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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뢰벨의 교육이론과 현대에 미친 영향
    -목차-1. 프뢰벨 교육이론의 배경2. 프뢰벨의 교육목적3. 교육원리방법4. 프뢰벨의 교육사적 의의와 후세에 끼친 영향5. 프뢰벨의 현대적 이해6.비판점-프뢰벨의 교육사상과 현대교육의 시사점-1. 프뢰벨 교육이론의 배경당대의 철학은 이상주의 철학의 최전성기였으며 자연철학과 자연과학이 분리될 수 없었던 시기였다. 또한 페스탈로찌의 교육이념이나 방법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만 페스탈로찌의 계몽주의적, 현실주의적 경험과 프뢰벨의 낭만주의적, 관념론적 사변과의 사이에서 생긴 기본적인 인식에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유럽의 정신적 파동을 일으킨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낭만주의 운동은 문학, 철학 등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육사상에까지 크게 작용하였는데 인간형성이라는 넓은 의미의 교육을 정립하게 함으로써 교육적인 사고와 교육제도상의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하였다.2. 프뢰벨의 교육목적프뢰벨은 인간을 이미 태어날 때부터 어떤 독자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 그가 말하는 신-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으로서 신의 본직을 지닌 존재로 보고 있다. 모든 것은 신적인 것, 또는 신으로부터 나오고 신적인 것 혹은 신에 의해서만 제약된다. 인식하는 존재, 이성을 갖는 존재로서의 특수한 사명, 특수한 직분은 인간의 본질은, 인간 속에 있는 전적인 것을, 따라서 신을 더욱이 인간의 사명과 직분 자체를 충분히 인식하고 명확하게 통찰하는 것, 다시 그것을 자신의 결정과 자유로서 자기의 생명 속에서 실현하고 활동시켜 구현하는 것이다. 왜 인간은 신적인 것을 인식하여야 하고, 신적인 것을 실현할 것을 사명으로 하는가, 프뢰벨은 이에 대하여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모든 것의 존재 근원 또한 '신'이기 때문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 하에서 교육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프뢰벨의 교육에 대한 견해에서는 일차적으로 내적인 것의 인식과 실현, 즉 신적인 것의 실현을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타고난 본질이 왜곡되지 않도록 방해되거나 간섭되어서는 안된다.두 번째로 프뢰벨의 교육에 대한 견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추종적인 교육에서 규정적 교육으로의 전환, 나아가 이들 양자의 결합이다. 그러나 프뢰벨은 추종적 교육과 규정적 교육만으로 인간의 교육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들 두 교육이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 쪽의 것만 강조하게 될 때는 참된 교육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착한 교육, 올바른 교육, 참된 교훈에 있어서는 필연성이 자유를, 법칙이 자기 결정을, 외적 강제가 내심의 자유의지를, 외적 증오가 내심의 사랑을 환기해야 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엄격함에 의하여 가혹과 반항과 불신을 낳는 곳에서는 모든 교육 즉, 교육, 교수, 교훈의 작용은 모두 파괴당하고 만다.이상에서 살펴본 프뢰벨의 추종적 교육, 규정적 교육 그리고 이들의 통일이라는 교육에 대한 견해는 놀이의 중요성과 의미를 밝히는데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프뢰벨은 인간 발달 단계 중에서 특히 이른 시기의 발달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이 이른 시기의 발달과 관련하여 이들 견해가 주는 시사가 크기 때문이다.프뢰벨은 구체적으로 인간 발달 단계를 유아, 유년, 소년, 청년, 노년으로 구분하고 각 단계는 서로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침투를 해 가면서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유아기를 "주로 다만 살아가기 위한 것뿐인 생명의 단계 내지 생명 그 자체의 단계, 내적인 것을 바깥에 나타낸다는 것을 주로 하는 단계, 그리고 소년기를 주로 외적인 것을 내면화하는 단계, 즉 학습의 단계"라고 밝히고 있다. 이 발달단계의 특징에 따라서 추종적 혹은 규정적인 교육이 그리고 이들이 결합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프뢰벨이 주장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에 따르는 추종적인 교육을 위주로 하는 교육, 이는 독자적인 능력, 신적인 본질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에 기초한 것이지만, 교육의 출발점을 인간의 내적인 필요와 요구에 두어야 한다는 접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3. 교육원리방법(1) 통일의 원리 : 만유내재신론의 입장에서, 모든 만물은 모순, 분열, 투쟁이 아니고 조화, 통일,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신성은 곧 창조성, 활동성으로 자유로운 교육, 자기활동, 노자활동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다.(2) 자기활동의 원리(자기표현의 원리) : 신성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타율적, 간섭적인 교육은 거부되어야한다. 자기활동이란, 자기 자신의 동기에 의하여 결정 되고, 자기 자신의 흥미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하여 지지되는 것이다.(3) 놀이 및 작업의 원리 : 작업적 놀이는 은물(아동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여러 가지 형태를 구성하는 탁상놀이이다. 은물을 통해 감각기관을 훈련하고, 우주의 이법을 깨닫고 신성을 인식하는 것이다.(4) 연속적인 발달의 원리 : 인간의 성장은 각 단계에 있어서 끊임없는 연속이며 단절이나 비약을 없다는 것이다. (이 교육원리는 Dewey의 교육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4. 프뢰벨의 교육사적 의의와 후세에 끼친 영향첫째, 유아교육의 본질을 재정립했고, 유아교육은 부녀자의 사명이라는 생각에서 부모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둘째, 사랑을 전제한 모성애적 보살핌에 의해서 유아의 생활은 유지될 수 있으며, 유아양육은 모성애적 본성의 발휘에서 가능하다고 했다.셋째, 몸, 마음, 정신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여 전인교육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넷째, 유희를 자기 표현의 가장 가치 있는 교육으로 생각하여 놀이와 게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다섯째, 아동교육은 그들의 활동, 욕구, 흥미에 의거하여 자유롭고 자발적인 성장과 타율적 강제가 아닌 자율적, 자발적인 계발을 중시하였다.
    교육학| 2008.09.04| 4페이지| 1,000원| 조회(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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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운 최치원의 삶, 참여냐 은둔이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참여냐 은둔인가?’....최치원의 삶 속에서 찾아본 그의 고뇌■당시의 시대적 상황최치원이 살았던 시기의 시대적 상황은 신라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닌, 당시 최고의 세계 제국의 면모를 당나라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최치원이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 있었던 17여년간, 당나라는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다채로운 문화가 모여드는 대제국의 영화는 지속되지 못하고 현종과 양귀비의 사치로 인해 당제국의 기강은 문란해져 있었다. 이를 노린 절도사 안록산의 난으로 시작되어 사사명의 난)에 이르기까지의 지속된 반란으로 정치?경제가 약화되면서 왕권은 권위를 상실했다. 게다가 당 말엽에 이르러서는 당쟁과 지방에서는 황소의 난으로 왕조의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당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온 후 보게 된 신라의 상황 또한 당나라 못지않게 혼란기에 직면하고 있을 시기였다. 이미 신라 사회는 수차례 왕위 쟁탈전으로 왕위 계승에 있어 적자 계승의 원칙이 무너짐에 따라 지도층의 권위가 무너져 있었으며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인한 기강의 문란, 지방 호족의 성장과 이중수탈로 인한 농민 반란으로 사회질서는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여러 문제에 따른 지배계층의 약화와 더불어 ‘골품제에 의한 인재등용 방법’이 사회 지배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한 것도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고운 최치원 - ‘당대 최고의 엘리트, 영원한 이방인’-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고운 최치원은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자는 고운, 해운이었다. 그는 6두품 집안 출신으로 대대로 문장과 학문에 능통하여 이름을 얻었으나 능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신라의 골품제도에 의한 관직진출에 대한 엄격한 신분적 제약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부친 최견일은 촉망받는 소년이었던 최치원을 조기 유학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남들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하였다”입당 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노력한 결과 입당 6년만인 894년 9월에 최치원은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합격 후 876년에 율수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조세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현위를 사직하고 입산을 결행하였다.-학문탐구의 이상향과 현실적 괴리감 사이의 갈등당장의 목표는 고급 관료를 선발하는 박학굉사과에 응시하는 것이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공부를 지속해 나가기가 여의치 않았다.당시 세력자인 고운에게 보낸 글 중 〈문을 닫고 쓸쓸히 앉으면 자리는 차고 창 틈으로는 눈발이 스쳤다. 붓은 마르고 벼루에는 얼음이 얼었다... 객사에 들기가 죽기보다 싫으니 생계를 어찌합니까...>며 자신의 처연한 심경을 토로하였다.-이방인의 격황소서(檄黃巢書-황소에게 보낸 격문)마침내 최치원은 박학굉사과 응시를 포기하고 고변의 휘하에 들어가 황소 토벌에 나선 고변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문장실력으로 파격적 대우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문서작성을 맡았다. 유명한 격황소서도 그에 의해 작성되었다.-이방인 최치원의 갈등당에서의 대작생활에서 당인의 사고방식과 문화로 생각하는 경향은 최치원에게 큰 갈등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였어도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고 이에 따른 민족적 자긍의식의 손상 및 고국에 대한 향수가 귀국을 결심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귀국 후 맞닥뜨린 현실의 벽최치원은 귀국 후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에 임명되어 문서작성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귀국한 이듬해 그가 당에서 지은 계원필경집, 중산복궤집. 시부 등을 왕에게 바쳤으나 고국의 현실은 냉랭하여 그는 지방의 태수직을 전전하였다. 30대에 접한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던 것이다.-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상소와 실의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지방 호족세력의 강성, 농민의 반란 등으로 국운이 어렵게 되자 혼란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아찬의 벼슬을 받게되나, 귀족의 반대로 개혁의지를 담은 시무 십여조는 시행되지 못했다. 이미 신라는 스스로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정책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에 최치원은 실의에 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은둔 생활의 시작그의 은둔 연대는 분명히 밝힐 수 없으나 풍류적 생활 후 가야산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풍류적 생활을 했던 곳으로는 경주 금오산,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고령 벽송정, 안동 청량산 등이다.■고운 최치원의 사상관 - 풍류도(風流道)유·불·도의 융합(삼교병행론)“나라의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교를 창설한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사실 그것은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하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요도를 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뜻이요, 무위의 일을 처리하고 불언의 가름침을 행하는 것은 주계사(노자)의 종지요,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받들어 하는 것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이다.”삼교가 융합하여 풍류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풍류라는 도가 군생을 접화하는 가운에 나타나는 가르침의 모습이 교화 각각의 교지와 같다는 뜻이다.고운은 풍류도의 실상을 사상적으로 해명하는 한편 이 픙류적 삶이라는 현실을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자적하는 풍류적 삶의 자세는 그의 생애 중 후반기 경에 두드러진다. 그는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세속에 대한 여운이라든가 애착을 벗어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풍류적 삶의 태도는 그가 지은 여러 시에서 풍류를 소재로 한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참여냐 은둔인가’라는 명제에 대한 나의 생각최치원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유학?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걸출한 문장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입신양명을 향한 의욕도 만만치 않았던 인물이었다.
    인문/어학| 2008.09.04| 4페이지| 1,000원| 조회(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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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대 신사층의 발달과정
    -목차-Ⅰ.서론Ⅱ. 본론1.신사의 개념2. 신사의 성립3. 명대의 국가권력과 신사1)사회변화와 신사2) 신사의 사회?경제적 역할4. 청대의 국가권력과 신사1) 명?청 교체기의 신사2) 청조권력과 신사Ⅲ.결론▶참고문헌◀Ⅰ.서론근대 이전의 중국역사에서 사회의 발전과정에 나타난 국가의 기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이면에는 각 시대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윤활유적인 역할을 한 계층이 있었다. 중국 역사상 진?한시대에는 호족이, 위진남북조, 수?당시대에는 문벌귀족이, 송대에는 사대부가, 명대 중엽 이후부터 청)나라 말에 이르는 시기에는 신사(紳士)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때문에, 신사의 다양한 역할과 존재형태는 명?청시대의 통치형태와 사회구조를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데 중요한 지표로 인식되었다. 동아시아의 맹주국임을 자처하며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기치로 명나라와 청나라는 그들만의 통치방식으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통치와 지배가 가능하게 했던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동아시아 정치질서를 주도하였던 명?청시대의 신사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Ⅱ. 본론1.신사의 개념신사는 과거제와 학교제 그리고 연납제를 매개로 하여 국가권력으로부터 어떤 자격을 받아, 관위와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는 계층을 말한다. 이들은 관직 경력자와 예비 관인층을 포함하고 있는 명?청대의 지배계층이었다. 여기서 '신(紳)'은 '허리띠'라는 의미로 고급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자나, 혹은 관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즉 이들이 허리띠를 착용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士)'라는 말은 학생이나 학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는 사민가운데 으뜸이고 지역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다. 모든 민들은 그들이 성인의 말씀을 알고 관학에 입학해있다는 점을 인정하여 사를 존경하고 섬기며 또 이들 사의 언행이 모든 民들의 모범이 될 수 있기에 그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다." 라고 『흠정학정하는 행동도 전개하였다. 학위층은 유교적 교양과 이념을 체득한 관료예비군이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대부였다. 또 그들은 국가로부터 9품관에 준하는 특권을 보장받은 특권층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관인층으로의 상승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또 국가로부터 받은 특권이나 사회 일반의 인식 및 사회적 지위에서 보면, 학위층은 관직경력자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계층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평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평민과 동류이기를 부정?거부하는 행동을 많이 하였다. 그들이 가끔 평민편에 서서 평민의 여론을 대변하거나 심지어 농민반란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그들이 평민인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통하여 사대부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공의식에서 발로된 행동일 뿐이었다. 향촌에서 학위층간에 존재한 강한 동류의식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민감한 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학위층의 계층의식, 행동양식, 혹은 제도적?실제적 지위 등을 고려할 때, 명대의 학위층을 중국사회의 독특한 사회의 중간계층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명 중기 이후의 사료에서 많이 보이는 ‘신금’ 혹은 ‘신사’라는 용어의 개념에는 분명히 관직경력자층인 신과 학위층인 사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직경력자와 학위층이 하나의 사회계층, 즉 신사로도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제도적?현실적 지위가 현저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과 사가 신사로 연칭될 수 있었던 계기는 첫째, 이념적인 면에서 미입사 학위층에게도 사대부로서의 자아의식과 공의식이 있었다. 그들이 비록 사리를 취하는 예도 많았으나, 그들의 명분적인 이상은 사리추구가 아니고 정치에 참여하여 유교적 이념과 대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면에서는 관직경력자와 학위층은 유사하였다. 둘째, 명 중기 이후 성행하게 된 서원에서는 그 강학과정에서 학문의 토론뿐 아니라 정치비판도 행해졌다. 강회에 참여하는 관직경력자와 학위층은 현실적인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 동지로 불렀으며 그 과정에서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3. 명대의 국가권력과 신사1)사회변화와 신사명초에는 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자작농을 기반으로 하는 이갑제 질서를 통하여 향촌질서가 유지되었고, 새로이 등장한 미입사 학위소지자나 기존의 관직경력자는 모두 이갑제 질서내에 별다른 문제없이 융화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부터는 정치?사회적인 변화가 현저해졌다. 대외적으로는 북변과 동남해안이 불안해졌고, 대내적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정치질서가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농업과 수공업 등 각 분야에서 생산이 증대되어 갔으며 지역간에 상품생산의 분업도 진전되었다. 각 지역의 상품은 객상에 의해서 전국적인 규모로 형성된 유통망에 의하여 교류되었다. 그 결과 상품?화폐 경제가 농촌 깊숙이 침투되었다. 조세와 요역은 점차 증가하면서 은납화 되어 갔다. 조세와 요역의 은납화는 농민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되기도 하였다. 소수의 신사나 세호가는 농토를 새로 개간하거나 기간지를 겸병하는 등의 방법으로 광대한 토지를 집적하면서도, 국가가 그들에게 부여한 요역우면특권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조세와 역을 부담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감된 부분은 다른 이갑호에게 전가되었다. 이와 같은 토지편중과 세?역의 회피와 각종 재해, 질병, 등이 빈발하여, 마침내 이갑호 뿐 아니라 이장 등 대지주마저 몰락하는 사례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 종래 이장, 이노인을 중심으로 하여 유지되어 오던 향촌의 질서와 재생산유지기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러한 이갑제 질서의 혼란기에 미입사 학위층의 수가 급증하였으므로, 기존의 관인층과 함께 증가한 학위층이 누리게 된 특권과 영향력만큼이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신사와 비특권 이갑호간의 부담의 격차는 더욱 커졌고, 그 결과 신사의 사회적 지위는 한층 돋보이게 되었다. 더구나 신사는 그들이 가진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따라 세금의 면제도 가능하였다. 비특권 지주들은 과중한 조세와 요역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하여,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스스로 학위층 이상의 신사을 용인하고 그 힘을 이용함으로써, 사회질서와 국가지배를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2) 신사의 사회?경제적 역할명조의 정치?사회질서가 약화되어 가고 이장, 이노인을 근간으로 한 이갑체제의 질서유지 기능 또한 점차 약화되어 이갑제질서가 해체되어 가던 바로 그 시기부터,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신사였다. 이들 신사가 향촌에서 질서유지 기능의 공백 부분을 대신 담당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신사의 협조 없이는 향촌의 질서유지가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국가권력이 신사의 사회적 지배력에 의지하고 신사는 이를 배경으로 그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국가권력과 신사의 상호의존 구조가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명 중기 이후 향촌에서 신사의 역할은 크게 3가지로 유형화해 볼 수 있다. 첫째, 질서유지 역할로서 신사의 공의식과 위기의식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향약?보갑제의 운영, 향촌방어, 향촌내의 대소분규에 대한 재판?조정, 재해?질병 발생시의 구제활동 등에서 신사는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둘째, 경제적 역할로서 신사는 특권을 이용하여 대토지를 집적하거나 요역을 면제받았다. 개인의 영향력 혹은 관과 연결하여 수리시설도 장악하였다. 도로, 교량 등을 사점하거나 시장을 개설하고 고리대를 경영하며, 객상에게 자본을 공급하여 밀매나 해상밀무역에 참여하고 수공업 경영에 간여하는 등 시장이나 상품유통 구조를 지배하였다. 셋째, 문화적 역할로서 신사는 향촌에서 개인의 영향력 외에도 향약?서원 등의 강학 등을 통하여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고 그들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신사는 또 향론을 주도하였다. 화남지방에서는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향신공의’, 사인공의, ‘신사공의’ 등이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곧 신사의 향론지배를 뜻하는 것이다. 신사는 또 지방장관의 유임 혹은 축출운동, 세?역 감면운동, 각종 수리시설의 수축 혹은 재해?질병시 구제 등 광범한 문제에 대하여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였다. 종래 이갑제 질서를 통해 수행되던 역할을 신사가 대행하게후 정복전선을 확대시키면서 점차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자성, 장헌충 등의 반란세력과 남명정권에 대한 정복전 외에도, 일단 점령한 지역의 질서유지도 극히 어려운 실정이었다. 각 지방에서 청조권력의 지방침투를 보좌해 줄 수 있는 우익세력의 확보가 절실하였다. 순치제의 즉위조에서 한인 신사의 기득권과 재산보호, 관리에의 임용, 과거?학교 등 명대 제도의 답습, 정규의 세?역 외의 일체의 징수 금지 등을 약속한 것은 한인 신사를 체제내로 포섭하려는 의도였다. 그 결과 청조는 항복한 지방관과 명군 그리고 신사의 힘을 빌어 전선을 확대하고 점령지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한편, 이 때 각 지방의 사정은 조금씩 달랐다. 먼저 하북과 산동지방의 신사의 입장은 참으로 절박한 것이었다. 이자성군과 청군이 연이어 들어왔을 뿐 아니라 유구?토적 등의 활동으로 인하여 사회는 무질서 상태하에 놓여 있었으므로, 신사의 사적인 자위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사로서의 특권은 고사하고 생명과 재산의 보호가 더 절실한 문제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청조는 신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모든 것을 보장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당시 팔기병의 위세로 보아 그러한 약속도 가능해 보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청조권력은 한인신사를 포섭하고 신사는 청조에 협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자의 상호의존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화남지방의 사정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강남 지방에서 대대적인 반청항쟁이 있은 후에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안정된 듯 보였다.한편, 강서?복건?양광?호광 지방에서는 남명정권과 이자성, 장헌충의 패잔병까지 가세한 항청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배경에는 다음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하였다. 첫째는 전선의 확대로 인하여 청군의 수가 항청세력에 비하여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세였다. 항복한 명군을 편입시킨 청군은 군기도 없고 군량도 부족하였으므로,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토착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다. 둘재는 남명정권의 존재 때문에 고향으로 귀환했거나 피난해 온 신사들이 명었다.
    인문/어학| 2007.12.16| 8페이지| 1,500원| 조회(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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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정척사사상의 이론과 전개과정 및 의의
    -목차-1.조선 말 시대적 상황2.위정척사사상의 대두3.화서학파-위정척사론의 이론적 체계화4.위정척사운동의 전개5.위정척사운동의 의의와 한계1.조선 말 시대적 상황19세기 말 조선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다. 밖으로는 빈번한 서양열강들의 침략, 안으로는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로 인하여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이 한계에 이르러 민중들의 봉기로 이어지는 국내외적으로 큰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자강을 위해 힘썼던 사상가들이 있었으니, 바로 개화사상가와 위정척사사상가 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국가 존립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상은 그 사상적 특성과 방법적 모색에 있어서 상이함을 가진다.우선 개화사상은 서구의 과학기술과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위한 구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들은 개항을 통해 서구질서와의 결합에 의해서 전통적인 전제왕조 체제를 극복하고 입헌적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다. 그러기 위해 갑신정변, 갑오개혁이라는 역사적 개혁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으나, 결국 열강들의 이권다툼 속에서 실패하게 되었다.이러한 개화 사상가들의 근대화개혁의 노력과는 반대로, 반외세 저항을 우선으로 하는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내수외양으로서 서구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는 것을 우선 조건으로 부패한 국가기강을 바로 잡으며 조선 왕조의 전통적 체제를 보존하자는 것이었다.하지만 극명하게 나뉘는 두 가지 사상은 그 궁극적 목표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들이 가진 궁극적 목표는 ‘국권수호’로써 그 비판의 대상을 정부로 삼았다는 것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들이 내놓은 방법이 ‘개혁’이냐 ‘저항’이냐의 차이일 뿐 다분히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둔 애국적 행위였다. 이렇듯 궁극적 목표에 있어서의 합일점이 존재하여서인지 1880년대 초까지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사상은 1890년대 이르러 사상적으로 접근하여 국민계몽과 실력양성의 방향으로 민족운동을 함께 추진할 수 있었다.위정척사사상, 개화사상의 중간에 위치하며 민중세력을 이끈 ‘동학사상’ 또한 개화기에 있어 중요한 사상이다. 이들은 ‘밑으로부터 근대화’를 주창하며 민중의 자주적 역량을 표출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이들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의 주를 이루고 있는 지식층과 사상적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1890년 이후 점차 의병운동의 형태로 위정척사운동에 합류하거나 일부는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였다. 즉, 이들 3종류의 사상은 그 사상적 기반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 같은 맥락 속에서 ‘국권수호’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진 민족운동이었다는 것이다.이러한 3가지 사상 중 국권과 전통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던 ‘위정척사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상적으로 매우 보수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자주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가장 극명한 행동을 보였다. 이는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추어 보았을 때 그 시사점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그들의 굳건하고 기개있는 정신은 한국근대사의 흐름과 민족운동, 정신사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2.위정척사사상의 대두위정척사사상의 기본논리는 “정(正)을 지키고 사(邪)를 배척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러한 위정척사론의 이념은 그 사상적 기반은 그 유래가 춘추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성리학의 2분법적 가치관인 이기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논리로 이러한 이단배척의 연원은 이미 선진 유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공자가 집필한『춘추』에서는 존주론(尊主論)을 대변한 것에서부터 남송의 주희에 이르러 존왕양이론(尊王洋理論)을 『자치통감강목』에 담아 중화사상과 오랑캐인 금(金)을 물리친다는 역사의식으로 체계화되었다.남송의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건국된 조선왕조는 이기론을 근거로 한 성리학에 의해 정계와 학계가 유지되었다. 조선 건국초기에는 왕조개창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이념적 차원에서 정도전 등이 불교를 배척하면서 척불론을 주장하였고, 17세기 청의 침략을 받게 되자 주희의 명분론에 의거하여 외세를 배척하는 북벌론으로 주장하였다. 그 뒤 18세기 말에는 서학의 전파로 인해 서양의 문화가 전해지자 그에 따른 대응책으로 정학을 높이고 이단을 물리친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유교논리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배척하게 된다. 이러한 서구의 사상에 대한 배척으로 일어난 척양ㆍ척외운동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한국 근대 민족주의사상에 기반을 이루며 종교적 측면이 아닌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역사적 움직임으로 변모하게 된다.3.화서학파-위정척사론의 이론적 체계화화서학파는 184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주리론, 위도론, 명분론에 입각하여 반세도,반개화 상소운동, 항일 의병운동 등을 벌였던 학파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화서 이항로로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지주로 여겨져 이후 그의 제자들이 그 인적 계보를 이었다.이항로는 이미 1835년에 국내정치세력인 남인과 아울러 서양세력의 확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는 19세기 이항로학파의 위정척사운동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생 주자학에 몰두한 주자학자였으니 학문적으로는 일찍이 송시열이 편찬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계승한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라는 방대한 『주자대전』 주석서를 완성하였다. 아울러 그는 제자인 유중교? 김평묵에게 부탁하여 화이론(華夷論)이 강하게 내포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찬하였다. 바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친다는 존왕양이(尊王洋理)로 대표되는 춘추정신을 담고 있었다. 또 이항로는 1863년 「벽사록변(闢邪錄辨)」을 완성하여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을 구축하였다.이항로의 제자 김평묵은 1839년에 저술된 이정관의 「벽사변증(闢邪辨證)」을 통하여 척사에 관심을 갖고, 이어 1847년 「벽사변증기의(闢邪辨證記疑)」를 정리하여 1866년 8월 완성하여 발표함으로써 척사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였다. 또한 김평묵은 병인양요 당시에 「어양론(禦洋論)」을 지어 위정척사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고, 1876년 개항당시에는 「斥洋大意」를 지어 이항로학파의 척사론의 이념을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한편 기정진은 『외필(猥筆)』,『납량사의(納凉私議)』를 통하여 철저히 주리적 입장을 나타내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학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못하였지만 주기론(主氣論)을 적극 비판하는 편에 서 있었다. 당시 영남의 대표적 성리학자 이진상도 영남의 이황 이래의 주리론(主理論)을 발전시켜 『이학종요(理學綜要)』에서 주리론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항로나 기정진?이진상 등 19세기 유림의 위정척사운동의 이면에는 주리론이 그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기정진과 이항로 등 화서학파들은 철저히 유교적 사회신분제를 옹호하여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를 주기론이 풍미하는 사회로 진단하고, 주리론에 근거하여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이론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성리학의 기능이 사학을 물리치고 천리를 밝히는 데 있다고 여겨, 천주교 등 모든 학설을 주기로 보아 배척하고 주리론이 주도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기(氣)가 이(理)에 복종할 때에만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고 여겨 이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동양은 양의 세계이며 서양은 음의 세계로 인식하고 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즉 차원높은 문화민족으로 생각하고, 서양을 문화적으로 도태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종래 조선과 청과의 화이론 관계에서 이제 조선과 서양이라는 새로운 인수론(人獸論)의 관계로 변질된 것을 말한다.4.위정척사운동의 전개위정척사운동의 시작은 1866년 병인양요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척사운동은 대부분이 상소의 방법으로 이루어져 전국 각지의 유생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1866년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을 정립한 이항로와 기정진이 활동한 병인앙요기와 그 뒤 1871년 신미양요에 이르는 시기로, 주로 개별상소를 통하여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이항로는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와 외세 개입을 상호 인과관계로 파악하여 조선성리학적 전통을 재정비할 것을 보국안민의 최선책으로 제시하였다. 서구자본주의의 침입으로 국가적 문화적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적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인한 성리학의 지도력 상실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인 성리학으로 전통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이 보국의 유일한 방안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의병을 조직하여 외세에 저항하자고 한 주전론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 후에 일어날 의병운동의 사상적 논리가 되었다.지금 왜적과 강화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폐단이 있습니다.첫째, 강화가 그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족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약점이 있어서 강화를 서두르는 것이라면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그런 강화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인문/어학| 2007.12.16| 5페이지| 1,000원| 조회(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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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과 제도의 형성과 전시과의 종류
    Ⅰ.서론ⅰ)전시과의 형성과정건국 직후의 왕건 정권의 분권적 세력을 정비하여 중앙집권적 지배권력을 확립하는데 있었다. 신라를 멸망으로 이끈 여러 모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토지지배관계의 문란으로써 왕건은 건국 직후 전제의 개혁에 착수하여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다. 왕건이 제위에 올랐을 때 고려의 토지제도는 대체로 신라의 것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내장, 식읍, 녹읍 등은 개국 직후의 토지 지배관계의 상태를 보여 준다.내장은 왕실소속의 특수한 장원을 말하는 것이고 왕실 제정의 기반이었다. 이는 궁예 시대의 제도를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후일 점차 확대되어서 왕실재정에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식읍은 대체로 그 성격. 내용이 신라의 것을 계승한 것이고 공로가 탁월한 고관 등에게 사급한 것으로 보인다. 공로가 탁월한 인물들 중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많이 포함되며 식읍에 대한 내용은 단순한 조의 수취뿐 아니라 역역등도 수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녹읍 간접적으로 신라의 제도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 이것은 토지 그 자체의 지배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생산노동력을 가진 인간과 그들이 거주하는 촌에 대한 일정한 지배를 의미한 듯하다. 건국 직후에 있어 관료들 전부에 대해 녹읍이 사급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며, 왕건의 호족연합정책의 실시로 왕친권세지가등의 특수층에 국한하여 사급한 것으로 추측된다.식읍과 녹읍은 그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치가 않으나 이것은 호족의 경제지배의 큰 기반이었다. 이 식읍과 녹읍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공로가 탁월한 고관이나 호족 등 일부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관료와 군사들에게도 어떠한 형태로든 토지의 급여가 있었을 듯싶고, 또 농민들도 자가경영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 잘 알 수가 없다.이상에서 설명한 식읍과 녹읍 등은 전조인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토지지배관계의 유형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고려가 새 을 수 있다.Ⅱ.본론전시과는 문무백관(文武百官)부터 부병(府兵)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관직에 복부하거나 직역(職役)을 부담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지위에 따라서 응분의 전토(田土)를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전시과 이외에 공신. 고급관료에 대해서는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시등을 사여하였다.ⅰ)전시과의 구분①일반전시㉠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전시과가 창설된 것은 경종(景宗) 원년 11월의 일이다. 경종 원년 11월에 비로소 직관(職官)8), 산관(散官)9)의 각품(品) 전시과를 제정하였는바 관품(官品)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人品)만 가지고 전시과의 등급을 결정하였다.자삼(紫衫) 이상은 18품(品)으로 나눈다. 문반(文班) 단삼(丹衫) 이상은 10품으로 나눈다. 비삼(緋衫)은 8품으로 나눈다. 녹삼(綠衫) 이상은 10품으로 나눈다. 전중(殿中)10), 사천(司天)11), 연수(延壽)12), 상선원(尙膳院)13) 등 잡업(雜業)의 단삼 이상은 10품으로 나눈다. 비삼 이상은 8품으로 한다. 녹삼 이상은 10품으로 나눈다... 무반(武班)의 단삼(丹衫) 이상은 5품으로 나눈다. 이하(以下) 잡직 관리(雜吏)14)들에게도 각각 인품에 따라서 차이를 두고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하 전시과 등급 사정에 미처 들지 못 한 자는 모두 전 15결을 준다. 초창기의 전시과인 만큼 직,산관 등의 급여 차등을 설정하면서도 태조대의 공음전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품도 급전의 기준으로서 고려치 않을 수 없는 미묘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목종(穆宗) 원년 12월에 이르러 개편을 보게된 개정전시과는 지배질서의 성장과 이에 따르는 관인체제(官人體制)의 발전에 호응하여 마련된 토지제도의 재정비를 의미한다.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우선 시정전시과와는 달리 개정전시과는 그 규정이 펵 간편하고 체계적화되어 전체 관인을 한 계통 안에 망라하고 있다. 즉 종전의 인품이라는 막연한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관직의 고하만을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지는 지급받지 못하였다. 갱정신시과는 목종대의 개정전시과에 비해 여러가지 상이한 점이 보이는데, 우선 주목되는 점은 분급되는 전시의 규모가 감소했다는 것이다. 1과의 경우 목종대 170결(전지 100결 시지 70결)에서 150결로, 2과는 160결에서 135결로, 10과는 85결에서 65결로, 18과는 20결에서 17과로 감소하였다. 무반(武班)에 대한 대우는 크게 향상되어 상장군의 경우 목종대 5과(130결)에서 3과로 올랐고, 대장군의 경우는 6과에서 4과로 올랐으며, 다른 무반도 모두 과가 상승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거란과 전쟁하면서 무관의 지위가 상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산직(散職)과 향직(鄕職)에 대한 토지지급이 보이지 않는 점도 주목할 사실이라 하겠다.갱정전시과는 고려전기의 토지제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시과로서는 최종적 결정판이었다. 몇 가지 특징을 꼽자면 개정전시과에서 지급하는 전시의 액수가 전제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감소된 대신에 무관에 대한 대우가 현저히 상승되어 있는 것이 주의를 끈다. 다음은 종전의 전시과의 대상으로 되어 있던 산관(散官)이 개정전시과에서는 배제되어 수급대상에서 완전히 탈락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직주의(現職主意)의 철저를 의미하는 것이다. 끝으로 주목되는 것은 종전까지 병설되어 오던 이른바 한외전(限外田)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 수급대상이 과내(科內)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제도 그 자체의 완비와 일원화를 의미하는 것이다.또한 위의 무관직계층과 그에 속하지 않는 계층들을 대상으로 무산계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여기에는 그들의 임무가 군역과 같은 직역으로 간주되어, 일종의 기술 군인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별사전시과(別賜田柴科)는 고려시대에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였음을 볼 때 여기에 종사하는 승려(僧侶)나 지관(地官)이 특별한 사회적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②공음전시공음전시는 양반신분 그 자체에 대한 우대의 특전으로 지급된 것으로 자손들에 그들의 경제적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정된 것이다. 문종 원년 구분전을 지급 규정을 보면 구분전은 고려시대에 관인 및 군인 유족의 보호를 위해 지급하는 토지였다. 구분전에서 주목되는 점은 자식, 자손이 없을 경우이며, 자식, 자손에 관한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한인전이다. 한인전은 관직 진출 예정자나 아직 오르지 못한 사람 즉 관인(官人)의 자제(子弟)들에게 지급된다. 이는 아마 6품 이하의 양반의 자제일 것이 분명하다.④ 외역전(外役田)문무관직에 대해 전시가 지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 및 지방의 서리(胥吏)들에게도 전시가 지급되었다. 중앙의 서리들에 대한 것은 전시과 규정에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으므로 별 문제가 없으나 향리(鄕吏)들에 지급한 토지 즉 외역전은 관계되는 기록이 매우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다.고려는 초기에 있어 향리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돌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라말기 지방 각 처에는 호족들이 분권적인 소왕국을 형성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이들은 고려 왕조 성립과정에서 지대한 정치적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건국 직후 중앙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으나 본고장에 그대로 남아처진 부류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향리로 편성되어 국가권력의 말단을 장악하여 군역, 역역(力役)을 징발하며 또 간단한 소송을 재결하는 등 지방 통치의 중요한 기능을 행사했다.향리는 본래 지방 호족으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광대한 토지를 사유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토지가 고려 건국 직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다. 초기 일정한 토지를 두었던 향리들은 과거 호족이 향리로 떨어져 그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장인 호장에 대한 결전이 불과 5-3결이었다는 것은 그 액수가 너무 적은 것이 같아 좀처럼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부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⑤ 군인전(軍人田)군인은 군역에 복무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군인전을 지급받았다. 개정전시과에서 제리와 더불어 고려 사회에 있어 중간층을 형성하는 신분이었으며 군인전은 순수히 수조권에 입각하는 토지이고 저들이 농민 신분이 아니라 양반에 준하는 수조권자의 위치에 있는 신분이라는 해석도 있다.⑥ 궁원전(宮院田)궁(宮). 원(院)은 왕족이며 궁은 원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 궁, 원에 소속된 토지를 궁원전이라 하였다. 이것은 비빈(妃嬪)을 비롯한 왕족들이 지배하는 토지였다. 물론 계승이 가능하였으며 이점 궁원전은 양반들에게 내린 양반공음전과 그 성격이 비슷하며, 왕족들의 중요한 재정기반이었다.⑦ 사원전(寺院田)불교사원들에 소속되는 토지를 사전 또는 사원전이라고 한다. 불교가 수입되어 크게 융성했고, 건국 당초부터 사원은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아 왔다. 사원전은 국가로부터의 기진뿐 아니라 계급의 상하를 비롯한 신도들로부터의 막대한 시납이 있었으므로 날로 비대해갔다. 또한 승려들에 대한 토지의 사급이 또한 많았을 것은 물론이다.토지는 절에서 가깝거나 먼 거리에 있었는데 가까운 곳은 승려나 사원노예의 사역에 의해 경작하는 일도 있었으나 일종의 승려이기는 하나 수도의 승려가 아니라 예속된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사원전은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사원전의 확대의 큰 원인이 되었다. 이는 고려말에 불교배척운동의 원인이 되었다.⑧ 왕실어요지(王室御料地)고려시대에는 왕실이 지배하는 광대한 어요지(御料地)가 있었다. 왕실은 국초부터 넓은 토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왕실의 지배토지는 고려1대를 통하여 전국의 토지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의 하나였다. 이는 왕실 재정의 기반이었다.이 밖에도 교육기관인 학교의 재정을 위한 학전(學田) 등의 토지도 있었다.ⅱ)전시과의 성격전시과의 과전은 기본적으로 관료·군인·한인 등이 관직이나 특정 지경에의 종사를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의 반대급부로 주어진 것이었으나, 이와 함께 그들의 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물적 기반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전시과의 과전다.
    인문/어학| 2007.12.16| 7페이지| 1,000원| 조회(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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