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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원제 :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1. Prologue인간은 늘 고질적인 불만족에 시달리는 신경질적이며 불완전한 존재이다.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남녀의 정열은 새로운 이성의 출연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퇴색되고 변질된다. 우리는 새로움에 흔들리고 목말라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꿈꾸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우디 알렌'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원제 Vicky Cristina Barcelona)'는 떠남-만남과 사랑-그리고 헤어짐과 해소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욕망의 구조를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2. 인물분석① 비키'비키'는 안정적인 연애를 선호하며 도덕률에 의해 욕망을 자제하려는 타입이다. 번듯한 약혼남이 있고 논문의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에 여행을 오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구체적으로 입체성을 띄게 되는 인물로서 크리스티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후안'과 말을 트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자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욕망에 눈을 뜨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휘말리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 그리고 도덕심이 욕망으로 대변되는 환상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데 성공할 것이라는 안일한 허위에 사로잡히며 결국 '후안'에게 집착하는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② 크리스티나'크리스티나'는 인생에 대한 환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대망상적인 성격의 캐릭터이다. 그러나 '후안-크리스티나-마리아'라는 현실적인 삼각 세계 속에서 결국 자신의 지나친 환상을 인식하고 결과적으로는 '비키'의 본연의 모습과 같은 속성을 보여준다.③ 후안 안토니아 곤잘로'후안'은 일상에서 벗어난 미국의 두 여인의 잠재된 욕망을 분출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가이자 재력가인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며 충동적이다. 즉 우리가 일탈을 꿈꾸는데 적합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④ 마리아 엘레나'마리아'는 '후안'과 함께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욕망과 그 허구성을 보여주는데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특히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정신 분열증적인 모습까지 보이지만, 그녀도 결국 사랑을 갈구하고 고질적인 불만족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내재된 욕망을 실질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3. 영화 분석하기① 바르셀로나, 그 유쾌한 일탈여행이 주는 매력은 자신의 흔적들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으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행지에서 발현되는 나의 생경한 모습은 그 시간과 공간에서만 존재하기에 불완전하지만 매력인 자아이다. 영화는 바르셀로나라는 이색적인 공간에서 드러나는 내재된 마음의 발현에 초점을 맞춘다. 바르셀로나는 '후안과 마리아' 상징되는 환상, 꿈, 열정을 대변하는 공간이자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내제된 욕망을 자연스럽게 분출할 수 있는 유쾌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갈 때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결국 자연스레 제 자리로 돌아온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면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② 인간의 욕망영화는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한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의 열정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비키'는 처음 발견하는 자신의 충동적인 모습 앞에 혼란스러워하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자신했던 자유로운 삶에 끝에 찾아온 공허함에 당황스러워한다. '후안'은 자유로운 연애관을 보여주며, '마리아'는 사랑에 대한 고질적인 불만족, 반대로 해석하면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인물들의 욕망은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허망함과 우스움을 보여준다.
    독후감/창작| 2009.06.14| 2페이지| 1,000원| 조회(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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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감상문)렛미인 평가A+최고예요
    1. Prologue영화는 아름답지만 창백해 보이는 눈과 함께 시작된다. 마치 영화의 양가적인 느낌을 대변하는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는 밤과 낮의 대비, 하얀 눈과 검의 밤하늘의 대비로 시각화된다. 영화의 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 '적당한 사람을 들여보내줘'라고 의역된다. 여기에서'적당한 사람이란' 진정 사랑하는 존재론적 인물로 해석될 수 있으며, 혹은 너무나 필요로 하는 수단으로서의 존재일 수도 있다. 사랑이 무모하며, 맹목적이지만 때론 냉혹할 정도로 이성적인 이유가 바로 존재에 불일치에서 시작되는 것을 영화는 천천히 보여주려 한다.2. 인물분석① 오스칼금발을 가진 연약한 체구의 '오스칼'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사며,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외로운 소년이다. 그러나 이웃집에 이사 온 '이엘리'를 만나면서 점차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소외당했던 심리가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분출된다. 소년은 뱀파이어 소녀(이엘리)에게 용기를 얻어 괴로움을 되돌려주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되돌려 준 괴로움은 다시 더 큰 괴로움이 되어 돌아오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엘리'를 통해 개인적인 구원을 받게 되어 함께 떠나게 된다.② 이엘리이 소녀는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뱀파이어이다. 인간을 증오하거나 종족의 번영을 위해 주민들의 피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연약한 인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냉혹하고 무서운 소녀이다.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인물(호칸)이 피를 공급해 오는데 실패하자 병원으로 찾아가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물론 걱정과 연민을 느끼고 뛰어간 것이지만 마지막 선택에 있어서는 냉정하다. 그리고 '오스칼'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감정의 일부분이라고 하여도 결과적으로는 '호칸'을 대신할 인물로 '오스칼'을 선택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③ 호칸'이엘리'의 아버지라고 나오지만, 영화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오스칼'과 '이엘리'의 관계가 오버랩된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이엘리'를 위해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살인을 하러 가기 전, '이엘리'에게 '오늘은 그 소년과 안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질투를 나타낸다. 최소한 '호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사랑임에 틀림없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지닌 특성이라 가능한 일이며, 병원에서 떨어지고 나서 클로즈업 된 얼굴에서 촉촉한 눈물을 보이며 '이엘리'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보여준다.3. 영화 분석하기① Let The Right One In'호칸'은 더 이상 소녀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너무 늙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을 선택한다.(그것이 처음에는 순수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먼저 '오스칼'은 학교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면서, 늘 칼을 가지고 다니는 폭력성을 내재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엘리'가 접근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며 두 인물을 사회에서 소외된 공통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다. 여기서 소녀가 소년을 자기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은 무척이나 세밀하며 치밀하다. 소녀는 소년을 위협하지도 협박하지도 겁을 주지도 유혹하지도 않는다. 소녀는 소년이 지쳐서 혹은 어떤 도적적인 딜레마에 빠져서 소녀를 외면하거나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녀 곁에 있으면서 피를 구해주는 사람이 되도록 자연스럽게 만든다. 고민을 해결하여 주고, 필요한 여자 친구가 되어주며, 목숨을 구해주지만 소년에게 일방적으로 다가가기 보다는 '나를 들여보내줘'라는 부탁과 함께 소년에게 선택하게 만드는 방법을 택한다. 결과적으로 '오스칼'은 '이엘리'가 찾던 'Right One'으로 변하게 되며 함께 떠나게 된다.② 루빅스 큐브'오스칼'와 '이엘리'를 자연스러운 친구로 만들어 준 장치이다. '오스칼'은 큐브를 자꾸 돌리며 어긋나게 만들지만(자신의 인생과 같이) '이엘리'의 경우는 손쉽게 조각들을 맞춘다. 즉 소녀가 소년의 인생의 고민과 어려움을 쉽게 풀어줄 인물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보인다. 또한 '구석부터 맞추면 쉽게 맞출 수 있다'라는 소녀의 대답처럼 우리 사회의 구석지고 방치된 사람들을 향한, 즉 '오스칼'과 '이엘리'로 반영되는 소외된 인물들을 풀어가는 문제는 그들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는 완곡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③ 장르의 혼합- 뱀파이어 공식 + 멜로드라마 + 성장영화 + 스릴러먼저 '오스칼'과 '이엘리'의 관계는 이성간의 멜로드라마(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사랑)의 틀을 취하며, '오스칼'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아픔과 극복을 통한 성장 영화의 구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엘리'가 피를 구하며, 빛을 견딜 수 없는 규칙들은 기본적인 뱀파이어 공식을 도용하였고, 마지막 결론을 통해 드러나는 스릴러의 반전은 오싹하게 느껴진다. 특히 소년이 빈정거리며 소녀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자 온몸에서 피를 토해내는 장면은 철저한 뱀파이어 영화 고전의 규칙들을 답습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전통적인 틀이 영화의 중요한 구성, 즉 소년과 소녀가 친구 그 이상의 관계를 형성하는 신뢰의 장치로 잘 이용되었다고 생각한다.④ 사랑의 본질에 대한 물음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당사자들만의 일방적인 시각일 수 있다. '호칸'과 '이엘리'그리고 '이엘리'와 '오스칼'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순순하게 포장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살인을 하거나 폭력 행위가 사회적으로 정당화 되지는 않는다. 즉 사랑은 치명적으로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은 쌍방, 그 자체적으로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호칸'과 '오스칼'은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모호한 '이엘리'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즉 이것은 존재론적인 실체에 대한 사랑이다. 자신들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 모든 것을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엘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아마 '이엘리'도 두 남자를 사랑했거나,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이엘리'는 두 남자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도구로서 사랑하는 측면이 강하다. 즉 순수한 본연의 사랑보다는 다소 변질된 현대인의 사랑과 가깝게 보여진다.
    독후감/창작| 2009.06.14| 3페이지| 1,500원| 조회(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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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 위안부(한국근현대사)
    목 차Ⅰ. 서 론Ⅱ. 본 론1. 일본군‘위안부’ 개념, 성격과 의미1)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개념2)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성격3) 일본군‘위안부’의 사회적 의미2. 전후 일본군‘위안부’들의 삶과 현재 모습3.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과 일본정부의 태도1) 한국 정부의 태도2) 일본 정부의 태도4. 최근의 국제적 움직임5.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개인적 견해1) 한국 정부에 자세2) 우리 국민에 자세3) 피해자의 보상문제4) 아베신조의 망언과 사과발언5) 야스쿠니 신사참배6) 미국의 책임Ⅲ. 결 론“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된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기려 하지 않는 자는 또 그러한 위험에 빠지기 쉽다”- 1985년 제 2차 세계대전 40주년 기념식에서,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Ⅰ. 서 론1945년 해방이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지도 벌써 6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이 이 땅을 감정하고 지배하는 동안 저지른 만행에 대한 만족할 만한 사죄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은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교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부끄러운 침묵의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떠하였는가? 일본과의 축구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였으면서도 독도문제, 야스쿠니 신사참배, 일본군 위안부 문제등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아픔에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해왔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수업 첫 시간에 상영된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동영상을 보았고, 주체할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지나가버린 하나의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진실을 규명하고 사죄를 받아야 할 ‘현재의 역사’라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그래서 이번 계기를 통해 수십 년 동안 망각의 역사였던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조사해보고 그 역사적 사실과 의미,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쟁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등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 론1. 일본군‘위안 받았고 위안소에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도록 감시를 받았다. 즉 일본군‘위안부’ 동원은 민간인과 군?관이 모두 나서서 사기와 폭력을 방법으로 닥치는 대로 사용하여 식민지 조선의 전 여성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행한 강제연행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다.3) 일본군‘위안부’의 사회적 의미)일본군‘위안부’의 문제는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문제이자 강간과 성매매를 포괄하는 성폭력의 유형이고 그 피해의 성질상 피해자 자신이 숨겨왔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여성의 문제의 형태를 띄고 있다. 또한 가난한 집안의 미혼 여성이 그 주된 동원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계급문제도 포함하고 있다.2. )전후 일본군‘위안부’들의 삶과 현재 모습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군 위안소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위안소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위안소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유기되거나 학살되었다.한편 연합군의 포로로 있다가 귀국선을 타기도 하였다. 해외에 남겨진 대부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처럼 위안소 경험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남아있는 경우도 많았다.고국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도 여성의 순결을 중요시하는 가부장적 사회가 주는 심적 고통과, 위안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남아있는 성병과 육체적 상처, 계속되는 빈곤으로 인한 생활고로 크게 고통받고 있다.대다수 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위안부 경험에 대한 수치심과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보다 더 큰 고통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평범한 여성의 삶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여성들은 신체적 장애뿐만 아니라 정신적 장애 즉,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다. 대부분의 군‘위안부’여성들은 직접 생계를 유지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식당일, 파출부, 막노동 등 육체적 노동에 종사해왔다.그후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발족되고,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이 시작되면서 한국정부에 법제정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93년 국회에서 ‘일제하 군위안부과 피해자 여성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군위안부 문제가 일반 사회에 넓게 확산되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정부는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오랜 침묵에서 깨어났다.1) 한국 정부의 태도① 종군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에서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던 초기에 한국 정부는 이에 관한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러나 1992년 1월로 예정된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직전인 1991년 12월 피해자 김학순 등이 도쿄지방재판소에 최초로 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자 비로소 종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공식 외교안으로 다루기 시작했다.1992년 정부는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을 구성해서 피해자 신고를 접수했고. 그 해 7월말 ‘일제 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 발간이후에는 부진한 활동을 보이다가 종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여론의 집중적 조명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자 1993년 UN인권위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에 대해 철저한 진상조사와 아울러 충분한 보상을 촉구하였다② 그러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직후 .일본정부의 진실규명은 촉구하나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겠으며 피해자의 보상은 한국정부 예산에서 집행하겠다고 밝히면서. 사실상 일본정부의 위안부 관련 국가 책임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여기서는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생존자를 대상으로 생활안정 지원금과 생활보호법 및 위료보호법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일본 정부에 대한 금전적 배상 포기는 위안부 배상문제와 관련해 국가의 재량적 권리인 한국의 외교보호권을 포기한 것으로 실질적으로 일본정부에 대한 법적 청구의 포기였다.개인의 국제법 주체성이 제한되고 가해국 일본의 근본적 입장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국제인권단체들의 관여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일본 정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에 김을 빼는 일이었다.게다가 한국정부는 종군위안부 희생자들에 대한 원호와 별다를 성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나아가 일본정부에 요구한 진상조사에 대한 압력도 별로 가하지 않았다.③ 1997년 11월한 초기에 일본 정부는 시종 관여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민간업자의 소행이었으며, 정부가 관여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었다.② 그러나 1991년 11월 21일 과거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에 직접 관여했다는 요시다 세이지의 양심선언과 1992년 1월11일 일본 주오대학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전쟁 당시 군위안소 설치, 관리, 모집에 일본군이 직접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다수의 정부문서를 공개하자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1992년 1월13일 가토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군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경영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일본 정부 관여를 처음으로 시인했다. 여론의 화살에 못 이겨 진상조사에 착수한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6일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1차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군위안부 문제의 핵심인 강제동원성을 시인하지 않자 한국 내 여론은 일본 정부의 미흡한 조사태도와 발표 내용을 비난했고 약 1년 후인 1993년 8월4일 일본정부의 제2차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 비로소 부분적이나마 강제모집을 시인했으나 피해자를 위한 대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③ 그 이후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 피해자 보상문제는 법적으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단락되었다는 전제하에 정부 재원에 의한 개인 보상은 배제한 채 민간기금 설치를 통한 위로금 지급 방식으로 해결을 모색해왔다. 이에 대해 피해자 단체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 전제되지 않는 어떠한 해결책도 수락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은 민간기구의 형태로 1995년 7월18일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국민기금이사회’는 1996년 7월19일 한국, 대만, 필리핀의 생존피해자에게 1인당 200만엔의 위로금을 지불하고 향후 10년간 75억엔을 의료복지사업에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위로금 지불시에는 사죄의 내용이 아닌 위로의 편지를 피해자에게 발송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내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관련단체와 한국정부는 공식적 사죄와 진상규명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특히 캐나다 교포 한인사회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구성하여 미국 하원의 결의안 지지 서명운동과 모금운동을 펼쳐왔다. 청문회 개최를 통해 결의안 채택을 주도해 온 중심에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국제적 인권연대로 뭉친 소수민족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헌신적인 노고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단지 최대 20만명의 피해 여성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자행된 반인륜적 전쟁 범죄이며, 잘못된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부정이자 평화에 대한 거부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류보편적 정의와 양심으로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규명하고 공식 사죄와 보상,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해 평화를 지향하는 국제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5.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개인적 견해1) 한국 정부에 자세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의 일차적 책임은 물론 반성없는 일본에게 있지만, 한국정부 또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 정부는 집권층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의한 피해자들에 대한 문제의 해결조차도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정부도 과거사 해결의 적극적 의지를 보여야 할 때가 되었다.즉 우리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간단체에만 맡겨서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국내적으로는 단순한 피해자구제 뿐만 아니라 군위안부 제도를 만들고 시행한 반인륜적 행위자, 전범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 피해자 배상요구 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하고, 국외적으로 공동피해자인 남북한의 적극적 협력시도, 세계의 피해 당사 국가들과의 연계를 통한 책임문제 강력하게 제기를 해야 한다. 하루 빨리 민족자존의 회복을 위해서 국가적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2) 우리 국민에 자세우리 국민은 스스로 지난날의 방관된 자세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수십년이 넘도록 제기하지 않고 피해자를 한다.
    사회과학| 2009.02.28| 9페이지| 1,500원| 조회(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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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가A+최고예요
    Ⅰ. 머리말3?1운동을 계기로 일제에 조직적인 항거를 위해 수립된 임시정부는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최고기구로서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초기에는 하나의 단일한 정부의 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각지에 분산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통일된 정부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마침내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게 된다.오늘날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그 존립과 역할을 두고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했고, 그 독립국을 운영?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조직체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그 활동과 역할에 있어 과연 ‘정부’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도 있는 것이다.따라서 본 고에서는 먼저 3?1운동을 계기로 탄생된 국내외 각지의 임시정부의 모습과 통합 과정을 정리해 보고, 통합 후 전개된 다양한 외교?구국활동의 양상과 국민대표회의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아울러 이들의 활동을 토대로 하여 임시정부가 지닌 의의 및 그 한계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Ⅱ. 임시정부의 수립 배경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일본에게 강점당한 이후, 한민족은 끊임없이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정치적 이념 및 방략을 지니고 있던 세력들에 의해, 국내를 비롯하여 만주?노령?중국?미주 등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어 가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렇듯 각기 다른 활동지역, 정치이념, 독립운동 방법을 취하는 수많은 단체들이 난립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민족의 독립 운동의 역량이 분산된다는 문제점을 보이게 된다. 이로 인해 분산된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으로 결집시키려는 시도와 노력인 통일전선운동이 추진되어 간다.한편 대외적으로도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전후 식민지 문제 처리방안을 위한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자를 아우르기 위한 구심점으로 한성정부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에 안창호는 상해정부와 노령정부를 한성정부에 통합한다는 원칙 아래 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둔다는 안을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의결시켰다. ① 상해와 노령에서 설립한 정부를 일체해소하고 한성정부를 승계할 것, ②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둘 것, ③ 상해정부가 실시한 행정은 유효임을 인정할 것, ④ 정부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할 것, ⑤ 현재의 각원은 일제히 총사퇴하고, 한성정부가 선임한 각원이 정부를 인계할 것 등 5개의 정부 개조안이 그것이다. 이어 6월에는 임시헌법을 공포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국무위원들로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9월 1차 개헌을 통해 비로소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민족의 역량을 한 곳으로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처음으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 헌정체제는 임시의정원(입법기관), 법원(사법기관), 국무원(행정기관)으로 구성되어 우리 역사상 최초로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였다는 데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중 임시의정원은 출신지역별로 선임된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행정부는 대통령제로 운영되고, 국무총리 아래에 시기에 따라 내무?외무?재무?군무?법무?학무?교통?노동 등 7~8개의 부를 두었다. 아울러 그 직할조직으로 민단을 두어 상해 동포 사회를 장악해 나갔다.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를 정하지 않아 스스로 사임하지 않으면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만 그 직책을 물러날 수 있게 한 것이나, 헌법의 범위 내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권한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국무원의 권한을 유리시킴으로써 임시정부 운영에 혼선을 가져 왔다는 점 등은 통합정부의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들어서는 노령 측의 문창범이 상해정부가 한성정부의 봉대가 아닌 ‘개조’라는 형식으로 통합을 추진하구의 대책마련을 위해서는 보다 큰 자원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지배적인 가운데 1922년 2월 6일 그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의 좌절은 소련 및 코멘테른에 대한 독립운동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게 되는데 이 시기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대한민국임시정부관계자가 한때나마 대거 참석하게 되는 것 역시 태평양 회의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의 한 발로라 할 수 있겠다.3. 중국에 대한 외교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도 중국에 대한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한 것은 중국 자신이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서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청일전쟁이후 이권다툼에 패배하여 정치정세가 약화되고, 원세개 사후에는 북경정부와 광동정부가 양립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임시 정부에게는 어느 정부와의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느냐의 문제가 제기 되었던 것이다. 우선 광동의 호법정부는 임정과의 정치노선이 비슷하였으나 만주에 1백만 이상의 한국 동포가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북경정부와의 관계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921년 임시정부는 신규식을 특파사절로 하여 호법정부의 총통인 손문을 방문하여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획득과 독립운동의 협조 요청을 주목적으로 하는 국서를 전달하고, 이에 대해 수락을 의미하는 회담을 가짐으로서 사실상 중국정부로부터의 승인을 얻어내게 되는데 이것은 양측 지도자가 가진 사상이나 이념의 공통성이 상호간의 이해를 촉진시킨 결과물이었다.한편, 임시정부는 만주 지방의 동포사회와 독립 운동에 관한 문제는 북경 정부와 교섭해야 했는데 중국입장에서 한국 독립운동자들의 처분 문제는 중?일간의 외교관계가 얽혀있었다. 일본이 대륙에 대한 침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용적인 처우가 혹시 그 구실이 되어 주권을 침해받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20년 훈춘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소위 간도출병은 중국측을 극도로 긴장시켰고,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취제하여 일본과의 공동보조리들의 운동으로써 세계의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과 통일전선이 되도록 결정.②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들의 운동으로써 혈전에 중심을 두고 조직적으로 추진해 가기로 결정.③ 본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 헌법, 제도, 정책 및 기타 일체를 실제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선할 것.3월 12일에 가결된 이 정부 개조안은 개조파에 의해 제출된 것으로 현 임시정부의 개조를 골자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창조파에서도 13일 신조직제의안이 제출되었다.① 앞으로 우리 독립운동은 전민족의 유일한 철혈주의로써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② 과거 5년 동안에 조직된 각 기관 및 각 단체는 그 명칭의 높고 낮음과 시설의 넓고 좁음을 논하지 말고 일체 이를 폐지하고 본 회의에서 우리들의 운동에 적합한 헌법으로 통일된 깃발아래 새롭게 조직할 것.창조파의 신조직안은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 신조직안은 3월 16일 까지 토론하였으나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참가 대표자들은 양파로 분열되어 3월 20일 회의에서는 이미 가결된 정부 개조안에 관한 토론이 다시 진행되고 창조파의 소요로 정회(停會) 22일 23일의 회의는 창조파 대표들의 출석거부로 개최되지 못하는 등 국민대표회의는 파행으로 치닫는다.한편 임시의정원은 국민대표회의의 추이에 따라 대국쇄신안, 임시헌법개정안을 제출하는 등 정부개편을 준비해 나갔고 국민대표회의의 개조파는 임시정부와 타협점을 찾으며 임시정부로 하여금 국민대표회의를 승인하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개조파와 임시정부의 타협 움직임이 깊어지자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부인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국민대표회의는 4월 11일 다시 개최되어 창조파에 의해 개조파의 ‘정부개조의안’은 기각되고 시국 문제를 보류한 뒤 재정 의안과 군사의안을 중심으로 회의를 진행해 간다. 개조파 측은 임시의정원에 < 헌법 제 57조를 ‘본 임시헌법의 개정 또는 조직 제도의 변경 및 중대 사업의 처리는 국민대경북도 연통제 조직의 독판부원과 군감 전원이 체포되었고 그 후 계속해서 국내 조직이 발각되었다. 동년 12월에는 평북 창성군에서 통신원 김지익, 다음해 6월에는 평북 독판부 특파원 권창훈과 7월에는 의주군 통신 양승업이 피검되었다. 그 후 연통제는 각 지방에서 계속 발각되어 1921년에는 적국의 조직이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 연통제는 1919년 7월에 설치된 이래 2년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독자적인 통신기구를 갖지 못하였던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담당 통신조직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① 연통부의 설치는 평안도ㆍ함경도 등 국내의 북구 지방에는 비교적 순조로웠는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순탄하지 않았다. 남부 지방에서는 각종 독립운동 단체가 연통부를 대신하고 있었다.② 연통제는 1921년에 거의 붕괴되었는데 그것은 일제에 발각되어 무참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③ 활동의 면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선전 활동과 자금 수합, 그리고 독립운동의 정보 수집 및 보고로서 큰 공로를 남겼다.④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한 것은 교통국의 업무와 중복되었으나, 그와 같이 통신이 일원화되지 않았던 점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는 처지에서 오히려 이득이 되었다.⑤ 국내 각도에 독판을 배치한 것에 비하여 만주 지방에 총판을 배치한 것은 만주 지방 독립 운동의 중요성과, 그 지방 동포 사회의 통할을 쉽게 하려는 의도와, 또 그 총판부에서 국내 독판부를 어느 정도 통할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연통부의 설치는 평안도ㆍ함경도ㆍ황해도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경기도ㆍ충청도에는 일부 지방 밖에 그 실현을 보지 못했고 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의 경우는 거의 설치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통부가 설치되지 못한 지방에서는 그것과 거의 비슷한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서 연통부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강원도의 전역과 충청도 및 전라도 일부 지역에는 대한 독립 애국단이 조직되어 연통부 활동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경기도와 그 외 경상ㆍ충청ㆍ전라도에서 청년 외교단과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의었다.
    사회과학| 2009.02.28| 21페이지| 2,000원| 조회(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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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서평)
    -조세희-서 평 목 차1. 글을 시작하며2. 현대사회의 계급3. 빈?부의 차이는 사회적 책임인가? 개인적 책임인가?4. 난장이의 자살과 영수의 살인5. 도도새, 우리 사회의 지식인의 자화상6. 노동법(근기법,노조법등)은 노동자를 위한 법인가?7. 21세기 난장이는 아직도 존재한다8. 결 론1. 글을 시작하며2001년 7월, 당시 21살이었던 나와 친구는 방학 기간을 통해서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대학생 신분인 우리는 용역업체를 통해서 전자제품 생산공장으로 파견을 나갔다. 기억하기로 처음 공장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란 사뭇 차갑고 기계음을 제외하곤 엄숙함이 느껴졌었다.곧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반장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인수되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은 뒤 일을 하게 되었다. 하는 일은 간단했다. 레일 앞으로 냉장고가 지나가면 그 속에 야채칸이나 얼음칸 같은 것이 움직이지 않게 테이프를 붙이는 일이었다. 8시간이상 똑같은 일을 하려니 답답하고 짜증나긴 했지만 나와 친구는 한달뒤에 받게 될 월급만 생각하며 참고 일했다. 고된 한달이 지나고 기대하던 월급을 받게 되었던 우리는 생각보다 적은 액수에 실망했다. 용역업체에서 조금 가져가고 연금이라고 얼마 가져가고, 결국 당초 예상했던 금액보다 20여만원 작은 돈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땐 너무 어리고 난생처음 벌어보는 큰 돈이라서 대충 만족하며 지나갔던 것 같다. 단 한달간의 공장 체험이었지만 무척 힘들었고 매일 매일 반복되는 단순작업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의 장면과 무척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여러 도서목록 중에 서평으로 조세희의 을 택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내 체험이 은연중에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 같다.2. 현대사회의 계급우리 사회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본다면 자본가(기득권문화), 중산층(지식인문화), 노동자(빈민문화)로 나눌 수 있다. 현대사회는 과거처럼 제도적으로 계급화를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빈?부로 구분되는 계층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난쏘공’에 등장인물들도 이런 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다.① 기득권층(자본가) : 윤호, 경훈② 중간계층(지식인) : 지섭, 신애, 수학교사③ 소외계층(노동자) : 난장이와 그의 가족‘난쏘공’은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로 인한 계층간의 양극화 과정에서 서로의 의사소통의 단절을 통해 당시 사회의 노동자들의 소외현상을 보여준다. 노동자인 난장이 가족의 빈곤은 세습되고 자식들은 태초부터 불평등한 사회에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사회가 기회균등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 시작점부터가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즉 난장이 가족의 물려받은 가난과 사회로부터의 냉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난쏘공’은 이러한 사회 구조속에서 중간계층(지섭,신애)이 소외계층을 이해하려는 눈을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즉 힘의 균형을 위해서 우리 사회의 지식인의 역할은 자본가의 편이 아닌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도우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첨예한 대립구조를 완화하며 화해불가능성을 극복하는 현실개선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 빈?부의 차이는 사회적 책임인가? 개인적 책임인가?현재 우리 사회의 매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무한 경쟁시대, 작은 정부, 자유와 기회의 균등 등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바로 무능력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즉 문제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으로 귀속된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납득할만 한가?‘난쏘공’에서 드러난 영희(노동자)의 사회인식은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결정되는 모순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희는 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다녀야 했고 당시 같은 나이 또래가 누려야 할 어떤 문화적 혜택도 받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는 출발선부터가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빈?부의 차이를‘개인’의 능력문제로 치부해 버리기에는‘사회’구조적으로 불평등이 엄연히 실제하다는 것이다.물론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는 개인 능력의 차이에 따라 빈부격차가 당연히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빈부격차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일정부분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절한 통제를 통해 해결해 나아가야 할 몫이다. 또한 자본가와 지식인들도 그들의 부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었는지 되짚어 보고 사회의 균형을 위해 힘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4. 난장이의 자살과 영수의 살인난장이의 자살은 표면적으로는 산업화?도시화의 과정속에서 자신의 근거지를 잃어버린 한 가장의 상실감의 표현이며, 사회적으로는 소외된 빈민의 경제적 논리의 희생이라고 보인다.다시말해 그의 죽음은 자살이지만 궁극적으로 모순된 사회로 인해 타살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리고 영수는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의지로 은강그룹 경영주를 목표로 살인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의 의도는 실행되지 못하며 사형을 선고받게 됨으로써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이는 도시 빈민의 궁핍한 생활,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찬 구조 속에서 노동자의 현실적 패배를 나타낸다.즉 ‘난쏘공’은 난장이의 자살을 통해 70년대 자본주의 시대의 모순을 비판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영수의 자살의 실패와 사형선고를 통해 현실극복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5. 도도새, 우리 사회의 지식인의 자화상)“나는 도도새다”(…) 그 새는 날개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개가 퇴화했다. 나중엔 날 수가 없게 되어 모조리 멸종당했어.‘난쏘공’에서 지섭은 자신의 현실문제에 대한 극복의지 부족을‘도도새’의 비유를 통해나타낸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되어 보인다.오늘날 우리들은 대부분‘그냥’살아간다. 즉 사회의 부조리를 분명히 인식하며 살고 있지만 내심 안주하면서 기존의 기득권이라도 유지하려 변화를 두려워한다. 사회적으로 지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상대적 약자에 대한 인식과 동정은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자신의 일정 수준의 몫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꺼린다.자본가와 노동자의 사이에서 한발짝 자본가의 가깝게 서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오히려 기존의 자본가와 유사하게 되려고 한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사회의 모순을 이식하고 비판하며 변화를 이끌어 가야하는 많은 사람은 도도새의 날개처럼 퇴화하고 있다.6. 노동법(근기법,노조법등)은 노동자를 위한 법인가?노동법은 본래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시초인 영국의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법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공장법의 제정을 배경은 자유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자본가의 입장에서 제정된 법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국가들의 노동법도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범위내에서의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을 제한하고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치고 있는 한계가 있다.즉 근본적으로 노동법은 노동자보다는 자본가의 편에서 노동자의 최소한도내의 법적보호상태를 유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최소한의 법적 안정장치마저 없다면 오늘날의 노동자들의 삶은 더 큰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삶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현재 우리 사회의 노사문제는 아직도 갈등의 골이 깊다. 이런 갈등 해결 어려움의 1차적 원인은 사용자들의 노조에 대한 완강한 태도, 이기주의, 일관성 원칙 부재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처럼 노조는 주로 사용자측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2차적 조직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우리 노사관계 문제 발생의 일정한 책임을 사용자들 스스로에게서 찾을 경우 사용자나 사용자 조직이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 노사관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될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9.02.28| 5페이지| 1,000원| 조회(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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