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나선The Double Helixby James D. WatsonⅠ. 들어가며노벨상을 수상한 왓슨(James D. Watson)에 의해 쓰여진 『이중나선(The Double Helix)』이라는 이 책은 DNA가 발견되기까지의 왓슨과 크릭의 연구과정을 소설처럼 그려내고 있는 책이다. 사실 이중나선이라는 제목을 대할 때 처음 풍겨졌던 이미지는 소설 같다기보다 딱딱한 이론서를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한 숨에 이 책을 다 읽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막막함을 가지고 책을 펼쳐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처음 생각했던 딱딱한 이론서의 모습이 아닌 마치 일인칭시점의 한 편의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사실 이러한 드라마 같은 서술로 인해서,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소설 같은 이 책이 소설 같지만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사실을 근거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했었다. 때로는 한 작가가 DNA발견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왓슨의 눈을 통한 일인칭 시점에서 여러 갈등 상황과 주변인물의 캐릭터들을 설정하여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었고, 설마 과학자가 이렇게 책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었다.이러한 생각은 내 안에 과학자의 모습이, 무엇인가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객관적으로 사물과 정황을 판단하는 이성적인 사람의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있음에서 비롯되어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는 저자가 과학자라는 것, 그 것도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라는 것에 처음에는 쉽사리 동의되지 않았던 것 같다.과학자가 서술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이 물씬 풍겨 나고 있는 이 책. 등장하고 있는 주변인물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표현되기도 하고, 실존하고 있는 유명한 과학도들에 대해 때로는 객관적이지 못 한 것 같다는 느낌의 묘사들이 되어지고 있는 책. 그래서 왠지 모르게 과학자가 썼다고 하기에 쉽사리 동의가 되지 않았었던 책이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과실 이 책의 주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DNA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 일반인들의 편견을 뒤엎는 과학자들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이 책의 한 묘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Ⅱ. 왓슨과 크릭이 DNA구조를 밝혀내는 과정소설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인 왓슨은 사실 시카고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학부 졸업생일 뿐 이였다. 그러나 그의 지도교수였던 쌀바도르 루리아로 인해 코펜하겐에 화학을 배우러 가게 된 것이 그가 DNA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된다. 코펜하겐의 칼카르 밑으로 간 왓슨은 칼카르의 연구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차에 나폴리에서 윌킨슨의 DNA의 X선회절상을 보고 DNA구조발견에 대한 큰 매력을 느끼게 되며, 여기에 폴링의 알파나선모형에 관한 논문을 읽고 난 후 DNA에 관한 그의 흥미는 더해져서 막스페루트와 존 켄드루가 있는 캠브리지 대학으로 옮겨가게 된다.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일생의 중요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그 상대는 바로 캠브리지 대학 캐븐디쉬 연구소에서 단백질의 3차원적 구조를 연구하고 있는 물리학자 크릭이다. 그들은 만나서 DNA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게 되고, 폴링이 폴리펩티드 사슬의 구조를 밝힌 것을 보고 폴링과 같은 방법으로 DNA의 구조도 밝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그래서 모형을 만들게 되는데 그에 앞서 크릭이 윌킨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DNA분자는 외가닥의 폴리누클레오티드로 되어있다고 생각하기에는 그 직경이 너무 크다고는 것이다. 그래서 크릭은 DNA분자가 여러 가닥의 폴리누클레오티드 사슬이 서로 꼬여서 형성된 복합나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며, 규칙적인 당과 인산으로 된 뼈대에 염기의 배열순서가 불규칙적인 것으로 설정하게 되었다.그렇게 임시방편으로 만든 인원자의 모형을 보고 프랭클린은 윌킨스와 함께 반론을 제기하게 되며 아직 완전하지 못한 그 모형에 있어 가능성을 얻지 못하게 된다. 사실 나선 구조에 부푼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이러한 결과로 인해 크릭과의 DNA연구를 그만두라는 결정이 하달되어 크릭은 단백질연구로 되돌아서게 된다. 또한 왓슨은 담배 모제익 바이러스에 관한일이나 하면서 지내기로 작정하였다. 담배 모제익 바이러스의 핵심적인 성분은 핵산이므로 그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DNA에 대한 관심을 계속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DNA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에는 안성 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담배 모제익 바이러스에 대한 일을 하다가 그것이 나선형임을 입증하는 X선 사진을 찍게 된다.그러다가 라이너스 폴링이 DNA의 구조를 밝혔다는 편지를 받게 되고 긴장하고 있던 중에 도착한 폴링의 논문에서 착오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착오를 말하다가 폴링의 모델이나 세 가닥의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두 가닥의 사슬로 모형을 만들게 된다.그렇게 해서 DNA의 구조는 밝혀지게 된다.Ⅲ. 왓슨과 크릭에게 영향을 주었던 관계들이 책에서는 저자인 왓슨과 그과 함께 공동연구를 한 크릭 뿐 아니라 윌킨즈, 프랭클린, 폴링 등의 과학도들에 의해 DNA구조가 밝혀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결국에는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의 DNA 구조를 먼저 밝혀내는 것에 성공하지만, 사실 그 과정을 내밀히 살펴 보면 윌킨스와 프랭클린 그리고 폴링의 선진 연구들이 없었다면 왓슨과 크릭의 발견이 그리 빨리 이루어 지지 못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사실 각 처에서 DNA를 연구하고 있는 그들의 생각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DNA를 관찰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했고, 접근하는 방식과 방법론에 있어서도 서로의 의견이 달랐다. 같은 사과를 보고 있지만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듯이 그들은 서로 다른 면을 바라보고 다른 면에서부터 시작하여 DNA를 그려내 나가고 있었다.크릭과 왓슨이 가장 먼저 DNA를 발견할 수 있었던 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자신과 같은 연구를 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연구를 토대로 자신의 연구를 관찰하고 검증하는데 있었던 것 같다. 자신과 다른 시각과 방법으로 틀렸음을 빨리 인정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했었던 것이 그러한 결과를 낳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사실 이 책에서 로지라 불리고 있는 프랭클린이나 윌킨스, 폴링 등은 크릭과 왓슨의 의견을 들으면서도 그 때까지만 해도 애송이 과학자였던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며, 오로지 자신의 연구방법만을 고수했다. 예를 들어 크릭과 왓슨은 DNA구조가 나선형이라는 것을 당당히 피력하였지만 프랭클린을 비롯한 나머지 학자들은 나선이라는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형으로 연구하고 있는 그들의 방법 또한 그리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었던 것 같다. 윌킨스나 프랭클린, 폴링 이 크릭과 왓슨의 의견에 대해 검토했었다면 어쩌면 그들이 더 빨리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학문에 있어서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신감과 또한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겸손함도 겸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그렇다고 프랭클린과 윌킨스, 폴링이 겸손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으로 왓슨과 크릭이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이중나선임을 발표했을 때 폴링은 감탄하고 함께 네이쳐에 논문을 실으며 새로운 발견을 축하해 주었다. 사실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많은 부분 그들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사실 왓슨과 크릭이 처음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은 폴링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유기 화학자인 폴링이 단백질의 알파나선구조를 밝혀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왓슨과 크릭이 혹시 DNA분자도 질서정연한 나선구조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을 하게 되었었다.또한 이러한 생각들을 이어져 나선구조가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이 것은 특별히 DNA구조가 나선구조라고 이야기하는 왓슨과 크릭 앞에서 DNA구조가 나선인지 아닌지는 X선 연구를 좀 더 해봐야지 알 수 있다며 끊임없이 X선 연구를 이어나갔던 프랭클린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왓슨과 크릭이 이게 영향을 준 것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사실 X선 사진을 몰래 제공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윌킨스과 프랭클린의 우호적이지 못했던 관계로부터 기인한다. 윌킨스와 크랭클린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윌킨스가 왓슨과 크릭의 연구에 힘을 실어주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쨌든 노벨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연구가 없었더라면 왓슨과 크릭의 DNA발견이 늦추어 졌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녀의 공 역시 크다고 볼 수있다.또한 왓슨과 크릭이 이온이 DNA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는데, 한참 이온연구로 법석을 떨고 있건 왓슨과 크릭에게 윌킨스와 프랭클린은 이온이 아니라 염이 중요한 부분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를 해주게 된다. 염에 대해서 돌아보게 해주는 이 부분 또한 DNA의 발견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됨을 알 수 있다.이리하여 이온이 아닌 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두 사람에게 다른 과학자로부터 연구된 염기 함량 비에 관한 데이터가 주어지면서, DNA에 대한 구조를 다시 잡아나가게 된다. 이러한 데이터는 자신들의 연구에 필요할 만한 것이 없는지 네이쳐나 여러 방법을 통해서 자료를 모으고 있던 도 중 알게 된 사실로, 다른 이들의 연구가 왓슨과 크릭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마치 하나의 집이 지어지기 위해서는 작은 벽돌 하나하나와 그 것을 연결하는 시멘트가 필요하듯, 하나의 DNA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각 처에서의 이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필요한 이론들을 모아서 분석에 성공한 것은 왓슨과 크릭이였으나 그 작은 이론들 하나하나를 연구한 다른 과학자들의 공로 또한 무시할 수 없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이런 여러 가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가며 DNA구조에 관한 이론이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하게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살펴 보았 듯이 과학자들의 상호 협력적인 관계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만의 이론으로 숨겨 된다.
이렇게 프롤로그의 부분이 지나고 본론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들어가면, 일본의 오까나와 야마구찌, 나가사끼, 이 세 지역에서의 평범하나 독특한 일본인 세 명을 만날 수 있다.오까나와의 그 슈퍼마켓 주인을 그냥 일본인으로 규정하기에는 미안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한국의 독자로써 일본인이라 통칭함에 이해를 바라며 글을 이어 나가겠다. 사실 오까나와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어떤 도시인지 사전적인 이해가 전혀 없던 나로써는 –수업시간에 들은 듯 하나- 책 속에 전개되는 너무나 잔인했던 오까나와의 역사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관광지라는 그 곳에 내가 언젠가 가게 될런 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고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도 않지만-가게 된다 할지라도 그 곳 해변이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취하여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역사 속의 아픔과 섬찟하리 만큼 대조되는 그 곳의 아름다움은 그 지난 역사를 잊게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까나와의 슈퍼마켓주인인 찌바나 쇼오지이씨는 그 아픔을 끄집어 내어 그 역사를 잊지 않게 하려고, 오끼나와인들에게, 그들이 일본인이라 부르는 본토에 도전장을 내민다. 일장기를 내리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태움으로써 비난을 받게되고 또한 목숨을 위협받게되었던 그의 행동.. 숨겨진 동굴의 비밀을 토해내기 위해 끈질기게 그 신념을 지켜나간 그의 태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만을 사회구조의 모순 속에서도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개인적 일상에 젖어있는 안일한 오끼나와 인들과 본토의 일본에 큰 파장을 안겨 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실 이러한 행동이 한국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군사주의정권이 아닌 한- 목숨을 내 놓을 만큼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책에서도 설명하고 있듯 일본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혼자 튀는 행동을 하고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는 입히는 것은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큰 죄로 인식되어 지는 것이다. 주위사람들의 눈총이 그리고 그 연대에서 쫒겨남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사회적 구조에 빠져들면 들수록 뼈져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데, -몇 년 살았다고 그러냐만은- 현재의 안락한 그 것들을 포기하고 과거의 역사의 진실을 택했다는 것은 보통 신념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라 생각된다.
'비정성시'(悲情城市)[Intro...]“A city of sadness” “슬픔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영화 『비정성시』는 1945년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자막으로 시작되고, 1948년 중국에서 패한 장개석이 대만에 정부를 세웠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렇게 대만의 현대사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영화에는 2.28항쟁의 배경이 깔린 가운데 한 가족의 삶을 보여준다.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해방된 대만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임아록에게는 장사를 하는 문웅과 일본군의관으로 출정해 행방불명된 문상, 불량배가 된 문량, 귀머거리이자 벙어리 문청. 이렇게 네 명의 아들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문청은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오관영이라는 지식인 청년과 함께 살고 있다. 관영과 그 친구들은 부패한 나라를 걱정한 나머지 개혁주의로 기울어져 있고 문청은 그들과 엮이게 된다. 문청은 간호사를 하는 관영의 여동생, 관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형인 문량과 문웅은 상해에 본거지를 둔 범죄 조직의 유혹으로 배를 제공하고 밀수에 손을 댄다. 그러나 상해조직은 문량이 일본에 징용돼서 일했던 것을 빌미로 문량과 문웅을 전범으로 당국에 고발하고, 이권을 빼앗아 버린다. 문량은 곧 석방되지만, 이미 폐인이 된다. 한편 2.28사건이 터지자 문청의 친구들은 체포되거나 실종되고, 문청도 옥살이를 하게된다. .옥에서 나온 문청은 관영의 정부 대항조직에 참여하려 하나 관영은 그에게 관미를 부탁한다. 이 때 제일 큰형 문웅이 상해 조직과의 혈전에서 죽음으로써 문청은 임씨 집안의 유일한 남자가 된다. 결국 문청은 관미와 결혼식을 올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까지 낳지만, 그도 역시 체포되게 된다.이러한 전체적인 줄거리 속에서 이 영화의 감독인 허우샤오지엔이 어떤 화면 구성과 카메라 기법, 그리고 음향방식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려 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영화 속으로..]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자막이 많이 나온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영화의 시작부터 자막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할만한 점은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귀머거리인 문청이 상대방과 이야기하는 것이 자막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 것도 상대방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화면이 갑자기 사라지고 까만 바탕의 전체 화면에 그가 종이에 적었던 말이 뜬다. 그와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의 말도 예외는 아니다.화면 밑에 대화 내용을 그냥 삽입하면 될 텐데 흐름이 끊어지게 왜 이런 방식을 쓰는 것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했었다. 처음에는 옛날 영화라서 그런건가 하고 지나쳤었는데 감독이 설정한 다른 여러 요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화면 구성이 감독의 의도적인 설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러니까 여기서 감독의 의도적인 설정이란 이러한 화면구성을 통해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거다. 영화의 다른 요소에서도 감독의 그러한 의도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전환 화면이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을 것 같다.영화 중간 중간, 관영이 관영의 친구들과 모여서 정치에 관해서 수다를 떨고 식사를 함께할 때 마다 카메라는 갑자기 화면을 옮겨서 바깥풍경을 보여주고 다시 그 내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곳곳에서 전체적인 스토리와 관계없어 보이는 장면을 넣음으로 인해 스토리의 흐름이 중간 중간 끊어지게 된다.스토리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요소로 사건전개에 있어서 논리적인 설명이 화면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관객들은 특별한 설명 없는 인물들의 관계를 영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추측해야하며, 사건 전개의 논리성을 스스로 구축해나가며 영화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를 편안하게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고하게 된다.영화를 보면서 사고하게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서정적이고도 호흡이 긴 카메라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롱테이크샷’이라 불리는 이 카메라 기법은 ‘오랫동안 보여주기’라고 번역될 수 있는 기법이다. 컷이 짧을수록 긴박한 상황을 나타내게 되고 이로 인해 생각할 여유없이 그 상황을 따라가기에 바쁜데 반해, 이 ‘롱테이크 샷’은 관객들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생각할 여유를 충분히 허락해준다.또한 카메라의 시선을 고정되어있고 주인공들이 필요할 때 마다 나타나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들어감으로 관객들은 그 이면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고민하게 되고 제 삼자의 입장에서 화면을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주인공의 눈을 따라가며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을 이입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보는 내내 관조적인 태도로 제3자가 되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적인 설정은 ‘서사극적 미학’을 추구하는 서양의 브레히트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서사극적인 미학이란, 관객이 영상과 줄거리에 몰두하지 않고 영화/연극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잃지 않도록 다양한 기법과 방법을 동원하는 예술관이다.이러한 서사극적 미학에 따르면, 음악은 결코 영상에 종속되어서, 영상이 말하는 것을 또 다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과 대비되도록 사용함으로써 다른 의미를 줄 수 있으며, 코멘트 할 수 있다.)이러한 영상과 대비되는 “음악의 대위법적인 사용”은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무리들이 먹고 살려고 밭을 갈 때에 클래식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영화의 첫 장면을 기억해 보아도 그렇다. “일본이 패망하고 국빈정부가 대만을 인수한다”는 방송이 나오자마자 들리는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담배연기만 내뿜는 초초한 기색이 역력한 문웅의 모습과 곧이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역설적인 장면이 그러하다.이렇듯 음악은 화면이 직접 말하는 것에 물음을 던지거나 또는 반대로 화면이 말하지 않는 것을 관객에게 암시하거나 설명을 할 수도 있다. 도식적이고 관습적인 영화음악과는 달리 새로운 긴장과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이다.이 영화에서도 감독은 음악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분위기를 살리기에 급급한 ‘배경음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음악으로 일종의 쇼크효과를 내었고 해석에 따라 저항감마저 줄 수 있게끔 설정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