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오스터, 황보석 옮김, 『달의 궁전』, 열린책들, 1997.다 읽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부담스러웠다. 언젠가 읽긴 읽어야지, 하는 마음은 늘 있어서 지금이 그 때야, 라고 애써!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좀 지루한가 싶었다. 주인공 포그가 에핑을 만나 그의 곁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좀 더 편한 자세로 읽으려고 책을 들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엎어져서 읽다가, 앉아서 읽다가, 누워서 책을 들고 읽다가 했다. 자세를 바꾸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 이제 부터가 진짜 소설의 시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이 났다. 즐겁고 신나게 뒷이야기를 상상하면서, 추측하면서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것에 뿌듯함을 느낄 때가 바로 읽으면서 신이 날 때다. 내게 있어 ‘신남’이란 나 홀로 어린아이도 됐다가 할머니도 됐다가 배우도 됐다가 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낙(樂)이다.사실 글을 쓰고 싶다는 나는 부끄럽게도 외국장편소설을 제대로 읽어 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도스토예프스키니 셰익스피어니 하는 고전 명작들을 빌려서 읽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읽지는 않고 표지만 구경하고 반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달의 궁전 역시 작품은 알지 못하고, 귀동냥으로 주워듣기만 작품 이었다. 작품에 재미를 붙이는 데에는 잠깐의 시간이 걸렸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서는 포그가 느끼는 허무와 허탈함 따위를 같이 느낄 수 있어 작품이 소중해졌다.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나 부분이 있으면 책의 한 귀퉁이를 접어놓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읽었던 책은 다 읽고 나면 책이 약간 빵빵해져 있다. 달의 궁전은 에핑이 등장한 이후로 접어놓은 쪽수가 많아지다가 에핑이 죽고 나면 줄어든다. 이 작품에서 에핑이 내게 겪은 일들과 그의 생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린다.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혹은 카페에 앉아서 말을 주고 받다보면 자주 여행 얘기가 나온다. 돈도 없고 떠날 여건도 안 되지만 다들 눈은 떠있고 귀는 열려있는 지라 어디에 가고 싶다든지 무엇이 보고 싶다든지 하면서 세계 각국의 유명 여행지들의 이름을 댄다. 도시의 색이 ‘푸름’이라는 산토니리부터 그리스, 체코, 터키, 스위스, 이집트까지 그 짧은 시간에 세계 일주를 한다. 나는 영국과 러시아 이야기를 하다가 지평선으로 넘어간다. 누군가 ‘지평선?’이라고 되물으면 수평선을 본 기억은 너무 나도 많다고, 오이도 앞바다는 이제 지겹기까지하다고 대답한다. 정말이지 수평선은 너무 자주 보아왔다. 집이 시흥이라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하루에 한 번씩도 석양을 볼 수 있고, 수평선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보고 싶었다. 에핑의 경험에서 나는 상상으로나마 지평선을 만났다.거기는 너무 넓어서 얼마쯤 지나면 땅이 사람을 삼키기 시작하거든. 나는 그걸 더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어. 그 지독한 정적과 공허함.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를 알려고 해도 거기는 너무 넓고 그 범위가 너무 엄청나서 마침내는……- 본문 중에서땅이 사람을 삼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지독할 정도의 정적과 공허함은 또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는 거겠지만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나를 보아온 주위 사람들을 보기보다 외로움 많이 탄다고들 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한테 절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지만 사실 그렇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독한 정적과 공허함, 밀려오는 외로움 앞에서 무참히 무너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에핑이 먼저 느꼈던,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땅에서 오는 형언할 수 없는 허탈함 따위를 직접 맛보고 싶다.내게도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나를 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은 잊지 않는다고,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인지 포그가 짐머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그 이후로 나는 그를 만나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지만 이 책을 쓰겠다는 생각이 내게 처음 떠올랐던 것은 4년 전 그 만남이 있은 뒤 짐머가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 내 시야에서 사라진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본문 중에서짐머가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어 사라졌다는 얘기에 르네 끌레망 감독의 영화 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배경음악으로 로망스가 흐르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합실 같은 곳에서 미셸을 부르며 사라지는 폴레트의 뒷모습. 두 장면의 상황이 다르고, 주인공들의 감정이 다르겠지만 그 순간이나 이미지가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한 때 자신을 구해준 짐머를, 어떻게 보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자신을 다시 살 수 있게 해 준 그런 친구를 어떻게 포그는 소식조차 궁금해 하지 않은 채 살아갈까? 과거의 기억에 많이 얽매여 사는 나로서는 의아했다.물론 포그는 내게 처음부터 좀 이상한 인물이었다. 자발적으로 파산을 한다는 것부터 그랬다. 나는 과거의 기억에 의지하는 과거지향적인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동시에 또 미래지향적인지 나의 앞날에 대한 어떤 희망이나 꿈같은 것을 스스로 놓아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포그는 그렇지 않았다. 빅터 삼촌의 죽음 뒤에 자신의 재정이 악화 되었을 때도 다른 어떠한 해결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수중에 쥐어진 돈으로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가려고만 했다. 왜 좀 더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키티 우를 만나고 집에서 나와 센트럴파크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신체나 정신에 문제가 있어 일을 하지 못할 상황도 아닌데 포그는 그냥 살았다. 포그의 이런 대책 없음은 어쩌면 삼촌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뜬금없이 여행을 목적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신을 물건들을 모두 조카인 포그에게로 넘기는 것을 보아 삼촌과 포그 모두가 대책 없어 보였다. 나로서는 매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포그의 그 막막한 상황, 어머니와 삼촌의 죽음과 더 이상은 아무것도 자신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을 그 외롭고도 막막한 상황에 포그를 조금 가엾게 여기기로 했다.앞에서도 에핑의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에핑이 등장했을 때 가장 신이 났었다. 에핑은 이상하게도 정을 주고 싶은 인물이었다. 에핑과 비슷한 경험을 한 주인공을 어느 드라마에서도 만났다. ‘마왕’이라는 드라마인데 나는 이 드라마를 본 방송 때는 보지 못했고, 어둠의 경로를 통해 다운 받아서 봤다. 이 드라마만의 독특한 흡입력이 있던터라 20부작을 일주일 안에 다 본 것 같다. 주지훈이라는 배우가 맡은 역할이 에핑과 닮았었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서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점이 공통적이었다. 책을 읽다가 ‘줄리언 바버’라는 처음의 자신을 버리는 느낌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해야 나는 이시내를 버릴 수 있을까.작품을 읽는 내내 에핑의 생이 얼마나 기구했던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에핑의 짧았던 결혼생활, 그의 그림, 유타에서 바이런의 죽음, 스코스비, 동굴의 발견과 그 곳에서의 생활까지. 정말이지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의 경험담도 아니고, 남들은 한 평생을 살면서 겪을까 말까 한 일들은 한 사내의 삶에서 이렇게 종합선물세트로 나타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