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규정한 가장 큰 요인은 코민테른이 채택한 새로운 통일 전선 방침과 중일전쟁(1937이다.)
    인문/어학| 2006.06.17| 12페이지| 2,000원| 조회(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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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물관 다녀와서 기행문]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와서 평가D별로예요
    국립중앙 박물관을 다녀와서과 목 한국사 입문교 수 님 박경자 교수님학 과 행정학과학 번 20042101이 름 김미현제출일자 2006. 3. 27(월)1. 국립중앙박물관을 가기까지국립중앙박물간에 가본지가 24년을 살아오면서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때나 중학교때는 역사탐방이 아닌 그냥 친구들과 수다떨면서 사진도 찍으려고 덕수궁이나 경복궁 또는 우면산 등지를 돌아다녔었다. 그러나 정작 박물관에는 박물관 견학이라는 방학숙제로 갔던 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집이 숭실대학교 근방이라 국립중앙박물관까지는 버스로 가도 약 20분정도 소요된다. 한강만 건너면 바로니까 말이다. 그런데 작년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와서야 후회되었다.2005년 9월에 완공된 국립중앙박물관이 세계 6번째로 큰 박물관이라며 언론에서 한동안 떠들썩했었다. 2005년말까지는 무료입장이라는 말에 ‘아 올해안으로 한번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했었고,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제의한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내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중?고등학교때 국사를 못했거나, 외울 것이 많다고 국사를 기피하던 사람들이라 함께 가자고 말했던 내 입이 몹시 무색해졌던 것이다.그러나 이번엔 사학과를 이미 복수전공으로 정했고, 나름대로 한국사를 매우 좋아하고 있으며(서양사는 그다지 재미도 안붙고, 너무 딱딱해서 정이 안들어용~), 마침 과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3월10일 토요일. 기숙사 출발하여 홀로 박물관을 향했다.마지막으로 룸메인 같은과 후배에게 “가자가자~” 꼬셔봤지만 “언니ㅠㅠ” 이렇게 매달리며 차라리 집에 가겠다던 과후배들.... 사학과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 나였기에 혼자 쓸쓸히 박물관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옆에서 징징대는 것 보다야 혼자 가서 보고, 적고, 느끼는 것이 오히려 도움되겠다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점심을 일찍 먹고 출발하여 거의 2시가 되어서야 이촌에 도착했다. 주말이어서 그랬는지 끊임없는 인파에 휩쓸려 박물관을 향해 걸었고, 박물관에 사람이 많으는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웅장하고 큰 규모에 놀랐기 때문이다. 세계6대 박물관이란 명성이 전혀 무색하지 않았던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박물관을 향하면서 처음으로 느낀 사실이 있었다. 박물관도 기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태극기와 박물관 기는 저만치 높은 곳에서 바람에 맘껏 휘날리고 있었다.박물관에 입장하기 전에 정면으로 많은 계단이 있고 그 뒤로 남산타워와 야구장같은 곳이 보였다. 어떤 곳인지 둘러보러 호기심에 올라가 보았다. 날씨가 춥지 않았고, 하늘은 굉장히 맑았으며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내게 실망을 안겨준 것은 골프장이었다. 신성한 역사의 현장 뒤에 인간들의 사치를 잘 반영한 골프장. 그러한 인간의 때 묻은 내가 물씬 느껴져 역겨워지려는 순간이었다. 박물관 정면으로는 정말 멋지게 길을 닦아 놓았고 나무도 심어놨는데 박물관 뒤편엔 골프장이라니! 보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지는 연출이 아니던가! 참 안타까운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그래서 집에 와서 박물관 뒤에 골프장이 있나. 이것부터 인터넷에서 뒤졌었다. 박물관 갔다가 가장 실망한 부분이기도 했다. 골프장을 한참을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한기를 느꼈고 바람이 세게 불어 얼른 박물관 안으로 향했다.2. 박물관 내부를 돌아보며박물관 입장 후, 일단 팸플릿 찾았다. 팸플릿은 어느 장소를 가건, 그곳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부여하기 때문에, 항상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 같았다. 팸플릿은 입장표를 끊자마자 정면에 배치되어 있어 찾는데 어려움이 느껴지진 않았다. 팸플릿이 배치된 곳 오른쪽으로 쭉 카운터가 둘러져있었고, 그곳에선 외국인을 위한 안내원 같은 곳이 있었다. 그 옆쪽으로는 음성/영상안내기 대여하는 곳이 있었는데 주로 외국인?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이렇듯 박물관의 거대한 규모에 이어 관내의 시설적으로 엄청난 감동받았다. ‘우리나라도 드디어..’란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러한 흐뭇함이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지어짐으로써 나의 기분을 대변했다.흐뭇함을 유지한 채 고고관으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유물들을 실제로 보니 더욱 신선했고 다시끔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고고관에 입장하자마자 세계지도가 벽 한쪽을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찾았다. 우리나라의 동쪽으로의 광활한 태평양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지리상 이점’에 대해 강대국들의 사이에 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지만 태평양과 주변 나라들의 그 커다란 영토 등을 직접 보며 생각해보니 비록 작지만 지정학적으로 우리 한반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도 같았다.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청동방울과 거친무늬거울과 잔무늬거울이었다. 의식용으로 쓰였던 청동방울은 아가들의 딸랑이 같은 장난감과도 비슷하게 생겼고, 개구리의 손발과도 유사하게 생겨 더 정감가고 신기했다.또한 거친무늬거울과 잔무늬거울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이지만 거친무늬거울의 무늬가 그다지 거칠어보이지도 않았고 잔무늬거울 못지않게 예뻤는데, 명칭이 거친무늬거울이라서 거친무늬거울이라 불리는 거친무늬거울이 정말 불쌍했다.삼국시대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독널이었다. 독널은 주로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었다고 들었고, 이는 일본에만 국한된 무덤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즉, 백제쪽)와 중국에서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독널이 항아리 두개 맞물려서 그 안에 시체를 넣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독널은 시골에서 자주 보던 항아리였다. 생각보다 큰 독널에 많이 놀랐고 정말정말 신기해서 기념으로 플래쉬 안터지는 핸드폰카메라로 사진을 한방 찍었다.그리고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동화 속의 그림 같아 보여 정말 귀엽고 집에 하나 가져다 놓고 싶은 충동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렁였다. 물론 마음뿐이었다.그리고 신라의 금신발과 금책 같은 경우 신라만의 그 소박한 듯 하면서도 화려함은 ‘아~ 역시 신라!’라는 찬탄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라시대에는 분명히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굶는 사람이 많았을텐데 액세서리는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나 그밖의 용도로 사용되었그러한 것은 당연시 여겨졌을 것이었기 때문에 사치스럽고 향락적이었다는 생각은 바로 접었다.금귀걸이를 보면서 ‘저걸 귀에다 걸면 귀가 쳐지지 않았을까?’, ‘저 무거운 것을 귀에 어떻게 걸고 다녔지?’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흑요석도 신선한 충격으로 내 시야에 들어왔다. 돌같지 않게 정말 예뻤던 것이다. 까만 광채를 온몸에 휘감고 있는 흑요석은 동양인의 까만 눈동자와 흡사했다. 찍개와 자르개 등은 굉장히 뾰족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뭉툭했다. 내 뒤에서 어떤 아주머니들께서는 ‘저거 옛날 우리 동네에 널려있던 차돌하고 똑같이 생겼네.’이러면서 웃으셨는데,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가 얼른 표정관리를 하고 계속 관람을 했다.중석기 시대의 이음도구를 봤을 때 구석기 때와는 또다른 정교함이 느껴졌다. 칼의 날카로움 또한 구석기시대와 구별되었다.토기의 경우, 그 시대 사람들이 무늬를 낸다고 낸 무늬가, 아기가 꺄르르 웃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 그 미소가 나도 모르게 지어졌음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선조인데 이런 얘기를 하기가 좀 그렇지만,,, 당시 빗살무늬토기 등을 예쁘다고 하며 너도 나도 만들어 썼을 것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낸 무늬가 귀여웠고, 보기에 좋았으며, 사람냄새를 물씬 풍기게 했다.(가지무늬토기는 토기를 굽다가 꼭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간석기의 종류와 형태는 다양해지고 정형화되었으며 청동기의 화살은 현 화살의 형태를 갖추었다. 청동검 등에도 무늬와 종류가 다양해져서 문화의 발달이 뭔지 빠르고 깊게 느껴졌다.이러한 문화의 발달을 또다시 느낀 것은 거푸집과 장식품 만드는 도구를 보고 나서였다. 거푸집은 그 눈금까지 있었으니 무엇을 만든들 그 정교함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장식품 만드는 도구는 생활의 풍요로움이 있었으니 장식품을 많이 생산하였을 거라고 생각했다.박물관 들어와서부터 나가기까지 3시간이 좀 넘었었는데, 약 1시간반정도가 철기시대 이전까지의 유물들을 구경하는데 보낸 시간이었다. 사진으로 봤던 것을 직접 눈으로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고구려관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본 것은 고구려 부채였다. 동물들의 깃털을 뽑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원시적이면서도 지배층의 소유였다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고구려관에서 가장 반가웠던 유물 중에서 ‘못신’이 있었는데, 이는 작년에 고구려 무력에 대한 역사스페셜에서 미리 봤기 때문이었다. 이걸 보면서 ‘이야.... 말 위에서 내리 찍으면 진짜 안떨어지고 못배기겠구나..’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또한 사신도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 거대한 크기의 사신도를 보면서 벅차오르는 기분과 엄숙해지는 기운을 느꼈고, 5c 그림치고 뛰어난 그림솜씨에 적잖이 놀랐다.삼국시대의 검 등은 상당히 발전된 문화 아래에 만들어졌음을 느꼈는데, 칼(청동?철검)을 보면서 지금의 칼과는 달리 칼을 보는 순간 ‘저것에 찔리면....’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구석기 시대의 검과 비교한다면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느낌이 사뭇 달랐다.또한 삼국시대의 농기구는 지금의 농기구 형태와 흡사했다. 선조들의 벼농사에 있어서의 지혜는 그때부터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보습의 경우 너무 무거워서 밭이나 논 갈기가 더 힘들었을 듯 했다.백제관과 가야는 별 특이한 유물이 없는 것 같아 그냥 쭉 둘러보았다. 고구려쪽에서 워낙 기운이 눌려서 그런진 몰라도 백제의 경우 고리자루칼과 손잡이가 달린 컵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리자루칼의 경우에는 길고 날카로워 찔리면 즉사했을 듯 했다.가야는 유리잔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신라관에 들어서자 삼국 중, 가장 화려함을 장식했었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금으로 쫙 깔린 듯 했다. 액세서리는 화려하고 정교했으며, 신발이나 사발까지도 금으로 만들었던 것을 보았다. 신라관을 나가면서 들었던 생각은 하나였다.“역시 신라야..”예전에 ‘북방사의 실체’라는 교양 강의를 들었었는데, 북방민족인 발해에 대한 수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발해를 볼때에는 삼국시대때와 또 다른 애착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건 용머리상과 연꽃무늬 기와같은 것이 다였다.이다.
    생활/환경| 2006.04.05| 6페이지| 1,000원| 조회(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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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참고 문헌 -------------------------------1◎서론1. 유비쿼터스의 개념 -------------------------------22. 유비쿼터스의 등장배경과 구현방법 ------------------2~3◎본론1. 유비쿼터스의 핵심 요소기술 ------------------------32. 주요 국가 개발 현황 -----------------------------3~43.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적용사업 사례 ------------------4~74.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의 문제점 및 해결방안 -------------7◎결론※.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에 따른 정책 과제 ---------------7~8※참고문헌 :? 정보통신서비스 정책 / jinhan M&B / 김창곤 지음 / 2004? 유비쿼터스 홈네트워킹 서비스 / 전자신문사 / 양재수, 전호인 공저 / 2004? 유비쿼터스기술 / 세화 출판 / 한종수, 배성수, 김경목 지음 / 2005? http://www.ubiquitousdream.or.kr/ (유비쿼터스 드림)사용자가 네트워크나 컴퓨터를 의식하지 않고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통신 환경으로서의 유비쿼터스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영어로, ‘편재(偏在, 어디서나 존재하는)’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도처에 편재해 있는 물이나 공기와 같은 자연물을 말할 때 사용하고, 종교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는 메인프레임, 클라이언트/서버, 웹컴퓨팅에 이어 나타나는 무소부재 컴퓨팅 환경을 말한다. 즉, 모든 사람과 사물에 컴퓨터 칩이 내장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인간생활을 지원하게 되는 것이다.유비쿼터스라는 용어를 컴퓨터 분야에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마크 와이저(Mark Weiser) 박사로서, 그는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의 원전이라고 불리는 ‘21세기를 위한 컴퓨터’를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컴히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에 상호 연결되고 상황을 능동적으로 인지 반응하는 등의 자율성과 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빠른’ 컴퓨터보다는 ‘똑똑한’ 컴퓨팅 환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일일이 개입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일을 처리함으로써 쾌적성을 극대화하고, 인간이 감지하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의 정보까지 획득하도록 심층성이 주요 초점이 된다.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의 구현은 크게 컴퓨팅 기능의 내재화를 강화하거나, 휴대성을 높이는 2가지 방향에서 구현된다. 내재화를 강화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컴퓨팅의 구현이 가능해지는데 이는 컴퓨팅 기능이 환경에 내재되어 이로부터 정보를 획득하고 활용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컴퓨팅 기능이 수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휴대성을 개선하여 언제 어디서나 상시적으로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소형 컴퓨팅 단말기를 통해 유비쿼터스 환경이 구현되는 것이다. 완전한 유비쿼터스 컴퓨팅은 이동성과 내재성을 모두 발전시킨 형태로서 장기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러운’ 컴퓨팅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다.유비쿼터스를 구현하는 데는 센서, 프로세서,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 보안 등 5가지의 핵심기술이 필요하다. 환경을 스스로 인지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센서, 프로세서, 커뮤니케이션 등 3가지 기술이 결합되어야 하며 사람과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인터페이스 및 보안 기술이 필요하다. 먼저 센서는 외부의 변화를 감지하는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의 입력 장치이다. 시청각정보는 물론 빛, 온도, 냄새 등 물리적 화학적 에너지를 전기신호로 변환하는 역할을 한다. 센서는 수동형과 능동형으로 나뉘며, 최근 RFID(Radio Frequency ID)가 급부상하고 있다. 프로세서는 센서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장치로서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에서 사용되는 OS(Operating System)는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실시간 처리가를 자율적으로 감지할 수 있도록 하고, 새로운 기능성과 서비스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한다. 사라지는 컴퓨팅은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 인간의 일상 활동을 지원하거나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EU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구소, 대학, 기업들을 통해 16개의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유럽에서는 미래의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기술로 편재형 지능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다음으로 미국 등에 비해 IT 분야에서 발전 속도가 늦은 일본은 총리 직속의 IT 전략 본부와 총무성을 중심으로 정부차원에서 유비쿼터스 정보기술을 지렛대로 활용하여 일본을 IT 최첨단 국가로 진입시킨다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총리 직속의 ‘IT전략본부’등을 중심으로 신가치 신산업 창조를 목표로 u-Japan 전략 수집을 모색 중이며, 총무성은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기술의 장래 전망에 관한 조사연구회’ 등을 구성하여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시대에 대비한 연구동향과 경제 사회적 파급효과 등 다양한 연구를 수행중이다. 끝으로 한국이다. 한국의 각 부처별로 이루어지고 있는 유비쿼터스 추진동향을 살펴보면, 먼저 정보통신부는 향후 전개될 IT시대에 대비하여 기반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광대역 통합망, IPv6, U-센서 네트워크 등 첨단 인프라 고도화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 중이다. 2010년까지 2000만 가입자에게 현재보다 50배 빠른 50~100Mbps급 광대역 통합서비스를 제공하여 속도?품질?보안이 보장되는 세계 최고수준의 정보통신서비스 이용환경을 조성할 계획이다. IPv6의 도입으로 인터넷 주소고갈의 문제를 해결하고, 광대역 통합망 및 홈 네트워크 구축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핵심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2011년까지 3단계에 걸쳐 유비쿼터스 IT시대의 핵심 인프라가 될 U-센서 네트워크 구축 기본계획을 추진 중이다. 과학기술부는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유비쿼터스 컴퓨팅 및 네트워크 원천기반기술개발사업을 추진 중이다. 산업자원부는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원천터스 환경으로 진화되고 있다. LBS(Location Based Service)는 휴대폰 속의 칩을 이용해 가입자들의 위치를 반경 수십 센티에서 수십 미터 내에서 언제든지 확인 할 수 있도록 해주며 사용자가 원하는 각종 정보를 개인화 된 환경에서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해 준다. 서비스 방식에 따라 이동통신기지국을 이용하는 방식과 위성을 활용한 GPS(Global Positioning Service)로 구분되며, 서비스 유형별로 위치추적서비스, 공공안전서비스, 위치기반정보서비스 등으로 분류된다. 최근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이동통신 3사에서 카네비게이션, 위치기반컨텐츠, 모바일 옐로 페이지 서비스 등 그 활용분야가 확대되는 추세다. U 헬스케어는 집안 곳곳에 심어진 각종 센서를 통해 거주자의 생체상태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계측장비와 센서가 장착되고 이를 통해 수집되는 각종 생체정보는 의료연구센터 내 중앙서버에 실시간으로 전송 돼 개인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데이터베이스로 활용됩니다. 이와 같은 실험연구가 성공할 경우 병원을 일정시간대에 방문해 고정된 기기로 검사를 받아야 하는 현행 진단체계의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주변 생활 곳곳에 각종 의료용 칩과 센서를 부착하여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시대를 앞당기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 타이어란 기존 고무 타이어에 각종 안전센서를 장착해 운전자의 위험상황을 경고하는 기능까지 수행하는 미래형 타이어로 실제 주행 중인 타이어가 펑크가 나기 전에 타이어 공기압 정보를 운전자에게 알려주거나 노면조건을 감지하고 타이어 외부형태까지 바꾸는 꿈의 자동차 타이어이다. 스마트 타이어의 핵심기술인 타이어 압력 모니터링 시스템(TPMS : Tire Pressure Monitoring System)은 4개의 타이어 내부 링에 장착된 무선 송신기와 압력·온도 센서 모듈, 운전석에 설치된 전용수신기로 구성되어, 시동을 켤 때마다 모든 타이어의 압력상황이 체크되어 계기판으로 압력있도록 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미국 전역의 FM라디오 방송국들과 주파수 임대계약을 체결했으며 현재 전국토의 80%를 서비스 영역으로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에 쉽게 접속하는 유비쿼터스 시대를 본격 구현하고 있다. 버스종합사령실(BMS : Bus Management System) 프로젝트는 위치측정시스템(GPS)과 무선송수신기를 장착하고 자신의 운행위치 및 상태와 배차간격, 도착 예정시간이 실시간으로 제공되며 원하는 목적지까지의 소요시간과 노선정보 등의 각종 정보를 스스로 수·발신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이다. 서울시는 버스사령실(BMS) 운영을 통해 편리하고 이용하기 쉬운 버스 운행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버스 운행 관리·감독의 과학화를 실현하고 자가용 운전자의 교통 수요를 대중교통으로의 흡수효과 기대 및 특히 최근 서울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예상되는 시내 도심지와 동북부지역의 교통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컴퓨터 칩의 소형화에 따라 급속히 전개되고 있는 디지털 컨버전스 홈네트워킹 혁명으로 조만간 구현 될 디지털 홈은 정보기기와 통신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가정은 물론 교통·사회 인프라·전자상거래 등과 연계되는 미래 인텔리전트 사회의 도래까지도 예상케 하고 있다. 디지털 컨버전스 홈 네트워크가 발전한 미래의 모습은 `사물이 지능을 갖춤에 따라 인간과 인터페이스하고 교감하면서 인간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해줄 수 있다`라고 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전 단계라고 말한다. NGN(Next Generation Network)은 전화망(PSTN), 인터넷, ATM, FR, 전용망, 무선망 등의 서로 다른 망을 하나의 공통된 망으로 구조를 단순화 해 음성과 데이터를 통합한 다양한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차세대 통신 네트워크를 말한다. NGN 환경에서는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어떤 단말기로 통신을 시도하더라도 콘텐츠와 전자기기들의 사용이 가능하며 초고속 광대역으로 통신을 할 수가 있어 그동안 꿈꿔왔던 상상 속의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을 구현 할 있다.
    공학/기술| 2006.05.24| 8페이지| 1,000원| 조회(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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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조선왕조실록의 위대성^^
    한국역사의 이해조선왕조실록의 위대성학 과 행정학과학 번 20042101이 름 김미현교 수 님 이순자 교수님제출 일자 2005. 05. 04목 차『조선왕조실록의 고찰』Ⅰ 서 론조선왕조실록을 주제로 선정한 이유Ⅱ 본 론1. 실록이란(1) 실록과 조선왕조실록의 정의(2) 조선왕조실록의 특징(3) 조선왕조실록의 원칙2. 실록의 제작(1) 실록편찬원의 구성과 자질(2) 실록편찬자료(3) 실록의 편찬과정(4) 실록의 보관3. 실록의 한계Ⅲ 결 론느낀점과 알게된 점참고자료Ⅰ 서 론조선왕조실록에 대하여 자세히는 몰라도 【조선왕조실록】이란 이름에서 나오는 분위기로 봐서 조선의 역대 왕들의 업적 ? 생애를 다룬 글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제작 과정에 있어서나 사관들의 노고 ? 역사의식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초초 ? 중초 ? 정초 ? 세초의 과정을 거치고 거듭 거친 후에서야 비로소 하나의 실록이 탄생한다는 강의를 들은 후부터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매력이 강하게 다가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고찰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틀어 문화재를 가장 많이 남긴 왕조는 조선왕조이다. 긴 역사만큼이나 역사적 유산 또한 많았던 것이다. 그중 조선의 가장 우수하고도 위대하며 매력적인 유산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는 이유와 그 의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Ⅱ 본 론1. 실록이란?(1) 조선왕조실록이란 무엇인가실록이란 한마디로 당대사라 정의할 수 있다. 즉, 황제 또는 왕이 승하하 면 바로 다음 또는 그 다음 왕대에서 전왕대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군왕 한 사람씩의 재위기간의 일을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조선왕조실록이란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조선 제25대까지의 472년간 역 사적 사실을 연 ? 월 ? 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총 1893권 888책 에 이르는 방대한 필사본 및 인쇄본을 일컫는다.(2) 조선왕조실록의 특징 ① 실록의 특징실록은 다른 사서들과는 다른 독특한 3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첫째, 실록은 기 때문에 그 분량과 내용면에서 단연 역사서와 자료집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셋째, 실록은 “당대사”였다.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의 “현대사”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당대 사람들은 보지 못했고 그 대상에서 왕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②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첫째, 조선왕조실록은 내용면에서 동아시아 어느 국가의 실록보다도 충실하다는 점이다.이는 조선시대의 정치 ? 외교 ? 사회 ? 경제 ? 학예 ? 종교생활에서부터 천문 ? 지리 ? 음악 ? 과학적 사실 ? 자연재해 ? 천문현상 ? 외교 등이 수록된 종합사서로 왕에 대한 명령 ? 보고사항 및 각 관청에서 취급한 일들까지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그 자세함과 정확성에 있어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며 500년간의 왕정기록이 하나의 체계 아래 작성된 것은 극히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둘째,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과 관리방식이 공정하고 엄격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 관료였다. 실록은 공정성을 지키기 위하여 당대 왕이 승하한 후에야 비로소 사관들에 의해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간다.또한 사관에 의해 제출된 사초는 극비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관 이외에는 국왕을 포함하여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유학의 영향을 받았던 중국 ? 일본 ? 배트남에서도 실록이 편찬되었지만 이를 후손 왕이 볼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었다.태조 ? 세종 ? 성종 등 숱한 국왕들이 실록을 열람하려 했으나 사관들의 목숨을 건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보지 못했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도 실록의 열람 욕구만은 강렬했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을 보고자 했고 실제로 태조실록을 열람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의 기록인 태종실록을 보고자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보지 못했다. 다만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를 본 것이 유일한 경우일 뿐이다. 이후 왕이 실록을 열람을 요청하면 세종의 예를 전거로 들며 국왕의 실록 열람을 견제했다고 한다.셋째, 조선왕조실록은 금속활자 또 200자 원고지에 옮기면 그 높이가 63빌딩의 세배에 달한다는 분량으로 봐도 세계가 깜짝 놀랄 일이지 않은가 싶다. 다른 나라 실록들은 조선의 실록처럼 그 분량이 방대하지 않았으므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후세에 영구히 전하려고 4-5곳에 분산 ? 배치하여야 했으므로 인쇄 분량 또한 엄청났기 때문에 활자 인쇄가 더 용이했던 것이다.넷째,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왕의 25대에 걸친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세월에 걸친 실록이며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을 완전히 보존한 것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비록 사고는 모두 불타 소실되었으나 오대산 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들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3)실록의 원칙첫째, 실록 및 사초는 누구도 볼 수 없었으며 심지어 왕도 임의로 볼 수 없었다.전혀 그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원칙은 조선왕조의 전 시기를 통하여 공론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실록은 왕이 볼 수도 없었고 본다고 해도 너무 방대하여 교훈으로 활용하기 어려워 역대 군주의 치적에서 모범될 만한 일을 골라 책으로 엮어 역사교과서로 활용되었는데 이를 국조보감이라 한다.둘째, 세초라는 작업이 실록의 질적 가치를 높여주는 요인이었다.조선왕조실록은 초초-중초-정초의 3단계의 편찬과정을 거쳤는데 실록이 편찬되고 나면 초초본과 중초본을 물로 씻어 지워버렸는데 이를 세초라 한다. 이는 뒷날의 구설을 막기 위하여 두 본을 없앤 거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광해군 일기는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이 전해져 오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대단하다고 한다.)셋째, 수정실록의 편찬은 그 가치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조선왕조에서는 실록이 수정된 경우가 네 번 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원래의 실록과 수정실록을 같이 남겼다는 사실이다. 원래의 실록과 수정실록을 같이 남겼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이를 비교하여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 가치로 보장받은 관직이다. 넓게는 춘추관의 관직을 겸한 모든 관원이라 할 수 있지만 좁게는 기사관을 겸임하고 있는 전임의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임사관은 정 7-9품까지의 직위는 비록 낮지만 대단히 청화한 벼슬로서 글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되었고 문벌 또한 좋아야했으며 사관 선임 방법도 엄하게 제정하여 전임 사관의 임명에 있어서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임명했다. 봉교이하 전임사관 8명은 승지와 함께 궁중에서 생활하며 각종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왕과 신하의 국론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였으며 잘잘못과 인물에 대한 비평까지 기록하였다.사관은 직필의 원칙을 지켜야 했으므로 자질 또한 무엇보다 중요했다.권력이 원칙을 누르는 경우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곧은 마음과 강직한 성품, 곧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도 후세에 올바른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정신이 사관들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관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으며 어떤 인물을 사관으로 선발할지 그 과정 또한 매우 까다로웠다.(2) 실록편찬자료실록을 편찬하는 기본 자료는 춘추관에서 매일 기록한 ‘시정기’와 사관들이 작성해둔 ‘사초’를 비롯하여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 및 개인의 문집 등이 있다.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관들이 쓴 사초라 할 수 있다.“사초”는 정치의 득실과 인물의 선악 등의 사회의 모든 일을 보고 듣는 대로 바로바로 적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춘추관에 두지 않았고 사관들이 저마다 간직하고 있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에야 비로소 제출하도록 하였다.“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의 공문서를 종합하여 정리한 것으로 1434년에 창시되었다.즉, 1434년 전까지 정부의 여러 기관에서 시행한 안건 중 후세의 귀감이 될만한 것을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관하던 것을 사관으로 하여금 날짜별로 종합 ? 정리한 것을 시정기라고 한다.사초와 시정기는 모든 사실을 직필한 극비의 문서이기 때문에 사관 이외의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국왕 있어 역사왜곡을 막기 위하여 보통 100여명 이상의 사관이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모든 사초와 기타 자료들은 먼저 각 방에서 편년체로 실록의 1차 작업인 초초를 작성하게 된다. 이것을 도청에 넘기면 그곳에서 검열하여 잘못을 정정하고 누락된 것을 추가하며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는 2차 작업을 시행한다. 그러면 실록편찬의 최고 책임자인 총재관과 도청의 당상이 중초를 검열하여 손질하고 문장과 체제를 통일시켜 마지막 3차 단계인 정초를 만든다. 이로써 실록은 완성되게 된다. 정초가 완성되면 그것을 여러 부로 인쇄하여 각 사고에 봉안하고 실록의 기본 자료였던 시정기와 사관들의 사초 그리고 실록의 초초, 중초, 정초는 모두 세초작업을 한다. 세초작업은 동시에 종이를 재생하기 위함과 동시에 기밀누설방지책의 일환이기도 했다.(4) 실록의 보관실록의 편찬과 인쇄가 완료된 즉시 활자로 출판하여 여러 본을 나누어 사고에 봉안하여 관리하였다.고려초부터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고종이 명종실록을 완성하여 개경의 사고와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였다.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세종때부터는 중앙의 춘추관과 지방의 성주, 충주, 전제 세 곳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실록 이외의 사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전란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춘추관 외에 지방 깊은 산 속에서 보관하였는데 정족산 ? 적상산 ? 태백산 ?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이 찬탈하여 갔다가 관동 대지진때 소실되었지만 나머지 3부는 다행히도 우리나라에 보관되어있다.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정상산본은 현재 김일성종합과학대학원에 보관되어있으며 정적산분과 태백산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있다.3. 실록의 한계실록이 완전한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한계와 약점이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떳떳치 못한 업적을 가진 왕의 실록일수록 부정한 면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실록의 한계에는첫째로 사실의 왜곡적인 면이 있다.예를 들면 태종이 고려 말기부터 사람을 많이 죽였기에 다.
    인문/어학| 2006.05.24| 8페이지| 2,000원| 조회(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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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VTR 5.18 광주 민주항쟁 감상문(KBS) 평가A좋아요
    VTR 5.18 광주 민주항쟁 감상문(KBS)광주민주항쟁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한 시각에서 본 적이 없었다.광주민주항쟁이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대강으로만 알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이번 5.18 광주민주항쟁 VTR은 80년대의 상황이 독재와 군대가 판을 치는 세상이 저런 세상이구나..란 생각이 들게끔 도와주었다.이승만의 독재와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이어지면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이 극도로 증폭되어 있었고 그 염원이 확대되어졌다.그러던 중 박정희가 암살당했고, 그 시기를 틈타 전두환은 김재규를 처리하고 12?12쿠데타를 일으켰으며 국가권력을 장악해갔다. 민주주의를 바라던 시민들의 의사를 묵살한 셈이며 국민들의 의사에 상관없이 또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선 것이다.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하게 되었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전두환은 전국 각지에 계엄령을 내려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구금되었으며, 이러한 시위는 광주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다.전두환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총칼로 무장한 공수부대는 광주에 파견되어 무차별한 사격을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시민군을 결성하게 하였고 이것이 광주민주항쟁이 되었다.시민들의 계엄령 철폐 요구는 결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그들의 불안감과 두려움?공포를 뛰어넘어 부도덕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이들은 시민운동에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이들 계엄군은 아무런 죄없는 일반주민들을 피습하거나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하는 등의 비인간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무참히 짓밟았다.정말 눈뜨고 못볼 일이었다.계엄령이 내려지고 난 후, 공수부대는 시민들?학생들을 곤봉(?)과 구둣발로 무참히 짓밟았고, 총과 칼로 위협하였으며, 총을 난사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만들었다.다른 민족도 아니고 우리 민족이.. 그것도 분단된 상황 하에서까지 한명의 권력욕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무참히 피흘려야 하는 이러한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 할 수도 없으며, 이러한 일은 이해되어도, 결코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느꼈다.전두환이 박정희 밑에 있으면서 그는 과연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몰랐을까?우리 시민들의 힘을 얼마나 경시했길래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란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박정희와 같이 무조건 폭력으로 국민들을 억압하려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전두환에게 있어서는 머리를 써서 민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보다 쉬운 일이었기 때문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군인은 머리보다 행동이 먼저다’라는 내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전두환은 당시의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깔아 뭉개버렸던 것이다.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광주시민들은 1차적으로 국가 권력앞에서 무너졌고, 2차적으로 언론에 의해서 쓰러져갔다.정부에서는 공수부대를 앞세운 무력진압이, 언론에서는 광주민주항쟁을 난동이나 폭도로 매도하면서 한번 더 광주를 왜곡하여 광주를 두 번 죽이는 셈이 되었던 것이다.광주 시민들은 이때 미국의 진면모를 알게 된다. 미국이 전두환의 쿠데타와 5?18무력진압을 은근히 승인한 것이 그것이다. 전두환은 군인이라 외골수인 것 같으나, 실제로 전두환은 친미성향이 강했고 미국에서도 전두환이 자신네 코드에 대체로 맞았으므로 전두환세력에 대해 그다지 큰 제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대지휘권이 없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전두환이 군대를 움직였다는 것은 미국이 승인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5?18의 무력진압에는 미국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VTR 후반부쯤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시민들 모두 합창을 하는데 그 대목에서는 정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슴 찡한 감동은 쉽게 가실 줄을 몰랐던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6.05.24| 3페이지| 1,000원| 조회(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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