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요리의 역사프랑스를 생각할 때 파리의 에펠탑이나, 세느 강, 베르사이유궁전 만큼이나 유명한 것이프랑스의 음식이다. 그 음식의 유래는 르네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선진국 이탈리아에서 고상한 방법과 함께 다수의 요리사 및 시니한 재료들을 르네상스 시대에 프랑스에 가져왔다고 한다.?14C이전에는 조리시설, 재료, 조리책 등이 미비했다. 심지어는 포크와 나이프도 사용하지 않았다. 15C경에는 유럽요리의 시초 이탈리아 요리를 중심으로 각 지역별로 발전했다. 프랑스 요리 역시 고대 로마 문화의 기술을 빌어 만든 것이 출발점이 되었다.?중세: 꽤 안정된 생활을 했으며 사치와 사교문화가 발달하면서 매일 호화로운 음식 대접이 되었다. 조리사의 생활여건은 좋아졌고, 미식연구에 관한 전문가가 등장했다. 천재적 조리사들이 이름을 알리게 되기도 하였다.?17C: 프랑스 요리의 기초가 형성된 시기이다. 먼저 전반기에는 앙리 4세의 요리장 라바렌이 출현했다. 중기에는 루이 14세가 등장하면서 맛보다는 장식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으로 풍조가 바뀌었다. 이 시기는 프랑스요리의 황금기라고 할수 있다. 후반기에 들어서 18c까지 심한 사치와 낭비로 인한 재정위기가 왔고 시민들에 의해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생활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8C에 캬렘이 등장하였다. 그는 요리를 예술로 여기는 사람이었고 “프랑스요리의 아버지”로 불리울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19C에는 전쟁이 빈번하였다. 유르반과 듀포와즈는 예술, 호화로움을 줄였다. 코스요리를 보급하기도 하였다. 에스코피의 등장은 “낭비없는 품위”라는 명목아래 요리를 근대화시키는데 앞장섰다.2.프랑스 음식문화의 특징1)수용적인 음식문화가 형성하였다프랑스는 여러 다른 민족, 켈트, 라틴, 게르만이 모여 사는 나라이므로 서로 다른 민족들의 고유한 요리가 널리 퍼져 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식탁보다 훨씬 다채로와 졌고그리스, 로마, 이탈리아를 거쳐 16,17세기의 경제적부흥기에 많아졌던 식민지들로부터 많은 식품과 음식의 조리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치즈는 우유를 응고시켜 유장(petit-lait, 탈지유)을 제거한 후 소금을 첨가해 만든 것으로 일반적으로 식사의 맨 마지막 순서에 빵과 함께 먹지만, 요리나 제과용으로도 사용하고, 적포도주의 안주로도 일품이다.치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인류가 소를 키우기 시작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유는 오랜 기간 저장이 곤란하므로 그 보존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치즈이다. 제조기술은 수도원에서 많이 발전되었으며 15세기말부터는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치즈가 프랑스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였다.1) 블르(bleu) 치즈소의 젖으로 만든 푸른색이 섞여있는 치즈로 오베르뉴, 싸브와, 쥐라 지방에서 주로 생산된다. 염소나 숫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는 블르 드 쉐브르(bleu de chevre) 혹은 블르 드 브르비(bleu de brebis)라고 표시되어 있다. 보통 적포도주와 함께 먹으며, 요리의 재료로 샐러드, 수프, 퐁뒤를 만들 때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로끄포르는 비프스텍의 소스를 만드는데 사용된다.2) 까망베르(camembert) 치즈소의 젖으로 만든 노르망디 지방의 특산물이다. 나폴레옹 3세가 까망베르라는 마을에 들렀을 때 맛을 보고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른 후 유명해졌다. 가장 품질이 좋은 것은 VCN(Veritable Camembert de Normandie)이며, 노르망디 지방의 술 깔바도스와 잘 어울린다. 약간 말랑한 상태에서 먹는 것이 좋으며, 너무 무르거나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것은 상한 것이다.3) 꽁떼(compte) 치즈젖소의 우유로 만든 치즈로 프랑스 동부지역인 두, 쥐라, 오뜨손 지방에서 13세기부터 먹어오던 오래된 치즈이다. 식사의 맨 마지막에 먹기도 하고, 그라뗑, 수플레, 샐러드, 퐁뒤등의 요리에도 이용된다.4) 그뤼예르(gruyere) 치즈둥글고 큰 모양으로 구멍이 나 있으며 스위스에서 많이 생산된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쉬 꽁떼, 부르고뉴 지방에서 생산되며,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식사의세 때부터 전해오는 요리이다. 요리사가 실수로 크레페를 만들 때 리큐어를넣었는데, 이 크레페를 먹은 영국 황태자가 맛에 반해 식사에 초대한 수제트 부인의 이름을 따 크레페수제트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그라탱-생선·고기·계란·채소·면류(마카로니 따위) 등 한 가지 또는 몇 가지를 섞고, 조미한 소스를 쳐서 구이접시(그라탱 접시)에 담고 가루 치즈와 빵가루를 뿌려 오븐에서 구워낸서양요리.오븐에서 겉이 누릇누릇하게 구워내며, 재료는 보통 맛이 담백한 것을 사용하고, 데치거나 삶거나 찌는 등의 기초적인 조리 과정을 거치는 것도 있고, 불이 잘 통하는 것은 날것을 그대로 쓰는 것도 있다. 조미용 소스는 전체의 맛을 좌우하므로 특히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닭고기·어패류·면류·채소류에는 화이트 소스를 기초로 한 소스가 적합하고, 수육류에는 브라운 소스나 토마토 소스가 잘 조화된다. 채소는 곁들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만들어서 즉시 먹어야 제맛이 난다. 그라탱은 일반적으로 연회요리로는 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왕새우 그라탱은 볼품이 좋으므로 내놓기도 한다. 그라탱은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오믈렛*오믈렛의 기원옛날 스페인 왕이 수행원을 데리고 시골길을 산책하던 중 배가 고파서 식사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수행원은 근처 누추한 집에 가서 왕의 식사를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빨리 만들어 달라고 독촉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이었던 한 남자는 주방에서 달걀을 풀어 팬에 넣고 익힌 후 접시에 담아 왕에게 바쳤는데 왕은 그 남자의 동작을 보고 "Quel homme lest!"(정말 재빠른 남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후 Hommelest(오믈레스트)가 Omelette(오믈렛)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오믈렛의 다른 유래로 라틴어인 달걀(Ovum)이란 뜻과 달걀구이(Ovemel)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이렇듯 오믈렛은 달걀을 잘 풀어서 우유나 생크림을 넣고 스크램블을 하여 부드럽게 만든 후 럭비공 모양으로 말아서 먹는 요리로 정착을 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주로 은 요리의 기본 재료로 쓰이며, 여러 종류의 사과 주스로 만들어지는 그것은 크게 4종류로 구분된다.-le cidre doux : 3도. 단막이 강함, 후식과 잘 어울린다.-le cidre brut : 4-5도. 고기와 잘 어울린다.-le cidre sec et dem : 설탕을 넣지 않았다. 짠맛이 나는 모든 요리와 잘 어울린다.-le cidre bouche : 일종의 거품이 이는 술로서, 후식, 빵 종류와 잘 어울린다르 푸아레le poire라는 배로 만든 시드르도 있다. 사과 브랜디calvados는 시드르를 증류시킨 술로서 어떤 책에 의하면 1553년 이후로 제조되었다고 한다.칼바도스라는 말은 스페인어 칼바도르Calvador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필립 2세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보낸 무적 함대가 폭풍으로 패하게 되어 배에 싣고 있던 진기한 리쾨르 술을 노르망디 해안에 쏟아넣게 되었고 이리하여 전통적인 칼바도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모든 증류주와 마찬가지로 칼바도스도 식사를 끝낼 때 마신다. 르 트루노르망le trou norman 이라 부르는 술이 있는데 이는 식욕을 더욱 돋우기 위해 식사 중간에 마신다.4) 알자스 (alsace)모든 증류주와 마찬가지로 칼바도스도 식사를 끝낼 때 마신다. 르 트루노르망le trou norman 이라 부르는 술이 있는데 이는 식욕을 더욱 돋우기 위해 식사 중간에 마신다.알자스 평야는 보주 산지와 라인강 사이에 형성된 긴 계곡으로 폭은 25-30km이다. 전통적으로 곡물과 채소를 재배하는 광대한 평야, 포도가 잘 자라는 토질과 과수원, 생선이 많이 서식하는 작은 강 등의 여건들이 알자스를 풍요한 요리의 본고장으로 만들었다.몽테뉴는 알자스 지방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거주보다 식사에 더 염려한다"고 종종 말했다. 요리를 살펴보면 양배추 절임, 알자스산 돼지고기(훈제한 비계, 스트라스부르산 소시지 햄) 등이 유명하다, 또 다른 요리로는 간이 들어간 파이가 있는데, 이 요리는 콩타느Contades 원수의 전속서부터 가자미, 대구, 도미, 가오리, 참치 등이 쿠르 부용(court bouillon : 포도주와 후추로 만든 소스를 친 생선 요리)으로, 튀김으로 또는 철판에 굽거나 그라탱(gratin : 빵가루를 입혀 구운 요리) 등으로 요리된다.해산물로는 갑각류가 매우 유명하고 그외에도 굴, 섭조개, 대합, 성게 등이 있다. 경단 고등, 작은 세우, 게, 가라비 등은 익혀서 먹는다. 또한 브르타뉴의 강에도 생선이 많이 서식하는데, 연어, 곤들매기, 뱀장어, 새끼 뱀장어, 송어 등이 있다. 요즘에 와서는 바다 송어도 많이 잡는데 이것은 살이 통통하고 분홍빛을 띠고 있다.브르타뉴의 육지는 무엇보다도 목축지라 할 수 있다. 새끼양이 특히 많고, 프레살레(pre-sale: 해변에서 기른 양고기)가 유명한데, 이는 조수가 밀려들 때 바닷물로 뒤덮인 목장에서 풀을 뜯는 양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양이 브르타뉴의 유일한 가축은 아니며, 돼지 역시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리에서 주된 역할을 맡고 있고, 소시지, 순대, 파테 등을 만드는 데 주로 쓰이며, 신선한 갈비, 콩팥 등은 구워서 소매로도 많이 팔린다. 소 역시 브르타뉴의 요리에 쓰인다. Kig ha far가 있는데, 이것은 삶은 쇠고기, 양배추, 건포도, 자두를 곁들여 삶은 흑밀가루(fard) 등을 섞어 요리하는 것을 말한다.브르타뉴의 또 다른 전문 음식들로는 낭트 지방의 유명한 버터와 소금으로 간한 돼지고기 요리가 있다. 채소 또한 브르타뉴의 유명한 것에 속하며 특히 양엉겅퀴, 꽃 양배추가 많이 난다. 과일에서는 적어도 플루 가스텔(plou gastel)의 딸기를 빼놓을 수 없으며, 이는 리쾨르 술의 기본 재료로 사용된다.마지막으로 크레프(crepe: 전처럼 납작하게 부친 빵)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브르타뉴의 위쪽 지방의 갈레트(galette: 빵 과자), 브르타뉴 서쪽 지방의 크레프는 메밀 가루, 황밀로 만들며 설탕 혹은 소금을 치고 속에는 초콜릿 등을 넣어서 굽는다. 노르망디 지방과 마찬가지로 이 지방 역시 시도이다.
일본영화감상문내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건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중학교 국사시간부터 비롯된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은 일본이란 가까운 이웃에 대해 무관심 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고등학교때 일본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히라가나 이상을 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 자존심인줄 알았다.그러다가 일본에 대해 지대하게 관심을 갖게 된건 한류붐이 불기 시작한 작년4월 부터였다. 나는 배용준을 좋아하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동영상을 찾다가 일본동영상과 일본드라마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질적인것과 반일 감정이 섞여 조소섞인 대응으로 일관하긴 했지만 일본드라마에 대한 신선함을 감추긴 어려웠다. 한국의 일반적인 캔디스타일이나 신데렐라 스타일의 드라마에 쩔어있던 나에게 다양한 주제로 다가왔던 일본의 드라마는 굉장히 신선했다. 물론 그런 드라마들도 계속보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게 됐지만......그중에서도 가장 신선했던 드라마가 롱 러브레터 표류교실이었다. 지금 내가 버리는 쓰레기들이 미래를 황폐하게 만든다는 어찌보면 황당한 내용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메시지도 담긴 멋진 드라마였다.여기서 알게 된 배우가 쿠보츠카 요스케이다. 작년에 투신사건으로 유명하기도 한 배우이긴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 느낌은 어느 배우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배우이다. 요스케 때문에 그가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관련이 있는 영화 한편을 찍었는데 그 영화가 'GO'라는 영화였다. 요스케를 알고자 본 영화이기 때문에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에서 보여지는 한국인의 모습들이 잘 드러나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재일교포를 표현하는데도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난 이영화를 통해 재일교포에 대해 이해를 하기도 했고 그러한 현실에 대해 충격을 먹었고,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던 나에 대해 반성을 하게 해준 나름대로 나에게는 심오한 영화였다.리정호란 이름을가진 주인공은 마르크스 주의자의 신봉자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조총련계 학교를 다니는 청년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하와이에 가 고 싶다고 해서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게 되면서 재일 한국인이 된다. 그리고 큰뜻은 아니지만 작은뜻을 얻고서는 일본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다. 농구부에 들어가지만 재일교포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팀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화가난 스기하라(리정호)는 모두를 흠씬 패주고 농구부를 나오게 된다. 이를 보게된 사쿠라이는 스기하라에게 반하게 된다. 나중에 친구의 생일잔치에서 자유분방한 사쿠라이를 보게된 스기하라는 끌리게 된다. 스기하라는 농구부에서의 싸움이후로 유명하게 되고 많은 도전자들을 받게 된다. 하지만 권투선수인 아버지 밑에서 어려서부터 권투를 배운 스기하라는 다른 도전자들을 모두 쓰러뜨린다. 그러던 중에 민족학교의 선생님이 꿈인 친구 정일이 지하철에서 같은 재일동포를 농락하는 것을 말리다 칼에 목이 찔려 죽게된다. 이것을 보게되는 스기하라는 커다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중에 사쿠라이의 위로를 받게되고 둘은 섹스를 하려는 찰나에 스기하라는 자신이 재일 동포임을 이야기 해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사쿠라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중국인과 한국인의 피는 더럽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이 일본적인 이름인 츠바키라며 외친다. 그러자 스기하라는 자신은 리정호이며 브루스리의 리자를 써서 너무너무 한국적이어서 이야기 할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헤어면서 경찰을 만나게 되고 신분을 묻는 그를 기절시킨다. 그가 깨어난후 자신에 대해 신세한탄을 하게 되고, 정일의 대학에 가라는 유언을 따르겠다며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사쿠라이가 전화를 한다. 사쿠라이의 전화에 학교로 간 스기하라는 소리친다. 자신이 누구냐면서, 그리고 어릴때부터 자신만의 원을 깨부스겠다고 하며 사쿠라이를 껴안으며 해피엔딩의 결말을 맺게 한다.“원밖에는 손을 넣으려는 녀석들이 엄청나게 많아. 그정도 쯤은 내가 붙어주지”① 원안의 나이 대사는 항상 재일교포라는 열등감 아닌 열등감 때문에 항상 자신을 보호하고자 자신의 원을 그려 아무도 그 이상 침범하지 못하게 만든 원을 스스로 부숴버리겠다는 스기하라의 의지이며 그깟 민족 때문에 사랑을 놓치지 않겠다는 스키하라의 각오이자 결단을 잘 나타내주는 대사이다.② 세익스 피어의 대사“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그 이름은 바뀌어도 아름다운 그향기는 변하지 않는 것을.....”이 대사는 스기하라가 비록 재일교포란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그 속모습은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인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이 영화속 정일과 정호가 항상 고민하고 정일이 죽기전 정호에게 해주고 싶어했던 말이었다.③ 스기하라의 분노“난 누구지? 대답해? 왜 사람들은 함부로 재일이라 부르는 거지? 재일이 무슨뜻인지 알기나 해? 재일이란 언젠간 이나라를 떠날 사람 즉 외지인이란 뜻이야!”이것은 스기하라가 사쿠라이와 오랜만에 재회하면서 그동안 속안에 담아놓았던 말들을 풀어놓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에게 이름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인지, 자신의 본질은 가만히 있는데 왜 사람들의 잣대에 그렇게 불리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동안의 분노가 표출되는 장이었다. 나는 이장면에서 스기하라의 진짜 아픔을 느낄수 있었다. 이것은 사쿠라이에 대한그동안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오면서 일본에게 느꼈던 일본에 대한 느낌을표출한 대목이다.④ 나의 연애사“이것은 나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다.”초반 스기하라가 농구부 사람들을 때리면서 민족,혁명, 등의 어려운 단어들을 열거하면서도 그 후에 이것은 나의 연예에 대한 이야기라 못을 박는다. 이것은 재일이란 어려운 주제를 연예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다루겠다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연애사라는 주제의 한가지로 재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내가 이영화를 고르지 않으려 했었던 이유는 너무나 일본영화에서 한국적인 이미지를 찾으려 한 것은 아니었나에 대한 고민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래도 충분히 일본적인 색채를 많이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폭력성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영화를 볼때 똑같은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영화일지라도 그 느낌이 다르다는 점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폭력적인 살인을 피가 나고 죽이는 장면에 많은 비중을 둔다. 하지만 일본영화에서는 피가난후 그에 보이는 비쥬얼적인 요소를 많이 중시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본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요스케 때문에 본 I.W.G.P라는 드라마에서는 잔인한 살인이 너무나 많이 등장하며, 그것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살인한다는 것이 정말 저렇게 쉽고 별것 아닌 상황에서도 일어나나?하는 의문과 함께 살인에 대해 내가 처음에 느끼던 놀라움이란 감정이 사라지고 무덤덤 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드라마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본 사람이 많은 배틀로얄이란 영화에서도 느끼게 된 점이었다. 배틀로얄은 자신이 살기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을 다룬 영화이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활을 싸서 죽이고 독극물로 죽이고, 전기로 감전시켜 죽이고, 도끼로 찍어서 죽인다. 칼이나 총으로 죽이는 것은 잔인하지 않다. 이처럼 일본영화의 특징은 죽음을 너무나 소를 잡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이유.......“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이란 영화를 본 후의 느낌은 황당함이었다. 화려한 헐리웃 영화나 잔잔한 멜로를 기대했던 나에게는 큰 실망을 안겨주는 영화였다. 하지만 레포트를 쓰기위해 “그 주인공들이 왜 그랬을까?" 라는 의구심을 풀기위해 다시한번 생각해본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은 그리 당황스럽기만 한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이란 영화와 ”낯선여름“이란 소설 사이에는 이어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선같은 것이 있다. 물론 극중이름과 소설주인공들의 이름은 같다는 공통점은 있다. 하지만 인물의 성격은 뭔가는 다르다. 보경의 남편이 영화에서는 결벽증을 갖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섬뜩한 인물이었다면 원작에서의 남편은 너무나 무료해서 벗어나고픈 충동을 일으킬지라도 따뜻하고 자상한 보경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이란 시는 원작보다는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준다. 시에서의 돼지는 주인공 효섭을 표현한 것인지 무언가에 쫒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 네명의 주인공을 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건조하면서도 메마른 느낌을 잘 전해주는 것 같다. 영화는 너무나 사실적인 느낌을 많이 준다. 특히 우리 일상에서는 주인공일 수도 있는 사람들....영화에서는 엑스트라인 사람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또 효섭이 화분속의 벌레를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은 영화속의 효섭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시속에서의 돼지이기도 할 것이다. 혼자 반사회적 행동을 하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효섭은 그 화분속의 벌레이자 우물에 빠진 돼지일 뿐이다. 빠져서 허우적 거리지만 그 누구도 쳐다보기만 할뿐 구해주려 하지 않는다. 돼지는 멱따는 소리로 울어보지만 그는 퉁퉁부은 얼굴로 우물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일상속에서의 효섭은 사라지지만, 아무도 그 돼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일상속의 한면을 장식하는 볼거리인 것이다. 감독은 이 부분을 많이 강조하는 것 같다. 시에서 가장 눈에 띄였던 것은 자화상이란 시를 인용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우물로 통해본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물은 자신이 밖을 쳐다 볼수도 있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수도 있는 공간이다. 한번쯤 우리는 우물에 서서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하려는건 아닐까? 일상으로의 변화를 갖자는 뜻은 아닐런지...... 보경역시, 일상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무료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남편에게서 탈출하고자 효섭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효섭이 탈출구가 될 수 없었던 걸로 보여진다. 그것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보경이 마지막에 신문을 읽고 그 신문을 바닦에 깔고 베란다. 끝에 서있는 장면일 것이다. 보경을 여느때 처럼 신문을 펼쳐읽는다. 그것은 하루의 일과인 것이다. 하지만 보경은 그 신문을 밟으며 베란다 밖으로 걸어나간다. 나는 여기서 보경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낄수 있었다. 이영화의 인물들은 사이코 영화에서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의 모습이다. 남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숨겨진 욕구와 이중성들......모두 꾸며진듯한 영화속 주인공이 아닌 하루하루 똑같은 삶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나 또는 주위사람들을 표현한 영화이다. 영화와 원작이 다른점은 아무래도 낯선 여름이 가진 이미지를 한층 극대화 시켜 모두들 꿈꾸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간절할 수밖에 없음을 보
1. 첫 번째 풍경 (혼인의 사회사)우리가 생각하는 결혼과 오래전의 결혼은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혼인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이 나중의 사회의 일부분을 이룰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삼국시대에는 혼인에 몇 가지 양상을 보인다. 그 첫 번째가 신분내혼이다. 삼국시대는 신분사회였으므로 혼인에도 당연히 혼인 당사자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 골품제가 운영된 신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혼인은 동일 신분내의 결합을 원칙으로 했다.두 번째는 족외혼이었다. 삼국의 성립 초기에는 원산 일대에 세력을 틀고 있던 동예에서는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점은 구구려 전반기의 계루부 왕실이 연나부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고 있다는 점과, 백제의 부여씨 왕실이 진씨나 해씨 왕비를 맞아들이고, 신라의 김씨 왕들이 박씨 왕비를 맞고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족외혼이 실시되고 있지만 지형적 여건이나 교통 그리고 고대인들의 정서나 전통 등을 봐서도 어느 정도의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앞의 예시에도 소나 부부만이 군을 달리하는 지역사람간의 결합일 뿐 다른 이들은 일상적인 접촉이나 교류가 가능한 같은 지역 혹은 인접한 지역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세 번째는 근친혼이다. 이것은 예외적이지만 성골 왕실의 경우 극히 한정된 인척 내에서 신분내혼을 하였기에 자연히 극단적인 근친혼이 이루어졌다.네 번째는 취수혼이었다. 이것은 나도 거의 처음 들은 내용이라 많이 놀랐었다. 취수혼은 형이 죽은 경우 동생과 결혼을 하는 풍습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중국의 고서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인줄 알았다.혼인하는 연령을 보면 불과 10년 전만 해도 20대 중반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나, 현재는 30대 초반까지 늦어졌다. 그리고 여자 나이가 몇 년 아래인 것인 통념인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나이 15세가 되면 장정으로 인정되었다. 여자도 이 나이가 되면 성년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여 진다. 평강공주의 경우 16살이 되자 혼인을 시키려고 했다. 이 사례로 볼 경우 여자는 15~1 개인적 사랑보다는 사회적 임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이전의 혼인풍습을 보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도 있으며, 사라지게 된 것도 있다. 재가 금지등의 풍습은 여성을 압박하는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성의 도덕성만을 문제 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면서 액땜을 하는 풍습등은 지켜져도 좋을 풍습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자주 볼 수 있던 풍습이었는데 요즘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2. 두 번째 풍경 (노비의 사회사)두 번째는 노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의 전반부는 노비와 노예에 대한 미세한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나 중국등지에서는 노비라 부르는 반면 고대 그리스 등지에서는 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노예를 생산의 의미까지 담고 있는 ‘계급’적인 성격이 강하다. 고대 생산력은 노예에서 왔다고까지 비약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동양사회 또한 농업에 많이 의존했다. 오히려 농업에 의한 의존도는 서양보다 더 했을 것이다. 서양노예제 사회의 경우에는 부족한 농업노동력을 대부분 외지의 포로 노예제에 의존했으나 동양사회에서는 용작민과 같은 몰락 농민들이 그 역할을 대신 하게 됨에 따라 노비의 경제적 비중이 서양에 비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를 사회생산의 한 축을 이루는 ‘계급’으로 볼 경우, 고대 서양 노예제사회의 ‘노예’와 동양사회의 ‘노비’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라 할 수 있겠다.노비가 생길수 밖고,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권력을 가진 기득권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토지가 있고, 사병을 이끌거나 할때 그것을 이루는 원동력은 노동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비를 이용해 자신의 기득권을 늘리게 되는 것이다.노비를 만드는 방법은 세습되는 것도 있었다. 노비는 종모법에 따르기 때문에 아버지가 상민이라도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은 노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쟁포로를 노비로 삼는 것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보호하는 관계이었지만 노비가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가법에 의해 사형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국가에서는 형법은 왕이 다스리는 일이라 금지했지만 암암리에 이루어지기도 했다.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노비도 사람인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나 저항이 일지 않았 을까라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저항들이 조선 후기에 많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이전에도 노비들이 저지를 난이 있었으나 조선후기 들어서면서 빈번해지고 과격해졌다. 혹은 자신의 주인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자신들에게 과세와 노역들이 심해지면서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노비가 사회적으로 지위가 향상된 것은 사회경제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부터이다. 이미 많은 노비들이 도망간 상태이므로 국가에서는 부역이나, 조세 등을 걷을 방법이 필요해서 노비들의 신분상승을 이루어 주려 한다. 물론 전 노비들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 일부 노비들에게 한정된 일이긴 하다. 재력이 있는 노비들은 면천이 되었다. 아니면 군역의 의무가 없는 이들의 입속을 권장하기 위해 군공면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노비들의 신분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각이 생겨나면서 노비해방의 물고가 트기도 했다. 이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신분제도가 폐지되면서 제도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3. 3번째 풍경(촌락의 사회사)한반도에서는 수십만 년전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나라라는 국가가 생겨나게 된것일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작은 단위의 촌락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움집생활을 하고, 농기구를 제작하고, 농경생활을 하며 촌락을 이루게 된 것이다. 신석기인들은 하천이나 강가에 10~20호 정도의 움집들을 이루며 촌락을 이루었다. 이때까지도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이룬 것이 아니었다.벼농사가 시작되게 되면서 계급사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논농사 뿐만 아니라 밭농사도 하기 시작패의 구조가 그 당시에 없었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보’라고 이웃하는 다섯 가호를 서로 감시하는 제도를 두었다.우리 집안 시조를 찾아 충청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신평이씨’라는 성이 흔하지 않아 그곳을 갔을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의 거의 대부분이 ‘신평이씨’를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동성촌락은 언제 생겼던 것일까? 향촌지역이 적극 개발되어 촌락이 형성된 것은 재지사족이 이족의 신분에서 분화되어 사족화 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퇴계 이황 가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외곽으로 이주하여 새로 터를 잡았다. 이렇게 외곽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읍치와 그 주변지역은 이미 발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성촌락으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 딸 , 친손, 외손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가 일반화되지 않고, 사위가 데릴사위를 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기 때문이다. 성씨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 때문이다. 여러 성씨가 한마을을 이루며 살다보면 좀더 열등한 성씨들이 먼저 물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연스레 같은 성씨끼리 마을을 이루며 살게 되는 것이다.일제시제가 되면서 그들은 향촌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촌락을 개편하게 된다. 군을 대폭 축소하고, 면리를 통합하거나 폐합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향촌 권력과의 갈등을 유발하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면장을 대폭 교체하게 되었고, 이는 촌락에 있는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촌락재편을 통해 공동체적 향촌자치구조가 파괴되자 역으로 민족적인 정체감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촌락재편은 일본의 한국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쓴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촌락은 시대의 구미에 맞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역시 권력을 가지기 위해 발전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노동력과 토지를 늘려 호민 층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영토를 찾아 개발하였고, 자연스레 자신들의 성진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왕이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기에는 사회적인 신분이동이 활발했으면 농민들 사이의 빈부격차가 심해진 시기였다. 어려운 농민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려 하였다. 이런 저항활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유망과 도적활동이었다. 이 시기에는 도적이 전설만이 아닌 주위에 흔한 것들이 되었고, 그들은 익명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잡기 힘들었다. 장길산은 의적은 아니었으나 그 사회가 도적을 많이 생산할 수밖에 없는 혼란스런 시기였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조선후기의 명화적은 횟불을 들고 불을 지르는 공격방법을 주로 쓰는 도적이었다. 지배층부패와 탐욕으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중 일부는 명화적이 되었다. 명화적은 부잣집을 선택하여 공격하였다. 이러한 명화적의 의식세계는 당시에 씌여진 문학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명화적은 가을과 겨울사이에 활동의 주를 이루었다. 집단적으로 활동하면서 좀더 조직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발각될 경우 토설하지 않을 것을 명시하는 일련의 규칙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명화적은 이후 활빈당이라는 보다 발전된 형태로 이어진다.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쌀을 수탈하기 시작할 때 활빈당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빈민구제’라는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부잣집이나 양반관료, 장시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홍길동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다. 이들의 하는 일 세 가지는 돈안주면 집에 불 지르고, 유부녀를 겁탈하고,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비록 이들이 ‘빈민구제’라는 좋은 목적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행동들은 별로 의로운 행동이며 미화될 수 없는 범죄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이들의 잘한 일을 뽑으라면 항일정신일 것이다. 이것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의병운동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은 칭찬해주고 싶은 점이다.5. 다섯 가지 풍경 (일제시기 대중문화사)우리가 흔히 다.
자기분석작성일: 3월 22일나는 내가 녹음한 걸 들으면서 많은 불안을 느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중에 가장 많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 진로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심리학과를 가야한다고 결정을 내렸지만 새로운 학과에 적응을 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과연 나에게 맞는 학문일까라는 고민을 해왔다. 그리고 여기를 나와서 내가 무엇을 할수 있을지도 고민이었다. 지금쯤이면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매진할 나이도 됐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때문에 나는 불안을 느끼고 있는것이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거나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해야할지 조차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편입에 대한 미련을 자꾸 가지게 되는건 아직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는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대학생활에 많은 환상을 가져왔다. 그래서 재수를 하면서까지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대학에도 가지 못했고 꿈꿔왔던 대학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꾸만 편입을 꿈꾸는 것 같다. 내가 꿈꿔오던 대학생활과 현실과의 괴리감이 나를 더욱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또 학과의 적응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한 학과에 스스로 실망할까봐 지례 겁을 내고 있는것이다. 또 내면에는 학과에서 낙오돼서 적응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도 한 것이다. 나는 과제같은 것에 미리 조바심을 많이 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음에도 그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 진다. 그래서 숙제에 대한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마도 모든 것에 조급한 마음을 갖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나 돈에 대한데 언급을 많이 한 것은 내가 요즘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 부모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으니까 아끼지 않는데에 대한 죄책감이랄까? 요즘에 내가 돈에 너무 얽매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내가 녹음중에 가장 많이 보이는 정서는 외로움인 것 같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두 서울에서 생활하고 친구들끼리 자주 모이고 하다보니 그에 대한 소외감을 많이 느껴왔다. 진로에 대한 불안감과 학교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데 친한친구들과 부모님이 떨어져 있다보니 혼자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녹음 한걸 들으면서 내 자신에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녹음한걸 들으면 “내가 왜 이러지...나는 꼭 이렇더라” 하면서 자기 비하를 많이 하는걸 발견했다. 지나치게 너무 내 자신의 탓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모든일에 대한 원인을 다 내탓으로 발견하려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내 탓일수는 없는건데......나에 대한 자존감이 많이 부족함을 알수 있었다. 모든 것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려고 하는 태도는 빨리 고치려고 노력해야겠다. 나는 내가 무의식 중에 자신을 너무 낮게 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못났기 때문에 불안하고 힘들어 하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점은 내가 하루빨리 고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사소한 일에라도 내 자신을 소중히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 같다. 학교불만이 많은것에 대해서는 과에서 행사하는 모임에 자주가서 선배나 다른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선배나 교수님들에게 도움을 구해서 진로에 대한 방향을 구해보는 것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줄일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그래서 좀더 학교에 대한 친근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여야 겠다. 그럴려면 진로의 방향을 하루빨리 정하는게 좋을 것 같다. 나는 걱정만 하지 결정을 해야할 부분에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잘 보인다. 진로의 문제도 자료를 수집하고 되도록 내가 가진 모든 조건과 상황을 토대로 내가 갈수 있는 최선의 방향을 정해서 하루빨리 목표를 정해야 할 듯 싶다. 그리고 친구들의 관계에 대한불안이나 외로움은 일차적으로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것 같다. 난 내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며 벽을 치는 것도 같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간다면 그리 불안해 할 것도 없는거 같다. 내가 친구들에게 연락을 자주한다던가 만남을 많이 가져서 친구들에게 쳤더 벽을 허물어야 될 것 같다.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항상 누군가가 먼저 다가오거나 조언을 해주거나 하기를 기다린다. 내가 먼저 한번도 다가선적이 없는것 같다.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손을 먼저 내밀 용기와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겠다. 어느 수업에선가 행동을 바꾸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 한 것 같다. 앞으론 적극적인 행동으로 그런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야겠다. 또한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갖는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는 항상 조급함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특히 과제같은 것은 하루하루 계획에 맞게 조금씩 해야겠다. 특히 계획을 세워서 나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제나 한꺼번에 그걸 하려는 욕심 때문에 조바심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리의 시간을 가짐으로서 나를 여유롭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자유연상이 나의 모든 무의식의 세계를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잘 알수가 있었다. 숨어져 있어서 잘 안보이는 고민을 볼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속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라고 방치해 두었던 문제도 있었다. 그것이 내가 가진 고민이지만 아닐것이라고 믿고싶었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문제는 대부분 내 마음가짐에서 나온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치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이것을 계기로 한층 성숙한 나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