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상업의 부흥과 도시의 발생목차Ⅰ. 서론Ⅱ. 중세도시의 성립Ⅲ. 도시발달의 유형Ⅳ. 중세도시의 모습Ⅴ. 도시공동체와 자치권의 획득Ⅵ. 대표적인 상권Ⅶ. 도시와 국가Ⅷ. 결론Ⅰ. 서론중세 도시는, 이른바 상공업이 발달한 지중해 연안지역과 북해 연안의 플란더스 지방을 중심으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생겨난 상공업 중심지이자 작은 도시국가다. 특히 십자군 원정이후 동방 무역으로 크게 돈을 번 이탈리아 지역 도시국가들은 르네상스를 주도하게 된다. 중세 도시의 발생은 일단 자유를 봉건 영주로부터 사들이면서 시작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들의 경우, 길드와 같은 조합형태가 나타나고 도시 내에 거주민들은 대체로 대상인들과 변호사와 같은 지식인계층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봉건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느니 거액을 주고 자유를 사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봉건영주의 간섭 하에서는 상공업 발전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큰돈을 주고 자유를 산 다음에 용병을 고용해서 도시를 방어하고 도시민들이 공동체 회의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거나, 의회를 결성해서 도시국가의 크고 작은 현안들과 통치를 시작한다.그러므로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을 자유민이라고 통칭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봉건 영주의 봉토에서와 달리 그들을 간섭하는 봉건영주로부터 돈을 주고 독립했기 때문에 간섭받을 일이 없었다. 이러한 도시가 가장 크게 발달했던 것이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북부지방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다. 특히 네덜란드는 이 도시국가들이 연맹을 결성해서 위트레히트 동맹을 맺고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면서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탄생시키게 된다.11세기 이후가 되면 삼포제 농경법으로 수확량이 늘어나고 동시에 인구도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교역이 확대되고 원격지 상업이라 해서 먼 곳까지 상품을 운반해서 거래를 하였다. 그런데 상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팔 물건이 있어야 되고 그래서 물건을 생산하는 장인(공장인)들도 덩달아 발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상인과 장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중심으로 울타리를 두르거권과 독점 생산권을 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도시들은 어떻게 운영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우선 도시를 성벽으로 둘러 외적을 방어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용병을 사서 전투에 참가시켰다.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은 동업조합(길드라고 함)을 만들어 그 규율에 따라 자치척으로 운영했는데, 도시에는 그 나름대로 엄격한 규약과 질서가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는 대체적으로 시청사와 교회, 그리고 광장이 있고, 시민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참사회)가 있어서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도시법을 제정 운영했다. 14세기가 되면 백년전쟁과 흑사병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사회가 혼란해 지면서 자치도시 내부에서도 분화가 발생하여 상공업자들 사이에도 돈이 많고 적은 계층이 여러 개로 세분 된다. 핵심을 한 말로 표현하면 -영주들은 돈이 필요해서, 상공업자들은 생산과 판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 서로가 손을 잡아 중세도시가 생겨나고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Ⅱ. 중세도시의 성립11세기에 들어서서 장원제 내부의 중요한 변화, 즉 현물 대신 화폐로 소작료를 지불하게 됨에 따라 화폐의 수요와 유통량이 크게 증가할 수 있었고 이는 화폐경제의 출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여건들에 힘입어 영주의 거성이나 교회가 위치하는 지역에 떠돌이 상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생산력 증대로 인해 늘어난 권력층의 수요를 항구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비교적 치안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더불어 잉여생산물의 판매를 위하여, 일상용품과 1차 생산물을 거래하는 장이 들어서게 된 것, 전문적인 수공업의 부활과 같은 변화들이 맞물려 조금씩 ‘도시’가 생성되고 그 규모가 커져가기 시작했다. ‘상업의 부활’이라고도 불리는 11세기 이후의 상업 발전은 그 이전시대와 비교할 때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Ⅲ. 도시발달의 유형중세의 상업은 지방과 지방사이나 국제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원거리 교역’과 ②지방적 수준에서 도시와 주변 농촌 사이에 이뤄지는 국지적인 ‘시장 교역’으 원거리 교역에 두든지, 시장 교역에 두든지 간에-’이 중세도시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상업의 부활에 농촌의 재활이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된 바 있다. 그런데 이구네는 ‘농업의 팽창’을 상업의 부활을 가능케 한 좀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파악한다. 그는 특히 보르도를 예를 들어, 9세기에 침체를 겪었던 보르도가 서서히 다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원거리교역의 주도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촌에서의 비약적 발전, 특히 도시주변에 위치한 농촌의 인구 증가에 의해서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는 실제로 “농업의 행창이 보르도의 시장을 부활시켰다”라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농업의 재활로 도시의 형성을 보는 것은 너무나 경제적인 요소만을 강조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되었건 여기서 또 한 번 상업의 부활에 농업의 발달이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중세도시는(알프스 이북의 도시국가적인 형태를 띠는 도시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봉건적 주변세계로 둘러싸인 도시의 경우 ‘지배자의 본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헨Aachen은 카알 대제 이후에도 ‘국왕의 도시, 지배자의 도시’로 남아있었으며, 프랑크푸르트Frankfurt는 ‘제국 동부의 지배자의 거처’라고 불렸고 9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왕의 통치 순회 시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도시였다. 프랑크푸르트는 루드비히 독일 왕 치하에서 지배자의 중심거점에서 더욱더 군주의 거처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 두 도시의 왕궁이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구도시의 핵심부였던 반면 도시적인 형상을 취한 후에 왕궁이 건설된 곳들도 있다.11세기경에는 많은 왕실의 권리들이 증정되거나 특매되는 등 왕실의 힘은 쇠퇴의 단계에 이르고,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규모가 큰 코뮌들의 자유경제가 왕에 의해서 통제되는 경제를 추월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서도 도시의 발전과정에서 국왕-국가적인 혹은 지배적인 요소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Ⅳ. 중세도시의 모습기본적으로 중세 도시는 현대의 도시와는 그 개호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12세기의 부르쥬, 프아티에, 디종에서는 상인취락을 도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혹은 취락의 성장에 대처하기 위해 로마 성벽들이 확장됐다. 혹은 새로 성벽을 건설하여 성곽외시를 보호하고 띠 모양의 성벽 안에 영주거처와 상인의 성곽외시 및 시장의 성곽외시를 모아놓은 경우도 생겨났다. 도시를 둘러쌓는 석조성벽이 축조됨으로써 도시는 이제 정주지로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농촌과 확연하게 구분되게 된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출신지역별로나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통일적인 성격이라고는 전혀 없이 가까이서 멀리서 영업활동을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이주하는 주민들을 하나의 통일적인 사회적 형성물 즉 자아의식을 가진 시민 층으로 융합시키는 역할을 했다.이 성벽의 안으로는 보통 성당과 광장을 중심으로 시청 등의 공공건물, 상인?공인들의 조합-후일 길드라 불리게 되는- 건물,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석조주택 그리고 그 뒤로는 복잡하게 얽힌 주민들의 허술한 목조 가옥들이 들어서 있었다. 도로는 포장되지 않아서 비만 오면 진창으로 변했고, 주택 주변에는 채소를 재배하는 텃밭, 양돈장, 닭장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 축일’에는 오물을 묻힌 돼지들이 도시의 거리를 점령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수도나 상수도 같은 위생설비는 결코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도시는 언제나 악취와 날파리들이 들끓는 오물통 그 자체였다. 게다가 소방시설이나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은데다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수공예 작업장들은 어떠한 안전설비도 없었으므로, 화재가 발생하면 주민들의 허술한 가옥들은 쉽게 불탔고, 도시 전체로 불길이 번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활력과 역동성을 갖추고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라는 말을 통해 잘 드러난다.Ⅴ. 도시공동체와 자치권의 획득중세도시에서는 지배자에게 맞설 수 있는 단위로서 ‘도시공동체’가 등장한다. 특히 럼 사법공동체로 기능하기도 한다. 플라니츠는 선서조합공동체로서의 도시공동체의 구도를 설명하기도 했다.처음에는 한 도시에 상공업자 전체를 포함하는 길드가 존재하였으나 그것이 분화되는 데에는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인 길드의 일차적 기능은 조합원의 지방시장의 독점을 유지하고 안정된 경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도시 내에서 외국인?외부인의 상업을 엄격히 금지했고, 다른 조합원의 판매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조합원에게 보장하였다. 또한 획일적 가격을 정하여 철저히 시행하였고 조합원의 매점매석을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수공업자 길드는 조합원의 독점을 유지하며 경쟁을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균일가격과 임금을 확립하고 시간 외 노동의 금지, 물건의 생산 방식과 질을 조정하는 상세한 규정을 정하였다. 길드에서 완전한 선거권을 가지는 조합원은 ‘장인’ 뿐이었다. 그들은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서 독자적으로 점포를 운영했다. 제2조합원으로 직인이 있는데 자신의 분야를 이수는 했지만 아직은 장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 아래에 도제가 있었는데 견습의 조건은 엄격했고 만약 장인으로 상승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작품을 만들거나, 기존 장인으로부터 그 기술을 공인받아야 했다.길드는 상공업으로 발달한 도시의 기초 조직이었으며, 또한 구성원들을 조직화함으로서 생산을 증대시키고, 외부의 경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도시의 발전과 상호작용을 하는 중요한 조직체였다. 또한 길드는 도시의 행정에도 참여함으로서, 도시의 치안과 운영에 있어서 그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그러나 부정적인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길드는 일종의 ‘과점’으로서, 가격의 상승에 비해 상품의 질이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으며, 도시의 행정에 지나치게 간섭하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새로운 중소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가로막는 방해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도시의 독특한 특성과 생활에, 일반적인 속민들에게 규정되는 봉건적이고 농촌적이고 장원적인 제도는 불합리하 했다.
20060777 영문학과 서소희‘엘리자베스’ 감상시간 : 08.10.2.목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만큼 영국 문화나 역사와 같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이해’라는 전공과목의 000 교수님께서 햄릿 작품의 시대를 이야기 해주시던 중 1998년에 영국에서 개봉한 영화 ‘Elizabeth’를 추천해 주셨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는 메리여왕에서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어 국가와 결혼함을 선포하는 부분이다.황금시대라고 불릴 만큼 훌륭한 시대를 이룩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시기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고, 또 그 전에 영국의 종교적 혼란이 다루어진 정서를 살필 수 있는 영화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국가들은 종교적인 영향이 아주 심했던 만큼 그 나라의 정치, 외교, 사람들의 정서, 문학 그리고 예술을 포함한 문화에 종교적인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영화 ‘엘리자베스’를 통해서 본 것은 위에서 말한 무거운 문제들에 더해서 영국 왕족과 귀족들의 의상 이라든지 연회나 무도회 같은 유흥문화 또한 살펴볼 수 있다. 게다가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여자로서의 갈등을 겪는 대목도 함께 감상이 가능했다. 여러모로 영국에 관한 것들에 있어 유익했던 이 영화로 실제로 나는 상당히 많은 도움과 이해를 안을 수 있었다.메리여왕과 엘리자베스여왕에 대해서는 헨리8세 부터의 이해가 필요했다.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인 헨리8세는 6명의 부인을 둔다. 그의 개인적인 원인으로 시작되었을 종교개혁으로부터 메리여왕 그리고 엘리자베스여왕까지의 종교적인 혼란이 일었던 사건들도 빼 놀 수 없다. 로마의 간섭에서 독립한 영국은 영국국교(성공회)를 성립하면서 시작 된 것이다.영화에서 다루어졌던 첫 시작 부분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 종교에 대한 기도를 하며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또 다른 이들은 불길에 볏짚을 던지며 불을 부추기기도 한다. 메리 여왕시대에서 나타났던 이 모습은 이 전의 성공회를 메리여왕이 다시 가톨릭으로 바꾸면서 부터의 엄청난 탄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헨리 8세 시기에 메리는 어머니의 고향인 에스파냐에서 절대적인 가톨릭신자가 되어서 돌아오는데 그래서 그녀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가톨릭으로 바꿨던 것이었다. 그리고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성공회 신자들이나 칼뱅파(구교도)인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반란을 막고자 해서 메리가 집권하던 때에는 피가 거의 끊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한다. 또 영화를 통해서 본 메리여왕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였으며 정신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는데다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 점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니, 메리 여왕은 첫눈에 에스파냐 왕제 펠리페에게 반했고 결국 메리여왕의 결혼선언이 있게 되자 나라 안은 크게 시끄러워 졌다.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메리여왕은 반란을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고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잔혹하게 모조리 사형에 처하게 했다. 메리여왕은 남편의 믿음인 가톨릭교를 더욱 열심히 믿는 한편 영국 국교인 '성공회'와 칼뱅 파인 '청교도'등 신교를 계속 억누르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고 차츰 메리 여왕과 멀어져 갔다. 게다가 남편 펠리페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유로 메리 여왕과 결혼했던 만큼 ‘메리'를 영국에 팽개쳐 두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기에 영화에서도 그렇게 묘사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나라 안에서 메리 여왕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놓아져 가자 메리 여왕은 차츰 정신병자 같은 심한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1555년부터 메리여왕이 죽은 1558년까지 3년 동안 성공회, 청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어 수만 명의 신교도가 화형장에서 목숨을 잃은 역사에 보기 드문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 화형장은 불길이 하루도 꺼지지 않을 정도였다다고 한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탄압으로 '메리' 여왕은 오늘날까지 영국 사람들에게 '피의 메리'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등극한다. 영화에서 알 수 있었던 역사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계속 이야기 해 나가자면 메리 여왕의 종교 탄압에 엘리자베스가 반역으로 죽음을 당할 번 하는 사건이 나온다. 그와 같이 메리의 재위기간 동안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가톨릭교도로 위장하였으며, 때로는 죄수로 몰려 갇히기도 하였다. 아무튼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공주 시절 사랑하던 로버트 더들리와 헤어질 것을 강요당하고, 정략결혼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또한 노포크 공이 왕정의 반대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국가를 위해서 엘리자베스는 죽은 언니의 남편이었던 스페인의 필립 왕이나 프랑스 여왕의 조카 앙주 공중 한 사람을 선택해 결혼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득에 의해 사랑이 가려진 계산적인 모습에 대한 갈등을 겪는다. 게다가 이때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엘리자베스는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위를 더욱 드높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청혼을 모두 거부하고, 이로 인해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더욱이 사랑했던 로버트 더들리가 결혼을 했던 자임을 알고 또 그녀의 반역에 가담했다는 배신감에 휩싸이게 되면서 엘리자베스는 이전보다 더욱 월싱엄 경에게 의지하게 된다. 조카의 청혼을 거절한데 대해 앙심을 품은 메리 여왕이 독 묻은 드레스를 보내 암살을 기도했음이 드러나자 엘리자베스는 월싱엄 경을 스코틀랜드로 보내 메리 여왕을 암살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노포크 공을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던 궁중 내 무리들을 숙청함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왕좌를 안전하게 지켜낸다. 음모와 배반의 소용돌이를 지나온 그녀는 자신이 영국과 혼약을 맺은 ‘버진 퀸’임을 선포하게 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이익 없는 기업은 사회악이다’를 읽고인간자원개발, 직업과 진로라는 교양수업 덕분인지 부쩍 기업이나 경영관리 부분에 관심이 생기게 된 나는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그에 관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에 한 눈에 딱 들어온 책 ‘이익 없는 기업은 사회악이다’인데 제목이 특이하게 다가왔으며 깊게 생각 해 보지는 않았으나 짧은 순간 그 타이틀에 공감을 할 수 있었기에 선택하게 되었다.그리고 책 읽지 않기로 소문난 내가 빠져들어 하루 종일 집에 박혀 내용에 분개하고 감동하며 고민하고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듯 희 노 애 락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 독후감이 과제로 주어졌기에 나에게 정말 많은 생각을 주고 느끼게 한 이 책을 소개하고 싶고 나의 생각 또한 정리를 해보고 싶다. 이 책은 공기업이었던 대한송유관공사(대송)가 민영화되는 과정과 또 그 후의 경영 근로자들의 노력 경영자들의 정책 등 그 회사의 4년간 피나는 역사가 담겨 있었다.고등학교 경제시간에도 배웠듯이 기업의 목적은 이윤창출에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겠지만 대한송유관공사는 10년 동안 적자를 기록하며 국민의 혈세만 축내 이미 목적에 멀어진 기업 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끝에 공기업인 대송을 민영화로 돌리자는 의견이 나왔고 민영화 초대 경영자(CEO)로서 조헌제 사장이 부임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헌제 사장은 ‘공기업 죽이기’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공기업 시절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시절과 철저하게 단절하자고 외쳤다. 무엇보다 조헌제 사장은 단 한 사람의 강제해고 없이 기존의 인력과 자원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하였다. 이 책의 구성은 살짝 특이하다. 지은이가 소개되고 프롤로그에서 조헌제 사장의 경영 시상식의 모습이 묘사되고, 그다음 조헌제 사장의 머릿글이 있으며 바로 민영화된 후의 실적이나 경영스토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 파트가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조헌제 사장이 초대 경영자로 부임되던 모습과 공기업이었을 때의 직원들의 노고가 함께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다시 대송의 즉 경영자의 경영 정신과 구조조정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이것은 살짝 순서가 뒤바뀐 것인데 그로인해 나에게 더욱 큰 감명을 주었으며 대송이 잘될 때 더욱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데 한 몫을 한 것 같다.그 이유를 들면서 동시에 엄청나도록 피눈물 나는 대송인 들의 노력까지 책의 차례와 다르지만 순서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SK주식회사 전무 출신인 조헌제 사장이 대송의 경영자로 부임되고 출근하던 첫날, 노조는 40개월 어치의 명예 퇴직금을 지급하는 단체 협약에 서명하라며 출근을 막았다. 나는 위의 책에서 적자기업인 대송을 흑자 기업으로 돌려놓았던 조헌제 사장의 결과를 미리 보았기에 안타까웠지만 또다시 그 사실을 예측할 수 없는 노조들의 심정으로 본다면 그 또한 이해 할수 있어 너무 속이 타들어갔다. 저렇게만 끝나지 않고 노조들은 갈수록 규모가 커져갔으며 조헌제 사장의 집 앞까지 찾아가서 시위를 하고 회사 앞은 물론이고 사장의 취임식에도 노조복으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조헌제 사장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노조 대표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 옷을 벗고 정장차림으로 취임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렇게 그들의 대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노조가 그렇게 극성을 부린 이유가 있었다. 회사가 적자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이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대송이 공기업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려워진 사정에 구조조정에 들어가 피땀 흘리며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회사에서 나가게 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공기업이 민영화가 되면 또다시 경영자는 구조조정을 할 것이며 그의 결과로 인원감축이 이루어 질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노조와 회사 임원들 간의 갈등이 계속 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보고 있는 제3자인 나의 입장에서도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시간낭비 였기 때문이다. 특히 10명도 안되는 수만 남고 직원 모두가 노조에 가입하여 파업을 일으켰을 때는 정말 이 회사가 망하는 구나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때 조헌제 사장은 남은 그 인원으로 힘들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때의 실정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헌제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매출액의 반을 이자로 내야하는 빚더미 회사의 실상을 직원들에게 거의 매일 이메일로 솔직히 알렸다. 그는 손익개념을 체득하지 않으면 회사가 살 수 없다. 회사가 문을 닫으면 직원들도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계속해서 설득했다. 가족들이 회사를 믿을 수 있도록 반드시 고용보장을 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직접 써서 직원들 가정에 수차례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취임식에서 했던 말이 있는데 그것은 “저는 싸우러 운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러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 회사를 월드베스트 종합물류회사로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기존 송유관 사업의 경쟁력을 제고함과 동시에 일반물류. 냉동. 저온 창고사업과 개인물류까지 아우르는 종합물류기업으로 변신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여기 모여있는 여러분과 함께 대송의 새로운 역사를 쓰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의 모든 것은 부정합시다! 모든 분야에서 변화와 혁신을 이뤄냅시다!" 이다.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움에 노조를 결성해 시위를 벌였던 사람들도 조헌제 사장의 여러 노력 덕분에 하나 둘씩 제자리로 돌아왔고 문제는 점점 진정되어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대송이 활약을 펼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대송인들이 하나되어 펼쳐나갔던 그 활약상을 짚어봐야 겠다. ‘돈 되는 일은 우리가 한다’라고 처음 스토리가 시작된다. 말 그대로 돈 되는 일은 대송인들이 모두 했다. 조헌제 사장이 부임해서 처음 한일은 모든 건물을 창고까지 빼먹지 않고 구석구석 살피며 건물의 주변 환경까지 보는 것이었다. 조헌제 사장은 생각했다. 11년 동안 적자만을 기록하는 기업이 이렇게 좋은 건물에서 헬스나 모든 서비스를 받고 있고 또한 한사람 당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 소비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을 본 건물 옆에 있는 작은 건물들로 옮기게 하였는데 옮길 때 인부들을 부르지 않고 직접 직원들의 힘으로 짐을 나르고 이사를 하게 하였다. 나는 이것 또한 의아했으나 최대한 자본을 아끼려는 조헌제 사장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수백의 사람들이 짐을 나르는데 고작 하루밖에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상과 모든 짐들을 옮기는데 사람들이 지치기도 하고 각자 불만을 털어 놓기도 했지만 결과는 조헌제 사장의 말대로 진행이 되어 끝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이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060777 영문과 서소희목차1. 머리말2. 헨리 8세의 영국교회(성공회) 수립3. 에드워드 6세 그리고 메리여왕의 종교4. 엘리자베스여왕의 영국 국교회 (성공회) 확립5. 맺음말1.머리말최고의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던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시작된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조를 거치면서 변모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때 영국국교회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된다. 영국 국교회가 성립되는 배경과 왕조별 변화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16세기 초엽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을 살피자면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영주들이 몰락하고 통일적인 왕권이 강화되었고, 특히 헨리 8세 때에는 이미 절대 왕정이 확립되어 그가 전제군주로서 절대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도 종교 일을 요크와 캔터베리 대 왕교에게 위임하고 있는 터라 대륙의 각국의 간섭과 교황의 속박이 심하지 않았다. 또한 일찍부터 신흥시민계급이 성장하여 민족주의 국가통일? 독립정신? 반 교권주의 사상 등이 발달하였고, 존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사상의 보급, 루터주의의 확산, 기독교 인문주의의 전파 등이 상당하였다. 헨리 8세는 이러한 환경을 배경으로 용이하게 로마 교황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국교를 수립할 수 있었고 교회의 수장으로 추대될 수가 있었음은 물론 종교개혁을 계기로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영국의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교회법의 집행, 교회재판소의 운영에 있어서 독자적인 권위와 지위를 유지하였고, 국민들의 종교생활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였으며, 성직자들에 대한 과세권,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서임권을 교황과 공동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휴머니즘은 영국 종교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토머스 모어, 존 콜레트 등은 초기 크리스트교 정신과 합리주의적 비판정신에 입각하여 가톨릭교의 형식적 예배와 승려 계층의 타락과 부패를 공격하고 마리아 숭배사상을 비판하고, 신도들의 교육향상? 성직자들의 자질과 지적 발전을 주장하더불어 신도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헨리 8세와 영국교회가 로마교황으로부터 분리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착잡한 이유와 이해관계가 엉켜 있었다. 헨리 8세의 왕후 캐더린은 처음에 16세 나이에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헨리 왕 아더와 결혼하였다가 겨우 6개월 만에 형이 죽자 동생 헨리와 재혼을 하였는데 이것은 정략결혼이었다. 이는 영국과 스페인이 공동의 적,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헨리보다 6세나 연상인 캐더린은 7남매를 출산했으나 모두 유산?사생?유아로 사망하고 얻은 것은 딸 메리 하나뿐이었다. 헨리 8세는 튜더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왕자가 아닌 남자후계자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더구나 헨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자신이 형수와 결혼했기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캐더린과의 이혼을 원했던 것인데 때마침 앤 볼린과 깊은 애정에 빠지게 되자 이혼문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2. 헨리 8세의 영국교회(성공회) 수립헨리 8세는 교황에게 이혼승인을 요청했으나 캐더린 왕후가 때마침 루터파와 싸우고 있던 세력이 막강한 신성로마제국의 칼교황의 이모였기 때문에 그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로마교회와 단교할 것을 결심하고 1529년에 종교개혁의회를 개최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하였다. 이 의회가 오랜 시일에 거쳐 심의? 통과시킨 법안들은 신중한 계획에 의해 재정 되었다 기 보다 압력에 의한 것이었고, 대부분 영국 성직자들의 통제와 교황의 위협을 겨냥한 것들이었다. 헨리 8세의 궁녀 앤 볼린이 아기를 가지게 되자 1533년 5월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더린의 혼인을 무효화 시키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곧 헨리는 의회로 하여금 수장령을 통과케 하였으며 이 선언에 의해 영국교회는 특이한 종교개혁의 과정을 거쳐 로마 교황과의 일체의 관계를 끊고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때 영국의 모든 신민들은 헨리 8세의 수장직을 인정하고 로마교황의 수장직을 부인하는 선서를 금을 주어 퇴직하게 하였고 1만 여명의 정규성직자를 타 직업으로 전환케 하였다. 그리하여 왕권의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하게 되었고 국교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영국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이 국왕의 개인문제로부터 발단되고 정치적? 재정적 문제와 결부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하부에서 철저한 교리상의 문제를 들고 나와 국교에 불복하는 치열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종교정책상에도 변화와 탄압이 있어 항상 불안과 동요가 뒤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교회는 가톨릭교의 의식과 교리를 대부분 그대로 채용하였기 때문에 신? 구교 양파로부터 항상 불만을 사게 되었다. 영국국교는 로마교황 대신 영국 왕을 수장으로 하는 가톨릭교회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특별히 개혁된 점이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톨릭의 신조를 약간 수정하였고 영어판 성서를 사용하게 되었을 뿐이다. 모든 영국인은 화체설, 한 종류의 미사, 성직자의 독신생활, 참회의 필요성, 순결의 맹세 등을 믿고 실천할 것을 강요하였고 화체설을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화형에 처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다.3. 에드워드 6세 그리고 메리여왕의 종교헨리가 죽자 그의 세 번째 왕비가 낳은 유일한 왕자 에드워드 6세가 겨우 9세의 어린 나이로 서머세트공작등 유명한 개혁자들의 협조로 즉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교파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즉위 후에도 신교사상이 짙은 이들에게 정치를 위임하고 특히 그의 보호자인 서머세트공작이 1549년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교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서머세트공작은 분명히 영국교회정책사상 최초의 개신교 추진 통치자였으며 이때서부터 영국의 종교개혁이 정치적 성격에서 점차 종교적인 것으로 이행 되었다.에드워드 6세가 16세로 죽자 헨리 8세의 유언에 따라 첫 번째 왕비의 딸 메리1세가 즉위하였다. 메리여왕은 모후의 전통적인 가톨릭주의를 물려받았고, 이복오빠 에드워드 밑에서 일반기도서를 거부하여 박해를 받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였기 때문에 즉위 후 피를 피로 씻는그러나 반교황적인 국민적 감정을 고조시키고 수도원 사지를 매수한 사람들은 단 한 치의 땅도 반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국민들의 반발이 강한데다가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왕위계승자로 예정되어 있는 필립 2세와 결혼을 한 것은 국민감정을 더욱 악화시켰고 설상가상으로 메리가 스페인을 도와주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시작하자 국민의 불만과 불신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 때 에드워드 6세 때 종교개혁을 추진한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와 주교 리들레이 등과 신교목사들은 도주하기를 거부하여 스스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고 또 다른 300여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은 영국역사상 보기 드문 참혹한 박해사건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사서 메리여왕을 아직까지도 피에 굶주린 메리, 피의 여왕으로 부르게 되었다.메리 1세와 그녀를 보좌한 폴 추기경은 철저한 가톨릭 신자일 뿐만 아니라 비 융통성? 비타협성 때문에 가톨릭 부흥의 꿈은 무너지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맺게 되었다.4. 엘리자베스여왕의 영국 국교회 (성공회) 확립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 앤 볼린이 낳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메리의 뒤를 이었다. 여왕이 즉위한 후 가장 먼저 하려고 한 것은 영국국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려는 것과 국민의 비 가톨릭화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정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종교정책에서 어느 특정 교파에 치우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중립적인 타협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1559년 그가 생각한 최대의 과제는 종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왕 수장령과 예배 방식 통일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일이었고, 1563년에는 영국국교의 교회를 규정하여 제정? 공포하는 일이었다. 이것들은 8년 후에 모두 영국의 법률로 확정되었는데 공통적인 특색은 타협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점이라 하겠다.1580년경 영국에는 가톨릭 신자가 전 인구의 겨우3%(약 12만 명, 1520년경에는 가톨릭신도가 압도적으로 다수였다)에 불과하고 국민의 대부분이트들이 정치적 비판을 삼가고 종교범위 내에서 활동하는 한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와 종교인들 사이에 별 마찰이 없었고 메리여왕시대에 대양으로 망명하였던 수많은 신자들이 귀국하여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558년도에 이르자 영국 종교개혁은 최후의 건설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지난 20년 동안의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최후 단계의 성격도 대략 결정되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른 누구보다 문예부흥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마키야벨리의 정치적 교활성에 에라스무스의 인도주의를 가미한 사람과 같은 여왕은 백성들의 정신적 경향을 잘 읽고 있었다. 왕위지상권도 회복했으나 자기 아버지처럼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다소의 수정을 가하게 되는데 그래서 "여왕은 이 나라에서만 최고의 통치자이다"라고 잘 다듬어진 교서가 선언되었던 것이다. 여왕의 실제 활동은 국왕지상권의 범위를 더 명백하게 제한하고 있다. 헨리는 아무런 제한 없이 변덕스럽게 종교상의 권위를 휘둘렀지만 엘리자베스는 자기라는 인간을 종교 법령의 권한 내에 두고 법령에 의하여 선출된 교회 대표회의를 통하여 교회 내에서 자신의 왕권을 활용했다. 왕권에 의해 탄압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던 여왕시대의 교회는 모든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 의회가 종교행사에 관하여 참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교회 통치는 공의회와 주교들의 관할이라고 규정지었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여왕은 영국 성공회의 생활을 간섭하고 그 구조를 변경시키려고 했던 퓨리탄 의회의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 막으면서, 그녀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 이 원칙을 고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왕위 지상권이 의회 절대권은 아니었고 원칙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은 영국교회의 법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엘리자베스의 왕위지상권의 주 대상은 가톨릭교도에 대한 회유에 있었다. 여왕은 그녀의 국가주의적 정치론이 종교적 의미를 동의해 줄 것을 국민에게 요청한 것에 불과기에 영국인이 국가교회에 적어도 표면상 충성한다고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