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야류란 이름은 수영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익히 들어왔을 것입니다. 나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래야류는 이제껏 접해본 적 없는 생소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한국문화의 전통이란 수업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탈놀이를 배우고 특히 부산의 대표적 탈놀이 동래야류를 볼 수 있어서 뜻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실용영어시간에서 부산의 자랑스런 어떤 것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해운대나 누리마루, 광안대교 등등 이었습니다. 저 또한 동래야류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설명치 못하였습니다. 이번 동영상을 보면서 동래야류가 중요무형문화제 제 18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동래야유 중에서 인상이 깊게 남던 것은 길놀이입니다. 길놀이는 탈놀이를 하기 전에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놀이는 마을사람들에게 이제 곧 탈놀이를 할 것이니 어울려 놀고 싶은 사람은 다 모여서 한번 신명나게 놀아보자고 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나와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놀이판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울림은 근래에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끌리게 된 것 같습니다.이러한 길놀이에서 바로 탈놀이가 행해지는 것은 아니고 대신 신나게 놀아보는 군무의 장이 열리게 됩니다. 이 군무의 장은 정말인지 함께 어울림의 장소이고 억눌려있던 마음이나 주체할 수 없는 신명을 푸는 축제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길놀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모으고 군무의 장에서 마을사람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장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영상에선 많이 다루어지지 않아서 그 신명남을 자세히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동래야류는 여러 탈놀이와 비슷하게 여러 과장의 탈놀음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 과장들은 저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처음과장은 문둥이과장으로 이것은 현재 전해지지 않아서 동영상에서도 상당히 간략하게 나왔습니다. 처음 문둥이 과장이라고 하기에 문둥이가 나병환자를 뜻한다고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문둥이라 하면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피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둥이가 주인공으로 하나의 과장을 차지한다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은 문둥이란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여금 민중 자신들의 핍박받는 것을 하소연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두 번째 마당인 양반과장과 세 번째 과장인 영노?비비양반과장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제체 높으신 양반들이 둘째 셋째과장선 조롱과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이런 풍자와 조롱을 하는 주체가 별 볼일 없는 말뚝이(하인)이나 반인반수인 영노입니다. 이것 또한 민중들의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평소엔 감히 주의에 접근하지도 무엇인가 논하지도 못하는 양반이지만 말뚝이라는 하인이 감언이설로 양반들을 안심시키는 듯 하면서 놀려 먹고 양반을 잡아먹으려 하는 영노에게 양반은 똥이며 소며 자신을 낮추어 말함으로써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줍니다.또 탈에서도 양반과 말뚝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양반탈은 하얀색이라서 병든 사람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에 비하면 말뚝이는 재미있게 생긴 얼굴에다 큰 귀, 큰 입등 이목구비가 뚜렷합니다. 더욱이 얼굴 낯빛도 붉은 색이라 더욱 건강하고 활기차보입니다. 그래서 말뚝이는 하인역이긴 하나 탈은 양반과 달리 노동을 하고 건강한 민중이 생각이 들었습니다.이렇듯 탈놀이에서 양반의 조롱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습니다. 이는 탈을 씀으로서 가능했던 같습니다. 탈을 쓰면 누가 말뚝인지 알 수없고, 양반은 탈놀이에서 단지 양반탈을 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정도의 놀림을 허용함으로써 양반들은 자신의 도량을 보이는 기회로 삼았을 것이고 민중들은 평소의 억눌림을 표출시켰을 것입니다.마지막 과장은 할미과장입니다. 다른 과장과 비슷하게 할미 과장도 사회의 불평등함을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할미와 제대각시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갈등의 긴장감보단 재미있는 말재담이 더 많습니다. 저는 할미와 영감의 아들들의 이름과 이 아들이 죽는 모양세가 이름에 맞게 죽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자신의 슬픈 처지에서 비관하지 않고 이를 재담으로 풀어내는 민중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차피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