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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상,중농 학파 실학학자 중심의 자료
    실학< 목차 >1. 우리조가 실학을 주제로 선정한 이유2. 당시 실학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3. 실학의 갈래4. 대표적 실학자-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5. 실학의 의의와 한계1. 우리조가 실학을 주제로 선정한 이유우리가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운 이황의 이기론, 이이의 이기이원론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학문은 유교사상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체계화하여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학문인 성리학인데 조선 사회는 성리학의 사회라 불리울 정도인데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학문을 해왔다. 하지만 당대의 핵심층은 예송논쟁과 같은 논쟁 아닌 논쟁도 당파싸움 등 탁상 공론을 하였고, 중화 외엔 다른 국가들을 '오랑캐'라 깔보아 왜란, 호란 때 쓴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으로 변동하는 사회의 흐름 속에 유학을 새로이 해석하여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렇듯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모순에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교조화된 성리학에 대한 비판, 반성의 움직임이 표출된 하나의 사회 개혁론. 현실 문제를 직시한 이들에 의해서 신분 제도, 농민 자립에 따른 토지 개혁, 부국강병을 위한 상공업 발전 등을 논의 하였다.우리 조는 어떠한 사회적 흐름의 변화 속에서 당시 지배적이던 이른바 대세를 따르지 않고 새롭고 파격적일 수도 있는 사상인 실학과 실학을 제창한 학자들에 대해서 조사하고자 하였다. 이번 발표를 통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진 학생이 되었으면 한다.2. 당시 실학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1. 성리학의 한계가 드러난 붕당정치조선 중기에 이르면 사림파가 훈구파를 내쫓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들 사림파는 얼마 안가 퇴계 이황의 학문을 따르는 동인과 율곡 이이를 따르는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최초에는 붕당간의 견제를 통한 정치를 하면서 보다 건전하고 백성에게1) 신분질서의 변동조선은 양반, 중인, 일반백성, 노비및 천한계층 의 신분질서를 가지고 있었음양반수의 증가 - 국가의 재정부족에 따른 납속책실시 - 공명첩(나라에서 재정을 확보하려고 거액을 받고 발행한 첩지, 가지고 있으면 신분상승가능). 하지만 나중에는 위조를 하였고 또는 위조한 걸 가지고 사고 팔기까지 했다.족보를 위조해서 양반가문에 편입, 족보를 위조 하거나 또 위조한 걸 가지고 매매가 성행했음. 그 당시에도 돈이면 다되는 세상. 이런 식으로 양반이 많아져서 세금을 내야하는 백성들의 수가 감소하자 국가 재정이 어려워짐. 그래서 남은 백성들에게 더욱 가혹한 수취 --> 도망가는 백성들&자진해서 노비로 들어감(밥 먹여주고 세금안내도 되니까) --> 세금 징수가 더 어려워지고 국가재정 파탄.양반의 위상 약화 - 전쟁으로 인해서 혹은 붕당 정치의 희생자가 되거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여 등등 몰락한 양반들은 시골에서 손수 농사를 지어먹고 살거나 아니면 돗자리를 짜는등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일반 백성과 다를 바없는 삶을 살게 됨. 이들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면서 성리학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실학을 연구하게 된 원인(물론 전부는 아님).김홍도가 그린 자리짜기 라고 하는 그림입니다. 여기서 아내는 물레를 돌려서 실을 잣고 있고 남편은 머리를 보니 양반 같은데 돗자리를 짜고 있네요. 아마 몰락한 양반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2) 자본주의 의 발전조선시대는 기본적으로 농업을 중시했고 상공업을 천시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청과 일본 사이에 무역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농업생산량이 전과 다르게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농업의 발전 - 조선후기 가면서 이앙법(모내기)의 발전에 따른 농업생산량 증가, 또 수리시설의 발달. 이모작의 발달, 시비법(거름)의 발달등 여러 가지 기술의 혁신으로 인해 적은 노동력으로도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음. 부농이 탄생하는 계기가 됨. 이러한 부농들이 많아진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면서 전에 발달하지 못했던 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 라고도 한다.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북학파의 실학사상은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 사상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이었다. 특히, 북학파 실학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박제가 : 북학의 저술, 청과의 통상 확대 주장유수원 : 우서 저술, 중상학파 실학의 선구자홍대용 : 기술 혁신, 신분제 철폐 등박지원 : 열하 일기 저술, 화폐 사용 등을 강조(3) 과학과 기술에 관한 연구허적 : 화폐의 필요성 건의권대운 : 화폐의 필요성 건의정약용 :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수원성)을 쌓음홍대용 : 중국의 천문 기술을 배워 혼천의 만듦(4) 우리 나 안나갔음. 실학연구에 매진하여 북학파의 대표주자가 됨.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열하일기를 쓰게 되는데 이 책 에서 쓰인 자유분방한 문체 때문에 정조임금과 대립하게 됨. 또 이책은 당시 지배층들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생각이 많이 담겨있어서 금서가 되었음. 나중에 정승을 지냈던 손자 박규수도 조부의 이책을 간행하지 못함. 나이 들어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관직에 나감박지원의 사상적 특징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 북학파의 영수로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실사구시(實事求是), 기술의 존중을 주장. 세상의 중심은 한족이 다스리는 명이 아니라 이민족 오랑캐에 의해 세워진 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수용.성리학적인 권위주의나 위선 또는 허위를 일삼는 선비계층을 비판하고 신분이 미천하고 하는일이 천해도 성실하면 칭송의 대상이 됨박지원의 문학작품세계양반의 위선폭로 - 양반의 위선과 비리 풍자비판, 평범한 서민들의 삶 찬양(양반전, 민옹전, 마장전, 예덕 선생전 등)실학사상 고취 및 북벌론 비판 - 도학자나 위정자들의 위선적인 내면 생활 폭로, 비판하는 한편, 상업경제 사상의 고취, 이용후생의 사상 및 북학론 주장, 북벌론의 허위성 폭로(호질, 허생전)※허생전연암집 안에 있는 허생전은 우리가 수능을 공부하면서 자주 접한 아주 친숙한 작품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돈 못 버는 양반 허생이 마누라의 바가지에 못 이겨서 결국 집 밖으로 나와 변씨에게 거액의 돈을 빌린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매점매석을 하여 번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도적이 된 사람들을 돕는 등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는 박지원이 어느 무인도로 들어가 만드는 사회를 통해서 그의 이상향을 엿볼 수가 있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완과 허생의 이야기를 박지원이 비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가 있어서 연암집에 수록된 여러 작품 가운데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여성의 인권신장 주장 - 여성들에게 지나친 정절 강요함으로써 여성이 고통받는 사회 현실을 비판(열녀함양박씨전)박지원의 대표작 -의 문체를 비판하고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문의 유명한 문장을 기준으로 글을 짓게 하였음. 하지만 박지원은 이를 거부하였음(임금의 명인데 거역하다니 참으로 대단). 개혁군주 정조가 왜 이런 보수적인 정책을 폈는지 이해가안감- 박제가박제가(1750∼1805)는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로 알려진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서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인물이자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그리고 유시공 등과 깊은 교류를 통해 북학파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1. 박제가의 일생박제가(朴齊家, 1750~1805 : 영조 26년~순조 5년)는 1750년 11월 5일 우부승지 박 평(朴枰)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고, 호는 초정, 위항도인, 정유, 뇌옹 등을 사용하였다. 박제가는 1766년(영조 42) 17세에 이순신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의 서녀와 결혼하였다. 박제가는 이 무렵부터 종로 백탑 부근에 사는 이덕무, 유득공과 교류하였고, 1768~69년 무렵에 박지원이 백탑 북쪽으로 이사 오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는 함께 그의 집을 드나들며 교류하였다. 박제가와 이덕무 등은 1778년(정조 2) 사은진주사 체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 연경에 가서 이조원과 반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웠고, 청나라에서 귀국한 그 해의 가을에 경기도 통진에서 북학의 초고를 완성하였다.박제가는 1779년(정조 3) 서른 살에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박제가는 유득공과 함께 1790년(정조 14) 정월 건륭제의 팔순제를 축하하는 진하사 황인점의 수행원으로 연경을 다녀와 정삼품 군기시정이 되고, 다시 같은 해 9월에 다시 정조의 특명으로 사은의 자문을 휴대하고 동지사를 수행하여 청나라에 다녀왔다.박제가는 1792년 외직인 부여 현감으로 부임했으나, 1794년 춘당대 무과별시에 장원으로 뽑혀 오위장에 임명된 뒤, 이듬해 1795년(정조 19) 영평 현감으로 부임했렸다.
    인문/어학| 2010.10.24| 15페이지| 1,0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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