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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영]장보고의 재조명
    목차(目次)=====================1.서론(序論)○ 세계화와 장보고2.본론(本論)○ 당에서의 신라인○ 장보고의 무역 배경과 구조● 신라의 무역배경● 장보고의 활동내역3.결론(結論)○ 장보고 무역의 의미와 계승과제1.서론(序論)○ 세계화와 장보고우리나라는 좁은 국토에 빈약한 자원으로 70%이상을 해외에 의존해 가며 선진국 수준의 경제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우리가 100년전 강화도 앞 바다에서 서구열강의 무역 제의를 일기에 거부하는 신미양요가 있었지만 곧바로 이러한 쇄국정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200여년 전 일찍이 장보고 대사는 청해진 앞 바다를 누비며 중국 위해에 신라방을 설치하고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다.이제 21세기를 맞아 우리나라는 40년 전 무역입국의 기치아래 세워 온 조국근대화의 성과를 어느 정도 거두어 왔다고 자부하여 왔으나 최근 들어 IMF 금융위기를 겪었고 온 국민이 이를 극복하여 새로운 제2의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출만이 우리 경제의 살길이라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예측불허의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세계무대에서 우리는 무역부국 또는 무역강국으로 발돋움하여야 할 숙명에 있다.최근 다큐소설이나 TV등의 매체를 통해 장보고를 재조명하는 붐이 일고 있다. 작가 최인호씨는 다큐소설 ‘해신(海神)’에서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인물인 장보고를 우리나라가 낳은 바다의 신으로 부르고 있다. 장보고는 무역선단을 이끌고 신라, 당, 일본을 잇는 바다를 달렸던 해상왕으로 청년기에 당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무공을 세웠던 무인이었으며 신라에 돌아와서는 자신이 조직한 1만 명의 민병으로 청해진을 건설하고, 그 당시 창궐했던 해적들을 소탕하였으며, 해상무역을 장악함으로써 무역왕이 되었다고 그리고 있다. 또한 장보고는 아라비아, 페르시아의 상인들과도 교역하였던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를 국제적 감각을 지닌 세계인이었다.태여난 연대(790년경?)은 확실치 않으나 통인신라시기인 846년에 암, 중국과 일본에서도 영웅으로 추앙하여 세계인 장보고를 기리고 있다.본문에서는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장보고의 정신을 재조명해보고 장보고의 정신을 되살려 무역대국의 영광을 재현할수있는 지혜를 모으는 것, 덧붙여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무역관계를 신라방과 청해진을 통해 고증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2.본론(本論)○ 당에서의 신라인먼저 당에서의 신라인의 진출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장보고는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나라와 일본의 해역까지 진출하여 해상무역을 주도하여 재당신라인들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무역의 중요성을 일깨운 그의 이러한 활동은 결과적으로 신라?중국?일본 삼국이 자유롭게 문물을 교류하고 협력하도록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장보고 무역은 나아가 남중국에 진출한 이슬람 상인들과의 거래를 통해서 동북아시아 문물 교류를 중동 및 서양에까지 확대하였다.당시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와 일본에 건너가 살고 있었다. 특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과 백제인 가운데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간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유민이 되거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당나라나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도 많았다. 또한 기근이나 흉년으로 먹고살기 어려워 외국으로 간 사람들도 많았고, 사회적인 신분차별 때문에 외국으로 건너가 입신양명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불법을 구가하거나 선진문물을 배우러 외국에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능하면 조국과 가깝고 왕래가 용이하며, 아무런 기반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는 곳에서 거주하고자 하였다. 중국연안과 일본의 북구주 지방에 신라인이 몰려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필자가 자료를 조사하면서 일본에 관한 자료도 많이 구할 수 있었으나, 본 과목 목적상 당나라의 신라인에 한해서만 설명하고자 한다. 당나라의 신라인이 거주했던 곳은 산동반도에서 신라인이 거주한 경위는 훨씬 오래전으로 보이며,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무왕의 동주공력이 성공한 시기 이후였다.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면서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일본과 신라에서 출항한 선박들의 일차적인 종착지이자 신라와 일본으로 가려는 배들의 출항지이기도 했다.장보고는 825년 무렵에 여기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 절은 무역의 중심지로 연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는 논과 밭을 소유하였으며, 산동반도 일대의 250명의 신라인이 법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법화원을 중심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사교적 모임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 곳의 신라인들은 관리, 군인, 선원, 통역사, 상인, 운송업자, 농민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산동반도 이외의 신라인 집단인 집단거주리로는 강소성의 회하 하류에 위치한 곳으로 이곳은 대운하와 회수를 이어주는 경제적?전략적 요충지로 운송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초추와 연수향 등에는 신라인들이 운수업, 무역, 조선업, 상업에 종사하였다.다음으로는 대운하 주변과, 여고진, 회화유역, 장강하류의 양주 등에서 신라인이 활동을 하였으며, 이러한 인근에서는 아랍인, 페르시아인 등의 외국상인들이 몰려들어 교역을 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신라인들은 지역의 특성에 맞게 염전, 운송업, 갈대판매, 오리사육 등의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한편, 남중국 연안에도 신라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 광주는 외국선박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왕래하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외국과의 무역업무만을 전담하는 관청으로 시박사를 설치할 정도로 교역이 빈번히 일어난 곳이다. 따라서 많은 신라인이 강소성 연해변에 살았으며, 집단거주지를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곳에 살던 신라인들도 운송업과 교역, 그리고 선박과 관련된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장보고의 무역 배경과 구조장보고는 의롭고 포용력이 강하고, 통솔력, 용병술까지 겸비하였으며 오늘날 무역세계에서 갖추어야 할 폭넓은 국제적 식견과 해외 개척정신을 모두 갖추어 있었다. 또한 오늘날 세계경영의 핵심인 네트워크형성에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보고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반도를 대륙과 한 항로를 따라 행하여진 공무역의 대상품은 통일전에는 주로 과하마, 백금, 명완경, 금갑 등을 수출하고, 비단, 의복, 병풍, 서적 등을 수입하였는데 통일 후에는 역법, 그림, 앵무새, 금은세공품, 비단, 철학서적, 불경 등의 생활문화 쪽으로 확대되면서 신라귀족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재당신라인이 거주한 지역은 산동반도 남해안 일대에서 해주, 양자강구, 강남연해 해안에 집중되어 있으며, 양주, 면주, 황암등에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산동반도 연해안의 중심지는 츠산포이며, 대운하변의 심장부는 초주였다. 여기에 신라무역상인, 선원, 조선기술자, 선주 등이 거주하였고, 이 마을을 신라방이라고 불렀으며, 교민을 관장하는 국당신라소를 두었다. 통관을 행정책임자로 하고 전지관과 역어를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이외에도 재당신라인들은 해주 동해현 숙성촌에서 촌장 왕량의 지도하에 소금생산을 업으로 하면서 다수 신라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밀주연안의 대주산 교마포에도 목탄운송업자, 조선업자, 선박 수리업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특히 재당 신라인의 마을 중에서 신라와 일본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면서 신라인의 마음의 고향은 산동반도 현안에 있는 적산 법화원이었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건립한 사찰로 1년간 5백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장보고 휘하의 장영, 임대사, 왕훈 등 3인이 경영하고 있었다. 승려 24명, 비구니 2명 노파3명 등 29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승방, 니방, 객사, 창고 등이 있는 큰절로서 정월법회 때는 신도가 250명이나 참가한 것으로 보아 적산 신라방의 규모가 큰 마을이라는 것이 짐작된다.● 장보고의 활동내역장보고는 당나라로 건너가 이국임에도 불구하고 무녕군의 군중소장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복잡한 왕권다툼으로 어려운 왕실을 도와 신라의 안전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신라 노예 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군중소장직을 버리고 신라왕실에 상소하여 군사 1만을 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남해안에 활동하는 해적들을 소탕함으로써 노예인물 이었다.구분당일본이슬람동남아수출품금, 은, 금은 세공품, 반황인삼, 과하마, 우황, 금대,해표가죽금, 은, 철, 곡물, 칼, 금은공예품, 고급비단, 호표가죽, 포, 말, 개, 노새, 낙타,약물류, 피혁, 병풍 등 불상, 도료명주, 비단, 검, 키민자우, 녹향, 노회, 말안장, 표피, 도기, 돛천, 육계, 쿠란잔, 코라이브(인삼), 장뇌, 생강수입품공예품, 견직물, 비단, 의복,금대, 은기, 동경, 금은 세공품,황금, 명주, 무명도감, 실목도리실, 금은실, 공작 꼬리,물총새털, 슬슬, 바다거북, 자단, 침향, 향료, 유향, 기불자단, 침향삼국간 무역에 나타난 장보고 무역의 특징을 간단히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첫째, 공무역에서 사무역으로 무역체계의 혁신적 벽화를 주도하였다. 장보고가 해상무역에 성공한 이유는 조공무역에 의해 진행된 기존의 무역의 틀이 시장주도형 사무역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이다.둘째, 장보고 무역은 유럽에서 당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신라와 일본은 물론 이슬람과 동남아지역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는 점이다. 당나라의 신라방에서 시작된 이슬람과의 교류는 당나라의 융성과 더불어 장보고를 통하여 동서무역의 범위를 일본까지 확대하였으며, 장보고의 해상거점 곧 청해진을 동북아무역의 허브 (Hub)로 만들었다.셋째, 이슬람 동남아 등의 지역과 일본과의 중계무역을 통하여 세계무역의 실질적인 중심역활을 담당하였다는 점이다. 이 당시 일본이 당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시도하였다는 학설도 있으나, 100여가지가 넘는 일본의 수입품 규모나 신라의 수출품에 서역지방의 수입품들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장보고 무역이 이슬람 등지의 생산품을 일본에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의 테두리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넷째, 이 당시의 주요 무역품들이 귀족들의 사치품과 같은 진귀품에 국한하였다는 점이다. 결국 사무역이 발전하였을지라도 장보고 이후에 그러한 무역이 지속될 수 없었던 이유도 이러한 귀족중심의 제한된 사무역의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하였다.
    경영/경제| 2006.05.17| 9페이지| 1,000원| 조회(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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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영]천하는 천하의 것이다 - 오다노부나가
    목차(目次)=====================1.서론(序論)오와리의 멍청이2.본론(本論)선교사의 기록극 현실주의자, 허무주의속의 공격정신독단성의 성공3.결론(結論)전국의 종결자 노부나가노부나가, 그리고 현재의 우리1.서론(序論)오와리의 멍청이꽤 오래 전에 『역사독본(歷史讀本)』이라는 잡지에서 일본 전국시대 인물들에 대해 인기투표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이정환 옮김, 경영정신, 2000 p.17제1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제2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제3위 우에스기 겐신(上杉鎌信)제4위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제5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또 다른 경영 잡지에서 같은 조사를 했을 때 또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우에스기 겐신의 순으로 결과가 나왔다.조사한 시점이 꽤 오래 전이니까 지금은 이 순위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인물이 순위에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1위 자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고 누부나가의 뒤를 잇는 인물은 사가모토 료마일 것이다.오다 노부나가가 현대사회에서도 이렇게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었일까? 본 지면을 빌어 하나하나 노부나가 밝혀내 보려 한다.오와리의 멍청이 는 노부나가의 청소년 시절에 주위 사람들이 노부나가를 멸시하고 비웃으며 붙여준 별명이다. 독단적이고 비정한 인물로 흔히 알고 있고 애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다고 알려진 그의 어린시절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오와리의 영주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인 노부나가는 영주의 장남에게 요구되는 소양 교육( 규칙적인 글공부나 무술연습 등을 들 수 있겠다.)에는 시큰둥하고, 하층계급의 개구쟁이들과 진흙탕에 뒹굴며 놀러다니길 일삼았다고 한다.따라서, 영주 노부히데와 중신 몇명을 제외하고는 주위 모든 이로부터 차기 영주감으로 모자란다는 수근거림과 멸시를 받으며 성장했다. 오히려, 착실하게 소양 교육을 받는 차남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이 많았고, 실제 차남도 차기 영주는 자기가 아닐까 생각한 듯 하다.그런데, 영주 노부히데가 전염병으로 죽자, 오와리의 멍청이 라고 불리웠던 노부나가는 차남을 중심으로 반발하는 세력들을 전광석화처럼 제압하고, 거짓말처럼 단시간에 영주로서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오히려, "오와리의 멍청이"라고 불리웠기에 상대 세력의 방심한 틈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이다. 이는, 일찌감치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혼란을 예상하고, 일부러 멍청이 흉내를 내고 돌아다는 노부나가의 계획적인 책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노부나가의 행적을 살펴보게 되면 다른 이들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노부나가가 당시 중소국인 오와리의 영주에서 일본 전국의 실력자로 커가는 과정에서도, "오와리의 멍청이"란 별명을 스스로도 싫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상대방의 방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활용했던 측면이 상당히 있었다 한다. 결론적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스스로와 역설적인 "오와리의 멍청이"란 가면을 쓰고 전광석화처럼 빠른 전략/전술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일본의 실력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2.본론(本論)선교사의 기록백과사전의 단편적인 결과물에 의하면 오다 노부나가의 삶은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직전신장), 1534~1582.6.21]로 소개가 되고 있다.정확한 자료이긴 하나 이것으로 노부나가에 대해 충분히 혹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됫다고는 할 수 없겠다. 몇몇 약력으로 인간을 판단하려 하는 것은 필경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예전 일본사 수업시간 첫 시간에 교수님이 지적하셨듯이 무미건조한 단순한 자료의 나열일 뿐이다. 그러기에 노부나가의 행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소개하며 글을 진행할까 한다. 먼저 필자가 입수한 자료 중에 외국인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노부나가를 만나 남긴 기록을 소개할까 한다.노부나가는 오와리 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지역을 다스리는 주군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37세의 나이에 천하를 통치하기 시작했는데 보통 키에 화사한 느낌을 주는 사람으로 수염이 적고 목소리가 맑으며 싸움을 좋아했고 군사 훈련에 힘썼다. 명예욕도 컸고 정의를 사랑했으며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해서든 보복을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었다.(후략) {)『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이정환 옮김, 경영정신, 2000 p.39노부나가는 원래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신경질적이었다고 전해진다.{)『천하제패 경영』 구스도 요시아키 지음, 조양욱 옮김, 경영정신, 2000 p.92위와 같은 노부나가에 대한 프로이스의 기록을 살펴보면, 노부나가라는 인물의 성격의 몇가지 특징이 있다. 자존심이 강하여, 모욕을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격이 급했다. 독단적이었다. 검소하여, 술도 마시지 않고 잠을 적게 잤다. 매우 솔직했다. 판단력이 뛰어났다. 종교를 믿지 않았다. 청결했다.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요점만 이야기했다. 좋은 의견일 경우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고 해도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표정이 약간은 우울했던 노부나가는 큰일을 처리할 때는 매우 대담하였으며 사람들이 그이 말에 철저히 복종했다고 한다.극 현실주의자, 허무주의속의 공격정신노부나가가 영혼 불멸이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이정환 옮김, 경영정신, 2000 p.42그는 이런 시를 좋아했다. 죽음은 정해진 것. 추억으로 무엇을 남겨야 할까. 쓸만한 말이나 한마디 남겨두자. 허무주의가 짙은 내용이다.그러나 노부나가의 경우, 세상사람 들이 흔히 생각하는 염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세상만이 인간이 사는 세상이며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한정짓고 사후세계 따위는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자, 주어진 생명을 완전 연소 시키자,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허무주의를 억제하면서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 나간 노부나가의 공격정신은 사면초가의 상황을 타개할 때의 용기로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독단성의 성공노부나가는 독단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이 각 호족을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과 봉건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노부나가의 독단성이야말로 경영자로서 가장 필요한 자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물론, 독단적인 면이 모든 점에서 장점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이든 그것은 리더를 따르는 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배경이 깔려 있어야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오해를 피할 수 있다.대부분의 경영자나 리더들이 독단적 결단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것이 편향적으로 작용하여 추종자들의 오해와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독단적 결단력의 바탕에 인간미와 객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노부나가는 모든 사람의 독특한 능력을 중시했고 어떤 경우에든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과감한 실행력과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편향적 사고가 아닌, 객관적 사고를 바탕으로 내리는 독단적 결단에는 어떤 부하이든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바로 그런 점이 노부나가라는 인물의 독단성을 장점으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오다 노부나가는 부하들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독단적 결정을 중시했고 의견을 수렴하는 회의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미 갖춰진 체계를 유지하는 것과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며 도전이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긴박한 상황에서 의견을 조율한 시간 따위는 없다. 최대한 빨리 최선의 전술을 고안하고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는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이정환 옮김, 경영정신, 2000 p.138 - 142위 인용문은 노부나가의 독단성을 여실히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지금까지 소개한 노부나가에 있어 그의 자세와 사고방식이 모두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 지도자는 늘 역경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부나가가 갖추고 있는 카리스마적 자질, 솔선수범하는 결단력과 과감성은 꼭 필요로 하는 자세가 아니었나 싶다.3.결론(結論)전국의 종결자 노부나가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한국의 젊은이 또한) 오다 노부나가를 악인의 이미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화나 게임 등에서 노부나가를 계속적으로 악신 내지는 악마의 이미지로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인가 싶다.노부나가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만큼 여러 새로운 정책을 과감하게 실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구체제, 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을 실행했었다.노부나가의 큰 장점 중의 하나는 개방성을 들 수 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만 권력을 과시하며 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구상을 통해서 그야말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던 노부나가의 과감한 개방성은 일본이 선진문물을 수용하는데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 덧붙여 그런 개방을 통한 경제 정책은 지금의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경제| 2006.05.17| 7페이지| 1,000원| 조회(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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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철학]현대사회의 대안으로 볼 수 있는 자로
    {{나는 바보가 좋다{동양고대사교수님부제 : 나는 내 자신이 도의를 쫑아 힘든 길을 마다할 바보가 되기를 희망한다.목차(目次)=====================1.서론(序論)자로에 대한 인지2.본론(本論)자로는 누구인가현대 사회의 심리적 괴리대안으로써의 자로3.결론(結論)大我와 小我1.서론(序論)자로에 대한 인지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되라고 녹화해주신 공자의 일생을 담은 만화를 시청한 적이 있다.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처음엔 별 감흥 없이 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울음을 터뜨린 기억이 난다. 공자의 제자중의 한 사람, 거칠고 반항적이던 아저씨가 난에 휩쓸려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죽는 순간도 너무 슬펐지만 아직은 눈물을 참을 만도 했었다. 헌데 그 아저씨가 죽는 순간에 내뱉은 한 마디는 결국 꾹 참고 있던 내 눈물샘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중상을 입어 쓰러진 채로 관을 향해 손을 뻗으며 군자는 죽을 때에도 관을 벗지 않는 법,, 라고 되뇌었을 때, 나는 그만 항복하고 감정을 폭발시킬 수밖에 없었다.13살에, 나는 두 번 울었다. 한번은 정비석의 삼국지에서. 관우가 맥성에서 패하여, 관평과 더불어 손권에게 죽임을 당할 때 오열하였고, 공자의 이름 모를 제자가 관을 되쓰며 죽어갈 때 나는 또 한 번 통곡하였다. 13살 때는 넘어져도 울지 않았을 때었고, 싸울 일도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위 사실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3살의 꼬마아이는 중·고등학교 때가 되어서야, 그때의 그 제자가 자로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사학도가 되어 23살, 10여년 만에, 밖에서는 가을이 익어가는 어느 한가한 오후에, 대학 도서관 4층 열람실에서 논어를 통해 나는 나를 통곡하게 한 자로와 다시금 대면하게 되었다.(어려서 보았던 대로) 자로는 원래 강직하면서도 호방하면서도 성격이 몹시 거칠고 무서운 것을 모르는 철부지 건달이었다고 한다. 자로가 공자의 제자가 된 것은 21세쯤 되었을 때였다. 공자의 나이는 그 때 30세를 넘지 않았을 때였고어쩌다 길가에서라도 공자의 흉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려 하는 그를 공자가 꾸짖은 적도 한번이 아니라고 한다. 이처럼 자로는 즉흥적이고, 단순하며,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나이도 공자와 가까웠다. 따라서 사제지간이라는 것을 떠나서 가장 흉허물 없이 지낼 수 있는 사이었다. 아마 자로는 공자에게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사람이며 그냥 내버려두면 무슨 짓을저지를지 모르는 망나니 동생 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공자가 볼 때 안연이 나무랄 때 없는 모범생이라면, 자로는 불안해져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말썽꾸러기 였지만 그러면서도 조금도 미워할 수 없는 문제아 였다.『논어』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자로 였으며, 공자로부터 가장 많은 꾸지람을 들은 것도 자로였다. 미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둘 사이에는 친밀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쪽같이 곧은 성품과 꾸밈이 없는 소탈한 인품 그리고 굳은 의지와 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불같은 기상은 그의 결점들을 감싸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성품이 공자로 하여금 자로를 아끼게 만들었다.2.본론(本論)자로는 누구인가衣 縕袍, 與衣狐豕各 者, 立而不恥者의폐온포, 여의호락자, 입이불치자基由也與, 不 不求, 何用不臧기유야여, 불기불구, 하용부장헤어진 솜옷을 입고 여우털의 값진 옷을 입은 사람과 나란히 있으면서도 조금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 그는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손을 빌리지도 않는다면 어찌 선인善人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시에 잘 어울린다이는 가장 자로다운, 자로의 인품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겠다. 공자가 자로를 좋아한 이유중의 하나는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전혀 구애받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제자 중에는 더러 애써 체면치레를 하기 위해 호화로운 옷차림을 한다거나 음식 투정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는가 보다. 이에 공자는 적어도 도를 닦는다면서 겉치레에 신경을 쓰고 빈약한 의복이며 가난한 음서 자로만큼 흔연欣然히 따른 자는 없다. 그것은 공자의 제자가 됨으로써 벼슬자리를 얻으려 한 것도 아니며, 또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스승의 곁에 있으면서 스스로의 재덕才德을 닦으려 애쓴 것도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전혀 바라는 것이 없는 순수한 경애敬愛의 정만이 이 남자를 스승 곁에 묶어놓은 것이다. 한때 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자로의 성품이 이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공자로부터 떠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순수한 경애의 정으로 평생 스승의 곁을 지키는 모습은 자로의 성품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공자가 가장 믿어온 것은 자로였다. 그리고 자기는 자로를 때로는 질타하고 때로는 놀려대고 했지만, 다른 제자들이 그를 흉보는 것은 용서하지 않았다. 자로는 늘 공자에게 꾸지람을 들었고, 학식도 출중하지 못했으며, 머리도 좋은 편이 못 되었다. 때로는 우직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가 가장 믿었던 제자가 자로였으며, 안회 다음으로 사랑한 것도 자로 였다. 그런 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자로부터 아무리 심한 핀잔을 들어도 조금도 고깝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다.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난 다음에 미처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을 때에는 더 이상 가르침을 듣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공자가 가르치면 그것을 배우는 족족 실행해 나가도록 노력했다. 공자가 한 말인지 제자 가운데 누군가가 나중에 한 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논어』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로는 자기가 한번 승낙한 일은 그 날로 실행하고 내일로 미루는 적이 없었다.자로는 언행이 일치되어 있었다. 한번 말하면 그것을 당장 실천에 옮겼다. 더욱이 그는 남이 자기의 결점을 들춰낸다 해도 노여워하기는커녕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도량이 컷다. 그는 자신의 결점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결점은 그대로 그의 매력이 되기도 했다.현대 사회의 심리적 괴리필자가 어려서 삼국지를 좋아 했던 것은, 그 속에 사나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군웅할거의 시대에 난립하던 영웅英雄들의 활약상 또한수 없으니 없는 걸로 봐서 허구일 가능성도 있겠다. 필자가 각기 다른작가들이 평역하여, 수없이 접해 본 삼국지들 중에서는 조조가 난세에 빛이 된다면 이 눈하나쯤은 얼마든지 잃어주겠다. 고 하후돈이 말하는 장면을 읽은 기억이 있으나, 이 역시 허구일 가능성이 크겠다.분명한 것은 위왕이 된 조조는 하후돈을 불러 항상 수레에 함께 타고 행동했으며, 특별히 친근하고 존중하여 침상에 까지 출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른 장수와는 비길바 없는 조조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자기 집안 사람들 위주로 등용하고, 사마의를 끝까지 믿지 않던 조조다. 이런 조조에게 이정도의 신임을 받는 다는 것은 그 만큼 하후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나는,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열을 올리며, 잇따른 평역, TV, 영화, 만화, 게임으로 몇 번이나 번복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삼국지연의에 이토록 빠져있는 것은, 난세에서도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仁과 義를 보여주었기에, 2000여 년 전의 사람들이 아직도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현대인이 배울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자세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현대인은 능력이 있으나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고도화된 성과 위주의 경쟁사회에서, 점차 인간관계가 좁아지고, 형식적인 인간관계 이외에는 필요성을 못 느끼는 세상에 살고 있다.예전에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고작 10여년 전 이지만), 학교만 파하면 집으로 향하는 골목 풍경은 매연을 연신 뿜어대며 지나다니는 자가용 사이 사이로 위험스럽게 공을 차고, 술래를 쫑아 다니고, 자전거를 몰고 다니며, 소리 지르며 뛰어 다니는 모습이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에 그런 풍경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근 풍경은 삭막함이란 표현만이 적절할 것이다. 사료들을 들춰보면 민심이 흉흉하면 대게 집집마다 문을 닫는다 하였는데, 우리가 그리 되어 버렸다.난세라면 난세라 할 수 있겠다. 현대인들은 역사가 쓰여 기록되기 시작된 시절부터 비롯하여,기존 어느 시절에도 이룩하지 못한, 서 여러 가지 접근법들이 대두되고 있다. 심리적인 안정을 위하여 단전호흡을 찾거나, 명상, 요가 등을 찾는 경우가 있으며, 불교, 천주교, 기독교 등을 통한 종교에 귀의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 이에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 말할 수 는 없지만, 필자는 대안으로써 유학儒學을 제안하고자 한다.유학을 통해서 남을 해하지 않고 언제나 곧은 성품으로 용모와 품행을 단정히 하는 겸양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실수하여 고치지 않으면, 곧 그것을 실수하고 만다. 실수하여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 라는 공자 말씀이 있다. 이는 곧 한 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매사에 완벽을 기하려,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말이다. 이천여 년 전에 각 제후국을 돌면서 뜻을 펼친 공자에게서 우리들의 마음의 고민에 해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완벽한 사람은 없다, 어느 인물이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눈이 만들어내는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완벽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는 그처럼 매력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을 하나 들자면, 사람의 매력은 가끔 그 사람의 장점에서 나오는 것보다 결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또는 결점이 있기에 더욱 그 사람의 매력이 돋보이는 경우도 있다.자로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성격이 곧고 급하며 괄괄해 대처럼 부러지기는 해도 구리처럼 휘지 않는 위인인 동시에 남에게 지기를 싫어해 곧잘 아는 체하다가 공자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학문이 출중하지도 않았으며,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로는 언행이 일치되어 있었으며.열정이 과하여 60세의 나이에도 항상 혈기에 넘쳐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한마디로 철저한 의협의 사나이이며, 그는 죽을 때 까지 도의를 따르고 행하던 인물이었다.어느 날 증자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군자다운 인간상을 설명함에 있어 어린 고아를 맡길 수 있고,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 있고, 목보자.
    인문/어학| 2006.01.04| 8페이지| 1,000원| 조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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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의이해]음악의이해 - 서양음악사 평가A+최고예요
    {{서양 음악사{음악의 이해과200200교수님목차(目次)=====================1.서론(序論)서양음악의 정의,음악의 발생2.본론(本論)고대음악중세음악르네상스음악바로크음악고전음악낭만음악국민파음악근대,현대음악3.결론(結論)서양음악의 의의1.서론(序論)서양음악의 정의서양음악은 인도 음악, 극동음악(일본 중국 한국), 중동음악, 아프리카 음악과 더불어 세계 5대 음악문화권을 이루는 음악의 큰 갈래중의 하나이다. 서양음악의 모체는 기원전 동지중해 유역에서 발전한 음악문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의 음악이 출발점이고 실제적인 모체는 중세 그리스도교 예배음악이다.음악의 발생음악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처음으로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인류가 역사를 알게 된 것은 말이 있고, 글이 생긴 이후 일이며, 음악에 관한 모든 실제적인 지식은 어떤 적당한 기보법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가능한 일로서 그 이전의 일들은 상상으로밖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음악의 발상에 관한 설은 세계의 어느 민족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데 신이 음악을 만들었다는 신수설(神授說)과 자연발생설(自然發生說)을 들 수가 있다.미개한 민족에 있어서도 어떤 형태이든간에 음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음악은 분명히 인간의 본능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음악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같이 시작되어, 지금 남아 있는 벽화나 고분의 유물, 그리고 지구상에 아직 남아 있는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디언, 오세아니아 종족들과 같은 원시집단의 음악연주와 실제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문화풍토를 지니고 있는 중국, 인도, 샴, 일본 등이나 다른 동양인 집단의 고대음악 연주들을 통하여 상상으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개한 원시시대의 원시인들의 음악은 영적인 것과 연관된 일련의 신앙적인 것에 연루된다. 신앙을 필요로 하여 음악이 발생되었고, 이러한 음악은 마법의 기능으로 병을 고친다고 생각했고, 노동이나 전쟁에 사용하기 위하여 음악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본론(本論)고대음악 - Antiquity s fixes)'이라고 불리우는 발라드(ballardes), 론도(rondeau), 비를레(virelais)가 발생한다. 이 모든 14세기의 특징을 창출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바로 기욤 드마쇼(Guillaume de Machaut)이다. 15세기 초 영국에서도 장조 조성으로 향하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 시기의 지도적인 작곡가로는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이 있다.-4. 세속 음악(Secular Music)11세기경까지 유럽의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성직자들이 주도하였으나 12세기에 이르러 봉건사회의 기사계급은 그동안의 교회와 수도원의 전통적인 권위의 지배 속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추구하였다. 또한 오랜 십자군 전쟁 이후 극단적인 종교열은 침체했고 동방의 화려한 이국문화의 접견으로 세속적 요소가 사회생활에 팽대해졌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세속음악은 점차 민중 속에서 발전해 나갔다. 대부분의 세속음악은 단선율로서 악기와 함께 연주되었다.이러한 세속음악은 12세기경부터 귀족계급인 남 프랑스의 투르바두르(Troubadour)와 북 프랑스의 투르베르(Trouvere)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작품도 많이 나왔다. 그들은 자작의 시에 노래를 즉흥저긍로 불렀다. 여러 곳의 왕궁과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여 간단한 악기의 반주로 그것을 노래했다. 시의 sodyhd은 사랑노래와 발라드 풍의 이야기,자연의 찬미,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인(藝人)도 고용하여 다녔는데 자작의 시를 그들에게 노래시켰다.-5. 기보법의 발달그레고리 성가를 위한 기보법이 9세기경에 네우마(Neuma)라는 그리이스말로 창안되었으며 1세기경에는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쪼(Guido d'Arezzo)는 네우마를 4개의 평행선상에 두고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기보법을 창안하였고, 또한 계명부르기를 고안하였다.13세기경에는 쾰른의 성 요한 수도원의 수도사이며 교사인 프랑코 데 콜로니아(Franco de Colonia)에 의해 음의 높낮이뿐만 아닌 길이도 표시할 수 있는런데 근대적 개념의 오페라에 접근되는 진보적인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몬테베르디(C. Monteverdi, 1567 1643)이다.그는 1607년 《오르페오(La Favola d' Orfeo)》를 상연하였는데 대규모의 합창과 관현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이전의 오페라라는 표현양식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기악의 서주로 시작하였고 댄스음악이 있고 신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 1725)를 중심으로 한 나풀리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에서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 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2. 오라토리오(Oratorio)와 칸타타(Cantata)특히 바흐의 헨델은 오라토리오 칸타타 협주곡 등에서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오페라보다 조금 늦게 종교음악의 한 형식으로 태어난 오라토리오는 초기의 모습이 오페라와 매우 유사하였다. 오라토리오의 특성은 오페라와 달리 종교적 내용으로 무대장치, 연기가 없다는 것이지만 초기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연극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최초의 오라토리오는 카발리에리(Emilo de Cavalieri, 1550년경 1602년)의《영혼과 육체의 극》인데 성서적 내용이 약하고 연극적인 면이 강하여 오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하겠다. 그후 카리씨미(Giacomo Carissimi, 1605 1674)가 쓴 《예프테, Jephte》로써 오라토리오의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바로크말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헨델(George Friederch Handel, 1685 1759)이다. 그는 극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여 합창을 증가시켰고, 소재도 성서적 내용이외에 고대 그리이스의 신화적 인물을등장시키는 등 기존의 오라토리오의 음악 양식에서 탈피하여 오라토리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메시아, Messiah》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범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칸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들 수 있다. 하이든은 소나타 형식과 악기 편성법을 확립하였고, 모차르트는 소나타 형식을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베토벤은 고전파 음악을 최고도로 발전시키고 낭만파 음악에의 길을 열었다.고전파음악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초에 걸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서 완성되고, 이어서 베토벤에 의해서 한층 더 충실하게 되고, 또 베토벤에 의해 또 다른 방향으로 인도되었다. 이 대가들은 주로 빈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이 완성기의 고전파음악을 빈 고전파음악이라고 한다.빈 고전파의 첫 번째 대가인 하이든(Joseph Haydn, 1732 1809)은 화성적 단성율 음악에 크게 성공했고 2개의 대립되는 테마를 제시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고 다시 테마를 반복 재현하는 소나타형식을 완성시켰다. 또한 교향곡에 있어서 제 3악장에 미뉴에트를 고정 배치하여 제 1악장 소나타형식, 제 2악장 가요형식, 제 3악장 미뉴에트, 제 4악장 론도형식 또는 소나타 형식의 근대적 교향곡의 형태를 확립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104개의 교향곡, 83개의 현악 4중주곡, 24개의 오페라 《천지창조》를 비롯한 4개의 오라토리오, 14개의 미사곡, 20개의 피아노협주곡, 기타 수많은 종류의 곡이 있다. 한결같이 명랑하고 쾌활하며, 전형적인 고전파음악의 성격을 지닌 걸작들이다.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1791)는 35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주옥같은 명작을 많이 남겼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독특한 유머 감각과 넘치는 창작적 기지로 시종 일관되어 있어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고전주의 오페라의 최고봉에 올라서 있다. 그리고 하이든이 확립한 소나타 형식에 풍부한 색채감과 음악다운 즐거움을 부여하여 자유분방하게 작곡하였다. 모차르트는 그야말로 음악을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그의 작품은 41편의 교향곡을 포함하여 600여곡이 넘는데 모두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며, 작곡의 중점을 오페라에 두었으융합의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Frederic Chopin, 1810 1849)은 피아노의 온갖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피아노곡들이 대부분이며, 모두 아름답고 향기가 높다.대개가 즉흥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꾸밈음과 템포의 변화, 독특한 장식음의 전개 등을 특색으로 하여 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기에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 1868), 도니체티(Guetano, Donizetti, 1797 18480,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 1868)로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프랑스에서도 오페라가 성행했는데, 낭만주의 사조에 의한 낭만적인 정서가 그들의 작품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1. 후기 낭만파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범위는 넓게는 시기적으로 낭만주의 전반부에 활동한 슈베르트나 베버 이후의 음악에 국한시킬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은 리스트나 바그너의 급진적 음악 양식이 도래한 시기를 기점으로, 좁은 의미에서는 바그너의 음악극이 출현한 1860년대 이후의 독일 음악을 지칭한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간 유럽 음악가들에게 미친 바그너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말기 낭만주의 음악 어법은 보불전쟁 이후 통일제국을 이룬 독일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언어로 전환되면서 바그너를 추종한 부르크너, 볼프, 말러, 슈트라우스에 의해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낭만파 음악은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서 더욱 다채로워져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은 대규모의 악곡이 많이 작곡되었고, 가극 화성법 관현악법 등이 급속하게 발달하는 한편,자유로운 표현에 의한 악곡이 작곡되었다.이탈리아의 베르디(1813 1901)와 푸치니(1858 1924), 프랑스의 비제(1838 1875)등은 사실주의와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작곡하여 낭만파 오페라는 절정을 이루었고, 독일의 바그너 (1813 1883) 에 의해 음악에 극 미술
    예체능| 2005.11.06| 26페이지| 1,000원| 조회(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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