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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단사 1908~1970
    국문학사2한국 문단사 1908~1970Ⅰ. 싹트는 신문학 운동육당 최남선은 1908년 11월 19세의 나이로 근대 잡지의 효시『소년』지에「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그는 창가 또는 찬송가의 형식을 대담하게 깨뜨리고 의성음과 파격적인 리듬을 도입했다. 망해가는 국운 속에 힘을 잃은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한약방을 경영하던 최헌규의 둘째 아들로 형 창선은 신문관의 주인이 되었고, 동생 두선은 해방 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50명을 뽑는 국비 일본 유학생 시험에 15세의 최연소로 합격되기도 했다. 17세에는 인쇄기?주조?자모를 사서 두 명의 인쇄공과 함께 귀국했다.그의 업적은『춘향전』『심청전』등 고전 소설들을 그의 새로운 문체로 고친 문고판 이른바 ‘육전소설’을 발간했다. 이즈음 교양지나 종교지가 우후죽순처럼 돋아났다. 1914년 10월 『청춘』을 창간했으나 이듬해 3월 ‘불온 사상’의 이유로 6호가 정간되었다가 다시 1916년 5월 속간호를 내어 4천 부를 인쇄, 금방 매진되는 바람에 재판을 찍어야 했으니『청춘』의 인기와 위용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또 다른 문학사적 기여는 본격적인 문예 작품을 현상 모집했다는 것이다. 소설의 경우 1등은 10원, 2등 5원, 3등 3원을 주었다. 그는 2살 어린 춘원 이광수를, 19세로 육당보다 2살이 많은 벽초(가인) 홍명희의 소개로 만났다. 이광수는 육당과 함께 2인 문단 시대라고 할 만큼 문단계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역할을 했다.1917매일신보에 1월 1일부터 연재하던『무정(無情)』이 본격적인 첫 소설이다. 당대의 자유연애와 계몽주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선풍적인 인기로 만 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무정』집필에 지나치게 열을 쏟은 나머지 폐를 상한 춘원이 병원을 찾았다가 의학을 수업 중인 허영숙을 만나 자유연애를 몸소 실행하게 되었다.허영숙의 부모는 의사에게 시집갈 것을 딸에게 요구했고, 춘원은 이미 결혼한 몸으로 아내가 따로 있었으나 합의 이혼하고 1918년 10월 북경으로 ‘사랑의할 48세에, 삽화가 석영 안석주도 50세에 모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고, 아동 문학의 개척자 소파 방정환은 신장염으로 33세에, 소녀 시 취향의 춘성 노자영은 43세에 별세했으며 카프의 맹장 회월 박영희는 50세 되던 해 6?25를 만나 납북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가장 극렬하던 1943년 3월 21일 두 명의『백조』소설가와 시인이 운명했다. 모두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다 간 것이다. 44세 장년의 나이로 세상을 버린 빙허 현진건의 부고가 찾아간 대구의 상화 이상화 집에는 위암으로 같은 날 43세의 명을 다한 상화 자신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빙허는 신극과 신문학 도입의 선구자로 그의 당숙이 되는『개벽』지 편집부장 현철을 통해 초창기의 문단에 등장했다. 「희생화」에 이어,「빈처」「술 권하는 사회」「운수 좋은 날」「B사감의 러브레터」등 한국 단편 문학의 백미가 되는 작품들을 썼다. 상화 이상화 역시 대구의 명문 이시우의 차남으로 빙허보다 8개월 늦게 태어났다. 형 상정은 임시정부의 장군으로 항일전을 지휘했으며, 동생 상백은 잘 알려진 사학자 겸 체육인, 상오는 수렵가였다.『백조』창간호에 발표한「나의 침실로」가 이때 씌어졌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그는 요한의「불노리」보다 앞서 탁월한 자유시를 쓴 것이다.탄실 김명순과 일엽 김원주, 정월 나혜석은 “1920년대의 조선의 신여성을 대표하는 여성계의 선구자요, 선각자인 여류문학자”(「김연실전」서문)였으며, 무엇보다 당대를 너무 앞서간 ‘희생화’였다. 이들이 한국 문단사에 빠질 수 없는 토픽으로 오르는 것은, 이들의 문학적 업적보다 자부심 강한 신여성이 피하기 힘들었던 불행한 남성과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김동인으로부터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란 희롱을 당하는 김탄실은, 처음 동경에서 화가인 김찬영과 놀아나 유학생들로부터 비난의 적이 된다. 김찬영으로부터 버림받은 탄실은 찬영의 친구인 노월 임장화와 동서 생활을 했고, 귀국 후에는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돌림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길진섭의 일이었다.1910년대와 20년대의 잡지?동인지 혹은 신문을 뒤적거려야 하는 초심자들에게 먼저 다가오는 당혹감은 글을 쓴 필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문필가들이 익명?필명 혹은 가명으로 글을 발표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필자가 누구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지만, 개중에는 전혀 필자의 정체를 찾아낼 도리가 없는 문예 작품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문필가들이 본명 외의 이름을 사용하게 된 데에는 호를 애용하는 선비들의 전통적인 관례와 신문화 초기에 보인 극도의 필자난 때문에 한 사람이 같은 잡지에 몇 편의 글을 동시에 발표하되 같은 이름으로 중복하기 난처하다는 애로가 겹쳐 새로운 유행으로까지 번진 때문이었다. 이처럼 필자난의 필명 시대에 작가들은 거의 두엇 이상의 별명을 갖고 있었다. 최남선은 공육과 육당, 홍명희는 가인, 가산, 벽초, 이광수는 고주, 외배, 춘원, 김동인은 금동, 시어딤, 수주 변영로의 형 영만은 산강, 삼청, 광호, 자민, 염상섭은 상섭, 제월, 횡보, 오상순은 상순, 공초. 호는 때로 항렬을 따르기도 해서 춘원의 부인 허영숙은 춘계, 전영택의 누이동생 전유덕은 춘강, 방인근에 의하면 “봄동산에서 물이 흘러 계곡이 되고,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를 것인즉” 그의 호는 춘해로 지었다. 하나의 호는 다른 말로 번역되어 필명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장춘 전영택의 늘봄, 팔봉 김기진의 여덞뫼, 천원 오천석의 에덴 등이 그 같은 예. 호와 필명의 상용은 본명보다 별명이 더 유명하게끔 만든 경우도 많다. 김소월, 나빈, 임화, 백철, 이상, 김동리 같은 문인들이 그런 예. 호를 바꾸는 데 따라 그의 심경의 변화도 느낄 수 있기도 한데, 오상순이『폐허』시절 상순의 낭만적인 필명에서 입산한 뒤 선운의 법명을 썼으며, 그리고 공초를 애용한 것, 노작 홍사용이 일제의 탄압이 자심할 즈음 소아로 벙어리를 자처한 것, 금강산을 방랑할 즈음의 무량 이상화가『백조』시절에 상화(想華), 경향적인 저항시를 쓸 때 상화(尙火), 말기에 백아로 바꾼 것이 그런 의해 경향파 문학론이 대두될 즈음, 보통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간도를 방황하던 무명 청년 최학송의 돌연한 출현은 20년대의 문학과 현실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불과 8년 동안에 발표된 50여 편의 창작으로 마무리되는 그의 업적은 10여 년 동안 계속되는 ‘논쟁의 시대’에 카프의 물결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강렬한 경향성을 갖고, 피착취자의 참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되 고도의 문학적 형식으로 수용함으로써, 뚜렷한 작품 없이 비평만 승하던 계급 문학의 이데올로기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데뷔작「고국」,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미만에 발표된「13원」「탈출기」「기아와 살육」등 잇따른 문제작들은 사학자 홍이섭 박사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20년대의 식민지적인 조건에서 궁핍과 기아와 대결하고 식민지 현실로의 민족적 궁핍화 및 기아와 싸웠던 경험을 그의 문학적 세계의 의식으로 살린” 당대의 구조적 모순을 투철하게 반영시킨 ‘빈궁 문학’의 걸작이었다. 평생의 지병으로 마침내 그의 죽음을 몰아온 위병과 복통에 견디다 못해 맞기 시작한 아편에 중독된 채 간도를 떠나 귀국하면서 아내와 뿔뿔이 헤어져야 했던 서해는『조선문단』창간호에「고국」이 추천되면서 이 작품의 선자이자 간도에서 감명 깊게 읽은『무정』의 작자인 춘원을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조선문단』이 폐간된 후 『현대평론』, 중외일보?매일신보 기자로 전전하며, 때로 한성 권번의 기생 잡지 편집까지 맡았던 그가, 그래도 행복한 가정 생활을 한 것은 말기의 5년 동안 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끝내 궁핍으로 얻은 위문협착증으로 삼호병원에서 수술하다 출혈이 너무 심해 이익상?박상엽 등 여러 친구들의 수혈에도 불구하고 한 많은 숨을 거두었으니, 그가 30을 겨우 넘긴 1932년 6월이었다.Ⅲ. 그늘 속에 난숙하는 현대 문학『백조』창간호에 실린 수필「영혼의 승방몽」에서 감상적인 서시를 쓴 월탄 박종화는 1년 후『개벽』1923년 1월호 ‘문단의 1년을 추억하야’를 통해 유명한 ‘역의 예술’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잡지 경쟁 대열에 끼어든다. 기존의 동아?조선?조선중앙 등 일간지와 이들의 종합지, 그리고 단속적으로 창?폐간되는 문예지?동인지들을 통해 문인들의 체질은 스펙트럼처럼 비슷한 색조로 계열화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문단 색조의 분화 현상은 20년대의 동인지 시대 각양의 주의?경향이 무질서하게 공서하던 것과는 양상이 다른, 다분히 질서 있고 정돈된 동류 체질의 확인이었다. 고도로 세련된 감성과 지성을 언어의 미학에 수용하는 순수 문학이 난만하게 피어날 즈음 문단에도 미묘한 변화가 조용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제2기 여류 작가의 등장이요, 두 번째는 이른바 지식인 작가가 출현, ‘인텔리 문학’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들은 프로 문학과는 달리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를 통해 현실적 좌절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의 프티 인텔리적 고민이 프로 문학의 경향성에 동조, 동반자 작가의 특성을 나타낸다. 러시아 혁명기의 동반자 작가군인 파프도키가 초기의 혁명 동조에도 불구하고 프티 부르주아 출신의 인텔리란 한계 때문에 볼셰비키에 의해 퇴거당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지식인 작가들로 인텔리를 통한 상황의 고뇌를 드러내는데 성공하지만, 머지않아 창작상의 전향을 겪게 된다. 여기서 동반자 작가보다 더 중시될 것은 카프와 같은 강령 없이 모인 기교파 예술 서클인 ‘9인회’의 형성이다. 이태준?이효석?박태원?정지용?김기림?이무영?이종명?유치진?김유영 등 9명으로 구성된 9인회는 “순연조용한 연구의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여 다독다작을 목적으로 하는 문인적 사교 그룹”. 1933년 8월에 모인 이 문학 서클은, 후에 이상?조용만?조벽암이 가담하지만, 이듬해 이무영이 동인 간의 경향의 불일치와 모순을 지적하는 글을 발표하는 것으로 분열, 이무영?조벽암의 탈퇴와 더불어 해산된다. 그러나 9인회의 공헌은 그 조직 활동 기간보다는 해산 이후 프로 문학을 넘어서는 그들 예술파 작가들의 분방한 활동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경향 문학에 동조하되 결코 카프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프.
    인문/어학| 2008.09.10| 23페이지| 3,500원| 조회(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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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톤
    왜 사람들은 철학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경우는 ‘놀라움’때문이라고 하였고, 데카르트의 경우는 ‘의심’ 때문이라고 했어요. 또 실존철학자들은 ‘불안’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보다 나이가 먹어갈 수록 자신에 대해서 혹은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되죠. 그런데 이런 고민을 할 때 바닷가의 등대처럼 길잡이가 되어주는 중심이 있어야 할 텐데요. 바로 이 중심에 철학의 힘을 빌려 볼까합니다.고대의 인도나 중국에서도 철학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고대 철학이라 하면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의 기원과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철학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리스인의 철학으로 그리스 철학이라고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 알고 계시죠? 제가 오늘 말씀드릴 철학자의 이름은 바로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형이상학을 수립한 철학자입니다. 형이상학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천국이나 지옥, 신 등에 궁금해 하면서 생긴 학문이죠.인간이 어떻게 생겨 난지 알고 계세요?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서 번창했다는 설도 있고 또 우리나라 고유 사상으로는 단군신화도 있잖아요. 이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 맞고 틀린지 아무도 이야기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을 모두 지켜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을 출발로 형이상학이 생겨났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입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애초에는 정치에 뜻을 두었습니다. 아버지 아리스톤은 아테네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의 후예이며, 어머니 페릭티오네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아버지로 불리던 솔론의 혈족이었고, 숙부 크리티아스는 30인 참주의 지도자였어요. 30인 참주란 지금의 국회의원과 비슷한 대표자들이예요. 이렇듯 플라톤은 굉장한 집안의 아들이었어요. 그는 20세 즈음 소크라테스 문하에 들어갔고, 28세 때 스승의 처형을 목도하면서 8년입니다. 서기란 서양의 기독교에 의해서 연도 법을 따르는 건데요. 참고로 예수는 서기 4년에 탄생하였습니다. 기원전이란 예수의 탄생 이전을 거꾸로 세어나가는 숫자로, 기원전 몇 년 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원전 399년 이란 예수의 탄생 399년 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놀랍게도 그렇게 오래 전에 그리스에는 민주정치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죄인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의 다수결에 의해 죄의 유무와 형량을 정했어요. 500명이 투표를 했을 때 우연찮게도 찬성과 반대가 250명씩 나오면 무승부가 되잖아요. 그러한 문제점을 방지하기위해 501명의 사람들이 투표를 하는데요. 그들 모두가 재판관이라고 할 수 있죠.그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입장을 많은 사람들에게 변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소라테스가 어떤 죄목으로 고발되었는지 들려드릴게요. “소크라테스는 지하나 천상에 관한 일을 탐구할 뿐만 아니라 다 졌던 토론을 뒤집어 이기게도 만들며, 또 이 같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는 점에 죄가 있다. 정말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라고 했어요. 이런 고발은 소크라테스를 시기하는 소피스트들의 입에서 나온 내용입니다.소피스트란 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소포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테네의 부유하고 교육열이 높은 사람들은 그리스에서 온 소피스트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자신의 아이를 가르치도록 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과외선생님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러나 이런 지혜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을 일컫는 말은 아니에요. 아테네는 커다란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설득을 잘하면 잘할수록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어요.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죠? 그러나 이런 것이 짙어지면서 무조건 말만 잘하는 사람, 옳지 않는 것 까지도 옳다고 여기게 끄름 말을 배배 꼬아서 남을 현혹하기만 하면 되는 사람으로 변질 되었던 거죠.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궤변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돈을 받고 사람들을 교육시킨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반론했습니다.소크라년들을 못쓰게 만들고 있다’며 비난을 듣게 되었어요.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유죄 판결은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2차 투표로 정하는 형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소크라테스는 죽는 마당에도 사람들을 향해 당당히 말했습니다. “이제 퇴장해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해, 제군들은 살면서 선택하기 위해. 그러나 우리 중 과연 누가 더 행복한 운명과 조우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 외에는!”이 책은 소책자에 불과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신념과 그의 철학정신이 가감 없이 그려져 깊은 감동을 주는 플라톤의 대표작입니다. 플라톤이 쓴 책인데 플라톤의 개인적 생각보다는 모조리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요. 플라톤의 사람됨에 대해서나 성격 취향 등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어쩌면 철저히 철학적이었던 플라톤의 사고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문과 자신의 인생이 일치가 됐다고 해야 할까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온전히 삶에까지 받아드린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까지 한권의 책도 쓰지 않은 것에 비해 플라톤은 쓰다가 죽었다는 말을 들을 만큼 많은 서적들을 남겼습니다.맨 처음 언급했던 희곡형식의 책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플라톤이 쓴 책들은 강의를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출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자 역시 동일한 업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읽고 이해하기에 편리하도록 대화술을 따라서 희곡의 형식이 되었다고 합니다.앞서 강의 목적이란 말을 했는데요. 플라톤은 아테네의 북서쪽에 위치한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의 학원을 설립했습니다. 아카데미란 말 들어보셨죠? 이 이름은 플라톤이 살던 곳 근처에 영웅 아카데모스의 성역이 있었던 데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아카데미아는 서기 529년에 유스티니아누스제에 의해서 폐쇠될때까지 거의 천 년에 이르는 세월에 걸쳐 법률적으로는 무사 여신들을 기리는 사설 신심단체의 형태를 띠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과거 신라의 화랑제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학식이 있어야 하고, 쉴 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농부와 수공업자와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입니다. 물질적인 것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는 것이지요. 기초적인 물질이 갖추어 진 뒤엔 인간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맙니다. 인간의 삶이 윤택해 지면 좋은 노래도 듣고 싶어지고, 예쁜 머리핀도 하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고, 달콤한 쿠키도 먹고 싶어지겠죠?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책 『국가』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플라톤이 거의 50세에서 60세까지, 장장 10년에 걸쳐 집필한 작품입니다.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담은 명실상부한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에는 옛날부터 ‘정의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내려오는데, 이 테마를 실마리로 국가론을 전개하면서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페이라이에우스의 부자노인 케팔로스의 저택에서 나눈 대화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형식이며,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와의 대화에서 산파술을 사용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쉬우면서도 난해한 까닭은 바로 산파술에 있습니다. 산파술은 상대의 사고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어 올바른 사유를 하도록 안내하는 논변이지 타당한 논거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전개하는 논술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부정만 할 뿐 긍정을 하지 않습니다. 산파란 아이 낳는 것을 돕는 사람이지 아이를 낳는 산모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부정으로써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럼 이제 『국가』의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제1부에서는 정의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데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아닌 약자의 그것이다. 즉 진실의 지배자는 자신의 이익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바른 사람은 선하고 지혜가 있지만, 부정한 자는 지혜가 없고 악하며, 따라서 정의는 지혜이자 덕이므로 부정보다 강력하여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내대해 사려가 깊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들을 지배자로 선발한다. 이 지배자와 그를 보좌하는 군인들은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수호 임무를 부여받고, 국민에게 부정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유재산은 소유할 수 없으며, 집이나 생필품은 봉사에 대한 보수로서 과부족이 없을 정도 내에서만 국민으로부터 제공받으며, 식사도 공동으로 하고 처자식도 공유한다.”오전엔 노래를 배우고 시를 암송하고, 오후엔 체조를 하고 춤을 추고. 몸과 마음을 균형 있고 조화롭게 단련하는 이 교육 프로그램은 플라톤이 창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플라톤 스스로가 그러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그러나 플라톤은 아동 교육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검열제를 주장합니다. 플라톤은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시가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줄 것이란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이지요. 따라서 검열제란 자기 패배의 비겁한 복수입니다. 스스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 철학자가 시인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겁함 이외의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플라톤의 말대로 검열제에 따르자면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언제나 희망찬 이야기들만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억지스러운 주장은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도 자신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플라톤의 교육 과정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0대의 소년 소녀는 부모와 떨어져 시골의 기숙사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앞서 말한 시가와 체육 교육을 받는데 체육 교육이란 사실상 군사 훈련입니다. 창던지기, 달리기, 씨름 등 전투에 대비하는 군인 양성 프로그램이지요. 북한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모습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지요?20대가 되면 본격적인 수호자 교육을 받기 위한 자격시험을 치릅니다. 선발된 수호자 후보생들은 산수와 기하학과 천문학을 배웁니다. 이러한 학문들은 군인들을 니다.
    인문/어학| 2008.09.10| 7페이지| 2,000원| 조회(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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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레포트]연극 바보각시
    연극 이윤택 작.연출, 연희단거리패신도림은 환승역이다. 1호선과 2호선을 바꾸어 탈 수 있는 곳인 만큼 하루에도 수천 여명의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 간다. 그러나 그 만남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 교류가 없는 만남이다. 역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야만 하는 이시대의 모습을 표상한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일정거리를 유지해야만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한 신도림역 부근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바보각시는 벙어리다. “등불하나 켜놓고......”라는 노래가 말해주듯이 어둡고 썩은 이 세상 속의 희미한 등불이 되려는 바보각시는 그곳을 찾아오는 다양한 남성들에게 `살보시`를 한다.‘홍콩의 밤거리’노래와 함께 등장하는 남성들은 정욕의 탈을 쓰고 등장한다. 인간은 누구나 탈을 쓰고 살아간다. 어떠한 탈을 쓰고 살아가는가? 관객은 이를 통해 자기는 어떠한 탈을 쓰고 살아가는지 통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 또 자칫 저질적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는 성행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데는 탈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등장인물들은 모두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러나 뮤직 박스를 통해서만 그들은 대화를 나눈다. 돈을 넣어야만 음악이 나오는 뮤직 박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꼬집어 주고 있다. 또한 그 점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살보시를 하는 벙어리 바보 각시와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나타낸다.바보각시는 그들의 처지를 들어주며 어떻게든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보려 노력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언어는 더러워 진지 오래이다. 언어가 더러워 졌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치관과 생활을 이야기한다.바보각시의 내면을 이야기 해주는 관조자로서 장님이 등장한다. 장님은 코러스로서 극중 인물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노래로 표현하는 장님과 벙어리인 바보각시는 모두가 장애인이다.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옳은 이야기를 내뱉는 사람을 장애인 취급하는 현시대를 풍자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이렇듯 작품 속에서는 인물이 가진 특성에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독후감/창작| 2006.06.21| 1페이지| 1,000원| 조회(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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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03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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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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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