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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조직의 재발견
    조직의 재발견인문학부 200620948 천승일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조직’을 공부하는 학생입장에서, 책제목에서처럼 ‘발견’에서 한 단계 넘어서 조직을 재해석한 것을 공부해야하니 전자의 충실하지 못한 나로서는 1회독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갔다 온 페이지가 많아서인지 수 회독을 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서평을 쓰는 이 순간에도 머리속에서 온갖 개념들이 이리 저리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고수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며, 만족할만한 내공을 갖추기에는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이 책의 저자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우석훈 박사이다. 이 분의 책을 처음 접한 건 “88만원 세대”였다. 그 책을 읽다가 도중에 포기했었는데, 이유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제 곧 졸업하고 사회에 한자리 지분을 빌려 알차게 확장하고 싶었는데, 그 책이 ‘사회의 쓴맛’을 제대로 여실히, 처참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현실을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그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 저자의 통찰력으로 본 현재 한국 사회의 본모습이었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가 사회초년생이 겪어야하는 ‘사회의 쓴맛’을 알려준 책이라면 이 책 “조직의 재발견”은 우리학교 모 교수님에 말씀하셨듯이 ‘조직의 쓴맛’에 집중 조명한 책이다.간단히 살펴보면 1장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조직의 경쟁(조직내,외경쟁)의 해외사례와 국내사례를 들어 조직의 과도한 경쟁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해서 논했고, 2장 ‘돈 장사와 사람 장사’는 조직의 유형별로 장,단점과 위기 등을 논했고, 3장 ‘위기의 한국 조직들’은 2장에서 배운 조직유형특성을 기준으로 한국조직들을 진단하였고 마지막으로 4장 ‘한국 기업에 던지는 조직론의 질문 Top5'는 포스트포디즘 시대에 유형별 조직구성원들과 상생하는 방법을 논했다.이 글의 서술 방식은 이 책을 포괄하는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를 선정하여 나름의 생각을 ‘조직론’ 수업에서 배운 이론과 설명방식들로 정리하고 논하는 것으로 이하의 여백을 채워나갈 것이다. 선정한 문제는 “한국 조직이 포스트포디즘시대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위해 어떤 방법 등을 도입했고, 그 전개양상이 어떠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먼저, 포디즘이란 자동차기업 ‘포드사’의 생산방식에서 유래한 말로 컨베이어벨트시스템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던 사회를 의미한다. 한국의 포디즘 사회란 6,70년대에 압축성장의 기반이 되었던 제조업-수출중심의 대량생산체제산업사회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포스트포디즘 사회란 90년대부터 조직사회에 불기 시작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포디즘 사회의 수직적인 권한의 일원화 구조보다는 의사결정체계에 수평적인 권한을 분배하고 협력과 자율을 더 중시한 사회를 말한다. 급여 시스템에도 변화를 가져왔는데 전자가 연공서열이 우선이라면 후자는 성과 이다. 하지만 성과를 너무 강조하면 협력을 해야할 부서사이의 경쟁을 위한 경쟁이 생겨 갈등이 심해진다. 이런 갈등이 심해지면 조직 입장에서도 손해다. 왜냐하면 능력있는 구성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근무환경이 좋지 않다면 당장 조직을 떠나 다른 곳의 둥지를 틀 유인이 생겨, 조직 전력의 큰 누수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IMF때, 많은 조직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보였었다. 심지어는 회사기밀까지 경쟁업체 또는 해외로 유출되기도 했었다.그렇다면 이 포스트포디즘사회의 문제는 뭘까?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을 ‘경쟁’에서 찾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쟁은 시장 유지와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과도한 경쟁은 담합, 높은 사회적비용 소모 등을 초래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기업에서 말하는 경쟁은 크게 둘로 나눠 기업밖에서 홍보, 서비스, 가격 등으로 경쟁하는 것과 기업내에서 성과경쟁, 승진경쟁, 구조조정 등이 있다. 기업 밖의 경쟁은 담합, 독과점 등의 부작용을 제외하면 공개적이고 국가와 시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기업 내부에서의 경쟁은 비공개적이고, 조직 구성원에 한해서만 국한되어 피해자도 구성원이고 그 피해는 한 조직의 균형을 잃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기업의 입장에서 성과경쟁은 활발히 일어날수록 기업에도 좋은 정의 관계이다. 승진경쟁도 또한 연공서열 이외에 성과 같은 다른 요건구비를 요한다면 동기부여측면에서도 정의 관계를 가진다. 그런 이유로 성과주의 시스템에서는 능력 있는 조직구성원일수록 더 좋은 대우와 급여를 받는다. 조직 입장에서 능력 있는 구성원이 조직을 떠나거나, 적대적인 기업으로 채용되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이직도를 낮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12.08.03| 2페이지| 1,000원| 조회(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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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삼국지
    삼국지삼국지는 소설이지만, 한나라말기부터 위,촉,오 국이 강성하던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훌륭한 군주와 뛰어난 책사 그리고 용맹한 호걸이 지금도 구전되어 캐릭터로 승화하는 등 한국에선 다양한 콘텐츠로 개발되어 보편적인 접근이 가능하기도 하다.이 글의 서술방식은 자료의 방대성만큼 어느 정도 요약의 필요성 때문에 거시적인 접근을 한 후, 군주 조조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엿볼 수 있는 전투에 대한 사실과 생각을 중심으로 나머지 부분을 채워나가겠다. 그 전투는 낙양-호로관전투, 낙양가는 길 산속-황제구출전투-레임덕걸린 왕을 끝까지 보필. 원소는 거절 ..왜 굳이 조조를 주제로 잡았냐면 조조는 각축을 벌이던 3국을 뛰어난 용병술과 지략으로 통일을 이끌었고, 특유의 카리스마로 주위에는 의용군시절부터 적실성있는 인재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승리자 서술보다는 유비와 그의 수하들-제갈량과 관우, 장비, 조운 등-을 집중하여 서술하였다. 왜 그런가 생각해봤더니 나관중은 원말명초에 혼란했던 정치 상황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몽고족 정권에서 한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세울 때, 유비처럼 덕성이 충만한 황제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표출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황건적이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 가난했지만 한나라 왕의 계보를 잇고 있던 유비가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을 소탕한다. 그러던 중, 역시 의용군으로 있던 조조를 만나지만 또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황건적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의용병에게 토벌되고, 집안의 재력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조조에 비해, 가난한 용병 유비는 공손찬의 수하로 들어간다. 한편, 한 왕조에서 승상의 지위에 있던 동탁은 (결과적으로 보면) 레임덕에 빠진 어린 황제에게 황국의 전권을 빼앗고, 온갖 부패와 악행을 일삼는다. 아무도 동탁을 호위하던 여포와 그의 정예부대 때문에 동탁의 부도덕함과 부당함을 언급하지 못했다. 신하 왕윤의 계략으로 동탁과 여포는 싸움을 벌여 동탁은 그 자리에서 죽고, 여포는 동탁의 군권을 잡은 부하 이각, 곽사에게 쫓겨 도망친다.한편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면서 갈 곳을 잃은 유비는 서주의 도겸에게 의탁한다. 조조는 황권을 등에 업고, 승상에 오르는 등 부와 지위가 격상하자, 서주에 있던 아버지를 부르지만 행차길에 도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도겸을 의심한다. 근처(복양)에 있던 여포가 거슬렸지만, 이성을 잃은 조조는 그대로 서주에 복수하기로 했다. 이에 도겸은 유비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비는 조조에게 옛정을 운운하며 도겸의 결백을 믿어달라했고, 사실이때 여포가 본부(허창)을 침공하고 있었다. 조조는 여포 때문에라도 도겸의 결백을 믿어주는 체했고, 유비와는 이때부터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여포를 보기 좋게 제압한 조조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이각, 곽사는 어린 황제를 동탁과 같이 부리고, 둘의 정권독식다툼을 틈타 황제는 원래 황궁이 있던 낙양으로 도망친다. 황제는 도망치던 길에 정신을 차리고 쫓아오던 이각,곽사가 추격한다는 보고를 받고, 근교의 군벌-조조, 원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원소는 구해줘봤자 권력이 약해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신하의 조언을 받고 거절하지만, 조조는 이 어려움만 해결하면 황제를 보필하면서 얻는 장기적인 이익이 더 크다면서 구출에 나섰고, 성공한다. 이 때 유비는 여포에게 속아 서주(도겸으로부터 양위)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는다. 여포를 제거해 주위를 평정한 조조는 유비를 공격했고, 유비의 3형제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관우를 포로로 잡는다.남방 양쯔강이남의 손권은 육군이 주전력이었던 조조에게는 거리상으로 너무 멀고, 무엇보다 폭이 큰 강을 건너야하는 단점 때문에 북방의 배후를 평정하고 강에 인접지역까지 점령하여 교두보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조조는 북쪽에 원소를 공격했다. 원소는 명문 귀족출신으로 집안의 재산이 많고,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군벌 출신이다. 원소 주위에도 뛰어난 장수가 많았지만, 원소의 성격이 의심많고, 우유부단해서 적절한 전략과 용병술을 사용하지 못했고, 장점은 자금과 군사수가 조조보다 월등히 앞섰다. 원소의 물량과 조조의 전략에서 조조의 전략이 앞섰다. 조조는 이 당시에 뛰어난 두뇌들이 많았다. 순욱, 순유, 정욱, 곽가, 가후, 만총, 유엽 등이 조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조조 또한 성격이 신중하고 사려깊은 면이 있어 신하들의 의견도 귀담을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조와 원소는 크게 9번의 전투를 승리했고, 원소 가문은 멸족했다.
    독후감/창작| 2012.08.03| 2페이지| 1,000원| 조회(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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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쯔빙글리와 루터의 차이점
    쯔빙글리와 루터의 대조 /첫째,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사조는 인문주의적 경향이 압도적이었고, 인문주의가 고대의 이상, 철학, 예술, 문학, 원전(原典) 등 옛 유산을 존중한 것과 같이 쯔빙글리는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저작으로 되돌아갔다. 그에게 성서는 개개인의 행위와 국가의 윤리와 교회의 실천을 통제하는 신적 율법이었다. 루터의 경우와 같이 종교적 체험의 결과로 개혁자가 된 것이 아니라 고전 연구와 성서 연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쯔빙글리는 항상 온건한 성서적 인문주의자로 머물러 있었다. 이에 비해 루터는 타울러와 스타우피츠의 신비주의 학파를 거치며 번민했고, 수도원의 극심한 도덕적 비리를 경험한 후에 비로소 이신칭의의 교리가 주는 평화와 위안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와 루터사이에 게재하는 차이점의 근원은 성서에 대한 루터의 이해가 주로 그의 종교적 체험에 두고 있는 반면에, 쯔빙글리의 성서 이해는 주로 그의 인문주의적 수련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쯔빙-정적, 루터- 동적둘째, 쯔빙글리의 개혁활동의 범위는 처음부터 루터의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하였다. 쯔빙글리는 성서의 학도가 되기 전에 인생을 알기 위하여 배웠으므로, 그가 국가와 정부까지도 그의 개혁활동의 범위내에 포함시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는 신권정치의 이상을 따랐다. 루터는 국가와 교회가 필요한 경우에는 제휴할수도 있다고 암시하였으나, 쯔빙글리는 국가와 교회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와 같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에 의하면 속권은 교회의 질서를 감독해야 하며, 한편 교회의 성서는 국가의 법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 법률의 타당성은 그것이 성서에 부합되느냐에 달려 있으며, 정부가 기독교적 표준에 미달되면 그 때에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주제로 삼고 영적 순례의 고뇌의 길을 따랐다면, 쯔빙글리는 애국적이며 지적인 사고의 길을 따랐다. 쯔빙글리의 애국심은 당시 스위스의 많은 부락과 도시들이 수입의 원천으로 삼고있었던 용병제도의 실행에 반대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수세기 동안 스위스인들은 군인으로서 명성을 날렸고, 그 명성으로 인해 외국의 군주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쯔빙글리 시대에는 이러한 제도가 일반적으로 용납되었으며, 반대하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쯔빙글리 자신도 용병제도를 지원했으며, 이득도 보았지만, 군종사제로서 전쟁을 경험한 후, 무가치한 일로 생명을 잃는 것과 돈에 의해 용병들이 쉽게 팔려가는 것을 보고 용병제도를 공격하게 된다. 해가 지나면서 이러한 애국적인 관심은 교회의 개혁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따라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항상 민족주의적이며 정치적인 색채를 띠며, 이러한 색채는 그가 복음의 법에는 개별적인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쯔빙글리의 정치적 활동은 그의 태어난 고장이나 스위스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는 헤세의 영주 필립(Landgrave Philip of Hesse)과 협력하여 매우 광범하고 과감한 정치적 책략에 몰두하였다. 그의 계획은 찰스 5세를 폐위하고 헤세의 필립을 독일의 황제로 등극시킨다는 것이었는데, 만일 루터가 이 계획을 알았다면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쯔빙글리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루터는 복음이 세속적인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쯔빙글리는 1531년 카펠 전투에서 군복을 입은 채 쓰러졌으며, 쮜리히에 세워진 그의 기념비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서 있다. 이러한 점도 루터와 대비를 나타내는 뚜렷한 실례(實例)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셋째, 쯔빙글리가 루터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쯔빙글리 자신은 루터의 제자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쯔빙글리는 1518년 이후에 나온 루터의 모든 저작들을 잘 알고 있었다. 죄와 회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총 등에 관한 그의 많은 표현은 듣는 자에게 루터의 사상과 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그의 '67개 신앙개조'에는 루터의 사상을 반영하는 많은 개념들이 있다. 쯔빙글리는 자기가 루터와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주 강조하였다. "나는 루터의 이름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저작에서 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쯔빙글리는 루터의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비판적이었고, 기독교에 대한 거의 인문주의적-철학적 개념은 특별히 그의 체계적 저작 가운데서 차츰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넷째,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종종 루터의 경우와는 달리 참된 종교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방면에 있어서 루터와 쯔빙글리의 차이점은 몇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루터는 유아세례를 장려했는데, 이는 세례가 어린 아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행하는 이유로서, 세례가 그의 국민교회의 권속을 증가시키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루터가 의인의 교리를 강조한 것은 이 교리가 그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이었으나, 쯔빙글리는 이 교리가 행함으로 공적을 쌓는다는 로마교회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에 강조하였다. 루터는 예전을 존중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전은 진정한 은총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그리스도께서 에전을 제정하시고 명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의 외적 표시로서 그것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상이점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의 추진력이 된 것은 그의 종교적 사상이었고, 단지 신학적 체계를 수립하는데 있어 루터와 달랐던 것이다.다섯째,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사적 의의이다.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과 같은 영도적 위치를 가지지 못하였다. 루터의 경우에는 그의 적들과 비방자들에게 계속하여 공격을 받았으나, 또한 죽을 때까지 추앙을 받았다. 쯔빙글리의 경우에도 공명자들과 지지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쯔빙글리를 자신의 영도자로 생각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독자적 신학자와 사상가로 자처하였다. 또한 쯔빙글리의 문헌적 공헌의 미약성을 들 수 있다. 루터와 칼빈의 경우처럼 심오한 사상을 내포한 대작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많은 문서를 남겼고, 그의 글들은 시적 영감이 흐르고 있으나 학문적 깊이가 결여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문헌적 공헌의 빈약은 그의 사상을 체계있게 후대에 전승시키는데 많은 약점을 안고 있고, 후대 교회의 주목을 끌지 못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PAGE PAGE 1
    인문/어학| 2007.06.03| 2페이지| 1,500원| 조회(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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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중세에서의 공포, 흑사병 평가A좋아요
    중세 구주대륙에서의 공포, 흑사병/ 이 름/1. 최초로 유럽에 퍼지던 날- 흑사병은 1334년, 중앙 아시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유럽에까지 퍼지게 된 까닭은 1346년 경의 카파 성(오늘날 러시아 남부의 페오도이야) 전투 때문이었다.성을 공격하던 킵차크 칸국(몽골의 한 부족)의 병사들이 자꾸만 죽어 가자 지휘관들은 돌을 쏘아 보내는 기구를 사용해 부패한 병사들의 시체들을 성벽 안으로 날려 보냈다. 카파 성 안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성을 탈출하여 흑해를 거치는 지중해 항로를 따라 고국 이탈리아로 피난갔다. 이 때, 그들과 함께 흑사병균이 유럽으로 옮겨 들어 왔던 것이다. 1347년경에 흑사병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만연하였다고 한다. 결국 흑사병균은 상인들의 옷이나 물건 등에 묻어서, 혹은 배에 같이 탄 쥐벼룩에 물린 쥐나 이미 감염된 환자가 뱉은 가래침 따위를 통해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전해졌을 것이다.2. 피해 경과 및 사례1347년, 가을에 이탈리아를 강타한 흑사병은 같은 해 말에는 마르세유와 아비뇽을 전염시켰고, 1348년에는 프랑스 전체를 휩쓸었다. 예컨대 흑사병으로 인해서 당시 5만에 육박하던 피렌체 시의 인구는 무려 5분의 1로 줄어 들었고, 파리 시의 인구는 15만에서 5만이 죽었다고 한다.1349년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도 상륙하여 이듬 해에는 영국 전체를 공포로 몰아 넣었고, 영국은 거의 절반의 인구를 잃었다. 이 때 스코틀랜드는 적국인 영국이 흑사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그들을 물리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다. 영국인들을 공격했던 스코틀랜드 병사들 역시 흑사병에 감염되었고, 고국으로 돌아 온 병사들에 의해 이 병이 퍼져 나가 스코틀랜드 전체가 흑사병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350년에는 흑사병이 북유럽을 거쳐 아이슬랜드와 러시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흑사병이 빠른 속도로 전염된 이유는 당시 활발한 무역에 의을 당했다. 독일에서는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이 60%를 넘었다. 카스티야 지방의 경우,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위험할 정도로 시골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경제 전체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주민 수의 감소는 곧 식량의 감소를 뜻했다. 거의 위험 수준에 도달한 주민 수로 인해 땅을 황폐해졌고,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일단 유럽 전역에 전염된 흑사병은 인간과 흙과 공기를 더럽히고 생명체를 가차없이 쓰러 뜨렸다. 이 무렵에는 굳건한 성채도, 교회도, 수도원도, 학교도 비위생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환자가 발생한 집에는 병균이 나오지 못하게 하느라고 문을 걸고 못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기 때문에 산 채로 불타 죽는 환자도 많았다. 그러나 못질을 하거나 집을 불태우는 것도 소용이 없다고 느끼자 사람들은 흑사병에게 언제 어디서 붙잡혀 쓰러질 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마을이나 도시를 탈출하였다. 도망갈 때는 병균이 떠 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하얀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죽음의 공포에는 성직자도 어쩔 수 없었는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고 남은 자들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 할 성직자도 간간이 이에 섞여 총총히 마을을 떠났다. 폐허가 된 마을 안에는 야생 짐승들이나 강도들, 거지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흑사병은 흔히 가난하거나 허약한 사람을 주로 희생자로 삼았다. 프랑스를 강타한 흑사병 역시 가난한 이들을 청소하듯이 깨끗이 사라지게 했다고 전해진다. 스스로를 잘 지킨 부자들은 질병을 피해 가거나 가난한 여인을 사서 흑사병이 지나 간 집에 거주케 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이러한 것으로 우리는 질병의 계급성을 엿볼 수 있다.최후의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농부들은 곡식을 심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그냥 평범한 유행성 전염병이 아니었다. 윌리엄 랭거에 따르자면, "중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흑사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였다."길가의 여인숙들이 모두들 문을 닫았기 가 거듭될수록 흑사병은 더욱 유럽을 유린했고, 죽음의 춤은 그 시대의 미술에 새로운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깡충깡충 뛰며 히죽거리는 해골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무덤으로 끌고 갔다.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럽에서 흑사병 이전의 13세기 수준의 인구를 겨우 회복한 것이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그래서 이 흑사병은 인구를 감소시키고 유럽의 사기를 전반적으로 저하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세 붕괴를 촉진하였다.생존자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단지 갑자기 쓰러져서 헛소리를 하다가 죽는 환자를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다 매장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매장을 거들었던 인부와 성직자조차 전염되어 쓰러지자 시체는 물론 쓰던 물건까지 불태우는 것이 살아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흑사병의 원인을 몰랐던 탓으로 공포는 한층 더 가중되었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각종 설들이 난무했지만 대부분 허황된 것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여 약초를 태우거나 수액을 구해서 마시는 일도 있었다. 또 신이 내리는 벌이라고 믿은 이들도 있어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기도만 하면서 성스럽게 죽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파리 대학교의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 이변의 결과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널리 유포된 끔찍한 유언비어는 누군가가 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평소 증오의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복수가 행해졌고, 속죄를 부르짖는 신비주의 성향의 이단파들도 발생하였다.3. 르네상스도래 이유설-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라틴어를 구사할 성직자의 수가 적어졌기 때문에 모국어로의 이행이 급속히 이루어져 결국은 르네상스로의 길을 예비했다고도 한다.4. 유행 당시의 치료법이라 불렸던 행위들.1. 인간의 배설물을 모아 자루나 주머니에 넣고 목에 건다. 물론 냄새가 지독하기는 하겠지만, 의사들은 그 냄새가 전염병으로 더러워진 공기를 종기가 난 부위를 칼로 짼 뒤, 시뻘겋게 달아 오른 부지깽이를 열린 상처 안으로 집어 넣는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환자의 병이 낫기는 커녕 급작스런 충격을 받은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7. 독성이 강한 비소를 먹는다. 이 역시 치료는 커녕 환자를 죽이는 결과를 낳고는 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설사 흑사병이 낫더라도 결국은 비소 중독으로 사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8. 환자의 방 한 가운데에 신선한 우유나 양파 한 접시를 놓아 방 안을 깨끗하게 정화한다.9. 잘게 부순 에메랄드를 삼킨다. 이 방법은 죽는 방법치고는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데, 의사가 진짜 에메랄드를 사용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부러 사기를 치는 사이비 의사들도 물론 있었지만, 양심적인 의사라고 해도 에메랄드씩이나 구할 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5. 대학살로 몰고 간 유대인에 대한 유언비어특히 유다인들이 샘이나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은 대규모적인 유다인 대학살을 가져 왔다. 특히나 유독 유다인만이 사는 곳에는 병에 전염되지도 않고 죽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특히나 독일인들의 의심은 한층 더 심해졌다. 그래서 동족을 잃은 독일인의 슬픔이 곧 유다인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바뀌어져 당시 수많은 유다인들이 이유도 모른 채 독일에서 애매하게 생매장되거나 타 죽어 갔다. 유다인들이 이렇게 당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도들이 평소에 미워해 온 이교도들이였다는 점과 지금도 그렇지만 유다인들은 상술이 뛰어나서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이었다. 유다인 학살이 점점 확대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9월 26일, 이같은 소문을 일축하는 칙서를 내리면서 유다인들을 보호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독일인들의 만행을 중지시키지는 못했다. 참으로 끔찍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6. 유대인의 피해가 적은 이유그러면 왜 모든 유럽인을 공포와 죽음의 도가니로 몰고 경제변화 / 노동자들이 소중해짐.흑사병 폭풍 후, 유럽의 경제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흑사병으로 노동 인구의 반이 죽었다. 유럽을 다시 복구할 식량과 원료를 충분히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남은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속박받는 무기력한 농노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노동에 대하여 어떠한 가격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심각한 노동력 부족은 높은 임금, 높은 제품 생산 비용, 그리고 도망치듯 뛰어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많은 회사들이 파산했고, 지은 재산을 잃었다. 노동력에만 의존하던 봉건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9. 흑사병으로 인해 농노제가 사라짐한편, 이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강제로 임금을 동결하고 농노 해방을 중지시키는 봉건 영주들도 있었다. 이러한 대응책은 지위 향상을 꾀하려는 농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 왔으며, 농민 봉기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농민 봉기들은 대부분 실패하였지만, 서유럽에서 차츰 농노제가 사라져 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유로워진 경지는 다시 목초지로 전환되어 가축이 늘어나고 육식의 음식 문화는 회복되었다.10. 도시의 새 주인들도시에서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 죽은 귀족이나 상인의 재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수했다. 그리고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텅 빈 도시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도시의 운영권도 이 과정을 통해 재산을 획득한 신참자들에게 돌아 갔다. 한 마디로 도시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완전히 흔들릴 정도로 바뀌었다.11. 흑사병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①죽음이 다가오면 신에게 의지하려 하는 인간의 심리- 교회가 세속을 능가하는 우월한 위치로 올라선 데는 과거에 유행한 역병들이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흑사병 같은 엄청난 재앙이 2천년 동안 굳건한 토대를 쌓은 교회의 권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럽 전역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던 지배력 덕분에 그런 폭풍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인문/어학| 2007.05.23| 5페이지| 1,000원| 조회(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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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학]여성학 리포트-여성 차별의 예 서술
    여성차별의 예천승일 200620948내 개인적 경험이나 사회적인 관습에서 남녀차별에서 차별의 사례들을 찾아보았다.첫 번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으로 개인의 성향이나 특별상황을 무시한다. 예를 들어, “남자가 쩨쩨하게” 혹은 “남자가 우냐”. 남자로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이런 관습적인 표현으로 세상 남자들은 모두 다 같은 성향을 가지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강인한 모습의 남성으로 사회화 되었다.필자의 여동생의 친구이야기로 여성다움의 이야기를 하겠다. 어릴 적 그녀는 바지 입는 것을 즐겨하며 남자아이들과 같이 축구하는 것을 즐겨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바지와 축구대신 “예쁜”치마와 인형을 사주면서 “여자답게 좀 굴어라.”라며 그녀의 개성을 무시했다. 주위에서도 여자답지 못하다고 놀려 댔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매우 견디기 힘들어했다. 이 경험을 통해 볼 때, 청순하면서도 조신한 여성의 일부는 이 사회에서 길들여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둘째, 여성이 취업하려고 할 때 남성보다 성공하기 힘들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사기업, 공기업 등을 통틀어 볼 때, 여성의 비율은 남성보다 현저히 적다. 모 기업의 간부는 일부러 여성들을 안 뽑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키워놓으면 힘들어서 나가는 직원도 많지만 근무환경과 남성 직원들의 분위기를 생각해서 안 뽑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 드신 분들은 아직도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더 많다.셋째, 호주제이다. 양성 차별의 관점에서 볼 때, 3가지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①3살짜리 손자가 60세 할머니의 호주가 될 수 있다. 호주 승계순위를 보면 ‘아들-손자-미혼인 딸-배우자-어머니’이다. ②동거인발생의 문제. 남녀가 결혼해서 함께 살다가 이혼한 후, 여자가 자녀를 데리고 재혼을 한다면 그 자녀는 호주제 관련 법상 동거인이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남자가 자녀를 데리고 간다면 정상적인 자녀로 입적된다. ③여성이 혼외자녀를 입적하려고 한다면 전남편과 현재 남편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남성의 경우는 아내의 동의를 얻을 필요 없다. 호주제의 경우는 가부장적인 남성을 양성하고, 남녀의 차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 2006.05.17| 2페이지| 2,000원| 조회(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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