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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포스트모던 철학][포스트모더니즘 철학]포스트모던 철학(포스트모더니즘 철학) 진리관, 교육적 시사점(포스트모더니즘 등장과 시대적 배경,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특징, 포스트모더니즘과 교육)
    포스트모던 철학(postmodern philosophy)의 진리관과 교육적 시사점목차I. 포스트모더니즘 등장과 시대적 배경II.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특징1) 대서사의 고부와 총체성의 해체2) 다원주의(pluralism)3)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III. 포스트모더니즘과 교육I. 포스트모더니즘 등장과 시대적 배경포스트모던(postmodern)이란 표현이 생긴 해는 1971년이다. 이 해에 Rudolf Pannwwitz가 쓴 유럽 문화의 위기 (Die krisis dereropaeischen kultur) 에서 postmodern 이란 형용사가 출현하였다. 이 표현은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언제나 표스트모던은 근대의 간막극이나 익살스런 것, 혹은 근대를 극복하는 비젼을 표현하였다.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60년대 문화이론의 영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논의는 건축, 문학, 미술 등과 같은 영역에서 포스트모던적인 문화의 새로운 형태를 규명하였다. 특히 1970년대 이래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 문화, 미술 등의 영역에서 모더니즘(근대성 혹은 현대성) 세계관과 다른 새로운 양상들을 담아내는 사상으로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모더니즘은 중세를 마감한 근대 시민사회 출범부터 현재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의미한다. 20세기 후반 지구촌의 사회 문화적 환경은 매우 크게 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인간 삶의 양식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틀이었던 이데올로기 대립구조가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해체되었고, 그 동안 관심을 끌지 못했던 환경문제, 여성문제, 여가문제, 청소년문제, 지역사회 문제 등이 사람들의 관심사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과거 특권층 중심의 소비 중심에서 절약이라는 미덕에 같혀 있던 대중들의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문화적으로는 정보통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영상매체의 보급이 이루어져 계층간의 문화적 차별이 줄어들고 새로운 대중문화의 흐름이 나타났다. 사회적으로는 고학력에 디지털식 전자매체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소비활동 및 여가활동에 관심이 많은 신 중간계층이 등장하여 기존의 사회규범 및 풍조에 도전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포스터모더니즘 이라는 개념을 계보학적으로 살펴볼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Th. Adorno)이다. 그는 신음악의 철학 이라는 글 속에서 이미 1930년대 이후 당시의 문화적 양상들을 현대성의 노화 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종래 사용되어왔던 현대 라는 시대적 의미로는 설명될 수 없는 다른 특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그러다가 60년대부터 모더니즘과는 다른 생활양식의 변화를 설명하고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고, 70년대 후반 이후에는 탈이데올로기화, 자본주의적 소비사회화, 디지털 영상정보, 신 중간계급 대구, 그리고 신 과학운동 등 대중문화 변동의 특성을 포스터모더니즘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게 되었다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단순한 연속이라든지 아니면 단절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될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경우에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의 성격을 지니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과 단절의 성격도 없지 않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현대 이후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기 현대 에 나타나고 있는 탈 현대적 현상들에 관한 사상적 포착을 뜻한다.. 이점 때문에 후기자본주의 내지 후기산업사회의 정치 문화의 역기능적인 현상에 직면하여 사회학자나 정치가들은 포스트모던적 시각을 정당하게 추구하고 있으며, 철학자들은 모더니즘에 입각한 민주사회의 경제학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담론 형성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 하고 있는 것이다.II.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특징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사랑으로 정립하려는 입장과, 새로운 문화변동을 설명하려는 패러다임을 구축하려 입장 등이 상호 혼재해 있다. 그러나 근대 이래로 자리잡아온 인간 이성에 입각한 합리성, 진리, 도덕 등과 같은 현대주의는 그 동안 상대적으로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무관심한 영역, 소외되었거나 거부된 혹은 부정된 영역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주제로 삼고 있다.1) 대서사의 고부와 총체성의 해체근대 시민사회를 지탱한 모더니즘은 이성의 시대가 낳은 지적 사고의 경향은 진보, 해방, 복지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된다고 하는 큰 주제,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되는 궁극적인 목적을 중심으로 한 이론 체계를 구성하였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이러한 이론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론 및 행동 규범을 정당화하여 인정하되, 그렇지 못한 이론 및 행동은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어 거부 혹은 부정하였다. 정당화된 이론 체계를 후 현대주의 철학자 리오타르는 대서사(grand narratives) 라고 푸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서사에 대한 거부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담론은 지금까지 대서사에 의해 거부되고 억압되어 온 소서사로 이루어진다. 즉 인간해방, 국가발전, 진보, 진리 등과 같은 대서사를 전체적이고 테러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그동안 대서사라는 중심부에서 소외된 가정, 지역사회, 청소년, 여성 등 작은 이야기를 정당화한다.2) 다원주의(pluralism)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성 회복을 거부하고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파악한다.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과 단절성, 객관성보다는 주관성, 같은 보다는 차이, 종합보다는 대조와 해체, 조화보다는 파편화 가 지배하는 현실의 모습을 인정하고 포용하려 한다.주체의 상실, 역사성의 상실, 연어와 표시와 현실의 차이서, 그리고 정보기술체제에의 종속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동안 주변적인 것으로 무시되거나 도외시되어 왔던 모든 것들이 이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그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동기가 된다. 그리하여 주변적인 것이 더 이상 지배적인 또는 중심적인 것과의 수직적 종속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수평적, 다원적 관계로 복귀하는데 크게 공헌하는 계기가 된다.3)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지식은 그 지식을 생산한 주체들의 이익과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이기적-집단적 이해관계를 없애기 위해서 지식과 관련한 일체는 반권위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탐구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도덕적 지식은 한 집단에 의해 형성되어 그 집단의 가치를 내재하고 다른 집단에게 규법 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모든 사람이 도덕적 지식 생산을 창조하는 열린 행위에 들어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주의는 반권권위주의적 상황에서 중시되는 절차는 대화적 절차라고 본다. 특히 개방적이고 비판적이 대화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다.III. 포스트모더니즘과 교육20세기 후반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한다면, 그 시대의 교육은 포스트모던적 교육 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미리 대답하자면 아니다 이다. 서구 근대사회 이래로 자본주의 교육의 계몽적 성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저명한 비판교육론자인 Klafki같은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붐은 계몽으로부터의 이별(Abschied von der aufklaerung) 혹은 계몽의 종말(Das ende der aufklaerung) 을 의미하지 않는 다고 지적한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의 교육철학이 지배적인 현재의 시점에서 전혀 교육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 교육적 상상력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 이성중심의 교육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즉 기존의 교육이 지향하는 가치나 도덕 그리고 지식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도록 한다. 교육이란 관연 어떤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고 거기에 대한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교육내용, 즉 확정적이고 절대화된 지식, 즉 대서사적인 지식관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도록 한다. 교육내용은 지식, 기술 또는 가치, 도덕 및 태도 등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교육의 내용은 모더니즘이 추구하는 가치 지향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이란 본질적으로 보다 나은 가치 지향적 작용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육의 이런한 성격은 교육 현실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확고부동한 믿음, 즉 교육내용이 종국에는 진리에의 추구로 이어진다는 신념으로써 교육내용을 절대시하는 믿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과학| 2005.10.14| 3페이지| 1,500원| 조회(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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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연합][EU][유럽통합]유럽연합(EU)의 형성배경과 유럽연합(EU)이 오늘날의 유럽에 미치고 있는 영향 분석(유럽통합의 역사적 배경, 유럽연합(EU)의 형성과 발전, 유럽연합(EU)의 성립, 유럽에 미치는 영향)
    유럽연합의 형성 배경과 그것이 오늘날의 유럽에 미치고 있는 영향목차I. 유럽통합의 역사적 배경II. 유럽연합의 형성과 발전1) 유럽통합을 위한 관념2) 유럽통합을 위한 협력3) 유럽석탄철강공동체4) 유럽경제공동체 및 유럽원자력공동체의 설립5) 공동체의 확대6) 단일유럽정서의 채택III. 유럽연합의 성립IV. 유럽에 미치는 영향(결론)참고자료I. 유럽통합의 역사적 배경유럽의 역사는 기독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유럽대륙의 지배를 위한 각 민족 및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유럽인들은 국가목표에 따라 또는 공동이익을 추구하며 그들의 문화유산과 국가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이한 민족, 국가간에 단합하여야 할 필요성을 자주 느끼고 이와 같은 단합의 필요성이 하나의 정치적으로 통일된 유럽을 지향하는 이상으로 발전되게 된 것이다. 특히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해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 사회적 폐해가 나타나게 되었을 때에는, 시민과 국민생활의 보전을 위한 하나의 공동조직체 구성에 대한 갈망이 더해 갔던 것이다. 사회적 국민생활에의 자멸을 초래하였던 일부 유럽국가에 의한 세계전쟁의 발발은 더욱 더 정치적으로 통일된 유럽을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그 기본 구상은 평화를 지향하는 모든 유럽의 국가와 민족이 평등하고 또한 동일한 권리의 행사를 가능케 하고자 하는데 놓여 있었다. 이러한 평화적인 유럽통일체 구성을 위한 정치적인 응집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 와해된 상황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유럽 통일체 구성의 가능성은 먼저 국제연맹의 테두리 안에서 다져진 유럽 국가들의 밀접한 협력관계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Europe(유럽), EEC(유럽경제공동체), EC(유럽공동체), EU(유럽연합) 등의 용어는 역사와 함께 변천해 온 유럽의 정치, 경제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1993년 11월 발효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의해 출범한 유럽국가들간의 연합기구로 현재 1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존의 유럽공동체(EU)를 기초로 했으나 EC와는 별도로 1999년 1월 1일을 목표로 짜인 유럽통합 일정을 추진했으며, 특히 마스트리히트조약이 추구하는 단일통화 도입, 공동외교안보정책 추진, 노동, 교육, 사회, 산업분야의 공조 등 3개 영역의 통합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유럽공동체와는 달리 법률적 실체는 아니며 유럽통합을 추진하는 추상적인 주체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인류문명의 개화지로 세계역사의 주도권을 장악해 온 유럽이 19세기 이후 미국의 정치, 경제적 위상강화에 따른 상대적 영향력 약화를 만회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지역안보와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는 유럽통합의 역사와 그 근간에 깔려 있는 이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거 같다.II. 유럽연합의 형성과 발전1) 유럽통합을 위한 관념최초의 유럽통합안은 1306년 프랑스 법조인이자 외교관인 삐에르 뒤브와가 제안하였는데, 그는 프랑스 국왕이나 교황이 최고 심판관이 되어 각 군주를 중재하여 하나의 통일된 유럽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약 3세기에 걸쳐 별다른 통합론이 제기되지 못하였다. 1632년 프랑스와 크루세가 만인에 의한 무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강좌 를 출판하여 유럽국가간 무역을 통한 통합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처음으로 비 기독교적인 형태의 통합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693년 월리엄 펜이 유럽의회의 창설을 주장했고, 17세기 프랑스의 재상 쉴리는 11개의 군주국과 4개의 공화국을 함께 통치하기 위한 유럽평의회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아베 드 셍-삐에르(Abbe de saint-pierre)는 1731년 유럽상원의 창설을 제안하였고, 루소(Jean j. Rousseau) 등 많은 사상가들이 유럽통합을 제창하였지만 구체적인 실현은 없었다. 이후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연방주의적 접근의 통합을 시도하였는데, 이를테면 1930년에 프랑스의 유럽관세동맹(Union douaniere europeenne)과 유럽의회동맹(European parliament union)안, 1933년 스위스 바슬(Basle)에서 개최된 유럽동맹운동(Europa-union movement). 그리고 1938년 영국의 연방제동맹(Federal union)안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독일의 무력침공으로 무산되고 말이다.2)유럽통합을 위한 협력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유럽사람들은 처음으로 평화적인 기반 위에 통합작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43년부터 유럽건설의 아버지 장 모네(Jean monnet)는 만약 국가주권의 기반 위에 국가를 재건설한다면 이 땅에 평화는 없을 것이다......., 유럽에 국가들은 자국국민의 번영과 발전만을 보장하기에 지리적으로 너무 인접해 있다. 따라서 유럽의 국가들은 공동경제를 중심으로 한 단일통합체를 건설해야만 한다 고 호소하였다. 모네의 이와 같은 호소는 로베르 슈망 및 유럽통합론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이는 유럽공동체의 성립으로 나타나게된 것이다3) 유럽석탄철강공동체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초국가적 기구인 고등관청을 통해 모든 유럽국가들의 석탄 및 철강자월을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취지를 가진 기구로서 1950년 5월 9일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로베르 슈망에 의해 그 성립이 제안되었다. 슈망선언은 유럽 국가들 사이에 사실상의 단결을 점진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확고한 성과들을 통하여 유럽의 통합을 점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장 모네의 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장모네으 lrn상은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ECES) 설립을 위한 파리조약에 프랑스, 이태리, 돌일,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6개국의 서명을 이끌어 내었고, 1953년 5월 마침내 석탄과 철강의 공동시장이 출범하였다.3) 유럽방위공동체의 실패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6개 회원국은 그들 국가의 군대를 1947년이래 첨예화되고 있는 동서냉전으로부터 유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유럽의 군대로 통합하려는 유럽방위공동체 설립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유럽대륙의 공동방위체제 구축을 목표로 했던 유럽방위공동체 창설계획은 프랑스 의회의 비준 거부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아다4) 유럽경제공동체 및 유럽원자력공동체의 설립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운영에 자신감을 갖게 된 6개국은 경제분야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고자 의도하였다. 그리하여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 설립을 위한 두 로마조약이 각각 체결되었으며, 이 두 조약은 1958년 1월에 발효되었다. 특히 유럽경제공동체조약은 노동, 상품, 서비스, 그리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허용되는 공동시장의 출범과 병행하여 회원국들은 공동청책을 구상하여 1961년 처음으로 공동농업정책이 탄생하였다. 10년에 걸친 열정적인 유럽건설의 노력에 이어, 1968년부터 공동농업정책의 재정문제에 기인한 회원국간의 알력, EC확대를 위한 협상지연,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유럽공동체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시적 위기는 회원국간의 협력으로 금방 종결되었고, EC회원국은 6개국에서 12개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1979년부터 유럽통화제도가 도입되어 회원국 화폐간의 변동을 조정 가능케 하였으며, 같은 해 유럽의회 선거가 최초로 직접국민투표에 의해 실시된 것이다.5)공동체의 확대EC의 회원국은 6개 나라였으나 오랜 교섭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1972년 1월 22일 영국, 아일랜드 및 덴마크 신입회원국으로 받아들였고 이들 국가의 가입조약이 1973년 1월 1일부터 발효됨으로써 EC는 그 회원국의 수가 6개국에서 9개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제1차 확대)1981년 1월 1일 그리스가 가입하였으며(제2차 확대) 1986년 1월 1일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가입하였다(제3차 확대), 제3차 확대 이후에 다수의 지중해 연간국들이 회원자격을 얻기 위해 공식적으로 가입을 신청한다. 터키와 모로코, 사이프러스와 몰타가 가입을 신청을 접수하였다. 하지만 유럽국가 아닌 나라는 가입에 거부가 된다.6)단일유럽정서의 채택프랑스 출신 쟈끄 들로르가 유럽위원회 의장에 취임한 뒤부터 유럽통합은 국경 없는 유럽의 구상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다. 1985년 12월 4일, 회원국들은 단일유럽의정서를 채택하여 로마조약의 개정을 결정함에 따라 통합작업을 적극 지원하고 1993년 단일시장 출범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198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유럽이사회에서 각국 정상들은 들로르의 단일시장 완성안에 대해 유럽이사회 사상 처음으로 표결을 통해 이를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57년 체결된 로마조약을 개정하고 공동시장 완성을 위한 회원국간의 정치적 협력을 체계화할 단일유럽의정서의 제정을 위해서 정부가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단일유럽의정서는 이후 여러 차례의 정부간 회의를 거쳐 1985년 룩셈부르크 유럽이사회에서 채택되었고, 다음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정식 조인되어 각국의 의회 및 국민투표를 통한 비준절차를 거친 후 1987년 7월 1일자로 발효되었다. 유럽에서 사람, 상품, 자본, 서비스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국경 없는 공동체의 창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즉, EC를 명실상부한 단일시장으로 완성하기 위해, 국가간 협력강화를 규정하고 각국이 설정해 놓은 규제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인력의 이동은 단순한 제한의 철폐를 요구한다. 인력의 이동은 단순한 제한의 철폐를 넘어 거주 이전 및 자유로운 취업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으며, EC 회원국의 국민이라면 국적을 이유로 상이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한다. 합의된 사항들 가운데 중용한 점은 자본과 인력의 이동을 제외한 제반사항에 대해서는 각료이사회에서 만장일치가 아닌 가중다수결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점이고, 또한 입법과정에서 협력절차를 도입하여 유럽의회의 영향력을 다소 높이도록 배려한 점이다. 단일유럽정서는 국경 개방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신속하고 순조롭게 자리잡아 갔고 통합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경제통화동맹으로 가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과학| 2005.10.14| 4페이지| 1,500원| 조회(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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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법][외교사절][방통대][국제법][특권][면제][외교사절 파견][외교]외교사절의 특권과 면제 분석(외교사절의 기원, 외교사절의 발달, 외교사절의 파견, 외교사절의 접수, 외교사절의 특권, 외교사절의 면제)
    외교사절의 특권과 면제목차1. 외교 사절의 기원2. 외교 사절의 발달3. 외교 사절의 파견과 접수4. 외교 사절의 특권과 면제4-1. 불가침권(不可侵權)4-2. 치외법권(治外法權)참고자료1. 외교 사절의 기원외교 사절은 외국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국가 간의 관계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외교 사절 제도는 근대 사회 이전 고대 이스라엘, 그리스, 로마, 중국, 인도, 한반도 3국 시대에도 시행되고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부족 국가 간에는 외교 사절이 교환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 바빌론 헤제키아(Hezekiah) 왕이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보내니, 헤제키아 왕은 사신을 영접하고 왕궁과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열왕기하 20장 12-13절). 그리스는 도시 국가(polis)로 구성되어 있어 국가 간의 관계가 긴밀하였으며 근린 동맹은 종교적 연합체로 사자(使者)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쟁 개시, 종료, 휴전 협상에 사자가 파견되었으며 사자는 신성불가침의 특전을 향유하였다. 로마에 와서는 외국과의 관계가 활발해지면서 국제 관계를 다루는 법제도가 발전하였으며, 외교 사절 제도도 국무를 담당하는 사절과 구두 통신을 전달하는 사자로 발달하였다. 실제 로마가 사절을 파견한 예로는 기원전 146-27년 프톨레미 왕이 이집트의 페르세포네(Persephone) 축제에 경축 사절로 에우독소스(Eudoxous)를 파견하였으며, 로마황제 안토니우스는 인도에 대사관을 설치 하였고, 로마와 중국간 실크 로드가 기원전 120년에 개통되어 양 대륙간에 교역이 활발하였다. 특히 인도는 로마에 사절과 함께 승려를 파견하였고 기원전 20년에는 인도 사절이 로마에 파견되었으며 서기 302년에는 로마 셀레우코스왕과 인도 찬드라 굽타 왕 간에 대사관을 교환하였다. 중국도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770-403)에 고대 국제 사회가 형성되면서 국가 간에 사신들이 빈번히 교환되면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漢)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하여 기원전 138년 장건을 사신으로 대월지에 관행이 발달하면서 외교사절 제도가 확립되었다.3. 외교 사절의 파견과 접수국가가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에는 대사관을 상설하여 외교 업무를 수행하는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저수하는 권리, 즉 공관 설립권(right of legation)을 가진다. 물론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고 해서 국가의 권리, 의무로서 상주 공관 성립권을 향유할 권리와 공관 개설을 접수해야 할 의무는 없다. 국가 간에는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도 상주 공관 개설을 합의하지 못하였거나 또 겸임 공간으로 유지하는 관례도 많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가 재정 사정으로 공관 개설 능력이 없어 상대국에게 공관 개설을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는 국가 안전 보장 때문에 자국에 외국 외교 공관 개설을 반대하는 데서 야기될 수도 있다. 정부는 특정 대사를 공관장으로 임명하기 전에 접수국의 동의(agrement: 아그레망)를 요청하는 것이 국제 관례이다. 아그레망 요청을 받은 국가는 특정 인물에 대하여 이의가 없을 때에는 동의함을 회보 한다. 그러나 특정인물이 불만족스러운 인물 또는 기피 인물일 때는 아그레망 부여를 거절할 수 있다. 아그레망 거부 사유는 대사로 내정된 특정 인물이 과거 접수국에 대하여 위해로운 발언 또는 논물 등을 게재하는 때 등이고 아그레망 거절 회보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아그레망은 서면이나 구두로 요청하고 서면 또는 구두회보를 받을 수 있으며, 소요 시간은 통상 2-3주이며, 접수국 국가 원수의 제가를 얻어 회보하는 것이 관례이다.접수국 동의(아그레망)를 받은 대사는 국내 절차에 따라 특명전권대사로 발령을 받은 후 임지에 부임 및 신임장 제정 일자를 조정한다. 신임 대사는 부임시 파견국 정부의 신임장과 전임 대사의 소환장 원본과 사본을 휴대하고 부임한다. 부임한 대사는 임지에 도착 즉시 신임장 사본 및 전임 대사의 소환장 사본을 주재국 외무부 장관 또는 의전국장에게 제출하고 주재국이 주선한 일시에 국가 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한다.4. 외교 사절의 특권과 면제외교 사절은 역사적으로 다. 국제법이 외교 사절의 특권과 면제를 인정하는 근거는 1)국가 대표에 대한 예의적 관념이고, 2)국가의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하며, 3)외교 사절의 직무 활동을 보장하는 데 있다. 또한 외교 사절의 특권과 면제를 인정하게 된 법적 근거는 1)국가 주권설, 2)자연법학설, 3)영토외적 성질설, 4)기능설 등 학설에 따라 상이하다. 국가 주권설은 국가는 절대 주권의 상징이므로 국가권을 상징하는 외교 사절은 국가가 향유하는 독립권 불가침권을 향유한다는 것이며, 자연 법학설은 외교관의 신분은 고대로부터 국제 관습에 의하여 보장받는다는 설이다. 영토외적 성질설은 외교 사절은 본국에 귀속하므로 주재국 영토 외에 거주한다는 설이며, 기능설은 외교 사절이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제약을 받지 않아야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 사절의 특권과 면제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속지주의(屬地主義)와 속인주의(屬人主義) 이론에 의하여 법적 근거를 규명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 사절의 신분은 치외법권적 이론에 근거하여 속지주의로 정의할 수 없고, 외교 사절의 특별 지위 때문에 외교 사절은 단순한 자연인이 아니므로 속인주의 이론의 적용도 부적합하다. 외교 사절의 특권은 불가침권(不可侵權)과 치외법권(治外法權)으로 정의 할 수 있다.4-1. 불가침권(不可侵權)외교 시절은 주재국에서 재임 중 불가침권을 향유한다. 외교사절의 신체, 명예, 관사, 문서는 불가침의 대상이며 특별보호를 받는다. 1)외교 사절의 신체와 명예의 불가침에 대해서 외교 사절이 내란 또는 공공 질서를 파괴하는 불법 행위를 하였을 때는 일시적으로 구속 또는 감금할 수 있으나 즉시 석방해야 한다. 외교 사절은 주재국에서 위법 행위에 대하여 법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나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를 받으므로 이런 경우 외교 사절 또는 본국 정부에 퇴거를 요구할 수 있다. 2)관사의 불가침이다. 관사는 대사관, 공사관, 관저를 의미하며 불가침이다. 외교 사절의 요구나 동의가 없는 한 주재국 정부 관헌은 직 존중한다고 규정하였다. 관사에 정치범의 비호권(right of asylum)을 라틴아메리카 일부 국가에서 인정하는 경우가 있으나 형사 범죄나 정치적 사건으로 도망하고 있는 자를 보호하는 것에 대하여 그 정당성이 논란되고 있다. 또한 본국의 범죄인을 본국에 송환하거나 유치할 목적으로 관사 내에 감금하는 것을 금한다. 3)공관의 문서는 불가침이다. 공관의 문서와 서류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불가침이다(비엔나 협약 제24조). 접수국은 공관의 공적 목적을 위한 본국 및 공관간에 자유로운 통신을 허용하고 보호하며, 공관은 외교신서사(diplomatic courier)와 암호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공관은 주재국의 동의를 얻어 무선 전신 장비를 설치, 사용할 수 있다(제27조 1항). 외교 행낭(diplomatic pouch)은 개봉하거나 억류될 수 없다(제27조 3항).4-2. 치외법권(治外法權)외교 사절이 주재국의 연방 및 지방법에 의하여 규제를 받지 않는 특권을 치외법권이라고 한다. 즉 외교 사절은 접수국의 재판 관할권, 경찰권, 과세권에서 면제된다. 치외법권은 관저의 면제, 재판 관할권 면제, 경찰권 면제, 증인 소환면제, 과세권 면제로 구분할 수 있다.첫째, 관저는 면제권을 향유한다. 외교 사절의 관저는 접수국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고려되므로 외교 사절은 피난민에게 비호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저의 면제권은 외교 사절의 독립성과 공문서의 불가침을 위하여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재판권의 면제이다. 외교 사절은 주재국에서 형사재판권, 민사 및 행정재판권으로부터 면제권을 향유한다(제31조 1항). 외교 사절이 반역 또는 동란 등 국내 형법을 위반한 경우에도 소추, 체포, 구금, 처벌될 수 있다. 그리고 외교 사절이 이임 후 재임국시 처벌할 수 있다. 외교 사절은 민사재판권에서도 면제된다. 외교 사절에 대해서는 공무상 행한 행위에 대해서는 민사 소송을 제기, 수리할 수도 없고 손해 배상 의무와 강제 집행이 허용되 사절은 특권을 포기하기 전에 본국의 동의를 요한다. 셋째, 외교 사절은 접수국의 사회 보장 규정에서 면제된다.(재33조). 넷째, 외교 사절은 경찰권에서 면제된다. 경찰의 명령과 규정은 외교 사절을 구속하지 못하며 교통 또는 위생 규칙의 위반에 대하여 처벌하지 못한다. 접수국 경찰은 외교 사절이 사회의 중대한 일반질서와 안전을 침해하였을 때는 소환을 요청할 수 있다. 다섯째, 증인 소환의 면제이다. 외교 사절은 증인 소환으로부터 면제되며 증인으로서 증언을 할 의무가 없다(제31조 2항). 외교 사절이 재임중 형사, 민사상 범죄 행위(주재국 관리, 노물 수수, 정보 수집 등)를 하였을 때는 증거 요구를 받게 되며 이를 거부하게 되면 소환 사유가 된다. 그리고 외교 사절의 범죄 행위가 이임 후에 밝혀져 증언의 필요가 있을 때에는 정부간 면책 조건으로 서면 또는 구두로 증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외교 사절은 민사 사건(부동산, 상속, 전문직 및 상업행위)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증언의 의무를 가진다. 주재국에서 재판 관할권 면제는 아니다(제31조 4항). 여섯째, 과세권(課稅權)의 면제이다. 외교 사절은 주재국의 국가, 지방의 시세와 수수료, 자치 단체가 외교 사절 개인의 인적 또는 물적 사항을 대상으로 부과하는 모든 부담금과 조세로부터 면제된다. 그러나 a)상품과 용역의 가격에 통상적으로 포함된 간접세. b)공관의 목적을 위하여 파견국을 대신하여 소유하고 있지 않는 주재국 영토 내에 위치한 개인 부동산에 부과하는 부담금과 세금, c)사망한 외교 관원의 유산처리와 관련 주재국에서 부과한 재산, 상속, 유산세, d)주재국 내에 그 원천을 둔 개인 소득에 대한 부과금 및 조세와 주재국 내에서 영리를 위하여 부과되는 투자 자본세, e)특정 용역에 부과하는 요금, f)사유 부동산에 부과하는 등록세, 법원 수수료, 기록 수수료, 저당 수수료, 인지세는 면제되지 않는다(제34조). 외교 사절은 반입한 수입품에 대한 관세로부터 면제된다. 외교 사절의 면세권과 관련하여 각 국의 다.
    법학| 2005.10.14| 4페이지| 1,500원| 조회(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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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목차소개글서평작가소개참고자료소개 글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윌킨스와의 파트너가 됨으로써 DNA 구조 연구에 뛰어들게 된 사건부터, 윌킨스와 왓슨에 의해 프랭클린의 연구기록이 유출된 경위, 평생 여성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던 왓슨에 의해 '다크 레이디'로 폄하되는 안타까운 과정,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되는 중에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험실을 떠나지 않았던 강인한 의지의 생애를 숱한 오해로부터 되살렸다. DNA의 이중나선 발견에 결정적 단서가 된 X선 분석 자료를 제공하고도 연구 업적을 도둑 맞았던 비운의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 심지어 그녀의 자료로로 노벨상을 받은 왓슨은 유명한 에서 그녀를 깐깐하고 욕심많은 여성으로 부당하게 묘사하여 그녀의 명예에 2번 상처를 입혔다. 생전의 프랭클린을 잘 알고 지낸 사람들 이 책을 접하고 분노를 표출했고. 왓슨이 이후 다소 수정을 가했지만 여전히 비판자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하버드의 감사위원회는 출판사로 하여금 책의 출간을 중단시키게 된다(서평)DNA의 이중나선 구조 규명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비운의 천재 여성 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말 많은 사건,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의 숨은 공로자였던 그 여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제임스 왓슨등 세 명에게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의 명예를 빼앗겨 버린다1962년 12월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는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들은 그녀의 별명을 다크 레이디(dark lady). 그녀로부터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의 영예를 앗아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모리스 윌킨스 세 남자가 붙인 별명이다. 프랭클린은 유대계 영국인으로 검은머리를 지녔던 그녀의 외모를 빙자한 이 표현에는 고집 세고 독점력 강하며 촌스러운 옷을 입는 여자라는 비난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훗날 이 표현은 1962년 노벨상을 수상한 이 3인방을 평생 쫓아다닌 악몽이 되고 만다. 이유인즉슨 이중나선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 등 3인은 프랭클린이 찍은 X선 사진을 보고 위대한 발견으로 나가는 영감을 얻는다.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프랭클린은 명석한 천재였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한 프랭클린은 분자결정에 X선을 쬐어서 얻는 X선 회절을 통해 분자의 3차원 구조를 밝혀내는 X선 결정학 전문가가 된다. 영국 킹스칼리지에서 일하던 프랭클린은 DNA 이중나선구조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X선 사진을 찍지만 과학적 확증을 위해 연구를 계속한다. 하지만 동료 윌킨스는 그녀의 허락없이 사진을 분석하고, 이를 미국의 왓슨과 크릭에게 보낸다. 이들은 곧바로 연구에 돌입, 1953년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냈다고 발표해버리고 마치 자기들이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만든 것처럼 해서 그 공로로 노벨상까지 수상하게 됐다.과학의 역사에서 정당한 자리를 빼앗긴 그녀는 비록 이중나선을 향한 경쟁에서 정당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지만, 프랭클린은 여전히 정력적으로 연구했다. 버크벡칼리지의 바이러스 연구팀장이었던 그녀는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미국으로부터도 강연 초청을 받았다. 미국은 그녀에게 새로운 발견이었고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이미 크릭 등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로 자문을 구하거나 협조를 요청할 것들이 있으면 그들은 주저 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프랭클린은 이중나선을 넘어서는 그 어떤 발견도 새롭게 해낼 것처럼 보였다. 미국 초청을 받은 때였다. 프랭클린은 2개월 동안 미국의 곳곳을 누비며 여행과 강연에 빠졌고 영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그녀는 갑자기 스커트의 지퍼를 올리기 힘들어진걸 느낀다. 허리가 불룩 튀어나온 것이다. 두 개의 종양이었다. 한 달 후 프랭클린은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고 더 이상의 암은 발견되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믿었다, 예전만큼 아니 예전보다 더 정력적으로 연구에 온 힘을 다했다. 그녀는 사실상 죽기엔 너무 바뿐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새롭게 소아마비바이러스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56년에만 일곱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957년에는 여섯 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과 상관없이 몸은 점점 더 쇠약해져갔다. 1957년에는 몇 달 동안 그녀는 반나절밖에 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녀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었다. 그녀는 치료를 받는 시간을 제외하면 연구와 학회 참석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언제나 건강하고 꼿꼿한 자세로 임했다. 항상 노력했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주위사람들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1958년이 되었을 때 프랭클린의 몸에서는 새로운 혹이 드러났다. 암세포가 전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학요법과 방사능 요법까지 동원되었지만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59년 그녀는 거의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렸지만, X선 기구가 있는 지하층에서 사무실이 있는 위층까지 가려면 거의 계단을 기어가다시피 해야만 했다. 그 해 3월 말 그녀는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 프랭클린은 그렇게 열정적 연구로 명성을 쌓아가다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자기가 연구해온 이중나선을 누가 앗 아 간지도 모른 체 말이다. 연구업적을 도둑맞은 비운의 천재. 여자였기에 힘겹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현실.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훨씬 뒤로 미루어졌을 생명의 비밀 발견이다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상을 받으려는 목적이 없었다. 또한 왓슨과 크릭을 제외한 누구도 경주라고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들을 이기려고 하지도 않았다그녀는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갈 운명 같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왓슨이 쓴 베스트셀러 《이중나선》으로 인해 프랭클린은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고 DNA 구조 발견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이중나선》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자신이 해석할 수 없는 데이터를 독점하고, 남자를 못된 소년처럼 대하고, 평균적인 영국 여성보다도 촌스러운 옷을 입은 ‘로지’로 묘사되었다. 만약 로잘린드가 살아 있었다면 왓슨은 세상에 자신이 쓴 것과 같은 ‘로지’를 제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전의 프랭클린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접하고 강력한 반대와 분노를 표출했고. 왓슨이 이후 다소 수정을 가했지만 여전히 비판자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하버드의 감사위원회는 출판사로 하여금 책의 출간을 중단시키게 된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죽어버린 로잘린드 프랭클을 잘은 모르지만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항상 정진하고 노력하며 여자의 몸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고 생각한다.
    독후감/창작| 2005.10.01| 3페이지| 1,500원| 조회(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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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리처드 파인만]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 리처드 파인만 독후감,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 리처드 파인만 독서감상문,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 리처드 파인만 서평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리차드 파인만목차책 소개서 평작가소개참고자료책 소개과학도 상상력이다. 숫자 하나로는 과학을 설명할 수 없다. 스타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1918∼88)의 지론이다. 그는 시인·몽상가보다 과학자가 훨씬 더 멋진 것을 상상해 왔다고 말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은 유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설적인 일화로만 그를 기억해왔다. 책은 그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 과학자로서의 파인만과 인간 파인만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노벨상의 배경은 양자전기역학이다. 양자역학은 고전물리학과 상충된다고 여겨지던 시절, 그는 명쾌한 '파인만 도형'을 통해 전자기학과 양자들의 운동을 통합했다. 그는 60세가 될 때까지 물리학의 최첨단에 서 있었다. 액체헬륨(초유체)의 성질, 원자핵 속의 약한 상호작용, '쿼크'의 존재에 확신을 준 파톤 모델 등을 연구했다.물리학자인 저자는 그가 노벨상을 세번 받을 만큼의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한다. 그는 남들이 증명한 수식에 의지하지 않고 독창적인 해법을 찾곤했다. 이름을 높이거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문제해결 자체가 즐거운 놀이였다. 양자전기역학보다 더 큰 업적이라고 평가되는 기초물리학 강의는 그를 '물리학의 샤먼'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론들을 나열하기보다 과학하는 방법,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 강연기록들은 전세계 물리학도의 필독서다.서평(호기심 많은 파인만씨)리처드 파인만은 어린 자신을 과학의 세계로 인도하면서 중요한 것은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패턴이나 본질이며, 권위 있는 이가 이름 붙였거나 설명했다고 믿으면 안 된다고 배웠다. 파인만은 평소 농담과 장난을 일삼았다. 어린시절 숙모가 경영하는 호텔 주방에서 일하면서 완두콩과 감자 따위를 썰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 사용하다가 손을 베고 낭패를 보는 등 많은 사건을 저질렀다. 독심술사 흉내를 내기도 하고 병든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사람도 사냥개처럼 냄새로 물건을 알아맞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등 재미있고 괴상한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물리학의 발전에 이바지한다거나 업적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즐겼던 파인만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끊임없는 호기심, 파인만은 “사물을 가지고 노는 것은 쉽다. 내가 노벨상을 받게 된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비롯한 모든 업적은 흔들리며 날아가는 접시를 생각하며 시간을 낭비한 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혹시 ‘형사 가제트’의 실제 모델이 아니었나하고 의심이 갈 정도로 그의 생각과 모든 행동들은 엉뚱한 면도 있다. 파인만이 대학 시절에 쓴 시를 보면 왜 (왜 그런지 궁금해/ 왜 그런지 궁금해/ 왜 궁금한지 궁금해/ 왜 궁금한지를 왜 궁금해하는지가/ 왜 궁금한지 나는 궁금해) 리처드 파인만이 대학 시절에 쓴 시다 이처럼 파인만은 사물에 대해서 항상 호기심과 사물을 남들과 다르게 볼려고 노력했다 기보다는 그냥 파인만 자신이 그렇게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이야 뭐라 하건!파인만은 학문적으로 위대한 승리를 얻어 가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막30세가 지났고 주요 업적을 낸 위대한 물리 학자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파인만의 영웅인 디랙 자신도 20대에 많은 업적을 냈고, 그 후부터는 큰 일을 하지 못한 좋은 예이다.파이만이 티랙에게 바쳐다는 시는 이런 점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는 모든 물리학자들이 두려워하는/ 섬뜩한 병이다/ 서른 살이 넘었다면/ 살아 있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아주 조잡한 시다. 하지만 예외는 아주 드물지만 있다. 39세에 과학에서 가장 큰 업적인 파동의 양자역학을 만들었지만, 이것은 꽤 특별한 경우다, 슈뢰딩거는 파동에 대한 옛날의 아이디어로 되돌아가서 양자역학의 혼란을 수습하고 어렸을 때 배운 편안한 물리학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비교적 나이 든 사람이 할 일이었고, 앞을 보기보다는 뒤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더 중요한 예외는 아인슈타인으로, 그는 40대를 넘어서도 진취적인 업적을 냈었다. 하지만 갓 30세가 된 파인만은 스스로를 또 하나의 아인슈타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사회적인 문제도 있었고 잘생긴, 매력적이고 외향적인 코넬 대학교 교수로서, 파인만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40년대 후반의 기준으로 볼 때 바람둥이로 이름을 떨쳤고 뒤돌아 볼 때 이 일은 알린을 잃은 슬픔을 메워 보려는 시도가 지나쳤던 것 같았다. 그가 즐겨 쓴 수법은, 학생 조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물리 숙제 때문에 쩔쩔매는 예쁜 여학생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접근하는 것이다. 파인만은 동료에게, 자기가 코넬 대학교를 떠나려고 마음먹은 것은 여학생에게 평소처럼 접근하면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학생이 아니라 파인만 교수님이죠 하는 말을 들을 때부터였다고 이야기한다. 파인만은 유명해지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스개 소리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부분적인 진실이 들어있는 듯했다파인만은 노벨상 수상자들 중에서도 특별했다. 노벨상을 받기 훨씬 전부터 그는 이미 과학계의 전설이었다. 파인만은 1940년대에 양자전기역학으로 명성을 얻었다. 양자전기역학은 네 가지 근본적인 힘 중에 하나인 전자기력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1950년대에는 약한 상호 작용을 이해하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다음엔 중력의 이해에도 큰 공헌을 했고 1970년대 초반엔 강한 상호 작용에 대해서도 심오한 통찰을 제공했다. 다른 어떤 사람도 이렇게 많은 근본적인 상호작용에 대해 공헌하지는 못했다. 겔만도 두 가지 상호 작용만 공헌했지만 그는 놀라운 천재로 간주되고 있다. 그럼 파인만은 어떤가 네 가지를 공헌했다 이건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파인만이 대중들에게 널리 아려진 것은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 사고 이후였다. 60대가 넘어선 파인만은 챌린저호 참사 조사위원회에서 보여 주 활약 외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파인만은 이론물리학에 큰 공헌을 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에 수학 문제풀기와 젊은 시절 로스앨러모스에서 이론 계산 부서를 이끌던 시기의 다양한 과학적 관심을 다시 일으켰다. 그는 아들과 함께 컴퓨터에서 차세대의 중요한 아이디어인 병렬 처리 개념을 개발하는 데 참여했다. 여기서 말하는 병렬 처리 개념은 작은 컴퓨터들이 서로 연결 연결되어 협력하면 다양한 계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컴퓨터 6만4000대, 처리장치 16개, 4000개의 칩을 연결해서 프로그램 했다.파인만은 항상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시절에도 컴퓨터를 다루었고, 1970년대 말에는 컴퓨터를 만들고 작동시기는 실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이론적인 한계에도 관심을 가졌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컴퓨터학과장이 던진 질문을 계기로, 파인만은 계산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적인 최소 에너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러한 최소 한계는 없다는 것을 알아내었고, 이 의외의 결과에 매료되었다. 에너지를 아무리 적게 써도, 이상적인 컴퓨터는 여전히 작업을 수행 할 수 있다. 파인만은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컴퓨터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무척 흥미를 느꼈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 미분, 체스 등 여러 가지 논리적인 일을 잘했는데, 우리가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러한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컴퓨터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논리적인 것, 예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단숨에 종합해서 이 방에 의자와 가구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있다고 전체적인 상을 그려내는 것이 컴퓨터에게는 힘들다. 이것은 아주 재미난 일이다. 컴퓨터는 매혹적이고, 그것으로 풀 수 있는 문제들도 매혹적이라고 했다파인만은 자기가 논리적이 사고에 강했다고 말했지만, 그가 위대한 과학자가 된 이유는 논리적인 사고력과 기계처럼 세심하게 생각하는 능력 때문이 아니었고 그의 위대한 성취는 무엇보다도 직관에서 왔고, 물리학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본능적으로 무엇이 옳은 접근인지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결코 양자전기역학에 대한 경로 적분 방법과 파인만 도형에 대한 완전히 논리적인 이론을 만들지 않았다. 오늘날 그의 접근버의 위대하 성공은 상호 작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감에 넘친 추측을 하고, 여기에서 나온 도형과 방정식으로 그추측을 점점 더 실험과 일치하게 만든 것에 있다. 파인만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자연이 어떻게 되어 갈지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문을 통과해서 곡선 궤적을 따라가는 공은 최소 작용의 원리를 준수하는 궤도를 차기 위해 복잡한 수학 계산을 할 필요가 없었고
    독후감/창작| 2005.10.01| 4페이지| 1,500원| 조회(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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