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회화의 흐름한국회화는 선(線)의 예술이다. 선의 표현은 다양하다. 그 표현방법에는 선을 표현하는 필법(筆法), 먹으로 면을 처리하는 묵법(墨法), 빛깔로 생생함을 돋우는 채색법이 있다. 한국회화는 이런 표현방법 외에도 구도 및 회화사적 지식을 갖추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한국회화는 도구의 사용에 세 번의 큰 흐름을 겪었다. 첫째, 선사시대에는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바위 위에 새긴 암각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둘째, 역사시대에는 종이와 붓, 먹으로 그린 수묵화가 유행하였으며 셋째, 근대 이후에는 유화가 도입되었다. 암각화는 시베리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된 국제적인 표현매체로 이른 시기에 이런 국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종이와 붓, 먹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은 중국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일본, 베트남 등지로 퍼져나갔는데 이는 한자문화권이라 부르는 영역으로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양화의 영역권과 궤를 같이 한다. 유화는 18세기에 서양화가 전래된 이후 20세기에 들어서서 고희동(古羲東 1886~1965) 등 우리나라 화가에 의하여 그려졌다. 한국회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를 파악해야 된다. 한국회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 조선의 회화 등 시대마다 그 취향이 다르고 장르마다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번잡한 것을 피하고 여유로운 것을 선호하며,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럽고 질박한 것을 좋아하고, 날카롭고 강한 것 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것을 사랑하며,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은유와 해학의 멋을 즐겼는데 이러한 정서가 회화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밑바탕에 흐르는 한국적인 특징은 분명히 감지된다고 볼 수 있다.선사시대의 회화선사시대의 회화는 암각화와 청동기에 묘사된 선각표현 등에서 볼 수 있다. 암각화는 150여개 나라에서 산재되어 있을 정도로 범세계적인 선사유이루었다.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회화삼국시대에는 붓에 먹을 찍어 채색하는 붓 그림으로 매체가 바뀌었다. 붓은 기원전 1세기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의창 다호리고분에서 발굴된 점으로 보아 원삼국시대부터 붓을 사용했던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실제로 제작된 작품으로는 4세기의 고분벽화에서 비로소 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고분벽화의 시작은 만보정 1368호고분과 같이 4세기 전반 무덤 안의 벽면을 들보와 기둥만을 그린 데서 출발하였다. 들보를 경계로 벽면은 현세, 천장은 내세로 인식되었다. 즉, 무덤 안은 현세에서 내세로 연결되는, 차원을 초월하는 공간인 것이다. 4~5세기에는 주로 풍속도가 그려졌다. 풍속도는 생전에 누렸던 부귀영화와 권세, 각종 생활상, 그리고 신선사상의 내세인 선계로 오르는 의식장면이 묘사되었다. 이들 벽화는 집안과 평양부근에 집중되어 있다. 집안지역의 고분벽화는 점무늬의 의상, 아랫부분을 경사지게 나타낸 동작의 표현 등 고구려적인 특징이 짙은 반면, 평양 부근의 고분벽화에서는 중국식의 의상, 사실적인 표현 등 요동지방 고분벽화와의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5세기에는 372년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내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벽화의 주제도 장식문양도로 변하게 된다. 연화문 그림이 주로 많이 그려지는데, 연꽃을 통하여 서방극락에 태어나길 바라는 연화화생연의 의미가 담겨있다. 7세기에는 도교가 성행하면서 고분벽화는 사신도가 중심 주제로 그려진다. 이의 등장으로 고구려 고분벽화는 세련된 형상에 역동감이 강해지고 다채롭게 표현된다. 당나라와의 빈번한 회화교류를 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솔거, 홍계, 김충의 같은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화가들의 이름을 접할 수 있다. 수준 높은 회화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가 현재 남아있는 자료로 보살들의 아름다운 자태는 당시 불교회화의 사실적이고 이상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려시대의 회화고려시대에는 산수화의 비중이 커졌다. 고분벽화에서는 배경이 작게 표현되었던 반면 고려시대에 와서는 산수가 제 크기를 찾아 크게 그려졌다. 곡선미와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성에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연처럼 단순하게 처리한 배경에서는 깊은 종교성을 감지할 수 있다.조선시대의 회화조선시대는 일반회화가 가장 발달한 시기이다. 일반회화란 신앙이나 종교와 같은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 아닌 감상용 그림을 말한다.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5세기에는 북송의 이곽파와 남송의 마하파 화풍이 중심이 된 북종화풍이 영향을 미쳤고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의 화풍이 일파를 이루며 시대를 풍미했다.유교국가의 체제와 제도가 정립된 16세기에는 회화에서 조선적인 특색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명대 절파 화풍이 전래되는 등 국제적인 문화 수용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지만, 이 또한 이내 조선화 되어 산수화의 넓은 공간감과 질박한 필치, 영모화의 정겹고 따듯한 정서 등에서 조선적인 취향이 물씬 풍기는 화풍이 유행하였다.1592년 임진왜란부터 1636년 병자호란까지 연이은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의 문화는 암흑기로 들어서게 된다. 숙종 때에는 전쟁으로 상실된 궁정소장의 회화들을 사대부가 전하는 회화들을 임모하여 채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반면 전란 직후 복구사업에 사찰의 기술자들과 노동력이 동원되고 그 보상으로 사찰의 재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불교미술은 오히려 융성하게 발달하게 된다.18세기 영. 정조시대에는 침체를 겪던 일반회화가 다시 성장에 힘입어 다양하게 전개된다. 실경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가 유행하고, 영모화, 초상화 등에서 사실적인 표현방식이 발달하며, 명나라 및 청나라의 남종화풍이 풍미하게 된다.19세기에는 김정희를 중심으로 간일한 표현과 이념성이 강한 것이 특징인 청나라 문인화풍이 득세한다. 그리고 현란한 기량으로 풍부한 회화성을 발휘했던 장승업을 끝으로 조선시대 회화는 막을 내리고, 그의 제자인 안중식과 조석진을 경계로 근대화단으로 넘어가게 된다.1)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 호는 춘곡(春谷). 1908년 한국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 오늘날 진 이전에도 붓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이 증명되는 붓이 출토되어 몽염이 최초로 붓을 만들었다는 설은 많은 이견을 가지고 있다.중국 신석기 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도자기(채도)에서 붓의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또 1932년 은허 발굴에서 도자기의 조각에 "祀"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붓의 흔적이 확실하여 은나라 때에 이미 붓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오늘날 중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붓은 1954년 호남성 장사시에서 전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붓대가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붓대의 길이는 18.5cm , 털의 길이는 2.5cm, 직경은 0.4cm,이며 붓털은 질이 좋은 토끼털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호북성 강릉현 황산에서 한나라 무덤에서 나온 붓이 있다. 이 붓에는 붓털에 먹의 흔적까지 역력히 남아 있고 현재의 붓의 구조와 다름이 없다.붓의 명칭도 각각 달리 불리었다. 초나라에서는 율(律), 오나라에서는 불률(不律), 연나라에서는 불(拂), 진나라에서는 필(筆)이라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붓이라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진나라 이전의 붓은 대개 자연에서 재료를 취해 만든 원시적인 붓의 형태였고, 오늘날처럼 동물털과 대나무로 만들어진 붓은 진 이후로 만들어졌다. 붓은 송나라에 들어와 모든 학문과 예술의 발달로 문인, 묵객의 필수품으로 등장하였다.명, 청시대에 와서는 붓의 제조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붓이 단순한 서화 용구로서 뿐 아니라 하나의 공예품으로 각광을 받게 되어, 붓대의 장식과 재료에 대나무 이외에 도자기, 상아 등이 사용되고 거기에 화려한 조각, 채색 등 다채로운 장식을 넣어 조형의 아름다움을 갖추기에 이른다.4)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 중심주제로 각기 네 벽에 나누어 그려짐. 이들 사신도가 주검을 보호하는 지킴이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주작 : 주조라고도 한다.중국 설화 등에서는 청룡 ·백호·현무 등과 함께 하늘의 4신을 이룬다.한국에서는 풍수용어로 사용된다. 이들 4신은 하늘의 사방을 지키는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작은 남 쪽의 수호신이다. ·자.삼의 7개 성좌가 있는데, ‘묘’성좌는 호랑이가 다스린다고 한다. 일설에는 ‘삼’성좌가 백호였다고도 한다. [시경]은 백호를 의로운 짐승으로 보고 있는 반면, 《인원비광경》은 흉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호를 그린 백호기는 천자가 거둥할 때 사용되었다.청룡 : 상서로운 징조로 간주된다.창룡으로서 백호 ·주작·현무 등과 더불어 하늘의 사신의 하나이며, 동방의 수호신으로 삼고 있다. 그 밖에 태세의 다른 이름으로 목성을 일컫는다. 《회남)》의 천문)에는 천)은 태세보다도 더 존귀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또 말 잘 타는 사람을 청룡이라고도 한다. 또한 연.나 ·교·산·도 등 말의 머리에 붙여 쓰기도 한다. 고대에서는 사신과 결부시켜 가운데를 황(黃)으로 하고 동 ·서 ·남 ·북에 각각 청(청룡) ·백(백호) ·주(주작) ·흑(현무)의 네 가지 색을 배치했다. 그 모양은 한나라 때 유품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만주 지안현 퉁거 우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고분벽에 걸린 사신도에서도 볼 수 있다.또한 일반적인 동방의 용은 '물'을 상징하지만 특이하게 사방신으로서의 청룡은 하늘을 상징합니다.현무 : 풍수지리설에서 북방의 신.북쪽 방위에 있으면서 수기를 맡은 태음신. 동방의 청룡, 남방의 주작, 서방의 백호와 함께 4신의 하나이 다. 거북과 뱀이 뭉친 그림으로 현무를 상징한다. 《초사》 원유의 보주에 “현무는 거북과 뱀이 모인 것 을 이른다.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고 이르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라고 한다.”고 하여 현무의 모양과 그 이름을 붙인 까닭을 말하고 있다. 옛날에는 흔히 무덤 속에 이 같은 그 림을 그렸는데, 평남 용강군에 있는 고구려 고분 쌍영총의 널방]에서도 이 같은 벽화)가 발견되었다.현무는 사방신중에 가장 인지도가 없는 동물입니다. 다만 벽화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 머리가 두개입니다. 꼬리는 뱀, 머리는 용, 등은 거북, 뭐 이런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5) 북송대의 이성(李成)과 곽희(郭熙)에 의해 이룩된 화풍으로 금(金)
Ⅰ. 머리말식리(飾履)는 장식신발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구려의 금동식리의 경우 발바닥에 스파이크(spike)가 달린 신발로서 고분벽화에서 그 사용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금동식리는 실용적 성격을 띄고 있다. 하지만 식리총 출토 금동식리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식리총의 금동식리의 형태를 보면 발뒤꿈치가 각이 져있어 피장자를 눕혔을 때 불편함이 없이 되어있다. 또한 바닥부분을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는데, 이는 부장품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식리총 식리의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더러, 대부분 제작기법에 치중되어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신라의 대외교섭으로 형성된 육각문의 원류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신라의 대외 교섭신라는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의 동남에 편재한 경주를 중심으로 세워진 부락집단의 소정치체제(小政治體制)가 발전한 국가이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중국과의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였던 지리적인 약점으로 인하려 고구려, 백제에 인하여 국가의 형성이 비록 늦었지만 신라는 일단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후에는 성장을 거듭하여 외국의 문물 섭취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신라의 대외교섭의 양상은 5~6세기의 형성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의 내재된 부장품들로 알 수가 있다. 적석목곽분은 지하에 무덤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다시 그 바깥을 봉토로 마무리한 무덤으로 축조되고 나서 목곽이 부식함에 따라 적석이 침몰되어 도굴의 위험이 없어 부장품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들 부장품 중에는 고구려, 백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색적인 유물들이 보인다.5세기 고분 부장품의 외래요소들로 볼 때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중국을 비롯한 중국 너머의 서역 및 북방문화권과도 교섭을 보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신라가 서역적인 유물을 접할 수 있었던 직접적 간접적인 통로는 여러 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식리총의 식리에는 서역적인 요소도 반영되었지만 또한 중국적인 요소도 확인되어 중국과 신라의 교류를 살펴보는 것은 식리총의 식리에 반영된 외래 요소의 원류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근동에서 시작한 문양이 신라에까지 유입되기 까지는 북중국, 그 중에서도 북위(386-534)의 역할이 중요했다. 북위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예술을 부흥 시켰으며 그 대표적 예가 운강, 용문, 동황석굴이다. 이 왕조는 북방유목민족출신인 선비족 일파인 탁발족(拓拔族)이 세운 국가로 북중국을 통일하여 당시의 동서무역로인 비단길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이전부터 간접적인 교역이 선행되어왔던 사산朝이란과 4세기초부터 직접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중국의 비단을 원했던 로마인들은 비단의 댓가로 서역의 이색적인 물건을 공급하였다. 이러한 교역을 통해 이란미술이 중국에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금동식리에 반영된 이란의 요소가 대부분 북위의 것과 연결되었던 사실을 볼 때에 이란미술의 영향은 북위를 거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Ⅲ. 금동식리 문양 특징과 구성① 구조적 특징 식리의 크기길이32.7cm최대넓이10.7cm발바닥 폭8.5cm높이97cm식리총 금동식리는 일제시기 1924년에 금령총과 함께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당시 파손이 있었으나, 지금의 형태로 복원이 되었다.그 크기는 과 같다.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얇게 누금된 3장의 동판으로 이루어졌는데 신바닥에 1장의 동판이 쓰이고 신등은 좌우 각각 1장씩의 측판으로 세워서 이루어 졌다.② 문양의 기법금동식리의 신바닥판과 등판에는 입체적으로 육각문, 화문, 귀신상, 인면조신문, 주두조신문, 괴어, 용, 쌍조문, 연주문 등이 표출되어있다.신 바닥판의 문양발등 문양(右) 발등 문양 (左)문양을 새기는 주출기법은 주조와 타출을 결합한 고도의 기술로 중국에서도 그 예는 드물다. 주출기법은 주조기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얇은 금속판을 놓고 도구를 이용해 타출하여 문양을 만드는 기법이다.③ 문양의 구성신바닥판의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테두리문양에 두줄의 연주문이 구획되어있고 그 내부에 중앙에는 육각문 9개가 나란히 배열되어있다. 그리고 양 옆으로는 반 육각문이 8개 배치되어있다.등판의 문양은 신바닥판과 동일하며, 육각문안에 문양만 다르다.금동식리의 문양은 모서리에 원 장식이 있는 육각문을 골격으로 하는데, 그 원형은 별자리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육각문 내부의 신수들 역시 천계에 속하는 존재로 상서의 상징이거나 통천(通天)의 기능을 하는 동물이었다. 여기에 역시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문양인 연화문과 상서의 상징인 운기문이 더해졌다. 식리총 금동식리의 전체문양 구성이 여러 문양의 단순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문양으로서 독립된 의미를 지녔음을 시사한다.이러한 정교한 문양은 다른 금동식리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른 식리들은 대체적으로 간단한 문양이 반복적으로 시문되어 있기 때문이다.Ⅳ. 금동식리의 이란적 요소식리총의 금동식리에는 몇몇 문양의 원류나 그 문양을 새긴 기법덕인 면에서 이란적인 요소가 발견된다. 4장에서는 이란미술에서 보이는 육각문(龜甲文)이 신라에 반영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① 육각문육각문 또는 귀갑문이란 거북이의 등껍질 무늬와 유사한 6각형의 문양을 말한다. 장수의 상징인 거북이 등껍질 무늬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장수와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 같다.② 육각문의 유형육각문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뉜다.첫째, 단순히 육각형의 무늬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이러한 유형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시작하여 널리 쓰였다.둘째, 육각형 내부에 각종 동식물 문양을 넣은 것으로 사산朝이란에서 유행하였으며, 이란미술이 중국의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친 문양으로 보인다.③ 육각문의 형성 배경위에서 언급한 내부에 문양이 수용된 예 중에 가장 오래된 시기는 2-3세기 무렵으로 고대도시국가인 팔미라(Palmyra)의 유적인 벨 신정에서 찾을 수 있다.팔미라 벨 신전의 천정을 여러 기하학적 문양으로 분할한 다음, 이들 내부에 벨신(神)을 비롯한 신들과 상징물을 배하하는 수법을 썼다. 천정의 중앙을 큰 원으로 구획하고 그 내부를 다시 아홉 개의 육각형으로 구획 지었다. 이와같이 육각문의 내부에 다른 문양이 수용된 것이 벨신전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이 팔미라의 육각문과 거의 흡사한 양식의 예가 사산朝이란의 금속기, 건축, 직물 등에도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이것은 사산朝이란이 팔미라의 육각문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앞서 신라의 대외교섭을 말하면서 중국과 서역의 교역이 비단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고 언급하였다. 육각문의 수용에는 다른 어떤 공예품보다도 직물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중국에서는 이란 원류의 육각문이 5세기이후에 전래된다. 그 최고의 예는 炳靈寺 169동의 西奏 建弘三年銘(420년)三尊佛坐像의 본존이 입고 있는 상의에 그려진 육각문이다. 그런데 병령사의 이 육각문에는 근동 및 이란의 육각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부의 특징이 보여 주목된다. 이는 6각형이 꺾이는 부분에 연결점이 배치되는 것으로 이란 원류의 중국 육각문의 공통된 특징이다.이러한 형식의 육각문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걸친 북위의 석굴사원에서 많이 보이게 된다. 대표적으로 운강석굴, 동황석굴 등에서 육각문을 볼 수가 있다.이란원류 중국 육각문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 할 수 있겠다.⒜ 시대적으로 볼 때, 내부에 다른 문양이 수용된 육각문의 최고의 예는 420년 서주시대이지만 대체적으로 5세기말의 북위시대의 운강, 돈황 등의 석굴사원 및 고분미술에서 성행하였다.⒝ 육각문 내부에 포함된 문양이 중국적인 것으로 변용된다.⒞ 이란에서는 찾을 수 없던 형식으로 육각문과 타 문양이 혼용되어 사용되며, 6각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화문이나 원으로 구성된 연결점이 배치된다.④ 그 외 육각문이 장식된 유물신라의 이란원류의 육각문을 보자면, 대표적인 예가 식리총의 식리이고, 그 외에 유물로는 황남대총 북분 출토 은제잔과 부부총의 금제태환이식(金製太?耳飾)을 좋은 예로 들 수 있다.황남대총 출토 은제잔은 식리총 금동식리의 문양구성과 가장 유사한 문양 요소를 가지는 것으로 육각문의내부에는 각종 동물문이 주를 이루는데 인물상이 장식된 점이 특이하다. 육각문의 꼭지점이 원으로 장식된 점은 식리총 금동식리의 육각문과 같으나 육각형의 변이 직선으로 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두가지 예를 제외한 나머지 문양구성이 보이는 유물은 태환이식인데, 이식의 넓은 고리 부분을 문양구성으로 장식하였다.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의 협소함 때문인지 식리총의 금동식리와 같은 복잡한 문양구성은 보이지 않고 단순한 화문이 주를 이룬다. 누금세공기법으로 표현하여 육각형과 그 내부의 문양이 모두 금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목차]⑴ 온·습도⑵ 조도⑶ 생물 피해① 훈증법Ⅰ. 훈증의 방법Ⅱ. 훈증제Ⅲ. 훈증조건Ⅳ. 훈증효과의 판정② 종합유해생물관리(Integrated Pest Management : IPM)Ⅰ. IPM이란Ⅱ. IPM의 제어법⑷ 대기오염? 참고문헌 및 출처다양한 환경 하에서 보존되고 있는 문화재를 박물관·미술관 시설에서 장기간 보존하기 위해서는 문화재의 주위 환경 인자를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부적합한 환경은 대량의 문화재를 단기간에 열화시킨다. 일반적으로 문화재의 보존방법으로는 문화재에 발생한 열화의 진행을 보존처리에 따라 직접 억제하는 방법과 문화재 주의 환경을 정비함으로써 급격한 열화를 예방하고, 열화의 진행을 완화하여 억제하는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후자의 목적에 맞추어 환경을 연구·정비하는 것을 보존환경학(Preventive Conservation)이라 부른다. 보존환경을 구성하는 인자 중에는 온도, 습도, 광(光), 공기 오염 등의 대기환경과 식물, 해충, 곰팡이 등의 생물환경, 자료의 취급 혹은 관리를 담당하는 관리자의 숙련도, 관리 체제의 미숙으로 인한 화재, 도난 등의 인적 환경과 홍수, 태풍, 지진 등의 천재로 인한 자연환경을 들 수 있다.⑴ 온·습도문화재를 보관 및 전시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온·습도 조절인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하절기는 고온다습하고 동절기에는 저온건조하므로 습도 변화량이 크기 때문에 이를 잘 조절하여 적온·적습 환경하에 두도록 세심한 배려와 주의가 요구된다.표 1 . 유물의 재질에 따른 전시환경 기준표작품재질온도습도조도비고금속 및 석재20±2℃45%이하150~250Lx유기질 부착시 200Lx이하목재(철기)20±2℃55~60%100~200Lx도자기,유리20±2℃45%이하250Lx굽지 않은 토기 : 150Lx이하서양화(유화)20±2℃50~55%200Lx이하유리부착 경우 300Lx 가능종이,판화20±2℃55~60%80Lx이하고서, 고판화 50Lx동양화 및 수채화20±2℃55~60%50~100Lx가죽 등 자연재받는 조도량은 100,000 Lx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1회 전시허용기간 = 100,000 Lx ÷ (사용조도 × 1일조명시간)예를 들면 : 150 Lx × 8시간(하루 전시시간) = 1,200100,000 ÷ 1,200 = 83일상기의 계산상으로 150 Lx에 하루 8시간을 전시를 한다면 83일간 전시를 할 수 있다.51234*************4*************1222324?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실 환경 조사 (측정일 : 2010.0113)번호습도(%)온도(℃)조도(lx)자외선(㎼/㎠)유물 재질측정 위치112.221.5117.80.1전시실 입구211.421.730.60지류전시케이스 앞310.92104650.1전시실 통로41121.218.10지류511.521.572.10.1도자기611.721.211.90목재711.521.580금속 및 목재811.821.31810.4전시실 입구914.420.5149.90목재1013.3212760.7전시실 통로1113.418.135.70전시실 입구1213.519.2105.70.1직물1313.119.420.70지류1413.119.830지류1512.919.721.20상아1611.720.27.10도자기1711.920.429.30목재 및 도자기1811.620.31300.4지류1911.220.33.40도자기2012.220.117.30지류2111.420.117.30사진2210.724.34.70전시실 통로238.924.78.50.12411.820.14373.8외부 이동 통로평균11.9625107.58873.8040.24166*************833303132번호습도(%)온도(℃)조도(lx)자외선(㎼/㎠)유물 재질측정 위치258.520.514.21.4전시실 입구2613.120.31600지류2711.419.3710직물2811.418.862.80목재2911.319.374.10지류3011.218.365.80석재3111.718.611.70지류321218.5132.90.1전시실 입구338.520.5142.21.4외부 이동 통로평균11.0이고, 구제는 이미 발생된 해충을 죽여 없애는 일이다. 일반적으로는 예방보다 구제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예방과 구제는 차의 양 바퀴와 같은 것으로 어느 쪽을 무시해도 해충 방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문화재 해충의 방제에 있어서 예방과 구제의 두 가지 방법으로부터 여러 문화재에 적합한 방제 대책을 고려하여 적용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특히 문화재 해충의 경우, 해충이 발생한 후에는 둘도 없는 귀중한 문화재에 많든 적든 피해가 발생된다. 가능한 한 구제보다 오히려 예방조치에 의해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이상적이다.가해 생물을 예방하는 방충제와 방미제 사용한다. 또한 가해 생물을 방제하기 위해서는 훈증법을 사용한다.최근에는 이러한 약제사용을 피하고 예방적으로 생물학적 피해의 확대를 예방하고 좋은 환경을 유지하는 종합유해생물관리(Integrated Pest Management : IPM)이란 방법이 제창되어 실천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① 방충제표 4 . 방충제 종류에 따른 특징방충제 종류효과특징장뇌 (Camphor)방충대량 사용시 장뇌독 현상나프탈린(Naphthalene)방충장시간 대량 사용시 하얀 옷감 등이 붉은 빛을 띔파라디클로로벤젠 (P-dichloro)방충완전한 밀폐공간에서 20g/㎥ 정도로 충분장뇌와 혼용시두 용제가 용해되어 문화재를 오염DDVP (Dichlovos)방충철을 녹슬게 하거나 안료나 염료를 변·퇴색문화재로부터 30cm 이상 떨어져서 사용살충자극적인 냄새가 남귀중한 문화재가 해충에 가해되지 않도록 사전에 방충제를 사용하여 예방 조치를 강구해 놓는 것도 중요하다.그림 1 . 방충·방균제가 들어간 쇼케이스? 방충제가 사용된 서울역사박물관 사례그림 2 . 방충·방균제서울역사박물관에서 사용하는 방충·방균제(제품명 ‘보존’)는 천연약재 추출물을 사용하여만든 물질로 살균, 살충력이 있다. 0.5평 미만의 공간에 2개월 가량 효과가 있다. 유물의 색도 변화는 없으나, 냄새가 지독하여 유물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② 훈증법Ⅰ.에서 살충, 살균할 때에 유효하다. 염화비닐(PVC)관등으로 틀을 만들어 그 속에 훈증대상을 넣고 두께 0.2~0.3mm의 PVC시트로 이중으로 싸서 훈증한다. 훈증제의 누출인 배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잔류가스 흡수장치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마지막으로 감압훈증은 밀페도가 높은 용이로 감압하여 훈증제를 도입한다. 따라서 약제의 재질 심부로 침투하는 것이 뛰어나다. 감압 훈증장치는 서적이나 소형문화대의 살충, 살균에 극히 유효하다. 단, 감압에 따른 온도 변화에 주의가 필요하다.Ⅱ. 훈증제문화재의 훈증에 사용하는 훈증제는 재질에 영향이 적으며 살충, 살균효력이 있는 약제를 선택한다. 현시점에서 살충에는 취화매틸(methyl bromide),불화살프릴(sulfluoride),살균제에는 산화에틸렌(ethylene oxide)와 취화매틸(methyl bromide)의 혼합제, 포름 알데히드(formaldehyde)를 문화재의 생물열화방제에 사용할 수 있는 훈증제로 쓰며 목적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Ⅲ. 훈증조건문화재의 훈증조건은 훈증목적, 기온, 훈증시간, 훈증용적 등을 고려하여 결정한다. 예를 들면 문화재의 살충을 목적으로 하였을때 기온 25도, 훈증시간 24시간이라면 훈증제는 취화매틸(methyl bromide)또는 산화 에틸렌(ethylene oxide)와 취화매틸(methyl bromide)의 혼합제를 사용량 35~50g/㎥ 이상으로 유지한다. 기온이 10~20도일 때에는 약의 양을 배로 한다. 살균을 목적으로 할때 기온 25도, 훈증시간 24시간이라면 훈증제는 산화에틸렌(ethylene oxide)와 취화매틸의 혼합제의 사용량 100g/㎥를 표준으로 한다. 훈증중의 공간균일가스 농도를 60g/㎥ 이상으로 유지한다. 단, 기온이 10~20도일때 훈증 시간을 2~3배로 연장한다.Ⅳ. 훈증효과의 판정훈증을 실시할 때는 반드시 훈증효과의 유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훈증의 살충효과의 판정에는 쌀바굼(sitophilus oryzae) 또는 밤빛쌀도둑(t이상 지금까지의 방법을 계속 사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때문에 피해가 발생하고 나서 대처하는 ‘처치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예방대책중심’의 사고방식으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 IPM이다. 원래 농업분야에서 농약에 내성이 강해진 해충에 대해 고민하면서 생겨났다. 처음에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농약이라도 좀 지나면 그 약제에는 효과가 없어져버린다. 그렇게 되면 새롭게 좀 더 강한 약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해충은 이 살충 능력을 또 다시 뛰어넘게 된다. 이와 같은 인간과 내성을 가진 해충과의 싸움으로 점점 약제는 강하게 되어 환경오염과 인체에의 가해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사태에 위기감을 가진 FAO(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은 1965년 충해방제의 전문가를 로마에 집결시켜 토론한 결과 새로운 충해방제 방법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IPM의 기본 개념이라 할 수 있다.1) 복수의 방제법의 합리적인 통합2) 해충밀도의 경제적인 피해 허용 기준 이하로 감소시킬 것3) 해충개체군의 시스템 관리문화재의 분야에서도 관리가 일시적으로 편한 방법이라는 이유로 안이하게 유해한 화학약제가 다량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그 후 문화재의 활용을 저해하고 문화재를 다루는 직원의 건강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를 들어 충해만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과거에 비소나 염화수은, DDT등 여러 가지 유해한 약품을 처치하여 약품에 오염된 문화재는 현재 박물관에서 직원이 직접 만질 수도 없는 그 독성이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Ⅱ. IPM의 제어법IPM에 있어 5단계의 효과적인 제어방법이 있다.1) Avoid(회피한다)미생물의 먹이가 될 수 있는 수원, 쓰레기, 식물, 먼지 등에 대하여 점검이 필요하다.미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이 발생하기 때문에 전시관 내의 청소는 물론 외부 환경에서 낙엽이나 물, 쓰레기통과 같은 곳도 점검하여 최대한 곤충이나 곰팡이들의 번식은 억제하여 이들을 유인하.
唐三彩- 색채의 향연 -[목차]들어가는 말 --------------------- 1쪽.1. 당삼채의 연원 --------------------- 1쪽.2. 당삼채의 제작 --------------------- 1쪽.3. 당삼채의 예술성 --------------------- 2쪽.① 정취있는 문양장식 --------------------- 2쪽.② 다양한 장식수법 --------------------- 2쪽.③ 독특한 품격의 조형 --------------------- 2쪽.④ 도소와 회화의 유기적 결합 --------------------- 3쪽.맺음말 --------------------- 3쪽.참고문헌 및 출처 --------------------- 4쪽.[들어가는 말]당대에는 여러 가지 공예미술이 모두 크게 발전하였으며 정교한 양식을 형성하였다. 많은 수의 공장(工匠)이 공예품의 제작을 위한 풍부한 경험과 숙련된 기술을 축적하였고 저명한 작가들도 창작에 참여하였다.당대의 공예미술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당삼채(唐三彩)이며 당삼채 도용의 출현으로 도자예술의 발전은 최고봉에 달하였다.중국고대 도자예술 가운데 대대로 세상 사람들의 애호를 받은 당삼채가 나오게된 시대적인 배경과 조형, 장식, 기법 등을 본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1. 당삼채의 연원당삼채는 독특한 미술도자로서 그 발전의 역사는 중국 도자공예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 기원은 아주 오래되었다.일찍이 삼천여 년전 상주시대(商周時代) 중원(中原)의 선주민들은 원시청자를 번조하였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대에는 자기와 시유도기 제작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후한(後漢, 25~220년)대의 장인들은 짙은 녹색·옅은녹색·밤색·황토색 등 네 종류의 단색의 시유도기를 만들었다. 종류로는 일상용품·동물룡, 그리고 정자와 누각 등의 모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의 장인들은 각종 유색금속원료(有色金屬原料)의 성질에 대한 인식과 화학 기술에 관한 이해와 응용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북위 태화 8년(484년)에 조영된 산서성 대동시 교외의 사마금룡무덤(司馬金龍墓)에서는 많은 녹유도용(綠釉陶俑)과 황유도용(黃釉陶俑)이 발견되었는데, 색이 잘 배합되어 조화를 이루고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아름답고 고풍스럽다. 그러나 유약은 색깔이 단조롭고 두텁게 입혀져 유동성이 없었다. 북조시기에는 시유도기가 빠른 속고로 발달하여 중국의 북방지역에서는 고령토를 원료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백색 또는 황록색 유약에 녹색을 섞어 자연적으로 흘러 스며들게 하여 맑고 투명한 광택이 나게 하였다. 이때의 사유도기가 바로 당삼채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다.수대(隋代, 581~518)에 들어와 중국의 시유도기는 한차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의 유도(釉陶)는 위와 같은 선조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녹(綠), 백(白) 또는 황(黃), 남(藍), 자(?), 흑(黑)등 여러 가지 색깔의 기본적인 유약을 동시에 같은 기물(器物)에 섞어 발라서 화려하고 기이한 ‘당삼채’로 발전하였다.2. 당삼채의 제작당삼채의 성형과 소성 등 제작과정은 일반적인 토기의 제작방법과 같다. 즉 태토를 채취하여 필요한 광석재료를 배합하고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정제한 다음 형태를 만들어 그늘에 말린 뒤 소성하면 단단한 그릇으로 완성된다.당삼채는 빛나고 화려한 색채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 만큼 유약을 바르는 것은 삼채의 생산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며 삼채생산의 성패여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당삼채는 백색 태토위에 황(黃)·녹(綠)·갈(褐) 또는 홍(紅)·남(藍)·흑(黑)색 등의 색깔이 있는 유약을 입힌 것인데, 이러한 유약의 주요 원료는 석영, 연분(鉛粉)과 각종 색을 내는 금속산화물이다. 당시의 장인들은 각종 금속산화물이 색깔을 내는 것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수요에 따라 일체(一彩)·이채(二彩)·삼채(三彩)·다채(多彩) 등을 자유자재로 소성하였다.3. 당삼채의 예술성당삼채의 종류는 다양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이는 당시 사회생활이 모든 면을 포함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성격에 따라 실용기(實用器)와 명기(明器)로 나뉜다. 또한 종류에 따라서는 생활용구(生活用具), 인형(俑), 장난감의 세종류로 나눌 수 있다.당삼채는 생동감 있게 만들어졌으며 형식도 다양하다. 삼채장인들은 당삼채의 특유의 장식예술언어와 조형예술언어를 통하여 뚜렷하고 생동감있는 예술형상을 사람들의 시작에 반영하여 한없는 아름다움을 주었다.① 정취있는 문양장식당나라 시대는 중국 중세 공예사의 중요한 전환기이다. 이때는 생산력의 발전과 국력의 부강 및 문화교류로 사람들의 사상과 의식이 한층 개방되어 이러한 풍조가 삼채의 장식소재(裝飾素材)에도 방영되었다. 식물을 주요 장식무늬로 삼기 시작하였으며, 자연과 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 많아 짙은 생활의 정취를 풍긴다. 그러한 것들은 상주시대 이래 조심스럽고 정적이며 신비스럽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벗어나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롭고 쾌적하며 활발하고 친밀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아름답게 활짝 핀 꽃, 자유로이 날아 다니는 새와 나비와 벌들은 모두 각종 삼채의 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중국 전통적인 민간미술의 심미적 이상을 충분하고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그림 1. 삼채 가운데 천왕용은 한 몸에 여러 가지의 장식수법을 해놓은 좋은 예이다.② 다양한 장식수법삼채의 장식수법은 다종 다양하며 풍부하고 다채롭다. 주로 각화(刻花), 인화(印花), 첩화(貼花), 획화(劃花), 퇴소(堆塑) 등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당삼채의 인화기법은 주로 도장같은 도구로 찍은 것으로 삼채에 애용되었으며 첩화는 물레 성형한 둥근 기물에 많이 장식되었다. 삼채의 첩화는 먼저 문양을 성형한 뒤 이것을 기벽의 장식부위에 붙였다. 획화는 유약의 색상에 맞춰서 삼채의 평면상에 장식되었다.삼채 장인들은 창작과정에서 이러한 장식수법으로 보상화, 연꽃, 연화유소(蓮花流蘇, 연꽃 모양 술 장식), 포수(鋪首, 귀신모양의 열굴) 등의 장식용 무늬를 이용하여 삼채에 입체감과 리듬감을 주어 문양장식의 사실성을 더욱 강조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채의 시각효과도 보강하였다.③ 독특한 품격의 조형중국의 전통적인 도자예술이 역사상 뚜렷한 특징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도자기의 독특하고 품격있는 조형과 예술특질 때문이다. 당대의 삼채 장인들은 장인정신으로 독특한 기법을 운용하였다. 선을 삼채 도소(陶塑)에 도입하여 ‘선을 몸체에 그리고 몸체는 선에 의지함으로써 선과 몸체가 하나가 된다.’는 독특한 조소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삼채도소는 더욱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삼채말의 조형은 더욱 성공적이었는데 ‘원-방-원(圓-方-圓)’의 전통적인 구성법칙에 따라 당나라 준마의 둥글둥글한 가슴과 정방형의 허리와 둥근 엉덩이를 추구하여 원혼(圓渾)한 힘의 정도를 강조하였다. 이런 ‘원-방-원’이란 구조로 준마의 튼튼한 몸매를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또한 장방형의 머리를 통해서 준마의 용감하고 힘센 기세를 더한층 굳세게 나타냈다. 동시에 장식성과 상징성의 예술효과를 내기 위하여 종류에 따라 다른 유약을 발라줌으로써 ‘요변’을 통하여 서로 녹아 섞여 화려하고 빛나게 만들었다. 이처럼 당나라 준마는 살붙임이 자연스러우면서 비대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고 부귀하며 속되 보이지 않는다.그림 2. 삼채마④ 도소와 회화의 유기적 결합그림 3. 삼채 여인상당삼채소의 또 다른 예술적 특징은 장인들이 제작과정에서 많은 회화수법을 운용하여 ‘모양을 흙으로 빚고, 본래의 모습을 그름’으로써 삼채 도소가 입체형상의 체적감(體積感)을 줄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이 필물정취(筆墨情趣)와 색채미감(色彩美感)을 갖추게 하여 ‘기운생동(氣韻生動)’하고 ‘천상묘득(遷想妙得)’한 예술적 효과를 얻은 점이다.
고려불화 - 수월관음도를 중심으로Ⅰ. 서론Ⅱ. 본론A. 고려불화ⓐ. 고려불화의 특징ⓑ. 고려불화 표현기법B.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의 표현 양식ⓑ. 수월관음도에 사용된 각 문양의 특징ⓒ. 수월관음도의 신앙적 특성ⓓ. 수월관음도의 도상 고찰Ⅲ. 결론Ⅳ. 참고문헌 및 출처Ⅰ. 서론불화는 불교회화의 줄임말이다. 예배를 위한 그림이나 교화하기 위한 그림, 그리고 절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불교그림들을 통틀어서 불교회화라 부르고 있다. 지금 전해지는 작품으로 고려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불교회화이다. 고려시대의 회화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작품들 중에 우수한 그림들은 단연코 고려의 화려하고 세련미 있는 불화들이다. 고려의 불화는 우리나라 그 어느 시대의 불화보다도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불화는 120여점 되는데, 모두가 13세기에서 14세기경에 그려진 것들로서 대부분 일본에 남아있다.본문에서는 고려불화의 흐름과 특징을 알아보고 현존해있는 고려불화중 수월관음도에 나타난 문양과 수월관음도속에 나타난 신앙적 특성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문화의 단면을 조명해보고자 한다.Ⅱ. 본론A. 고려불화우리 역사상 불교에 의해서 나라가 세워지고 이런 전통이 끝까지 지켜진 유일한 나라는 고려(918-1391)밖에 없다. 고려는 시종일관 불교가 국교로 행세한 철저한 불교국가인 셈이다.고려는 주체성의 회복이라는 강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중국의 여러 왕조를 통하여 외래문화를 수용하였지만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려적 개성을 지닌 불교미술의 우수한 작품을 창작, 발전시킬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고려불화는 13세기에서부터 14세기에 걸쳐 고려후기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고려불화의 특징첫째, 고려불화는 귀족불화라고 할 수 있다. 고려불화의 특징이 귀족불교였던 만큼 불화의 수요자들도 왕실내지 귀족들이었고, 불화의 작풍(作風)도 귀족 취향 내지 궁정 취미가 현저했다. 특히 귀족취향의 불화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둘째,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불교는 교종, 그 가운데도 화엄종과 법상종에 이어 천태종이었으므로, 화엄경과 법화경에 의한 미술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따라서 당대의 불화도 이러한 화엄, 법화, 법상의 변상도들이 주류를 형성했다.셋째, 아미타불화나 관음·지장보살시왕도 같은 불화들이 왕실과 권문세가들의 시주에 의해서 성행되는데, 바로 내세에도 그들의 영화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넷째, 고려불화의 재료적 바탕은 아직까지도 벽화였다. 당대의 걸작이나 대작들은 벽화였고, 따라서 주 예배대상의 불화는 당연히 벽화였다. 그러나 탱화들도 왕실이나 귀족들의 기원용으로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고려불화 표현기법고려불화를 대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색채의 화려함과 정교함, 구도 등이다. 우선 구도면에서 크게 그려지고 협시들이 아래에는 작게 그려지는, 다시 말해 본존과 협시가 2단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2단구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2단구도로 된 그림들의 경우 아래부분의 협시들을 대각선으로 중앙의 보존을 행하도록 비스듬히 배치하여 2줄의 보살 등이 마치 원으로써 본존을 떠받들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이같은 대각선구조는 단조로운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박진감을 더해주는 한편,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효과를 주고 있다.색채는 밝고 은은한 색조가 전면적으로 묘사된 것이 가장 큰 특징으로, 여기에 찬란한 금색이 조화되어 화려하고 고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있다. 금생이라든가 불·보살의 옷 전반에 걸쳐 촘촘히 그려진 무늬는 후기로 갈수록 더욱 요한하고 화려해져 다소 형식화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인물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특징적으로 나타나지만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근업하거나 단정·근엄하면서도 풍만하고 우아한 형태를 보여준다. 여기에 묘사된 필선은 단단하고 힘있는 선, 구불거리는 선 등으로 다양한데, 이상과 같은 인물의 형태적 특징은 당시의 불상조각에서도 공통된다.B. 수월관음도수월관음은 33관음 가운데 한 분으로 「화엄경」보타락가산의 그윽한 연못 위에 비치는 달처럼 맑고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보살이다. 수월관음도는 특히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사상이다. 고려시대에 관음신앙이 유행한 이유는 이 시기에 외부의 침입과 한난이 계속되어 신앙이 문중의 현세이익을 위해 성행되고, 길흉화복의 관심이 높았던 시기라 고려궁정을 중심으로 관음사사이 충만되어 수월관음도가 유행했다.ⓐ. 수월관음도의 표현 양식수월관음도의 의상을 보면 보관과 전신을 덮어 내린 능라(綾羅)의 무색의 베일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문양이 금니로 되어있다. 상(裳)에는 적색의 바탕에 금니의 귀갑문을 지문으로 하고 그 위에 홍연화(紅蓮花)를 조합한 타원형의 연화문을 배치했다. 상의 선장식이나 영건에는 보상화당초문이 주로 장식되어 있다. 선재동자(仙才童子)의 의문(衣紋)에는 두상에 국화, 연화복합문, 하의엔 이중의 원문등이 표현된 경신가 소장품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형태와 문양이 변화 가운데 통일된 조화를 이룬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는 관음의 얼굴, 목, 가슴, 팔 등이 노출된 부분을 제외하고 의복으로 가여진 표면에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체와 섬세하고 조화로운 문양들로 가듣하다. 이는 일본이나 중국의 수월관음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수월관음도에 사용된 각 문양의 특징첫째, 기하문양으로 직선과 자유곡선 등 여러 가지를 이용하여 교차되는 곳에서 문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칠보(七寶)문이나 귀갑(龜甲)문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칠보문은 사슬 모양으로 전후좌우를 연속되어 전개시킨 상태의 문양이다. 천계와 지계의 구분을 짓거나 하늘의 신비스러움을 더해주기 위한 문양으로 금문에 많이 쓰인다. 귀갑문은 거북이 등모양의 무늬로 더욱 귀족적이며 고급스러움을 더한다.둘째, 자연문양으로 자연그대로의 사물을 도식화하여 문양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자연문양에는 화염, 성광, 구름, 바람, 파도 등이 있다. 그중 구름은 내재적 기세, 강약허실을 동시에 갖추고 있고, 운문표현은 환상적 경지나 내세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셋째, 동·식물 문양으로 운봉문, 보상화, 연화문, 국화문, 초화문, 당초문, 모단당초문등이 쓰였다. 고려불화의 의문 가운데 봉황이 상당수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고위한 지체와 품위를 상징하는 무늬로서 표현되며 성스러운 구름 속을 나르는 봉의 무늬는 보살의 영험과 자비로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보상화는 불교교리와는 관계없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꽃으로 두 개의 잎을 합성하여 된 상상의 꽃이다. 보상화 역시 보살의 품위와 귀족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수월관음도의 신앙적 특성평범한 중생들이 종교에 귀의심(歸依心)을 가질 때는 대개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普門 品」에서는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라도 관세음보살에게 의지할 수 있고, 또 간절한 그 바램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관음이 이와 같은 적극적이고도 평등한 중생 구제는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이는 수월관음 명호 유래와 연관이 있다. 즉 수월관음은「普門 品」관음의 구제 자비심을 상징하는 명호이며, 이로 인해 관음 보살을 단순히 “수월”로 호칭하기도 하였고, 관음도에서는 상주처(常住處)를 표현한 수월관음도도 상이 종래의 화상을 대신하게 되었다.고려 수월관음도에서 산호 보주가 연화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연못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연못은 「아미타경」의 극락정토 칠보지 묘사에서 비롯한 것으로「40화엄」에서 관음보살이 설(說)하고 있는 관음정토 왕생과 연관이 있다. 즉 칠보지 표현은 관음정토를 암시하는 것이고, 아울러 그 정토에 나고자 하는 신앙심을 나타낸 것이다. 고려 수월관음도에서 관음 형상이 고정적이고 선재에 비해 유달리 크게 표현되며 연못 도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모두 이러한 신앙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월관음도의 도상 고찰화면 상단의 관음 위쪽으로는 암굴을 시사하는 바위가 고드름처럼 늘어져 있으며, 그 바위 끝에 파랑새 한 마리가 꽃을 물고 가느다란 나무 가지에 않아있다. 파랑새는 고려 수월관음도에 처음 나타나는 도상이다. 그리고 관음의 등뒤로 대니무 두 그루가 암벽 앞으로 나와 있는 것이 눈에 띈다.화면 하단의 수면은 갈고리 모양의 거품이 하얗게 일어나고 있는 바다로 표현되어있다. 바람은 화면 하단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듯 느껴진다. 이런 생동적인 묘사는 관음의 정적인 모습과 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성인과 속세를 구분하는것 같다.이 작품은 안정된 구도와 색채의 조화가 뛰어나 화려하면서도 온화한 품격 높은 그림이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고려불화를 대표할 만큼 우수하다. 화촉의 크기도 대폭이어서 왕실 발원 작품일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화면 거의 전면을 차지한 물방울 모양의 커다란 광배 속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을 향해 비스듬히 연화대에 발을 디디고 서있는 모습이다. 관음의 얼굴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부은 듯한 눈두덩과 코, 입술주위를 흰색으로 칠하여 하이라이트 효과를 내고 있다. 오른손에 버들가지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의 형상과 물방울 형태의 후광 모양이 연관성이 있어 보이고, 물방울 모양으로 인해 인체의 비례가 길어 보인다. 이 작품은 높은 품격 외에도 고려 수월관음도중 유일한 입상으로 또 우아한 귀부인을 연상케하는 관음의 섬려한 아름다움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