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동양평화론머리말1. 안중근의 동아시아 삼국 인식1) 한국 인식2) 일본 인식3) 중국 인식2. 안중근의 ‘동아시아 협력론’ 인식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맺음말머리말올해는 안중근 의사(1879~1910)가 하얼빈 의거를 결행한지 101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얼빈의거 이후 안중근은 한국 민족의 숭모의 대상이 됐고, 현재는 남, 북한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안중근은 일본의 동양평화론 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독창적인 동양평화론을 제시했다.최근 들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에 따라 동아시아 국가간의 긴밀한 경제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평화와 그에 기초한 경제협력의 필요성은 이미 100년전 제기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구상의 한 가운데 안중근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에는 그의 구상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 드물었지만 지금은 크게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최근의 동북아 협력시대의 도래가 안중근 플랜 의 실현을 의미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과거의 독립투사로서만 볼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를 고민한 사상가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유럽의 EU와 같은 형태의 동아시아 협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따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많은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이다.)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 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교한 논리를 갖추게 되었다.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이유중 하나는 이토의 동양평화론 의 기만성을 세계에 폭로하고 자신의 동양평화 구상을 알리고자 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하얼빈 의거는 성격이 다른 동양평화론의 필연적인 충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안중근은 개화기 동아시아담론을 계승한 위에서 나름대로의 동양평화론을 제시했다. 따라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개화기 정점에 도달한 동아시아담론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안중근의 서우학회에 가입하였고, 1907년 봄에는 평양에서 서북학회에 입회했다. 또 그는 대한자강회에 입회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자강회 회보를 항시 열람했다.) 그는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이 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안중근의 활동은 실력양성운동만을 전개했던 애국계몽운동단체와는 달리 실력양성운동과 무장항쟁을 병행한 신민회의 노선과 유사했다. 또 안중근은 신민회의 별동대원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신민회 계열의 운동노선을 지지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안중근은 의병전쟁보다 애국계몽운동에 더 많은 기대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1907년 간도서 국권회복을 기도했을 때 처음부터 의병전쟁에 가담하려 하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의병으로서 일본에 대적하는 것은 마치 작은 추로 큰 산을 파는 것과 같이 도저히 무익한 것이라 토로한 바 있었다. 그가 의병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이토의 정책에 승복하지 않음을 세계에 공표하려는 것이었다.)안중근은 한국인을 문명하게 하려고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그는 서울에 천주교 대학교를 설립하여 문명개화를 추진한다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설립했고, 하얼빈의 동흥학교와 간도의 서전서숙을 방문하는 등)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교육에 한국민족의 장래를 낙관했다. 그는 두만강 좌안에 있는 강동 거주 한국인들이 몽매, 완고하고 이기적이어서 국가의식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들에 대한 교육이 순조롭게 실시되고 있고, 그 결과 이들이 성년이 되면 일본과 대적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는 강동의 100만 한인은 모두가 결사대라고 강조한 것이다.)한편 안중근은 신문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신문사는 한국 인민을 문명으로 인도하는 기관이라고 인식했다.) 안중근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공립신문, 대동공보 등을 열독하는 한편) 대동공보사의 지국을 열어 신문 보급에 노력했다. 또 그는 해조신문에 기서했고, 대동공보에 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면 프랑스의 종복, 일본어를 사용하면 일본의 종복이 된다고 지적하며 외국어를 배우려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면 세계인들은 한국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등) 강한 민족의식을 표출했다. 그러므로 그는 일진회 등 친일 무리들을 멸시했다.) 이처럼 그는 민족을 중시했기 때문에 일부 계몽운동가들이 일제와 타협한 것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계몽운동가들이 일본 천황이나 이토 통감에게 동양평화의 맹주라고 인식한 일본의 실책을 비판하지만 안중근과 같이 일본의 포악에 도전하는 의분을 가지지 못했다고 비교했다.)이상과 같이 안중근은 한국의 문명화가 진척되고 있다고 인식했고, 국가의식의 고취를 중시했다. 이 시기 박은식, 신채호 등 다른 사상가들은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한국 역사에서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안중근은 한국사에서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찾으려는 측면은 약했다고 판단된다. 그는 한국사보다는 천주교의 인간 평등, 개화사상의 천부인권설 등에서 한국인의 존엄성, 독립정신을 추구한 것으로 판단된다.2) 일본 인식안중근은 일본의 문명 수준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는 일본은 백만의 정병을 가졌고, 천만 문의 대포를 구비했다고 지적함으로써 일본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일본의 문명화에 대해 ‘일본은 유신 이후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됐다. 그러나 외교상의 전쟁이 일어나자 동족간의 불화를 중지하고 연합하여 애국당을 만들어 이같은 개가를 올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일본의 부국강병은 일본 국민의 일치단결에 기인한다고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그렇다면 안중근은 일본의 문명 수준을 어느 정도라고 인식했을까. 그는 재판 당시 일본 측이 영국인, 러시아인 변호사를 허가했다는 소문을 듣자 일본의 문명 정도가 이정도인가라고 하며 감탄했다. 그리고 이 조치가 사실일 경우 일본의 문명은 세계 1등국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끝내 영국인, 러시아인 변호사를 허가하지 않았다.) 중국인은 중화대국으로 자칭하고, 외방을 이적이라 부르는 등 교만하고 오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더구나 권신, 척족들이 제멋대로 국권을 농간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맺고 상하가 불화하여 봉변을 당했다’고 언급하는 등 중국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중국은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가 여순, 대련, 우장 등 부동항을 점령하려고 기도하자 관동 각진을 신식 군대로 설치하여 대비했지만 실패했다고 언급했다. 또 안중근은 의화단 봉기를 계기로 8개국 연합군이 천진을 함락시키고 북경에 침입하자 중국 황제는 서안부로 파천하고 군민간에 상해된 자가 수백만에 이르렀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같은 참화는 세계 역사상 역사상 드문 일이요, 동양의 일대 수치였다고 규정했다.) 안중근은 중국이 과거의 중화사상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국민의 단결력을 결여되어 부국강병에 실패했다고 인식했다. 그 결과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국민들이 희생되는 등 동양의 약소국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한편 안중근은 중국은 사회 언론들이 비등해져 무술정변이 일어났다고 지적함으로써 중국이 외세의 침략에 자극을 받아 개혁을 추진했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이 개혁에 성공을 거둬 점차 개명국으로 전환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은 중국이 개명한 증거로서 약장을 준수하는 한편 동양 평화를 추구하여 러일전쟁 때 일본을 지원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중국인들은 일본 국왕의 동양평화 유지 조칙에 공감한 결과 일본군을 환영하는 한편 일본군을 위하여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 등의 방식으로 적극 협력했다고 주장했다. 중국 유지들도 일본의 동서양 진출을 천지가 시작한 이후 제일가는 대사업으로 인식하여 이를 기뻐했다고 언급했다.) 안중근은 중국인들이 청일전쟁 때의 구원을 갚으려 했다면 일치 단결하여 일본을 물리치고 러시아에 협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그는 ‘중국이 상하가 협동하여 의화단 때처럼 행동했다면 청일전쟁 때 당한 숙원을 갚았을 것이다. 북청 일대 인민 폭동과 허실을 엿보아 무비한 시설을 공격하고, 개평, 요양 방면국에 대해서는 여순을 반환할 것을 제의했다. 아울러 그는 일본이 대외정책을 전환하여 평화회의에 참여한다면 일본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도 동양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한편 안중근은 일본의 지도층과 인민을 분리하여 사고했고, 특히 일본 인민들의 다수는 평화를 희망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같이 인식했기에 ‘동아시아 협력론’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또 안중근은 중국이 개명국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안중근은 한국과 중국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판단했으므로 한, 중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촉구했다. 한편 안중근은 한국 민족의 진보 가능성을 확신했고, 이러한 민족에 대한 신뢰가 일본의 보호정책 등을 비판하는 기반이 됐다. 아울러 한국이 동양평화의 한 축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하여 동양평화론을 강력히 제창하게 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안중근의 동양평화 구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구체화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10년 2월 고등법원장에게 수년간 다듬어 온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일본이 여순을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3국이 이 곳에 대표 를 파견하여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해야 한다. 동양평화회의의 회원에게서 회비를 모금하여 재정에 충당하게 하면 수억명의 3국 인민이 가입할 것이다.둘째, 원활한 금융을 위해 3국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셋째, 3국의 공동의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가르치면 서로 우방으로 생각하게 되고 형제의 관념도 높아질 것이다.넷째, 한?중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다섯째, 한?중?일 세나라 황제가 로마 교황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면 세계 민중의 신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첫째 항목은 ‘동아시아 협력론’에서 볼 수 없었던 구상이며, 나머지 항목들도 ‘동아시아 협력론’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긴 했지만 새로운 내용들이라 할 수 왔다.
미국 교육은 1620년 메사추세츠주에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부지방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대개 개인 가정교사를 두었고, 그렇지 못한 가정들은 어머니들이 직접 가르치거나 이웃의 종교인이나 지식인들이 가르치기도 했다. 당연히 지역마다 가르치는 내용과 교사들의 자격이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전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통일된 교육제도를 마련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발전과 함께 각 지역사회에서는 그들의 자녀를 집단적으로 교육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써 공립초등학교제도가 형성됐으며, 그 결과 이들 학교의 교사양성을 위한 사범학교(Nomal College)가 설립되었다. 미국에서의 사범학교의 효시는 메사추세츠 주에서 보통 초등교육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이런 과정에 시민들로 구성된 교육통제조직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것이 19세기 대중교육 체제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것은 선출직 소위원회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고유의 권리와 책임을 가진 독립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권한은 지방교육위원회로 이양되어 이것이 학교 전반에 관해 중요한 권한을 행사하였다.19세기에 출현한 교육의 구조는 단조로웠다. 연방 정부의 권한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나누어 진 것과는 달리 교육에 관한 모든 형식적 권력이 시민들로 구성된 교육 통제 조직에 집중되었다. 학교체제는 ‘보통 교육운동(the Common School Crusade)’에 힘입어 발달하였는데, 이 때의 학교체제는 '행정적'영역과 '전문적'영역 간에 분명한 구분이 없었다.그 후 미국의 학교는 수적, 양적으로 증가했고 규모고 커졌으며, 이에 따라 관료제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와서 교육감은 교육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책임자가 되었다. 학교체제가 관료화됨에 따라 시민들로 구성된 교육 통제조직은 두개의 층으로 분화되었다. 하나는 정시제 시민대표로 구성되었고, 다른 하나는 전일제 행정가로 구성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행정가들이 교육위원회를 대신하여 교사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다.미국에서 무장제의 중등교육 의무화를 실시하게 된 것은 '카라마주우(Kalamazoo)사건에 관한 판결이 내려진 1874년부터이다. 그러나 미국 최초의 공립중등학교는 1827년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500이상의 가구를 가진 모든 지역에서는 의무적으로 중등학교를 설립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초기의 중등교육은 그 자체로서의 완성교육 기관이었으나, 차츰 인문계와 실업계를 모두 포괄하는 종합중등학교로 발전하였다. 1910년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Junior High School이 신설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중등학교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기 시작하였으며, 6-3-3-4제가 미국의 기본적인 학제가 되는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연방정부 내에 처음으로 교육국(National Office Education)이 설치된 것은 1876년이다. 그 후 약간의 변천은 있었지만, 교육국은 주로 연방안전보장기관(Federal Security Agency)에 소속돼 있다가, 1953년에는 신설된 보건, 교육, 사회 복지성(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의 일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지미카터 재임기인 1979년에 처음으로 교육에 관한 일을 전담하는 교육부(Department of Education)가 연방정부 내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일차적, 공적 책임을 여전히 주 정부에 위임되어 있다.
대약진운동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일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 사람 본인이 성취했던 것이 별로 없거나 혹은 전혀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 반대로 평가되는 모습들이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은 독자적으로 세운 공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칠천량 전투에서 무능력한 지휘로 인해 조선 수군을 몽땅 말아먹은 최악의 패배를 자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순신에 필적하는 용맹한 장수라고 인식되고 있다. 이순신 띄우기에 열중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반작용 때문이다. 사치와 허영에 빠져 살았고 자신을 욕한 주민이 살던 마을에 군대를 보내 초토화시켰던 명성황후 민씨는 오늘날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며 국가의 발전과 백성의 행복을 걱정한 여왕으로 칭송받고 있다. 90년대 이후, 페미니즘과 민족주의라는 두 기류가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면서 그런 시류로 인한 혜택을 맛본 경우다.예전에 나는 한 신문사에서 발행한 잡지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죽은 모택동과 등소평이 등장해 대화를 나눈다는 가상의 설정인데, 둘은 서로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웠고 특히 등소평은 모택동을 가리켜 “중국 경제 발전의 아버지.”라고 칭송을 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 칼럼을 읽고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살아 있을 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했던 사이였지 그 칼럼에서처럼 화기애애한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모택동이 중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닌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모택동의 집권 기간 동안, 중국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낙후되어 있었다. 그가 1958년에 경제 개발 계획으로 내세워 시작한 대약진 운동은 최소 2천만에서 최대 7천만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비참하게 굶어 죽게 만들었다.또한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면서 국민들에게 이른바 ‘뒤뜰 용광로’라는 장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각 집마다 철을 생산하는 용광로를 하나씩 만들어서 철강 생산량에서 중국이 세계 제일이 되게 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뒤뜰 용광로’를 만들기 위해 중국의 모든 가정들은 주전자와 냄비와 식기 및 생활 공구들을 모두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인들은 크나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 쇠가 붙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용광로에 집어넣다 보니, 생활에 꼭 필요한 용구들이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주전자와 냄비가 없으니 물을 끓일 도구가 없어졌고, 음식을 만들 수도 없었다. 공동 식당에서 애써 음식을 만들어도 숟가락과 젓가락이 없으니 음식을 집어먹기도 불편했다.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였다. 농사짓는데 필요한 농기구들도 죄다 용광로에 넣은 후라 곡식이 여물어도 추수를 하기가 매우 난감했다. 더구나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뒤뜰 용광로 일에 매달려 있어, 일손이 부족했다. 노인이나 여자나 어린 아이들이 나서서 농사일을 해야 했지만 장정들도 하기 힘든 농사일을 허약한 그들이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당시 정황을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들판 가득 곡식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추수할 사람이 없어 결국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또한, 중국 정부가 비축하고 있던 수천만 톤의 곡식과 육류(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를 소련에 보내 식량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당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제조 기술을 전수받고 있었는데, 그 대가로 곡식과 육류를 보냈던 것이다. 그 무렵 중국의 제조업 기술은 지금과는 달리, 매우 미미한 수준에 그쳐 다른 나라에 수출할만한 제품을 만들어낼 형편이 못 되었다. 따라서 해외에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품이라고는 식량 자원 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은 중공업에만 몰두한 나머지, 경공업을 소홀히 하여 식량이나 생필품이 부족했던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 잘 맞물려 중국은 기회가 날 때마다 그들에게 자국의 식량을 제공해야했다.이밖에도 모택동은 농민들에게 참새들을 박멸시키도록 지시했다. 참새가 곡식의 낱알을 먹는 해로운 새라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는데, 바로 참새는 곡식뿐만이 아닌 곡식을 먹는 해충들도 먹는 생태계의 균형자라는 것이었다. 모택동의 지시대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은 참새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한동안 중국의 농촌에서는 참새의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결과, 천적이 없어진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곡식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버리고 말았다. 해충들이 곡식을 먹어버리자, 자연히 중국인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중국인들이 겪었던 기근은 결코 날씨가 좋지 않거나 가뭄이 들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우스운 일은 모택동이 그렇게 열심히 매달렸던 뒤뜰 용광로에서 나온 쇠들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연철들뿐이었다. 결국, 뒤뜰 용광로는 전국적인 열정으로 추진되었던 시작과는 달리 쓸쓸히 폐기 처분되는 운명을 맞았다. 결국, 이런 원인들로 인해 대약진 운동이 전개되었던 1958년에 1961년 사이에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전대미문의 참극을 맞이한 것이다.
적벽대전‘삼국지를 안읽어 본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거쳐 문학부터 민간신앙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 부문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영향력과 대중적 인기가 이어져 안읽어 본 이가 드물 정도로 굉장히 널리 읽혀지고,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인지도를 바탕으로 한, 중, 일 삼국의 공통분모로서 중국에서 한국, 일본, 대만과의 합작을 통해 영화를 제작했다. 개봉년도인 2008년은 중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한 역사적인 날이다. 올림픽을 통해 경제적 재기에 성공한 대국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고자 한 면이 올림픽의 여러 모습을 통해 가시화 되었다. 이러한 측면으로 옛 동아시아의 맹주자리를 되찾고, 나아가 대동아단결을 통해 미국을 위시한 서양대국들에 중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노림수로서 2008년에 중국 주도의 한국, 일본, 같은 민족인 대만까지 끌어들여 합작을 노린 것으로 보여진다.삼국지의 전투 중 가장 많은 인기와 영향력을 미친 전투 단 한가지를 꼽으라 하면 거의 모두 주저없이 적벽대전을 꼽을 것이다. 적벽대전을 통해 유비는 형주를 차지해 파촉으로 들어가는 기반을 얻을 수 있었으며, 손권 또한 파죽지세의 조조를 저지함으로서 동오의 위치 확고와 그들의 위세를 조조에게 새로이 각인 시킬 수 있었다.적벽대전은 영화로 제작하면 단연 많은 명장면들을 연출할만한 소재들이 많다. 조운의 장판파 탈출기, 장비의 다리위에서의 조조군 저지, 황개의 거짓투항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중에서도 제갈량과 주유의 지략싸움은 백미다. 영화감독 오우삼 또한 적벽대전에서 포커스를 잡은 것 또한 제갈량과 주유다. 연의에서 주요 인물들로 등장한 유비, 관우, 장비가 아닌 제갈량과 주유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영화에서 감독은 왜 유비, 관우, 장비라는 삼국지 주인공의 ‘원칙’을 깨고 제갈량과 주유를 택한 것일까? 사견으로는 충성과 의리라는 코드로 읽혀지는 세 인물보다 암투와 음모, 배신으로 엮여지는 두 인물, 제갈량과 주유를 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맹으로 맺어졌지만,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서, 같은 전쟁을 두고 모두 승리를 염원하고 있지만 서로의 노림수는 다른 이러한 점을 포인트로 부각시켰다.연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또한 조조는 부정적 이미지로 연출되어진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헌제에게 유비와 손권 토벌을 자신의 의지대로 행할것을 강요하고 협박하며, 이에 대해 부당함을 간언한 공융을 살해하며 잔인한 역적으로서 등장한다. 곧이어 유비를 따르는 백성들을 추격해 학살하는 잔악함을 지닌 폭군으로서, 주유의 부인인 소교를 탐해 동오로 진격하는 호색가로, 손권이 보낸 사신을 머리를 잘라 보내는 무도함을 보이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반면 유비와 손권은 백성들과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영웅으로서 묘사되는데, 영화 시작부분에서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 피난길에 오르고,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는 성군으로서 등장함은 조조의 잔악한 모습과 대비되며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또한 아이들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는 관우와 조운의 모습과 더불어 짚신을 만드는 유비의 모습까지 더해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는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조조의 대사 중 ‘연전연패하는 유비에게 이런 많은 명장들이 따르다니.. 내 휘하에는 저런 명장들이 없는 것이냐’고 한탄하는 모습까지 오버랩시키며 가진 것은 없어도 휘하에 따르는 이들이 많은 인덕있는 군주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또 손권은 압도적 군세로 파죽지세의 형국으로 밀고 들어오는 조조에 맞서 굴하지 않고 싸우는 용기있는 모습으로 연출했으며, 더불어 주유는 군사훈련 중 한 노인의 병사 중 있는 물소도둑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노인에 대한 보상과 동시에 병사의 잘못을 감싸주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동오의 인정어린 모습을 부각시킨다.영화에서 보여지는 부정적 이미지를 입고 있는 조조, 성군으로서 부각되는 유비, 용기있는 결단력의 손권으로 각자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양분해서 나누자면 부정적인 이미지의 조조와 호감적 이미지의 유비, 손권으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앞에서 영화 개봉연도와 합작등과 맞물려 중국의 다른 의도 또한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대동아 단결’이 아닐까 생각된다. 베이징올림픽에서 가장 강조된 모토는 ‘단결’이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올림픽을 통해 하나의 중국을 강조한 의도임도 있겠지만, 영화 제작에 있어 한국, 일본과 합작을 통함으로서 마치 19세기의 서양열강들에 침탈당한 역사, 20세기의 미국을 위시한 서양국가 주도의 세계에 대한 중국주도의 동양국가들의 단결을 통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프랑스내의 이민자사회는 더 이상 이민자들로만 치부하기엔 적지않은 규모의 구성원들이 모여 그들만의 프랑스를 살아가고있다. 2차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입되어 온 프랑스이지만 오늘날 프랑스 이민자들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권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은 이전의 프랑스내 초기 이민자들과는 달리 이질적인 종교와 문화를 갖고 있는 이민사회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점에서 현재 프랑스의 사회, 문화적 큰 이슈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