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를 움직인 여인들호사카 유지의 『일본 역사를 움직인 여인들』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서지사항을 보았을 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바로 한국으로 귀화했다는 사실에서였다.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이 쓴 이 책 안에서 일본 역사를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지, 또 남성의 역사가 아닌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들의 역사를 어떻게 조명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책의 서지사항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면, 이 책은 (주)문학수첩에서 2006년 05월17일 초판 발행되었고, 지은이는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인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흘러가는 역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어느 시기이든 남자 곁에는 여자가 있었고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은 여자이다. 또한 힘 있는 남자 곁에는 꼭 특별한 여자가 있었다. 게다가 남자 못지않은 강한 힘을 가진 여자들도 많았다. 이 책에서는 일본에서 남자 사무라이 못지않았던 여자들, 사무라이 곁에서 강한 힘을 휘두르며 일본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여자들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라는 당찬 집필 의도를 밝힌 저자 호사카 유지의 의도대로 고대를 평화롭게 통치했던 여자 천황들, 일본문학에 큰 획을 그은 여성 작가들, 용감히 싸웠던 여성 무사들,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애썼던 근대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한국에서도 고대의 소서노, 신라시대의 선덕여왕, 조선시대의 문정왕후, 명성황후 등 장대한 포부를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 많았다. 그러나 반만년 한국의 역사는 남성적인 시각에서 과소평가되거나 왜곡된 역사 속 여성 인물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성들은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 언뜻 역사의 무대에서 모습을 감춘 듯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역사의 무대를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역시 일본에서도 유학을 받아들인 후 부터는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남성위주의 무사계급 위주 인물의 역사가 많이 전해져 왔지만 일본 역사 속에서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남성의 역사가 아니라 이들 못지않게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여인들이 존재하였다. 특히 일본 고대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여왕이 많이 존재했고, 그녀들은 남성이 통치했을 때 보다 더 평화롭게 일본을 다스렸다. 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에 있어 뛰어난 문예가들, 용맹스런 무사로서의 여인,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선구자들 사이에 일본 여인들이 있었다.오늘날 승자의 역사 혹은 남성의 역사, 힘의 역사에서 벗어나 아래로 부터의 역사, 여성의 역사로 역사를 다시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남성의 입장에서, 승자의 역사 입장에서 쓰인 것이 많다. 이러한 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서 역사 속에서 소외된, 역사 속에서 항상 있어왔지만 우리가 간과해 버렸던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 특히 동양에서의 여성은 짙은 유교사상의 뿌리박힘으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등한시 되어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역사를 그녀들의 편에 서서 다루며, 당당하고 자립적인 힘이 강한 여성의 모습을 많이 보여 준다. 그것은 여인무사들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작가에게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과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그녀들의 모습이 당차 보였다. 필자는 마치 우리나라의 그 여인들이 고려시대 여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친간의 결혼이 자연스러웠던 일본의 풍습도 고려시대 초기 호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근친간의 결혼을 허용하고, 여성들의 지위도 남성과 거의 동등했던 것이 비슷하다.필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일본 최초의 여의사 오기노 긴코’부분일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옮은 성병으로 인해 고생하지만 남편의 배신과 남성의사에게서 받은 굴욕감에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고 28세 때 일본 최초의 여의사가 된다. “역시 여자가 의사가 되는 건 무리야. … 여자는 곤란하다.”) 라는 냉정한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무섭게 노력을 하였다. 그녀 앞에 첩첩 산중으로 쌓여있는 일본의 제도와 관습의 벽을 힘겹게 무너뜨렸다. 여기서 한국의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와의 다른 점은 오기노 긴코는 최후의 수단으로 외국에 나가서 자격증을 따오는 것을 생각은 하였지만, 결국 뚝심으로 일본 자국 내에서 그녀의 강한 의지로 일본 근대에서의 여의사 제1호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오기노 의원은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노력은 사회내의 남녀의 사회 비율 진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현대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더 필요한 부서도 있고, 여성이 사회에 진출한 경우도 훨씬 많지만 사실상 국회의원의 자리만 보아도 여성의 숫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남성의 사회진출 비율이 더 높다. 오기노 의원의 뚝심 있는 노력을 보면서 20세기 초의 그녀가 매우 당차 보였다.이 책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언급이 잦다. 호사카 유지 작가 자신이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오랜 기간 연구해 왔기 때문에 일본과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와 가설로만 알고 있던 유래에 대해서는 “그러나 필자는 고교쿠는 백제에서 직접 건너왔다고 본다.”)라는 식으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백제계, 가야계의 고대 여왕들의 부분에서는 더 뚜렷이 비교가 되는데,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른 문제인 것 같다. 호사카 유지 자신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독자가 조금 더 역사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게다가, 고대시대를 평화롭게 했던 여왕들 부분에서 특히 여인들의 주변 인물들까지 너무 복잡한 인물구도를 모두 그리고 있어서 간혹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있었다. 또한 책 전체에 긴 일본의 리고 있 여인들을 한 권에 담아내려고 하니, 내용이 많이 함축적이a힘든략하다는 느낌둄까지았고, 보충설명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최대한 많은 것을 담고 싶었던 작가의 욕심이 사전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글로 담아져 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칭기즈칸 (Genghis KHAN)핏덩어리를 손에 쥐고 태어난 전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망, 그의 무모한 야망은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현실이 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넓고 큰 대제국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칭기즈칸」 다큐 영화에서는 그동안 많이 다루어 졌던 칭기즈칸의 비범한 태생, 대제국을 건설한 업적 등을 다룰 뿐만 아니라 그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도입했던 원칙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칭기즈칸이 제국을 건설하면서 도입했던 열린 문화 수용,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사회 개혁 원칙 들을 하나하나 소개하여 칭기즈칸 제국의 통치 철학이 오늘날에 바로 세계 경영 원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한다.칭기즈칸은 심리전에도 강했는데, ‘우리 부대는 바다와 같이 넓고 너의 군대는 모래 한줌과 같다.’와 같이 말하며 자신의 부대의 사기를 높이고 능력위주의 인재를 등용하면서 자기사람들로부터 충성심을 받게 되며, 그는 더더욱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주게 된다. 테무친은 금나라 정복에 서하(西夏)를 이용했다. 1227년 서하를 완전히 무릎 꿇게 하기 전부터 몽골은 서하와 금이 전쟁을 벌이도록 했다. 오랜 전쟁으로 두 나라 모두 국력이 쇠퇴했고 몽골족은 두 나라를 모두 손아귀에 넣었다. 그의 정복 전쟁 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장벽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보급품을 방해하고, 그에게 항복한 중국인들에게 많은 정보를 얻으며 장벽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이민족이라고 해도 능력이 뛰어나면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 덕분에 칭기즈칸은 세계 정복에 나서면서 투석기, 쇠뇌, 사다리, 끓는 기름 같은 기술을 도입했다.그는 몽골인을 위한 모든 것이 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몽골인 노예를 금지 시켰다. 북방민족이었던 요, 금과 같은 경우에는 한인에게는 강력한 군현제로, 자신들의 민족에게는 부족제로 다스리는 이중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거란문자, 서하문자, 여진문자와 같이 그들은 한족과 완전히 동화되기를 꺼려하며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문자의 힘을 알고 있었다. 법률체계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이 행하고 말한 것을 모두 받아 적도록 하였다.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고작 200만 명도 채 안 되는 몽골족을 이끌고 수억의 인구를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하고 우리 역시 몽골족에게 정복당했었지만 그의 뛰어난 전술전략을 알지 못하면 앞으로도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 크고 방대한 나라를 바쁘게 건설한 그는 뒤도 돌아볼 틈이 없이 앞만 보고 전진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칭기즈칸이 묻힌 몽골초원의 어딘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의 장례절차를 행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이고, 그가 묻힌 곳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그 위로 말을 여러 번 달리게 하고, 나무도 심었다고 한다. 아직도 찾지 못하는 그의 무덤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과 강한 심리전을 이용해 세계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도 몽골의 초원 어딘가에서 그의 뒤를 잇는 후손들의 행로를 지켜봐 주고 있을 것 같다.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1776. 7. 4.1. 독립선언서 등장배경2. 독립선언서, 누가 만들었을까?3.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서명자4. 독립선언서의 의의5. 누구를 위한 독립선언인가?참고문헌0. 독립선언서 등장 배경1776년 1월에 토머스 페인의 『상식』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아직까지 표명되지 않았던 독립의 정당성을 분명히 한 정치 팸플릿이었다. 페인은 단호한 어투로 군주정을 공격하였으며, 공화제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팸플릿은 대륙회의의 대표들이 여러 부 교향으로 보내 지역구민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고, 페인의 사상은 당대의 생각을 유창하고 설득력 있게 요약하여 독립을 원하는 주민들에게 의지를 북돋아주었다.『상식』이 독립을 고조시키자, 1776년 5월 제2차 대륙회의에서는 각 식민지에 대하여 새 정부의 수립을 권고하여, 각 식민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다. 1776년 6월 7일 버지니아 대표 리처드 헨리 리)는 "이 식민지 연합은 자유롭고 독립된 주들이어야 하며 마땅히 그래야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버지니아가 아메리카 식민지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부유한 곳이었기 때문에 버지니아 대표 리처드 헨리 리의 제안은 비중이 컸다. 독립에 찬성할 것을 아직 승인하지 않는 주들(메릴랜드, 델라웨어, 뉴저지, 뉴욕)의 대표들이 고향에서 동의안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투표가 3주간 연기되었다. 동시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벤저민 프랭클린, 매사추세츠 주의 존 애덤스, 코네티컷 주의 로저 셔먼, 뉴욕 주의 로버트 R. 리빙스턴, 버지니아 주의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1. 독립선언서, 누가 만들었을까?이제 독립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된 대륙회의의 대표들은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고자 하였고,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 ~ 1826년 7월 4일)이 포함된 위원회에 독립 선언서의 초안 작성을 의뢰했고, 이 위원회는 다시 제퍼슨에게 초안을 만들어줄 것을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 지식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아 그들이 쓴 저서를 통하여 계몽사상을 배웠고 계몽사상을 자신의 평생 정치 철학으로 삼았다.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 선언서는 다양한 저술활동과 독서의 영향을 끼친 결과였는데, 특히 존 로크)과 앨저넌 시드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제퍼슨은 반연방주의)를 지향하여 독립 자작농을 공화주의 미덕의 모범이라 이상화하였고 도시와 자본가를 믿지 않았으며 각 주의 독립적인 권한과 강력히 그 권한이 제한된 연방정부를 지향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농민이 주도하는 농업국가로 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제퍼슨은 또한 인권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의 기본 원칙인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역설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는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였다.2.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서명자독립선언서의 내용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문서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독립선언서는 선언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전문을 포함해서 인간의 평등, 기본적 인권, 인민의 동의에 입각한 정부의 조직과 혁명권 등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은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쓰여 졌다. 하나는 영국의 절대 왕정에 대항하여 식민지 미국의 혁명을 정당화 시키고자 함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비전과 이상을 반영하고자 함이다. 미국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퍼슨은 로크의 자연법주의에 크게 의지했다. 이는 제퍼슨이 로크의 자유주의 삼위일체 중에 생명권과 자유권을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으로써 독립선언문에 적은 중요한 이유가 된다. 동시에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에서 재산권 대신에 행복추구권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목록에 넣음으로써 허치슨적인(혹은 로크적인)공공의 행복추구를 새로운 미국의 도덕적 규범으로 삼으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변혁하거나 폐지해 인민이 가장 효과적으로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이다. (사료로 읽는 미국사, 65~66p)이 전문은 독립 선언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제퍼슨은 계몽사상이라는 정부의 원칙을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라는 표현은 본래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가 “생명, 자유, 그리고 재산(property)”이라고 처음 사용했으며, 이후 애덤 스미스가 “생명, 자유, 그리고 재산의 추구(pursuit of property)”로 다듬은 것을 제퍼슨은 ‘재산’이라는 표현을 ‘행복’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제퍼슨이 독립선언서의 집필 의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제퍼슨의 사상이 그 당시의 시대정신에 녹아있던 미국인들의 마음의 표현을 대변하면서 혁명을 정당화하고 새로운 미국의 성격을 규명 짓는 독립선언서에 투영되어 있다고 본다.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 등의 사상적 원리를 함축한 개념들은 현재 일반 미국인들의 가치관에도 깊숙이 내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의 원칙에도 핵심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개념들이다.)대영국의 현재 국왕의 역사는 악행과 착취를 되풀이한 역사이며, 그 목적은 직접 이 땅에 절대 전제정치를 세우려는데 있었다. 지금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다음의 사실을 공정하게 사리를 판단하는 세계에 표명한다. (사료로 읽는 미국사, 66p)전문의 마지막에 제퍼슨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끝맺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불만의 나열로 총 27개로 나누어 제시되어있는데 각 불만은 연대순이 아닌 주제별로 제시되어있다.1~13국왕은 공익을 위해 ~ 국왕은 다른 기관과 결탁해 우리 헌정이 인정하지식민지의 법률을 정지시킴, 평화시에 상비군을 주둔시키겠다는 행정 권력의 남용14~22대규모의 군대를 ~ 어떠한 경우든 우리를 대신해 법률을불공정한 세금, 무역제한과 같은 위헌 하여금 아메리카인과 동일시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영국의 형제들(our British brethern.)’이라고 불리는 문단은 아메리카 인들이 평화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는 방식을 서술하고 있다. 제퍼슨의 원래 문단은 두 배 정도 더 길지만 대륙회의 판본은 경제적으로 줄임으로써 더욱 힘차게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있다.)불만들을 나열하고 마지막 결론부분에서는 제퍼슨은 다음을 강조한다.이 모든 식민지 연합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이며, 권리에 의거하고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여야 한다. 이 국가는 영국의 왕권에 대한 모든 충성의 의무를 벗으며, 대영제국과의 모든 정치적 관계는 완전히 해소되고 또 해소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국가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서 전쟁을 개시하고…… (사료로 읽는 미국사, 69p)즉, 식민지와 대영제국 사이의 모든 정치적 관계를 해체시키고 또, 완전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륙회의 대표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계, 다시 말해 혁명을 지지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주기 위한 내용이 결론에 담겨있다.서명자독립 선언서에 실제로 서명하는 것은 대역 행위였으며, 만약 독립이 실패로 돌아가 버린다면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우선 서명 후 그들은 안전을 위해 6개월 동안 이름을 발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1777년 1월이 되어서야 56명의 서명자 이름이 들어있는 독립선언서의 공식 판본이 발표가 되었다. 사실 독립 선언서는 정확히 7월4일에 서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독립선언서가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지 못해서였고, 7월 19일에 되어서야 뉴욕의회가 동의를 하며 완성되었고 투표가 이루어 졌다. 투표가 만장일치로 끝나자 대륙회의는 서명을 위해 정서한 판본을 준비했는데, ‘아메리카 13개 연합주의 만장일치 선언’이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제일 먼저 서명한 사람은 대륙회의 의장인 존 핸콕)이었고 굵은 글씨체의 그의 서명은 텍스트 아래 중앙에 있다.서명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위 관료층이나 전문직, 농장을 소유한 왕정과의 분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 전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팽창은 영국과 식민지인간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태도를 키워가고 있었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부과하는 새로운 규제들(설탕법, 인지세법, 수입세 등)에 대한 반항도 초기에는 영국의 신민으로서의 자유의 방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항은 사람들의 사상을 바꾸고 사상의 변화는 더 많은 행동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미국에서의 인권선언의 선구라고 인식된 1776년 6월 12일의 '버지니아권리장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독립선언서는 영국 헌법을 부정하고 그 테두리 외에 있는 '인간의 권리'를 선언했다. 인간이 평등한 것은 자명한 진리이며,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천부의 권리이며 그 권리에 걸맞은 '새로운 정부'를 만들 권리가 있다. '악행과 찬탈의 역사'였던 영국 식민주의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를 선언했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를 앞서는 시민 혁명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고, 유럽에서의 시민혁명 전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또한, 후에 아브라함 링컨은 독립 선언서에 표명되어 있는 사상이 미국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를 표현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노예제 종식을 위한 연설에서 자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독립선언서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 진리’를 제시 했다고 믿었다. 마틴 루터킹 2세는 연설을 통해 독립선언서의 문구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인종문제에 대해 그는 꿈이 있다고 하며 모든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것이 몸소 실천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했다.4. 생각해볼 거리누구를 위한 독립인가?)독립선언서는 영국 왕의 부당한 행위들을 열거했다. 영국 와의 통치는 폭정이자 압제로서 정의가 배제된 채 폭력에 의지하는 정치라는 것이었다. 독립선언서는 민중이 정부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선언서는 영국이 그들에게 부과했던 고통과 고난을 상기시켰다. 그러한 주장은 식민지의 다양한 사람들이 공유하기에 알맞은 내용이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남들이 다 돌아올 시간에 그녀는 떠난다. 밤에 더욱 빛나는 야광을 몸에 바르고 번쩍이면서 일몰의 저녁 순간에 불확실한 그림자를 길게 끌며, 지치고 더러운 거리로 나가기 시작한다.‘오경아’, 그녀의 삶을 비추고 있는 에서는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듯이 서울이라는 현대 도시라는 곳에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잘 조명하고 있다. 을 단순히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료로서 작가가 책속 인물, 시대적 배경에 대해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에 대해 중점을 두어 읽었다. 문학으로 만날 수 있는 역사는 매우 흥미로웠다. ‘1970년대는 유신의 시대이다. 그리고 억압과 탄압의 시대였다. 경제개발로 고도 산업이 성장했던 시대이다.’ 하는 것들에 대해 단면적으로 배우는 역사라기보다는 문학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알려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조금 더 동감할 수 있고, 이입시킬 수 있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최인호의 소설 은 1972년 7월 1일부터 1973년 9월9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으며, 1973년 예문관에서 상?하 2권의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으며, 그 인기는 1974년 영화로 만들어 진 후에도 계속 되었다. 20년만인 1994년에는 샘터사에서 상, 하권으로 나뉘어 작가의 말을 포함하여 출판 되었다. 처음 2장에서부터 7장까지는 경아의 이야기가 그리고 8장부터 11장까지는 주인공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미술대학 강사인 김문오가 이른 새벽에 갑작스런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는 시대의 변모에서 성장으로 치닫지 못하고 추락하는 주변화 된 인물인 경아를 표면에 제시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것으로 보이는 경아는 직장동료였던 첫사랑 영석에게 버림받고 사업가인 만준과의 결혼에서 실패 한 후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으로 타락해 간다. 동혁에게 육체적으로 얽매인 채 술집 여급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가난한 화가 문오에게서 영혼의 휴식을 갈구하지만,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남성사회의 희생양이 되어 눈밭에서 스물일곱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경아’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한국사회의 우울하고 암울했던 시대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최인호의 이 그 당시 무섭게 팔려나가자 당시 지식인들은 이를 호스티스 문학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작가의 서문에서 “경아의 직업이 한때 호스티스였을 뿐 소설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라며 호스티스 문학이라는 용어는 참으로 멋지게 붙여진 용어이며 공격을 당하기에 알맞은 목표물이었다고 한다. 필자 또한 이 책을 읽어가면서 호스티스라는 직업을 가진 경아의 삶에 대해 같은 여자로서 그녀를 매우 동정하였다. 이 작품은 여성과 육체, 성 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의 모습으로 청년문화라는 틀 속에서 이 소설을 바라 볼 수 도 있다. 70년대식 세대논쟁이라 할 수 있는 청년문화논쟁에서 최인호는 젊은 세대의 대변자 혹은 대중문화의 옹호자로 논쟁의 중심에 서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최인호의 은 대중문화 그리고 청년문화를 촉발 시킨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 4월 민주항쟁으로 시작된 학생운동의 시대 속에서 청년들은 서구문화의 유입이 활발한 가운데에 성장하였다. 이런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문화의 붐을 일으켰던 197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대중문화가 그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대였으며, 과 같이 수십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나오고 40만 이상의 영화관객을 극장으로 불러일으켰고, 다양한 장르의 TV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는 74년 긴급조치 1호와 함께 시작된 유신체제의 억압으로 대중의 일상과 의식 그리고 정서까지도 통제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이기며, 탄압과 저항의 시대, 군부독재, 고도 산업 성장, 그로 인한 소외 현상, 등등 사회 문화적인 과도기였으며 정치적 방황의 시대였다. 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풍경은 70년대 서울이라는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우울하고 황량한 내면이다. 이 작품에는 당대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나 사회분위기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묘사된 당대의 분위기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숨이 막힌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퇴폐, 병리로 받아들여지던 젊은이들의 문화는 그 시대의 우울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들의 감성과 인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자 열망했던 젊은이들이 이 작품에 열광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70년대 초반 대중문화, 청년문화는 대학생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 확산되었던 통기타, 대중소설, 영화, 코미디, 패션, 소비문화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억압당하던 사회 속에서 주류문화에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여러 욕구를 다른 곳에서 채워나갔다. 특히 70년대 청년들은 생산의 신성함을 조롱하는 과소비, 기성의 관습에서 벗어나는 의상착용 등 당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무의식적 거부를 하였고 이를 반영한 것이 청년 문화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대성공을 한 이유가 시대적인 코드와 잘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영석, 만준 그리고 문오 모두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경아’는 구원자의 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그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안식처 이상의 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경아를 버렸다. 모든 남자가 경아에게서 즐거움과 안식을 얻어가지만, 결국 잊어버리고 잊어져야 하는 인물이었다. 다른 모든 억압된 것, 즉 성과 마찬가지로 경아도 한때 혹은 몰래 즐기는 것이지만, 결국엔 억압하고 잊어야 할 존재가 된다. 1970년대를 관통해온 남성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히려 개방적 이였고 앞서나갔던 경아에게 가부장제로의 안착을 부단히 시도한 것일 지도 모른다. 영석에게는 욕정의 대상이었고, 만준 에게는 전처를 상징하는 이미지로만 존재했으며 동혁에게는 돈을 벌어주는 생산자에 불과했던 경아는,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 위안을 얻던 당대 남성들의 무능함을 받아들이더니,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희생하여 마침내 죽고 나서야 여자로서 경아를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에 나오는 남성들이 함부로 경아를 범하고, 버리면서 유신시대에 저항할 수 없었던 그들은 그들 스스로 경아로부터 우월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소설 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더욱 교묘해진 책략과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재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야샤르케말터키의 문호, 야샤르 케말의 작가는 터키가 낳은 세계적 작가 야샤르 케말(yachar kemal)이다. 그는 1922년에 터키 남서부 타우루스 산맥에 있는 작은 마을인 헤미테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케말 사디크 고그젤리인 그는 5세 때 아버지가 모스크에서 살해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고, 그 자신도 이 와중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 그는 2년간에 걸쳐 중등교육을 받은 뒤 학교를 자퇴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40년대 초 2권의 민담집을 출판했다. 1944년 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된 후 풀려나 1951년부터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채집한 아나톨리아 민속자료를 바탕으로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대표작 과 를 집필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25년 동안 터키는 일명 “촌락 소설(Village Fiction)”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양식을 창조해 냈다.야샤르 케말은 이 양식의 가장 저명한 옹호자이다. 그러나 그는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빈곤의 가혹한 현실을 다루는 이 장르는 자연 재해의 위협에 노출된 농민과 인간의 무자비함을 묘사한다. 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앗아가는 경제적·심리적 궁핍, 가뭄과 홍수, 혈족 간의 원한 관계를 바탕으로 드라마가 형상화된다. 소설적 배경으로는 정체, 무지, 불결함, 기아 상황이 빈번하게 설정된다. 1962년 터키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는 여러 작품들을 집필하였으며, 1969년 발표한 이 정부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후 터키 작가 협회 회장, 터키 작가 노조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야샤르 케말은 여성, 소수민족, 가난한 소시민과 도시 빈민층의 이야기를 현대의 신화로 다시 창조해내었다. 또한 민속자료를 바탕으로 서구화를 통해 잃어버린 터키의 전통과 가치 회복을 염두에 두면서도 그릇된 전통과 악습에 다.” 실제 삶에서도 야샤르 케말은 거인의 풍모를 보여준다.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이 작품은 야샤르 케말이 1950년대에 코잔(Kozan)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에 만났던 한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사건은 하산(작품의 주인공)의 아버지인 할릴(Halil)이 어머니 에스메(Esme)를 납치해 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에스메는 추쿠로바 지역에서 아름다운 미인이였다. 터키에는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을 강제로 납치해서 살면 결혼으로 인정받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할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에스메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에스메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압바스라는 사람 이였는데 압바스는 에스메 때문에 무기징역을 받은 상태였다. 에스메의 집안에서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에스메는 압바스를 사랑했다. 할릴은 그녀를 눈독 드렸고 그는 돈도 많고 용맹한 남성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에스메에게 여러 번 청혼했으나 에스메는 단호히 청혼을 거절했다. 그러자 할릴은 여자를 납치해서 약을 먹인 후 강제로 신부로 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차지하게 된다. 그녀는 체념한 채 아들 하산을 낳고 살지만 옛 애인 압바스가 찾아오자 “돌아가 달라”면서도 만남을 지속한다. 에스메의 옛 애인 압바스 역시 에스메를 되찾아 오려고 할릴을 살해 하고 만다. 여기서부터 피의 복수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할릴을 죽인 압바스는 끝내 몇 걸음 도망치지 못하고 할릴의 형제들에 의해 살해된다. 할릴의 형제들의 복수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에스메는 시집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장본인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에스메의 옛 애인이 없었다면 자신의 형, 아들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릴의 하나밖에 없는 혈통인 아들 하산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게 된다. 아니 그것은 무거운 짐이라기보다는 의무시 되는 것 이였다. 바로 피의 복수 ‘내 아들을 죽인 네 어미를 죽여라!’ 하는 것이다. 에스메의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비롯한 할릴의 친족들은 어린 하산에게 총을 선물한다. 어머니에게 총을 들이대고 만다. 하산은 너무 어렸다. 사실 하산이 에스메를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생각이 가득 차 있어, 결말부분 하산이 에스메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을 때에는 ‘안돼!’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에스메의 머리는 화로에 타고 있었다.결국은 주변 사란들과 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어머니를 죽인 어린하산의 움직임과 심경을 작가는 잘 표현한 것 같다. 부족이나 친족에 해를 입히거나 손실이 가면, 반드시 복수하고야 마는 것이 피의 복수이다. 이것은 그들의 고유문화 속에 녹아있는 명예 죄의 모습이다. 우리 가문이나 혈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살인은 정당하며, 오히려 영예롭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여인상을 보자. 정조를 지켜서 열녀문을 세워주던 그 시대, 그녀들은 남편이 죽으면 따라죽거나 정조를 지키고 한 남편만을 끝까지 사랑하므로써 생을 마쳐야했다. 마치 이것이 당연한 듯 조선시대의 풍조는 여인들의 정조를 끔찍이도 지켜야했다. 우리나라의 뿌리박힌 전통이다. 이것이 은장도를 창조해냈고, 다른 사람에게 내 순결을 바치느니 차라리 내 목숨을 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권의 명예 죄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여인네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빠가 여동생을 명예살인 한다거나, 하산과 같이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 이는 천륜을 어기는 일과 같다. 야샤르 케말은 명예 살인 가운데 최악의 경우를 소설화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충격적인 의구심에 대해 “아, 이렇게 벌어지는 구나” 하고 현실을 알게끔 해준다.또 한 가지, 소설 중 두루순 할아버지와 무스타파 삼촌 그 외에 이 마을의 남성들은 에스메의 아름다운 미모에 그녀를 살인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종교관과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한 사람을 죽이지 못할 만큼 비교가 되었을까?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하산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죽을걸. 알고 있는 에스메는 다른 사람보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싶었을까? 하는 몇 특히 납치 혼이 인정되는 이런 사회에서는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히잡(차도르)에 관련해서 나오지는 않지만 나의 상상력만으로도 차도르를 착용하는 것을 다시 한번 이해하게 되었다.야샤르 케말이 말하고자 했던 독사는 누구였을까? 작품 속에서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독사는 누군가를 지칭하고 있다. 그것은 에스메의 시어머니일 수도 있고, 에스메일 수도 있다. 아니 나는 하산을 부추겨 에스메를 죽이게 한 그들이 독사라고 생각한다. 사실 야샤르 케말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집안과의 피의 복수에 연루되어 살해되고 그때 그가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자신을 모델로한 소설이 아니었을까?또,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정권에 탄압받고 투옥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작품의 주제가 항상 터키 내 쿠르드 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 도시 빈민, 여성, 소외된 사람들에게 향한 것을 보면 그 독사는 이슬람 세계의 없어져야할 관습만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 불평등, 사회적 약자와 빈민층에 대한 폭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 된다.이슬람교도의 명예살인 그리고 여성아랍은 열악한 자연, 기후 조건에 의해 유목과 장거리 교역 등 위험 부담이 높은 산업이 주된 제 활동으로 자리 잡았고 이러한 환경은 충성도 높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이는 곧 아랍이 가족, 친족, 부족 등 혈연 중심의 사회가 되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부족의 구성원은 충성도 높은 노동력을 부족 중심의 경제 활동에 제공하고 이는 다시 부족의 번성과 군사력으로 평가 되었으며 반대급부로 부족은 그 구성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보호하는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부족 사회는 곧 부족간의 관계에 있어서 신뢰와 힘의 견제의 관계를 형성했고 부족의 우월성은 곧 그 부족의 군사력은 물론 평상시 부족의 신뢰성과 명예에 바탕을 두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족의 명예는 부족의 우월성이 상징이었고, 그 명예는 부족원 개개인의 도덕성으로부터 답보 되었다. 따라서 부족의 명예에 손상이 되는 행위를 한 구성원은 다른 부족의 이유로 한 가문의 누군가가 다른 가문으로부터 살해나 모욕을 받았을 때는 그에 따라 복수가 시작된다. 상대 가문의 누구이든 죽여야만 하고 그리하여 피의 복수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슬람문화, 특히 유목민들의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피의 복수’를 용인한다. 그러나 복수의 명분이 되는 그 명예라는 게 순전히 남성의 명예이며 가문의 명예를 뜻한다. 결코 여성을 위한다거나 올려 세우기 위한 게 아니다. 이러한 일은 종교적인 신념에 의한 일로서 분명 살인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살인자로서 처벌을 받는 일이 없다. 이슬람교를 믿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런 일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을 명예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로 치부하면서 사회적인 반발이나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다.철저한 가부장적 관습 아래 명예살인, 일부다처제, 차도르 의무 착용, 사회 진출의 어려움 등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로 알려진 이슬람. 하지만 코란 곳곳에는 여성을 남자와 동등한 인격으로 보았고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남성의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차도르 속에 감춰진 진실은 무엇인가?“…눈을 아래로 뜨고 정숙함을 지키고 노출된 부위 외에 가려야 할 곳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 얼굴의 너울을 가슴까지 내려라. 제 남편, 아버지, 시아버지, 자기 아들, 남편의 아들, 자기 형제, 형제의 아들, 자매의 아들, 자기 집안 여자 혹은 자기 바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자 또는 욕망을 품지 않는 남자하인 혹은 여자의 숨결에 대해 느낌이 없는 유아 외에는 네 몸의 가리워져야 할 곳을 보여 주면 안 된다.…” 이것은 여성격리풍속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순결성의 관계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18세기 무렵부터 차도르(히잡)는 경제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였으며, 순결과 처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슬람교의 해석에 따르자면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성적 존재로 본다. 남성의 성적 탈선은 여성이 지니거나 보여주는 유혹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차도르를 쓰지 않는 여성은 그녀와 교제하게 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