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황도 개경』을 읽고 나서...이 책을 읽으면서 또는 읽고 난 후 나는 500년 가까이 고려의 중심지로서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그 시대의 개경이 눈앞에 펼쳐지듯 가까이 느껴졌다. 여타 다른 사실 전달 위주의 책이 아닌 이 책은 고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생활사 중심으로 엮어졌기에 사실감이 더 하는 듯 했고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그림들을 접하면서 막히는 곳 없이 재미있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필자들은 책머리에 “고려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분단 극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남북이 분단이 된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 고려의 역사가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사도 자랑스런 우리네 역사이며 고려에 대한 이해는 신라, 조선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대해서 여태껏 몰랐었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으며 책을 덮으면서 개경이 한층 친숙하게 느껴졌다.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고려의 수도로서의 개경의 구조를 각각 풍수, 성곽, 궁궐과 관청, 태묘와 사직, 절,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으며, 2부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하여 도로, 시장과 주거, 조세, 구휼제도, 교육,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축제를 다루면서 고려시대 가장 높은 지적, 문화적 수준을 구가하며 고려 문화의 정점을 당시 개경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있다.서기 896년 후고구려 왕 궁예는 예성강 일대의 호족 왕건에게 송악산 일대에 성을 쌓게 했고, 2년 후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궁예는 7년 후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은 이듬해 다시 송악으로 돌아왔다. 사신사四神砂를 고루 갖춘 장풍국의 명당으로 꼽히던 송악은 이렇게 해서 개경이란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 화려하게 떠올랐다. 현재 많은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는 신라,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500년 가까이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던 곳된다. 또 개경 주위에 300개 이상의 절이 있었으며, 왕실을 비롯한 백성들의 모든 의례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등 불교도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고려는 정치이념으론 유교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이념을 제외한 모든 면, 특히 사상면에선 불교가 일반민중의 모든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정도로 절대적 힘을 발휘했으며, 고려 역사=절대적 권위의 불교=수많은 절의 건립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앞으로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짚어보며 왜 고려는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가와 불교의 발달이 고려인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 걸쳐서 살펴보도록 한다.송나라 사진 서긍徐兢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해 그 지경에 들어서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고 한 말은 건국 초기 고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자연 지세를 거스르지 않는 풍수의 사고를 바탕으로 도읍을 정하고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나라와 왕실이 중국의 그것과 대등하다는 신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묘실墓室을 경영한 것은 고려의 주체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치이념으로는 중국의 유교 질서와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불교국가로서의 위상을 가진 특성이 강력히 응축되어 탄생한 도시가 개경이다. 개경 주위에만 300여 곳의 절이 있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온 개경 사람들이 어우러져 즐기는 축제였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불화 등의 제작과 불경 간행을 통한 눈부신 인쇄ㆍ출판문화의 발전은 이런 환경 속에서 가능했다.무엇보다 개경은 사람들의 땀내 나는 생활의 공간이었다. 시전市廛과 여항소시閭巷小市라 불리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청자, 벼루와 당대 최고 품질의 먹 등 문방구를 거래했고, 그곳에선 여자들의 머리장식과 화장품 등 패션 상품도 주요한 거래 품목이었다. 그리고 시장과 관아 주변에는 권세가들의 주택가가 밀집해 있었다. 필자들은 이 개경의 거리에서 벌어지던 싸움질, 무인정권기 최충헌ㆍ최충수제도를 변형 수용해 이룬 개경의 특징은 조선의 수도 한양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개경은 벽란도를 드나들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코리아’란 이름을 세계에 알린 바로 그 수도이다. 그만큼 유연하고 개방적인 상업도시이기도 했다.앞서 개경이 사신사四神砂를 고루 갖춘 지형이란 말을 했는데, 여기서 사신사四神砂란 풍수의 대상이 되는 땅의 전?후?좌?우에 있는 산을 말한다. 사신사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을 중시하여 그를 따라 성곽이 건설되었고, 또한 각 산이 주요 건축물들의 입지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개경은 풍수적 관점과 도시설계가 잘 맞물린 곳이다. 이처럼 가급적 자연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삶의 조건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선택하고자 하는 태도는 우리나라 풍수風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나라의 도읍이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풍수적 관점뿐만 아니라 국방 및 교통 그리고 물산物産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도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데, 개경은 한반도 중부지방에 위치해있으면서 예성강과 임진강을 좌우로 두르고 송악산 아래 분지지형에 자리잡은 도시이다. 그러므로 개경은 풍수지리적 여건뿐만 아니라 재생산구조와 제반 물류物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고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는 대내외적으로 격심한 혼란기였는데, 대내적으론 나말여초의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고, 대외적으론 당송唐宋 교체기 중국사회의 변화와 발해 멸망 이후 거란 등 북방세력이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려는 국방수비가 불가피했는데, 고려시기의 성곽은 대개 단일 성곽이나 중성을 쌓은 2중성 구조로 이루어졌고, 성문?수구水口?성두城頭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그 외곽에 차성遮城이나 보자堡子등을 두어 중심성곽을 보호하였다. 개경?서경?강도와 같은 국가의 중심 도성은 궁성?황성?나성의 3중성 구조였는데, 이는 군사적?상징적 성격을 모두 함축하였다. 궁성宮城은 정궁인 본궐本闕 및 기타 국왕과 관련된 시설들을 둘러싼 것이며, 황성은 궁성을 며, 도성 정비를 완성하는 결과물이었고, 이를 기준으로 도성의 안과 밖, 그리고 동교?서교?북교?남교(東郊?西郊?北郊?南郊, 성동?성서?성북?성남)의 지역적 구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고려는 개경 전체의 주산이 되는 송악에 의지하여 가장 중요한 궁궐을 두고, 성종 때에 그 좌우 산줄기인 청룡과 백호에 의지하여 태묘太廟(혹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지었다. 고려의 종묘?사직 제도 도입은 유교와 그 예제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중국의 오례五禮체제를 받아들여 새로운 예제질서를 구축하려 했고, 두 제도를 같은 시기에 함께 도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바로 자신들의 국가와 왕실이 중국과 대등하고 자신들이 천자국에 살고 있다고 믿었던 고려인들의 신념은 태묘와 사직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후 태묘제도는 정종靖宗때에 이르러 한차례 논란을 겪게 되며, 1232년(고종 19)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태묘와 사직의 신주들도 같이 옮겼다. 결국 종묘?사직은 고려가 망하면서 그 운명을 다하였다.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수백개의 크고 작은 절이 있으며 그중에는 규모가 수천 칸에 이르는 것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적인 불교문화가 산간불교山間佛敎라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려의 불교는 국도불교國都佛敎의 성격이 강하여 수도 개경에는 국가 또는 왕실에서 중시하는 절이 수십 곳에 들어서 있었는데, 고려 초기 절의 창건이 개경의 도시구획과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정치는 유교에 입각하되, 민심수습과 국민단결은 불교를 통해서 하겠다는 태조의 입장이었고, 이는 고려 500년간 유지된 국가 운영원칙 중 하나였다. 한국역사상 불교가 국가체제 내에 완전히 포섭되고 전全국민적인 종교로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확고히 정착시킨 것은 고려시대였다. 그 중심에 있던 개경의 사찰은 고려불교를 대표했으며, 고려시대 불교사상과 문화는 개경의 사찰과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이 시기의 절은 개인적인 소원을 기원하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장례와 제사도 담당하는 곳이었으하였다. 문득 내가 개경의 절에서 기분 좋은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개경 영역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왕의 활동공간인 황성과 5부방리의 영역을 포함한 도성, 그리고 성외城外 지역에 해당하는 4교로 구성되어 있다. 개경의 구획은 5부 35방 344리로 편성되었다. 또한 왕실을 보위하고 왕도王都를 유지하기 위해 왕도 외곽지역에 설치한 특별구역으로 경기가 있었다. 원래 경京은 천자의 도읍을, 기畿는 천자가 직접 관할하던 도성 주위 1천리의 땅을 의미하였다. 천자의 권위를 반영한 고려의 경기는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고려 내내 왕경을 보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음으로 개경도시내內의 문제를 처리하던 행정관서와 관원들의 업무를 살펴보겠는데, 5부방리의 임무가 거주민과 직접 접촉하면서 실무를 처리하던 기구였다면 개성부는 그것을 총괄하는 한편 중앙관서와의 연결에 많은 비중을 두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이과같이 5부와 개성부는 제각기 중앙관서와 연결을 가지는 독립된 관청으로서 존재하였다.고려는 식생활의 경우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특별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의생활이나 주생활, 즉 무엇을 입고 어떤 곳에 사느냐에 대해서는 차별을 두었다. 하지만 적어도 개경에선 개인의 의사와 경제관계에 의해 주거위치가 선택되었고, 신분에 따른 주거위치의 차별이 없었다. 그리고 시전市廛은 개경 도성 안의 중심부이자 간선도로의 연변에 위치하였다. 시장거리는 민심의 불안과 동요의 요인을 줄이는 사회통합의 장이 되기도 했으며,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슬픔과 기쁨의 공감대를 확인함으로써 지배자의 권위를 다지고 외교적인 의례儀禮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이렇듯 개경의 시장은 개경 도성의 중심으로서 물류와 교통의 요충이었을 뿐 아니라 고려의 왕과 심민臣民이 만나는 하나의 광장이었다. 개경엔 경작토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전세田稅는 다른 조세에 비해 부담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 가장 큰 부담은 수도 경영을.
E.H.카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교수님께서 한국사 탐구 시간에 먼저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는 역사일반에 대해서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를 대략적이나마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책을 추천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E.H.카 著 『역사란 무엇인가』이다.책의 내용이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딱딱하고 읽기에 다소 어렵고 지겨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터라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용어도 이해하기에 어려웠다. 그래서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간단히 요약정리 하고자 한다.먼저 책의 구성은 제1장 역사가와 사실, 제2장 사회와 개인, 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 제6장 넓어지는 지평선 이렇게 총 6Chapter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제부턴 각 Chapter마다 작가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그것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제1장 역사가와 사실에서는 E.H.카는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는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의 관계에 있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오,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고 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하다, 사실을 못 가진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 없는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의 첫째 해답인 것이다. 제2장 사회와 개인에서는 사회와 개인은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필요한 보충관계에 있다. 역사가도 하나의 개인이다. 딴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하나의 사회현상이며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바로 이러한 자격으로 역사가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부터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동시에 그 입장 자체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의 다음과 같은 언급들은 의미심장하다. 카는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그의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 고 충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가는 개인 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 이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을 살펴보면, 역사학은 과학인가? 역사연구에 있어 종교와 도덕은 어떠한 위치를 갖는가?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역사를 과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과학적으로 만드는 일, 역사가로서의 자질에 좀더 엄격한 기준을 부과하고 그리하여 역사가들 자신부터가 자기 일에 대해 좀더 강한 신념을 가짐으로써 역사의 수준을 높이는 일 이라는 것이 카의 결론이다. 역사란 조커 없이 노는 트럼프 게임 같은 것 이라는 게 카의 소견이다. 역사와 도덕의 관계는 역사가가 자신이 다루는 역사적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관념을 내릴 필요는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역사가와 도덕가의 입장은 다르기 때문이다.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서는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많은 원인의 복합체를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기가 작성한 여러 원인의 목록을 앞에 놓고서는, 그것을 질서지여야 하겠다. 제 원인의 상호관계를 결정할 수 있도록 거기에 상하관계를 설정해야 하겠다. 혹은 "결국에 가서는""궁극적으로는" 어떤 원인과 어떤 종류의 원인을 최종 원인, 즉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지어야 하겠다는 직업적인 강박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의의라는 견지에서 행하여지는 선택과정이다. 역사가는 다수의 인과연쇄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들을, 아니 그것들만을 빼내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의의에 대한 규준이 되는 것은 자신의 합리적 설명과 해석의 원형 속에 인과연쇄를 맞추어 넣는 역사가의 능력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과거의 기록이 보존되기 시작한 것은 미래 세대의 복지를 위한 것이었다. 훌륭한 역사가들은 역시 미래라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다. 역사가는 왜냐라고 묻는 동시에 어디로라고 묻는 법이다. 역사란 결국 역사적 의미 라는 맥락에서의 선택 과정 , 다시 말해서 실제에 대한 인과적 태도 에 의거한 선택 체계 라고 할 수 있는 바, 역사가가 자기목적에 맞는 의미 있는 사실 을 골라내고 더 나아가 이것들로 형성되는 원인과 결과의 무수한 연쇄들 가운데서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 만을 뽑아내고자 한다. 역사적 의미에 대한 기준은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틀에 이러한 연쇄를 적합하게 만드는 역사가의 능력에 있다. 제 5장 진보로서의 역사에선 카는 역사를 진보의 과정,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흐름으로 제시하고 있다. 역사란 한 세대에서 획득된 기량이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과정이 반복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보를 일컫는 바, 이 점에서 역사는 진보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진보하는 과학 이기도 한 것이다. 진보란 과학 지식의 축적을 통한 자연환경에 대한 지배력의 증대와 사회 질서를 형성하고 사회를 조직하는 인간의 힘의 증대를 의미한다. 카가 정의한 진보에 개념은 다음과 같다. 진보란, 말 그대로 앞으로 계속 움직이는 것- 인간이 신념을 가지고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 목적을 향한 의식적인 움직임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과정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능력의 진보적인 전개를 믿는 것을 뜻한다. 는 것이다. 끝으로 제6장 넓어지는 지평선에선 카는 현재와 미래 를 검토함으로써 현대에 있어 역사와 역사가가 처해 있는 위치를 점검하고 있다. 인간역사의 진보는 기존 제도에 이성의 이름으로 과감히 도전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인 바, 그 같은 용기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십자군 전쟁의 바른 이해에 도달하면서... >교수님께서 과제로『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내주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지금껏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의 시각에서 종교적인 편협성 때문에 아랍인에 대한 시각이 왜곡되었고,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아랍 세계의 자료와 생각을 모아 줌으로써 비로소 균형 잡힌 감각과 객관성을 가지고 십자군 전쟁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셨다. 나 역시 이제껏 십자군 전쟁은 단순히 이교도에 유린당하는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하는 고귀한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한 성전(聖戰)으로 알고 있었고,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알고 있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정의는 아랍 세계를 철저히 무시한 유럽인들이 만들어냈을 뿐이며, 십자군 전쟁에 대한 나의 기본 시각을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되었다.이 책은─1부 침략(1096~1100) 1장 프랑크인들 들이닥치다 2장 저주받을 갑옷 제조인 3장 마라의 식인종, 2부 정복(1100~1128) 4장 트리폴리스의 2천 일 5장 암살단 아사신, 3부 반격(1128~1146) 6장 다마스쿠스의 음모 7장 에미르의 눈에 비친 야만인들, 4부 승리(1146~1187) 8장 성왕 누르 알 딘 9장 살라딘의 등장 10장 관대한 군주, 5부 유예(1187~1224) 11장 살라딘과 리처드 12장 예루살렘의 운명, 6부 추방(1224∼1291) 13장 몽골인의 채찍 14장 신이여 다시는 그들이 이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옵소서─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장 극악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에 분노하고 고뇌했던 당대 이슬람 지식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의 침략 전쟁이고, 이방인들이 저지른 대학살과 약탈로 삶이 짓밟힌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이었다. 성지회복이라는 대외적인 명분을 내걸고 시작된 십자군전쟁의 진짜 속셈은 셀주크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는 소아시아와 오리엔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물자를 약탈하겠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기에 있었다. 실상 십자군이 성지 탈환의 흉내라도 낸 것은 1차와 5차 원정 정도였다. 1099년 7월 15일, 40일간의 포위 끝에 성지 예루살렘을 차지한 그들은 시퍼런 칼을 들고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슬람 사원은 불탔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것이 위대한 1차 십자군 전쟁의 실상이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한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은 같은 그리스도 교인들을 살육한 전쟁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이 4차 원정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다. 당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상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십자군이 동원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잔티움 제국은 회복 불능의 쇠퇴를 맞게 되고, 결국 1453년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에게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십자군 전쟁은 잔혹한 살육과 약탈, 문화유산의 파괴로 점철된 추악한 전쟁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이슬람 세계의 앞선 문화를 접했고, 그 당시 낮은 문명권에 머물러 있던 유럽에겐 도약의 발판이 되었으며, 찬란한 전성기를 누렸던 아랍에게는 쇠락의 길을 걷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이슬람교와 기독교라는 두 일신교의 뿌리깊은 반목과 갈등의 역사적 단초가 되었다는 점도 강조된다.이 책은 크게 기독교인들의 침략행위와 그들의 만행을 쓰고, 이어서 아랍내의 파벌, 그리고 반격으로 나아가는 형식을 취한다. 아랍인들은 처음 십자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왜 왔는지 몰랐다. 그래서 극렬하게 싸우기 보다는 도망가기에 바빴다. 기독교인들은 지금의 터어키 아래 시리아 땅의 알레포라는 곳을 공격해 들어갔다. 아랍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원정을 왔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가리라 믿고 그들의 식량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알레포 근처 마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기독교인들이 아랍인들을 구워서 먹는 식인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아이들을 말이다. 이 사건은 아랍인들의 눈으로 볼 때 전쟁중에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으며, 기독교인들은 아랍인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이었다. 짐승이나 가축으로 본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나는 기독교인들의 행위는 여태껏 아랍인들이 보거나 듣지도 못한 행위였다.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땅과 문화 그 모든 것이 철저하게 망가진 곳은 아랍이었다. 아랍인들은 그 전쟁으로 당시 세계적 우수문명인 아랍이 영원히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되고, 십자군들은 남의 나라 땅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 어느 날 훌쩍 떠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이같은 아랍의 상황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0년 전, 소설가 김진명의『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남북한이 힘을 합쳐 핵무기로 일본을 무찌른다는 내용의 판타지 소설인데, 한국인들 속에 있는 무언가 말 못하는 역사적 울분을 대리 분출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쳐들어와서 마음껏 노략질하고 불을 질러 모든 문화재를 소실시키고, 어느 날 패해서 훌쩍 돌아간 일본인들을 보는 폐허의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아랍인이 보는 십자군 전쟁과 서구인이 보는 십자군 전쟁의 차이가 너무나 크며, 그 간격이 서로간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인정 없이는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교수님께서 이번 학기 첫 수업시간에『린 마을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라는 과제를 내주셨는데, 내주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1949년 이후~1990년 초의 중국현대사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또 이 책은 저자와 예서기 간의 대화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 재미있으면서도 사실적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동안 중국 현대사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그 전의 시대들보다 더 흥미도 있었고, 수업시간 중에 중국 현대사를 다룬 비디오도 보면서 나도 어느 정도는 그 시대에 관해서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본 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내가 알고 있었던 중국의 현대사는 역사 속에 가장 중요한 존재인 농민이 빠진 빈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일반인에게 보여지는 역사라는 것은 지배자에 의한 역사였던 것이었다. 지금부터 수업 시간에 배웠던 중국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린 마을 이야기는 1949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중국 동남부 연안지역의 린 마을에 사는 공산당 간부 예서기의 눈을 통해 한 개인, 한 마을, 그리고 한 국가로서의 중국이 지난 40년간 동안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 어떻게 성장ㆍ혼란ㆍ변화되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한 대학의 인류학 교수로서 중국 급변하는 근대사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지리적으로는 중국의 일부였고 국공내전 후에 자유진영을 타고 경제발전을 이룩한 타이완과 가까워 개혁개방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는 샤먼 지역, 그 중에서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린 마을을 연구 장소로 정하고 1년여의 현지 조사기간 동안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관리인 예서기의 상세한 인생사와 함께 린 마을과 인근 지역 주민들과의 면담도 덧붙여, 객관적으로 중국 혁명의 다양한 국면들이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보여주고 분석하였다.이 책은 총 12장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그 차례를 살펴보면-프롤로그, 가족사, 해방, 굶주림,굶주림, 활동가가 되다, 귀향, 공안 주임, 번영기, 해체, 마을 간부들, 1990년대 마을의 변화, 린 마을은 어디로?-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농민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농민은 혁명의 과실을 맛보았는가? 그들은 과거의 봉건적인 멍에로부터 진정으로 해방 되었는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부정적인 것 같다. 예 서기의 삶과 린 마을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알게 된 것은 오늘날 중국 농민은 여전히 사회적 위계의 최하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현대 중국에서 시도한 가장 논쟁적인 정책은 농민가족을 단순한 경제적?사회적 단위로 개조하고, 농민가족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정신적?의례적 의미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여러 정책 중에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정책은 중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자행했던 산아제한운동이었는데, 그것은 정부가 주도한 정책 중 전통적인 농민가족을 궁극적으로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는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1980년대 초 이후 농촌지역에서 한 가족 한 자녀 정책 아래 실시된 운동이었다. 적절한 퇴직연금이나 노인복지정책이 없는 상황에서 늙어 가는 농민들이 갖고 있는 최상의 보험은 경제적인 생산력을 가진 아들인 것인데, 정부가 각 가족은 아들과 딸 구별 없이 오직 한 자녀만 가질 수 있는 산아제한운동을 실시함에 따라 비극적이게도 농민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아 살해를 광범위하게 자행했다. 이것은 정부의 이해와 농민의 이해가 상충된 데에서 비롯된 것인데, 인구성장률을 감소시켜서 잠재적인 인간과 토지의 충돌을 지연시키려는 정부의 이해와 앞서 설명했듯이 집안의 대(代)를 잇기 위해서도 아들이 꼭 필요했던 농민의 이해가 맞물려서 생긴 참혹한 사태이다.예 서기,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거칠고, 공격적이며, 오만한 지역폭군 같았지만, 그는 대중들에게 조심스럽게 감추고 있는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당 지부의 우두머리로서 개인적인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관점에서 만사를 고려해야만 했으나, 마을사람들은 그가 과거의 실패한 정책과 약속이 가하는 위협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우리는 예 서기의 삶과 일을 통해 한 국민의 탄생이라는 격동적인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예 서기가 린 마을에서 보았던 기쁨과 고통, 연약한 발로 일어서려는 불안정한 시도, 시행착오와 실패를 딛고 이룬 성취가 수백 배 수천 배 확대되어 중국 이라고 불리는 집합체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린 마을의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예 서기는 중화제국시대의 인자한 지현(知縣)처럼 행동했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문자 그대로 마을사람들을 위해 법조문과 조례를 작성하며, 그들이 소송을 관장하고,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법권을 행사했다.처음 저자는 예 서기를 농촌 공산당 간부 중에서도 예측 불가능하고, 참견하기 좋아하고, 거만한 유형을 대표하는 가장 악질적인 인간으로 간주했는데, 후에 예 서기와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점점 처음 인상과 달리 그를 생각하며, 나중에는 린 마을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경외심마저 갖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자는 그를 통해 마을의 사건들에 접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열망, 그리고 많은 문제들에 관한 그의 믿음과 견해에 대하여 상당량의 정보를 축적했다. 저자가 예 서기와 처음으로 심층면접을 한 것은 자기 아버지 무덤이 훼손당한 사실을 안 그가 밤늦게 찾아온 그날 이후였다. 저자는 그와 아버지 무덤으로 다음날 찾아가게 되는데, 거기서 저자는 가족 경작지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여성들을 보고 중국인들이 얼마나 근면한지 깨달았고 농업생산책임제라는 새 정책이 왜 성공적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해방으로 인해 린 마을사람들의 기존의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데, 지주와 부농은 가지고 있던 땅과 지위를 잃어버렸고, 예전의 소작농과 농업노동자들은 중국의 새로운 명예로운 시민으로 선언되는 등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1949년 농촌에서의 인민정부 수립과 1951년 토지개혁은 농촌지역에 공포의 지배를 낳았고 내부에 증오의 씨앗을 뿌렸는데, 한 예로써, 린 마을에선 이런 개혁으로 인해 계급의 적 이 될 뚜렷한 지주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우씨 형제는 투쟁대회를 할 때 린보팅 같은 부농을 주요 표적으로 삼고, 그저 자기를 깔보았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해주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여기서 예 서기는 문제는 단지 정책이 아니라고 하는데, 계급투쟁이라는 관념, 그리고 농민을 다양한 계급으로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중국 정부의 근본적인 실수라고 지적한다. 계급차별은 서로간의 증오를 조장하는데, 1978년 중국에서 계급분류를 철폐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은 아주 잘한 것이라고 했다.학창시절에선 지금은 그의 아내가 된 바오주와 그는 해방 전에 두 마을(린 마을과 투쿠 마을)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잊어야 할 봉건적인 인습이라고 마을사람들을 설득했는데, 바오주와 그는 새로운 중국과 함께 성장해 온 새로운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과거 역사의 짐을 벗어던질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토지개혁 이후에 얼마나 많은 토지를 소유했는가에 상관없이 이제는 모든 수확물이 노동량에 따라 분배되고, 농민들이 농업노동자가 되게 되는데, 일거에 정부는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토지를 가져가 버렸다. 농민들은 마오 주석과 당을 너무나도 신뢰했기 때문에 정부가 선전한 궁극적인 낙원이 도래하려면 이런 모든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덧붙여 예 서기는 봉건제의 굴레를 벗고 완전한 해방을 가져온 공산주의 혁명이 없었더라면 결코 중국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다음으로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관해 말해보자면, 예 서기는 대약진운동을 곧 굶주림과 동일시하였는데, 거의 30년이 지나서도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1958년 후반 인민공사가 농촌지역에 설립되면서 대약진운동은 시작되었는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 는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아래 전 중국이 계급 없는 하나의 인민공사가 될 때까지 집체의 규모를 계속적으로 늘릴 수 있다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단숨에 달성할 수 있고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1959년 가을경,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 온 기근은 사회의 모든 가식과 허위를 끝장내 버렸고, 이후 20년 동안 기근문제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예 서기는 여기서 의문을 가졌는데,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식량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왜 부족했던 것일까? 정부는 그 기간 동안의 기근을 자연재해 탓이라고 선전하는데,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 재앙의 진짜 이유는 인간의 과오라고 결론짓고, 마오 주석은 그 이후 30년 동안 전 중국을 휩쓸었던 모든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집체체제를 설명했는데, 집체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동기부여라고 말하면서 농민들이 일과 보상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즉 자신들이 획득한 노동점수가 전체적으로 합산되는 과정을 거쳐서 계산된다고 알고 있을 때, 그들은 일을 성의 없이 대충 하게 된다고 말했다.그가 얘기한 문화대혁명은 최근 역사의 특징인 내부의 갈등과 증오로 가득 찬 광란의 시기 중 하나였다고 하면서, 정치적 광신은 전염성이 아주 강한데 끊임없는 파벌싸움으로 가득 찬 환경에서 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인해지고 비합리적으로 되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