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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난새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
    금난새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1. 클래식 음악이란?클래식은 고대 로마의 계급을 가리킨 라틴어에서 비롯된 말로 ‘잘 정돈된, 품위있는, 영구적이며 모범적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고대 로마 시민은 6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 최상급을 ‘클라시쿠스(Classicus)’라고 하였고, 그 말을 따서 예술상의 최고 걸작을 ‘고전(Classic)'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우리말로 고전주의라고 해석되는 클래식이라는 말은 원래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약10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유럽에서 유행한 문학, 미술, 음악 같은 예술 분야의 공통적인 경향과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음악에서는 대략 바흐가 사망한 1750년부터 베토벤이 사망한 1827년까지의 기간 동안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등의 음악가들이 만든 음악을 뜻한다.그러나 오늘날 클래식이라는 말은 원래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의 고전파 음악을 포함한 더 넓은 범위, 즉 17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음악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이유는 고전파 음악이 이후의 음악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전파 시대에 확립된 멜로디, 화음, 악기 사용 방식 등 음악의 모든 형식이 이후 음악에 교과서 구실을 한 것이다. 그래서 고전파 음악을 포함하여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낭만파, 국민악파 등 19세기 말까지의 서양 음악을 통틀어 고전 음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2. 음악의 미식가 ‘로시니’ : 오페라 서곡로시니는 베토벤보다 22년 늦은 1792년,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29일에 이탈리아 중부의 페사로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호른 주자였고, 어머니는 소프라노 가수였으므로 로시니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면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로시니에게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뛰어난 소질이 보였으므로 교회의 성가대로 들어가게 됐다. 여섯 살이 되던 해 로시니 가족은 불행한 일을 겪게 된다. 열렬한 민주주의자였던 로시니의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이 일로 로시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런 이유로 로시니는 낭만파 음악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에 활동하면서도 고전파에 가까운 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18살이 되던 해인 1810년, 로시니는 베네치아에서 이라는 오페라를 발표, 작곡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로시니의 오페라는 듣기 좋고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고, 그 결과 그의 이름은 순식간에 온나라에 알려졌다. 20대 초반의 로시니는 작곡가뿐만 아니라 지휘자, 극장장으로서도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1813년에는 , 를 공연, 호평을 받았고 1816년 로마에서 공연한 역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로시니는 일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됐다.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절 로시니는 고전파 음악의 형식, 즉 엄격한 소나타 형식을 오페라에 적용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세리아, 세미세리아, 부파와 같은 오페라 장르를 종합하는 공을 세웠다. 1822년 그는 의 주역을 맡으면서 알게 된 성악가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한다. 그 해 비엔나에 방문하여 베토벤을 만난다. 베토벤은 로시니에게 오페라 세리아를 쓰지 말고 더 많은 ‘이발사’를 쓰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후 로시니는 영국 런던을 방문, 영국 왕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고, 다시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했다.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의 감독을 맡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연금과 보수를 받으며 작곡에 몰두했다. 1829년 로시니는 정치적인 색채를 띤 을 작곡, 무대에 오렸는데, 안타깝게 당시에는 큰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인정을 받아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로시니는 한창 나이인 37세에 오페라에서 손을 떼고, 이탈리아 볼보냐로 돌아가 자신의 모교인 볼보냐 음악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만년을 파리에서 지냈다. 늘 고뇌하던 베토벤과 달리 로시니는 낙천적인 성격에 농담을 즐기는 성품이었는데, 그의 작품 역시 주인을 닮아 생기발랄하고 힘이 넘쳤다. 그러나09년 독일 함부르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계몽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모제스 멘델스존이었고, 아버지는 은행가였으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멘델스존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 또한 아마추어 음악가에 영문학과 불문학, 이탈리아 문학을 연구하던 지적인 여성이었다. 멘델스존에게는 4살 위의 누나 파니가 있었는데 그녀 또한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나서 훗날 작곡가가 되려고도 했으니 남매의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펠릭스라는 이름의 뜻대로 행운아로 태어난 멘델스존은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괴테와 절친한 음악가였던 첼터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그 결과 아홉 살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고, 열 살 때는 작곡을 시작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딴 을 썼는데, 이 중 행진곡은 바로 오늘날 결혼식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부유한 환경 덕분에 멘델스존이 입은 음악적 혜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정 전속 오케스트라를 이용하여 마음껏 작곡을 하고 가정음악회를 통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또 수시로 유럽 각국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작품에 큰 도움이 되었다. 멘델스존은 폭넓은 교양과 잘 다듬어진 감성으로 고전파와 낭만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사실 그가 살았던 때는 낭만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였지만, 멘델스존은 모차르트 등 고전파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모두 고전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둔 단정하고 명쾌한 형식을 띠었다. 새롭게 등장한 낭만파보다 전통적인 고전파를 따른 멘델스존의 이 같은 경향에 대해 사람들은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는데, 이 또한 그의 성장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고생을 모르고 편안하게 살다 보니 아무래도 모험적인 것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음악의 내용까지 고전주의의 전통을 따르지는 않았다. 내용만큼은 낭만주의에 멘델스존은 너무 놀라서 피가 얼어붙고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너무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그 종이에 쓰인 글씨는 다름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작, 마태가 전한 복음서에 의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곡’이었다. 이 진귀한 악보를 한눈에 알아보고, 100년 동안이나 묻혀 왔던 이 곡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였다. 이 일로 인해 바흐의 음악은 대중성을 얻게 되었으며, 멘델스존 역시 유능한 지휘자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던 멘델스존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베를린 음악협회의 감독직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낙방의 이유가 다름 아닌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에 실망한 그는 베를린을 떠나 유대인에게 비교적 너그러운 라이프치히로 갔다. 지휘자 멘델스존은 바흐의 음악 이외에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의 숨겨진 곡들을 발굴하여 대중에게 소개하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얼마나 많은 곡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는지 모른다. 1847년 누이 파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그에겐 엄청난 비극이 되었다. 소식을 듣고 상심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여섯 달 만에 결국 누이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4. 체코 민족의 자긍심을 음악으로 드높인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e단조 작품 95 드보르작은 1841년 보헤미아의 넬라호제베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블타바 강변의 자그마한 마을이다. 그는 여관을 겸한 푸줏간집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하곤 했는데, 당시 체코 사람들은 악기 하나쯤은 누구나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17세기 초반 체코를 지배하던 게르만 귀족들이 그들의 여흥을 위해 체코인들에게 악기를 배우도록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드보르작 역시 유년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당시 푸줏간에서 일을 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푸주한 자격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을 외삼촌이 있는 소도시로 보낸다. 어린 드보 주었다. 이듬해 드보르작은 다시 리만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고 음악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16세의 드보르작은 드디어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몇 년 후 졸업 후 드보르작은 호텔과 레스토랑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악단의 비올라 연주자로 일했다. 작곡을 하기 위해 필요한 오선지를 사려 해도 악단에서 주는 박봉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다가 좀더 수준 있는 카렌 콤자크 악단에 들어가게 되지만 생계는 여전히 빠듯했다. 드보르작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결혼을 한 후부터이다. 귀금속 상인의 두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드보르작은 여배우였던 큰 딸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귀족인 백작에게 시집을 가버리는 바람에 드보르작은 실연을 당했고 몇 년 후 자신의 콘서트에 합창단의 알토로 참여한 그녀의 동생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한 이듬해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생으로 발탁되어 5년간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기간에 처럼 체코의 농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코믹 오페라 , 과 네 번째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을 작곡해 일약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그의 명성은 점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특히 영국을 방문했을 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급기야 저 멀리 미국에서도 러브콜을 보내올 정도로 그는 어느새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어느날 미국의 재닛 더버라는 부유한 식료품 판매업자의 부인으로부터 미국 음악의 진흥을 위해 뉴욕에 새로 음악원을 설립하게 되는데 원장직으로 그를 초청받았다. 제시한 대우는 당시 파격적이었다. 연봉만 해도 체코에서 버는 총 연간수입의 세 배에 달하는 1만5천 달러, 하루에 세 시간씩만 학생을 가르치면 되었고, 1년에 4개월의 휴가를 가질 수 있으며, 자유롭게 창작하며 미국 전역에서 몇 차례 연주하기만 하면 되었다. 드보르작은 오랜 고민 끝에 요제프 코바직이라는 제자와 동행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에 그는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과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스케일에 압도되었다. 다음에는 .
    예체능| 2010.06.04| 4페이지| 1,500원| 조회(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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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츠 카프카 변신을 읽고
    변신: 일만 하던 일벌레가 진짜 벌레로 변신했다!당신의 아버지는 안녕하신가요? 이 책을 읽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대사회의 가족, 특히 아버지들을 그린 작품이 아닐까 하는... 현대 아버지상과 비슷한 그레고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이 책 속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하려고 깨어나는 순간 벌레로의 ‘변신’을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이동생이 있지만 사실상 경제적 가장이였던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걱정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벌레로 변신 한 후 직장에 출근을 하지 못하자 직장 상사가 그의 집을 찾습니다. 그레고르를 제외하고는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어서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직장 상사에게 굽실거리며 잘 대해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사실을 알게 되지요. 이후 생계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은 가정부를 내보내고 하숙집을 운영하는데 하숙을 하러 온 사람들은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모두 도망을 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도 ‘변신’을 합니다. 여동생은 그레고르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고, 오빠에 대한 사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그레고르의 변신 후 그레고르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고, 어머니, 여동생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됩니다.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예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건강하고 단정한 모습을 되찾게 되며 은행 수위로 취직을 하고, 천식을 앓아 거동조차 힘들었던 어머니는 의상실에서 일감을 받아 삯바느질을 시작하고, 여동생은 상점 점원으로 취직한 후 더 나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어와 속기 공부도 합니다. 그레고르가 무능력자라고 치부하던 그들이 그레고르의 변신과 함께 같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그가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레고르가 죽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방안에 갇혀 모두와의 단절 속에서 숨을 거두지요.프란츠 카프카의 은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 소통의 상실, 소외에 따른 고독 등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레고르는 말 그대로 일벌레였습니다. 돈만 벌어다주는 일벌레... 그런 그가 진짜 벌레로 변신한 것이지요. 그레고르의 가족들에게 그레고르는 경제적 역할만 수행하는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역할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가족들은 그의 영혼까지 벌레취급하고, 자신의 혈육을 버리고 죽게 했습니다. 즉, 물질만능주의가 가족의 의미까지 퇴색시킨다는 말이죠. 이런 점을 볼 때 참 많은걸 반성하고, 반대로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을 느낍니다. 항상 가족부양의 의무로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기계처럼 반복적인 생활로 힘드실텐데 가족의 일원으로써 너무 나몰라라 한건 아닌지 그런 죄송함과 감사함이 겹칩니다.
    독후감/창작| 2010.04.14| 1페이지| 1,000원| 조회(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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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리소설 `13계단`을 읽고
    13계단 /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전새롬 역 / 황금가지 / 2005 - 작성자:손희정추리 소설을 읽는다고 하면 한마디로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得 없는 심심풀이의 독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다소 무거운 책을 골라보았다. 13계단!!! 이 책은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점과 모순점들을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동시에 추리소설적 재미까지 추구하는 사회파 추리소설류로서 사형제도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를 테마로 삼고 있다. 내용의 뼈대는 누명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가 무죄임을 밝히려는 전직 교도관과 출소자의 사건해결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을 읽은 후 아직도 끊임없는 고민을 하게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살인죄에 대해 인간이 인간을 사형으로 단죄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같은 범죄의 번복을 피하기 위해 사형은 반드시 필요한가? 또한 사형을 집행하는 간수들은 또 다른 형태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이 책을 읽기 전 같았으면 바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사형제도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범죄에 대한 예방효과와 만약 살인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 죄 값을 똑같이 치러야 하니까” 라고 말이다. 이렇게 완고한 생각을 갖고 있던 나를 움직이게 한 이 책 한 권. 무엇보다도 이런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언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죄수들의 상황과 사형집행 과정을 생생히도 묘사한 부분이다. 거기에는 아침 9시만 넘으면 들려오는 저승사자의 발소리, 제발 내 방 앞에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죄수들의 절규,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인한 발작,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을 위한 제사 등 이런 장면이 하나하나 머리 속에 그려지며 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극도의 불안한 상태를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우리나라의 사형제도는 어떠한가? 사실상 12년동안 사형이 나오지 않아 사형폐지국이다. 하지만 ‘부녀자연쇄살인사건’ 강호순이 사형 확정되어 다시 사형제도가 부활하는 것인가? 강호순처럼 개선과 교화가 불가능한 범죄자라면 마땅히 사형제도가 존재해야겠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사형수처럼 누명을 썼을 수도 혹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사형수가 됐을 수도 있다. 이런 부분 때문이라도 심층적 조사, 사형수의 개전의 정을 참작해야 할 것 같다. 다소 무겁고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지만 피해자의 입장뿐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과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독후감/창작| 2010.03.11| 1페이지| 1,500원| 조회(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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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외 금융환경 변화의 특성(4가지)을 설명하고 이 기준에 입각하여 우리나라 금융환경의 변화 과정을 서술하시오.
    I. 서론최근 금융산업은 금융혁명(financial revolution) 또는 금융혁신(financial innovation)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빠르고 구조적인 변모를 진행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이자율, 환율, 조세구조, 경제활동 등의 격심한 변화로 금융환경이 크게 바뀌고 있는데다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완화(deregulation)와 기술발전이 금융산업의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금융기관이 고객에게 상품을 제공하는 과정상의 혁신을 가져왔다.)금융상품면에서의 혁신은 유동성과 수익성이 높으면서 효율적인 위험관리기능이 강화된 신상품의 개발이나 기존상품의 질적 심화를 말하고, 금융서비스 매체(media)의 발전, 금융기관간의 연계체계 강화 등을 통한 다양한 서비스의 결합 등 거래과정의 혁신을 의미한다.이와 같은 금융혁신이 일어나게 한 원인은 크게 적응적 혁신(adaptive innovation)과 기술적 혁신(technological innovation)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적응적 혁신은 금융기관들이 금융환경과 구조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금융상품과 시작영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창출된 것이다. 적응적 혁신은 과거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가 지속될 때에도 이를 효과적으로 우회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존재하여 왔었다.미국의 경우 금리나 업무영역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만든 CD나 RP, MMMF 등의 금융상품과 은행지주회사(BHC : bank holding company)의 설립 운영 등이 그것이다.그러나 적응적 혁신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의 완화, 즉 자유화되고 금융기관간에 업무영역에 대한 제한이 완화됨에 따라 각종 금리 및 가격변동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위험헤이징상품과 금융기관들의 업무영역의 확대와 제휴 등에 따라 결제기능과 투자기능이 혼합된 상품 등 다양한 복합 및 제휴상품 등이 개발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규제완화는 특히 금융산업의 경쟁을 심화시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금융기관들이 경로 자금을 조달할 경우 지급준비금부담, 위험자산에 연계된 자기자본규제 등에 따른 실질적인 자금코스트의 증대 등을 말한다.향후 금융의 증권화는 신금융상품 개발과 금융상품의 가격변동성의 확대 등을 초래하게 될 것이며 이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전문적인 투자기법과 규모 및 범위면에서 경제적인 투자능력을 갖춘 기관투자가의 역할이 증대되는 이른바 금융의 기관화(institutionalization)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금융의 증권화는 또한 대기업의 직접금융시장 이용 증가로 이들의 탈은행화를 재축하고 금융개가 종래의 금융기관중심에서 금융상품중심으로 이행됨에따라 금융제도의 불안정이 증대되고 감독당국의 통제 및 감독을 더욱 어렵게 할것이다.금융의 범세계화 현상과 함께, 정보비용의 하락과 금융혁신으로 금융의 증권화(securitization) 및 탈금융중개화(disintermediation) 현상이 촉진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금융중개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자금의 조달 및 운용수단으로서 증권을 이용하는 직접금융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또한 금융시장에서 신용도가 우수한 대기업은 자금조달에 있어 은행대출보다는 CP, 희사채, 전환사채 및 신주인수권부사채 등 직접금융 의존도를 증가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간접금융을 담당하던 전통적인 상업은행의 기능의 위축되고 있으며, 자금의 수요자와 공급자를 직접 연결하는 투자은행의 기능이 확대되고 있다.탈은행화의 진행으로 금융산업의 고객기반도 변화하고 있다. 금융기관은 중소기업 및 가계 등에 대한 고객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전통적인 중개업무에서의 예대마진 하락에 대응하여 투자자문, 협조융자,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고부가가치 금융서비스 및 수수료수입 비중을 증대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증권화 현상에 대응하여 대출채권의 유동화 등을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고 새로운 증권화 금융상품의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이러한 금융시장의 환경변화는 결국 금융구조의 변화와 함께 금융기관간 차별화를 촉진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변하지 못하였던 상황에서 정부는 특히 은행산업을 경제개발 전략 추구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1961년에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면서 은행의 주주가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이 제약되었으며, ‘부정축재처리법’의 제정을 통해 당시 재벌이 보유하고 있던 시중은행 주식의 대부분을 정부에 귀속시키고 시중은행을 공기업화 하였다. 그리고 1962년에는 ‘은행법’을 개편하여 은행의 인사, 내부경영 및 자산운용에 대한 정부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한편 ‘한국은행법’의 개정을 통해 금통위를 개편하고 중앙은행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은행만으로 정책목표를 충분히 달성하기 어려운 분야에 대응하기 위해 특정 목적을 가진 금융기관들이 신설 또는 확충되었다. 1961년에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위해 중소기업은행을, 1962년에는 서민금융의 지원을 위해 기존의 무진회사를 통하여 국민은행을 설립하였다. 또한 산업은행과 농업협동조합을 개편하고,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 1967년 한국외환은행, 1969년 한국주택은행 등 특정부문에 대한 금융지원을 담당하는 특수금융기관들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서 1971년까지의 기간 중에는 지역금융의 활성화를 위해 10개의 지방은행)이 신설되었다.) 특히 정부는 국내에서의 자본 및 외환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외국차관지급보증법’(1962) 및 ‘외자도입법’(1966) 등을 제정하였으며, 1967년에는 미국의 체이스맨하탄 은행을 시초로 외국은행의 국내지점 설치를 허용하였다.아울러 정부는 환율제도를 개편하고 수출업체에 대한 은행의 자동대출승인제도(1961) 등 은행 및 한국은행의 재원에 기초한 각종 수출금융제도를 마련하고 무역금융의 금리를 대폭 인하하는 등 무역금융 지원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하고 경제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사용하였고, 물가상승을 방지하고 국내저축의 동원을 위해 대폭적인 금리인상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나) 1970년대의 금융억압과 금융다변화정부주도의 경제개발금융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과거 금융억압에 따른 자원분배의 왜곡 등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자유화에 대한 필요성이 국내에서 크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범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외국으로부터 금융자유화 및 개방화 압력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미국 등 자국 금융산업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을 확대하려는 국가들의 금융개방 요구가 표면화되었다.이에 정부는 과거 정부주도의 개발정책에서 탈피하여 시장기능을 중시하는 금융자유화 정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 금융자유화의 충격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빅뱅식의 전격적인 전략보다는 점진적이고 완만한 속도의 자유화 추진전략이 채택되었다.먼저 정부는 상징적으로 은행의 자율경영을 유도하기 위해 ‘은행법’을 개정하고 시중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정부는 인위적인 시장개입을 축소하기 위해 정책금융에 대한 금리우대를 축소, 폐지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각종 규정 및 통첩을 정비하였다. 금융기관의 신규진입도 허용하는 한편 부분적으로 업무영역을 확대하여 시장경쟁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국내 금융기관의 대형화 및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규모 증가 및 점포호가대 등의 자유화 정책도 시행하였다. 금융시장에서는 규제금리의 실세화를 추진하고 금리체계의 합리화를 꾀하는 한편 CP, CD, RP, CMA 등 금리가 자유화된 신종 금융상품을 도입하였다. 또한 국내금융시장의 개방을 추진하여 외국인과의 합작은행 설립, 보험시장의 개방 확대, 외국인의 국내증권 간접투자 등을 허용하였으며, 외환 및 자본거래에 관련된 규제를 완화하였다.그러나 1980년대의 금융자유화 및 개방화의 진행과정은 그 속도가 상당히 느리고 단편적이었으며, 이미 시행된 자유화 조치가 다시 후퇴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사실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행된 단편적인 규제완화는 기존의 다른 규제와 상충되거나 경제여건의 미성숙 등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재규제 혹은 정부의 비명시적 개입을 초래하였다.) 또한 자본시장의정책으로 인해 단기차입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 단기조달-장기투자라는 만기 불일치(mismatch) 문제와 외화차입-원화 대출이라는 통화 불일치(currency mismatch) 문제가 심화되었다. 이중 불일치-만기 불일치와 통화 불일치-는 아시아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나) 은행중심에서 자본시장 중심으로(1998 ~ 1999년)외환위기 이후 은행중심의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은행이 자기 생존을 위해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신용경색현상이 심화되었다. 1998년에 은행부문이 대규모로 기업자금을 회수하자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 기업들이 대체 자금조달 수단으로 회사채를 대량으로 발행하면서 1999년에는 은행대출이 회복되지 않은 가운데 주식시장이 기업자금 조달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1998년 하반기부터 금리하락으로 인해 주가가 상승하자 회사채 시장에 이어 주식시장이 기업의 주요 자금조달 수단이 되었다 외환위기 이전 은행중심적이었던 금융시장 구조가 외환위기로 인해 자본시장 중심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용평가, 시가평가, 회사채 발행 관련 공시제도 등 시장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회사채 시장이 은행을 대신해 자금중개 기능을 수행하면서 한계 대기업의 생존을 연장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다) 은행중심으로의 회귀(2000년 이후)1999년 중반 대우사태 이후 대기업 부실로 회사채 시장이 붕괴된 반면 은행은 공적자금의 투입으로 재무구조 건전성이 개선되었기 때문에 시중 자금은 다시 은행권으로 집중되었다. 회사채 시장이 위축되면 일시적으로 자본시장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금융구조가 다시 은행중심 구조로 회귀한 것이다. 대우사태 이후 투자자의 위험기피 현상으로 인해 회사채 시장이 붕괴하자 정부는 자산담보부채권(ABS), 특히 프라이머리 CBO, 대출담보부증권(CLO) 등과 같은 구조적 Financing 방법을 동원하여 신용경색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다. 문제는 이 관점에서 공적 신용보강을 수반하였기에 재정 투명성을 악화시키고 외환위기 이전과
    경영/경제| 2009.11.12| 18페이지| 2,000원| 조회(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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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역사)모나리자 스마일
    1. 이 영화의 시대, 사회적 배경이 영화는 미국의 한 역사의 일부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1950년대이고 정확히 말하면 영화는 1953년 가을부터 시작하여 1954년 중순까지 1년의 단위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1950년대 미국의 사회는 제1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 경제대공황을 거치고 난 뒤 경제적으로 안정적 시기를 맞는 때였다. 예를 들면 자식이 차를 사달라고 부모에게 조르면 부모는 부담 없이 사줄 정도로 경제의 황금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은 보수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노예 해방은 되었으나 여전히 인종 차별이 있었고, 특히 여성들은 남성의 보호 속에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진주만 등 전쟁을 통하여 여성에 대한 필요가 급증하였다. 그 이유는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가정을 꾸려나가려면 돈이 필요하였는데 그 돈을 여성들이 사회로 나가 일을 해주어야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피임약 개발로 인해 여성들은 더욱더 성(sex)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게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2. 영화의 주요한 내용들영화 내용을 살펴보면 1953년 가을에 뉴잉글랜드의 명문여자대학(웰슬리)에 가을 새 학기를 맞아 새로운 미술사 교수가 임용된다. 웰슬린 대학의 새 학기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단체로 학교 건물로 달려가 학생 대표가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건물 안에 총장이 “누가 배움의 문을 두드리느냐?”라며 새 학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새로 부임한 왓슨 교수는 주위 교수들로부터 학생들을 얕잡아 봐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듣게 된다. 도대체 어떤 정도인데 라는 의문을 가지고 첫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왓슨 교수를 가장 놀라게 한 일은 학생들 전체가 이번 학기에 나갈 교재를 전부 완독하고 와서 왓슨 교수가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먼저 대답해버리며 진도 다 나갔으면 자습시간을 달라고 했던 일이 있다. 이에 왓슨 교수는 림임으로 당황해 한다. 그러나 왓슨 교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수업을 이끌어 나간다. 학생들 중에서 조앤과 베티, 지젤, 아만다라는 여학생들과 왓슨 선생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된다. 학생들은 점차 왓슨 교수가 무얼 원하는지 깨닫게 된다. 학교 측에서는 전통과 계율을 중요시 하는데 왓슨 교수가 자꾸 그것들을 허물고 새로운 것들을 가르치려 하자 다음 재임용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러나 미술사 강의가 인기가 많아지자 총장은 재임용을 하지만 그 대신 조건을 단다. 조건은 학교에서 짠 그대로 수업과정을 나가며 교내 직원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왓슨 교수는 더 이상 대학을 가장한 신부수업을 하는 그런 학교방침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학교 남교수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서나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나 그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재임용을 포기한다. 그녀의 1년 남짓한 교육에 모든 학생들이 모두 남성으로부터의 독립된 여성,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성으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인식 속에 새로운 것을 심어준 것은 사실이다.먼저 조앤의 이야기를 하면 조앤은 웰슬린 대학의 모범생이다. 그녀는 왓슨 교수가 C 학점을 주었을 때 왓슨 교수를 찾아가서 왜 C 학점이냐고 묻자 교수는 너는 다른 사람의 글을 베껴서 쓰고 너의 생각은 쓰지 않아서 C 를 주었다고 한다. 조앤은 이런 평가기준을 당황스러워 하였다. 왓슨 교수는 어느 대학원에 가고 싶냐고 묻자, 조앤은 예일대학에 가고 싶지만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이에 왓슨 교수는 조앤이 다른 학생들보다는 꿈에 대한 가능성이 있는 여성으로 보고 조앤을 돕는다. 그로 인해 조앤은 예일대학에 붙게 된다. 학교 파티에서 교수는 조앤의 남자친구와 춤을 추게 된다. 남자친구는 조앤이 자기와 결혼을 하여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예일대학에 못 간다고 한다. 이에 왓슨 교수는 꼭 예일대학이 아니더라도 이사 가게 될 지역에도 대학원이 전업주부를 꿈꾼다. 베티는 재학중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신혼 초부터 베티의 남편이 바람이 나서 행복하지 않았다. 베티가 이혼을 한다고 하자 베티 엄마는 베티 남편 쪽 가족들을 만나 1년간 보류하자고 했다고 하고 베티에게 그 가족들이 네가 잘하면 받아준다고 하고 또한 남편이 화가 많이 나있다고 말한다. 이에 베티는 누가 화를 내야할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로 이혼을 하고 만다.지젤의 이야기를 하면 진정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지젤은 학교 교수와도 사귀었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는 유부남 의사와 사귀었다. 성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갖지 못한 듯 보였다. 지젤은 베티의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처음 목격했지만 친구를 위해 말하지는 않았다. 이후 베티가 이유 없이 지젤에게 마구 욕을 퍼 부었다. 지젤은 베티가 자기에게 왜 화를 내는지 아니깐 그냥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아만다의 이야기를 하면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아만다는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도 친구의 부탁으로 그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남자친구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그 남자는 약혼녀가 있다며 단순히 즐기고자 널 만나는 거라고 충고한다. 이에 아만다는 연락을 끊어버린다. 아만다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친구와 함께 학교 파티에 온다. 이를 본 아만다는 그 여자가 약혼녀라 생각하는데 그 남자는 그게 아니라 약혼녀와는 예전에 헤어졌고 이 사람은 아만다와 헤어지고 새로 만난 사람이라고 한다. 이에 아만다는 자신이 실수를 하였음을 알고 슬퍼한다. 아만다는 남자친구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실수였다고 말하고 그 여자와 헤어졌다면 두 번의 실수는 하기 싫다며 기회를 다시 달라고 한다. 결국 아만다만은 행복하게 된다.3. 영화 대 역사이 영화 속 이야기와 실제 역사의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소재는 여성의 인권이다. 실제 역사속에서 여성의 참정권 운동은 1830년대에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인에게 있어서 청교도 정신인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이란 의미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되새길 수 있었고 이런 연유로 조직적으로 운동을 벌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의 이런 노력으로 1920년 여성 참정권이 통과된다. 이에 미국 여성 운동은 결과에 만족하고 얼마간 휴식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미국의 1950년대에 들어와서 또 다시 여성 인권 문제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미국의 1950년대는 황금의 시기라고 한다. 전쟁들과 대공황이 끝나면서 미국의 경제가 활성화 되는 시기였다. 이런 화려하고 넉넉한 시대에 여성에 대한 혹은 여성들의 보수적인 생각은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첫째 ‘모나리자 스마일’이란 제목으로 영화 속 중심 주제를 알 수 있는데 왜 하필 제목을 ‘모나리자 스마일’이라고 지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더니 1950년대 미국 여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그녀들의 행복이 무엇인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면 그게 정말 행복한 건지에 대해 모나리자의 웃음을 비유한 것 같다. 그림 속 모나리자는 미소를 짓는다. 근데 그 미소가 정말 행복한 미소인지 그 미소 속에 감춰진 뭔가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이 모나리자 미소의 이중성처럼 이 당시의 여성들 또한 이중성을 갖고 그것을 드러내려고 시도한 시기인 듯하다.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들은 남성들의 보호 속에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길 원했었기 때문이다.둘째 가족의 지위와 사회적 위치가 남편의 직업과 소득에 따라 결정되었던 많은 가족들에게 대공황의 심리적 충격은 심각하였다. 그러나 대공황(1929년~1939년)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력의 증가가 이전의 경향을 가속화시키지는 않았다. 공공연한 적대감에 직면하면서 가정성에 대한 일반대중의 강조가 재연되는 가운데에서도, 기혼 여성의 노동 참여가 계속 증가하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상당수의 가정에서 가치관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남성의 소득이 생계를 유지할 만큼 충분하다 하더라도 기혼 여성들은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냉장고·세탁기·자동차 등과 같은 가정 소로그램의 실제 행정은 주로 여성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구제 프로그램은 흔히 기혼 여성에게 취업을 거부하거나 재봉질과 같은 여성에게 정형화된 직업을 제공하고 여성에게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여성을 차별하였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은 오직 남성만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직업과 구제가 필요하다는 관념에 의거하여 계속 추진되었으며, 이러한 관념은 여성이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은폐하였다.셋째 영화에서 왓슨 교수는 18살 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남자친구가 진주만전에 참전하면서 변하게 되어 헤어졌다고 말한다. 이에 한 학생이 자기네 부모님도 진주만전으로 인해 부모님이 서로 멀어지고 이로 인해 아버지가 새살림까지 차려 이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당시 역사 속에서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였을 때, 단 한 번의 공습으로 전쟁은 미국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에 똑같이 찾아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대규모 동원은 유례없을 정도로 일상생활을 정치화하였다. 여성의 가장 평범한 활동조차 국민주의적 열정으로 가득 찼다. 고기·설탕·휘발유를 배급받았고, ‘승리 기원 텃밭’으로 식량을 보충하였으며, 적십자 혹은 민방위 기관에 자원하여 봉사하였고, 전쟁 채권을 구입하였으며, 소비품의 구입을 가능한 한 연기하였고, 군에 입대하였으며, 유례없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노동력에 편입되었다. 이전의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던 일들이 갑자기 여성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애국적인 일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남성이 제대함에 따라 여성은 공장에서 나오게 되었다.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가정으로 복귀하여 사적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경제활성화와 소비수요의 자제와 더불어, 전쟁이 가져다 준 것은 평시 소비 경제가 제공해 주는 물질적 생활환경을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기대였다. 이때 여성이 해야 할 일은 개인 생활의 질을 두루 살피고 현명하게 구입하며 가족과 가정의 감성적 중심이 되는 것이다.
    예체능| 2009.11.12| 5페이지| 1,000원| 조회(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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