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1) 냉전 시기의 소련의 한반도 정책19세기와 20세기 초의 국제상황은 유럽과 대서양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하리만큼 유럽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변수가 세계사를 좌우했었다. 따라서 고르바초프 이전, 소련의 대외정책의 중심도 유럽지역에 있었고, 아시아지역에 대한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소련의 대 동북아정책은 소련의 유라시아적인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파생된 대 유럽정책과의 강한 연계 속에서 추진해야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대 동북아정책을 추진하는데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 아시아·태평양지역이 북미 및 유럽과 함께 국제정치와 경제의 중심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동북아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소련이 부분적으로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을 개발하고자 하였고, 또한 이 지역 내외의 전략적 정치적-경제적 연계가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1980년대 중반 소련은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당시 소련 국민의 생활수준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물론 일부 개발도상국보다도 뒤떨어졌고, 게다가 소련 사회 경제의 비효율성은 눈에 띄게 악화되어 더 이상 엄청난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되었다.)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추진과 더불어 보여 주었던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유라시아라는 소련의 지정학적 연계성보다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과 아시아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근거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소련의 사회경제발전을 촉진하는 신노선을 선언하며,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한편, 종전의 소련대외정책이 자국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이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변화하는 국제상황에 적합한 대외정책이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국제사회에서의 힘의 기반은 군사력보다 견실한 경제력이라는 사실을 고르바초프를 중북·소 간 교역량은 증가세가 지지부진하였다. 소련의 항공·우주 기술과 한국의 생필품 제조 기술의 교류는 이미 이때부터 그 조짐이 있었던 반면, 공산주의 경제의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던 북한과는 경제적 교류 측면에서 하등 이익 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북·소 교역량은 오히려 감소하게 되었다.더불어 공산주의 경제 제체를 완전히 폐기한 개혁지향의 러시아 지도부는 북한체제를 경멸하였고, 그에 따라 경제 및 군사 원조 등 북한체제를 연장시켜 주는 일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이 시기의 한반도 정책의 의도를 살펴보면,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하는 소련의 새로운 지도부는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적극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채택하였다. 고르바초프 정권은 한국을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아·태 지역 전체에서도 소련 경제에 이득이 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경제협력 파트너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르바초프 시대의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변화는 고르바초프의 ‘적극적’인 대 한반도 정책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3) 냉전 이후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1) 보리스 옐친 집권기 (1991-2000)집권 1기(1991-1996) 전반 - 한국 중시 정책의 지속집권 1기 후반 - 친한국 정책의 사실상 실패와 대한반도 정책의 수정집권 2기(1996-2000) 한국·북한 균형정책1기 전반에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로이 출범한 러시아의 외교정책 목적과 인식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할 수 있기보다는 탈냉전시대 새로운 세계질서 대두와 급격한 변동의 국내사정에 따라 한반도를 포함한 기타 지역의 외교정책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재구성으로 진행되었다.1기 전반에 대남 관계에 관해서는 1992년 11월 옐친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러 기본관계조약’을 체결했고, ‘한·러 군사교류에 관한 의정서’를 교환하였다. 이는 양국간 쌍무조약으로서 여러 가지 분야에을 여전히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대내적 요구와 현실이 결합하여 전보다 북한에 대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그 결과 북·러 양국은 거의 단절되다 시피한 고위급 관료 회담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러시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던 북한 경제에 대한 넓은 범위의 지원을 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 또한 대북 지원에 대한 정책 수립과 더불어 실행 단계에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다.그러나, 북·러 관계는 과거 북·소 관계만큼 회복되지는 않았다. ‘1961년 조·소 군사우호협력조약‘에 대해, 러시아는 남한과의 수교 과정을 통해 그것이 사실상 사문화 되었다고 입장을 비친적이 있는데, 이것의 효력을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북한과 러시아는 이견을 보였다. 보다 근본적으로 소련이 해체된 상태에서 계획 경제를 버리고 국가 주도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는 초기 과정에 있었던 러시아로서는 계획 경제를 고수하고 과거 스탈린주의와 같은 주체사상을 내세우는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러시아에 대한 북한의 상환불가능 채무는 나날이 늘어갔으며, 원칙적으로 북핵 문제에 대해서 러시아는 반대의 입장을 꾸준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동반자의 관계로 복귀할 수는 없었다.)이 시기의 한반도 정책의 의도는 1기 전반에서 1기 후반·2기로 넘어오면서 러시아는 친한국 외교 정책에서 한국과 북한을 대등한 위치에 놓는 전략으로 방향을 수정하였다.우선, 옐친은 권력의 강화를 위해 역으로 보수파의 의견을 탄력적으로 받아들였다. 차기 대선과 상·하원 선거 결과를 노린 행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미국 주도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반감에는 상당부분 공조를 하여, 미·중과는 다르게 한반도에 대한 독자적인 영향력을 구축해야한다는 방향으로 외교안보정책을 돌리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러시아는 그 동안 소홀했던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한국과 북한을 동등하게 대우선 정책을 수정하였다고 하였다. 위의 지리적 안보와 정치적 안보뿐만 아니라 푸틴 정권에 들어서도 경제적인 이익을 확대하는 정책, 즉 경제적 안보는 그 중요성이 퇴색되지 않은 채, 지리적·정치적 안보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졌다. 한반도는 유럽이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폐쇄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같은 대 사업에서 이익의 제한을 받고 있다. 또한 폭발적인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는 중국이 한반도를 겨냥한 정책을 내세움에 있어 역시 러시아와 같이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대한반도 정책을 보다 더 중요시 할 수밖에 없었다.한반도, 그 중 특히 한국은 러시아의 경쟁력 있는 상품을 소화할 수 있는 시장 경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앞으로 착수할 시베리아 개발 사업에서도 한국은 훌륭한 개발 파트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푸틴 정권은 한반도에 대해 균형 정책을 펼쳐 안정 중시의 정책을 폄으로써 경제적 안보를 수호하려고 노력하였다.한반도정책에 있어서 푸틴 정권은 정권 출범 직후 가장 먼저 북한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옐친 정권 후반기 ‘한반도 균형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2000년 2월 기존 ‘조·소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대체하는 ‘북·러 신 우호조약’을 맺었는데, 과거의 자동군사개입조항과 유사한 안보조항을 삽입하였다. 또한 푸틴은 취임 직후 가장 먼저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는 역대 러시아 최고지도자 가운데 최초의 방북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푸틴의 전격적인 북한 방문은 앞서 강조한대로 한국과 북한을 동등한 거리에 놓고 외교 정책을 펼친다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지난 정권 당시 한국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폈지만,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내심 기대했던 요구 사항을 충족할 수가 없었을뿐더러, 한국은 신흥 강국인 중국, 그리고 지난 냉전시기부터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과의 관계에 정책을 집중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입아 국내 경제를 본 궤도에 올려놓고, 서방 세계와의 마찰을 줄이는 등, 산적한 현안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푸틴 정권의 대한반도 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갈 가능성이 크다.(4) 북한 핵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2006년 10월 3일 북한의 핵실험 의도 선언 당시 러시아는 북한에 핵실험 자제를 촉구하였다. 이어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북한을 비난하였지만 북한에 대한 UN의 직접적인 제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은 이중적이다. 경제적 파트너로서 북한을 인식했을 때, 북한은 러시아에게 있어서 매력이 전무한 국가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발 벗고 나설만한 동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전적으로 미국의 정책에 의존할 수 없다는, 국가 대 국가의 자존심 문제도 있다. 러시아는 북핵 실험 당시, 핵실험이 미국의 대북 금융봉쇄 정책에 기인한다고 판단했고, 북한과 미국에 양비론을 펼친 바 있다.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러시아가 등거리 외교 선상에서 북핵에 대한 적절한 억제를 추진하지 않을 수는 없으며, 북한의 지속적인 핵 실험에 대해 아무런 견제를 하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다음의 세 부문의 안보 분야에서 위협을 받을 수 있다.1) 지리적 안보의 보장러시아는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며, 시베리아를 포함한 동러시아 지역은 아직까지 미개발 상태이나, 천연 자원의 보고로 엄청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또한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중국, 몽골, 북한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러시아의 입장으로서는 향후 러시아의 전략적 성장의 동력이 될 동러시아 지역에 대한 안보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행해야 하는데, 북한의 핵 문제는 러시아의 안보 정책에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북한이 핵실험을 지속적으로 하여 핵무장 의도를 계속하여 내비칠 경우, 미국의 한반도 MD 체제 구축 의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러시아는 서쪽 국경에서 미국의 MD 체제 구축에 대한 위협을 이미 절감한 바 있다단계다.
1.서론음악이 인간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현대에 이르러 과학적인 증명 방법을 통해 충분히 입증이 되었지만, 이는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검증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과학적 증명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명멸의 과정을 거친 고대로부터 근대까지의 수많은 국가들은 정권 차원에서 음악을 정치적인 수단의 달성을 위한 훌륭한 도구로 대접해왔다. 현대 국가들에서도 중요한 선거전이나 정책홍보에 있어, 귀에 익숙한 음악들이 선전도구로써 사용되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어용의 측면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음악은 그 위력을 인정받았다. 각국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하는 ‘도참(圖讖)’이나 ‘예언’과 같은 요소들은 구전을 통해 전달 또는 전승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음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또한 종교나 문화의 전파 과정에서도 음악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다각도에서 이용되었다.이렇듯, 음악은 인간 정신의 향락을 상승시키는 본래의 역할 이외에도 국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다양한 분야에서 선전 도구로써 끊임없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 파급 효과는 정권의 교체나 문화의 흡수·통합 등 중요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사소한 치정문제에 있어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 가지는 파급 효과는 역사를 통틀어 상당한 빈도로 목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위력은 너무나 대단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음악의 파급 효과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세뇌(brainwashing)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음악의 가락이나 선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상에 따라 효과적인 모양새를 취하는 음악 가락·선율과 더불어, 핵심적인 메시지인 가사 내용이 정밀하게 결합하였을 때 세뇌는 극대화가 된다. 이러한 점은 어용 음악이나 상류 귀족들이 즐기던 음악보다는 민간에서 구전되는 여러 음악들을 통해 더욱 더 자세하게행하던 신식 음악인 창가에 대한 통제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통제는 크게 불온 창가 가창 금지령·관인 창가의 교육·가요 음반 검열 등의 방향으로 이루어졌다.2. 일본 창가의 유입시조나 판소리가 주도적인 민간 음악이었던 조선 사회에 새로운 음률을 가진 서양의 음악이 들어 온 것은 구한말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음악을 통틀어 ‘신식 음악’이라고 하는데, 서양의 클래식 등도 포함된다. 신식 음악은 단순히 종교의 전파 이외에도 이면에 식민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전파되었는데, 이는 문화의 전파를 통해 장기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를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각 국가의 전통적인 감수성을 서양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일본은 조선과 달리 서양 문화를 16세기부터 꾸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는데, 신식 음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내 선교사들에 의해 신식 음악을 수동적이고 급작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그를 몇 세기에 걸쳐 꾸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19세기에 와서는 서양 음률을 자국의 입맛에 맞게 각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정권의 어용 음악보다 민간 사회에서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에도 막부 말기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신식 음률에 일본 전통시를 연결해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보통 이것을 일본 ‘엔카(演歌)’의 시초로 보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음악을 ‘창가(唱歌)’라고 지칭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내에서는 비단 일본식 엔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 당시 일본에 존재했던 일본화되지 않은 서양 음률 또한 포괄하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즉, 신식 음률로 이루어진 대중적인 음악이 곧 창가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창가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국민을 계도할 목적으로 유행된 것이었으며 한국에 수입될 때의 성격도 마찬가지였다.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인 의도가 증대될수아말고 학교로 나가보세.’라는 내용으로 이는 일본 의 음률에 가사를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하더라도, 서양식 음률의 수입을 조선 민중의 애환을 담은 내용을 덧붙여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형식이 대다수였으며, 다분히 친일의 내용을 담은 향가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경술국치 이후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보다 다양한 창가들이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재조선 일본인뿐만 아니라,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유입된 창가들은 조선화되는 과정에서 가락은 살아남고 가사는 한글로 개조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그 내용은 경술국치 이전보다 더욱 더 친일적이고 노골적인 속성을 띄게 되었다.3. 관인 창가의 등장또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창가들에 대한 통제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일제는 사립학교 등을 중심으로 불리워지던 애국독립가류나 창가들이 가지고 있던 나름의 민족의식을 철저히 봉새화기 위해 그러한 창가들이 수록되어 있는 ‘불온 창가집’의 사용을 금지하고 통감부 학부에서 만든 『보통교육창가집』(1910.05), 총독부에서 발간한『보통학교창가집』을 사용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것은 국가차원의 첫 관인 창가집의 등장이며, 대중 가요의 파급 효과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이들 관인 창가집에 실린 창가들은 소시민적 생활정서, 자연예찬, 권학과 근면의 강조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관인 창가집에 수록된 창가 중 일부는 아예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어 창가는 교육용으로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인해 새로이 창작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이는 경술국치 이후 초기 일제의 통치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일제는 지속적으로 교육용 관인 창가집을 펴내었고 이는 문화 통치 시기까지 꾸준하게 지속되었다. 학교에서 강제로 보급되는 이 관인창가들로 인해, 오늘날의 노래문화에까지 일본문화의 잔재를 남기고 있다.이러한 통제 정책 속에서도, 전국에 산재한 사학들에서는 독립가류의 전통을 계승한 창가들이 당시만 해도일 등은 사람들이 군집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데, 이는 총독부로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반일의 내용을 가진 창가가 불리워 지게 된다면, 그것이 촉매가 되어 대규모 민중 시위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로서는 ’주도면밀한 지도‘를 통해 창가가 가지고 있는 반일적인 요소를 없애야 했다.이를 바탕으로 관인창가는 주제를 한정하여 제작이 되었다. 특히 노골적으로 메이지천황을 찬양하는 창가나 황국사상의 내용을 담은 창가를 교육하였으며, 이러한 국가주의적 창가 아래 노동의 미덕 등을 강조하는 창가를 일관성 있게 배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조선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교육하기 위해 노력하였다.)4. 유행 창가의 분화와 가요의 등장관인창가의 등장으로, 기존 창가들의 통제와 변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간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창가가 등장하였는데, 그것을 이른바 ‘유행창가’라고 한다.) 총독부의 일방적인 보급과 교육으로 억지로 주입되었던 관인창가와는 달리, 유행창가는 자생적 성격이 강하였다. 유행창가는 일색이 짙고, 계몽적인 내용 위주의 관인창가와는 다르게, 희노애락의 감정을 담은 소소한 내용의 창가가 주를 이루었으며, 이 창가들이 급속도로 민중의 공감을 얻게 됨으로서 관인창가를 넘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행창가가 반드시 반일제적인 정서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유행창가는 일본 창가를 번역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 , ,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내선일체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있는 관인창가와는 달리,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는 유행창가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유행창가의 등장과 더불어 정형화된 창가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가요’가 등장하게 되었다. 정형시 느낌의 창가와는 달리 자유시 느낌의 가요는, 친근한 음률에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을 법한 남·녀 애정문제 등을 중심으로 폭 넓은 주제를 다룸으로써, 유행창가와 비등할 정도로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요는 일본식 엔카는 일본에 존재하고 있던 외국계 음반사들이 조선에 지점을 내는 등 외국 자본이 유입되었고, 대내적으로도 조선인 의주의 자생 회사가 들어서는 등 음반 산업이 형성되고 있었다. 특히, 윤심덕의 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수익성 창출의 단서를 본 사업자들은 축음기 녹음 방식을 통해 경쟁적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외국의 음반을 수입하게 되었다.) 당시 존재했던 거대 음반사로는 콜럼비아 레코드, 빅타 레코드, 포리돌 레코드, 오케 레코드 등 빅4가 있었으며, 기타 군소 음반사도 상당 수 존재했다.이 당시 일본 자본을 기반으로 한 음반사가 조선 자본을 기반으로 한 음반사보다 약 두 배 가량 더 많았는데, 이는 총독부는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그들이 문화 통치에 걸맞는 음반을 제작해 주기 바랬던 것 같다.그러나, 총독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음반 산업은 대중의 기호에 맞는 내용의 창가를 제작하게 됨으로써, 식민통치 후반기 총독부는 음반 검열을 실시하게 된다.)6. 음반 검열과 군국 가요 제작본격적인 음반 검열은 1933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음반을 압수하는 등 다소 가벼운 조치를 취하였으나, 1937년부터는 사전검열 등을 도입하여 검열 강도를 강화하였다.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에 입각해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내용과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가미된 음반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벌금이나 과료를 무는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음반 사업자들이 총독부 입맛에 맞게 주제를 한정하여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다.)특히, 1937년 발발한 중·일 전쟁은 초기 군국가요를 등장케 하는 사건이었다. 엄중한 검열로 인해 하락세를 띄는 회사의 수익성을 감내하지 못하던 음반 업계 관계자들은 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군국가요의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다.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1차 대전의 승리와 더불어 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세를 불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군국가요가 많이 생산되어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었다.) 일본에서 .)
사료노트? 주요 분석 대상 사료- 李亮,「失業京城」『삼천리』(1931.06.01 제16호), 삼천리사(三千里社)? 정보 가공 방향- 현재는 통용되지 않는 지명,인명 등을 찾는다.- 주요 분석 대상 사료는 1931년의 경성을 다루고 있는데, 비슷한 연대의 잡지나 도표를 통해 실업에 대해 분석하고 정보를 새롭게 가공한다.- 주 사료 분석을 위해 새로운 사료를 첨가하고 다시 재분석한다.? 기타 사항- 표제어는 기본적으로 각 사료 출전에서 쓰인 제목으로 하되, 사료의 일부를 인용하였거나, 주 사료처럼 사료의 분량이 제법 되는 경우 임의로 분할하고 새로운 표제어를 단다.- 수집된 사료는 현대 표준말로 고치지 아니한다.失業京城 (실업경성)1. 상경 전 필자와 필자 친구의 이야기, 상경『서울은』 그래도 朝鮮(조선)사람들이 사-는 듯하네. 이말은 어느날 아츰에 시골 친구가 와서 첫 人事(인사)로 한말이다.나는 이 시골친구와 文誼(문의)가 잇슨지 퍽도 오래다. 내가 茨城縣日立鑛山(자성현일립광산)에 가서 잇슬때에도 가티 잇섯고 또 내가 西伯利亞(서백리아-시베리아)에 잇슬때도 가티 黑麥包(흑맥포)를 씹부면서 流浪(유랑)하던 사람이다.그는 나와가티 近20년을 두고 이뜻- 저뜻- 轉轉漂流(전전표류), 무엇을 意圖(의도)하고 잇섯다.지금 이 자리에 그나 내나 다가티 30이 넘도록 하여노은 일이 업시 그저 困難(곤란)의 痕蹟(흔적)이 그 이마에나 그 눈초리에 흐르고 잇슬 뿐이다.그런데 이 친구가 웨이러한 말을 하는지 나는 잘안다. 그는 家族 때문에 朝鮮의 運動을 버리고 그만 故鄕에 도라가서 적으마한 雜貨商?(잡화상포)을 始作하엿다. 처음부터 무슨 資本이 잇슨 것이 아니라 그 아부지의 唯一遺産(유일유산)인 草家집 한채가 金融組合(김융조합)에 抵當(저당)이 되야 300圓인지 350圓인지 어더다가 고무신작이며 미영疋(필)이며 空冊가튼, 갑업는 日用雜品(일용잡품)을 팔고 잇섯다.그러나 資本競爭(자본경쟁)의 이 世上, 더욱 商業智識(상업지식)이라고 寸餘(촌여)의 頭腦(두뇌)가 업는 그 武骨(무골 自己의 苦痛, 自己의 不安을 X家的으로 解決할려는 國民性이 업섯다.農村이 그럿코 都市가 그럿코 學者가 그러코 經論者가 그럿타.지금의 朝鮮은 失業時代다. 以前에도 失業時代다. 李朝500年末의 淸貧志操(청빈지조)가 지금은 乞人意圖(을인의도)가 되여왓다. 於是乎 朝鮮의 失業은 時代를 떠난, 其數를 떠난 失業人民이기 때문에 그 的確한 例를 들기에 甚히 困難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잇는 한 都市의 失業數, 한 農村의 失業數를 짐작하면 朝鮮의 13道, 348郡府의 失業數를 대강은 알어볼 것이다. 그 한 例로都市의 元山1928年度1929年度1903年度43,27名4,327名4,613名(全人口의 2割할5步强)¾²村의 金堤1928年度1929年度1903年度3,2003,461名3,496名(全人口의 1割5步强)失業者의 統計를 이러케 본다면 今日 朝鮮同胞의 2千萬名이면 其失業者數가 적어도 2百萬名- 全同胞人口數의 2割은 될 것이다. 그러나 今日 朝鮮同胞의 生活上 苦痛은 2割일는지 3,4割의 실업일런지 그 數가 許多할 것이다.그런데 問題의 京城失業者- 卽 失業京城은 엇더한 것인가. 이룸펜의 서울, 이 襤褸(남루)의 서울, 이 飢渴症(기갈증)의 서울- 卽 熱病的 失業都市 서울은 그 失業者가 勿慮(물려=무려) 5만은 達할 것이다.4. 경성시민의 실태朝鮮全體가 그러하지마는 더욱 서울의 朝鮮사람은 엇더케 살어가는지 엇더케 먹어가는지 그 內容이 궁금할 것이다. 엇더한 生活計學者이던지 今日 서울의 朝鮮人生活狀態은 참말 어러운 難題일 것이다. 人口 40餘萬이니 하로 한사람이 5合식만 쌀을 먹는다 하여도 하로 2千石은 될터인데 米穀商의 말을 드르면 하로 平均천5,6백石에 不過하다하니 經濟條件이 다른 日本人이나 其他 外國人을 除外하면, 이 不足된 쌀이 누가 굶어지내나 우리는 잘 알 것이다. 이것이 그저 잘알고만 잇슬 問題가 아니라 참말 눈물겨운 事實일 것이다.우리는 저 거리에 단이는 朝鮮사람을 보라. 저 蓬萊橋다리겻테 빈지게만 지고 섯는 짐車을 보라. 黃金町 鍾路通 其他거리에 어슬넝어슬넝 전망그러면 朝鮮의 失業, 더욱 京城의 失業問題는 엇더케 할것인가.이것은 土木救濟事業도 아니며 道路改築大京城都市計劃도 決코 아니다. 엇더케 하면 今日 京城의 商工業者를 營業增進에 農村에서 모혀드는 新勞?者의 産業的 工場職工에- 計劃하는 京城府의 府是가 잇고 府政이 잇서야 될것이니 이는 中央政府의 所使나 拓務當局이나 總督府施政의 如何보다 京城府는 京城府로의 失業對策을 樹立함에, 金融機關의 增加, 또는 改革- 이것을 徹底함에 잇슬 것이다.그는 金融의 調達로 國有地無償拂下, 京電官營等, 이것이 아니라 半官金融機關인, 朝鮮銀行, 殖産銀行, 或은 東洋拓殖會社, 金融組合等의 營業方法을 私設銀行이나 其他金融機關보다 따로히 國家的, 公民的 利益의 意圖下, 貸付, 貯金의 길을 改定하여야 되겟고 또는 各洞町의 必要地帶에 의하야 가장 洞町의 能動的인 庶民銀行을 創設하여야 될 것이다.이 庶民銀行은 其資本을 어데에 求할것이냐하면 勿論 中央政府에 要求할것이나 이것은 中央政府로도 別個資本을 割積함이 아니라 그 府면 그 府의 그 洞町이면 그 洞町의 在住하는 人民의 國勢調査에 의하야 表明되는 資本- 卽 家屋所有나, 무슨 土地의 有無나 其他 不動産만 意味하는 것이 아니라 日用家具며 給料對象이며 衣類며- 모든 家産을 認定하는 資本으로써 假設定의 振出을 볼것이니 그는 國家的 公認의 資本- 얼마던지 有價貨幣를 發行할 수 잇슬 것이다.이와가티 庶民化한 金融機關의 創設로 因하야 發興할 수 잇는 商工業이며 또는 大資本事業에 대한 한가지 凋落的 抑揚을 볼 것이다.이에 失業問題의 對策은 그 改良的 職業戰線을 보면서 應當의 길- 어느 쪽으로의 生活安定을 볼 것이다.때문에 失業의 京城은 今後改正되는 府會議員의 勇氣와 其抱負에 爲先 自治的 基本의 ?果를 낫타내며 失業의 京城도 業務의 京城이 될것이 안일가-.)明治町, 黃金町1897년 국제 개혁 직전인, 1896년 8월 고종은 서울을 황도로 개조하기 위한 지시를 내렸다. 새로운 본궁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현재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지는 길, 동쪽43(1.4)공 업375,290(2.1)415,294(2.2)540,221(2.5)상업 및 교통업975,903(5.8)1,142,766(6.1)1,400,003(6.6)공무 및 자유업235,828(1.4)420,030(2.3)633,926(3.0)기 타 유 업 자545,919(3.3)657,487(3.5)1,421,038(6.7)무직 및 직업 무신고자270,896(1.6)252,699(1.4)353,810(1.7)합계16708431(100)18,615,033(100)21,248,864(100) 조선인 직업별 구성)그러나 를 통해 상경한 잉여 노동력이 순탄하게 공업 노동력으로 전환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십 년을 단위로 작성된 표에 따르면 농업·임업·목축업이나 어업 등 1차 산업 종사자들의 비율이 급격하게 감소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업 노동자의 비율이 증가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농촌 잉여 노동력이 공업 노동자로 편입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기타유업자에는 자영업자나 일용노동자들이 포함되는데, 이 비율이 십 년 사이에 두 배로 상승함으로써, 잉여 노동력이 일용노동력으로 전환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급료생활자에 대한 일용노동자의 비율에서 일본인의 경우보다 조선인 쪽 비율이 훨씬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래 표와 같이 현재와 과거의 시대 간극을 고려하더라도, 보통 일용노동자 직군에 비해 급료노동자 직군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더 필요로 하는 현상은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의 교육 수준이 낮았다는 가정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다음의 은 1925년 당시 학제에서의 조선인·일본인 비율의 비교를 보여준다.학교민족별학생수인구1만명에 대한 비율비율의 비교초등학교조선인일본인386,25654,042208.201,272.3516중등학교(남)조선인일본인9,2924,5325.01106.70121중등학교(여)조선인일본인2,2085,4581.19128.501107실업학교조선인일본인5,4912,6운 후광은 무자비한 자유주의에 짓발피어 허엿케 퇴색이 되고 자본주의문화에 잇서서는 역시 손을 버리고 「나에게 밥을 주시요」하는 일개의 노동자가 되고 만 것이다.더구나 그들은 허머를 들고 XX을 XXXXX려는 푸로페타리아와도 달너 입더날도 업고 긔운도 업고 햇슥한 얼골에 주린 빗으로 단장만 하고 잇슬 뿐이다.그럼으로 우리는 그들을 일홈지어 창백한 문화예비군이라고 한다.그들은 푸로레타리아와 한 가지로 모도가 자본가의 노예다. XX가 그러하고 천하를 論하나 xx이 그러하고 학자가 그러하고 누구하나 빼어노흘 것업시 심지어 한 개의 은행회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도가 그러하다.산업예비군과 한 가지로 문화예비군은 제한업시 늘어간다. 그러나 그들을 늘어가는대로 흡수하기에는 현대의 생산제도가 그것을 허락치 아니한다. 아니 도리어 모든 산업을 잡어주리게 된다. 그러자니 노동자의 실업군이 생겨나고 다시 그만큼 문화기관도 주는 만큼 문화실업군도 늘어난다.할 수 업시 그들은 산업예비군과 한가지로 밥을 구하려 街頭로 방황하게 되엿다. )이 사료에서 조재호가 왜 그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대략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학제는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 시대에서 근 팔 십여년 가까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처럼 의무교육제도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난한 조선인은 그나마 주어진 학제에서도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조재호의 논조는 이러한 불가항력의 상황에 대한 결과인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연도구인수구직수취직수취직률(%)19296,47910,3473,40032.919309,14813,2554,83336.8193110,53017,5136,25035.7 1929~1931 경성의 구직·취직 현황)진로연도관공서교원은행회사가사진학기타사망합계192654(5.3)111 (10.9)36(3.6)320(31.6)260(25.6)231(22.8)2(0.2)1014 (100.0)192799(7.7)107(8.3)74(5.8)409(31.9)298 (23.2)2 卽
SRTC 유형별 분석 -탐구형-청 사대 황제 성조 강희제 (淸四代皇帝聖祖康熙帝)애신각라 현엽 (愛新覺羅 玄燁)-목차-1. 인물 선정 이유2. 인물 소개3. SRTC를 통한 분석(1) 수신 (Self)(2) 제가 (Realation Ship)(3) 치국 (Tactics)(4) 평천하 (Community)4. 소결론5. 참고문헌1. 인물 선정 이유나에게 맞는 유형을 찾기 위해 몇 가지 설문 문항에 응답한 결과, 나는 ‘탐구형’의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탐구형’ 리더는 이용 후생을 통해, 맡은 일에 있어 끊임없는 검토와 응용을 하고 그 결과 제반 문제들에 관한 해답을 찾아 가는 인물 유형이다.‘탐구형’ 리더에 걸맞는 인물로는 설총, 문익점, 최무선, 세종대왕, 장영실, 허준, 장현광, 정약전, 김정호, 지석영, 이제마, 주시경, 우장춘 등이 있다. 당초 세종대왕으로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세종대왕과 같은 호학군주이며 일생이 그보다 더 드라마틱한 강희제로 최종 결정하였다.흔히,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백여 명 이상의 황제 중 진시황(秦始皇)·한무제(漢武帝)·당태종(唐太宗)·송태조(宋太祖)가 보통 으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선정 방식은 상당히 고전적인 방법으로, 위의 네 인물들은 각각 개국을 하거나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며, 중국 역사에서 제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그러나, 위의 네 명 이외에도 중국 역사에서 명철하다고 할 만한 황제나 군주들은 많았다. 제2의 개국을 했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나), 당현종(唐玄宗)과 같은 인물들도 능히 명철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나, 명성조(明聖祖)같은 인물도 무시할 수 없는 공로를 가지고 있다. 또, 현대 중국이 현재 그들의 영토를 기준삼아 역사를 재편하고 있는데, 그 기준을 잠시 빌리자면,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징기스칸(鐵木眞)이나 쿠빌라이(忽必烈) 같은 위대한 정복 군주는 위의 네 명과 위치를 능히 다툴 수 있을 정도이다.흔의 인물됨을 볼 수 있다.그러므로, 나는 비록 황제의 위치에서 나라를 이끌었던 인물이지만,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그를 파악할 수가 있었고, 때마침 세종대왕이 탐구형 리더의 예시로 선제시 되었기 때문에 그를 탐구형 리더로서 다룰 수 있는 일말의 근거를 얻을 수 있었다.2. 인물 소개강희제는 어수선한 정국이었던 청나라 초기인 1654년에 순치제(順治帝) 복림(福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산해관을 넘은 지 얼마 안 되었던 청조로서는 외적으로 한족의 극심한 저항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이룩한 왕조가 붕괴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강희제의 아버지이자 청조 삼 대 황제 순치제는 나서부터 병약하였거니와, 그 역시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였기 때문에, 이 대 황제 황태극(皇太極, 홍타이지)의 동생인 다이곤(多爾袞, 도르곤)이 섭정왕이 되어 정국을 지휘하였다. 순치제의 어머니이자 황태극의 비였던 효장(孝莊) 태후는 만주족 풍습을 들어 시동생이었던 다이곤과 결혼을 하여 순치제를 지켜주었다.효장 황후의 기지로 청조는 골육상쟁의 피바람을 겪지 않았고, 순치제는 다이곤 사후 친정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치제는 이십 오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을 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병약했던 그가, 총애하던 비의 죽음 이후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출가를 하였다는 설이 존재하나, 어찌되었던 역사적으로 그는 이십 오세에 제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양위를 받은 자는 그의 삼남이었던 일곱 살의 현엽(玄燁)이었다. 그가 바로 성조(聖祖) 강희제이다.차기 황제를 철저하게 궁중에 가두어 버렸던 한족 황실과는 다르게, 만주족 풍습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던 청나라 황실에서 강희제를 포함한 황족들은 민가의 자제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유아기의 생활 과정이 한 인물의 성격과 인품이 결정지어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따랐을 때, 비록 칠 년 동안이지만 강희제는 왕조 개창자를 제외한 어떤 한족 국가의 황제보다도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그 다음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탐구하여 종래에는 무난히 해결하는 수완을 벌였다. 직관적 판단에 뛰어 났다고 여겨지는 당태종에 비해 그는 상당히 냉철한 분석으로 판단을 이끌어냈으며, 그의 판단은 대부분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정치·군사 등 거국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그는 역법 수정과 같은 문화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 부문에서 ‘탐구형 리더’로서의 그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오배가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 그를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한 사건이 ‘역법 사건’이다. 순치제 제위 당시 서양에서 온 선교사 아담 샬(湯若望)은 서양의 선진적인 계산법으로 천문역법을 만들어 내었는데, 순치제는 그를 국가 천문대인 흠천감(欽天監)의 수장으로 임명을 하여 본격적으로 역법을 개정하는 작업을 지휘하였다. 당시 중국 농경문화에 있어 역법을 바꾼다는 것은, 천명을 바꾼다는 것과 진배없는 엄청난 일로 받아들여졌고, 어렵게 포섭한 한족 관리에게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양광선(楊光先)이 있었는데, 그는 오배를 찾아가 탕약망의 시헌력(時憲曆) 표지에 ‘서양의 신법에 의거함’이란 글이 청으로 하여금 서양 세력에 항복케 하는 음행사교(陰行邪敎)라고 고하였다. 오배의 지지를 받은 양광선이 흠천감의 감정(監正)이 되었고, 그는 연구가 진행 중이던 서양 역법을 폐지하고 중국의 옛 역법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이 역법 논쟁은 파벌 논쟁을 커져 일부 부처의 관리들이 처형당하였고, 아담 샬 또한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역법에 대해 지식이 전무했던 강희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역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배 사후 구 역법 세력이 주춤하자 선교사 페르비스트(南懷仁)을 보내 두 역법을 비교하게 하였고, 그 역시 정무가 끝나면 수학·천문·역법을 공부하였다. 결국 양광선이 내세운 역법에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강희제 역시 공부를 통해 그와 같은 사실을 능히 계산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유모의 손에 넘겨진 강희제는 생후 칠 세 구 개월만에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사가에서 지내면서, 여느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였다. 누구나 어린 시절 말타기 흉내를 내듯, 말타기 흉내 내기를 좋아하였으며, 배우기를 좋아하였다고 전해진다.2) 배움을 생활화 함그의 배움은, 한족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융합하여, 저명한 한족 지식인과 대등한 위치에서 형이상학 논제들을 다룰 수 있는 위치까지 그를 이끌었다. 이와 같은 그의 학식은, 강희제 치세의 단면이라고 평가되는 문자의 옥(獄)에 있어서 명을 그리워하는 한인 지식인들을 논파하고 철저히 벌하는 등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할 정도다.흉내 내기와 배우기를 좋아했던 어린시절의 습관은 그가 사망 직전까지 책을 놓지 않는 호학군주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특히 배우고 탐구하며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정무 처리에도 적용하여, 하루에 보통 사 백여 개의 상소 문건에 친히 답변을 달아주었는데, 붉은 색 글씨로 답변을 달았다고 하여 이것을 주필(朱筆)이라고 하였다. 그는 몽골 친정을 떠나 전시 중에도 이 백여 개의 문건을 시시각각 처리하였으며, 만년에는 더욱 더 정무에 매진하여 개인 공부 이외에도 하루에 오 백여 개의 문건을 처리하였다고 한다.3) 직무에서 목표 달성의 방법을 찾음그가 정무에 대단히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들은 좋은 습관인 덕분도 있지만, 그가 정무를 통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난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하고, 그의 목표를 달성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도 있는 것 같다. 사 대 황제이지만, 그의 아버지 순치제가 청조가 산해관을 넘은 후 제위에 오른 첫 황제라는 사실을 보았을 때, 강희제가 지고 있었던 짐은 당태종에 견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왕조의 틀을 튼튼히 닦아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것을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4) 주기적인 사냥을 통한 활력 충전강희제는 치세 기간 동안, ‘궁중에난리를 평정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2) 삼번의 난 - 도해, 주배공삼번의 난 때에는 도해(圖海)·주배공(周培功)과 같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있어 전장에서 대단한 공로를 세운 장군들로, 이들의 수완으로 산해관으로 입관 이후 다소 나태해졌던 만주 팔기를 결합시켜 삼번의 난 당시 상당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삼번의 난 이후 러시아와 몽골의 남진을 막는 등 훌륭한 활약을 보인 인물들이다.3) 대만 수복 - 시랑당시 대만에서는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 세력을 내쫓고 점령한 이후 정경(鄭經)-정극장(鄭克藏)-정극상(鄭克?)의 삼대가 복명의 기치를 내걸고 청 왕조에 대항하고 있었다. 삼번의 난 진압 이후, 청 왕조의 최대 판도를 마련하는 데에 있어 대만 역시 반드시 수복해야 하는 곳 중 하나였다. 대만 수복에 큰 공로를 세운 시랑(施琅)은 본래 정경의 부하로, 정경과의 다툼으로 청 조에 귀순한 사람이었다. 시랑의 귀순 당시 청 조정에서는 시랑에 대한 박한 대우를 결정하였는데, 강희제는 그와 같은 제언을 취하지 않고 시랑을 우대하여 거꾸로 대만 공격에 있어 총제독직을 맡긴다. 시랑은 능히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시랑은 후에 강희제와 사돈 관계를 맺게 되었다.(3) 치국 (Team)1) 오배의 난 진압 - 정치권력의 형세를 파악하고 이를 역이용하다.강희 치세 극 초반에는 권신 오배의 세력이 대단했다. 병이 난 오배를 문병간 강희제가 수상하여 오배의 침대를 뒤졌을 때 단검이 나올 정도로 시시각각 오배의 세력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오배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반란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오배의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은 대단히 소년적이고 드라마틱하다.장장 8년 여동안 오배의 간섭을 받던 강희제는, 오배를 존대하고 정무 결정권을 양보하여 오배를 안심시켰다. 또한, 오배 부자를 연속적으로 승진시켜 오배와 그 아들을 각각 ‘일등공(一等公)’, ‘이등공(二等公)’으로 봉하는 등 파격적인 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