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 박사의 한국, 번영의 길을 읽고...‘나라가 잘 살아야 국민이 대접받는다’보릿고개로 하루 끼니를 어떻게 때울까 걱정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가난을 극복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물론 저 같은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시절이 실감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해 4강 신화를 이루고 휴대폰과 선박을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의 노력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인 것입니다.‘나라가 잘 살아야 국민이 대접 받는다’ 는 문장은 공병호 박사의 ‘한국, 번영의 길’에 담겨있는 하나의 소제목입니다. 지극히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정말로 제 가슴에 와 닿았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1938년 아시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나라는 필리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의 가정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한 달에 100만원을 벌기 위해 서계 여러 나라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가난한 시절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외화를 벌어들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십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아오고 있습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부존자원도 자본도 없던 이 땅에서 불과 반세기만에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눈부신 경제적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인들이 부러워하고 배우려하는 이러한 역사적 자부심을 우리 국민들은 점점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정부 규제 속에서 많은 기업가들이 기업가적 정신을 잃어가고 자신이 하던 사업을 처분하여 외국으로 떠나고 있고, 높은 조세 부담률로 근로자들은 근로의욕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 주변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중국경제는 고속성장을 거듭하면서 한국을 추월하려고 하고 있으며 일본은 10년간의 장기불황을 끝내고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한국이 앞으로 계속 번영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 나가야 할 지 공병호 박사는 인센티브의 중요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개개인의 지적 자산과 창의성이 중요시 되는 지식사회에서는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센티브의 중요성은 인센티브를 억압한 조선의 도공제도에서 몰락한 도공들과 개인의 실명으로 도자기를 빚을 수 있게 하여 개인의 인센티브를 유인한 일본의 도공제도에서 성장한 도공들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공병호 박사가 말하는 탁월한 제도란, 한 공동체가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개개인이 물질적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으로 행복감과 안정감을 갖도록 도와주는 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신분 구조에 대해서1. 신분사전에서 신분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사람의 법률상 지위나 자격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 혹은 중세의 신분을 얘기할 때는 계급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어떤 일정한 전체사회에서 혈통, 가문, 직업, 직업상의 지위, 교양, 수입, 재산, 권리 등에 따라서 특정한 사회적 평가와 처우를 받는 계층을 신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계급과 신분은 별개의 개념이다. 계급은 오직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히 중세 사회를 말 할 때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이 자주 혼합되기도 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제도, 관습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제적 관계의 위치에 불과한 계급 사이에 존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낳았고 이것은 곧 사회적으로 다른 지위를 가지는 신분의 싹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생산 관계상의 경제적 위치라는 계급이 신분이라는 옷을 입음으로써 일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신분은 반드시 경제적 예속 관계 등으로만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배층 내에도 그 역할에 따라 다양한 신분이 구성되었고 피지배층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분의 다양화가 진행되어 갔다. 이러한 신분은 신분제라는 법으로, 혹은 그와 관련된 다양한 제도, 관습으로 고정화 된다. 또한 신분은 직업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분에 따라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어 조세나 역 등에 차등을 두는 것이 중세의 지배체제였으므로 신분제의 동요는 곧 그 사회의 위기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분의 구성 형태와 그 변동 과정에 대한 연구는 한 사회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분야이다.2. 고려시대의 신분 구조앞에서 말한 듯이 신분을 국가나 공동체가 한 인간이나 집단의 지위를 법률적, 정치적으로 제도화 시킨 것이라 한다면 고려시대는 원칙적으로 양인과 천인의 두 신분만이 존재하는 양천제였다. 고려 성종 때 정치가 최승로는 “우리나라의 양천제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였는데 양천제는 그 만큼 당시의 신분제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양인 신분은 다시 여러 계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관료, 군인, 향리 등 지배질서에 참여한 정호층, 일반 농민인 백정층, 그리고 부곡 지역에 거주한 잡척층의 3가지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다. 천인 신분은 노비 밖에 없었는데 여러 신분 계층 중에 그 수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노비는 양인과 같이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재산으로 취급되었다.양인의 여러 신분 계층을 살펴보면 우선 정호층은 지방 세력의 후예라 할 수 있는데 고려 태조가 지방의 주요 세력에게 성씨를 내려 줄 때, 성씨를 부여받은 층을 가리킨다. 정호층은 정치적으로 지방사회의 지배 세력이면서 경제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자들로써 고려 왕조가 지방 세력에 기인하고 있는 만큼 고려의 지배 세력은 이 정호층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 실시된 과거제는 이러한 세력을 지배 세력에 흡수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점에서도 이들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지방 세력들 중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이들은 중앙관인이 되고 나중에는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거나 정치적, 학문적 능력을 발휘하여 문벌로 성장함으로써 지방 세력의 체질을 완전히 벗어버리게 된다. 한편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은 지방 세력은 지방행정의 실무자인 향리층이 되거나 지방군의 장교가 되어 해당 사회에서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이렇듯 정호층은 고려 사회에서 직역과 정역을 부담하였고 지배 세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신분이었다.백정이라 하면 흔히 조선 시대에 소, 말, 개, 돼지 등을 잡는 사람을 상상하겠지만 고려 시대의 백정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이들은 정호층과 달리 국가에 대해서 역의 의무를 지고 있지 않았던 자들로서 일반 농민층과 같은 존재였다. 국가의 직역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 성을 쌓거나 도로를 건설하는 일반 요역을 부담하면서 국가에 3세를 부담한 것이 이 백정층으로 그들은 민전을 경작하면서 3세를 부담했는데 달리 말하면 조선 시대의 양인 농민 계층과 그 성격이 비슷한 신분이었다. 고려 초기에는 향리층의 자제에게만 과거 응시권이 주어지는 등, 신분 상승이 매우 어려웠으나 중기 이후에는 과거 응시가 가능해져 매우 제한적이지만 과거를 통해 정호층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해졌다. 또한 국가에 대한 역의 부담은 없었지만 군역 등을 부담하였을 경우에는 국가로부터 공전을 가급 받아 정호층이 될 수 있었다.잡척층은 여러 가지 전문적인 기능에 종사하는 역을 지는 신분층을 말한다. 대표적인 잡척층은 주로 향, 소, 부곡, 장, 처 지역에 거주하는 양인의 최하층 사람이나 교통의 요지인 역이나 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다. 향, 부곡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주로 관청에 지급된 토지인 공해전, 둔전, 학전을 경작하는 역을 졌고 소에 사는 사람들은 도자기, 종이, 먹, 소금 등의 생산에 종사하였으며 장, 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사원이나 왕실의 토지를 경작했다. 즉, 잡척층은 국가가 필요로 했던 각종 토지를 경작하고 물품생산을 위해 특정의 역을 지던 사람들을 말한다.3. 군현제군현제는 고려 시대의 신분 구조만이 아니라 고려 사회 전체를 보는데도 매우 중요한 지방 제도라 할 수 있다. 군현제는 단순한 지방 정치제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국가가 민중지배를 실현하는 수단이자 민으로부터 역역이나 군역을 취하고 그들의 생산물을 수취하는 매개체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군현제 개편이 항상 토지와 수취제도 개편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고려 시대의 군현단위는 주현을 기준으로 그 아래 여러 개의 속현과 향, 부곡 등이 예속되어 하나의 행정단위와 영역을 이루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향, 부곡 등의 행정구역은 특정 역을 부담하는 행정단위라는 점에서 일반 군현과 구별해 흔히 부곡제 영역이라 한다. 이러한 군현제 영역과 부곡제 영역은 서로 다른 역의 부담을 지고 있던 계서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군현전 영역에서는 일반 농민층이라 할 수 있는 백정층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민전을 경작하며 농업에 종사하면서 국가에 대하여 3세를 부담하였다. 부곡제 영역에는 잡척층이 거주하였는데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 농업 생산에 주력하였는데 근본적으로 반 왕조 세력의 후예들이었던 잡척층은 3세는 물론 추가로 앞서 말했던 특정의 역들을 부담하였다.고려시기에 이렇게 특수한 형태의 지방 제도가 운영된 것에는 지역 간 발전의 격차가 크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선진적인 농법을 수용한 지방 세력이 거주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 간의 생산력 차이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계서적인 군현 지배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반 왕조 세력을 재편하기 위해서였다. 이들로 하여금 국가 직속지나 왕실과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거나 그 곳의 주민을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금, 은, 철 등이 생산되는 생산지에 편제시켜 생산을 전담케 하였으며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게 하기도 했다. 즉, 군현 지배 체제는 고려 초기 지방 세력의 존재, 지속적인 개간과 새로운 촌락의 증가 현상이라는 사회 경제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특히 사회적인 분업의 장치이기도 했다. 이러한 편성으로 인해 정호층은 자연스럽게 지배계급으로 편입되었고 백정층이나 잡척층은 피지배계급으로 편제되어 간 것이다. 또한 이 관계를 묶어 나가기 위해서 국가적인 토지 분급제를 제도적인 장치로 두었다.위에서 보았듯이 향, 소, 부곡의 주민은 천민이 아니다. 흔히 부곡민을 천민이라 보는 견해가 많은데 부곡민은 양인 신분의 최하층이었지, 천민은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 역사에서도 부곡이 존재했는데 그들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하지만 고려의 부곡은 특수 행정구역을 뜻하며 향과 소도 마찬가지이다. 양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양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떤 일정한 역과 조세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반면 천인은 일체의 의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인에게는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다든가 관리가 된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부곡민이 백정층보다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국가에 대해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천인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REPORT친일파 청산 어떻게 할 것인가- 민족주의를 넘어서서론1945년 8월 15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 날은 우리 역사가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들과 단절하고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세상이 출발하는 새로운 날이었는가? 아니면 식민지의 유산이 고스란히 대한민국에 이어지는 연속적인 날의 하루에 불과한 것인가? 해방은 분명 우리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긍정적으로만 보이던 그 변화로 인해 36년간의 치욕적인 식민 지배를 벗어나 이제야 비로소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역사를 우리 손으로 가져 올 수 있다는 희망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생겨났다.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우리의 해방은 과거로부터의 단절로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절이 아니었다. 역사는 칼로 무를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떠난 자리에는 미군정이 들어왔고 남, 북한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으며 우리는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서 살고 있다.게다가 해방 공간에서, 더욱이 남한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관료들과 친일적 인사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해 갔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와 따로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식민지 시대의 유산들, 그리고 그 속에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들은 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반드시 역사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단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밝은 미래와 내일의 역사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대체 ‘친일파는 누구이며 어떤 행위가 친일 행위였는가?’,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으로 할 것이며 죄의 경중과 처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기준, 혹은 납득할 만한 규정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자칫 근대와 현대를 단절시켜 식민공간의 모습을 잘못 보게 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해방 후의 우리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반공과 민족주의이다. 친일파 청산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반공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민족주의 민족전선’의 친일파 규정에서 ‘반민족’이 전면에 등장하였다고 한다. 또한 1948년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의 제정은 친일행위를 반민족 행위로 수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윤해동은 이러한 친일 규정의 방식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자의적인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판하고 있다.)친일파의 개념을 민족문제와 연관하여 생각하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느냐며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친일파, 혹은 식민지 청산을 논할 때 언제나 그 기준에는 민족이 들어가 있어야 하며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과거 규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로 바라보는 역사관은 이분법, 그 자체이다. 민족주의는 항상 식민지 시기의 지식계급 및 사회 인사를 친일, 반일의 폐쇄회로 속에서 바라본다. 오직 민족 반역자인 친일파와 민족의 위인인 항일 투사, 독립투사만이 존재할 뿐이다. 독립투사를 위인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당연히 동의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외의 사람들을 민족 반역자로 몰아가는 것엔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다양하고 나름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100명이 있으면 100가지의 삶의 형태가 있고 가치관이 있다. 그들을 민족주의의 가치관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친일, 민족 반역자라는 자루 속에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꾸겨 넣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횡포이며 자기기만, 무지일 뿐이다. 식민지 조선 사회는 흑백만이 존재한 곳이 아니다. 그 곳엔 수많은 회색의 공간이 존재한다.)친일파를 분류하고 규정하는 작업은 조심스럽고 세밀해야 할 것이며 정밀하며 완벽하여야 한다. 의식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따른 자들을 친일파로 규정하되 거기엔 반드시 더욱 치밀한 연구와 증거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36년간의 일제 통치하에서 머릿속에 너더분하게 남아 있는, 생활 속에 스며들어있던 일제의 잔재를 어떻게 단순히 이분법의 사고로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하게 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분명한 민족반역자를 방면하게 될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그 자체에 몇 가지 커다란 역설을 지니고 있고 나는 그로 인해 민족주의에 의거한 친일파 담론이 비생산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그 역설 중 하나는 민족주의는 역사적 사건들 중에서 언제나 자신이 보려고 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르낭은 ‘본질적으로 국민이란 많은 일들을 공유하면서도 또 그만큼 많은 사실들을 잊어버리는 개체들의 집단이다’)라고 하면서 프랑스 국민들은 성바르톨로뮤의 학살을 프랑스와 위그노라는 다른 집단 간의 갈등을 동족 학살로 보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경쟁하는 왕조 국가였다는 것을 망각하고 민족 간의 대립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신라에 의한 통일을 민족의 통일로 기억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국립묘지에 참배하는 것에는 너무나도 무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자신이 가진 민족주의의 허상이나 모순에 대해서는 관대하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한용운이 중일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는 것은 망각시키고 ‘님의 침묵’만을 조명하는 결과를 낳았고 서인식의 글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역사 철학자들의 세계사 문제를 읽지 못하고 오로지 친일의 저술들로만 판단하는 오해를 만들어 버렸다.그런데 이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가진 태생의 한계이다. 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다. 제국주의는 자신의 식민지에 제국의 근대를 이식하고 이는 식민지가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근대에 진입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는 근대성과 식민지의 근대가 가지는 특수성은 동일한 논리 위에 존재한다.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대하여 이중성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억압, 통제를 의미하는 제국주의는 식민지가 보편적 세계 질서 속에서 근대를 체험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 체험은 자주적신도가 가진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단군의 후예는 천황의 자손이란 말로, 반만년 유구한 역사는 만세일계의 형통으로, 홍익인간은 팔굉일우와 치환이 가능하다. 식민지의 근대성이 가지는 모습은 이런 것이다. 일본이 국민들에게 민족정신을 심기 위해서 천황과 신도를 이용한 것과 나철이 조선인들에게 민족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단군을 재발견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것은 적대적 상관관계의 좋은 예이다.천황의 만세일계 주장과 단군의 후예를 말하는 것이 닮아 있다는 주장에 펄쩍 뛰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은 대동소이한 논리라는 것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 일본이 말하면 거짓이고 전쟁의 논리이고 우리가 말하면 유구한 역사와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되는가? 때리는 자의 민족주의는 나쁘고 맞는 자의 민족주의는 심정적으로 동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국사라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식민사관의 극복은 중요하다. 그것은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방식이 식민사관이 세워지는 방식과 결국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에는 왜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가? 우리가 우리만의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역사를 말하는 것에는 일본이 일본에게 유리한 방식대로 역사를 재단하고 횡단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역사를 그 자체의 진실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근대 이후에 생겨난 일국적인 국민국가의 경계 속에서 역사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되고 날조된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정당한지를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일본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에게 한국의 국정교과서를 본받으라고 촉구한 산케이 신문의 사설은 이러한 국사를 둘러 싼 논의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에 대해서 통렬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다시 식민지 시대에 발현한 민족주의에 돌아가 보자. 일본 제국주의가 가져온 서구의 사상들은 조선을 압박하는 무기가 되었지만 역으로 그것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 반발하는 사상적 무기가 되기도 하였수 있다. 이 중 민족주의 계열은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세계사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측면이 많이 보인다. 반면 사회주의 계열의 역사철학자들은 비록 각자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보편적 질서로 다가오는 세계사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근대사 경험은 명실상부하게 유럽세계사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만남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하여 행해졌다.) 이러한 유럽세계사와 일본의 세계사 사이에서 착종된 상태의 조선의 세계사 인식은 다양한 범주로 갈라졌다. 여기서는 그 중 마르크스와 교토학파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에서 전개되어 갔던 세계사 인식과 내선일체론자들의 인식을 살펴보겠다.우선 내선일체론자들 중 김구 선생의 친일파 명단에도 등장하고 있는 현영섭은 ‘일본은 국가 중의 국가, 국가 위의 국가, 세계국가로서 어두운 밤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세계 인류의 광명이 된다...(중략)...우리들은 일본국가의 세계사적 사명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현영섭은 일본이 보편적 유럽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빛이 될 것이며 우리 조선인은 그에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창기 등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는 이러한 주장은 조금 더 비교 검토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세계사적 사명을 제국주의의 침략 노선에 결부지음으로써 친일파로 비판받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또한 인정식 등은 일본의 동아협동체론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조선이 병참기지화 되는 것을 반기고 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주장을 친일 내셔널리즘이라 하여 이미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되어 버린 이상, 그 속에서 일본 다음가는 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공업 건설을 독려하고 종국엔 참정권을 따내어 조선인이 받는 멸시를 떨쳐 버리자는 주장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조선인은 일본인화 되어가고 이것이야말로 제국주의자들이 바라는다.)
'간접투자 쑥쑥' 주식형펀드 40조 돌파[경향신문 2006-07-04]“부동산-예금서 주식 간접투자로” 국민자산구조가 바뀐다 [동아일보 2005-7-18]목 차간접투자의 의의 간접투자기구의 관계회사 간접투자와 직접투자의 비교 펀드에 가입하려면? 펀드의 종류 펀드의 종류별 기간 수익률(1) 펀드의 종류별 기간 수익률(2)8. 펀드 유형별 3년 성과 우수 펀드 상품 유형별 위험과 수익간 관계 펀드 투자시 유의점1. 간접투자의 의의(1)개념 : “간접투자”라 함은 투자자로부터 자금 등을 모아서 자산에 운용하고 그 결과를 투자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을 의미1. 간접투자의 의의(2)2. 기능 자금의 중개 기능 증권시장의 안정화 증권의 대중화 및 다양한 저축 수단의 제공1. 간접투자의 의의(3)3. 특징 다수의 자금으로 공동 투자 전문가에 의한 대행 투자 대규모 자금에 의한 분산 투자2. 간접투자기구의 관계회사(1)자산운용회사 투자신탁의 설정,해지 투자신탁재산의 운용 및 운용지시 투자회사재산의 운용 자기가 운용하는 간접투자증권 판매 일반 사무관리업, 투자자문업 겸업2. 간접투자기구의 관계회사(2)2. 판매회사 간접투자증권의 판매 간접투자증권의 환매 수탁 및 자산 보관회사 4. 일반사무관리회사3. 간접투자와 직접투자의 비교4. 펀드에 가입하려면?1.판매회사방문 증권사,은행,보험사 등2.판매회사에서 펀드 상담 펀드종류, 특징에 대한 설명3.가입대상 펀드 선택 투자목적, 투자기간 등 고려4.설명서를 읽은 뒤 자필서명 가입펀드에 대한 상세내용 파악5.거래 계좌 개설, 자금 입금 실명확인 가능한 신분증 지참6.가입 완료 수익률 변동 등 수시 확인5. 펀드의 종류다양한 성격의 펀드에 분산 투자다른 펀드재간접펀드수익권 및 출자지분특별자산펀드선박,석유,금실물펀드환금성에 제약이 따르지만 장기투자를 통한 안정적 수익 추구부동산부동산펀드파생상품을 통한 구조화된 수익 추구선물, 옵션 등파생상품펀드수시 입출금이 가능단기금융상품MMF안정적인 수익 추구채권에 60%이상채권형채권투자의 안정성과 주식투자의 수익성을 동시 추구주식에 60%이하혼합형고위험, 고수익 추구주식에 60%이상주식형 (성장형)증권 펀드펀드 특징주된 투자 대상구분6. 펀드의 종류별 기간 수익률(1)자료: 한국 펀드평가11.16%7.25%3.96%2.07%1.05%0.35%MMF13.24%6.97%5.27%2.46%1.29%0.28%채권형23.98%17.78%6.40%1.95%3.09%1.52%채권혼합형35.74%27.81%7.43%1.48%5.00%2.85%주식혼합형81.24%67.13%11.22%1.21%7.39%3.43%주식형3년2년1년6개월3개월1개월펀드유형[기준일: 2006년 11월 17일]7. 펀드의 종류별 기간 수익률(2)8. 펀드 유형별 3년 성과 우수 펀드86.07.672003년 7월한국운용한국부자아빠엄브렐러인덱스파생상품90.796.762001년 10월CJ운용CJ비전포트폴리오인덱스파생상품93.67.452002년 1월한국운용한국부자아빠인덱스파생상품인 덱 스 형14.511.432003년 1월대투운용스마트중장기채권I-316.131.312003년 11월대투운용클래스원장기채권S-116.621.352003년 10월도이치운용도이치코리아채권1-1클래스A채 권 형119.328.62003년 11월미래에셋자산미래에셋드림타겟주식형125.147.582001년 2월미래에셋자산미래에셋인디펜더스주식형1137.899.312001년 7월미래에셋자산미래에셋디스커버리주식형주 식 형3년3개월수익률설정일운용사펀드유형9. 상품 유형별 위험과 수익간 관계10. 펀드 투자시 유의점(1)원금 손실도 가능 투자자들은 뮤추얼 펀드가 100% 자기책임아래 투자하는 실적 배당상품임을 알아야 함 (펀드는 예금상품과는 달리 예금자보호를 적 용받지 않지때문에 원금손실도 가능 따라 서 판매자는 원금손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수 익자에게 충분히 사전고지할 의무가 있음)10. 펀드 투자시 유의점(2)2. 투자자별로 개인성향을 고려 - 간접투자 때는 투자목적을 분명히 해야 함 - 주식투자 비중이 높은 공격형 펀드를 택할지 채권투자 비중이 큰 안정형 펀드를 고를지도 펀드 투자전략을 체크 - 해외주식에 투자되는지, 주식과 채권·선물·옵션 등에 대한 투자배율은 어떤지 고려 - 자기가 가입하고자 하는 상품이 스팟형 펀드인지 아니면 인덱스형 펀드인지도 확인10. 펀드 투자시 유의점(3)3. 투자와 관련된 비용도 고려 - 수수료와 세금도 고려 - 중도환매가 어렵다는 점도 감안 (현재 뮤추얼 펀드는 모두 폐쇄형이라 중도에 환매가 불가능)참고문헌경향신문 2006-07-04일자(인터넷) 동아일보 2005-7-18일자(인터넷) 동아일보 2006-11-18일자 B3면 금융자산관리사V권-금융상품비교분석-{nameOfApplication=Show}
“국민국가, 동아시아, 제국을 넘어”를 읽고1. 서론“국민국가, 동아시아, 제국을 넘어”에 나온 8편의 논문 및 강연 원고, 그리고 인용 등은 매우 흥미 있고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용어라든가 개념 등이 생소한 것도 있어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전쟁을 확대함에 따라 나타난 서구의 보편성에 대항하는 ‘동아’라는 개념의 최초의 구성,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과 대응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초반부의 글들을 지나면 친일과 반일에 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시선들에 관한 글이 나오고 전후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 나타난 국민국가들의 문제에 대한 글이 나온다. 마지막으로는 야스쿠니에 대한 책을 인용함으로서 “동북아 시대와 일본”에 대한 생각을 기존의 민족주의적인 시선에서가 아닌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라보려는 의도와 그 역사적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실제로 현재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등으로 대표되는 이 동북아 지역은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영유권 분쟁이라든가 역사 전유의 문제 등은 이미 몇 년이 지났어도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고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미국, 러시아는 물론 세계의 관심이 이 동북아 지역에 향하고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민족주의적인 방법에 기초한 국민국가들간의 논리는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 동안의 패러다임과 헤게모니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탐구가 절실한 상태이다.이 책에서는 이러한 후기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입각한 지금까지의 학문적 방법을 각자의 방법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활로 찾기나 그 대안의 제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여러 글들이 있는데 이 글들에 대한 내 나름의 생각이나 소감 등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2. 본론이 책에 나오는 논문을 한 번에 요약하기는 각 탈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세계사 담론의 전개가 가능하게 된 요인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세계사 담론을 통해 근대 조선에 있어서 세계사의 존재는 무엇이었으며 해방 이후 세계사를 어떻게 말해왔는지를 조명함과 함께 지금까지 이러한 측면에서 조명되어 오지 못한 한국의 근대성에 관해 새롭게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럽세계사’와 ‘세계사적 세계’ 사이에서 근대 조선이 어떻게 굴절된 세계사와 만나왔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우선 서인식을 예로 들며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어떤 세계사적 과제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그의 주장을 말하고 있다. 서인식은 세계사 속에 동양을 포함시킴으로서 일원적인 세계사의 공간을 다중심적 세계사로 확충하고 또한 그 다중심적 세계사가 각기 역사적, 문화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독립체로서 그 ‘역사적 자기’의 내용을 혁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부터 일본이 종래의 세계사를 대치하는 현대 일본의 세계사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동아협동체론도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 의의를 가진다고 하고 있다. 서인식은 니시다 키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세계의 다중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니시다와는 달리 주체와 주체의 투쟁, 혹은 민족투쟁의 역사라는 ‘횡의 세계에서 종의 세계’로의 전개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니시다의 ‘만세일계’에 근거한 시간적 세계의 공간적 세계로의 확장은 서인식에겐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그러나 신남철은 서인식과 달리 니시다의 시간적 세계의 공간화를 극찬하고 있다. 그가 이 니시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바로 ‘일본정신’이나 ‘일본적인 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여기는 문화본질주의적 자세에서 그 공통점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교토학파내의 좌파 지식인인 미키 키요시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세계자본주의의 국제성 영역에 일본이 이미 진입했다는 사회적 발전을 근거로 일본의 사상계를 높이 평가하면서 미키를 비판하고 각한다. 하지만 이진경은 당시의 상황에서 이 방식 역시 목소리를 잃어 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저러한 철학적 문제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 할 힘이 없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 해결을 주장한다는 것에 있었다. 철학적, 자본주의적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양점 이었고 식민지 인민이 그 지양점에 서서 구체적인 보편자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피지배층의 입장에선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한 일이었다.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연대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는가? 이것을 수용하면 자신의 형체를 사라지게 하고 부정하면 더 이상 반론을 내놓을 수가 없는 정치적, 사상적 입장에서 식민지 인민들은 어떻게 해야 했는가? 여기에 대해서 이진경은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들을 그 대응의 방식으로 들고 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두 가지의 대응방식을 찾아낸다. 이진경은 김사량의 소설 ‘풀 속 깊숙이’에서 요구나 규칙을 과도하게 따르는 상황을 우습게 설정하여 동아신질서론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한낱 희화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전략을 발견하고 이를 인정식 등의 모방의 전략에 비해 식민지배자들의 당혹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좀 더 적극적인 내파의 전략이라고 하고 있다. 또 한설야의 소설 ‘대륙’에서 순진무구한 동아신질서에 대한 믿음, 아시아 주의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일본이 이 새로운 연대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횡단의 전략을 발견하고 서인식 등의 이탈의 전략이 서구의 보편성을 주체의 자리로 빌리려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동아시아 그 자체를 보편적 주체의 자리로 빌리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가고 있는 전략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있다.지금까지 이진경이 설명한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동아신질서론에 대한 네 가지 대응방식을 살펴보았다. 이진경은 모방의 전략보다는 내파의 전략이, 이탈의 전략보다는 횡단의 전략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내파의 전략도, 횡단의 전략도 모두 마찬가지로 한계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고구려를 그리는 마음이나 최남선이 만주를 꿈꾸는 것에는 제국주의의 흔적과 배타적 민족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과 대조영이 당나라에 맞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현대의 대한민국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당당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가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됨을 상상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여기에는 중국과 한국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에 대한 공격적인 시선과 문화사적 동아가 아닌 정치적 동아만이 그 곳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고구려 역사와 고구려 땅을 왜 중국이나 대한민국이 전유하려 하는가, 죽은 고구려 사람들을 왜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에 편입시키려 하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고서는 동북공정은 바르게 해결 될 수 없으며 그 바른 해결의 실마리가 최남선의 제국의식과 만몽문화론에 담겨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본다.(2) 친일, 반일의 이분법우리의 마음속에 친일이란 무엇인가? 요즘은 조금 덜한 것 같긴 하지만 주변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나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주변에서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본다. 일본 게임을 좋아하거나 만화, 영화, 음악 등의 문화적 부분을 즐기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친일파’라는 거북한 호칭을 듣기 일쑤다. 나도 일본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로 오해를 받거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같은 과 선, 후배들도 흔히 주변에서 ‘넌 일본이 좋아서 일본학과에 갔니?’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대답하기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일본학이 좋다고 하면 상대가 마음속에서 ‘친일파’라고 느낄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지 일본과 관련된 점이 있다는 것만으로 듣게 되는 ‘친일파’라는 용어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욱이 사람들의 내면 속에 일본이라는 존재가 조금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일본 만화나, 영화, 게임 등을 즐겁게 즐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내 안에는 일본의 영향이 조금도 나도 역사철학자들의 일차자료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렇다 해도 사후적인 평가로 “‘동아협동체론’이 결국 제국주의의 침략 이데올로기였으므로 그에 관련한 역사철학자들의 대응도 그 외에 무엇의 가치도 가질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민족의 억압 하에 있던 상태에서 ‘동아협동체론’에 대한 담론이 조선민족이 자체적으로 모순을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었다는 생각 또한 사후 언설적이고 단순한 생각이라는 느낌이 든다.민족이 그 내부에 여러 모순과 오점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저항의 근거지가 되고 희망의 근원이 되는 것이란 윤건차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 할 수 있다. 식민지하의 피억압민족에게 민족운동과 민족해방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귀중한 의미를 지니고 때로는 최대의 투쟁목표, 획득목표가 된다는 것도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민족이란 것이 식민지하에서 세계, 근대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발현되는 것이라 볼 때 당시 지식인들의 여러 모습들을 민족에 최대의 기준을 부여하고 보는 것이 과연 역사를 바르게 평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인가라고 되묻고 싶다.윤건차는 식민지성과 근대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근대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또한 식민지성의 폭력과 통제 등의 억압적인 역기능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성을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근대성의 다양한 발현 형태의 하나이고 지배, 억압에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긍정, 부정의 양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조선지배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부정적인 측면이 강화되어 갔고 식민지성과 근대성 중에서 식민지성이 점차 부각되어 간 것이다. 이런 윤건차의 시각은 조선의 지식인이나 민중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하고 가담한 것이 근대성이 식민지성으로 변질되어 간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대성은 친일과 반일 양쪽에게 동시에 다가갔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조선의 지식인이 가졌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