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다른 전공 수업의 과제물 때문이었다.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를 위해 다시 ‘한 아이’라는 책을 접했을 때 떠오르던 생각은 예전과 변함 없이 환경에 대한 중요성이었다. 어제가 지나고 새로운 오늘을 맞으며 그리고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점점 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더 깊어진 것 만 같다. ‘한 아이’를 통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대중매체들의 기삿거리들을 통해 또한 내 주변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도 말이다. 주인공의 어긋난 생각들과 행동들이 물론 잘못된 것들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생존해 나가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존재를 모르고 자란 아이에게 따뜻한 눈길과 마음가짐을 바라는 어른들의 생각은 어쩌면 모순이기도 하다. 덧셈만 가르쳐주고선 사칙연산을 해보라는 무리한 과제가 아닐까.'한 아이'는 주인공인 쉴라의 사회적응 과정을 그린 책이다. 여섯 살난 정서 부적응아이인 쉴라의 엄마는 겨우 14살 때 쉴라를 낳았고 그러한 쉴라는 엄마의 의해 버려졌으며, 알코올중독자인 아빠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면서 자기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사회와 벽을 쌓고 주위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면서 남들이 자기를 싫어하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독한 모습까지 갖게 되었다. 3살난 이웃집 아이를 유괴하여 나무에 묶고 불을 질렀으며 금붕어의 눈을 연필로 도려내는 등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들을 보였다. 쉴라는 6살이 되기도 전에 험난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쉴라는 자신이 받은 학대로 인해 난폭하고 잔인하게 변해가던 불쌍한 영혼이었다. 그런 쉴라에게 등불처럼 다가온 토리 선생님을 만나면서 쉴라는 차츰 마음의 문을 열게된다. 쉴라에게 토리 선생님은 쉴라가 잘못을 하면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라며 너의 잘못이 아니다 라며 격려해 주었고 다른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쉴라가 창피해 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토리선생의 지극한 정성과 관심으로 처음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하며 울부짖던 쉴라도 차츰 세상과의 손을 서서히 잡게 된다. 결국 하루 하루를 전쟁 같은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쉴라는 좌절을 이겨내고 자신을 되찾게 된다.쉴라처럼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아픔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모든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 삶의 현실에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환경 속에서 길러지고 자라나면서 부적응을 하게 되고 결국 일반적인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향과는 어긋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그들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을 뿐이다. 쉴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의 작은 몸은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잔인성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설마 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었을까? 어린 나이에 감당 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버림'이란 걸 경험했고, 잦은 폭행, 지독히도 가난한 환경이 그 아일 사납고 잔인한 아이로 돌변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안타깝지만 인간은 자신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환경을 핑계삼아 부적응적인 삶을 살아갈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교육의 역할은 큰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자기의 갈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해결책을 찾지 못해 방치되며 결국 자포자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볼 때 우리는 왜 좀 더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지 못했을까, 마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인 것 마냥 행동했을까 하는 반성이 깃들기도 한다.
Neoliberalism을 근거로우리의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대한 방도시대가 급변하고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눈과 귀에 낯설지 않게 등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각종 정책과 행정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바탕 안에서 설계되었고 그에 발맞추어 나가기 위해 세계는 한시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업들과 각 국가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 즉, 국제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신자유주의(Neoliberalism)란 1912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W.윌슨이 ?독점을 조장하는 부정한 경쟁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억제함으로써 미국의 자유와 진보의 원천인 경제적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며 공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부의 활동범위 확대를 주장했는데, 정부의 개입을 적극 반대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와 비교해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1970년대 서구에서는 높은 실업률, 인플레, 경기 후퇴라는 전반적인 악조건에 직면하였다. 경제만 침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창조적인 분위기나 생동감이 저하되는 현상이 함께 나타났다. 이 때문에 과도한 국가개입정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반성과 비판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이를 토대로 한 사회경제정책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것의 본질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법으로 사회 및 경제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에 있었다.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강화의 주요 정책으로는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 보장, 불필요한 규제들의 철폐, 정부 규모의 축소, 세금 감축,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과도한 복지의 축소, 정책과 행정의 투명성 강화 정책 등이 있다. 국민의 정부도 이 정책을 대체적으로 수용해 정부, 금융, 기업, 노동부분의 4대부분 구조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른바 4대 구조개혁의 방향은 작지만 봉사하는 효율적인 정부, 건실하고 경쟁력 있는 금융, 투명하고 강한 기업, 노사정이 함께 만드는 활력 넘치는 노동시장으로 설정하고 여기에 세계와 함께 하는 개방 경제 등을 추가해 경제개혁과제로 제시하였다.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개념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를 근거로 우리의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대한 방도에 대해 논하여 보고자 한다.IMF를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급격한 자본의 이탈로 인해 환율이 빠르고 큰 폭으로 평가절하 되었으며 이를 예측한 외국 투자자의 빠른 자금회수 혹은 사업철수로 실업과 기업의 도산이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정부는 막대한 채무부담을 가지게 되었으며 노조를 비롯한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 내기와 불법파업으로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IMF 경제위기를 통해 우리나라는 ‘정부실패’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급속히 부상한 개념이 신자유주의였다. 물가상승과 소득감소 및 실업률 증가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인 스태그 플레이션으로 인해 정부부채가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까지 누적되었고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국가 성장’을 바탕으로 한 개방 경제로 나아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여기는 부분은 전 세계 장벽의 철폐이다. 무역, 문화, 산업 등 모든 분야 전반에 이르러 국가라는 틀을 넘어서 교류하는 것은 상생의 목표이자 협력 증진 방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은 동아시아의 주축으로써 신자유주의 시대에 발맞추어 같이 발전해나가고자 모든 분야에 걸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아시아 3국은 지리적으로 매우 밀접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써 한 국가의 정치, 과학,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일들은 다른 두 나라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홀로 성장할 수 없다. 이미 세계는 국가라는 이름의 장벽을 허물어 지구촌 곳곳을 장악했으며 무한경쟁 체제에서 고립되는 것은 발전과 성장의 의지가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국가 간의 긴밀한 교류와 협력은 국가 발전에 있어 필요 충분 개념으로써 주변국과의 관계 설정이 한 국가의 경제와 정치 및 존재의 방향을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수없이 강조되어 왔다.하루가 달리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 새로운 정보와 문물을 접하게 된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면 뉴스와 신문 및 각종 대중 매체는 어제와 다른 오늘의 새로운 이슈로 가득하고 산업현장에서는 새로운 발명품과 생산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러한 일들은 세계 모든 곳에서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으며 같은 이슈, 같은 발명품이 아닌 모두 다른 발상과 아이디어로써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세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매일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그들을 대표하는 경쟁력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만으로도 국가 간의 관계 설정이 중요함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전체의 합은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말이 있다. 쉽게 풀이하자면 1+1은 단순히 2가 되는 것이 아니라 2에 +a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서로 문화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며 가치관 또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생각하는 것도 다를 것이고 발전해 나가는 방향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비단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에 멈춘다면 그 ‘다르다’라는 것은 그저 ‘다르다’는 개념으로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것끼리 만났을 때 그 다른 것에서 새로운 다른 것이 만들어지며 그것은 +a를 통해 무한한 개념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더더욱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설정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기업을 통해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지금은 세계 5위의 발군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한 ‘현대’는 초기 자동차 기술을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미쓰비시 자동차로부터 전수 받아 그 기술을 바탕으로 무한한 투자와 노력을 통해 이제는 미쓰비시를 넘어선 세계적 자동차 회사가 되었다. 또한 세계 최고의 전자회사인 삼성전자는 매년 비즈니스 위크에서 발표하는 '2005년 세계 100대 브랜드'에 의하면, 삼성 브랜드 가치가 149억5600만달러로 20위를 기록해 107억5000만달러 가치인 소니(28위)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삼성전자는 10년전만 해도 임원들과 기술진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소니의 기술과 경영체제를 일선에서 직접 배웠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나타나 이제는 소니를 넘어선 기업이 된 것이다. 이런 대기업뿐만이 아니라 중소기업들 또한 중국, 일본과 기술 교류를 하고 있으며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이렇듯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교류를 통해 기업을 발전시켰으며 더 나아가 세계 최고가 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렇게 세계 최고가 된 것에는 기술을 받아들였다는 안일함에서 그치지 않고 과감한 투자와 기술증진을 위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미국 백인들의 블루스로 불리는 컨트리 음악에 대한 고찰 』Ⅰ. 컨트리 음악이란?컨트리 음악은 한(恨)의 음악인 블루스가 흑인계 아메리카 음악인데 비해 백인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미국 백인들의 대표적인 전통음악으로 미국 남동부에서 형성된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흑인계 음악을 백인들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동부의 민요에서 왔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자랑스러운 정신적 유산은 바로 개척 정신과 컨트리 뮤직이라고 한다.Ⅱ. 컨트리 음악의 어원컨트리는 처음에는 애팔레이션 포크로 불러져 왔으며, 유럽에서 그들이 불렀던 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친숙한 노래'(familiar tunes) 또는 산(山)지역사람들의 노래라고 해서 '마운틴 뮤직'(mountain music)으로 통했다. 이 용어는 19세기 말에 와서 힐빌리(hill-billy)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1940~1950년대에는 컨트리 웨스턴(country western)으로 불리다가 1960년대 말에 와서 western이라는 단어는 빠지고 컨트리로 불리게 되었다Ⅲ. 컨트리음악의 기원신대륙이었던 지금의 미국 땅은 과거에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영국 및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앵글로셀틱계의 많은 이주민들이 미국에 건너오게 되었는데, 그들이 소지품에는 악기뿐만 아니라 그들 몸에 베어있던 고유의 전통음악과 곡조도 자연히 들어오게 되었다. 남동부에 걸쳐 있는 애팔레이시아 산맥 지역에 정착한 초기 이주민들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주민들의 전통음악과 곡조들은 새로운 땅에서의 고된 생활과 멀리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미래에 대한 불안, 그에 따른 신에의 귀의와 잔연에 대한 동경 등의 정서가 그 지역 및 그 시대 사건들에 대한 노래 속에 자연 흡수 되면서 당연히 새로운 독특한 사운드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를 애팔레이션 포크 또는 힐빌리라고하며 오늘날 컨트리음악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있다.컨트리 음악이 형설 될 초기의 무렵에는 직업적 뮤지션은람들이 그 기원을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가사가 변하기도 하였으며, 한 음악에 대한 제목도 옛날음악이라든지 산의 음악 등으로 다양 할 수밖에 없었다.Ⅳ. 컨트리음악의 역사1) 1920년대 컨트리 앤드 웨스턴1920년대 초반 산발적으로 미국 남부 산악 지방의 전통적인 현악 밴드 음악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서서히 상업적 목적으로 녹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초기 시골 연주자즐의 실린더식 음반에는 피들린 존 카슨, 기드 테너, 릴리 퍼킷, 어니스트 '팝' 스톤맨 등과 같은 연주자들의 특징이 남아 있다. 또한 시골 노래들의 활력과 사실적 색채를 띤 상당수의 가사 내용이 엄격한 칼뱅주의 교도의 도덕주의적 관점을 지닌 비인칭의 이야기체 비극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 대부분 대중음악들의 역겨운 감상주의와 커다란 대조를 보였다.컨트리 음악의 발전에 있어서 음반보다 더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1920년대에 소규모 방송국들이 남부와 중서부 지역의 커다란 도시들에 생겨났고, 이들 방송국들은 방송 시간의 상당 부분을 시골의 청취자가 좋아할 음악의 생방송이나 녹음방송에 할애했다. 특히 큰 영향을 끼쳤던 두 방송 프로그램으로 1924년부터 시카고에서 방송된 "내셔널 반 댄스(National Barn Dance)"와 그 다음해부터 내슈빌에서 방송된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를 들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이 청취자들로부터 즉각적인 인기를 얻자 더 많은 음반 녹음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시골의 재능 있는 연주자들이 라디오, 레코드 스튜디오에 몰려들었다. 이들 중 하나였던 카터 패밀리의 연주는 특히 후대 연주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경제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인구가 남부에서 북부 도시들로 이주함에 따라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에는 새로운 장이 펼쳐졌고, 이에 따라 영향을 주는 요인들도 새롭게 변했다. 상업적 발전의 영향 아래 컨트리 앤드 웨스턴은 음악 자체의 성격까지도 변했다. 변형되지 않은 상태의 옛 노래 가락을 그대로 옮긴 최은 ''노래 부르는 카우보이'' 영화 스타들이 이른바 산(山)음악인 ''힐빌리'' 음악을 불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진 오드리는 적당한 가사를 변경하여 가짜 ''웨스턴'' 음악을 부르곤 했다. 좀 더 실질적인 두 번째의 변화는 텍사스-오클라호마 지방에서 컨트리 음악의 한 변종인 ''웨스턴 스윙''인 ''홍키 통크'' 양식으로 나타났다. 이 지방에서는 산악지대로부터 가져온 초기 정착민들의 음악이 블루스, 재즈, 루이지애나와 최남부 산악지방의 케이전(Cajun : 아카디아 출신 프랑스계 이민의 자손들) 음악과 섞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양식을 낳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양식은 밥 윌스, 어니스트, 터브 등에 의해 발전되었고, 쇠줄 기타나 전기증폭 기타를 사용한 강한 춤곡 리듬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3) 1940년대 블루그래스1940년대에 컨트리 음악이 이처럼 상당한 정도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만돌린 연주자 빌 먼로는 옛가락들을 여러 개 복원시켰고, 전통 양식으로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자신의 현악 밴드인 블루 그래스 보이스가 연주하게 했다. 빌 먼로는 최근에 컨트리 음악에 채택된 리듬과 악기들을 버리고 대신 옛 악기 피들을 주요선율악기로 복원시키고 고음역의 화성 창법을 복원시켰다. 그의 악단이 밴조 연주자 얼 스크러그스는 3개의 손가락으로 현을 퉁기는 주법으로 유례 없는 기술적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이전에는 반주악기로 쓰이던 밴조를 주요선율악기로 부상시켰다. 그 음악은 옛것과 새것의 기발한 혼합으로 상상력이 넘쳐, 한때 먼로의 밴드로부터 따온 ''블루 그래스''라는 이름의 독특한 형태로 인정받았다.4) 제2차 세계대전 이후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과 이것의 변조인 블루 그래스는 주로 일부 지방의 음악이던 것에서 확대되어 미국 전, 심지어 외국에서도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랜드 올 오프리" 이래 컨트리 음악의 중심지가 되어온 테네시 주 내슈빌의 주요음반회사들이 대규모 스튜디오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트리 앤드 웨스턴은 그 나름의 고유한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해나가면서, 몇 안 되는 미국 고유의 음악 양식 중 하나로 남았다Ⅴ. 컨트리음악의 발전현대에 들어서면서, 70년대를 기점으로 컨트리 음악계는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화되었다. 일렉트릭 사운드를 가미한 컨트리 음악의 팝과 록화(化)는 폭넓은 대중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컨트리 음악이 시대와 타협해 발맞추어 가면서 '컨트리 팝'과 '컨트리 록'으로 크로스오버화 했다. 영화 에 삽입됐던 'Stand by your man'과 'Apartment No.9', 'D-I-V-O-R-C-E'를 줄줄이 히트시키며 최고의 컨트리 여가수로 군림한 타미 와이넷(Tommy Wynette), Charlie Rich를 시발점으로 크리스탈 게일(Crystal Gale), 케니 로저스(Kenny Rogers), 그리고 윌리 넬슨(Willie Nelson), 앤 머레이(Anne Murray),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이 컨트리 팝 아티스트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컨트리 록'음악은 1960년대 소위 프로테스트 운동과 연관 히피족과 급진파들의 삶의 근원을 농목생활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에서 비롯된 밥 딜런의 1968년도 앨범을 선두로, 자니 캐시의 1969년도 앨범 과 존 바에즈(Joan Baez)의 1969년 앨범 과 1970년도 앨범에서 햇살이 비치는 남부와 고향이 푸른잔디 등의 목가적인 서정시를 노래했다. 1960년대 말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흡사한 목소리로 로큰롤을 노래했던 리키 넬슨(Ricky Nelson)이 컨트리 록으로 전향하기까지 한다. 1971년∼1975년 사이에 컨트리 록의 대표적인 밴드인 이글스(Eagles)은 당시 잭슨 브라운이 작곡해준 '테이크 잇 이지'(Take it easy)로 최초의 히트 넘버를 기록했다. 이 밖에도 1968년도의 앨범으로 컨트리 록의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했던 버즈(The Byrds)를 비롯, 버팔로 스프링필드(The Buffa에 힘입어 더욱 현대화됐다. 하지만,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도시 카우보이 스타일의 George Strait and Randy Travis와 같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복고적인 성향의 New Traditional Country가 득세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신성과 같이 등장한 가스 브룩스(Garth Brooks)는 순수 컨트리에 팝과 록을 섞은 Contemporary Country로 일시에 미국 음악계의 왕자로 군림한다. 그를 비롯 남성위주의 컨템포러리 컨트리는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중심을 여성들에게 이양, 팝과 컨트리의 장르적 널뛰기를 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셔나이아 트웨인(Shania Twain)과 페이스 힐(Faith Hill) 두 여전사의 시대로 들어 선 것이다. 이 두 여성은 이미 '그래미 시상식'을 통해 최고의 여성 컨트리 가수상을 한번씩 나눠 가진 바 있다. 게다가 리앤 라임스(LeAnn Rimes)와 딕시 칙스(the Dixie Chicks)의 가세로 말미암아 지금 미국 컨트리 음악계는 '지금은 여성시대'이다Ⅵ. 컨트리음악의 장르 및 대표 아티스트1) bluegrass : 빌 먼로, 블루그래스 보이즈, 스탠리 브라더스와 같은 아티스트가 있다.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에서 마운틴뮤직을 전통 민속악기로 현대화한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 양식이다. 명칭은 1939년 빌 먼로가 조직한 블루그래스보이스그룹에서 유래한다. 블루그래스는 먼로의 고향인 켄터키주의 애칭이다. 마운틴뮤직을 바탕으로 탄생하였으며 1940년대 중반부터 현대적인 음악 양식을 갖게 되었다. 1940년대 말부터 연주하는 밴드들이 늘어났다. 라디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영역을 넓혀 1950년대부터는 텔레비전에도 등장하게 되었고, 1960년대에는 대학이나 민속 축제 때 즐겨 연주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젊은 음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록음악의 영향까지 블루그래스에 도입하여 다양한 음악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3개의 손가락을 쓰는 스크루그스 있다.
동화 속에는 그 동화가 가진 상징을 나타내는 동화상이 존재하는데 동화상은 동화 이야기 속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 동화상은 동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깊게 새길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 속에 내포하는 진정한 뜻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동화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지금부터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첫 번째로 색채와 동화의 상징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색채는 단순히 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색채 속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색에 따라 현재의 분위기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견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개구리 왕자 에서는 흰말이 등장하는데 흰색은 빛을 의미함으로써 행복한 결말을 암시한다. 또한 흰색이 상징이 잘 나타나는 동화로는 헨젤과 그레텔 이 있는데 헨젤과 그레텔 에서 흰색은 빛, 순수, 완전성을 지닌 색으로 무죄를 상징하며 흰 새와 하얀 고양이가 등장함으로써 헨젤과 그레텔을 돕는 역할을 한다. 흔히 흰색은 여성을, 붉은 색은 남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색채의 상징에서 황금색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털복숭이 공주 에서의 황금 반지, 황금 실패, 황금 물레 그리고 물의 요정 닉시 에서의 황금 빗, 황금 피리, 황금 물레는 어려운 사건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열쇠가 되는데 이들 모두는 황금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황금색이란 동화에서 해결책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근거와 희망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색채의 의미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동화로는 어부와 그의 아내 가 있는데 어부와 그의 아내 에서는 바다의 색을 욕망으로 표현하는 색채 상징 법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맑고 투명한 색이었던 바다가 녹빛 노란 빛깔로 바뀌고 다음으로는 보라색, 어두운 녹색, 잿빛으로 변하자 바다는 고요해지고 거품이 일어났으며 짙은 잿빛, 검정 색으로 변하자 물이 뒤집히고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바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짙은 검정 색으로 변하고 혼탁해지자 회오리바람이 일고 광란의 파도가 일기 시작했으며 약간의 푸른빛과 시뻘건 폭풍 색으로 바뀌자 벌판과 숲은 온통 진동을 했고 파도는 해안을 후려쳤다. 마침내 칠흑 같은 검정 색으로 변하자 사나운 폭풍이 일고 온 세상은 시커먼 색으로 뒤덮였는데 바다의 색은 욕망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어둡게 변해갔고 그에 따라 세상도 혼탁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바다의 색이 욕망의 깊이를 나타내는 소재로 작용한 것이다.두 번째로 해와 달 그리고 바다의 동화 속 상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해와 달은 동화 속에서 신성화되는데 개구리 왕자 에서 황금 공은 해와 일치한다. 공주는 우물가 보리수 아래에서 황금 공을 가지고 노는데 여기서 해는 공주의 삶의 의미상으로 나타난다. 그 근거로 세상 구경을 두루 한 해님도 그녀의 얼굴을 비출 때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란다 라는 내용과 공을 잃고 슬픔에 잠긴 공주에게 왜 그리 슬픈가 하고 묻는 개구리의 물음을 들 수 있다. 해가 공주를 비추는 장면은 성숙의 문턱에 선 여성을 가리키며 황금 공을 가지고 유희를 즐기는 것은 유년기적, 자아 중심적 미성숙을 나타내어 해가 삶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달은 고대 동양 권에서 해보다 중요시되었으며 많은 민족들에게서 주로 여신으로 상징된다. 또한 변화의 상징으로 모든 생성과 소멸, 지상의 모든 생체 리듬과 연관되며 주기적 의미를 띠고 성적 다산성, 비, 물기와 연관되기도 한다. 달은 수많은 신화에서 해의 누이, 부인, 애인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달이 부드럽고 수동적인 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보름달이 의미하는 상징이 크게 작용하는 헨젤과 그레텔 에서도 보름달이 떠오르자 헨젤이 그레텔의 손을 잡고 자신이 뿌려 놓은 자갈들을 따라 집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도 달이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함에 따라 어머니의 상징 즉 여성성, 여신으로써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물의요정 닉시 에서도 보름달은 여성성과 직관을 나타냄으로써 양치기로 변한 부부가 서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보름달이 뜨고 그 보름달이 환한 빛을 비추자 그 빛으로 인해 얼굴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서로가 부부임을 알아보게 된다. 이 밖에도 많은 동화에서 해와 달은 신화적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는 무한한 생명력과 대모상 즉 삶과 죽음을 나타내며 무의식의 의미상이고 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부와 그의 아내 에서는 바다의 색이 점점 짙게 변해 갈수록 세상도 혼탁해짐으로 인해 바다가 생명을 좌우함을 알 수 있었다.세 번째는 동물상이다. 많은 동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동물이다. 이렇듯 동화에서 동물은 친근한 존재로 다가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이러한 동물도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구리 왕자 에서 개구리는 왕자적 세계보다 강한 주체성을 띠는 존재로 우물에서 떠오른 개구리는 남근적, 남성상으로 부상한다. 즉 성숙과정을 나타냄으로 인해 성적 상징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개구리가 왕자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은 남성의 완전한 변신, 죽음에서 재생으로, 폐쇄와 은둔에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헨젤과 그레텔 에서 새는 하늘과 대지의 매개자의 역할로 영혼의 육화 작용을 하는데 새는 흔히 천사상을 띠며 코란에서는 운명이나 불사와 연관되어 있고 서양의 수많은 신화와 인도에서는 정신적 영혼적 매개적 존재로 구원적 영혼으로써 상징된다. 또한 오리는 결혼의 행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고기는 생명의 요소로써 물과 연관되며 다산성 또는 죽음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리스도와 세례를 뜻하기도 한다. 어부와 그의 아내 에서는 물고기로써 넙치가 등장하는데 넙치는 창조주로써 성서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넙치는 창조주이며 어부를 아담으로 본다면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로써 본래적 천국, 생명력의 세계, 인간과 신 또는 자연의 직접 대화 상태, 자연과 인간의 공생으로 의미를 넓혀 볼 수 있다. 또한 넙치의 긴 핏자국은 공생과 조화를 상실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다른 동물상으로는 비둘기가 있다. 비둘기는 사랑을 나타내는 존재로 잉꼬 비둘기 한 쌍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데 비둘기가 나타내는 상징성은 신데렐라 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신데렐라 에서 어깨 위의 두 비둘기는 영혼이 더 높은 존재와 결혼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네 번째는 마녀상과 계모상인데 유난히 동화에서는 마녀와 계모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녀와 계모가 등장함으로 인해 권선징악에 대해 느끼고 교훈을 얻지만 마녀와 계모는 또 다른 의미로 동화 속에서 상징하기도 한다. 마녀와 마법사, 대모, 계모, 친모는 모두 여성성의 체계에 바탕을 두는데 라푼첼 에서 여성 마법사와 할머니상은 모성 콤플렉스를 나타내며 친모와 양모는 자연모와 대모를 각각 의미한다. 또한 신데렐라 에서 계모와의 갈등은 아프로디테와 프쉬케의 신화적 연관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 에서는 모성의 그림자상이 계모와 마녀상으로 나타나는데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잔인한 계모로 그렸고 황금 머리카락 에서는 악마의 할머니 상으로 지혜로운 부인들을 탈가치화 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홍차문화와 우리나라의 녹차문화의 비교모든 국가는 그 나라만의 고유한 전통과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국민성과 생활양식에 반영되듯 차 문화 역시 국가 고유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듯 러시아는 사모바르, 터키는 차이라고 불리우는 국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차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영구의 홍차문화와 우리나라의 녹차문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홍차문화는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로 영국인은 차를 받아들인 시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훌륭한 차 문화를 꽃피웠다. 홍차는 완전히 발효된 차로 동양에서는 차의 빛깔이 붉어서 '홍차(紅茶)'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찻잎이 검다고 해서 '블랙티(Black Tea)'라고 부른다. 통상적으로 생각해보면 Red Tea라 칭하는 것이 올바른 것 같지만 Black Tea라 불리 우는데도 역사적인 이유가 숨어있다. 차를 처음 마신 나라는 중국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녹차를 배에 싣고 가는 과정 중 뜨거운 태양열을 받아 찻잎이 발효되어 유럽에 도착해 상자를 열어보니 찻잎 색깔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 후 까맣게 변해버린 찻잎을 버리기가 아까워 끓여보니 맛이 좋아서 계속 마시게 된 것이 바로 홍차의 유래이며 이렇게 해서 붙인 이름이 'Black Tea‘ 인 것이다.영국에 홍차가 처음 보급되었던 것은 1600년 중반으로 스페인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 왕실로 시집갈 때 설탕과 함께 홍차를 가지고 가 영국 왕실에서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라고 한다. 이 후로 영국 왕실은 물론 귀족 사회에 가장 인기 있는 기호 음료가 되었는데 이렇게 유럽대륙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홍차가 영국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당시 영국에는 경쟁할 만한 비알콜 음료가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와인문화, 독일의 맥주문화라고 하듯 영국에는 특징적인 알코올문화도 없었다. 서민들은 진(gin)과 값이 저렴한 와인 정도를 마시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여건으로 낯선 것에 대한 문화적 마찰이 적어 홍차가 무난히 도입될 수 있었던 여지를 주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음료인 차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차에 대한 반대론은 주로 차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점과 함께 당시 차가 사치품으로 인식됐으므로 그만한 돈이 있으면 자선하는 것이 좋다는 정신적 유해설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 반대운동은 그것을 주도하는 이들조차 차를 애음 했으므로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경쟁대상이었던 비알콜 음료로는 커피와 코코아가 있었는데 이들 음료가 영국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차가 알려진 시기와 비슷하다. 영국에서 차가 커피와 코코아를 이길 수 있었던 데에는 1662년 찰스 2세에게 시집온 포르투갈 왕의 딸 캐서린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궁정이나 사교장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에일(ale: 맥주의 일종)이나 와인(wine) 등을 마셔 술에 절어 살 정도였는데, 차 애호가 캐서린 여왕의 등장으로 비알콜 음료인 차가 유행하게 됐다. 여왕의 취향을 상류층 여성들은 너도나도 본받길 원했고 곧 차는 상류문화로 자리잡았다. 18세기 중엽 차가 대중적으로 유행하기까지 경제적인 요인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영국에는 산업혁명이라는 경제발전에 따른 소득증대가 있었고, 아시아 무역에서 중국 차에 주력한 영국이 차의 국내 관세를 낮춰 차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준 것도 차의 대중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 영국에서는 홍차를 단순 기호식품이 아닌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티타임이다. 영국 홍차문화의 발상지는 1730년대에 문을 연 ?티 가든?이다. 티 가든 이란 차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는 런던 교외의 공원 혹은 유원지를 말한다. 커피 하우스가 실내에서의 남성들의 담론장인데 비해 티 가든은 여성들의 야외 사교장이다. 대체로 화사한 봄 4, 5월부터 8, 9월 가을 바람이 일기 시작할 무렵까지 문을 여는 티 가든은 처음에는 상류층 숙녀 신사들의 저녁 사교장이었다. 색색의 조명등이 켜진 산책길, 음악과 갖가지 여흥, 차와 식사(술은 금기였다)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차가 가장 애호되면서 티 가든 으로 불리게 됐다. 티 파티는 집의 가장 큰방에서 열리며, 화사한 날이면 정원에서도 열리게 된다. 스콘?머핀?비스킷 등 과자를 곁들인 식탁에는 그 집안과 주부의 품위를 가늠케 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티 세트와 테이블 보 그리고 다양한 식기들도 선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매너와 세련된 화제다. 이 때 사람을 초대하기도 하고 비즈니스를 펼치기도 해 ?티파티?라는 단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으며 홍차문화의 화려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차의 용기는 보통 도자기제의 포트로 잘 데우는데 특히 안쪽에 물이 묻지 않도록 끓는 물 속에서 포트의 외면만을 데워 거기에 홍차를 넣는다. 분량은 1인분에 티스푼으로 수북히 하나 넣고, 거기에 포트 분으로 하나를 더 넣는다. 다음에 끓는 물을 넣고 뚜껑을 닫은 후 2~3분 그대로 뜸을 들이는데 너무 오래도 안 되고 짧아도 안 된다. 홍차를 마시는 방법에는 우유를 먼저 컵에 따른 다음 홍차를 따르는 식과, 홍차를 먼저 부어 놓고 우유를 치는 2가지 방법이 있는데, 영국에서는 전자가 중산계급 이하의 풍습이고 후자가 상류사회의 격식이다. 영국의 홍차 소비량은 한때는 일인당 연간 4.5kg 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많이 줄어서 2.6 kg 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80% 의 영국인이 매일 홍차 5,6 잔을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차를 마시는 시간만으로도 다음과 같이 다양한 차가 있는데 아침에 잠자리에서 마시는 Early tea, 아침식사와 같이 마시는 Breakfast, 오전 동안에 바쁘게 일하는 도중에 잠시 쉬면서 마시는 Elevenses, 오후에 간식을 먹으면서 마시는 차 Middy tea break, 사교를 목적으로 하는 Afternoon tea,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마시는 High tea (Meat tea), 저녁식사를 마치고 느긋할 때 마시는 차인 After dinner tea,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시는 Night tea가 있다.끝으로 차 광(狂)이던 ?걸리버 여행기?(1726)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늘 차를 함께 마셨던 여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차는 우리들을 진지하며 매력 있고 철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나는 당신이 교양인으로, 좋은 어머니로, 완벽한 주부로, 그리고 훌륭한 티 마니아(Tea Mania)가 되기를 바랍니다.…내 최고의 처세훈(訓)은 차와 커피를 마시는 일입니다.…좋은 인생이란 재산과 건강, 그리고 차와 커피를 마시는 일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습니다.?우리나라의 대표되는 차 문화로는 녹차문화가 있으며 우선 녹차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오게 된 시기는 약 1100년 전인 삼국시대의 말기로 중국으로부터 불교문화가 도입되면서이다. 차의 유래에 관한 기록으로는 정사인 「삼국사기」제10권「흥덕왕」편에 나온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이 중국 황제 문종으로부터 차씨를 받아와서 흥덕왕 3년인 828년 왕명으로 지리산 남부자락에 심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대 우리나라에는 차가 이미 재배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흥덕왕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도 차가 자생적으로 자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 성행하여 찬란한 신라문화와 화랑도 정신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그 후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고 더욱 번성하여 차만을 재배, 제조하는 「다소(茶所)」가 있었으며, 차에 관한 일만 전담하는 기관인 「다방(茶房)」도 있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함께 성행하였던 음다(飮茶) 풍습은 민간으로 보급되어 우리의 시절풍속인 정초, 한식, 추석의 성묘와 백중에 절을 찾는 일, 그리고 삼짇날 중구에 친척들끼리 시제를 모셨던 차례 등으로 민속화 되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차인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차 문화는 쇠퇴하였고, 차도 점차 일반 대중과 멀어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부터 각종 의식에 차대신 술이 쓰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