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1. 구제도의 모순2. 재정의 위기3. 계몽 사상의 영향♧ 프랑스대혁명의 전개♧ 프랑스대혁명의 한계 · 결과 · 의의1. 프랑스대혁명의 한계2. 프랑스대혁명의 결과3. 프랑스대혁명의 의의♧ 프랑스대혁명 여기서 그치는가?1. 프랑스의 국기2. 에펠탑♧ 참고사이트프랑스대혁명에 대해 살펴보자.♧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는 세계인류는 기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국경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의 접촉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이해하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고 싶고, 이를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이치를 깨닫고자 프랑스문화의 이해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한 학기 가량 이 수업을 들으면서 지금까지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본 프랑스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우리나라와 프랑스가 수교한지 100 여년이 지났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프랑스에 대해 이해하기 보다는 막연한 환상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대해 좀 더 접근하고자 지금의 프랑스의 시민사회를 성립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프랑스대혁명에 알아보려고 하는데, 저는 프랑스대혁명의 전개보다는 그 원인과 결과, 의의에 더 집중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고등학교 1학년 사회시간에 프랑스대혁명에 대해 배울 때, 늙은 농민의 등위에 젊은 성직자와 귀족이 앉아있는 그림을 본적이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태는 매우 좋지 못하여 국가재정도 바닥이 나고 있었으며, 왕이었던 루이 16세와 왕비인 앙트와네트는 사치병에 걸린 것처럼 돈을 물 쓰듯 썼기 때문에 귀족들은 눈에 핏줄이 설만큼 피지배층인 농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였던 혁명전 프랑스 사회를 풍자한 내용의 그림 이었습니다.프랑스 혁명ien Regime), 즉 구제도의 모순은 프랑스혁명의 깊은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프랑스대혁명의 원인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면,1. 구제도의 모순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인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습니다. 앙시앵이란 '오래된', '낡은'이라는 의미이며, 레짐은 '제도'또는 '체제'를 의미입니다. 따라서 앙시앵 레짐은 근대 사회로 변모해 가는 당시 상황에서 이미 낡은 제도, 즉 봉건적 신분제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당시 프랑스에서는 3개의 신분이 존재하였는데, 소수의 특권층인 제1신분 성직자의 수는 총인구 2700만명 중에서 극소수인 10만명 정도였지만, 전국토의 1/10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주로서 봉건지대를 받고 십일조를 징수하는 특권과 면세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제2신분인 귀족은 40만명 정도로서 전 국토 1/5 정도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농민으로부터 지대를 받았고, 교회·군대·행정의 고위직에 앉아 연금을 받았으며, 지세인 타이유(taille)와 도로부역에서 면제되는 등의 실질적인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칼을 찬다든지 하는 형식적인 명예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족은 혈통귀족인 대검귀족과 법복귀족으로 나뉘는데, 법복귀족은 부유한 부르주아지 출신으로 관직을 매입하여 귀족이 되었고 법관직이 많았으며 재산관리에 능하였습니다. 이들은 점차 혈통귀족과 거의 같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처음에는 대검귀족이 법복귀족을 경멸하였으나, 점차로 양자 간의 차이는 사라졌습니다. 귀족은 막대한 토지 소유, 교회·군대·정부요직 차지·면세 특혜를 향유하였습니다. 특권신분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대다수는 제3신분에 속하였다. 그 수는 전 인구의 96%에 달하였으며, 거기에는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지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총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었고, 18세기 프랑스 농민은 동유럽의 농민들과는 달리 농노 신분에서 소금은 실제 시세의 10배였고, 염세 때문에 매년 30,000명 이상이 투옥되고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습니다. 또한 염세를 정부 관리자가 징수하지 않고 개인이나 회사에 청부를 주어 징수하였으므로 청부업자들의 횡포가 심하였습니다. 제3신분 중 가장 중요한 계층은 시민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민계급은 금융업자·상공업자·법률가·의사·문필가 등 자유업 종사자로 이들은 재력과 능력이 뛰어나 사회 발전에 필요한 존재였으나, 평민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특권귀족의 하위에 있었고, 정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경제면에서 봉건적 잔재 때문에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소시민층은 소상인과 수공업자를 포함하는데 이들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할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신분은 불만을 가지고,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습니다.2. 재정의 위기국가 전반의 경제 사정도 계속 악화되었다. 1786년 영국과 맺은 자유 통상 조약(이든 조약)으로 영국의 값싼 상품이 유입되면서 프랑스 산업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프랑스는 영국에 원료와 식량을 수출했는데 오히려 생필품 값만 올라 사회 불안이 점점 심해졌고, 당시 파리 노동 인구 가운데 실업자가 50%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경제적 위기와 함께 왕실 재정의 위기는 혁명 발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습니다. 루이 14세 이래 악화된 재정은 루이 15세 때 더욱 누적되었고, 이에 루이 16세는 1774년 중농주의 경제학자 튀르고를 등용하여 사태를 타개하려고 하여 튀르고는 면세특권 계급인 제1신분과 제2신분에게 면세 혜택을 박탈하고 모든 토지 소유자에게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려는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왕실 경비를 삭감하려다 왕비 및 귀족들의 반대로 1776년에 파면되었고, 이후 스위스 은행가 자크 네케르가 1776년에서 1781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계속 돈을 빌리면서 사태를 꾸려갔으나, 미국 독립 전쟁 원조 때문에 재정상의 으나 다른 유럽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절실하게 불행하다고 느꼈고 사회 비판 의식도 갖추고 있었는데, 이것은 계몽사상의 영향이었습니다. 계몽 사상가들은 비판과 분석의 정신을 발전시키고, 관습과 전통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이를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여기에 계몽 사상가의 주장을 소화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프랑스 인의 지적·문화적 수준이 더해졌습니다. 계몽사상의 내용은 '인간 이성의 힘과 그것에 의한 인류 진보로의 믿음'에서 논리가 전개된다. 계몽 사상가들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계몽을 통하여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이성에 어긋나는 구습과 낡고 모순된 제도를 과감히 시정하여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현존하는 질서를 타파하려는 개혁사상이었으며, 현실적으로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계몽사상의 대표적 인물로는 볼테르(1694∼1778), 몽테스키외(1689∼1755), 루소(1712∼1778)등이 있는데, 제3신분 중에서 시민계급은 계몽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이 소유한 교육·재능· 야망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우를 요구하여 봉건적 요소와 전제 정치를 타파하려 하였습니다.이처럼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게 된 원인에는 구제도의 모순과 국가의 재정상의 위기, 계몽사상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 앞서 미국에서 발생한 독립 혁명의 성공은 프랑스 시민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의 전개프랑스대혁명의 전개를 간다하게 살펴보면,재정 파탄 → 삼부회 소집 → 국민 의회 결성 → 바스티유 감옥 습격 → 봉건적 특권의 폐지 선언→ 인권 선언 → 베르사유 행진 → 국왕의 바렌 도망 사건 → 1791년 헌법 성립 → 오스트리아에 선전 → 왕정 폐지, 공화정 선언(1공화정) → 루이 16 세 처형 →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 → 봉건적 특권?의 폐지, 최고 가격령 → 테르미도르 반동 → 총재 정부 성립 →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입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국민의회는 곧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고 8월 26일에는 앙시앵 레짐의 모순과 부조리의 타파를 염두에 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하였다. 사회는 혼란하고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물가가 올랐으며 실업자도 증가한 상황에서 10월 초, 서민 여인들이 빵을 요구하며 베르사이유로 행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와 더불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을 단행하던 중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791년 9월 국민 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새 헌법에서 참정권은 세금 납부에 따른 일부 시민에게만 부여하는 유산계급 지배체제였다.유산계급 지배체제였다. 이즈음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나라로 혁명 전파될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간섭으로 혁명전쟁이 시작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의용군이 파리에 모여드는가 하면 8월에는 혁명에 고무된 파리 민중이 왕국을 습격하여 방화하였다. 국민 공회는 곧 공화정을 선포하고, 다음 해 1월 루이 16세를 처형시켰다.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지방의 반란이 빈발하는 가운데 1973년 6월 자코뱅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공안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 정부를 수립하였다.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대파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한편 혁명정부는 공정 가격제 등의 통제 경제를 실시하고 봉건 공납의 폐지, 혁명력의 제정 등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쳐있던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1794년 7월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공회 내의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한다. 로베스피에르 타도 이후 1975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행정부 즉 총재정가 성립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
정치영역속의 불평등한 여성의 현실을 검토하시오.우리나라는 고위 행정담당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습니다. 이와 같이 여성의 법조계나 정계에의 진출현황이 부진하므로 자연히 여성의 문제가 정책적인 의사결정시 중요 순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산재해 있는 여성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여성과 정치, 우리사회에서는 참 어색한 낱말의 연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다시 말해서 한국의 정치는 여성이 배제되어 온 남성 정치의 역사라고 할 수 있고, 여성은 참정권을 행사하고 있다지만 정치적 결정권과 그 권력 행사에서는 극히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여성을 형식적 들러리고 간주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에 내재한 가부장적 가치관에서부터 파생된 남성 우월주의는 전통적으로 볼 때도 남성영역과 여성영역을 이분화 했고 여성이 정치에 뛰어든다는 것을 남성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에게도 부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고까운 눈길을 보내고 있으며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동등한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민주정치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치를 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정치인들의 지위와 그 수는 매우 낮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점들을 결코 간과하여서는 안 되며 이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이 한국 민주정치 발전과 한국 사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1913년 런던의 한 경마장에서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이라는 한 여성이 트랙 안으로 질주하던 경주마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하여 대부분의 영국인들과 영국의 대표 신문인 더 타임스는 "여성 참정권자 사건, 폐하의 기수 다치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고, 한 여성의 생명보다 말을 몰던 기수가 다친 것을 더욱 중요시하는 모습에 여성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근대 민주주의의 시발지인 영국에서 여성에 대한 참정권이 부여되었습니다. 데이비슨 사건은 훗날 여성 운동에 거대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녀는 여성운동의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물론 데이비슨의 행동이 원래부터 그런 목적으로 이루어졌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이런 행동이 사회적인 관심과 반향을 불러왔다는 점이고, 여성 참정권 획득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0세기 초, 정치 선진국이었던 영국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은 한 여성의 희생으로서 획득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시기 한국사회의 여성의 지위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낮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정치 영역에 있어서도 이제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유교정신에 입각하여 여성을 적극적이기 보다 소극적인 모습으로, 진취적이기 보다 맞추어 진 틀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대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아왔던 한국 사회에서도 20여 년 전부터는 여성 지위에 대한 많은 관심이 일고 있고, 여성 스스로의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운동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그러나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자부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특히 정치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는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빠른 경제 발전과 문화 컨텐츠의 성장, 시민 의식 성장 등에 비교하였을 때 한국 정치사회에서 여성이 누리는 지위는 매우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102개국 중에서 한국의 여성 권한 척도는 83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책 결정의 자리에 매우 극소수의 여성들만이 있을 뿐이며 여성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매우 드물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여성의 의사와 여성의 목소리가 사회 민주 발전에 전혀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즉, 한국사회의 정서는 아직도 기존의 여성상에 상당부분 머물러 있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 사회의 발전이 매우 급격하게 이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는 아직도 만들어 지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정치가 있고, 권력이 있는 곳에 여성은 없습니다.?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질서를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시민사회는 참여 민주주의를 시민사회 정신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시민사회의 구성원은 남녀 공히 개인의 합리적 능력과 선택을 중요시하며 시민권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사회구성원간의 평등한 권리존중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 모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 각 영역에 참여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시민사회의 본래 모습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특히 정치 영역을 들여다보면 참여 민주주의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되묻게 합니다. 여성의 정치 참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고 실제 정치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도 낮습니다. 한국의 여성 의원 비율은 전 세계 평균 여성의원 비율 11.7%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 여성의 정치 참여는 아직도 후진국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사회 전반적인 남녀 불평등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정치라는 영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의 남성 우위는 결국 경제영역을 비롯한 기타 영역에서의 남성의 독점적 지배를 가져와 여성을 철저히 남성에게 종속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 속에서 배제되는 여성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와 관련하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의 경제활동은 늘어나고 있지만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차별은 크게 개선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이러한 상황이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사회적으로 형식적인 평등만이 존재 할 뿐 실질적인 평등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불평등이 만연된 현실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주장이나 그네들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성 요구를 입법화 할 수 있는 다수의 여성정치인이 필요하고 여성의 정치세력화 및 조직적 여성세력 성장을 위해서도 여성의 정치참여는 확대되어야 합니다. 미국이나 영국은 여성 의원의 수가 점점 상승하고 있고 핀란드는 각료 18명 중 8명이 여성일 정도로 여권신장이 두드러진 나라이며, 독일과 스웨덴 역시 각각 20%, 40% 이상의 여성 의원 비율을 보이고 있으며 제도적으로 비례 대표제를 도입한다든 지 각 정당의 할당제 도입 등 여성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특히 여성의 참여에 대한 적극성을 교육을 통해 전파하면서 여성의 정치 참여가 긍정적으로 표출 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일랜드와 뉴질랜드에서는 여성 지도자끼리 바통을 이어 받아서 아일랜드에서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메리 로빈슨의 뒤를 이어 1997년 메리 매컬리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뉴질랜드에서도 여성 총리가 계속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경우 60,70년대를 거치면서 80년대 들어서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의식수준 또한 향상되어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그러나 현재 여성의 정치 참여 정도는 정치자금의 문제와 정당조직의 비민주적 운영 등으로 겨우 구색을 갖추는 정도에서 여성 단체나 정당의 여성 간부들을 충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2000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비례대표 여성 30%할당제를 의무화한 정당법이 통과되었지만 그것 또한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2002년 첫 여성총리 지명 발표가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총리 후보였던 인물의 자질은 둘째 치고 첫 여성총리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정치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는 충분히 컸습니다. 개인의 여러 가지 여건과 자질 검증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 때문에 총리에 임명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만큼 총리 자질 검증에 의원들, 정확히 말해 남성 의원들이 열을 올린 적은 없었던 듯합니다. 정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 진보운동 세력 내에서도 여성들의 주장과 요구는 묻히거나 삭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화가 남성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지 않더라도 여성은 남성과 함께 어울리기가 힘들다는 인식이 우리의 현실에 팽배하게 깔려 있습니다."모든 정당 내에서 평당원과 당직과 공직에서 여성 50%가 안정적으로 활보될 때까지 할당제는 마땅히 확대, 강화, 강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 여성계의 공통되고 마땅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한국 정당의 제도를 살펴 볼 때 여성 후보를 위한, 여성을 위한 규정을 제대로 정립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진보정당이나 보수정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이 정치권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 그지없는 것입니다.?민주정치는 모든 국민이 혹은 다양한 국민 대표자들이 골고루 가치 분배의 결정권을 나누어 갖는 정치체제를 말합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정치적 가치관, 사고방식, 행동양식, 사회적 경험 등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권익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대표자가 이 가치 분배에 평등하게 참여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의 대표자들이 성적으로 여성일 경우 그 대표성은 최대화 될 수 있습니다.?정치영역에서 여성이 배제된다면 사회구조의 의미에서 분명 비민주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녀의 동등한 대표성이 실현될 때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성의 의회 진출과 행정 관리직에의 참여도 등을 지표로 한 여성신장권한 척도에서는 한국은 70개국 중 63위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90위 아래로 떨어져 있습니다. 한국 여성의 정치 참여 수준은 아직도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지난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여성 후보 할당을 위한 후보 복수 추천체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여성 지방의원 3.2%, 여성 국회의원 5.9%라는 수치가 나왔는데, 이는 정치 영역에서 권력이 있는 곳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