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나 사실적으로 다룬 , 그래서 충격적이고 더 가슴아픈... -<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고 나서 >기독교 개론 수업의 과제를 하기 위해 보게 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나보다 먼저 영화를 보았던 친구들의 하나같은 첫마디는 " 너무 잔인해 " 였다. 기독교인이 아닌 무신론자인지라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잔인한 장면이 많다는 이야기에 선뜻 내키지는 않았던 것이 영화를 보기전의 내 생각이어서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놓고 선뜻 실행시키지 못했다가 내 나름대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보게 된 영화였다. 어쨌든 이 영화는 예수의 앞의 내용이 생략된 채 제목 그대로 예수가 수난 당하는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멜깁슨이 만든 영화라고 하는데미국식으로 만들었다기보다 언어도 영어도 아닌 듯하고 그 지방의 언어를 사용한 듯 했는데(왜냐면 영어자막 위에 한글자막이 떠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만 보더라도 그때의 상황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노력이 느껴졌다.여기서 나오는 인물들은 예수, 악마, 제자들 그리고 마리아, 총독으로 나오는 빌라도,빌라도의 부인,헤롯왕,유대교 제사장들, 광적인 유대인,로마병 정도였다. 예수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 예수를 해하려는 사람 , 그리고 예수를 인정하지만 우유부단함으로 예수의 고난을 계속하게 만드는 소수의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다. 일단 처음 장면은 푸르고 슬픈, 그리고 음산한 분위기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그 부분에서는 예수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하지만 두려움을 완전하게 감출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예수도 사람이기에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에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그걸 보면서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앞으로 예수가 짊어져야 할 고난에 대해서 무겁고 진지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난 외에도 악마가 자신을 향해 내던지는 시험적인 말들도 이겨내야 했는데 이 역시 하나님을 외치며 예수는 이겨내고 한결같은 모습을 지킨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이 다치자 그 사람마저도 어루만져줌으로써 치유시키고 그 사람에게도 경외감을 일으키게 한다.확실히 두려움에 떨기도 하는 인간의 존재지만 자기 앞일을 내다보고 다친 사람을 치유시키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마저도 사랑하는 그는 보통 사람과는 확실히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신성모독죄라는 혐의를 씌운 제사장들과 그 대상인 예수를 은30냥에 팔아넘긴 유다에 의해 고난은 시작되게 되고 그렇게 사람들의 잔인한 모습이 영화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예수에게 모욕과 무차별적인 폭행을 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있던 예수를 따랐던 베드로조차 자신이 위험해 질 것 같자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예수는 알고 있었고 예수는 이미 예전에 죽음까지 함께 하겠다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세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을 했었다. 베드로는 그 일을 회상하고 죄책감에 그 자리를 뛰쳐나가고 유다 역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결국 자살을 한다. 물론 제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긴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의 배신과 외면까지도 겪어야만 했다. 정말 모든 것이 자신 하나로 버텨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겨워만 보였다. 여기서 문득 왜 예수는 자신들에게 온갖 해와 배신,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까지 희생을 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적인 신념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만도 한 부분이었지만 ‘ 이 영화가 그 해답을 어느정도 제공해 줄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영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얻어맞은 예수는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끌려가 로마의 총독인 본디오빌라도 라는 사람 앞으로 끌려간다. '어? 빌라도...' 어렸을 적 교회에 잠깐 다녀본적 있던 나는 그 이름이 익숙했다. 그리고 중학교때 선생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동안 매 주말마다 욕을 먹는 사람이 있다면서 본디오빌라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교회시간마다 매번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구절을 통해 매주 기독교인의 입에 오르곤 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는 이 영화에서 그렇게 다룬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대표적으로 입에 오르내릴만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지만 예수의 진리를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었고 어느정도는 예수의 고난을 막으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왜 본디오빌라도가 혼자서 온갖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그렇게 몇천년동안 이름이 오르내리는가가 어리둥절했고 궁금해진 부분이었다. 어쨌든 본디오빌라도는 헤롯왕에게 그 판결을 맡기지만 결국엔 예수는 살인범인 바라바와 자신 중에 처형당할 한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결국 처형이 결정되게 되고 어떻게 저렇게 당하고 살아있을 수 있고 버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도구들로 엄청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걸 꿋꿋이 버티는 예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얼마전 들었던 기독교 개론 수업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다. 사자밥이 되기도 하고 여러방법으로 박해를 당하지만 절대로 굽히지 않는 것. 바로 그런 종교적 신념을 조금이나마 알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온몸의 살이 찢겨지고 면류관이 머리에 박히고 피범벅이 된 예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 철학과 인간의 이해에서 '맹자'를 읽고 -맹자라 하면 성선설, 사단 칠정, 왕도정치 와 같은 정도를 아주 조금씩 얕은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 책의 내용도 결국은 이런 내용을 논하고 있지만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다소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 있어 읽고 이해까지 하는데 어려움이 따랐지만 세심히 읽어 나갈수록 맹자의 사상에 빠져들게 되는 나를 볼 수 있었다.책의 시작은 고자와 인간의 본성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물에 동서가 없듯이 인간의 본성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성무선악설을 내세우는 반면 맹자는 물의 상하가 있음을 비유하며 인간의 본성은 누구나가 선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록 타락하고 죄를 많이 지었을지라도 그것을 본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맹자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신뢰가 바탕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사상은 타락하거나 죄를 많이 지은 인간일지라도 본성이 착하기 때문에 다시 선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김으로 인해 인간에게 있어서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상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의(義)에 관한 것이었다. 맹자는 의를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생(生)보다도, 인(仁)보다도 의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맹자에게 있어서 의란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의에 관한 이야기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것은 생과 의가 모두 소중하지만 둘 중에 하나만 얻을 수 있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인간에게 있어서 삶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더라도 그 수단을 쓰지 않는다던가 환란을 피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점은 현인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고 한 점이었다. 나 역시도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라고는 할 수 없어도 분명 내가 이익을 챙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위험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하지 않을 때가 나 역시도 있었음에 맹자의 말에 공감이 갔다. 어쨌든 맹자의 말에 의하면 현인이 되는 것은 언뜻 보면 어려워 보이지 않아 보인다. 별다른 것 없이 타고난 본성을 잘 지켜 나가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맹자 말대로의 착한 본성을 잊지 않고 유지하기는 사실 매우 어려운 것이다. 바로 다음에 맹자가 말하는 물욕에 관한 것이 우리의 착한 본성을 잊게끔 위협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물질만능시대에 있어서는 더 큰 유혹이 도사린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본성을 유지하고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지만 맹자가 말하는 물욕에 대한 경계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마지막으로 맹자는 육체보다 정신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러한 관점을 보이는 것 같지만 어쨌든 맹자도 역시 손가락이 굽은 것은 언짢게 여기면서 자신의 본심이 옳지 않은 것은 얺짢게 여길 줄 모른다는 말과 함께 정신의 문제는 깨닫지 못하고 신체의 문제만 생각하려드는 어리석음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본심의 병이 수족의 병보다 심각하다는 입장으로 이 역시 겉모습의 문제만 신경쓰려 들고 겉모습만 고치려 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시사하는 점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나 역시도 이러한 맹자의 가르침에 그동안 나의 본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겉모습만 신경쓰려 했던 내 모습에 반성을 하게 되었다.
철학과 인간의 이해 과제학과/학번/이름플라톤의 ‘ 국가 ’ 를 읽고플라톤이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플라톤에 대해서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시간에 배웠던 철인정치에 관한 내용과 이데아, 동굴의 비유 등과 같은 내용들이 이번에 읽게 된 국가에 담겨 있어 부담스럽지 않은 느낌으로 읽어 나갈 수 있었다.처음에 나온 이야기는 바로 ‘기게스의 반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기게스의 반지’라는 것은 리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의 이름이 기게스였는데 그 기게스가 얻은 반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반지를 자신을 향해 돌리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러니까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반지였던 것이다. 기게스는 그 신비한 힘을 이용하여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살해한 다음 왕국을 장악했다는 이야기다.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이 반지를 소유하게 될 경우 올바른 사람이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든지간에 양쪽 다가 같은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 방향은 당연히 올바르지 못한 쪽으로.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올바르려고 하기 보다는 그 상황의 부득이함만을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올바르지 못하게 행동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딱하고 어리석게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확실하게 공감을 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줄 모르고 마냥 착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반응과 함께 어리석다는 식의 반응을 내비치곤 한다. 나 역시도 어느 누군가에게 그랬던 적이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나도 그런 취급을 받아 내가 올바른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렇게 올바른 사람을 어리석다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칭찬을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자신이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 글라우콘은 올바르지 못함의 최상급, 그러니까 이 글에서 말하는 최상급의 올바르지 못함이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으면서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과 올바름 빼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 잘못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르지 못함의 최대 악명을 얻도록 하는 시험을 통해 이들 중에 어느 쪽이 행복한지를 판정받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였는데 그에 따라서 나오는 내용은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도록 행동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는 행복하게 되고 올바른 사람은 엄청난 형벌까지 받은 후에야 비로소 올바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올바른 것처럼 보이려고 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도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에 대한 많은 어려움과 또한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 이익이 되는 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도 사람들은 늘 올바름을 찬양하곤 하지만 실제적으로 올바른 사람에게는 불이익이 많이 떨어지고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며 올바르게끔 보이는 정말 최상급의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이익을 보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동시에 씁쓸함도 느껴야만 했다.제7권으로 새롭게 권수가 바뀌게 되면서 등장한 다음 이야기는 통치를 위한 본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으로 ‘좋음의 이데아’ 라는 것이 등장하며 그것에 대한 인식의 길로 들어서게 함으로 인해서 철인 정치자들의 확보 가능성을 보기 위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교육과 교육 부족과 관련한 성향에 대해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등장한다. 동굴의 비유란 ‘사람들은 동굴 속에 갇힌 죄수와도 같다.’ 라고 보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들은 동굴 벽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들을 보며 그것이 실재라고 믿는 것을 말한다. 이 동굴의 비유에 처한 사람들 중에 중에서 어느 날 어떤 이가 동굴을 빠져나와 동굴 밖에 실제 사물들을 직접 보게 되고, 나아가 이들에게 빛을 주는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 처음에는 눈부심 등으로 인해 적응을 할 수 없지만 익숙함에 따라 그는 실재를 보는 눈이 달라지며 지혜를 가지게 된 그는 자신은 행복함을 느끼지만 동굴 속의 죄수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게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자리에 앉을 경우 그는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오히려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을까? 하는 내용이었는데 자신 역시 태양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만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러므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교육을 통해서 알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은 이야기는 제비뽑기에 대한 이야기로 이것은 대다수의 혼들이 제비뽑기의 운수에 따라 나쁜일과 좋은 일들의 엇바뀜이 생기는데 이 제비뽑기의 선택은 전생의 습관에 따라서 선택을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전생에 있어서 무장에 대한 판결을 기억하고 있는 아이아스혼 같은 경우 인간으로 태어나길 피해서 사자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전의 고난에 대한 기억을 이용해서 고난을 입지 않을 삶을 찾아서 다른 짐승들,또는 사람들로 서로 이행해가고는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망각의 평야와 무심의 강이 등장하는데 무심의 강의 냇물은 어느정도 마시기는 하지만 분별의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경우 그 이상을 마셔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 이야기를 믿고 망각의 강을 잘 건너면 자신의 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고 또한 우리의 혼이 불사의 것이며 모든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견디어 낼 수 있다고 믿고서 주장에 설득된다면 모든 방식으로 분별을 갖고 올바름을 수행할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 뿐만 아닌 신들과도 화목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며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