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을 위한 정부의 정책정부는 재정정책, 금융정책, 산업정책, 다른 나라들과의 경제협력으로 꾸준히 대한민국의 경제를 성장시켜왔다. 한강의 기적,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 정부의 정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1900년대의 경제정책을 요약정리 하면, 우선 1960년대 수출 주도형 성장 모델을 틀 삼아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을 발전 시켰다. 또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으로 고속도로 등 전국이 1일 생활권에 속하게 되었고 선진국 대열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와 IMF타격으로 경제가 크게 타격을 받고 끝없는 구조조정과 고금리 정책으로 많은 가정이 붕괴되었다.그리고 21세기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성장을 위한 정부의 정책을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는 직접적인 공동 투자의 지출을 늘리는 것이다. 첫 자본금이 많이 들고, 이윤은 적은 이유 때문에 민간 기업에서 손대지 못하는 사업을 정부가 나서서 하나의 큰 기업을 이루어 국민에게 필요한 공공재를 알맞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두 번째로 기업에게 직접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방법이다. 기업에 연구개발 비용을 일정부분 지원한다던지, 신규투자 확대 시 세금을 감면해주는 방법 등이 있다.그렇게 되면 기업에게 개발동기가 생기고, 기업의 기술개발 노력으로 인해 생산비용이 줄어들고 더 적은 비용을 들여 더 질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럼 판매량이 늘고 기업의 이윤이 증가하게 되어 결국에는 경제 성장에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외국과의 관계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국내산업 보호로 수출정책을 이끌어 왔지만, 2000년대 여러 나라와 수입개방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보이고 있다. 국민들이 더 저렴한 값에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어 소비가 활발해지고 경제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다. 반면에 농업분야 같은 경우 너무 싼값에 들어오는 수입품들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천천히 수입개방을 하는 것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국민들에게 피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천연자원의 공급변화에 따른 가격변화우리 주변에 천연자원에는 태양열부터 시작해서 석탄, 석유 등 가장 큰 자원력이 되고 있는 광물 자원이 있고 지하수나 해수가 만드는 수자원, 산림자원, 토양자원 등이 있다. 이 중 우리 실생활에서 가장 많이 피부로 느끼며, 가장 많이 쓰이는 자원은 광물자원이다. 만약 석유나 석탄이 없다면 지구의 전 세계 국가들은 마비상태가 될 지도 모를 만큼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쓰이는 만큼 점점 고갈 되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세계는 영국을 시작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키면서 점점 수공업에서 기계의 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기계를 돌릴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광물자원이었고 이에 따른 수요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P D D' S 수요가 늘어난 경우 선탁이나 석유의 가격도올라가고 거래량도 늘어났을 것이다. 이때는아마도 자원이 아직 풍부했기 때문에 공급도P' 같이 늘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P 하지만 21세기인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Q 급격한 기계 자동화 시스템 도입으로 자동차,Q Q' 공장 등 석유, 석탄, 철광석 등 안 쓰이는 곳이없다. 그러므로 수요는 자꾸 더 늘어나는 반면에 공급량은 점점 줄어가는 추세이다. 이미 매장량이 정해진 자원들은 바닥이 보일 시점까지 왔기 때문이다.이렇게 되면 가격은 반드시 증가하게 되고 P D D' S' S거래량은 수요 증가가 더 큰지, 공급 감소가더 큰가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지금 그래프는 P'수요 증가와 공급 감소의 양을 같다고 가정했을 때의 그래프이다. P예를 들면 석유파동으로 인한 기름 값 상승 등이 Q
1단계 : 이 사고에서 제기될 수 있는 윤리적 문제* 10월1일 부산 해운대구 우동 마린시티 내 우신골드 스위트 빌딩 화재 발생과 관련하여 환경 미화원들이 사용하던 4층 남자 탈의실에서 사용한 문어발식 전기 콘센트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였다고 밝혀졌지만 과연 시공 회사 측은 아무 원인이 없는가?2단계 : 이 사고에 사실관계 검토* 경찰 조사결과 각종 배관이 지나가는 피트층(4층)에서 2006년 6월 재활용품 분류 작업장과 미화원 탈의실 등이 불법 증축 및 용도 변경됐다. 2008년에는 휴게실(24㎡)도 불법 설치됐다. 화재 당시 불에 활활 탔던 외벽 마감재는 전체 2만6900㎡ 중 6500㎡(2억5000여만원 상당)만 독일산이었고, 나머지는 시방서와 달리 국산 자재가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골든 스위트 화재의 최초 발화 지점은 4층 남자 탈의실 출입문 바깥에 놓여 있던 속칭 문어발식 콘센트에서 발생한 전기 스파크가 화재원인이라고 밝혔다* 화재 발생 당시 건물 내 스프링클러는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나 비상방송은 없었다고 경찰은 밝혔다.* 골든 스위트에서 일어난 초고층건물 건물에는 가연성(인화성)이 강한 건축 자재로 건축이 됬었습니다. 보통 고층 건물을 짓는다면 H빔을 박고 그 틈을 판넬로 채운 후마감 작업을 합니다. 이 때 판넬은 여러가지 판넬이 있으며 이번 해운대 참사에서는 값이 저렴하고 가연성이 강한 판넬을 사용했는 것 같습니다* 30분만에 4층서 38층까지 번진 해운대 골든 스위트 화재는 주민 4명 병원 후송과 31명 구조하였다* 경찰은 우신골든스위트 관리소장 정모씨(54)와 방화책임자, 환경미화원 3명 등 5명을 업무상 실화 및 업무상 과실치상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또 건축법 위반 혐의로 시공사 대표 강모씨(69) 등 7명도 입건하기로 했다.*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의 소방방재청 국정감사에서 부산 해운대 주상복합아파트 화재 때 불을 키운 알루미늄 패널 외장재에 불을 붙이는 실험을 해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사다리차는 보통 32~52m이며 아파트 기준으로 최대 15~20층까지 사다리가 올라 갑니다. 이것도 공간확보가 된다는 기준하에 이뤄지는데 이렇게 초고층 건물 화재에서는 사다리차 효율성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요번 고층건물 화재에서 대활약을 한건 소방헬기였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미화노동자 휴게실이 설치돼 있어야 하는곳에 건물주가 불법 휴게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3단계 : 관련되는 요인과 조건* 산업안전보건법상 미화노동자 휴게실이 설치돼 있어야 하는데, 건물주가 불법 휴게실을 만든 것이 근본적 문제라는 지적이다. 공공노조는 설계 당시부터 미화노동자들이 쉴 곳을 마련하고 재활용품 분리실을 만들었다면 이 같은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노동자들의 죄라면 건물주가 불법으로 만들어준 좁디좁은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한 것뿐이라고 반발했다.* 화재 당시 불에 활활 탔던 외벽 마감재는 전체 2만6900㎡ 중 6500㎡(2억5000여만원 상당)만 독일산이었고, 나머지는 시방서와 달리 국산 자재가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초고층 건물에는 발코니가 없으니깐 대피공간은 밑에서 위로 올라 오는 유독 가스를 막고 옥상으로 대피하여 헬기 구조를 받는것이 좋다.4단계 : 취할 수 있는 행동* 화재의 원인을 제대로 밝일수 있도록 여러 가지 원인들을 파악한다.* 언론 매체에서 다루는 관련된 자료를 많이 보고 이해한다.* 화재 관련 법규들을 확인 하고 숙지한다.5단계 : 대체안 검토* 설계 당시 환경미화원들이 쉴 곳과 재활용품 분리실을 만들었다면 화재가 일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시공 회사의 부실을 알고 정확히 파악 하여야 한다.(1)* 초고층 건물에 대한 화재 예방 및 교육과 이에따른 소방 시설 구비 및 안전대책 마련(2)* 확실한 안전 조치를 취한다.(발코니와 스팬드럴의 설치, 외벽 마감재의 제한, 발코니 확장 불허, 피난계단의 방연화, 층간 방화구획의 엄격한 적용, 엘리베이터홀의 방연)(3)* 고층 건물 내에 스프링클러 설치 및 정상적 작동 활성화 및 긴급상황 안내 방송 사전 연습(4)* 부실공사를 방지하기 위한 건설현장의 감리 감독을 철저히 한다.(5)* 모든 국민들에게 평상시 화재 예방 할수 있는 교육들을 만들어 교육의무화 한다.(6)NPPP542.361시공부실로인한 화재 환경미화원들 전기 스파크 원인6단계 : 취해야할 행위 결정* 화재의 원인으로 밝혀진 환경미화원들의 문어발식 콘센트 사용에 의한 전기 스파크로 인한 화재는 과연 그들의 문제인지 시공회사의 부실공사는 없었는지 파악해보아야하고 또한 초고층 고층 건물의 화재 예방 또한 먼저 고쳐야 한다.
1일 카이로이집트 박물관카이로의 중심부에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미술과 고고학적 유물의 수집으로는 양과 질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19세기 초부터 이집트의 고(古)미술품이 함부로 해외에 반출되자 이를 우려한 프랑스 고고학자 A.마리에트(1821∼1881)에 의해 1858년 카이로 교외의 불라크에 창설된 후 190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그레코로만시대 초기에 이르는 유물 약 10만 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이집트 각지의 신전(神殿)유적이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로서, 건축의 일부, 각종 조상(彫像), 부조(浮彫) ·벽화 ·공예품 등 당시의 생활 전반에 걸쳐 있다. 일괄 유물로는 제18왕조 말 투탕카멘묘(墓) 부장품이 가장 유명한데, 그의 황금마스크와 황금의 관(棺)을 비롯하여 호화롭던 파라오의 궁정예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카프레왕 ·멘카우레왕 ·람세스왕 등의 조상, 서기 ·귀족 ·궁정부인, 일하는 노예의 조상 등이 유명하다. 또, 역대 파라오의 미라를 한 곳에 모아 놓은 방도 있다.이집트 고고학박물관카이로의 고고학박물관은 타흐릴 광장에 위치하고 있어서 교통이 편한 곳이다. 이 박물관은 장소는 좁지만 유물이 많은 곳으로도 이름이 나있다. 나중에 느낀 것이지만 아무리 많아도 스케일면에서는 아무래도 각지방에 널려있는 신전이나 유물에 비하면 왜소한 느낌마저 들고 무엇인가 빠진 느낌이 든다. 방대한 유물이 오랜 시간의 궤적속에 숨쉬고 있다. 교과서나 책에서 보는 이집트와 차원이 다름을 느낀다.2일 카이로기자(쿠푸왕 피라미드, 스핑크스 관광) 피라미드, 제2피라미드,제3피라미드. 스핑크스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의 미리를 만드는데 쓰인 해부대가 놓여 있다.알라바스타(설화석고)로 만든 스핑크스 관광람세스 2세의 상 동쪽 광장에 있다. F. 페트리에 의해 1912년 발굴된 것으로 제18왕조 아멘호테프 2세의 것이라고 전해진다. 크기는 기제의 스핑크스에 미치지 못하지만, 단정한 모습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신전의 남쪽 입구를 수호하는 것 중의 하나다.5일 파이윰 오아시스 부근파이윰 오아시스 부근에 지은 왕실의 장례용 피라미드와 신전들은 이 시기에 더 규모가 작아졌고 주로 말린 벽돌과 석재포장을 사용했다. 특히 부조와 회화는 높은 수준의 예술적 기량과 정확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멤피스의 전통을 되살린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부조작품은 테베의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과 카르나크에 있는 세소스트리스의 작은 사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인물과 문구를 배치하는 데서 여백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조각의 세련미를 크게 높이고 있다.6일 세인트 안토니우스 수도원홍해 연안과 아라비아 사막의 라스 자파라나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지평선에서는 갈라라 산 아래에 있는 초록색 점 하나를 뚜렷이 볼 수 있다. 12m 높이의 모래색 벽에 둘러싸인 세인트 안토니우스 수도원이다. 옛날 '바구니 엘리베이터'가 걸려 있던 거대한 문이 흰색 쿠폴라를 향해 반쯤 열려 있다. 이 수도원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준 성인이 갈증으로 고통받으면서 사막의 유혹(환영)을 견뎌낸 곳이 바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굴에서였다. 이 수도원은 7세기에 지어졌다. 오늘날 이 수도원은 면적이 6ha이고, 위에 순찰로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7개의 교회가 그 안에 자리잡고 있다. 하나 있는 샘 덕분에 종려나무, 캐롭나무, 망고나무, 올리브나무 등이 자라고, 오늘날에도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수도사가 만드는 영성체 빵에 난 구멍은 그리스도의 다섯 군데의 상처, 12도사와 4명의 복음서 저자를 상징한다.7일 세인트 폴 수도원이집트 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수도원 중 하나이다. 이집트나 된다. 신전은 BC 2000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다고 전하는데, 역대 왕에 의해 증개축이 되풀이 되어, 초기의 유구로는 제12왕조 세누세르트 1세의 성당만이 남아 있다. 현재의 신전은 신왕국시대부터 1500년 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걸쳐 건립된 10개의 탑문, 제19왕조의 창시자 람세스 1세로부터 3대에 걸쳐 건설된 대열주실(입구에서 스핑크스 참배의 길, 제1탑문, 제2탑문으로 가는 근처에 있다. 높이 23m, 15m 두 종류의 큰 기둥이 134개나 늘어서 있는 것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와 그의 딸로서 여왕이 된 하트셰프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 투트모세 3세 신전, 람세스 3세 신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높이 약 23m의 석주 134개가 늘어선 대열주실은 너비 약 100m, 안쪽 깊이 53m로서 안쪽의 하트셰프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와 함께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신전은 중왕국시대 이래 줄곧 아멘 신을 모시 곳으로, 제2탑문 왼쪽 부분의 제사 장면 외에 여러곳에 옛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부조가 보인다. 또한 카르나크 신전에서는 매일 빛과 소리의 나이트 쇼를 즐길 수 있다. 쇼는 입구 부근, 제2탑문 앞, 제7탑문 앞, 그리고 성스러운 연못 등 광대한 신전 안을 빛과 소리로 안내하면서 진행된다. 소리도 매우 깊이 있는 스테레오이므로 대단히 박력있다. 마지막으로 성스러운 연못에 설치된 무대에서 보는 하늘의 별도 훌륭하다. 한여름 이외에는 매우 추우므로 충분히 준비해 가야 한다.룩소르 박물관테베의 유적에서 출토된 것을 소장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1975년에 개관했다. 진열실은 1.2층으로 나뉘어 있고, 출토품의 연대는 5000년 이상 지난 선왕조시대로부터 이슬람이 점령한 시대까지 약 3000년에 이른다. 볼만한 것으로는 입구의 오른쪽에서 시선을 끄는 적색 화강암의 아멘호테프 3세의 두상, 1층 안쪽의 하트셰프수트 여왕의부조, 람세스 3세의 작은 오벨리스크, 힉소스와의 싸움을 기록한 카메스의 비석, 2층의 서쪽에 있는 아멘호며 이중 일부만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람세스 3세 장제전람세스3세 장제전의 규모는 룩소신전못지 않다. 첫번째 탑문벽에는 람세스 3세의 업적을 나타내는 커다란 부조가 그려져 있다. 입구에는 토드신의 석상이 있고 안에 들어가면 람세스3세의 신전과 아문신전이, 가장 끝에는 성소가 있다. 성소는 고대에는 어두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지붕이 무너지고 없어 장제전에서 가장 밝은 곳이 되었다.왕비의 골짜기파라오의 왕비들을 묻은 곳으로 왕가의 골짜기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로 1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곳을 '아름다운 자리'라는 뜻의 "세트 네페루(Set Neferu)"라고 불렀다. 1903~1906에 이탈리아의 탐험가들이 8기의 무덤을 발견했다. 발견했을 당시에도 많은 것이 불타거나 낙타나 당나귀의 축사로 이용되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볼만한 곳은 람세스 II세의 왕비인 네페르테리의 묘와 람세스 II세의 젊은 왕자로 어린 나이에 죽은 아멘히르 코페세프(Amemhir Khopeshef)의 묘 등이다. 네페르테리의 묘는 복원에 들어갔다가 1995년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라메세움(람세스 2세 장례신전)핫셉슈트 여왕의 장제전에서 대략 30분을 차 로 달리면 람세움이라고 불리우는 람세스 2세의 신전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우선 입구에 들어가면 주위에 황량한 들판과 폐허로 변한 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과거의 영화가 남아있는 것은 이제 무너진 돌 덩이들 뿐... 우선 정면에 보이는 것은 람세스 2세의 석상인데 목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진 우측 아래에 있는 좌측 람세스 동상의 머리이다. 대략 크기는 2m정도이니 신전의 규모는 상상으로 가름될수 있을 것이다.11일 에스나, 에드푸, 콤옴보크눔신전 에스나에 위치크눔 : 카타락트(폭포지대)의 신으로 나일강을 상징하며, 다산(多産)과 창조의 신으로 알려졌다. 남(南)이집트에서 신앙되며, 주신전(主神殿)은 상아섬에, 아내 사티스 및 아누키스와 함께 모셔졌다.호루됐다.이시스 신전고대 이집트 말기 왕조시대부터 로마 지배시대에 걸쳐 건축이 이루어진 곳인데 이곳은 아스완 댐의 완공에 의해 수몰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부근의 아기르키아섬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강 중앙에 떠있는 아기르키아섬의 이 신전은 정말로 아름답고명쾌한 느낌을 준다.누비안 박물관아스완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의 누비안 유물을 전시한 곳. 오픈시간 매일 9시-1시, 5시-10시. 학생 10EP. 카메라 반입료 10파운드. 상당히 많은 유물이 있음.13일 아스완엘레판틴 섬이슬람교 이스마일파의 최고 지도자 에가 칸(1877∼1957년)의 간소한 묘역. 에가 칸은 매년 겨울동안 인근에 있는 백아의별장에 묵었었다. 묘 역에서는 나일강에 떠있는 엘리펀티네 섬과강변의 에스완 마을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세헬 섬상형문자로 뒤덮인 기둥들이 있다. 세헬섬은 고대 신들이 새겨진 멋진 암벽 조각이 발견된 이집트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 파미네 기둥이라고 불리운다.약 기원전 300년대인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필레 섬예로부터 '나일의 진주' 의 예찬되어 오던 아름다운 진초록의 섬이었으나 에스완댐의 완성으로 수몰, 7∼8월경 물이 빠지는 시기에만 모습을 나타낸다. 섬에 있던 이시스 신전을 비롯한 역사적 건축물은 당시의 위치대로 인근 마키루키아 섬으로 옮겨 졌다. 이시스 신전은 보존이 양호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14일 아스완, 아부심벨에가 칸 묘이슬람교 이스마일파의 최고 지도자 에가 칸(1877∼1957년)의 간소한 묘역. 에가 칸은 매년 겨울동안 인근에 있는 백아의별장에 묵었었다. 묘 역에서는 나일강에 떠있는 엘리펀티네 섬과강변의 에스완 마을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아스완 하이 댐나일강 하구에서 약 900Km 상류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댐 가운데 하나. 1959년 기공, 1970년 완성했다. 전체 길이 3, 600m, 수면위 높이 평균 111m, 저수지 (나일호)는 스완 영내까지 전체 길이 약 500Km, 전 면적 500 평방Km. 댐 완성에 의해 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여성의 삶고려시대는 다른 시대에 비해서 남자와 여자가 비교적 평등한 사회였다. 따라서 가정 생활이나 경제 생활에서 여성의 지위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높아 남자와 거의 동등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조선시대와는 달리 혼인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 적 이었다. 고려 시대에 왕실이나 일부 지배층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행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다.또한 혈족과의 상간(相姦)과 결혼이 가능 했다. 에서 "우리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다. 지금 신분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처 한 명만 두는 데 그치고, 아들이 없는 사람마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다. 바라건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처와 첩을 둘 수 있게 하소서." 라고 박유라는 신하가 임금에게 일부다처제를 허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제상들이 자기 부인을 두려워하여 논의조차 하지 못하였고, 결국 이 주장이 시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여성의 지위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그리고 호적 기록에도 몇녀 몇남 이런식으로도 남녀에 관계없이 출생자 순으로 기록이 되었다. 유산상속에서도 에서 보면 어머니가 일찍이 재산을 나누어 줄 때 나익희에게는 따로 노비 40구를 물려주었다. 나익희는 "제가 6남매 가운데 외아들이라 해서 어찌 사소한 것을 더 차지하여 여러 자녀들로 하여금 화목게 살게 하려 한 어머니의 거룩한 뜻을 더럽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사양하자 어머니가 옳게 여기고 그 말을 따랐다.라고 할 정도로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많이 주지 않고 남여 차별 없이 출생 순에 따라 차등, 균등 분배 했고 시집간 딸자식에게도 돈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으며,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아내가 재산 분배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노비를 비롯한 재산의 소유권에서도 아내와 남편이 재산을 따로 소유하였다.또한 여성의 지위가 높은 만큼 자녀의 의무도 균등했기 때문에 불교에서 개인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종법의 수용이 미미했다는 점, 그리고 서류부가 혼속의 영향으로 결혼 뒤에도 친정에서 살 수 있었다는 점이 합쳐져 여성이 결혼을 하지 않고 친정부모를 모신다거나 결혼을 한 뒤에도 친정부모에게 효도를 다 할 만큼 부모에 대한 봉양은 물론 조상에 대한 제사까지도 아들 딸 구별 없이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행이었다. 사찰에서의 재가 중요했으므로 돌아가신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아들의 중요성이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덜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들이 없는 경우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받드는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 하였다. 절에서의 재는 행사 주관은 승려가 하고 가족들은 비용만 내면 됐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재를 베푸는 윤회 봉사가 가능했다. 딸의 자식인 외손도 가계를 계승할 수 있었고 어머니가 호주가 되기도 했다. 고려시대 여성은 재산상속권, 가계상속권, 제사상속권 등에서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고려시대에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갓집에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까지 이어져 조선 중기까지도 결혼 후에 남자가 여자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본처와 첩 사이의 차별은 없었으며 그로 인한 적서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처가살이 사위 외손자에게도 음서의 혜택이 돌아갔고, 자유로운 재가가 가능했으며, 재가녀의 자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또한 대다수 고려인들은 불교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어 내면생활은 주로 불교에 의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려의 종교가 불교라고 해서 여성 출가를 권장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비구니의 묘석 등을 증거로 볼 때 여승으로 출가한 사례가 입증 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을 통해 여성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며 불교행사나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등 부녀자로서 조신한 몸가짐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그리고 무신정변 이후 몽고의 침입과 동시에 고려시대 여성의 삶은 변화를 겪게 된다. 한국 중세 원 간섭기에는 친 원 세력인 권문세족이 등장하고, 몽고풍, 고려양이 유행함에 따라 여자의 족두리, 옷고름에 차는 장도, 신부의 연지 찍는 풍속, 여자들이 귀뿌리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속, 여자들이 다리를 넣어 머리를 땋는 일 등과 같이 지금까지 아직도 남아있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몽골의 풍습인 일부다처제가 수용되었으나 권문세가 일부에서만 그 관습을 받아드렸을 뿐 여전히 일부일처제였다. 또한 다른 몽고풍과 고려양과 같은 것들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변형되거나 사라지지만 이전의 고려 전통의 사회양식에서 생겨난 여성의 지위나, 풍속 등은 조선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러 임진왜란 전까지 유사하게 이어졌다.그러나 고려시대 여성들이 비교적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사회적 진출은 하지 못하여 벼슬로 나아가지 못하는 제약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서는 실력보다는 뒷 배경이 되어야 관직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를 4개의 시기로 나누어 보면 문벌귀족사회에서는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집안이 주로 관직을 차지하였다. 광종 때 과거제도가 실시되었지만 과거로 벼슬에 진출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여자는 더욱 없었다.무신집권기에는 힘이 센 무신만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무신이 아닌 이상 사회적 진출을 할 수 없었다. 권문세족기에 여자들은 대부분 원나라에 잡혀갔고, 관직에는 실력이 아닌 원나라에 등을 지고 있는 사람이 진출했다. 말기에 신진사대부들은 실력위주였으나 이때도 여자는 없었다. 결국 그들의 권리나 주장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은 항상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완벽하게 남자와 여자가 평등했다고는 할 수 없다.반면 조선시대의 여성의 삶에서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사회적 및 경제적 처우가 매우 떨어졌다. 사실 조선 초기부터 중기 까지는 생활면에서 남성과 거의 동등하였다.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아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가 보편적이었다. 또한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이는 15세기까지 조선 사회 당시 사람들은 양자보다 직접적인 혈연관계에 있는 딸에게 봉사권이나 재산상속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15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부계 중심의 가계 계승 의식보다는 부녀의 정이 우선하였으며, 그에 따라 제사 및 재산의 상속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식의 딸 혹은 외손에 의한 봉사는 조선 중기까지도 사대부가에서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의 경우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아들을 낳으면 외가에서 청년에 될 때까지 키우는 풍습도 있을 정도였다. 재혼도 가능했었는데 조선 성종 때 재혼이 금지되자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다는 것만으로도 여성의 지위가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러나 조선 중기 사림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지방출신의 선비는 인맥과 연줄이 닿아있는 같은 문중이나 학파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정계 진출이 완전히 단절되거나 간혹 진출한다 할지라도 부를 상징하는 세력을 키우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부 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같은 양을 유산으로 나누어 주던 것을 장자에게만 집중적으로 물려주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과 차남들은 장자에 비해 재산의 권리가 적고 제사 역시 지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에게 돌아가던 경제권을 상실하게 되어 여성에게는 단순히 육체가 가지는 생산력이라든가 노동력 정도의 가치만 남게 되어 전체적으로 볼 때 여성들의 지위가 하락하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부터 성리학적 명분론이 퍼지면서 지나친 성리학의 영향으로 유교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으면서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었다. 남자의 권위를 여자보다 높게 올려놓아 여성의 지위가 급 하락하고 여성에 대해서는 남성중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보조적 역할 담당자로 인식하였다. 남존여비, 남아선호, 적서차별 같은 올바르지 못한 풍속들이 생겨났으며 아들과 딸을 차별하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해서 남녀의 만남이 활발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여성을 출산, 양육, 가사노동에 전념시키기 위해 법적으로 사상적으로 여러 가지 제한을 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역시 여성의 사회진출이 힘들었지만 조선시대는 더더욱 여성이 사회진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남자만이 학문을 하게 되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진출할 길은 전혀 없었다. 물론 관직에도 내명부라 하여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부인도 관품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권이 전혀 없었고 단지 여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