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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멕시코의 한인- 디아스포라
    < 목 차 >>Ⅰ. 서 론 - 1Ⅱ. 세계 이민사에 유례없는 ‘디아스포라’ - 1Ⅲ. 멕시코 한인의 이주와 정착1. 구한말 이민 1세대의 모습 - 22. 초기 한인 피와 땀이 서린 애니깽 농장 - 33. 21세기 이주 한인들의 모습 - 44.멕시코와 대외교역에서 55억 달러 흑자 - 4Ⅳ. 결 론 - 5Ⅰ. 서 론약 100년전인 1905년에 최초로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이 있었다. 유카탄 반도 메리다의 에네껜(henequen 우리말로 어저귀, 영어로는 사이잘 sisal. 선인장의 일종으로 섬유질을 추출하면 선박용 로프의 원료가 되었다. 종전 ‘애니깽’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된 표기) 농장에 천여 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이주한 것은 1905년 5월 중순이다. 그로부터 약100년, 에네껜 이민들은 모국에서 잊혀진 채 이역만리 멕시코에서 가혹한 삶을 살아야 했다. 에네껜 이민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연극이나 영화, 방송프로그램 등으로 알려진 바 있다.Ⅱ. 세계 이민사에 유례없는 ‘디아스포라’한국인 멕시코 이민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 이민사에 유례가 없는 단 1회의 집단 이민이다. 1905년 4월 1,033명의 한인들이 영국 국적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반세기 이상 우리에게 잊혀졌다. 한일합방과 2차 대전,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격류 속에서 이들은 모국과 단절되었다. 이민의 출발은 기만적인 ‘사기광고’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이 발행한 여권 등 최소한의 합법적 형식은 갖추었는지 모르나 이미 고종의 이민금지령이 공포된 상황에서 배는 출발하였다. 4년간의 채무노동은 ‘사실상 노예’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수난과 고통의 점철이었다.멕시코 에네껜 이민은 이미 2년 전에 시작되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과도 현저히 다르다. 왜 그들의 이주는 단 1회로 끝났는가. 동포들이 마이어스라는 국제 이민 브로커의 농간으로 이역만리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 당시 그들의 조국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일제의 지배를 직전에 둔 대한제국의 무력함, 그리고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이 묻힌 선영과 일가친척을 두고 머나먼 멕시코 땅에 남겨진 한인들의 질기고 억센 삶 자체다. 그들은 지난 세월 동안 열악함과 척박함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그리고 약 1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모진 것이 목숨이라 한인들은 어떻게든 멕시코에서 살아남았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낯선 땅에 떨어진 이들이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눈물겨운 역정이다. 초기 이민자들의 자원이 풍부한 미주 한인 사회만큼은 못하지만 후손 중에서 하원의원, 주 대법원장, 자선 아동병원장도 나오고 교수, 회계사, 의사, 엔지니어는 부지기수다. 화가, 연주가, 마야유적을 지키는 문화재 관리소장, 오페라 프리마 돈나, 프로레슬러도 있다. 한민족의 특징 중의 하나인 드높은 교육열은 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서 한민족의 강인한 생존력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만약 지구촌에서 각 민족을 대상으로 서바이벌 게임을 하더라도 한민족의 적응과 경쟁력을 자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인고와 수난의 한 세기를 마감하고 도전과 개척, 융합과 포용으로 멕시코 이민사를 재구성할 때다.1921년에 멕시코 한인 중의 일부인 270 여 명이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 경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재이주를 결행하였다. 이들은 국제적인 사탕수수 시세의 폭락으로 상투를 잡은 꼴이 되었다. 사탕수수 밭과 공장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하였다. 한인들은 쿠바에 산재해 있던 그 한 맺힌 에네껜 밭으로 다시 가야만 했다. 그래도 쿠바 한인 중에서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이도 있으며 전문직종 종사자의 비율은 매우 높다. 오늘날 쿠바에 살고 있는 한인 후손은 천 명이 넘지 않는 것으로 추산된다.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각별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의 유서 깊은 조국애 때문이다. 어려운 시절 일제 치하에 있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에네껜 밭에서, 사탕수수 밭에서 혹은 냄비 땜질을 하며, 치클 껌을 긁어모으며 번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을 하였다. 그래데 정작 외세에 의한 해방과 동족상잔의 전쟁, 분단 이후엔 조국에 대한 실망감으로 그들의 귀속의식은 상당히 이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한편 유달리 단일민족으로서의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고 혈연의식이 드센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에네껜 이민의 후손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지에서는 치노(chino 중국인의 뜻. 멕시코, 쿠바에서는 동양인만 보면 이렇게 말한다)라고 놀림을 받고 한국인으로부터는 외국인으로 취급받는 이들에게도 정체성 문제는 여전히 숙제다. 멕시코에서든, 쿠바에서든 장기간의 단절과 격리 속에 불가피하게 그들은 대부분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혼혈로 인해 얼굴도 현지화가 완연하고 한국말도 할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 적어도 자신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것은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Ⅲ. 멕시코 한인의 이주와 정착1. 구한말 이민 1세대의 모습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3월 6일, 1033명(남자 802명, 어린이 포함 부녀자 231명)의 조선인들이 황성신문에 난 대륙식민회사의 광고를 보고 제물포 항으로 몰려들었다. 가난한 황족에서부터 도둑에 이르기까지 신분이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굶주린 배 모양의 땅(멕시코)을 목표로 배에 오른 것이다.그 후 이들은 1905년 5월 15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2년 전, 멕시코 남부의 오아하까(Oaxaca) 주 살리나끄루스(Salinacruz) 항구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이렇게 태평양을 건너며 두 달여를 배에서 시달리다가 처음으로 육지에 발을 딛었지만 그곳이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기차를 타고 목적지인 메리다(Merida) 지방으로 이동해야만 했으며, 메리다에 도착해서는 유카탄 반도 전역에 산재되어 있는 25개 이상의 노예농장에 분산 수용되어, 백인 농장주들의 학대를 받으며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당시 유카탄 반도에는 애니깽(선인장)으로 닻줄을 만들어 부를 누리는 노예농장들이 많이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다. 당시는 파나마 운하 건설(1881~1914)을 비롯해서 수많은 토목공사들이 중미지협 대서양 연안에 대규모로 진행될 때였다. 또한 한편에서는 미국의 ‘유나이티드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와 ‘스탠다드프루트 컴퍼니(Standard Fruit Company)’를 주축으로 바나나 플랜테이션이 급속도로 확장되던 시기였다.이러한 토목공사와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확장은 노동력의 심각한 결핍을 초래하였고, 이는 부지런하고 정직한 한국인들을 계약노동의 형태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다.하지만 성공을 꿈꾸며 지구의 반대편까지 건너온 한인들은 곧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4년간의 계약노동은 자유노동이나 다름없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언어와 생활풍습이 다른 곳까지 건너왔지만, 그들이 접한 현실은 너무나도 열악했다.2. 초기 한인 피와 땀이 서린 애니깽 농장그들이 가을걷이쯤으로 생각했던 애니깽 농장일은 바로 선인장 잎을 잘라서 다발로 묶은 뒤 가공공장에 옮기는 것이었다. 애니깽은 높이 1~1.5m, 너비 30~40cm의 잎사귀를 가진 선인장의 일종으로, 한 나무에 보통 50~100개 정도의 잎이 뭉쳐 있다. 이 잎을 잘라서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을 묶으면 튼튼한 로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인들은 하루 평균 5-6000개의 잎을 따서 날랐고, 이 과정에서 애니깽을 자르고 묶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시에 찔리게 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약도 없어 응급조치로 담배나무 즙을 발라 피를 멎게 할 정도였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이러한 그들의 고통은 1909년 5월 12일 4년간의 계약이 만료되어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고, 그들은 또 다른 선택에 직면해야만 했다. 당시 그들의 조국은 너무도 미약했고, 이마저도 곧 한일합방으로 사라지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돌아갈 조국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곧 멕시코 전역과 인근의 쿠바·플로리다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흩어져서 백년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 삶들을 누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휴양도시 깐꾼(Cancun)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낀따나로(Quintanarro) 주 대법원장 리자벳 송(Lizabet Song)이나 치와와(Chiwawa) 주 전(前) 하원의원인 노라 유(Nora Yoo) 등이 그 대표적인 모습들이다.3. 21세기 이주 한인들의 모습멕시코 이민국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멕시코에는 또 다른 한인이 1만 명(비공식적으로는 2만 명 정도 거주) 살고 있다. 그들은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들로 최근에 멕시코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그런데 그들이 이주한 모양새는 구한말의 한인들과 매우 다르다. 구한말의 한인들이 멕시코의 남쪽지방인 유카탄 반도에 정착했다면, 오늘날 한국인들은 주로 멕시코시티와 북쪽지방인 치와와·레온 등지에 정착해 있다.또한 구한말의 한인들이 망해가는 조국으로부터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한 채 빈손으로 들어와서 그들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했다면, 오늘날 한국인들은 선진기술과 자본을 보유한 채 이곳에 들어와 역으로 이곳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들로 마킬라도라에 위치한 한국의 기업들을 꼽을 수 있다. 마킬라도라는 멕시코 정부가 개방경제를 선택한 후 집중 육성하고 있는 수출 공업단지들을 말한다.폐쇄적인 시장경제정책으로 중남미의 변방에 머물렀던 멕시코가 지난 94년 미국ㆍ캐나다와 나프타(NAFTA)를 체결한 후 중남미 제1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생산현장이 바로 마킬라도라인 것이다. 이 마킬라도라에 한국의 기업들이 진출해 멕시코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멕시코의 북서쪽 국경지대인 띠후아나(Tijuana)에서는 삼성전자가 TV를 생산하고 있으며, 북동쪽 레이노사(Reynosa)에서는 LG가 냉장고 등 백색가전을 생산하고 있다. 멕시코시티 근처의 께레따로(Queretaro)에서 대우전자 역시 백색가전제품을 생산해내고 있으며, 뿌에블라(Puebla)에서는 포스코가 강판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다.
    사회과학| 2007.12.17| 6페이지| 1,500원| 조회(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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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당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R E P O R T< 한국정당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 과 목 :* 학 과 :* 학 번 :* 이 름 :* 교수님 :* 제출일 :< 목 차 >>Ⅰ. 서론Ⅱ. 정당의 의의(정당의 개념과 기능)1. 정당의 개념2. 정당의 기능Ⅲ. 한국 정당정치의 모습1. 격심한 이합집산2. 한국 정당대결구도의 동태적 변화① 민주화투쟁기② 제도개혁과 지역할거구도의 정립③ 여소야대의 정국과 3당합당Ⅳ. 한국정당의 성격과 문제점1. 한국 정당의 구조상의 문제① 정당이념의 편향성② 정당생멸주기의 단기성③ 지도자 일인에 의한 정당의 도구화④ 지역적 배타성과 지역할거주의성⑤ 비민주적 정당운영⑥ 정당(선거)자금(political fund)의 불투명성Ⅴ. 선거와 관련된 한국정당의 문제1. 정당중심의 금권선거2. 흑색비방선거의 주범3. 당원의 자질4. 지역감정 조장의 원천Ⅵ. 한국정당의 발전방안1. 선거구제도의 개혁2. 정당제도의 개혁3. 정당내부의 민주화4. 정치(선거)자금의 투명화와 국고보조금 제도의 폐지5. 정당의 전문화와 대중화(국민화)6. 현대시민사회와 매스컴과의 관계의 활성화Ⅳ. 결론(한국정당의 미래)Ⅰ. 서론사회학자 만하임은 개인이 집단의 의미구성방식을 무의식 속에 가지게 되면서 집단무의식을 형성하게 된다고 보고 그런 집단생활에서 나오는 관념체계, 세계관, 의미구성방법 등의 구성물 그 자체를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토대로 세계를 보게 되는 존재구속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론적으로 존재구속성에서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하나의 집단을 상정한다. 자유롭게 부동하는 인텔리겐차 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인데 집단적?계급적 갈등에 몰입되지 않는 지식인 집단을 의미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가지는 세계관에 구속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아갈 바를 결정한 후 소신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다.1948년 정부수립 이후 우리나라에는 250여개의 정당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그 중 어느 당 하나 대당(大黨)으로, 장수하는 당으로 남지 못하였으며, 정치에 입문할 때 각 전문성이 있으며 참신했던 사람이 일단 정당에 들어가면 기존의 잘못된 질서에 그대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국회의원 개개인의 당선 후에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습들은 결국 정치에 대한 호감도 하락을 초래했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정당정치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느냐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의 현재 정당의 문제점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Ⅱ. 정당의 의의(정당의 개념과 기능)한국 정당의 문제점과 발전방안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우선 정당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1. 정당의 개념정당의 개념과 의미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정당은 정치적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획득하여 그들의 정치적 이념과 정책을 구현하기 위한 자주적이고 영속적인 정치조직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정당 없는 민주정치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민주주의국가에서 정당이란 말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당체계란 사실상 있을 수 없다.이상적인 민주정치는 직접민주정치를 의미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간접민주정치인 대의정치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의정치에는 국민의 뜻을 대의하는 집단이나 기관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발생한 것이 정당이다. 그래서 현대 민주정치는 일차적으로 정당정치라고 한다.2. 정당의 기능정당은 민주정치과정의 요체로 평가되는 주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① 이익의 표출과 취합② 사회적 갈등의 조정③ 정치사회화④ 정치참여의 조장⑤ 정치엘리트의 충원⑥ 정치체계의 유지⑦ 정치적 과제 설정Ⅲ. 한국 정당정치의 모습1. 격심한 이합집산1987년 민주화투쟁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심한 조직적 이합집산을 거듭해오고 있다. 대략 4년여의 주기로 조성되었던 세 차례의 선거 국면에 존재했던 주요정당들의 정식명칭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당조직의 높은 유동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민주-반민주의 대립이 해체되고도 오랫동안 이 같은 이합집산이 반복되는 것은 극소수 정치엘리트들의 정략적 이합집산에 의한 정치표류현상이며 이것은 지극히 병리적인 현상이다.2. 한국 정당대결구도의 동태적 변화① 민주화투쟁기한국에서 민주이행을 향한 정당대결의 구도는 1983년 전두환 정권이 배제적 방식으로부터 포섭적 방식으로 통치방식의 전술적 전환을 단행한 이후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던 정치적 공간 내에 마침내 신한민주당이라는 공개적인 ‘반체제정당’이 85년1월 창당되면서 조성되었다. 결국 2.12총선이후 6.29선언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대립전선에서 정치사회와 정당이 차지했던 공간은 지극히 협소했고 정당이 수행할 수 있었던 역할 역시 지극히 제한적이었다.② 제도개혁과 지역할거구도의 정립6.29선언은 한국의 민주이행을 시민사회와 국가간의 투쟁의 국면으로부터 정치사회내의 정치엘리트간의 협약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즉, 국민운동본부와 국가권력 간의 협약이 아니라, 민정당과 민주당이 협약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민주화투쟁에 가담했던 시민사회의 모든 세력의 이익과 요구를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이 아니었고 결국 87년10월과 11월의 신민주공화당과 평화민주당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보수4당간의 대결구도를 초래했다. 그 결과 지역주의적 전선이 정치사회내에서 급속히 형성되었고 대통령선거운동을 거치면서 시민사회에 본격적으로 하향부과되었던 것이다.③ 여소야대의 정국과 3당합당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예상과 달리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을 획득함으로써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행정부와 의회를 여야가 분할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커다란 시련이면서 정치관행을 확립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민정당이 선택한 것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김영삼의 민주당과의 3당합당이었다. 3당합당은 민주-반민주 전선을 완전히 와해시켰고 그 결과 한국정당정치의 구도는 보다 단순화되고 보다 심화된 지역적 대립구도를 띄게 되었다.Ⅳ. 한국정당의 성격과 문제점정당정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정당의 안정성, 지속성, 이념성, 민주성 그리고 건전한 경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정당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듯이 한국정당의 성격은 1) 이념형 정당의 부재와 선거편향성, 2) 정당생존 주기의 단기성, 3) 1인 중심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 4) 정당운영의 비민주성, 5) 지역 주의적 정당구조 6) 비정상적인 정당운영자금의 투입과 산출 등이다. 이러한 정당의 성격으로부터 정당의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 문제점을 구분하면 정당의 기본구조상의 문제와 선거와 관련된 문제로 나누어진다.1. 한국 정당의 구조상의 문제① 정당이념의 편향성한국정당은 여, 야를 막론하고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이 아주 강하다.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전제되어야 그 기준에 따라 정책을 개발하고 집행에 따른 책임정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당은 선거에서나 국회에서 정책대결보다는 인물 중심이었으며, 상대방의 흠집내기로 일관되어 왔다. 한편 여야 동일하게 ?보수우익?편향성을 보이면서
    사회과학| 2007.12.05| 10페이지| 2,000원| 조회(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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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교육개방의 정치 경제적 분석
    R E P O R T- 세계정치?경제의 세 가지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목 차 >>Ⅰ. 서 론 * 1Ⅱ. 제주 교육개방의 현 위치 * 21. 교육 자치의 개념 * 22. 교육개방의 배경 * 23. 제주의 교육개방 * 2Ⅲ. 세 가지 패러다임적 분석 * 31. 국가 중심적 패러다임 * 3① 공교육의 질적 향상 제고 * 3② 해외유학 대체를 통한 외화유출 감소 * 4③ 도정과 연계한 엄격한 입학 시스템 * 4④ 동북아 중심도시로의 성장 * 52. 시장 중심적 패러다임 * 5① 경쟁을 통한 도내 교육기관의 질적 향상 * 5② 교육수요자의 교육서비스 선택권 확대 * 63. 구조 중심적 패러다임 * 6① 교육 불평등 심화로 인한 계층 간 위화감 조성 * 6② 영리추구로 인한 공교육의 황폐화 * 7③ 투기성 자본의 투입과 외화의 유출 * 74. 세 가지 패러다임의 비교 분석 * 8IV. 제주 교육개방의 미래 * 9Ⅴ. 결 론 * 10Ⅰ. 서 론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였다. 이는 국제자유도시라는 기본바탕과 함께 톱니바퀴가 되어 제주를 이끌어갈 중요한 출발이기도 하다. 특히 제주도를 자치입법, 조직 및 인사, 재정 등 자치행정 전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자치권을 갖는 “자치모범도시” 육성을 기본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같은 계획은 제주지역 특성에 적합한 4대 핵심 산업(관광?1차 산업?교육?의료)과 이에 기반을 둔 첨단산업 육성 (4+1 핵심 산업 육성)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으로 교육과 의료의 개방을 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제주는 양적인 발전을 넘어, 21C 양과 질이 적정수준을 넘어 국제자유도시로서의 손색이 없는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작은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교육은 모든 핵심 산업의 기초가 되며, 제주 발전 단계의 첫 단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개방을 통해 제주는 경제적인 효과와 더불어 교육서비스의 기회 확대와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야 한다. 즉 교육산업과 연관 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려는 제도이다.) 따라서 교육 자치는 중앙으로부터 지방분권화와 자주성이 확립되어야 하며, 주민참여, 전문적 관리가 이루어져야 하는 제도이다.현재의 우리나라 교육 자치는 일반지방행정기관으로부터 독립된 분리형 지방교육행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방 교육 자치는 시?도 수준에서 시행(시?군?구 단위의 교육청은 시?도교육청의 하부행정기관)되고 있다.) 그리고 교육자치행정기구는 시?도의 교육, 학예에 관한 삼의 중요사항을 심의, 의결하는 교육위원회와 집행기관인 교육감이 있다. 교육감 산하에는 하급 교육기관인 교육청, 보조기관, 교육연수원 등을 두고 학예에 관한 사무를 집행하고 있다.2. 교육개방의 배경WTO의 GATS(General Agreement in Trade and Services: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관하여 개최된 DDA(도하 개발 아젠다)에서 발의된 교육, 문화 개방이 세계 각국 간에 협의됨에 따라 교육인적자원부는 ‘외국교육기관 설립운영 기본 계획 및 특별법 제정안’을 발표하고 그 취지를 ‘현재의 고등교육시장 개방 수준으로는 외국 대학의 국내 진입이 사실상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제주 및 경제자유구역에 외국교육기관 유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고등교육 기관과 성인 평생교육기관‘을 그 대상으로 하는 WTO교육개방 양허안을 제출하였으며, 외국교육기관 설립운영 기본계획 및 특별제정안‘을 제정하였다. 특히 ‘경제자유구역 및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외국교육기관 설립?운영에 관한 특별법’ 중 고등학교 이하의 각 급 학교에 해당하는 외국 교육기관의 설립승인 및 지도?감독 등에 대한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권한은 도교육감에게 위임한 것으로 본다.) 2003년 이 법안이 발의될 당시에는 교육 및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3. 제주의 교육개방현재 우리나라는 해마다 해외 유학생이 증가하고 있고 외국의 교육기관들은 한국 유학생들을 그 기관의 재원으로 삼고 있으며, 공교육은 점차 동으로 투자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제도를 정비한다. 또한 초?중등교육의 경우 외국교육기관의 분교설립을 허용하고, 교육과정, IB(국제공통 대학입학 자격)?AP(미국대학의 입학편의 제공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해 교육수요 확대해 나간다.지역 교육의 국제경쟁력 강화로는 초?중?고 교육시설 및 외국어교사 연수지원, 원어민 교사 확대(각 학년별 1원어민), 초등학교 조기 영어교육(3학년→1학년) 등이 있으며, 대학(2년제 포함)의 경우 국내외 대학 간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외국인 유학생 초청 프로그램 지원을 통하여 대학의 국제화를 촉진하고자 한다.)Ⅲ. 세 가지 패러다임적 분석1. 국가 중심적 패러다임국가 중심적 패러다임은 중상주의시대의 패러다임으로 그 시기상 가장 오래되었다. 특히 이 패러다임은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으로 정치, 경제적 목적에 있어서 부국강병을 1차적 목표로 삼고 있다. 즉, 권력을 통하여 부를 창출하고, 이러한 부는 다시 권력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 중심적 패러다임을 교육시장의 개방이라는 또 다른 시장경제와 접목시켜 본다면, 제주를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파악해 나갈 수 있다. 제주도정은 교육의 개방에 있어서 일정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새로운 부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꼭 부가 금전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을 통한 새로운 인재양성 또한 부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제주도정이 국가 중심적 입장에서 어떠한 역할을 소화해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① 공교육의 질적 향상 제고교육개방이 오히려 교육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정부가 직접 양질의 교육역량을 갖춘 학교를 주도적으로 유치하게 하는 것이다. 적정 규모의 학교 수를 제한하여 유지함으로써 외국교육기관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외국교육기관이 학생들의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여 투명성과 학교의 책무성을 확보하도록 한다. 이는 책무성 규명차원에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부실한 외국 교육기관들이 유입되는적 보조지원 등의 제도를 마련하도록 한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제주도정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입학테스트 제도를 투명성이 확보되는 가운데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테스트가 결국 상류층에만 주어지는 일이 없도록 입학허용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입학 테스트의 경우는 어느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개방된 시험이어야 한다.그리고 외국교육기관과 도내교육기관과의 연계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킴에 따라 기존교육기관 학생들의 교육기회를 확대시켜줌으로써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가 있다.④ 동북아 중심도시로의 성장차별화되고 체계적인 교육개방으로 선진국 못지않은 수준의 교육과정과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배출된 인재를 국제자유도시 추진의 전문 인력으로 양성함에 따라 제주도의 경쟁력을 갖출 발판이 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국내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학생들도 유치할 수 있는 충분한 교육환경을 조성하여 이렇게 마련된 교육여건이 외국투자자들의 자본유치의 촉진제역할을 하게 되어 도내경제를 활성화시킨다. 제주도정은 이 같은 촉매제 역할의 선두에 서있어야 하며, 교육과 인재양성에 대한 연결고리를 넘어 양성된 인재를 제주특별자치도를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지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따라오는 인재양성을 통해 경제창출 효과에 기인하게 되며, 더 나가서는 동북아 교육중심의 도시로 성장해나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2. 시장 중심적 패러다임자유주의에 입각하여 등장한 패러다임으로,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에서 시장의 자유기능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특히,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과 같이 시장은 조율되고 관리 되지 않는 어떠한 시스템을 통해 수요와 공급, 그리고 가격이 결정된다. 특히, 시장 중심적 패러다임은 positive-sum game의 특징을 지닌다. 다시 말해 일정량의 공급이 이루어진다면, 상대는 그에 상응하는 다른 재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무역에 대한 스미스의 관점은 리카도문 및 기술의 국제화와 다원적 국제 관계망의 형성으로 인한 지식정보 기술의 교류 가능성이 신속해진다. 이에 따라 국제적인 인재를 보다 많이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재를 육성시켜 제주의 교육을 한층 더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다.3. 구조 중심적 패러다임국가 중심적 패러다임과 시장 중심적 패러다임에 대한 상호 모순을 비판하며 등장한 이론이다. 여러 제 이론들이 ‘구조(structure)가 결과를 조건 짓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구조주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는 국내 혹은 국제 경제구조이며, 계급문제는 그 분석의 줌심적 위치에 놓여 있다. 또한 선진자본주의의 팽창과 침투가 저개발국들의 발전을 가져오기 보다는 오히려 ‘저발전의 발전’을 초래한다고 보는 종속이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교육개방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구조 중심적 패러다임을 통하여 교육시장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① 교육 불평등 심화로 인한 계층 간 위화감 조성‘외국교육기관특별법’의 3대 독소조항이 제한 없는 내국인 입학자격허용, 결산상 잉여금 송금허용, 학력인정이라 볼 때 역차별의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교육기관에 대한 영리행위를 인정해줌으로써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첨예해 질 것이다.외국인학교의 내국인입학이 제한 없이 허용될 경우 그것은 ‘부잣집 자식들의 특권’이 되어 계층 간의 위화감만 커질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종속이론으로 달리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층부의 자녀들은 교육의 중심부에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주변부에 서 있는 일반 서민층은 교육의 주변부에 머물 것이다. 이는 결국 인재양성에 대해서도 종속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일반 서민보다 돈을 많이 벌고 잘 쓰는 집안의 자녀들만의 특권이 되고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높은 교육열에 따라 빚을 내서라도 자녀를 외국교육기관에 입학을 시킨다 해도 상류층 자녀들과의 문화적 격차로 소외당할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 구조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본다면모른다.
    사회과학| 2007.12.05| 12페이지| 2,000원| 조회(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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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일본의 얼굴을 보았는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가지런하게 꽂혀있는 책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특히나 내가 서있던 그 곳은 일본에 관련된 책들이 모여 있어서 흥미가 가는 것을 고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제일 처음 찾은 책은 ‘왜 일본은 망하는가’란 책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책은 찾을 수 가없었다. 다시 이런저런 책을 훑어보고, 목차도 살펴보던 중 강한 인상을 주는 책 제목을 발견하였다. 「누가 일본의 얼굴을 보았는가」가 그것이었다. 일본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궁금하여 나는 목차를 살펴보았다. 일본의 얼굴……. 그것은 다름 아닌 천황(天皇)이였다. 천황,,,,그랬다. 일본의 얼굴은 천황이었던 것이다. 현재 수업을 받고 있는 일본정치론에서 배웠듯이 이 책에서 또한 천황을 상징적으로, 그러면서도 일본을 알기위한 첫 단계인 얼굴로써 보고 있었다. 제목에 이끌려 고르게 된 이 책을 보며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국가와 관련한 책은 오랜만에 읽는 것이라, 이 책으로 하여금 나의 머리와 가슴에 일본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이미지가 각인 될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책을 조금 읽어보고 그다음 계속해서 읽을지 말지 판단하기로 하였다. 나는 책을 고르고서 바로 그곳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일본의 얼굴을 찬찬히 훑으며 읽어가기 시작했다.이 책은 크게 5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역사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신의 나라’답게 아주 오래전 신들의 과거에서부터, 1945년 8월 14일 히로히토의 패전선언을 종점으로 그의 향보에 이르기 까지 길고 긴 천황가의 여정을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여러 사료들을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수업시간에 배웠던 무사에서 막부체제, 천황의 상징적 의미 등 다양한 면에서 배경지식으로 도움이 되었다. 반대로 수업시간에 헷갈렸던 부분이나, 일본어라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이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히 그 깊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때문에 나는 이 책의 선택에 대해 탁월하지는 않았더라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보듯이 일본의 천황이란 매우 커다란 존재였던 것이다. 그것은 200년이 넘게 지속된 사무라이들의 세계 즉, ‘막번체제’때도 여전하였다. 그 기원은 아주 멀리 일본 신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각 나라에 개벽을 알리는 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은 아주 특이하게도 그 신화의 탄생이 섹스(Sex)에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쓴 작가는 첫 내용부터 외설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서 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단군신화에서 그의 탄생과 그의 부모와 조상에 대한 존재의 여부에 대하여 섹스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 있지가 않다. 이슬람이나 인도 등과 같은 경우도 종교의 특성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신은 성스러운 관계를 통하여 신들을 다시 낳았으며, 이는 일본 최초의 신인 00천황의 기원이 되고 있기도 하다.신도(神道)를 중시하던 막부체제의 사무라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교적인 권한에 있어서 황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윤리를 강조하는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조상, 주인,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효를 다하는 것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의식은 당연히 종교적인 개념에도 포함되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신에 대한 조상을 천황가를 만든 최초의 신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 천황가의 조상들이 곧 자신들의 신과 같게 여겨 천황가의 그 자리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특히, 새로웠던 내용은 일본 침략전쟁의 역사는 아주 오래이전 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최초의 침략전쟁은 천조대신이 자신의 손자인 니니기에게 일본을 주기위해 벌인 전쟁이다. 일본에 있는 다른 존재를 없애버리기 위한 오로지 영토차지가 목적이라는 침략전쟁이었다. 일본의 침략적 성격은 어쩌면 천황가 조상 때부터 이어져온 하나의 관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에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반성을 하지 않는. 그러나 이러한 칼이 항상 천황에게 옳게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본 천황이라는 이름의 누군가가 얼마나 잔인무도하고, 인간의 도리로써 할 수 없는 일들만 해왔는지, 일본의 얼굴이라는 천황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한 예로 12대 천황은 자식만 8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연 순리의 엄중한 벌일까 우습게도 그 다음 13대 천황에서는 대를 이을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또 한 가지 일화로 천황의 자리를 놓고, 마음을 비운 삼촌과 그 자리에 대한 야욕이 너무 강한 악착같은 조카도 있었다. 삼촌은 조카가 천황의 자리를 이어받고자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알기에 극구 사양하며 조카에게 천황의 자리를 넘기려 하였다. 그러한 삼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카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삼촌을 죽일 계략을 세우다 그만 먼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고 말았다. 이에 따라 삼촌이 40대 천황에 오르는데, 그는 다름 아닌 텐무(天武)천황이었다.그러나 이 책을 쭉 읽어나가면서 어떠한 부분에서는 기억해야할 가치가 있었다. 일본을 방문했던 어느 조서 시대 관리가 했던 지적에 따르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세워진지 수천 년이 되었으니, 그 동안에 반드시 어진 임금이 있어서 백성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을 것” 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천황은 바로 닌코쿠 천황과 메이지 천황이 아닌가 싶다. 닌코쿠 천황은 지금도 선조의 오랜 어진 뜻으로, 역대 천황들뿐만 아니라 일반 일본인들도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본받고자 하였다. 닌코쿠 천황은 마을에 굴뚝연기가 피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몇 십 년 간 근검절약하고, 천황이 사는 궁궐의 벽이 허물어져 내려도 신축하거나 고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화가 잔뜩 나 있어도 그는 그 신념에 있어서는 절대 굽힘이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마을 굴뚝에서 하나 둘씩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천황은 그때서야 한시름 놓았지만, 바로 자신의 다짐을 풀지 않고, 한동안 밥 먹는 것도 아끼고 줄였다. 이 같은 닌코쿠의 을 장악했던 그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국가 재정의 고난도 무시한 채, 경복궁 재건에 착수하여 2년 만에 준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같은 무리는 조선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의 원성과 더불어 그에 대한 지지도를 떨어뜨렸다.이렇게 일본에 있어 천황은 그의 백성을 울리기도 하였고, 웃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천황의 권위는 막부 체제에 들어서면서 그 위기를 맞이한다. 소위 일본판 전국시대라 할 수 있는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막부 시대는 일본을 한 때, 사무라이 체제를 몰아갔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세 사람은 리더쉽에 있어서도 많이 비교가 되어져 왔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례로, 울지 않는 두견새를 울게 하기 위한 각자의 방법에서 그들의 성격을 파악해 나갈 수 있다. 오다의 경우, “두견새를 울게 하라. 울지 않으면, 죽여라.”라는 극단적이면서도 카리스마 적인 지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반면, 도요토미는 “두견새를 울게 하라.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어라.”라는 계략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쿠가와는 “두견새를 울게 하라.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타고난 처세술을 엿볼 수가 있다. 이들은 각자의 성격과 자질을 가지고서, 일본을 천황의 국가에서 사무라이들의 세계로 바꿔놓았다.하지만, 여기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존재하였다. 200년 이라는 막부시대가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천황의 흔적과 그 기억이 잊혀 질 법도 하나, 여전히 천황이란 존재는 유명유실 하였다.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해 ‘썩어도 준치 망해도 천황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소제목을 읽으면서 표현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적어놓았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사무라이시대가 한창일 때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잊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각 지방에서 천황의 옛 명성을 등에 업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도 부지기 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라도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란 사라지지는 않되, 조용히 연명 모습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목격하는 천황은 양복 정장 차림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1945년 9월 27일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 옆에 서 있는 양복 차림의 왜소한 천황이 그 시발점이다. 그러면 왜 천황은 군화를 신고 군복을 입게 되었을까? 군국주의 일본을 통치했던 천황으로서 군인 복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만일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가지 않았다면, 천황은 군호를 신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도 영국의 처칠 수상도 군화를 신지 않았듯이 말이다. 무(武)를 높이 받드는 상무정신이야말로 일본 고유의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학자나 정치가는 너무나 많다. 이들은 신이 천황에게 전해주었다는 세 개의 보물 가운데 거울?구슬과 함께 칼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으로부터 거울?구슬?칼을 받은 일본은 지(智)?인(仁)?용(勇)의 미덕을 갖춘 나라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천황의 무장은 빠뜨릴 수 없는 일본의 3대 미덕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다.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교과서에 등장한 건국신 진무 천황의 무장도 이런 논리에서 비롯된다. 유목민족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자는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제패한 자가 말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단지 궁궐에서 천하를 통치하더라도, 천황은 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왜소한 몸집의 히로히토를 기억할 것이다. 태평양전쟁 때까지 일본 최고의 통수권자였던 히로히토. 1948년 11월 13일자 에 “동경재판의 피고석에 한 삶의 결석자가 있다. 그는 천황이다.”라고 보도된 장본인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징용당한 조선인들은 이곳저곳에서 강요된 임무 때문에 전범자로 몰려 처형당했으나, 정작 최고의 전범이었던 히로히토는 전범재판에서 무사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범죄를 잊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평양전쟁 것이다.
    사회과학| 2007.12.04| 5페이지| 1,000원| 조회(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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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 디아스포라 평가C아쉬워요
    제1장 서 론1. 디아스포라의 개념우리말로는 민족분산 또는 민족이산으로 번역되며, 어원적으로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 전치사 dia(영어로‘over', 우리말로 ’~를 넘어‘)와 동사 spero(영어로’to sow', 우리말로‘뿌리다’)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은 뒤 그곳으로 자국민을 이주시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때 디아스포라는 이주와 식민지 건설을 의미하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후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유랑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2.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학문적, 정책적 의의코리안 디아스포라 연구는 모국과 재외한인의 공동발전을 위한 재외동포정책 수립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21세기에 들어서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해 국가간의 경계가 약해지면서 국민국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상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취지에서 해외 한민족의 이주와 정착의 역사, 거주국 사회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적응, 민족정체성, 이민문화 등을 연구하여 재회한인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고 이들을 한민족공동체에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과 조건들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민족사적 의의를 갖는다.제2장 중국의 조선족1. 이주와 정착일제 식민지통치 기간에 만주로 조선족의 인구이동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중국 동북부 지역의 조선족 사회는 더욱 확장되었다.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설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와 식량기지로 활용하고자 하는 방안을 세웠다. 또한 당시 조선족 인구의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통치기간에 이주해 온 것이다.그러나 중국에서 조선족 이주민의 생활은 참으로 비참하였다.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가 1949년 신중국 건설 이후 시행된 토지개혁이었다. 조선에서는 물론 일제 치하의 중국에서도 조작을 하며 비참한 생활을 해 오던 그들에게 토지가 분배된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족은 중국 공산당을 은인으로 여기며 1910년에 강제로 합병하고 1919년에 삼일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난 이후부터는 정치적인 동기를 띠게 되었다. 고려사람은 이 지역에서 경제적 성장에 기초하여 민족문화, 교육을 장려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고국의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기지로 발전시키려 하였다.2) 1937년 강제이주1937년 8월 21일 소련 지도부는 국동지역의 고려사람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집단 이주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주대상이 되는 사람은 소유물, 농기구, 동물 등을 소지할 수 있고, 이주민이 두고 간 동산, 부동산, 파종 종자 등은 가격을 계산하여 보상한다고 되어있었다. 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는 1938년 3월에야 이주민에게 정주구역을 정해주었으며 경제활동 재개에 필요한 도움은 물자의 결핍으로 줄 수 없었다. 37년의 강제이주가 스탈린에 의해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강제이주에 앞서 오랜 기간 상당한 논의와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결정이라는 사실은 최근 들어 공개되기 시작한 정부 문서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강제이주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들이 제기되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차르정부로부터 소비에트정부에 이르기까지 고려사람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고 자국 변방에 믿을 수 없는 소수민족들을 예방차원에서 내륙지역으로 이주하려고 한 러시아인의 시각과 그 시각을 반영한 민족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제주의 정권에서 강제이주와 같은 집단테러는 정권 반대세력 또는 위협세력을 제거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효과적인 통치수단이었던 것이다.3) 강제이주 후 고려사람의 정착1938년 7월에는 ‘이주고려사람의 경제체제의 발전에 관하여’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중앙아시아 고려사람은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1937년의 강제이주와 자신들의 불우했던 역사를 얘기하기 시작하였으며 스탈린의 정책을 비인간적 처사로 비판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아직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박해받은 고려사람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이 마련되고 있지 않다.2. 인구학성원간의 긴밀한 접촉, 교류, 의존성과 같은 것들이 고려사람에게 중요한 요인인지를 검층하기 위해서 교회 출석 여부와 교회 신도의 민족 구성비율, 직장 동료의 민족 구성비율, 가까운 친구의 민족 구성 비율 등에 관한 질문들을 물었다.독립국가연합에서 짧은 기간 내에 고려인 개신교회가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구소련 붕괴 이후의 사회심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려사람이 언어, 문화적으로 정착사회에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소수민족으로 구별되고 다르게 대우받는 것에 기인하다. 그리고 고려사람의 민족성은 친구를 사귀고, 배우자를 찾고, 교회를 다니고, 직업을 찾는 등의 과정들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지는 기준이 된다.이렇게 다인종, 다민족사회에서 타민족들에게 의해서 고려사람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특정 소수집단의 성원으로서 구별되고 인식되는 과정과 그 결과가 고려사람의 민족정체성 형성과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제4장 재일한인1. 이주와 정착1) 한일합방 이전한일합방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는 일본의 대부분의 산업에서 외국인노동자를 금지했기 때문에 한인 노동자의 유입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당시에도 각종의 육체노동자들이 도일한 것으로 알려져 일본경제가 초기 산업화단계에서 조선인 노동력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2) 제1기(1910~1938)일본 자본가들은 국내의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저임금의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강압정치를 시작했고 이때 식민지 경제정책의 중심이 된 것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1920년대에 일제는 조선에서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에서 쌀 생산을 증가하였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증가하여 조선에서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경제와 사회여건은 결코 한인이 이주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에는 한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혼의 증가와 맞물려서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가 일본으로 귀화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 중에 일본에 산다‘는 의식이 강해지면서 한인으로서 겪는 차별을 벗어나고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반면 1985년 이후 귀화자 수는 자연증가의 규모보다 크기 때문에 재일한인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법적’인 재인한인의 감소를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일본의 국적법의 변화이다. 또 한 가지의 인구변화는 출산율의 감소와 노령화이다. 이 두 현상은 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일본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인구의 노령화는 인구감소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인구와 부양인구의 감소를 가져와서 경제적 부담을 가중하게 된다.재일한인의 연령별, 성별 구성이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첫째, 이주 초기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남성 중에서도 15세 이상부터 39세 이하의 청장년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둘째, 앞서 지적하였던 출산력의 감소와 노령화로 인해 과거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인구구성이 1992년 이후에는 10세 이하의 아동의 비율이 줄고 청장년층의 비율이 높은 종 모양의 인구구성을 보인다.3. 민족정체성중국, 미국, 캐나다, 독립국가연합 등과 같은 다민족사회에 사는 한인은 ‘조선족’, ‘코리안 아메리칸’, ‘코리안 캐나디안’, ‘고려인’과 같이 혈통으로는 한민족이지만 거주국 국민이라는 이중정체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재일한인의 경우에 ‘한인계 일본인’(Korea Japanese)라는 이중정체성은 일본인은 물론 한인조차도 아직까지 수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잘 알다시피 재일한인의 이주와 정착의 역사는 다른 재외한인에 비교해서 특별하다.재일한인은 일제 식민지 통치시기에 이주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피식민지의 국민으로 핍박과 차별을 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일방적으로 국적을 박탈당하고 외국인 신분으로 오랫동안 불안정한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2, 3세들이 주류를 형성하면서 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않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3) 최근한인이민, 1965~현재1965년 미국 이민법에 크게 개정되면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만 5천 명의 한인들이 이민을 가서 멕시코와 필리핀다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되었다. 최근에는 처음부터 이민을 오는 사람들은 연 7천~8천 명에 머물고 있다. 1965년 후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은 그 이적의 한인 이민자들과 크게 구별되는 인구학적, 사회경제적 특성을 갖고 있다.우선 최근 한인 이민자들은 핵가족이 단위가 되어서 이민을 갔고 이민 후에도 가족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미국사회에서의 경제적 적응이 훨씬 용이하였다. 1965년 이후의 최근 한인 이민의 발생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배출요인과 미국에서의 흡인요인을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 한인 이민의 주된 배출요인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 도시화, 그리고 교육의 확대로 인해서 한국사회에 대도시 거주, 대졸 학력, 그리고 직업적으로 전문직, 기술직, 관리직 등에 종사하는 신 중간계층의 빠른 형성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신 중간계층 성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또 하나이 중요한 동기는 자녀 교육이었다.한국사회의 높은 교육열과 하여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를 낳게 하였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 흡인요인으로는 1960년 중반 급격히 성장한 미국의 의료 보건 분야에서 미국 자체적으로 의료 보건 요원을 충원하지 못하게 되자 필리핀, 인도, 아르헨티나, 한국 등과 같은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의사나 간호원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4) 최근 한인 이민자의 계층 변화첫째, 미국의회는 1970년대 중동 오일 쇼크 이후 불경기가 계속되자 자국내 노동자들의 직업 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외국 전문직 노동자들의 미국 이민을 억제하기 시작하였다.둘째, 미주 한인
    사회과학| 2007.11.23| 12페이지| 2,000원| 조회(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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