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품 분석 2.1. 소설의 배경 - 문화대혁명소설의 배경은 1966~1976년 중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문화대혁명은 당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이다. 마오쩌뚱은 공산 혁명이 계속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 그의 정책에 반대 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룹은 거의 사상가들이었으며 교사, 과학자들이 특히 용의자가 되었다. 그들은 혁명에 강하게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하거나 죄가 씌여졌다. 그리고 나서 잘못된 집안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 되는 사람들도 숙청되었다. 잘못 된 집안 배경이라는 것은 부유층이거나 지주층을 뜻하는 것. 이들은 직업을 잃고 사람들에게 비웃음, 조소를 당했다. 학생들은 홍위병이라고 불리는 조직으로 결성되었고 그들은 정책적으로 불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밀고하는 것을 부추겼다. 홍위병은 중국인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세력이 되었으며 그들이 워하면 언제든지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홍위병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 되는 사람을 발표할 수 있었고 그들의 집이나 가게를 파괴했다. 사람들은 상처를 입거나 죽음을 당했다. 매일매일 테러와 같은 경험들이 추가되자 전 세대의 중국인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공산주의 이외의 모든 사상을 탄압했기 때문에 문화 활동이 일어날 수가 없었고 지식인들은 모두 사상가로 오인되어 고문을 받거나 재교육을 받았다.◇ 소설 속 문화대혁명 시기인 것을 알 수 있는 부분나중에 모주석의 말씀이 계셨다. …(중략) “말과 글로써 투쟁해야지 무기를 들고 투쟁해서는 안 된다.” …“학습을 재개하고 혁명을 지속시키자.”라는 말씀을 하시자 일락, 이락, 삼락이가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다시 수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식 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빈농과 하층 중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일락이는 요와 이불을 말아 등에 지고, 보온병과 세숫대야를 손에 들고 붉은 깃발을 따르는 대오를 쫓아 길을 나서게 되었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처음부터 조금 자극적인 내용이 나와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번 소설은 빨리 읽혔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더 흥미진진해졌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서 주인공이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인 아픔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 되어 있었고, 자연스레 내가 만약 미흔이라면 저 상황에 처했을 때의 느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었다.남편의 외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미흔의 하루하루는 무의미했다. 그래서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마음을 치유하고자 한다. 그런데 거기서 사랑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적당히 쾌락을 즐기는 규라는 우체국장을 만나게 된다. 소설의 인물들은 변화를 겪는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고 변화한다. 부희와 휴게소의 여자는 아이를 보고 그들 나름대로의 힘든 상황을 견뎌 낸다. 아이 때문에 참고 아이 때문에 힘들어한다. 이들 둘의 모습을 보고 미흔의 생각도 바뀌게 된다. 아이와 가정이라는 것은 여자들을 유폐시키고 여자들은 실종된다. 언제까지나 두 눈을 감고 잠자야 할까…….미흔은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모두들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 인생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구별되고 싶다고 느낀다. 평범하게 살아온 미흔에게 작은 일상 탈출은 너무나 즐거운 것이었다. 그녀를 일상으로부터 탈출시킨 것은 규였다. 가정과 아이에게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욕망이 이끄는 대로 규를 계속 만나게 된다. 결국엔 그와의 관계가 남편에게 들통 나게 되고, 미흔과 규는 도망치고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규의 마지막은 소설에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고 추측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 연약하게만 그려졌던 미흔이 소설 끝에 가서는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미흔은 어느 때 보다도 살아 있다고 느낀다. 불륜으로 가정을 파괴시키고 모든 것을 벗어버린 미흔은 불행해 보이지 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미흔이 아들인 수에게서는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도 아이를 보면서 참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여성은 자신을 버리고 가정에 묻혀 산다. 그러다가 자아를 찾기 위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불륜을 저지르게 되는 것 같다. 과연 여성들은 가정에 묻혀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아야 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Response on "Everyday use"앨리스 워커(Alice walker)는「Everyday Use」에서 정신적 가치에 이야기한다. 매기(Maggie)와 디(Dee)의 인물적 특성과 퀼트(quilts)라는 물건을 통해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는 인물은 ‘나’(I)이다. 나는 몸집이 크고(I am a large), 큰 골격을 가진(big-boned woman) 여성이다. 추위도 잘 견뎌 내고 돼지나 송아지죽이는 일을 다루는 일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거칠고 남성적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매기의 퀼트를 가져가려는 디에게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게 된다. 그 행동은 퀼트를 빼앗아 매기에게 주는 것이다. 작가는 이것을 통해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디는 나, 매기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녀는 매기, 나와는 달리 일정한 교육받았고 자기 스타일이 뚜렷하고 당찬 여자이다. 매기와 다르게 그녀는 천성적으로 아름다움을 지녔다. “매기보다는 하얀 피부였고(Dee is lighter than Maggie), 머리결도 좋고(with nicer hair), 통통한 몸매를 가졌다(a fuller figure)”고 묘사하는 부분에서 확인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과 걸맞게 세련되고 스타일이 뚜렷하다. 그녀는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들, “디”라는 이름 대신 “Wangero”라는 이름을 가지고 온다. 그녀가 이름을 아프리카식으로 바꾼 이유는 흑인들을 억압했던 미국인들의 미국식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집에 있던 “우유교반기”(the church)와 “퀼트”를 단지 장식품의 용도로 쓰기 위해 가져가려고 한다. 디의 모습을 종합해 보면 그녀는 본질이나 가치를 보지 못하고 단지 보여 지는 것에만 충실하다. 그러므로 그녀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그런데 그녀는 나가 퀼트는 매기의 것이라고 말하자 “매기는 이 퀼트의 진가를 몰라요!”(Maggie can't appreciate these quilts!)라고 대꾸한다. 이 말은 디가 매기에게 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은 디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또 “당신은 정말 이해를 못해”(You just don't understand)라는 말도 모순된 것임을 알 수 있다.매기는 할머니의 퀼트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물이다. 매기의 외모는 예쁘지도 않고 팔과 다리에는 흉한 화상 상처가 있다(homely and ashamed of the burn scars down her arms and legs). 그리고 자기보다 뛰어난 언니를 부러움과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외모와 당찬 언니로 인해 항상 주눅이 들어 있어서 디가 퀼트를 가져가려 할 때 그것을 빼앗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때 매기는 “나는 퀼트 없이도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어”(I can remember Grandma Dee without the quilts) 라고 말한다. 여기서 퀼트를 장식품으로 이해하는 디와 달리 매기는 이것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매기) 퀼트하는 법을 알려준 것은 할머니와 이모였다”는 부분을 볼 때 매기는 할머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물려 받게 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워커는 퀼트를 빼앗아 매기에게 주었다. 디도 Dee라는 이름이 대물려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꾸어 버리기 때문에 집안에서 내려오는 관습을 파괴시키는 자로서 비판 받게 되는 것이다.
◎ Job과 OedipusJob은 히브리적 사유, Oedipus에서는 그리스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문학이다. Job은 신본주의적인 반면에 Oedipus는 인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JobJob은 구약성서 중 하나로 Job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탄에 의해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게 된다. 하나님의 허락으로 사탄은 욥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소유물을 잃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자 사탄은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한다. 욥의 온몸에 악창이 생겨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때 그의 친구들인 Eliphaz와 Bildad, Zophar이 찾아와서 위로를 한다. 친구들은 그의 재앙이 욥의 잘못 때문이라며 주장하였지만 욥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욥은 더 나아가 자신의 의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던 젊은 Elihu는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평하고 의로우시며 절대 주권을 지니셨다고 주장한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욥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는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욥은 자신을 지적했던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며 기도를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전보다 더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하신다.○ Oedipus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저주를 받고 태어난 Oedipus는 발목에 못을 박은 채 버려지게 된다. 어린 오이디푸스를 불쌍히 여긴 한 양치기가 이웃나라에 그를 넘겨주게 된다. 이웃나라에서 성장한 그는 자신이 저주스러운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신탁을 받고 가는 도중에 그의 아버지 Laius를 살해하게 된다. 그때 테바이는 왕도 죽고 스핑크스라는 괴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내서 맞추지 못하면 죽이곤 했는데 오이디푸스는 그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를 구하게 된다.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왕이 된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게 된다. 그러던 중 테바이에 재앙이 와서 신탁을 받았는데 그 신탁을 오래전 왕을 죽인 살인범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살인범을 찾는데 온 힘을 쏟게 된다. 조언을 얻기 위해 유명한 예언가인 테레시아스를 불러 도움을 요청하는데 살인범은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무시하고 살인범을 찾는데 노력한다. 그러던 중 이웃나라에서 온 사자에 의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주의 신탁이 빗겨 갔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사자는 오이디푸스가 아버지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이 테바이의 사람으로부터 아이를 받아 왕에게 바친 것을 고백한다. 테바이의 양치기와 사자와 삼자대면을 하고 나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과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이 이루어졌음을 깨닫는다. 그 사실을 알고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Jocasta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그의 눈을 찔러 자신의 무지를 벌한다.◎ 인간의 고통과 지혜에 대한 관점의 차이욥과 오이디푸스는 고통을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원인을 서로 다른 곳에 두고 있다. 또한 지혜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차이를 보인다.○ 욥이 받는 고통에 대해 Eliphaz는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던가? 정직한 사람이 갑자기 죽던가? 내가 본 바로는, 악의 밭을 갈고 죄를 심는 자들은 뿌린 대로 거두며, 하나님의 숨결에 망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끝장이 난다네”(Consider now: Who, being innocent, has ever perished? Where were the upright ever destroyed? As I have observed, those who plow evil and those who sow trouble reap it. At the breath of God they are destroyed; at the blast of his anger they perish, 4:7-9)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고통이란 죄를 지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이라는 뜻이다.이에 비해 오이디푸스는 죄에 대해 스스로 벌을 내리고 고통스럽게 한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르게 되는데 이때에 그는 “나에게 재앙을 가져다 준 것은 아폴론이다. 그러나 눈을 찌른 것은 바로 나다”(Apollo! It was Apollo! He brought this pain suffering to me. But it was my own hand that struck the blow)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저주한 신을 탓하지만 의도되지 않았던 의도적이었던 간에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해 벌한다.그리스적 사유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죽음으로 외면한 Jocasta와 는 달리 스스로 고통을 주며 벌을 주는 행동은 위대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유는 인간의 고통은 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다.욥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지혜의 길을 아시고, 총명이 어디 있는지 아신다네”(God understands the way to it and he alone knows where it dwells, 28:23)라고 주장하는데서 지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지혜란 하나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Genesis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이 지혜를 얻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판단의 기준이 모두 신에게 있으며 그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지식이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르시길,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며 악을 떠나는 것이 총명이니라’고 하셨다네”(And he said to man, The fear of the Lord--that is wisdom, and to shun evil is understanding, 28:28)라고 말한다. 히브리적 사유는 모든 것이 신이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에 비해 오이디푸스에서 지혜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진리였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한 지혜가 있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 자신이 재앙이며 그 살인자라고 말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육체적인 눈은 없지만 정신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던 테이레시아스르 무시하고 조롱한다. 결국엔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마음을 눈을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육체적인 맹목성만을 믿었던 자신을 단죄한다. 육체적인 눈을 버리고 정신적인 눈을 얻음으로서 그는 자기 인식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적 사유에서의 지혜란 인간에 대한 지혜가 최고의 지식이었다.
Homework#1(Response paper on "Harlem")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는「할렘」(“Halrem”)에서 흑인들을 천대하는 백인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동시에 흑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이 시에서 휴즈는 흑인들을 “연기된 꿈”(a dream deferred)에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들에게 천대받고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 수 없는 흑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연에서는 차별받는 흑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으며 현재의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2연부터는 흑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4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로 흑인들의 모습을 “햇볕 속에 말라 버린 건포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햇볕”(sun)은 백인을 가리키며 "건포도"(raisin)는 백인들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해 꿈을 펴지 못하고 움츠려 들 수밖에 없는 흑인들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흑인들을 곪은 상처에 비유하고 있다. 흑인들은 백인들의 천대에 억압받고 꿈을 펴지 못해 결국엔 포기하게 되는 것을 “뛰어가다”(run)라고 표현했다. 세 번째는 “썩은 고기”(rotten meat)라고 비유한다. “악취를 풍기는”(stink) 썩은 고기는 흑인들의 가난한 생활 모습을 표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빵 껍질”(crust)과 “설탕”(sugar)으로 흑인들을 비유한다. 빵 껍질과 설탕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 하찮은 존재가 되어 버린 흑인들을 의미한다. “끈적끈적한”(syrupy)이라는 단어로 볼 때 빵 껍질과 설탕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3연에서는 흑인들의 미래 모습에 대해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 번째는 결국엔 백인들의 천대와 무시 속에서 흑인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게 되고 꿈을 펴지 못해 사회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흑인들이 안게 되는 고통을 “무거운 짐”(a heavy load)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폭발하다”(explode)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백인들의 천대와 무시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흑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백인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으며, 흑인들에게는 백인들의 천대 속에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시인은 첫 행과 마지막 행에 행간을 두어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마지막 행을 이탤릭체로 써서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행이 바로 첫 행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