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읽고일찍이 E.H.Carr는 자신의 저서인『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대전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역사는 역사가들에 의해 선택된 사실들의 기록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미 지나온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가의 눈을 통해 과거의 사료들이 정리되고 다듬어져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줄 수 있을 때에야 역사는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기록이나 그 밖의 사료들은 우선 그 양이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대로 갈수록 현저히 줄어든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고고학자들의 힘을 빌어 당시 시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했던 진나라도 몇몇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화려한 역사에 비해 그러한 역사를 증명해줄 수 있는 유물들이 빈약하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 지장이 많았다. 그러나 진시황릉과 그 주변의 병마용갱이 발굴되면서 2200여년전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의 거대한 실체가 조금씩 진실로 살아나게 되었다.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규모도 물론이려니와 그 속에 부장된 너무나도 사실적인 도용과 도마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들은 당시의 통일국가 진나라의 강대한 면모를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위에 난이 쓴『진시황릉』은 1974년 섬서성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병마용갱이 처음으로 발굴될 당시부터 오늘날까지의 이야기를 비교적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 책의 원래 제목인 “세계 8번째 불가사의”라는 말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만큼 이 책은 비록 가까이에서 병마용갱을 볼 수는 없지만 마치 스케치하듯이 소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감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효과적으로 유발하는데 성공했다.이 책은 진시황릉과 그 주변에서 발굴된 병마용갱 등을 중심으로 유물들과 관련된 진시황에 대한 이야기까지 함께 풀어나간다. 진시황릉이 진시황 재위 직후부터 그의 사후구에는 항상 우연성이 존재하고 있기에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에서부터 교양으로 역사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언제나 끊이지 않는 흥미거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우연성은 바로 1974년 진시황릉 주변에서 최초로 발굴된 병마용갱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용갱은 진시황릉으로부터 1.5킬로미터 떨어진 서양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당시 중국 서북지역을 휩쓸었던 가뭄이라는 천재지변이 세기적 유물의 발굴이라는 우연성으로 귀결된 것이다. 가뭄에 목말라하던 농민들이 우물을 찾고자 손에 쥔 삽과 곡괭이가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용(俑)’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 죽은 사람을 묻을 때 함께 땅속에 묻는 일종의 부장품을 일컫는 말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다른 문명발상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생의 연장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죽음에 대한 철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부장품들을 제작해서 껴묻거리로 함께 묻으면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사상적 배경이 진시황릉 축조에도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집트에서도 파라오를 위한 무덤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고 그 안에 진귀한 부장품을 함께 묻었지만 아무래도 중국인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예전부터 중국의 문화유산과 관계된 책이나 영상물을 보면 항상 느끼게 되는 생각이 ‘스케일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크다.’ 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병마용갱 또한 그 규모면에서 일단 접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호갱 첫 발굴 당시 그 끝 모퉁이가 어디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고 하니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진시황의 유적을 접하게 되는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일단 진시황이라는 한 인간이 가진 비범함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그런데 규모도 규모지만 그 속에 있던 엄청난 수의 도용 수많은 도용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 존중의 개념이 진나라시기에 이르러 극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말처럼 진시황 사후 곧바로 중원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이러한 인간 존중의 개념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평균적으로 175~195cm에 이르는 조금씩 다른 키와 이민족 구분을 할 수 있을 만큼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된 도용의 표정과 복장은 이미 진시황이라는 한사람만을 위한 소유물에서 벗어난 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 군대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적인 면모는 지면상에서도 생동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친위대는 황제가 죽을 때 산 채로 함께 묻히는 대신, 그들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으로 만들어져 무덤 곁에 묻혀 지금까지 시황제를 호위하고 있는것이다.이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시 2호, 3호갱이 잇달아 발견되었다. 대부분이 보병이던 1호 용갱과는 달리 2호 용갱은 궁노병과 기병등의 다양한 부대로 이뤄져 있었고 3호 용갱은 군대 지휘부로 밝혀졌다. 이를 통해 전국시대 진나라의 군대가 얼마나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5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는지에 관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과거 군대의 주력부대는 보병이었으며 보병 방진 여러 개가 중앙의 주력 방진 양옆에 V자 대형으로 비스듬히 줄을 지어 적을 공격하는 것이 이른바 안행지진이다. 진시황은 여기에 기병 부대와 전차 부대의 기동성을 가미한 새로운 전술을 창안했다. 보병이 돌격한 뒤 전차?기병이 적의 측면을 협공하면 보병 방진이 옆으로 흩어져 적을 포위하는 전법이 바로 그것이다. 책에 나와 있는 배치도 그림을 보면서 가상으로 전쟁시뮬레이션을 설정하여 어떤 식으로 진나라 군대가 이동하고 상대편을 무력화시켰는지 상상해보는 것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나름대로의 흥미였다. 병마용갱의 발굴로 밝혀진 고대 진나라의 진용을 통해 마용갱의 경우에도 항우에 의한 훼손과 이후 한나라의 유가사상 채용 등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역사 서술에서 제외된 듯하다. 그러나 병마용갱 출토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헌이나 참고자료가 전무할지라도 유물의 발굴을 통해 한층 더 당시 시대 복원에 가까운 역사 서술이 가능해짐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 이후에 발견된 동거마는 오랜 기간 땅속에 묻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 보존된 상태로 출토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통해 진시황 당시의 중국 대륙의 발전된 제조, 공예 기술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책에 사진자료가 많이 있어서 발굴된 유물들에 관한 상태와 수준을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이렇듯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타의 고대제국을 능가하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던 진나라였지만 진시황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구심점이 없어지자 통일제국 진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태자들의 싸움에서부터 시작된 혼란은 결국 항우와 유방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진나라의 멸망이라는 결말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진시황 사후의 상황은 진시황릉 부근에서 발견된 17좌의 순장묘에서도 알 수 있다. 귀족의 묘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유품들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형태도 갖추지도 못한 채 어지럽게 유골들이 흩어진 모습은 묘자리의 주인들을 진나라 말기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어 매장된 귀족들로 추정하게 한다.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은 후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혼란을 거듭했고 결국 화려한 과거를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이 책은 진시황 당시의 화려했던 유물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러한 유물을 통해 진시황과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을 연결시키고 있음에 큰 의의가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겠지만 오늘날에도 진시황을 평가하는 시각의 차이는 다양하다. 시황제는 난세의 영웅이었고 그가 행한 통치방식은 통일 이후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는데 효과적이었다는 긍정적인 의견과, 자신의 위엄을 위해 수많은 과 그로 인해 중국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북쪽 대륙으로의 진출을 차단하였다는 점에서 진시황은 비판을 받는다. 훗날 중원지역의 왕조가 계속해서 바뀌면서도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에 대해 만리장성은 충분히 방어를 해 주었으며, 덕분에 진시황도 마음 놓고 중국의 남쪽 지방에 신경을 쓸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통일국가 수립 이후 흉흉해질 수 있는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의 삶에 압박을 가했음은 결국 진나라가 자기 스스로를 멸망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위엄 있고 힘 있는 군주라 할지라도 군주가 덕을 잃고 민심이 그에게서 떠나면 왕위를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우리는 역사적 교훈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분서갱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진시황에 대한 평가를 좋지 않게 결론짓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이는 특히 한나라를 거치면서 한무제 이후 동중서에 의해 유교가 국교화 되면서 역사를 저술하는 유학자들로부터 악평을 받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당시 진시황은 상앙, 이사와 같은 사람이 주장했던 법가를 진나라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학파들, 특히 그 당시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사건건 시황제의 일에 제동을 걸었던 유가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던 중 당시 재상이었던 이사가 진시황을 부추기게 되고 결국 수많은 유교 경전과 유학자들이 불태워지고 매장당하는 분서갱유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국가의 문화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지배자의 시도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함을 또한 역사적 실례를 통해 알 수 있다. 20세기 전, 중반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간 1, 2차 세계 대전처럼 그 당시 전 세계를 전쟁으로 치닫게 한 배경에는 군국주의나 전체주의와 같이 부정적으로 변질된 민족주의가 있었고, 그 이전 신대륙에서 자행된 수많은 학살과 토착 문화에 가해진 파괴와 약탈에도 기독교와 서구 문화라는 칼날이 숨어 있었다. 오늘날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비롯해서 본다.
목차1. 개요 22. 사건의 배경 및 발단 22.1.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적 모순2.2. 후야오방 총서기의 죽음3. 사건의 진행 상황 33.1. 4월 17일3.2. 4월 22일3.3. 4월 26일3.4. 5월 15일3.5. 5월 18일3.6. 5월 19일3.7. 5월 20일3.8. 5월 27일3.9. 6월 3일3.10. 6월 4일3.10.1. 탱크맨3.10.2. 민주주의의 여신상4. 결과 65. 영향 75.1. 국제적 제재의 타격5.2. 화교들의 동요5.3. 교육과 문화적인 충격6. 언론의 보도 97. 각종 매체에서의 천안문 항쟁 97.1. 다큐멘터리7.2. 음악7.3. 영화7.4. 만화7.5. 애니메이션7.6. 인터넷8. 평가 11 121. 개요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및 시민들의 평화시위를 중국 정부와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하고 총포를 난사해서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반중 인사들은 중국의 피의 일요일 혹은 베이징 대학살(Beijing Massacre)이라고 부른다. 보다 중립적인 학자들은 한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빗대어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나 1989년 톈안먼 광장 저항(Tiananmen Square Protest of 1989)이라고 한다. 중국 관변학자들은 톈안먼 광장 사건(Tiananmen Square Incident)이나, 6.4 사태(June Fourth Incident)라는 용어를 쓴다. 중화권에서는 무력 진압이 일어난 6월 4일에서 따와서 류쓰(六四),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 부른다.덩샤오핑은 텔레비전 등에까지 나오면서 확고한 진압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의지였나, 아니면 보수파의 위협적인 부상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나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으나 결론적으로 덩샤오핑은 이 사건에 대한 평가를 이후에도 뒤집지 않았다.2. 사건의 배경 및 발단2.1.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적 모순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집권했으나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의 후유민공 시위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3.4. 5월 15일5월 15일에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방중하기로 했으나 이 시위로 인해 일정이 늦춰졌고, 시위대들 때문에 천안문 앞의 장안가(長安街)를 통과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 숙소인 베이징 서쪽의 조어대(釣魚臺)로 가는, 중국 지도자들로서는 대단히 창피한 일도 벌어졌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중국 공산당은 이 사태를 난동으로 규정한다.3.5. 5월 18일베이징 일부 지역에 한정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전 11시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은 우얼카이시, 왕따한 등 학생 측 대표와 전격적으로 면담을 가졌다. 신임 총리 리펑은 당내 강경파들을 대신해서 학생들을 강한 어조로 설복시키려 했으나, 학생 지도층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당일 당내 회의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기를 결정했고, 덩샤오핑은 출동명령서에 사인했다. 오직 쉬친셴(徐勤先, 당시 중장)만이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라며 출동을 거부했는데, 그는 군법에 의해 직위해제 처분되어 소식이 끊겼고, 서방에서는 사형에 처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명령불복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5년형을 받고 이후 스자좡(石家?)시에 거주지 제한조치에 취해졌다고 한다. 사건 20여 년 후 홍콩언론인 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인터뷰했는데, 그는 군인연금도 끊기는 등,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었음에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3.6. 5월 19일당총서기 자오쯔양은 5월 17일 북한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결국 5월 20일 발효될 계엄령을 막지 못하고, 19일 새벽 4시 45분에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리고 병가를 사유로 사임장을 제출하고 공산당을 떠났지만, 결국 체포된 이후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 되었고, 2016년 현재까지 林)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주인공이다. 6월 5일, 수십 미터 밖에서 진격해오는 59식 전차들을 어떤 사람이 단신으로 막았다. 전차 조종수들이 차마 그 사람을 깔아뭉개고 갈 수 없었는지 옆으로 피해서 지나가려하자, 이번에는 전차가 피하는 방향으로 뛰어가면서 그야말로 몸을 던져 막았다. 그런가 하면 전차 위로 올라가서 조종사석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몇몇 시민들이 달려와 데려가면서 위험한 상황이 끝난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주변에 포진해있던 사복 경찰들이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달려와서 떼어놨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 공개된 천안문 관련 사진 중에 자신과 똑같은 흰색 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과 같이 몸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왕웨이린의 행방에 대해, 대만으로 건너가 살아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는 중화권 언론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여부는 100% 밝혀진 바 없고, 오히려 진압 직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 중이거나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그러나 1990년 미국 ABC 방송의 유명 베테랑 앵커인 바바라 월터스(Barbara Walters)가 장쩌민과 단독 인터뷰를 하였다. 월터스가 대놓고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며 왕웨이린을 언급하자 장쩌민은 너털웃음을 짓는 등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월터스의 질문에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장쩌민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죽지 않았다.(But I think 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 그것을아이의 엄마인 차이링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로 살고 있다. 차이링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류샤오보와 나는 톈안먼에 탱크가 밀려들 때 마지막까지 같이 서있었다”며 “기념비적인 일이며 노벨위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차이링은 현재 ‘올 걸스 얼로드(All Girls Allowed)’란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중국의 강제낙태와 여아(女兒)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이링은 지난 10월 12일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매일 3500여명의 여아가 강제 낙태되고, 500여명의 여성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중국의 여성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중국 공산당에서는 폭도들을 진압한 인민해방군 측에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 1,000명이 희생되었으나 폭도들은 고작 27명이 죽었다고 당초 보도했지만,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에 의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뉴욕 타임스 지에서는 400명에서 800명, NSA에서는 약 1,000명, 중국적십자에서는 2,600명,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 학생들은 7,00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며, 부상자 수는 진압에 나선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약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추산된다.5. 영향개혁, 개방 개시 이후 서구, 일본 등의 선진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경제성장을 꾀하던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먼저 선린우호 전략을 내세워서 아시아의 주변 국가와 국교를 맺는 전략을 취했다. 1992년의 한-중수교도 바로 이러한 중국 전략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내부적으로 중국은 국가 내 사회영역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국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체제 안정과 제도의 정비를 국내 정책의 최우를 사실상 전면 해제했다.5.2. 화교들의 동요대만과 홍콩 등지에도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인데,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홍콩인들이 중국과의 통합에 회의적으로 변하여, 이 때문에 한 동안 외국으로 이민을 간 홍콩인들이 큰 수로 증가하기도 했고, 대만에서도 한창 대륙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던 상황이었는데 때 마침 대만이 리덩후이 치하에서 계엄령 철폐와 언론통제 폐지, 야당의 허용 등 정치개혁과 민주화에 나섰던 상황이고 통일 여론도 고조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통일에 대한 회의론이 커졌다. 대만 내 야권에서 중국과의 통일에 찬성하는 사회민주당과 노동당, 공당 등 통일찬성파가 별 힘을 못 쓰고, 중국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민진당의 파이가 압도적으로 커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민당이 중국과 가까워지게 되는 상황이 되면서 대만내 독립파에서는 천안문 사태를 통일반대론의 단골 레퍼토리로 쓰고 있다.그리고 한국에도 천안문 6.4 항쟁과 연관되어 도망쳐 온 중국인이 꽤 많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보통 화교보다도 훨씬 더 중국인이라는 티를 잘 안 내고, 한국 내 화교 커뮤니티와도 거의 연관을 맺지 않는다. 화교들의 상당수는 산동성 출신이긴 하지만 국적이 중화민국이란 차이도 있긴 하다. 그리고 1989년이면 한국의 화교들이 마오쩌둥이 중국인의 해외 출입국을 막아서 대륙과 연계가 끊어진 1949년부터 40년이 지났을 즈음이다. 다만 너무 티를 안 내고 한국과 융화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심한 경우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된 화교끼리 결혼하고는 집안에서 단둘이 있을 때조차 철저하게 한국어만 쓰고 자녀에게까지도 자신들의 출신을 안 밝혀서 자녀 본인이 화교 2세인 걸 전혀 모르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숨기고 중국인 커뮤니티와 연관을 피하는 것도 중국 정부 지지자로부터 테러를 당할 것을 우려해서다. 실제로 미국으로 망명한 천안문 사태 참가자들이 낯선 중국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5.3. 교육과 문화적문이다.
목 차1. 서론2. 고대의학에서 인체실험 및 그에 관한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3.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과 인체실험4. 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비윤리적인 인체실험5. 일본의 세균전과 잔학한 인체실험6.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와 인체실험7. 의학연구를 위한 인체실험에서 윤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8. 결론 : 보다 건강한 사회, 그리고 보다 윤리적인 사회를 위한 의료인들의 과제1. 서론궁극적으로 인간의 질병과 인체를 연구하는 의학에서 임상실험을 포함해서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몸에 직접 실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의학지식의 향상과 의료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체를 대상으로 한 의학실험이 불가피하다. 인체실험(Human experiment)이란 새로운 약의 효용을 평가하는 임상실험(Clinical trial)으로 부터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한 생체해부(Human vivisection)에 이르기까지 실험동물이 아닌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의학실험을 하는 것을 넓게 지칭한다. 사실상 인체실험은 의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인체실험은 새로운 진단방법이 나올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치료제나 치료법이 나올 때마다 계속 되어졌다. 또한 병의 원인이나 인체에 대한 연구를 할 때에도 인체실험이 행해진 경우가 많았다. 의학의 목표는 인체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의 증진과 인간의 질병의 치료에 있으므로, 아무리 동물실험을 많이 한다고 하여도 인체에 대한 연구를 통하지 않으면 새로운 의학지식과 의학기술의 과학적 정당성이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인류역사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인체 실험은 종종 범죄자, 정신 질환자, 고아, 정신지체부자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잔혹한 인권침해의 결과를 초래해왔다. 그동안 인체실험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도 보건의료 및 의학연구에 대해 윤리적인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20세기의 유명한 철학자인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 불평한 기록들도 있다. A.D. 1세기에 어떤 군인은 "내가 몸이 아팠을 때, 의사 시마쿠스여, 당신이 나를 진료하러 10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즉시 왔지. 북풍으로 얼어붙은 100개의 손들이 나를 마구 주무르고 간 뒤, 시마쿠스여, 그 이전엔 열이 없던 내가 열로 시달리고 있다네"라고 기록을 남겼다.3.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과 인체실험19세기를 통해 근대 실험의학이 발전한 이래 동물 생체실험과 인체실험이 급증하였다. 특히 임상과학이 발전하면서 대학병원의 임상의사들(그들은 대개 임상의학 연구자이기도 했음)은 규제할 법규가 없는 가운데, 환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Bedside"를 의사들의 "Laboratory"라고 불렀으며, 질병을 "Nature's experiment"라고 불렀다. 단순한 관찰(Observation)을 넘어 그들은 환자의 질병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실험을 하거나, 환자의 치료와는 상관없는 시술을 통해 의학 지식을 넓히려고 하였다.프랑스생리학자 클라우드 버나드(1813-1878)는 실험의학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고 인체실험에 대한 명확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1865년에 "인체실험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인체에 고통이나 어떠한 종류의 해를 가하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의 복지에 위협을 가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1907년 William Osler는 미국 의사협회 대회에서 "모든 새로운 치료법은 인체실험을 거친 뒤 사용되어야 한다. 단 동물실험을 통해 '절대안전'이 보장된 이후에, 상황에 대해 모든 정보를 받은 환자의 'full consent'를 받은 뒤 인체실험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치료를 위탁한 환자들에게 직접 이익이 없는 한, 우리는 그들을 실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것들이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 환자와 의사를 엮는 신성한 끈은 끊어질 것이다."(1) 자가 인체실험 (Autoexperimentation)의학연구자가 환자나 일반인을 상대로 인체실험 하기 전에 실험자 상황에서 연구대상들의 복지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 정신병원이나 주의 감옥소에서 말라리아를 대량 투입하고 실험용 해독제를 주어 재발율과 부작용을 조사.죄 없는 사람들도 군인 징집이 되어 죽는 상황에서 죄수들이 전쟁노력에 몸 바쳐 일조를 하는 것은 타당하다는 여론.? 의사들이 전쟁에 의학기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우생학 이데올로기와 나치하의 보건의료? 나치하의 인체실험은 우생학(Racial hygiene, or Eugenics)에 근거를 둔 것? 다윈의 진화론과 유전학에 기초한 우생학---“"인류의 발전을 위해 국가가개입하여 나쁜 유전자는 제거하고 좋은 유전자만을 남긴다."”우생학방법론 : 정신병자, 부랑아, 정신박약아, 유전성질환자, 사회 범법자들을국가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 불임시술을 시행한다.? 우생학을 가장 잔인하게 사용한 나라는 독일이지만, 우생학의 선진국은 미국.나치 독일의 초기에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은 1970년대까지도 캘리포니아주에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대규모 불임시술을 시행하였다.(2) 나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와 의료인? 나치주의에 가장 빨리, 가장 많이, 가장 열성적으로 호응한 집단은 의료인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나치주의)는“응용 생물학"이라고 칭송.? 히틀러도 의사들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나는 변호사, 엔지니어, 건축가 없이는 할 수 있지만, 그대들, 국가사회주의 의사들 없이는 한시도 일을 해 나갈 수 없다. 그대들이 나를 돕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실패할 것이다.” -- Hitler --"? 나치는 독일 의사계의 다수였던 유태인 의사들과 사회주의 의사들을 추방하였음에도 불구, 전체 의사 수는 급증.? 의사들의 월급도 급격하게 증가하여서 다른 전문직종의 수입을 훨씬 능가함.(3) 나치독일의 보건의료정책핵심: 사회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내과적, 보다 바람직하게는 외과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해결한다.① 1단계 : 불임법. "유전적 질환이 있는 자손을 예방하기 위한 법률"” 1933년 시물 실험이 실험은 공군의 조종사와 해군의 선원들을 위하여 실험되었습니다. 여기서 실험 대상들은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하였고 오직 화학 처리된 바닷물만 마셨습니다. 이 실험으로 여러 실험들과 같이 많은 희생이 치러졌습니다.⑧ 전염병, 황달 실험 (대표적 연구자 : 발데마르 호벤)이 실험은 여러 질병들에 대한 치료와 관찰을 위해 시작되었고 특히 육군을 위한 도움을 주기 위해 자행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질병과 황달액을 투입 받았으며 결국 다른 실험들처럼 많은 희생을 야기했습니다.⑨ 불임 실험 (대표적 연구자 : 카를 클라우베르크, 아돌프 포코르니, 빅토르 브라크)이 실험에 목적은 의학 발전이나 야전의학의 발달을 위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은 오직 유태인들을 비롯한 나치가 혐오하던 인종들의 절멸을 위해 자행되었습니다. 이 실험의 목표는 최소한에 방법으로 더 이상의 인종 증식을 막기 위한 방법 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약물, X-레이, 거세 방법이 고안되었습니다. 이 실험의 피해자는 자그마치 400,000명이라고 합니다.⑩ 발진티푸스 실험이 실험은 발진티푸스를 황열병, 천연두, 파라티푸스, 콜레라 등을 비롯하여 여러 바이러스의 위험과 치료법, 백신 법을 개발하기 위해 자행되었습니다. 이 실험을 할 때마다 90% 이상이 죽었으며 바이러스를 위한 백신 개발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⑪ 독 실험 (대표적 연구자 : 발데마르 호벤, 요하임 무르고브스키)이 실험은 다양한 독극물에 대한 효능을 실험하기 위해 자행되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엄청난 독이 투입되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으며 더 나아가 독을 간편한 도구에 이용하여 쓸 수 있게 확장되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습니다.⑫ 소이탄 실험이 실험은 화상에 대한 반응과 이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다양한 화상치료제의 효과를 보기 위해 진행되었습니다. 이 실험도 다른 실험처럼 많은 희생을 야기했으며 특히 이 실험의 피해자들은 약의 후유증과 화상의 상처로 고통 받았습니다.⑬ 안락사 실험 (독보적인 연구자 : 카를 차림으로 실시했다.수류탄을 시험하기 위해 인간 목표물을 다양한 거리의 다른 위치에 세웠다.인간을 대상으로 화염방사기를 시험하였다.인간을 말뚝에 묶어 세균방출폭탄, 화학무기, 폭발성 폭탄을 시험하였다.③ 세균전 공격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접종되어 그 효과를 연구했다. 예방접종이라고 위장하였다.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강간에 의해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질병 전파 벼룩을 대량으로 얻기 위하여 수용자에게 벼룩을 감염시키고 세균전의 유용성을 연구하였다.일부 수용자에게는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만두에 집어넣고 급식시켰다. 당시 수용자에게 지급되는 음식이 만두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도자기 폭탄은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 페스트,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④ 기타 여러 실험일부 수용자는 숨 막혀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매달았다.일부 수용자는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동맥(또는 심장)에 공기가 주입되었다.일부 수용자는 신장에 말의 소변이 주입되었다.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고압의 방에 놓여졌다.일부 수용자는 극저의 온도에 놓이어 동상이 걸리게 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인체 살의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로 여성 수용자에게 행해졌다.일부 실험은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일부 수용자는 원심분리기에 넣어져 죽을 때까지 돌려졌다. 인체 수분 함량 비율을 알기 위해서였다.동물의 혈액이 일부 수용자에게 주입되어.
목차1. 생명윤리 22. 생명윤리 논란의 발발 23. 쟁점 - 생명의 시작 24. 인간복제 찬반논란 34.1 철학적 접근4.2 종교적 접근4.3 사회문화적 접근4.4 법률적 접근5. 생명과학윤리 55.1 연구윤리 (과학연구의 자유)5.2 의료윤리6.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생명윤리법) 67. 이슈 77.1 복제양 도리7.2 황우석 사건8. 관련 작품 108.1 영화8.2 소설9. 참고문헌 111. 생명윤리그리스어의 bios(생명)와 ethics(윤리)로 이루어진 합성어. 최근의 [[생명과학]](life science)의 발전과 더불어 생명을 어디까지 인위적으로 조작할 것인가, 개인의 생명존중 등이 문제시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인간가치의 관련을 생각하고 그 윤리를 묻는 분야이다. 유전자조작이나 [[세포융합]] 등 생명과학 혹은 생물공학(biotechnology)의 발전에 따라 종래의 생명관 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근래에는 생명을 어디까지 인위적으로 조작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로 자주 대두되고 있다.2. 생명윤리 논란의 발발20세기 후반, 괄목할만한 생물분야의 발전으로 유전자 변형 콩, 복제 양 [[돌리]] 등이 만들어졌다. 동식물의 복제기술에 위험도를 줄이고, 그 연구결과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파킨슨씨병]], 근육병, 왜소증과 같은 절망스러운 질병을 퇴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로 인해 실험대상이 되는 동식물 생명의 [[독자성]], [[존엄성]]의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전자 조작]]기술이 개발되자마자 생물학적 연구규제운동이 벌어지고, 많은 연구의 제약조처가 뒤따르고 있다.특히, [[인간복제]]에 관한 생명윤리 논란은 인간복제배아가 성공되기 이전부터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모아왔다. 이에, 2001년 3월 유럽회의(EC) 41개 회원국 가운데 과반수인 24개국에서 이미 '배아 분리, 세포핵 이식 및 기타 기술을 통한 인간복제를 금지하되, 오로지 연구 목의 도가 사상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타율적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아래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주체적 능동적 존재이다. 자율성 존중 원칙은 생명 존중이라는 큰 틀 아래 생명의 현세 지속성, 불로불사를 최고 가치로 여긴다. 도가사상의 주 개념인 도(道)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다. 무위사상은 인위의 반대이며,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살고자 하는 자연적 인간관이다.? 유교사상의 생명윤리유교사회에서 인간생명과 인간관계에 대한 지배적 도덕관념은 인간애에 근거한 관계적 개인이다. 그리고 인간애는 가족주의적 관점을 재구성하였다. 대표적 가족주의 유교 사상인 효경은 부모가 남겨준 온전한 신체를 중시하고 훼손없이 물려주는 것을 중시한다. 자손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을 유체를 소실하는 것으로 보고, 훼손으로 여긴다. 대를 이어 유체-유자-유전자의 영속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인간복제와 같은 수단도 기꺼이 수용하였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의학적 의사결정에 있어 신체를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행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뇌사와 장기이식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신체 보전의 측면에서 보면, 뇌사자의 장기처분과 배아의 의료연구 목적 이용 또한 신체의 훼손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적 생명윤리페미니스트들은 연구용 배아복제가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고 상업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임산부를 단지 태아 보유의 그릇이나 운반도구로 보는 것은 여성 모독이며, 태아는 임산부, 즉 여성의 몸의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태아에게는 생명권이라는 기본권이 있으며, 태아는 홀로 존재하기 위한 개체이므로 임산부에 속하는 존재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페미니즘적 접근은 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여성을 인격을 억압하는 남성중심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다는 모순이 있다.4.2 종교적 접근? 가톨릭의 생명윤리생명윤리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은 교회문헌에 의해 통제되며 이것은 주로 성서와 자연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일종으로 보호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생식의 자율권이라는 원리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문화 속에 내재 되어 있다. 세계인권선언 16조에서는 정치적 개입에 대해 인간 삶의 요소를 보호할 뿐, 어떤 기술을 사용해서라도 자연적 생식의 장애물을 극복할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적 정책 보완론복제기술을 사용하고 의미를 가다듬기 위해서는 관련된 실천적, 사회적, 윤리적 공공 잣대로 엄밀히 고찰해야 한다. 그리고 충분한 정보에 입각한 대중적 반응을 토대로 과학 연구에 대한 적절한 자유를 정책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생명윤리와 인권에 관한 보편 선언2005년 제 3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으로 인간에게 적용되는 의학, 생명과학 및 관련 기술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을 사회적, 법적, 환경적 측면에서 다루었다. 각 국가가 생명윤리 분야의 법률, 정책 혹은 기타 장치들을 제정할 때 지침이 되는 원칙과 절차의 보편적인 틀을 제공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생명윤리에 관한 기초적인 틀을 제시한다.? 대중의 비판적 수용과학기술자들의 합리적 사고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해야하는가? 인간은 합리적 존재이고, 합리적인 질문을 받을 때 합리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논란거리를 찾아내고 성토하는 것은 좋은 대안을 모색하는 길이다(문화철학자 카시러(E. Cassirer)). 생명복제를 위시한 과학기술 시대의 생명위기에 대한 철학적이고 윤리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과학자와 같은 한 부류에 모든 과정을 독식시키는 것보다, 과학적 구조와 사실적 관점에서 생명존엄에 대한 책임, 윤리의식을 다각도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4.4 법률적 접근? 인간복제 헌법 기본권 합헌 판결번식할지의 여부와 그 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적 권리를 헌법이 창조한다. 낙태로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면 생명을 창조하는 행위인, 자신을 복제할 권리도 있다. 나 자신을 복제하겠다는 결정은 낙태를 하겠다는 여성의 결정과 같다.? 인간복제 헌법 기본권 위헌 판결유전적으로 동일한 존재를 ? 의료윤리는 [[생명의료윤리]] 와 관련된 윤리 용어 중 영어로 제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의학윤리]]라고도 한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윤리에서는 질병 치료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윤리 문제를 주로 다루며, 대개 [[의학]] 이라는 학문과 관계되는 윤리 문제를 주로 다룬다. 비슷하게 쓰이는 용어로, 생명의료윤리는 생명과 의료라는 두 용어를 복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의료 윤리와 생명 윤리 전반을 다루는 가장 포괄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료윤리의 원칙①자율성 존중의 원칙 : 자율과 인간존엄성을 존중하는 [[자기결정권]] 의 원칙으로 의사는 진료 행위를 할 때 환자의 자율적 의사를 존중하여야 한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은 병중과 치료 방식 그리고 효과에 대하여 충분한와 설명을 제공한 후 환자나 그 가족의 동의를 얻어 치료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즉 환자 스스로 자신의 건강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시술이나 투약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② 악행금지의 원칙 (피해회피의 원칙) : 신체적, 정신적 또는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는 불가해의 원칙이다.③ 선행의 원칙 : 환자를 돕고 배려하여 환자의 건강을 촉진하도록 노력하라는 원칙이다. 선행의 원칙은 악행금지의 원칙을 넘어서 해악의 예방과 제거는 물론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선의 실행을 요구한다.④ 정의의 원칙 : 의료혜택이나 의료자원의 공평한 분배와 차별 없는 치료를 함으로써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다.6.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생명윤리법)생명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거나 인체에 위해를 주지 않도록 생명윤리와 안전을 확보하고 생명과학기술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복지부의 입법예고안은 '' 인간복제금지 '', '' 체세포복제금지 '', '' 이종 간 핵이식 금지 '' 를 골자로 한다. 다만 이종 간 핵이식을 포함한 체세포 복제는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술의 성공을 알리는 것이다. 1997년 2월에는 돌리를 생산한 기법을 응용하여 인간 유전자를 지닌 폴리와 몰리를 탄생시켜 화제를 모았다. 사람에게서 피를 응고시키는 단백질 생산 유전자를 추출해 이를 양의 젖 생산 유전자에 이식시킨 후 기존 DNA를 제거한 다른 암양의 난세포에 이를 치환, 수정란으로 만든 다음 대리모에 착상시키는 방법이다. 이로써 젖에서 [[혈우병]] 치료제를 생산하는 양을 만들었다. 로슬린연구소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복제기술은 동물복제를 이용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었으나, 그 후 동물복제에 관한 실험과 시도들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마침내 인간복제 실험에 관한 논쟁으로까지 치닫게 되어 윤리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는 성인의 체세포를 떼어내 자신과 같은 인간을 만들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언 윌머트는 [[알츠하이머병]] 등 난치병 치료를 위해 인간배아복제 실험에 착수할 것을 밝혔고, 1998년에는 한국 경희대학교 병원팀이 인간 체세포 복제에 성공하였다 하여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인간복제에 관한 윤리문제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열성인자를 가진 사람도 자기 수준에 맞는 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조작]]을 허용할 수 없고, 인간복제로 벌어질 복잡한 문제를 감안하지 않은 채 의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인간이 신의 영역인 생명의 창조를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돌리가 똑같은 실험을 거친 난자 277개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케이스라는 점도 인간복제 실험을 반대하는 논거가 되었다. 이런 논란 가운데 [[유네스코]]는 복제기술 이용에 대한 윤리협약을 마련했고,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도 규제 법령을 마련하게 되었다.? 비판① 생명의 존엄성 훼손실험실에서 사용하는 모든 생명 공학적 자료화된 생명은 그것이 [[배아]] 이거나 [[세포]], 혹은 태아이든 아니면 동물의 그것들이든 동일한 생명 윤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일단 실험실에서 수정된.
목차Ⅰ. 서 론Ⅱ. 본론1. 우리나라 수질관리 현황 및 한계 -----------------------------------------1(1) 우리나라 물 환경 정책의 발전과정(2) 물 환경 정책의 구조(3) 수질현황(4) 현행 수질관리의 한계2. 수질 오염에 따른 영향 ------------------------------------------------6(1) 수질오염 개요(2) 수질오염 사례(3) 우리나라 4대강의 오염현황(4) 낙동강오염 현황3. 지역상수도의 계획과 관리 ---------------------------------------------19(1) 상수처리 방법(2) 지역상수도의 정수방법(3) 상수원의 보호Ⅲ. 결론1. 강을 살리자 - 외국의 성공적 사례 --------------------------------------26(1) 영국의 템즈강(2) 독일의 라인강2. 수질오염 예방 대책 -------------------------------------------------29< 자료출처> ---------------------------------------------------------30Ⅰ. 서 론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산업구조의 변화와 팽창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지만 과도한 인구의 집중화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수질, 토양, 대기환경오염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그간 고도경제 성장위주의 시책을 시행하면서 환경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와 환경보전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그중에서 수질문제는 우리의 생존조건에 필수적인 요소로써 국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국민의 관심이 높고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물을 보전하기 위해서 그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그리고 최근 들어 환경보전에 관한 인식이 급증하면서 기존 정책들로써는 수질오염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 이외에도 환경영향평가 협의, 오염원 설치허가제, 특정수질유해물질 배출시설 설치 제한지역, 오염총량제 등도 대표적인 사전예방정책이다.〈 오염감축정책 〉오염감축정책은 이미 발생된 오염물질을 사후에 정화 처리하는 것을 말하며 공단폐수처리장, 하수처리장 등 환경기초시설을 설치하여 발생된 오, 폐수를 처리하는 것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도시, 도로, 농경지 등 토지이용에 의하여 발생하는 비점오염원은 하천에 대한 오염부하 비중이 매우 높으나 제도적인 조치는 거의 없다.〈 하천환경관리정책 〉하천환경관리는 물이라는 매체를 담고 있는 하천이나 호소의 쾌적성 창출을 위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하천을 단순한 '물길' 정도로 인식하여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직강화하고 콘크리트 호안을 쌓았으며, 고수부지를 주차장으로 이용하거나 복개하여 도로로 이용하는 등 반환경적으로 관리되었다. 이러한 하천을 다시 자연형태로 바꾸어 수생 동, 식물의 서식처를 보호하고, 하천환경을 쾌적하게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하천의 자연정화기능, 친수기능, 생태적 기능을 제고하여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하천으로 만드는 것이 하천환경관리정책이다.라. 수질오염행위 감시 및 단속감시, 단속업무는 법과 제도가 정한 기준과 절차를 이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점검하는 활동이다. 현재 배출업소에 대한 감시, 단속업무가 자치단체로 위임되어 있으며 환경부는 본부에 환경감시기획단과 환경청에 환경감시대를 설치하여 환경범죄에 대한 사법경찰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마. 모니터링 및 평가공공수역의 수질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2004년 현재 1,886개 지점에 수질측정망을 설치, 운영하고 있으며, 오염사고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6개소의 수질자동측정망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지점에 대해서는 주간단위로 측정하고, 그 외 지점은 월 1회 측정하고 있다. 수질조사결과는 매월 관보와 언론매체를 통해 공표하며 인터넷을 통해 수질데이터를 공개하고 있다. 매년 초에는 수질조사결과를 종합하여 환경기준 달성 여부를 평가하고 목표성소 요구량20 ℃에서 5일간 수중에서 존재하는 혼합미생물군에 의해 유기물이 분해 될 때 소모되는 산소의 양으로 유기물의 양을 간접적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BOD가 높다는 것은 그 물 속에 분해 되기 쉬운 유기물이 많음을 의미하므로 수질이 나쁘다는 것을 뜻한다. 강이나 바닷물에 녹아 있는 산소는 물 표면에서 녹아드는 산소와 물 속 식물의 동화 작용에 의하여 공급된다. 오염된 물의 BOD가 물 속에 녹아 있는 산소량보다 많으면 산소가 부족하여 물 속의 생물이 죽게 된다.▶ BOD 측정법두 개의 병에 물을 채취한 다음 하나는 즉시 DO를 측정하고, 다른 하나는 밀봉한 후 20℃의 어두운 곳에서 5일간 방치한 다음 DO를 측정한다. 5일간 방치한 병에도 처음에는 다른 병에서 측정한 만큼의 용존 산소가 들어 있으나, 5일 동안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여 산소를 소비하기 때문에 용존 산소량이 줄어든다. 따라서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는데 필요한 산소의 양, 즉 BOD는 다음 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BOD = (즉시 측정한 DO) - (5일후 측정한 DO)이때, 병을 밀폐하는 것은 공기 중의 산소가 물 속에 녹아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5일간 방치하는 것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여 얼마만큼의 산소를 소비하는지 알기 위함이다. 또한, 어두운 곳에 보관하는 것은 광합성에 의한 산소의 공급을 막기 위함이다.- COD(Chemical Oxygen Demand) - 화학적 산소 요구량물 속에 들어 있는 유기물, 아질산염, 제1철염, 황화물 등은 물 속에 녹아 있는 산소를 소비하는데, 이런 물질이 많이 들어 있으면 물 속의 산소가 없어져 물고기와 미생물이 살 수 없게 되고 물이 썩어 고약한 냄새가 나고 물 색깔이 검게 변하여 물이 죽게 된다. 이런 유기 물질이 들어 있는 물에 과망간산칼륨이나 중크롬산칼륨 등의 수용액을 산화제로 넣으면 유기 물질이 산화된다. 이때 쓰여진 산화제의 양에 상당하는 산소의 양을 나타낸 것을 COD 값이라고 한다. COD 값이 적을수록 오염 물질속적인 방류는 시화호 연안해역을 모두 죽이는 행위이다. 마산, 진해만과 같이 한번 죽은 바다를 재생시키는 데는 호수의 복구비용 이상의 대규모 비용이 필요하고 현재의 기술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제는 그 원인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과 호수내의 오염된 환경공학적 방법을 최대한 강구하여 오염지수를 낮추고, 해양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해양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류방안이 세워져야 하겠다.③ 자연의 재앙 - 미나마타병미나마타병은 중금속에 의한 수질오염의 대표적인 사례로 공장폐수에 섞여 있는 수은이 생물체와 사람의 체내에 축적되어 심하면 마비 증상을 일으키며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이다. 1950년대 초 일본 규슈에 있는 미나마타라는 어촌마을에 하늘을 날던 갈매기들이 갑자기 땅에 떨어지고,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입에서 거품을 내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도 손과 발이 마비되고 통증과 오한, 두통,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이 나타나고, 심한 경우에는 격렬한 고통과 마비증상으로 죽음으로 이어졌다.초기에는 보건당국과 의사들조차도 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였으나 56년 5월 미나마타시의 보건소가 당시의 신일본질소비료회사의 미나마타 부속병원으로부터 특이한 뇌증세를 나타낸 환자 4명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이 단서가 되었으며, 그 후 조사 결과 4년 전부터 그러한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59년 구마모토대학 의학부 '미나마타병 연구반'이 '신일본질소 미나마타 공장의 배수(排水) 중에 포함되어 있는 메틸수은이 어패류의 체내에 들어가서, 그것을 많이 먹은 사람에게서 발병 된다'는 유기수은 중독설을 발표하였고, 63년에는 메틸수은 화합물의 생성과정을 밝혔으며, 오염의 근원이 그 공장이었음을 규명하였다.그러나 이것을 일본 정부가 공해병으로 확인한 것은 68년이었다. 64~65년에는, 일본 니가타현[新潟縣] 아가노강[阿賀野川] 하류 연안에서도 똑같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상류 60km에 있는 공장에서 배출되는 메틸수은에 의한 것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 오염의 진원지-대구공업단지대구 금호강 남쪽 연안을 따라 굳게 자리잡고 있는 곳이 대구공업단지이다. 섬유·염색 공장을 집단배치하고, 시내에 흩어져 있는 용도지역 위반공장들을 집단 수용하여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검단공업단지북구 검단동(檢丹洞)의 경부고속도로변에 위치한 섬유공업 전문화 단지이다. 면적 79만 86 ㎡인 이 공단은 1974년 착공하여 75년 완공하였다. 섬유·의류·조립금속·기계장비제조업 등 32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7,000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제3공업단지북구 노원(魯院)3가동의 금호강 기슭에 있는 경공업 전문화 단지이다. 면적 109만 4000㎡이고 1967년 착공하여 86년 완공하였다. 섬유·의복·조립금속·기계장비제조업·비금속 등 170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1만 7000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비산염색공단서구 비산(飛山)7동의 구마고속도로변에 있는 염색공업 전문화 단지이다. 면적이 79만㎡이며 1974년 착공하여 81년 완공하였다. 단지 내에는 8만 5000t 규모의 폐수처리장과 시설용량 3만 9400kw의 열병합발전소가 있다. 염색업체 위주로 110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1만 4500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서대구공업단지서구 상이동(上梨洞)·중리동(中里洞)의 구마고속도로변에 있으며,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공장들을 집단 수용한 단지이다. 면적 241만 7000㎡이고 제1차 지역은 1975년 착공하여 79년 완공하였고, 제2차 지역은 78년 착공하여 79년 완공하였다. 섬유·의복·조립금속·기계장비제조업 등 355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2만 4000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성서공업단지달서구 성서동(城西洞)의 구마고속도로변에 있으며,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공장들을 집단 수용한 단지이다. 면적 727만㎡이며 제1차 지역은 1984년 착공하여 87년 완공하였고, 제2차 지역은 88년 착공하여 92년 완공하였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