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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년기의 특징들-ulinim
    청소년기의 특징들1. 일반적 특징: 내적 갈등과 외적 압박감이 증대하기는 시기1) 내적 갈등 - 부모와의 심리적 애착 대체물 찾기 , 자율성과 의존의 갈등예) 이성에 대한관심, 비행, 특정집단에 소속되어 지지를 얻고자 함.대중스타의 우상화, 양면감정행동 즉 부모와의 관계에서 정서적 불안정성반항 즉,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하려는 행동2) 외적 압박감 - 다양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대와 요구 증대예) 양립 불가능한 역할기대, 아들 대 남자친구역할 불일치. 타인이 부여하는 역할과 개인이 원하는 역할간의 괴리. 실제보다 높은 부모기대역할의 불연속성, 이전의 역할에서 변경된 역할 , 더 높거나 완전히 다른 역할2. 신체적 특징1) 신체급성장과 이차성징의 발달남여고환 발달/근육발달생리시작(체중의 17%지방일 때/ 골반발달이차성징 발달 후 키.몸무게 급성장키 성장 후 가슴과 음모 발달 그이후 생리시작2) 신체성숙의 심리적 의미- 성적욕구. 자아정체감에 영향. 불안 수줍음 등의 정서성 증대남녀에 따른 조숙과 만숙의 차별적 영향조숙형 남자사회적 적응에 유리만숙형 남자*적응문제 초래. 오랜시간 동안 어린이 취급을 받음조숙형 여자*사회적 이점이 모호함. 자신감과 달리 내적 요동의 우려 . 내적성숙과 지적성숙을 위한 지도가 필요3) 성적 성숙과 성도덕 : 오늘 날 청소년들은 성문제에 대해 더욱 개방적이고 공공도덕의 차원으로 보다는 개인적인 가치의 문제로 보며 안정되고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특징을 나타낸다.3. 인지적, 사회적 특성1) 논리적 비판적 사고의 발달 ( 형식적 조작단계): 이상을 추구하고 현실비판적2) 사회적 사고의 발달: 개관적 조망 능력 발달자기 내면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타인과 공감하고 다양한 역할을 수용하는 대인관계능력이 발달하는 시기3) 자아정체감 확립의 시기 : 개인이 집단 내에서 타인과 구별되는 독립된 고유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인식① 친밀성 문제- 형식적인 관계, 고립, 각종 중독증② 시간 조망의 어려움- 계획의 어려움. 시간감각유지곤란, 변화에 대한 두려움③ 근면성의 문제- 자기자원을 현실적인 방식으로 집중하기 어려워함.관심과제의 빈번한 이동④ 부정적 자기상의 형성- 부모나 사회가 기대하는 정반대의 자기상 형성4) 심리 사회적 유예기간 - 청소년기는 자기 존재를 탐색하고 다양한 역할을시험해보면서 결정을 보류하는 시기 즉, 고민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청소년기의 문제행동( 약물복용, 음주, 흡연..) 들은 청소년발달의 측면에서 볼 때 나타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대처행동이거나 자기 조절적인 성질이 있음을 고려해볼 수 있다.5) 부정적 자아개념을 야기하는 정보들을 평가절하 시킨 후 자신의 존중감을 부풀릴 수 있는 보상이나 방어적 행동을 선택하여 비행을 저지름-흥분과 공격성을 발휘해서 좌절감을 표현, 거칠고 남성성 과시, 특이한 옷차림, 문신집단정체감, 집단결속력강화, 과음등 성인 모방, 과격한 운동6) 자기중심성- 타인에 대한 사고가 가능해지면서 자신의 관심사와 타인의 관심사에 대한 분리가 잘되지 않아서 자신이 동일한 문제에 몰두하면 타인들도 동일한 문제에 몰두되어야한다고 가정을 함상상 속의 군중 :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쓰기, 자의식 증가, 거울 보기개인 우화 : 자신을 중요 인물로 보고 자신의 느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간주우선 일반적인 특징으로 내적갈등과 심리적 압박감이 있는데 나같은 경우는 극심한 갈등과 압박감은 없었던것 같다. 우선 우리 부모님 께서는 전적으로 나를 믿어주셨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 흔한 공부좀 해라 라는 소리는 못들었던것같다. 부모님과 대립하는 경우는 학업에 대한 부모님의 욕심 때문에 부모님과 대립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집 같은 경우는 그런것은 없었다. 그리고 둘때로 자란 탓인지 집안의 대소사는 형이 다 알아서 했기에 부담감없이 바르고 건강하게만 자라라 했었다. 물론 자랑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때 반에서 10등을 벗어난적이 없기에 지금 가끔 부모님에게 물어보면 그때는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물론 어렸을적에 강했던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나는 신발에 간것같았다. 중고등학교때는 신발을 모으는 것에 흔히 미쳐있었던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하기힘든 신발을 구함으로써 친구들사이에서 주목받는 것이 좋았던것같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서 주말에 같이 어디같이 가자는 부모님을 안따라다니는 경향이 많았었다. 예전에 주말이면 북한산 온천을 매주 갔었는데 중학교 2학년때부터는 거의 안따라가고 친구들을 만났었던것 같다. 그리고 이시기에는 부모님의 역할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데 한예로 중학교때 질안좋은 아이들과 어울릴뻔 했는데, 그때 어머니의 ‘이건좀 아닌거같다’라는 말한마디에 스스로 느끼고 그 친구들과 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신체적 특징으로 우선 나는 조숙했던것 같다. 중학교 1,2학년때 반에서 내가 제일 키과 덩치가 좋았다. 중학교를 들어갈 때 당시 170센치로 입학했고 중학교 2학년때 175센치 였던것 같다. 지금키가 179센치이니 내 키는 거의 중학교때 다 컷다고 봐도 무방하다. 키와 덩치는 컷지만 다른 2차성징같은 경우는 다른 또래의 친구들과 비슷했었다. 그때 당시 그좋아 하던 목욕탕도 잘다니지 않았었던 기억이 난다. 체모가 나기 시작한 중학교 1 2 학년 그 2년만 목욕탕을 다니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서 그것이 뭐가 챙피하다고 왜그랬는데 모르겠다. 그렇지만 신체가 성숙했다고 해서 불안하거나 뭐 부끄러워 하지는 않았었다. 나는 키가 크고 덩치가 큰게 좋은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다가 190센치 까지 키가 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그때당시에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하니 같은반 작은 아이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었던것같다. 나는 알수없는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주위에서 만나는 어른들였시 키커서 좋겠다. 아들참 덩치 좋다 이런말을 많이 들었던것 같다. 이런 요인역시 나의 신체적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할수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인지적 사회적 특징으로는 우선 대인관계의 형성인데 내 주변에는 참 많은 친구들이 있었던것 같다. 이끌려다니기 보다는 이끌고 다니는 성격이라 많은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던것같다. 물론 중학교 3년내내 반에서 임원을 해서 아무래도 선생님이나 친구들과도 함께 잘지냈고 친구들에게 보여지는 나의 모습에 많은 신경을 썻던것같다. 그리고 이시기에 나는 무엇을 하고 나는 어떻게 되겠다 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막연하게 나는 대통령이 이나 경찰이 되어야지가 아니라 이때다시 내가 하고싶은 사업가와 선생님 이 2가지 중에서 많은 고민을 했던것같다. 대학교는 어디를 가고 나는 이제 이떻게 무엇을 하겠다라고 구체적으로 계획 했던것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사회에 나가서 독립된 나의 삶을 생각했었 던것 같다. 집단내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다른 친구들과 나의 차이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날 하는 회의시간에 논리적으로 나의 의견을 말하고 현실을 비판하고 했었다. 정체감의 미형성으로 나타나는 친밀감의 문제나 근면성의 문제등은 나타나지 않았던것 같다. 하지만 나의 자기 중심성은 좀 강했던것같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같은 고민을 하고 어떤일이 일어나도 그 중심은 나자신이라고 생각했었다. 한예로 고등학교 1학년때 발목이 부러져서 인대가 파열되었던적이 있었는데 학교를 한달정도 나가지 못했던적이 있었다. 나는 내가 없으면 우리반이 안돌아 갈줄 알았는데, 내가 없는데도 학교가 잘 돌아 간다는 사실에 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내 주위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 가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는 굉장히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인문/어학| 2014.06.05| 3페이지| 1,500원| 조회(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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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학]대북지원에대한찬성
    [북한학] 대북지원에 대한 찬성목차Ⅰ. 서론Ⅱ. 본론 (대북지원의 당위성)Ⅲ. 결론Ⅰ. 서론나는 대북지원에 대해선 일단은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경제 현상이나,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 국민들의 시각이나 정서에 비추어 볼 때 많은 반대의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나 자신도 대북지원에 대한 생각이 흔들릴때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보느냐 아니면 동포로 보느냐에 따른 시각차이가 아닐까한다. 나역시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북한을 단순히 국가적 이익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대상국으로서가 아닌 우리의 또 다른 민족으로, 동포로 보기에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세계 여러나라가 북한을 주목하고 있다. 여러 가지 군사적 도발국가로, 혹은 불량국가로 지정하고 감시하고 경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평화주의적인 입장에서 북한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북한에서 주민들이 식량난으로 굶어 죽고 있다는 소식과 특히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하나로 온 세계는 북한을 경계하면서도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도움을 주고 있는데... 하물며 같은 민족인 우리들이라고 모른체 하고 있을순 없지 않은가? 과거 정부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김대중 정부역시 북한에 대한 대북지원은 같은 동포로써 민족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고 본다. 나름대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북지원에 들어가는 경비가 현재 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실업자 구제’에 들어가는 비용의 0.1%정도라 한다. 그렇다면 엄밀이 따져 보았을 때 대북지원에 대한 부담은 그리 크지는 않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제부터 본인이 주장하는 대북지원의 당위성에 대해 나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와 비유(?)를 들어 얘기하고자 한다.Ⅱ. 본론 (대북지원의 당위성)1. 북한은 우리의 형제이다.대한민국의 헌법 규정을 보자. 헌법에 명시되어있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명시하고 있음을 알당과 그 비호세력 및 추후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앞의 두 가지의 경우를 보더라도 북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 헌법에서 조차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동포로 보고 있다. 다만, 지금껏 국가권력을 장악했던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우익적인 경향이 강했고 그들의 비 정상적인 정권 교체를 국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해 대북관을 악용한 적이 많았기에 아직까지도 순진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에 대북지원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불쌍한 민족인가! 반만년의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민족의 침략을 수차례 받고 결국은 일본에 나라까지 빼앗기고 해방후에도 강대국의 이익속에 가뜩이나 작은 나라가 두 동강이가 나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간의 일임에도 왜 우리들은 아직까지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지... 그것도 모잘라서 같은 민족에 대한 생각조차 하나로 모아질 수 없는 우리 나라의 현실이란...대북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 같은 형제가 민족이 동포가 어려워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고 해도, 정말 악의가 차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것인가? 이산가족의 상봉을 우린 뜨거운 눈물로 지켜봤다. 식량이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도 아니며,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오지의 사람들도 아니며, 우리와 함께 반만년동안 같이 웃고 땀흘리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했던 우리의 형제들인 것이다.2. 대북지원은 남한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한다.많은 사람들이 우리 남한의 경제 사정도 어려운데 북한을 도운다고 대북지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물론 나도 몇가지 자료를 찾기 전에는 단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같은 동포이니까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으나,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본 결과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가 발생하고 있고, 특히 중소기업 부문에서 과거 임금경쟁력에 의존했던 상당수의 기업들이 한계에 봉착하여 새로운 생산기지 확보를 통한 활로 모색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음. 이에 따라 국내 중소기업들은 동남아나 중국, 중남미 등 후발국으로의 진 출을 모색해 왔으나, 현지의 인금 인상, 언어문제와 문화적 갈등, 동남아 국가의 국내기업 육성 방침 등으로 현지 기업 운영에 상당한 애로를 겪고 있음.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경협은 우리 기업들에게 산업구조조정 측면에서 우리의 유휴설비와 기술, 북한의 저렴한 노동력을 결합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언어 및 문화의 동질성, 시장확대와 우회 수출기지로의 활용 가능성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됨.-통일교육 연수원-※자료 2.대북지원이 활성화 된다면 서방기업들은 대북경협 경험이 있고 북한과 언어?문화적인 동질성이 있는 우리기업들과 동반진출 등을 추진하면서, 남북경협 확대를 통해 북한의 투자여건이 개선된 다음 본격적 대북투자를 모색할 것으로 예상됨. 그럼으로써 남북간 공식적인 경제협력 증진은 직접적인 경제효과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경제×비경제적 효과를 수반함으로써 주식시장의 새로운 테마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이는①정상회담을 통한 남북간의 해빙무드는 Country risk를 감소시켜 외국자금 추가 유입 및 신용등급 상향 계기②남한측의 '고비용저효율 산업구조'의 해소- 즉, 전통산업 과잉설비의 북한이전으로 인한 산업 구조조정③남북간 국방비 지출과다에 따른 왜곡된 산업구조의 개선 등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한겨레 신문 200/10/20일자 기사에서...※자료 3. -대북 테러 지원국 해제시 경제 효과 (2000/10/17, 동아)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16일 북한에 대한 테러 지원국 해제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전에 이뤄질 듯 하다며 잉여농산물과 첨단기술제품, 중저가 산업설비 등의 대북수출이 늘고 자원개발 및 SOC(사회간접자본) 건설이 유망하다고 밝혔다. KOTRA 북한실은 `. 투자와 관련해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하는 동북아 시장을 겨냥한 미국기업의 진출이 예상되며 특히 우리기업과의 동반진출 가능성이 크다.-김기성 basic7@donga.com앞의 3가지의 자료만 보더라도 대북지원을 통해서 남한이 경제적으로 얻을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실로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대상으로만 북한을 보더라도-앞에서 얘기한 민족적인, 인도주의적인 대상으로서의 북한을 보는 것이 아닌- 대북지원의 당위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3. 대북지원은 통일의 발판이다.남한과 북한은 1953년부터 현재까지 휴전상태에 있다. 즉,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잠시 전쟁을 쉬고(?)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작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문’까지의 단계까지 이를 수 있었음에 대북지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남한의 지도자가 적지에가서 적국의 정상을 만난 것 자체가 과거와는 다른 남북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장공비가 넘어오고, 서해에서 교전이 일어났어도 인내심을 갖고 대북지원만은 꾸준히 이어온 과거 정부와 현 정부가 오늘의 해빙무드를 일구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대북지원이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단한 차돌바위같은 그들의 마음을 열게끔 할 수 있었던 것도 대북지원을 통한 우리 정부의 통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현함에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대북지원은 북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으며 적대적 감정을 민족적인 감정으로 바꾸는 역할까지도 한다. 여기에 대북지원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북지원을 통해서 남북한의 해빙무드가 이어질 수만 있다면, 최소한의 적대적 감정을 해소시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서 남북한의 군사적 위기가 감소하고 군비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면 그로인한 또 하나의 경제적 이익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한겨래 신문에 실렸던 남북한의 군비가 줄어들었을 때의 효과에 대한 내용이다.-한반도에 평화체제를 확경우 경제적 실익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연철(金鍊鐵) 수석연구원은 "국방비는 대부분 운영유지 등 소모성 경비로 지출되기 때문에 생산 및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매우 작다" 며 "남북한이 군비축소에 합의, 축소비용을 사회간접자본(SOC) 이나 21세기 국가전략산업에 투자할 경우 경기 활성화는 물론 생산 증대에 크게 기여할 것" 이라고 말했다 또 사회불안을 없애는 실업대책기금이나 사회복지예산으로 사용할 수 있고 북한지역의 SOC 투자 등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 남북한 모두에 큰 이익이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남북한이 군비축소에 합의할 경우 국방비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큰 북한이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1999년 GDP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남한의 경우 약 2.8%인데 반해 북한은 무려 3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통일부.한국은행) . 군사비가 경제에 심각한 주름살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실질 군사비 47억8천만달러 가운데 25%를 줄인다면 약 12억달러를 다른 부문에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金연구원은 "북한이 이 자금을 낙후된 경공업 부문에 투자한다면 주민생활 향상은 물론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을 육성할 수 있다" 고 말했다. 그는 또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따라 북한의 대외 이미지도 획기적으로 개선돼 미.일과의 수교도 이뤄질 것" 이라며 "그럴 경우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도 해제되고 50억~1백억달러로 추정되는 일본의 배상금으로 북한은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이 경제개발에 나서 침체에 빠진 경제가 활기를 띠게 될 경우 남북간 격차를 줄일 수 있음은 물론 장기적으로 통일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한반도의 군비축소는 일본과 중국.러시아 간의 군비경쟁을 완화시켜 동북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영호(金泳鎬) 경북대 교수는 "한반도의 평화체제가 동북아의 군비축소로 이어질 경우 동북아판 마셜플랜을 실현할.
    경영/경제| 2014.06.05| 5페이지| 1,500원| 조회(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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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항 경영학부
    부산항1. 부산항의 과거1) 부산항의 유래2) 부산항이란?3) 시대별 부산항Zoom in ) 일제시대의 부산해운① 일제침략(한일합방)과 부산해운(1910~1913년)② 1차 대전 이후의 부산해운 (1914년 ~ 1930년)③ 태평양전쟁 전후의 부산해운(1931년 ~ 1945년)④ 부산항의 축항공사2. 부산항의 현재1) 세계 속의 부산항2) 부산항을 둘러싼 상황3) 오늘날의 부산항3. 부산항의 미래1) 부산 신항 개발사업2)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3) 부산항의 전망◆ 부산항의 과거1) 부산항의 유래“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골과 같아 부산이라고 하였다.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부산(부산)이란 명칭이 기록에 처음 보인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강구사 이하생을 대마도에 보낼 때 백미 천석(千石)을 부산포에서 반출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또『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부산포"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동국여지승람(1481)』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 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2) 부산항이란?북항, 남항, 다대포항, 감천항을 통틀어 부산항이라 불린다. 하지만 최근 부산신항이 추진 됨에 따라서 미래에는 부산신항도 부산항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부산항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컨테이너부두, 일반부두, 정박지로 나뉜다.< 부산항의 컨테이너부두 위치와 현황>위의 그림에서 갈색으로 이름이 표시 된 것이 컨테해 개항한 그로부터 부산의 요긴한 땅은 일본인손에 넘어가고 메워진 바다는 그들 소유가 되고 수산업과 제조업 운수업들이 그들의 손에 억눌리고 고래의 순풍미속마저 그들의 침략을 입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침략은 조약·조규·협약·협정같은 소리없는 문서침략이 행위침략으로 현실화되었다.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1910년 8월 29일에 체결되어 우리의 통치권을 잃게 되었다 해도 이미 그 이전인 1905년에는 『을사 5조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에 약탈당했고, 1907년 7월 24 일 이완용(李完用)과 이또오(伊藤博文) 사이의 『한일신협약』인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법령 제정권·관리 임명권·행정권마저 잃어가면서 일본관리를 임명토록 하는 조약까지 곁들여졌다.오늘의 부산항 - 대한민국의 국력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부산항은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하여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연결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항만이다.지리적으로는 산과 섬으로 둘러싸여 항내수면이 잔잔하고 수심은 5m∼15m로 깊고 조수간만의 차는 거의 없을 정도인 1.3m로써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어 환태평양시대를 선도하는 세계 속의 물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 부산항을 계속 확충하고 배후 지원시설을 완비하면서 항만운영을 민영화·정보화하여 효율적인 항만운영체제를 구축할 때면 세계 속의 중심항으로 비약할 것이다.Zoom in )) 일제 시대의 부산해운< 일제침략(한일합방)과 부산해운(1910~1913년) >1. 일제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10년을 전후한 당시의 세계 해운의 역사① 14세기에서 18세기까지 항로를 발견, 태평양 ? 대서양의 횡단, 바다를 통한 세계 일주,즉, 대항의 시대가 개막되어 자국해운의 육성을 위한 연안무역 ? 식민지등을 통한 중상주의 적 ? 보호무역적인 해운시대가 열림② 19세기에 들어서,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자유경쟁적인 해운시대를 맞이함.해운시대가 급격히 발달한 배경 : 당시의 모든 선진해운 국가가 적극적으로 해운업을전쟁이 발발한 7월까지는 여름 불경기로 일시 불황이었지만, 1차대전 후에는 외국선박의 내왕이 감소된 반면 일본 본토의 대형기선의 징용으로 급격한 해운의 활기를 회복하였고, 운임보험료의 급격한 폭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부산항의 해운계는 그 영향이 적었고, 또 무역에도 심한 변동이 없었다. 그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을 들자면, ① 정기선의 징용근무로 인한 선박의 변경, ②부산 ? 블라디보스톡 간의 임시항로의 개설, ③ 해상보험료의 양등 등이 있겠다.< 태평양전쟁 전후의 부산해운(1931년 ~ 1945년) >1. 태평양전쟁 전후의 세계해운과 부산해운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세계경제의 대공황 → 해운계는 수년간 절망적인 불황을 경험 → 1차 대전 후 축소된 무역량에 과잉 선복량이란 불균형 상태 → 미증유의 세계대공황 → 1930년 이후 세계 해운의 절망적인 불황의 근원적인 원인이 됨 → 각국은 선복량을 해체 ? 해철을 통하여 타개하려 노력함 → 해체작업이 별 성과가 없자 각국은 자국선주의를 취함 → 그로인한 경쟁으로 각국은 준전시태세에 돌입 → 각국의 전시태세 준비에 물동량이 증가하여 국제무역이 증가 → 세계해운의 급격한 호황을 부채질 →선복량도 1937년 하반기에 거의 해소 →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공격에서 태평양전쟁 시작 → 태평양 전쟁은 바로 해운 ? 해군의 전쟁, 해상권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민주주의와의 대결은 바로 해군 ? 해운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 1931년에서 1945년까지의 한국해운은 바로 일제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해운도 일제해운과 동일한 맥락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부산 해운이 한국해운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일본 해운의 예민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준전시 해운에서 전시 해운체제로 바뀌어 나갔다. → 1942년 6월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손실을 입고 1945년 8월에 결정적인 패배를 하게 되었다. → 그에 따라 등으로 부산항의 본격적인 기초사업을 추진한 것이었다. 한일합방으로 그들은 계속하여 항만 설비(부두 ? 매축 ? 방파제)를 제1기 ? 제2기로 구분하여 시공 ? 완성하는 한편 부산진 매축공사, 절영도매축, 남쪽해안매축, 북쪽해안연안무역설비 등 제공사를 시행하였다. 한일합방 당시 부산의 인구가 10만이었던 것이 일제 말기에는 30만 인구로 팽창하였으니, 여기에 시가지 및 도로의 정리 ? 상수도 공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부산항의 유명한 공사로 알려진 부산대교공사도 일제시대에 완성하였다. 부산항의 근간이되는 거의 모든 항만 설비는 일제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19601911~1944제 1,2,3,4,5,6,8 물양장 및 제 1,2,중앙,3,4부두와 적기 호안 축조1959~1964제7물양장 축조1963~1967남항 물양장 축조19801974~1978제7,8 양곡부두,국제여객 부두및연안여객부두 축조,제1,2부두 개축1974~1982자성대 컨테이너 부두(5, 6부두)축조1979~1982제3,4중앙부두 및 제5물양장 개축1979 ~감천항 개발1985~1991신선대컨테이너 부두 축조19901974~1978감만컨테이너 부두 축조1974~1978우암컨테이너 부두 축조1974~1982내륙 컨테이너기지(ICD)조성1979~1982감만컨테이너 부두 확장1979~부산 신항만 개발1985~1991자성대 부두민영화20002002.02신감만부두개장◆ 부산항의 현재4) 세계 속의 부산항2000년대의 항만환경 수요에 적극대처하기위해 정부에서는 '부산항 광역개발 기본 계획'을 수립, 실시함으로써 부산항 항만 시설 및 기능을 재배치하여 항만 효율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그 내용은 각항별 기능을 특화 하여 북항을 컨테이너 수출입전용항으로, 남항을 연근 해어업 전용항으로,감천을 컨테이너 및 산화물 전용항으로, 다대포항을 목재 전용항으로 개발할 계획이다.◇자매항부산항은 미국의시애틀항, 뉴욕/뉴저지항, 일본의 오사카항, 영국의 사우스앰턴항, 네덜란드의 로테르담항 및 중국의 상해항과 지가 되기 위한 두 항구의 경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2)일본, 대만의 노력-그동안 지역균형개발 정책 때문에 허브항 경쟁에서 물러나 있던 일본과 대만 카오슝 항만도 화려했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항만비용 인하, 생산성 제고 등 다양한 방안을 동원하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3)환적물량의 감소우려화-부산항은 환적화물이 전체 물량의 60%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외국의 환적화물 유치가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환적물량이 많았던 것은 처리비용이 싸고 효율적인데다 한반도 남쪽이라는 지리적 장점 때문에 중국 일본은 물론 러시아 등에서 유럽이나 미국으로 화물을 실어나르기 위한 환적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을 통한 직접 운송이 늘어나면서 환적수요가 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 환적 화물 증가율은 2002년 32.1%에서 지난해 8.8%, 올 1-2월 1.2%로 둔화되었다.(4)정부차원의 동북아 물류중심지 건설그간 규모적인 측면과 중요도에 비해 물류산업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의 도약을 차세대 비전으로 내건 정부차원의 공약은 물류업계에 감흥을 불러일으켰다.(4)홍보의 부실-여러 상황으로 보아 부산항의 경쟁력 강화가 시급하지만 인터넷을 활용한 해외홍보는 매우 부실하다. 현재 150여개 해외 해운, 항만 관련 인터넷 사이트 중 부산항에 관항 정보를 링크 서비스 하는 곳은 5개밖에 안되는 상태다. 이처럼 해외 해운, 항만 관련 사이트를 활용한 부산항의 홍보가 부실하다 보니 외국인들이 부산항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 자연히 국제적인 인지도가 낮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6) 오늘날의 부산항다각적인 구조와 역할을 가진 부산항은 동북아의 물류기지로서 지리적·지정학적(地政學的) 조건과 우리나라 동남부에 위치한 자연적 조건으로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에 걸맞는 우리나라 제1의 국제항으로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정보시스템 또한 국제항 상호간으로 연계되어 환태평양 중심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2000년도 취급물량은 수출 5천4백74만톤
    경영/경제| 2014.06.05| 12페이지| 2,000원| 조회(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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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리데이비슨의 위기극복
    할리 데이비슨 위기 극복 상황목 차할리 데이비슨 연혁할리 데이비슨의 위기할리 데이비슨의 위기 극복 요인할리 데이비슨의 미래할리 데이비슨 연혁1903년 3대의 모터사이클을 제조2차세계대전(1939~45)에 20,000대 참가1969 1차위기 ,American Machine Foundry Company 가 인수1982 ITC(국제무역협회)에 소송제기/ 생산성 향상 3대전략 수립1983 2차 파산의 위기1983 HOG (Harley-Davidsion Own's Group) 창단1986 결함률 1% 미만 수준 향상1998 Buell Motorcycle Company를 인수2007 매니아층의 젊음화를 위해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개발과 새로운 품종 개발에 주력할리 데이비슨의 위기1960년대중반까지 200여개의 미국 모터사이클 업체중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갑작스런 일본업체의 침공으로 거의 파산할 위기1969년American Machine Foundry Company가 인수1981년 까지만 해도 자사의 로열티는 없었고 성장주 반열에도 못미침1969년부터 1981년 사이 외국계 경쟁업체(혼다,스즈끼,야마하 등)들의 공격적인 판매전략으로 인해 고객들이 이탈AMF 가 매각을 발표, 경영진들이 지분을 가까스로 사들여 겨우 명맥을 유지(1983)1983년 또다시 일본기업의 약진으로 파산의 위기할리 데이비슨의 위기 극복 요인1. CEO: 본 빌스 don't talk try act2. 브랜드파워의 강화지속적인 매출 확장을 추구하는 대신 신뢰성 있는 품질을 제공하고자 노력 하여 충성심을 지니는 고객집단을 형성품질 제고 및 딜러와의 우호적 관계유지할리 데이비슨의 위기 극복 요인3. HOG(Harley-Davidsion Own's Group) 창단고객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함에 있어서 순수하고 꾸밈없는 관계를 지향 = 고객의 로열티 라는 큰 자산을 확보할리 소유자들의 모임시장조사 및 각종 설문조사에 써야하는 비용을 줄여준다정보를 교환,개조된 오토바이를 보고 고객들이 원하는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음고객의 소리를 듣고 배우는 좋은기회경영진들의 행사참여중요한 문제를 광범위하게 논의 하는 기회로 활용HOG(Harley-Davidsion Own's Group)Our family lives in more than 100 countries. Our home is any road, any city, any place we choose to gather.할리 데이비슨의 위기 극복 요인4. 생존 도구로서의 품질1983년이후 다시 품질위주의 전략으로 호귀AVF사에 의하여 인수후 1970년대에 명성은 땅에 떨어짐(품질을 희생하더라도 생산량을 늘림)일본기업의 JIT생산방식을 채택고객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 과도한 부품의 재고를 감소-현금 유동성을 제조공정상의 품질 향상에 투자딜러들의 품질향상의 노력할리 데이비슨의 미래1. 젊음층과 여성들이 선호하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추가3. 엔진은 더욱 강하게, 운전조작은 쉽게2. RIDER'S Edge 라는 교육 프로그램실시현재 주력 소비자들은 베이비붐세대로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어 할리 데이비슨 자체의 이미지도 노쇄 해 간다는 점.{nameOfApplication=Show}
    경영/경제| 2014.06.05| 9페이지| 2,000원| 조회(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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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영전략 P&G사례
    경쟁 속에서 철학이 생겨난 P&GP&G의 경영이념: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해 전세계 소비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최상의 품질과 가치를 지닌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P&G의 경영활동은 모든 면에서 고객 중심적=>P&G의 대표적 제품들은 모두 경쟁사의 제품과 혹독하게 경쟁해서 이긴 브랜드들로 구성10년이 넘는 연구개발을 통한 아이보리 출시 / 타이드를 통한 세탁 세제 분야에서의 혁명=> 이 시기에는 제품력에 있어 경쟁사를 압도1950년대 이후 생활용품 사업은 서서히 범용화되기 시작(기저귀 시장의 예)P&G가 1961년 팸퍼스라는 브랜드를 출시하였을 때부터는 시장을 압도하기가 어려워짐=> 초기 시장을 장악하였으나 킴벌리-클라크에서도 킴비즈라는 품질 좋은 제품을 출시하여 경쟁이 심화, 킴벌리-클라크는 1970년대 말 하기스를 출시, 팸퍼스와 대대적인 경쟁을 벌임=> 두 회사는 연구개발과 마케팅에 엄청난 투자를 감행, 계속된 제품 혁신으로 기저귀가 더 얇아지고, 더 잘 맞고, 더 쉽게 조여지고, 더 예뻐짐=> 애널리스트들은 기저귀 전쟁을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사이의 전쟁과 비교(치약 시장의 예)1960년대 P&G가 불소화합물이 첨가된 충치 방지 기능 치약 크레스트를 출시하였으나, 경쟁사들은 곧바로 비슷한 제품으로 응수=> 콜게이트가 토탈이라는 브랜드로 미백기능 치약을 출시, 치약 시장은 기능 중심에서 미용 중심으로 변화함, P&G 또한 미백 기능이 첨가된 크레스트 화이트스트립스를 출시하여 시장점유율 싸움을 벌임(일본 시장의 예)P&G가 일본 시장에 진출했을 때의 경쟁자는 콜게이트나 레버, 킴벌리-클라크가 아닌 일본 기업들일본 회사인 유니참은 팸퍼스보다 40% 비싸지만 더 얇은 종이 기저귀를 내놓고 시장을 휩쓸어감=> 일본 어머니들은 미국보다 기저귀를 더 자주 갈았는데, 기저귀에 묻는 분비물의 양도 적어 얇은 기저귀가 더 효율적이였기 때문결국 일본 소비자들의 특징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일본기업에게 P&G가 고전을 면치 못함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재빠르게 파악하여 제품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P&G의 소비자 지상주의라는 기업이념은 여러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생겨난 결과물신입사원만 뽑아 뛰어난 인재로 키우는 것으로 유명한 P&G프록터와 갬블 집안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CEO가 된 리차드 듀프리(RichardDeupree, 1885~1974) 회장의 말=>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자본과 빌딩과 브랜드들을 놔둔 채 우리의 임직원들을 데려간다면 회사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자본과 빌딩과 브랜드들을 가져간다고 해도 우리의 임직원들만 남겨둔다면 10년 내로 모든 것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P&G는 미국 최초로 1887년 이익분배제를 실시하였고 1892년 종업원지주제를 시행 => 이러한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갖게 만드는 오래된 전통은 오늘날까지 지속직원의 복지를 중요시하는 P&GP&G가 주력하는 생활용품의 경우 제품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 직원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만드느냐가 관건창업자의 아들인 윌리엄 쿠퍼 프록터(William Cooper Procter, 1862~1934)가 주5일 근무제와 이익 분배제도의 시행을 경영진에 설득=> P&G의 직원 복지와 인재 중시 전통은 일등 사업을 지속시켜가고자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결과물경쟁이 매우 심한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P&G회사 내에서 직원들끼리 선의의 경쟁=> 자사 브랜드끼리도 같은 제품 영역에서 경쟁하도록 장려, 그래서 회사 브랜드를 노출시키지 않고 제품 브랜드만을 내세워서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유도
    경영/경제| 2014.06.05| 2페이지| 2,000원| 조회(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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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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