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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스카불교
    3부 일본의 성립과 신라 ·발해 : 이념과 현실6장 아스카 불교의 배경1. 불교의 공전(公傳)① 동아시아 정세와 아스카 문화6세기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가 도래했고, 중국에서는 수(隋)나라가 남북조의 분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7세기에 접어들면 당(唐)이 중국의 강력한 통일 체제를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왜는 쇼토쿠 태자 시대 다이카 개신을 거쳐 율령 체제를 구축하고, 왜국에서 ‘일본(日本)’으로 고대 통일 국가를 완성하기에 이른다.아스카 불교란 나라분지 아스카 지방에서 꽃피운 불교미술을 말한다. 불교를 왜에 전래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소가씨(蘇我氏) 가문)은 스이코(推古) 천황을 즉위시키고, 쇼토쿠태자가 섭정을 맡았다. 주로 쇼토쿠 태자 섭정시기인 592년부터 645년 다이카개신 이전을 아스카 문화라 한다. 쇼토쿠 태자 시대 삼국과의 관계를 아스카 불교를 통해 살펴보면 다이카 개신 이전에 왜국이 동아시아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불교가 한반도로 전래된 후 다시 왜에 전해졌던 시기는 6세기 이다. 그러나 백제의 성왕(聖王)이 김메이(欽明) 천황에게 불상과 경전을 보냈던 ‘불교 공전’의 연도에 대해서는 538년과 552년 두 가지 설이 있다.《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김메이 천황 13년인 552년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졌다고 하였다. 한편《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은 무오년으로 되어 있고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에는 김메이 7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서기 538년이 된다. 김메이 천황의 즉위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서기 년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540년까지는 천황이 두 명이어서 왕조가 분열·대립하고 있었으며, 김메이 천황으로 일원화 됐던 때가 540년이 아닐까 하는 설이 주창되기도 한다.② 백제 불교 전래의 의미불교의 공전 연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승려의 파견과 불상, 경전의 증여는 여러 차례 있었는데, 538년이 처음이고 552년도 그 몇 번 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어느 쪽이든지 불교전래는 백제가 삼국 항쟁에서 고구려와 신라와 대립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538년 설로 본다면 백제가 웅진성에서 다시 남쪽의 사비성으로 천도해서 재건을 꽤했던 시기이다. 이해에 불교가 전래됐다면 왜와 동맹 관계를 다시 확인하는 의미로 해석 할 수도 있다. 552년설로 본다면 백제가 551년 한산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시 552년 신라에 탈취되었고, 554년에는 성왕이 전사하는 사태를 맞았다. 즉 552년에 불상이 전래됐다면 백제가 신라와 대립하는 가운데 왜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2. 호코사의 건립① 소가씨와 불교전래김메이 천황 시기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인물이 소가씨이다. 소가씨는 도래인(渡來人)과 관계가 깊으며, 조정의 재정을 담당하는 직책을 바탕으로 세력을 넓혀간 씨족이다. 당시 재정 업무에는 첨단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래계 씨족들과의 관계 구축이 불가피 했고, 불교도 그러한 새로운 문화의 일원이었다.소가씨는 모노노베시와 정치적 패권을 두고 대립하였는데, 불교를 들여오는 데에 대한 입장으로 587년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소가씨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지지를 받아 592년 일본 최초의 여제인 스이코 천황이 즉위했고, 다음해에는 쇼토쿠 태자가 섭정하게 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호코사(法興寺)는 소가씨의 씨족 사찰로 건립되었다. 호코사는 나라 시대에 헤이죠코(平城京)로 이전해서 간고사(元興寺)가 됐고, 옛 절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아스카사(飛鳥寺)이다.② 호코사 건립과 고구려 불교의 전래호코사를 건립할 때에 백제에서는 승려와 사공(寺工),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등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주목되는 점은 고구려가 불상을 제작하는 데 황금 320냥을 보냈다는 것이다. 또한 호코사의 건축 양식이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다. 가람 배치는 1개의 탑을 동·서·북 3개의 금당이 둘러싸고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로, 평양 청암리(淸岩里) 폐사(廢寺)의 양식과 같았다. 또한 이와 같은 양식은 상오리(上五里) 폐사나 정릉사(定陵寺)의 사원유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595년에는 고구려에서 혜자(慧慈), 백제에서 혜총(慧聰)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 두사람이 호코사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 특히나 혜자는 615년 귀국할 때까지 10여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쇼토쿠 태자의 불교 스승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정치 외교의 중요한 일을 맡았다. 쇼토쿠 태자가 저술한 《삼경의소(三經義疏)》도 혜자의 지도 아래 이뤄진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호코사의 건립에서 보듯이 예전부터 있어온 백제 불교에 고구려 불교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다.③ 고구려와 왜와의 교류고구려가 처음 왜국에 사신을 보낸 때는 570년이며, 572년과 다음해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호코사를 건립할 즈음에는 고구려가 커다란 구실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세기 신라가 급속히 성장해 영역을 확대하면서 552년 고구려와 백제를 격파하고 서해안 지역으로 진출해 바닷길로 중국과 직접 통교하였다. 589년 수가 통일하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수에 조공해서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국경을 맞댄 수와 고구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고, 598년에는 마침내 수나라 문제(文帝)가 30여만 대군을 고구려에 파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더군다나 이러한 정세에 호응해서 수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위협하는 움직임을 강화했던 것이다.고구려는 불리한 동향 속에서 왜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600년에 왜가 출병해서 신라와 싸웠던 기록이 있으며, 601년에는 왜가 고구려와 백제에 사자를 파견해서 신라 공격에 대해 협의한 기록도 있다. 그리고 602년에는 쇼토쿠 황자의 동생뻘 되는 구메(來目)황자를 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신라 원정에 파견하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했다.3. 견수사의 파견① 해 뜨는 곳의 천자쇼토쿠 태자가 벌인 외교의 핵심은 견수사(遣隋使)의 파견이다. 《일본서기》에 최초로 기록된 견수사는 607년 오노노 이모코(小野?子)가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고 쓰인 국서를 지참했다. 국가적 자립의 기개를 보여주었다고 해서 자주 강조되는 문서이지만 《일본서기》에는 나오지 않고 《수서》에만 실려 있다.양제(煬帝)는 무례하다고 하면서 불쾌한 태도를 보였지만 결국에는 귀국하는 이모코와 함께 배청세(裴淸世)를 파견했다. 왜 왕은 기뻐서 “듣건대, 바다 서쪽에 대수(大隋)가 있는데 예의의 나라라고 한다. 그러므로 조공할 것이다. 나는 오랑캐 사람(夷人)으로 바다 한구석에 동떨어져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했다”고 《수서》에 기록되어 있다.양제가 불쾌해 했던 것은 세계의 중심에서 오직 한 사람만 군림해야 할 ‘천자’를 번이(蕃夷)의 소국에 지나지 않는 왜가 자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국서가 중국 황제를 흉내 내어 자신도 또 다른 한명의 황제가 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② 견수사 파견의 목적당시의 국제 정세를 신라가 수에 접근함으로써 고구려가 수와 신라에 협격당하고, 한편으로 왜가 고구려 백제와 제휴해서 신라를 원정하려고 하던 때이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왜는 고구려의 상대편인 수를 자극하는 국서를 지닌 견수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쇼토쿠 태자의 외교 정책에 있어 핵심 인물이었던 혜자, 즉 고구려의 전략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의 배후에 왜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일부러 부각함으로써 수의 고구려 공격을 견제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다.한편 백제도 같은 해인 607년에 사절을 파견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기를 요청한다”고 해 수나라에 영합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이에 대해 수는 고구려와 화합하여 거짓으로 중국을 엿본다고 판단해 경계하였다.각국 모두 만만치 않은 외교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수의 양제가 왜와 국교를 성립한 이유는 고구려와 왜의 결탁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등한 국가로서의 기개를 보여준 ‘해 뜨는 곳의 천자’국서가 받아들여진 것은 고구려가 수와 대결하려는 국제 정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는 612년과 614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고구려 원정실패 이후 멸망하고 말았다.4. 두 개의 미륵보살상① 고류사의 반가사유상견수사의 파견은 긴장된 동아시아 세계속에서 누구도 적으로 두지 않는 왜의 적절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다. 백제 · 고구려 뿐만 아니라 수와 관계를 확보하는 계기가 됐으며, 또한 신라와 관계를 호전시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 신라 불교와 교류가 강화되었다.
    인문/어학| 2010.06.24| 4페이지| 1,500원| 조회(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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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청시대 인구 이동과 환경변화 평가A+최고예요
    동양사회경제사화 3-4교시인구변화와 인구이동- 명 ? 청 시대를 중심으로강 의 명 :담당교수 :학 번 :이 름 :제출날짜 :【 목 차 】머리말Ⅰ. 중국의 인구1. 중국인구의 변화2. 중국인구 수치파악의 한계3. 명 ? 청대의 인구1) 명대의 인구2) 청대의 인구Ⅱ. 인구변화의 원인1. 새로운 작물의 보급1) 조생종의 보급2) 신대륙 작물2. 기후의 변화와 자연재해1) 명대의 기후와 자연재해2) 청대의 기후와 자연재해3. 전염병4. 태평천국의 난Ⅲ. 인구이동1. 정부 주도하의 이동2. 이동의 실제1) 사천지방으로의 이주2) 백련교도의 난에 보이는 인구이동3. 산악 지역의 생활맺음말참고문헌인구변화와 인구이동- 명 ? 청 시대를 중심으로인구(人口)는 역사의 진행 속에서 꼭 이해되어야 할 변화의 원인이 된다. 인구는 ‘머릿수’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며, 또 가장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집합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중국 인구의 이동은 일상적이면서도 자연현상의 변화, 사회경제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인구와 변화의 원인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변화의 원인으로 인구를 살펴볼 때에는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인구증감에 원인을 미치는 요인으로 농업부분, 기후와 자연재해, 전염병, 전란이후의 인구변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둘째, 이동의 원인과 이동의 양태를 밝혀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명 ? 청사회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고자 하는 것은 명대에는 지속적으로, 청대에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이루면서 동시에 사회경제적 발달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Ⅰ. 중국의 인구1. 중국인구의 변화중국의 인구성장 특징에는 세 가지 있다. 첫째, 진대부터 서한까지 1천만여명에서 6천만명으로 급증하였다. 이후 명말 청초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 동안 비록 여러 차례 큰 폭으로 줄어든 적도 있었지만, 중국의 인구는 대체로 6천만명 전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제국주의의 침략과 봉건세력의 착취로 생산력이 타격을 받게 되고, 군벌의 혼전으로 인구성장 속도는 떨어졌다. 1851년에는 4억 3000만명으로 가장 인구가 가장 극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18세기이다. 1937~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여 수천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하였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였을 때 중국의 인구는 약 5억 4천1백6십7만명이었다.Ⅱ. 인구변화의 원인명 ? 청대는 경제 규모 면에서 획기적인 신장세를 보인 시기이다. 그리고 명 ? 청대의 인구증가는 비단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환경과 관련되어 설명되어야 한다. 때문에 당시의 인구증감에 영향을 미쳤던 농업발전, 기후, 자연재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환경의 영향 외에도 청대에 있어났던 혼란인, 난의 반발 중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인구증감에 미치는 영향도 알아보도록 하겠다.1. 새로운 작물의 보급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중국의 농학 저서는 약 6백여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고대국가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수량이다.)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농업에 종사해 오면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산도구와 경작기술을 끊임없이 개선하였으며, 아울러 선진의 농업기술을 국외로 전파하기도 하였다. 특히 명 ? 청시대에는 경작 면적의 증가, 노동집약적인 농법의 시행과 특히 경작 체제의 개선으로 인하여 면적당 생산량도 증가하였다.농업발전의 가장 큰 혜택은 잉여생산물을 얻은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양호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영양상태가 양호할 시에는 자연히 자손의 번식과 영아사망률이 줄어들게 된다. 특히나 명 ? 청대에는 기술상의 중요한 발명은 없었지만, 당시의 경작은 무엇보다도 저지대 ? 평원 ? 골짜기 등에서 산악 지역으로 농업 경작지를 확대시켜 나가면서 행해졌다. 또한 산악지역에서 생산되는 품종도 확대되었으며, 전국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에 유입된 새로운 작물 덕분으로 경작형태의 변화와 함께 인구부양 능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1) 들이 보인다.1601년, 양기(兩畿)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부평현(阜平縣)에 기근이 들었는데 어린 자식을 잡아먹은 사람이 있었다. 소주(蘇州)에 기근이 들었는데 민이 세리를 때려죽였다.1640년, 북기, 산동, 하남, 섬서, 절강, 삼오(三吳) 지방 모두 기근이 들어 회수에서 북으로 기남(畿南)까지 나무껍질을 모두 벗겨먹었고, 매장한 시체를 파내서 먹었다.『명사』「오행지(五行志)」에 나오는 수재 ? 한재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장강 유역의 수재 ? 한재의 주기는 10.5년이다. 황하 유역은 7년, 장강 유역의 수재는 18년마다 한차례의 파동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적도 해양기단이 진령-회화 이남 구역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아열대 태평양 해양기단이 황하 유역을 제어하는 시기가 장강 유역을 제어하는 시기에 비해 훨씬 짧기 때문에 황하 유역의 수재 ? 한재 주기는 장강 유역에 비해 짧다고 인식하였다.) 앞서 명대의 인구증가를 보았지만, 인구증가와 증가한 인구가 얼마만큼 풍요롭게 사는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명대의 기후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러한 불안정 하며, 농업에 비교적 부적합한 기후 때문에 기근은 계속 될 수밖에 없었다.2) 청대의 기후와 자연재해청대 전기는 제 5차 소빙하기가 계속되었다. 즉 명 말기 후반기의 기후와 똑같아 한랭건조 시기에 속할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한랭하면서도 그 기간이 가장 오래된 시기였다. 한편 청대 초엽의 삼번의 난의 경우, 역사에서는 강희제의 삭번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여기에는 기후의 악화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청대 초기 몹시 한랭건조하여 매년 기근과 흉년에 시달려야 했기에 오삼계, 경정충, 상가희가 어떤 마음을 품고 난을 일으켰던 간에 쉽게 가담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청대 중기는 비교적 온난한 겨울과 온난다습한 기후였다. 강희 말년에서 건륭 초기까지 기후는 비교적 온난다습하였고, 건륭 중기까지는 비교적 한랭건조 하였으며, 건륭 말기에서 가경 연간까지는 또 비교적 온난다습하였다. 오늘방이나 수로망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하물며 늘어만 갔던 군대조직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기반이 갖추어져 중국이 중남부로 진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출을 억제한 것은 질병 이외에는 없었다. 질병의 장애가 얼마나 컸는지는, 한나라의 개척자들이 양자강 유역에 많이 이주해서 정착하는데 5세기 내지 6세기가 걸렸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쉽게 표현하면, 춥고 습도가 낮은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빠른 개발이 불가능했던 것이다.서아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옛날 기록에서 사람에게 위협을 주었던 기생생물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을 길은 없다. 사마천은 “양자강 남쪽의 땅은 낮고 기후가 습하다. 성인남자는 젊어서 죽는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지방에 농사짓기 좋은 토지는 많고, 인구가 적다고 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위해 중국 여러 곳을 샅샅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 지적은 확실히 권위있는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사마천 이후에 남겨진 각종 문헌에 따르면 남쪽이 북쪽에 비해 매우 비위생적인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남쪽에 파견된 관리들의 임기는 매우 짧았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지막으로 잦은 이동은 전염병의 확산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 전염병을 피해 이동하는 경우도 전염병이 빈번했던 만큼이나 허다했다.4. 태평천국의 난내란의 특징은, 근대적인 전쟁 윤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사와 민간인이 대량학살 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연장됨에 따라 정부군은 반란군을 굶겨 죽이는 초토화 정책을 채택하기도 한다.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광범위한 농민 반란으로 인하여 북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사천(四川)의 경우는 인구가 거의 소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내란 지역에서의 유례없는 많은 인명 손실을 두 개의 기본적인 역사 사실로 입증할 수 있다. 첫째, 내란 지역의 공식적인 경작 면적인 명(明)대의 7억묘에서 1645년에는 4억 50명 성조 사후 이주민 감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느슨해졌으나, 군둔은 명말까지 중요한 정부시책으로 남아 있었다. 정부 주도하에 행해진 이러한 이주 정책은 미개발 지역 경제에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이에 반해 명대의 자발적인 이주는 청대와 근대에 행해진 지역간의 이주 규모보다는 못하였다. 자발적인 이주는 대부분 경제적 동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명대 전체 인구는 청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경작 가능 면적은 풍부하였기 때문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한 이후 시기보다는 이주에 대한 동기 유발이 적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2. 이동의 실제1) 사천지방으로의 이주유례없는 인명 피해를 가져온 명말 이자성과 장헌충에 의한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인하여 사천분지는 일종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다. 청의 공식적인 기록에, 적어도 만주군의 정복전쟁보다는 피해가 크지 않았던 장헌충 반란의 잔인함이 과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사천성 인구 감소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사천성의 인구 감소로 인하여 초기 만주 정부는 1653년 농업을 위해 사천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백성과 병사를 초치하여 그들에게 소와 종자를 제공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황제는 명을 내려 사천에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5년 간 세금을 면제하고 300명의 이주민을 초치하는 지방관은 즉시 승진시킨다고 하였다. 한편으론 농업 이주를 더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도 하였다. 비옥한 이 지역의 절대적인 경제적 호조건으로 인하여, 1712년과 1713년의 논지에서 토착민과 이주민 사이의 재산 투쟁을 조정할 법령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호북성 ? 협서성 같은 이웃 지역에서 이민이 행해졌다.1650~1850년의 2세기 동안 사천은 인구가 가장 많이 유입된 지역이었으며, 태평천국 이후로 그 자리를 다른 지역에 넘겨주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첫째, 청대에 다른 성보다 더 많은 인구를 사천에 유출시킨 호북성의 지방지를 보면 사천으로의 이주를 그린 공식적인 설명, 시, 민간가요 등이 예외 없이 1850년 이전 시기를다.
    독후감/창작| 2010.06.24| 20페이지| 2,000원| 조회(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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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페라 리골레토 감상
    클래식감상목 4-5교시리골레토공연일시 : 2008년 5월 17일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1주년 기념으로 열린 오페라 ‘리골레토’는 나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준 공연이 되었다. 일산에 있는 저동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에 지금의 아람극장 뒤에 있는 정발산의 산책로를 많이 오갔었다. 그 산책로가 학교에서 ‘라페스타’라고 하는 유흥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자, 눈에 띄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들의 산책로가 공사 때문에 길이 좁아지고, 한적함을 잃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공사현장이 오페라 전용관, 미술관 등이 생겨난다고 하자 이런 구석진 곳에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내가 경험해 볼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예전의 산책로도 회복했고, 나 자신도 학창시절을 생각하는 조금 덜 큰 성인이 되어있었다. 이러한 곳에서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관람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의 ‘변화’라고 조금 크게 확대해서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공연 날 조금 일찍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며, 줄거리를 읽고 엄마에게 설명해 주는 그 시간이 특별했다. 오페라가 처음인 엄마와 나, 그리고 여동생 두 명과 함께 간 ‘여자들만의 외출’이었다. 우리들은 자막이 설치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촌스러운 걱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리골레토의 핵심인물은 테너 바람둥이 만토바공작, 소프라노 주인공인 처녀 질다, 바리톤 주인공인 광대 리골레토이다. 굉장히 다른 성격의 주인공들이라서 그런지 아리아 또한 각자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만토바공작은 경쾌하고 익숙한 음악을 노래한다. 질다는 순수하고, 조금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사랑스럽다. 리골레토는 격정적인 삶을 사는 만큼 호소력 있지만, 비관적인 목소리가 슬프다. 전체적으로는 각자의 색깔을 보여주지만 또 각 막에서의 느낌이 다양하다. 그 외에 살인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 스파라푸칠레의 여동생으로 남자들을 유혹하고 다니는 술집여자 막달레나, 리골레토에게 저주를 내리는 몬테로네 백작이 있다. 가신들의 모습에서 바람둥이 만토바공작의 노래가 가장 먼저 들린다. 1막에서는 그의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었기 때문에 단순한 바람둥이 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체프라노 백작의 젋은 아내에게 눈독을 들이며 부르는 에서 남자들의 유치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소도시 만토바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디를 가도, 그때도 지금도 존재하는 흔해 빠진 바람둥이가 가지는, 여자들은 영문도 모를 자신감 말이다. 그런데 1막 2장에서 이러한 공작의 자신감이 어쩌면 흔해빠진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체프라노 백작이 나타나 공작에게 싸움을 걸자, 리골레토가 광대답게 체프라노 백작을 모독한다. 때마침 공작에게 딸을 농락당한 몬테로네 백작이 나타나 공작에게 덤벼들다 만토바의 부하들에게 강제로 끌려간다. 리골레토가 그를 조소하자 백작은 너도 아버지의 노여움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며 저주한다. 한편 마를로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꼽추이면서 광대인 리골레토에게 아름다운 애인이 있다면서 비웃는다.이야기가 시작되는 1막에서는 공작은 단지 바람둥이일 뿐이고, 리골레토는 중심점 없는 그저 광대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오페라의 가장 주요한 핵심단어가 제시되었다. 바로 ‘저주’이다. 리골레토를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르게 한 ‘저주’는 ‘비극’의 시작이었고, 리골레토 스스로는 풀 수 없는 ‘공포’였다.1막 2장 집으로 가는 길무대가 바뀌었다. 1막에서는 무대는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어수선한 상태에서 감상하고 있었다. 1막 2장이 되자 서서히 무대장치와 지휘자의 지휘봉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휘자가 무대 위의 사람들에게 표시는 주자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어찌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커튼이 열리자 샤롱의 모습과는 다른 짙은 푸른 빛 어둠이 깔려있다. 이러한 어둠속에서 안면이 있다고 해서 결코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스파라푸칠레를 만난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에서 리골레토는 '그는 살인자, 나는 혀끝으로 사람을 찌르 대가족에서 살다보니 아버지와의 단 둘만의 경험은 없는 듯하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결코 소원하지는 않지만 항상 동생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딸과 아버지 단 둘만의 관계에서의 느낌을 완전히 느껴본 구체적인 경험은 없다. 사실 이 노래에서 느끼는 감정은 노래 자체에서 오는 느낌보다는 서로에게 전부인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는 이럴 것이라는 추측에서 오는 감성이었다. 하지만 리골레토는 질다를 너무 가두고 있었다. 그래서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질다의 사랑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지속되었는지도 모른다.공작이 질다에게 바치는 사랑고백은 잠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1막에서 어쩌면 공작은 흔해빠진 바람둥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부분이기도 하다. 이 둘의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듣는 사랑고백이었지만, 사랑고백은 언제나 보는 사람들도 하여금 가슴 떨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TV 드라마에서 허다하게 등장하는 바랑둥이는 마치 방황하던 사랑의 종착점이 존재하는 듯 여자 주인공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지금은 쓸쓸한 솔로인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일생에 꼭 한번은 진정한 사람을 하게 된다는 희망을 가득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일생에 한번은 꼭 만나는 진정한 사랑의 주인공이 존재하듯이 질다도 공작에게 그러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3막에서 만토바 공작이 부르는 은 특별할 것 없는 바랑둥이 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입증한다.공작이 아닌 괄티에르 말데라가 떠난 후 질다는 그 유명한 소프라노 아리아 을 부르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아버지가 가둬놓고 기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리따우며 소녀 같은 그녀의 성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아리아였다. 관객들을 폭발적으로 만드는 기교도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극적인 부분은 없지만 저절로 박수를 만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순수’라는 이름에 어떠한 수식어가 붙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진실 되고 착한 마음에서 나오는 목소리, 행동에는 화려한 수식어가 오히려 필요악인 것이다.리골레토는 체프라노 백작과 변장한 가신들의 음모에 눈앞에서 질을 되뇌는 것뿐이었다. 딸랑딸랑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다니는 리골레토의 방울소리가 다음날 궁정의 가신들 앞에서 비웃음이 되는 상황은 비참했다.2막 만토바 공작의 궁정공작이 질다가 유괴되었다는 말에 슬픔의 노래인 를 부른다. 바람둥이는 으레 감정적이다. 감정적이기 때문에 바람둥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격정적으로 사랑하다 한순간에 식어버린다. 바로 이 부분이 공작이 격정적으로 사랑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마치 자신은 격정적으로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듯이 관객들을 속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페라 ‘리골레토’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공작의 눈물에 속는 것이 현명한 듯해서 또 속아주었다. 공작이 질다 만큼은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공작에게 속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신들이 공작에게 리골레토의 애인을 유괴해 왔으니 한턱을 내라고 하자 그는 그녀가 바로 질다라는 것을 알고는 우울하던 기분이 갑자기 기쁨으로 바뀐다. 교외에 살고 있는 리골레토의 여자라면 질다 일 게 틀림없다고 직감한 공작은 발걸음도 가볍게 질다가 갇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공작이 한심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질다, 리골레토, 가신 모두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었다. 리골레토와 질다는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할지도 모른다. 비록 16세기 유럽에서 신분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막은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1막의 마지막에서 보이는 리골레토는 ‘저주’를 운운할 뿐 현실극복의 노력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리골레토가 현실극복의 노력을 보이지 않는 것부터가 이 오페라가 비극인 최대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리골레토는 질다가 공작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공작의 방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가신에게 방해를 받는다. 리골레토는 분노를 폭발시키지만, 곧 태도를 바꿔 딸을 돌려달라고 가신들에게 절절하게 호소한다. 를 통해 리골레토의 본성이 솟구쳐 오른다. 가신들 앞에서 슬퍼도 웃는 척, 하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부모님들의 은혜, 아침 라디오 방송 ‘여성시대’의 사연들에서 들리는 부모님들의 사랑과 자식들의 못난 미움을 감싸주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나는 부모라는 존재라고 해서 완벽하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무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한이라는 것은 무한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무한이라고 할 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사랑은 무한으로 볼 뿐 완벽하게 무한이라고 확신할 수 없으므로 자식들은 무한에 가깝게 되도록 조금이라도 실망을 안겨드릴 여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므로 질다는 자신을 속였던 괄티에르 말데라의 사랑에 실망하고,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룬 공작에게 절규했다. 한편으론 아버지가 숨겼던 세상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자신에게 느끼는 수치심과 아버지에게 죄송함 때문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을 것이다.감옥으로 끌려가던 몬테로네 백작이 벽에 걸린 공작의 초상화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복수를 맹세한다. 리골레토는 ‘그 복수는 내가 하겠다’고 외치며 질다와 함께 격렬한 2중창을 부른다. 는 ‘순수’란 이름의 것을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표현하는 것 같다. 바리톤과 소프라노의 2중창은 서로를 감싸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로를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높은 소리의 음성이 동시에 들리거나 시간차를 두고 들려서 그런 것 같다. 감정을 가지고 노래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민중가요 학회에 속해 있는데, 공연 때마다 노래에 감정이 실리지 않아 호소력이 없다는 지적을 항상 받았다. 특히 남녀가 화음을 할 때면 더욱 힘들어 하곤 했었는데 그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나의 감정만을 느끼며 노래하는지, 같이 호흡하는 사람의 감정까지도 이해하고서 노래를 하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노래에서 각자의 감정이 모두 전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궁금증이었다. 이번 오페라에서 이 물음에 답을 얻었다면 오페라를 정말 즐길 수진다.
    독후감/창작| 2010.06.24| 6페이지| 1,500원| 조회(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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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균전제
    北魏의 均田制- 遊牧民族에서 漢族國家로의 變樣Ⅰ. 序論Ⅱ. 北魏 中原統治 構造- 計口受田을 중심으로1. 漢族王朝와 征服王朝의 차이점2. 計口受田과 割當生産制1) 계구수전과 할당생산제2) 계구수전의 한계3. 計口受田에서 均田制로의 이행Ⅲ. 三長制와 均田制1. 三長制1) 胡族사회의 경제적 기반2) 胡族사회 경제적기반의 변화- 화북통일과 낙양천도3) 豪族사회의 경제적 기반2. 均田制1) 균전제의 이념적 전통2) 효문제 시기의 토지문제Ⅳ. 均田制의 내용1. 均田制의 田種1) 露田2) 桑田3) 麻田2. 均田制의 의의1) 遊牧民族的 성향2) 漢族的 성향Ⅴ. 結論Ⅰ. 序論중국은 독특한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 4천년 동안 ‘中華’라는 민족적 자존심이 매우 강하였다. 한편 秦漢統一帝國의 시기를 거치면서 거의 완성의 형태를 보인, 中國古典文明은 그 질적인 면에서 상당히 다른 차원의 유목문화와 대면하게 되었다.유목민족의 중원진출과 중국통치 기간은 중국역사에서 秦, 漢이래 3분의 1에 해당된다. 또한 역사의 진행과정을 볼 때에 새로운 왕조성립 이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前 왕조의 제도, 혹은 사회의 진행이 완벽하게 단절될 수 없다는 점에서 유목민족이 중국역사 전체에 끼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유목민족의 중원진출 이전의 중국문명의 성격은 다분히 농경문화적인 것의 집합이었다. 그러나 北魏), 遼, 金, 元, 淸 등 다섯 정복왕조) 이후의 중국은 漢族만으로는 중국을 설명할 수 없었다. 유목민족은 중국문명에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여 새로운 문명을 형성하는데 일조하였다.) 특히 北魏는 胡族의 中原統治를 이룩한 최초의 왕조이며 중국 고래의 통치구조상에 변화를 가져왔다.북위가 존재했던 때는 여전히 전쟁의 시기로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때이다. 이 때의 상황과 중원에 나타난 호족의 중원통치는 새로운 통치구조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통치구조상의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均田制 실시에 따른 일련의 과정에 있다.북위 시대에서의 토지는 절대적인 생산기반으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위첫째, 대규모의 사민의 공급의 종결이다. 따라서 황제의 통치에 필요한 자원의 생산을 주로 사민에게 의존하던 기존 정책의 전환을 불가피하게 했다. 둘째 경영지역의 확대와 對象民의 수적 증가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부가되었다. 이 두 가지의 발생은 더 이상의 계구수전 실시를 불가능하게 했다. 즉 齊民分配의 틀을 마련해야 했다. 또한 정복자라는 입장은 후퇴하고 피정복자측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太和十一年,京都大饑,麒麟表陳時務曰:‘…今京師民庶,不田者多,遊食之口,三分居二.蓋一夫不耕,或受其飢,況於今者,動以萬計.…制天下男女,計口受田.宰司四時巡行,臺使歲一按檢.勤相勸課,嚴加賞賜.數年之中,必有盈贍,雖遇災凶,免於流亡矣.…’新校本魏書/列傳/卷六十 列傳第四十八/韓麒麟㉠에서 태화 11년에 韓麒麟이 올린 상서에서 보면 그는 平城 京畿지역에다시 계구수전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는 均田制가 실시된 이후에 제기된 주장으로 均田制가 계구수전의 정신을 그대로 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시일이 지남에 따라서 弛綬을 거듭해 온 계구수전을 다시 정비하여 실시하자고 하고 있다.㉡ 太和 二十年 五月 丙子,詔曰:「農惟政首,稷實民先,澍雨?洽,所宜敦勵.其令畿內嚴加課督,惰業者申以楚撻,力田者具以名聞.」新校本魏書/紀/卷七下 帝紀第七下/高祖孝文帝宏전술한 대로 계구수전는 토지를 할당하고 생산을 독려하기 위한 체제인데, ㉡은 均田制 시행을 선포한 均田詔가 반포된 효문제 태화 9년(485)보다 11년이 지난 태화 20년에 반포된 조칙이다. 이에 의하면 계구수전의 정신인 配當-監督-殿最의 형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太和 九年 三月 丙午,詔曰:「朕政治多闕,災?屢興.去年牛疫,死傷太半,耕墾之利,當有虧損.今東作?興,人?肄業.其?在所督課田農,有牛者加勤於常歲,無牛者倍庸於餘年.一夫制治田四十畝,中男二十畝.無令人有餘力,地有遺利.」庫莫奚、契丹國各遣使朝獻.新校本魏書/紀/卷七上 帝紀第七上/高祖孝文帝宏한편 ㉢의 ‘無令人有餘力,地有遺利’에서 보듯이 땅에 백성을 긴박시켜 그곳에 생산해 낼 수 있는 모든 이득을 려움이 있었던 듯 보인다.) 한편 ㉣에서는 용이하게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집단적 수공업 경영이 산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한편 국가는 호족계 귀족들을 농경지역에 정착시키기 위한 일련의 우대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우대정책에도 불구하고 호족계 귀족을 포함하여 모든 이주민이 농경생활에 적응하고 적극적으로 田産을 경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태화 9년에 반포된 균전조가 호족들 전체를 포함하여 시행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또한 균전제가 갖는 대토지 소유에 대한 限田的 기능이 호족계 귀족들에게는 적용될 여지가 적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다만 삼장제는 모든 인민을 編戶化 하여 稅源으로 포착하려는 것이므로 호족들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옳다. 하지만 삼장제와 균전제는 피지배민족이었던 한족을 주 대상으로 하여 설정되었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2) 胡族사회 경제적기반의 변화 - 화북통일과 낙양천도화북통일이후 토지에 대한 관심과 소유욕의 차이는 胡族내에서도 上層, 下層으로 나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실 호족사회에서도 부족제 시대부터 부족의 통솔자, 지배자층과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있었고, 제국시대에 들어서부터는 훈공과 북위황실과의 통혼관계가지 얽혀, 신분이 고정되는 경향이 진척되고 있었다. 호족사회에도 귀족제)가 생겨나고 있었지만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인 호강층과 함께 균전제실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富强者幷兼山澤, 兼弱者望絶一廛”)의 국면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위국가체제의 기반이 선비족 중심에서 중국적 관료층으로 이행해 갔으며 그것에 따라 한인 관료층이 크게 대두되었다.洛陽은 후한에서 위진에 걸쳐서 천하의 중심이었다. 이 곳에 수도를 정한 것은 북위제국이 호족국가에서 탈피하여 위진의 전통을 잇는 중국적인 천하 국가로의 비약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풍속의 전환명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호족의 성은 중국식의 한 글자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히 의심스러워 爭訟이 遷延되어 판정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비옥한 밭이 버려져도 개간되지 못하고 연한 뽕잎이 말라고 채취하지 못합니다.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일어나서 번잡한 獄事를 일으키니 집안이 풍족하여, 해마다 저축을 하면서도 사람마다 資用을 얻는 것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은 당시 장기간의 혼란으로 고향을 떠나 표류하던 주군민, 즉 양민들은 향촌이 안정됨에 따라 귀향하게 된 것을 보여준다. ㉡에서는 당시 삼장의 확립에 의해 유민의 귀향이 본격화 되고, 향로들이 토지소유권의 결정에 크게 간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은 경작지가 황폐해져 다시 개간하는 과정에서 소유관계가 불분명하여 강종호족이 침릉 하든지 소송에 결말이 나지 않아 많은 토지가 버려져 있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균전조에서와 같이 토지소유관계의 불균형과 토지소유권에 관한 분규가 당시 해결해야 할 당면의 과제였던 것이다.효문제의 조에서는 토지분규의 문제성만 지적할 뿐 해결방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이안세의 상서에 보듯이 토지소유권의 법적 확립에 관한 언급은 채택되지 않아 균전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균전령은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확립된 전제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따라서 수전은 실제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耕地 전체를 국유화한 전체에서 다시 모든 토지를 재분배한 형태로 균전령을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한편 이안세는 토지소유권과 토지계승권을 현재의 점유상태를 기준으로 확립하자고 하였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첫째, 토지를 마땅히 다시 均量하고 그 경계선을 확실히 하여 기준에 따라 나누어 힘써 일하는 것을 고양하도록 하고 있다.) 둘째로 분규가 일어난 토지에 대해서는 今年내에 단안을 내리고 사태가 오래되어 밝히기 어려운 것은 모두 현재의 지주에게 귀속토록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토지소유의 불균형 해소와는 무관하고 부분적으로 상호 모순되는 면도 보이고 있다.이로써 균전제는 효문제 시기의 토지문제에서 보듯 국유황을 배로 지급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倍田에는 노전조에서처럼 노전의 正田分을 배로 지급받은 倍田과 같이 倍田화한 倍田이 있으며, 제3조의 ‘不足者以露田充倍’의 경우처럼 노전이 倍田과 桑田이 倍田화한 倍田이 합쳐져 倍田이 된 것이다. 노전조에서 倍田의 역할을 ‘以供耕作及還受之盈縮’ 규정한 것처럼 노전의 倍田은 耕休의 역할을, 桑田이 倍田화 된 倍田은 還受之盈縮, 즉 새로운 受田자격자가 발생했을 때 그 受田액에 대비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위의 사실에서 均田制가 시행될 때 그 이전의 기존의 土地所有權을 均田疏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장 변동하려는 것이 아니고, 旣所有地를 桑田화하여 民들의 기존의 土地所有權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大土地所有者는 均田制下에서도 均田制 이전의 그들이 토지를 그대로 소유할 수 있었으므로 이 규정을 大土地所有者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유한 旣所有地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빈민에게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그들의 旣所有地를 倍田화하고 그 여분이 正田分 40무 이상 있을 때 이들에게 다시 토지를 지급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均田令에 규정된 受田額을 受田대상자의 受田最高限額이라고 본다면 그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 그들이 소유한 노동 능력으로 경작할 수 없다. 그런데 다시 이들에게 국가 노전을 지급하게 되면 노동력의 부족으로 토지가 방치되어 地有遺利 초래하게 되므로 均田疏에서 언급하는 것에 遺利를 없게 하고 인에 능력을 없게 하여 力業相爭하자는 의도에 모순되는 것이다. 기소유자가 桑田 20무, 倍田分 40무에 충당하고도 노전분 40무 이상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제6조의‘有盈者無受無還’에 의해서 잉여분의 토지는 국가에 반납하지도 않고 또한 국가에서 토지를 받지도 않는다. 그 가에 進丁受田者가 나오게 되면 그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소유지가 규정액 이하가 될 때까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노비를 소유한 大土地所有者의
    인문/어학| 2010.06.24| 30페이지| 3,000원| 조회(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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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화와 칼 독후감
    들어가는 글고등학교 시절 SBS 야인시대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다. 김두환이 청년시절 종로 뒷골목을 후비고 다닐 때, 만났었던 나미코라는 일본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나미코의 성대모사도 유행했었다.‘안녕하세요, 나미코에요’라는 짤막한 유행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일본 여자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앞으로는 창백할 정도의 낯빛에 예의를 굉장히 차리지만 뒤로 꿍꿍이를 잔뜩 부리고 있는 것 같아 약간은 무서운 이미지였다. 우리는 가끔 각 국가에 대한 어줍지 않은 이미지로 그 문화에 틀을 씌우려고 한다. 하지만 국제관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해 보지 않고서는 자국의 대응방법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준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국화와 칼』이다.미국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대국을 적으로 하는 전쟁에서 이처럼 현격히 이질적인 행동과 사상의 습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더구나 일본은 서양의 문화 전통에 속하지 않는 완전히 무장되고 훈련된 국민들이었다. 결국 적의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적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저자는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겉핥기식의 일본문화를 체험하는 것보다, 먼발치에서 일본인들의 사유에 대한 증거물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객관적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각 장마다 일본인들이 어떻게 사유하는지 일본인들만의 특수성을 찾아내고 있다.1. 전쟁 중의 일본인미국은 일본, 이탈리아, 독일 추축국의 침략 행위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반면 일본은 계층 제도를 수립하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고,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인이다.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 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갖는 필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일본은 대동아 여러 나라와 동일한 인종이므로 세계 지역에서 먼저 미국을, 다음엔 영국과 소련을 쫓아내어서 ‘자기네의 알맞은 위치’를 갖지 않으면 고 한들 일본인의 군국주의는 결코 공격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천황폐하에 대한 열렬한 숭경은 분면 다른 유의 것이기 때문이다.천황에 열렬한 숭경을 보내고 있던 일본인 포로들을 군국주의자와 거의 동일시 파악했었다. 그러나 서구의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 사이의 가장 현저한 차이는 일본 병사들이 포로로서 연합군에게 협력한 점이다. 일본포로는 명예를 잃은 자이며, 일본인로서 그들의 생명을 끝났다고 생각했다. 일본인은 어떤 하나의 행동 방침에 모든 것을 걸며, 만일 그것이 실패할 때는 다른 방침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쟁 중의 일본인의 행동의 특이성과 같이, 이것 역시 그들이 그것에 따를 수 있도록 조건 지어진 생활양식 전체, 그들의 여러 가지 제도의 기능 및 그들이 배워 온 사고와 행동의 관습 등에 관한 문제들을 제기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2.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먼저,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가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의 계층 제도에 대한 신뢰야말로 인간 상호 관계 및 인간과 국제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이어서 가족, 국가, 종교 생활 및 경제생활 등과 같은 그들의 국민적 제도를 기술하는 것이 된다.1940년대 일본은 두드러지게 서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족주의 적인 사회였다. 사람들과 인사하고 접촉할 때는 반드시 서로간의 사회적 간격의 성질과 정도를 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기본단위는 가정으로 가정 내부에서 계층 제도의 습관을 배우고 그것을 경제생활이나 정치생활 등 영역에 적용한다. 그것이 실제로 그 집단 속에서 지배력을 띤 인물이든 아니든 자기보다 위의 ‘분수에 맞는 위치’를 갖는 자에 대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경의를 표하도록 배운다. 아내에게 지배당하는 남편, 아우에게 지배되고 있는 형일지라도 표면적으로는 존경을 받게 된다. 특권과 특권 사이의 형식적인 경계선을서구적 견지에서 보면 무용한 것으로 비치지만, 모든 점에서 계층적 역할이 엄밀한 정의에 습관화된 일본인은 그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행동의 끝에서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고, 모든 사회적 지위한 정해진 그러한 세계 속에서 생활하도록 조건지어져 있다.그러나 무력적인 계층 제도의 지배하에 놓였던 다른 몇몇 나라의 국민들처럼 온화하고 순종하는 국민으로는 되지 않았다. 각각의 계급에 어떤 종류의 보증이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천민 계급일지라도 그 특수한 직업을 독점하는 권리를 보증 받았고, 또 그 자치 단체는 당국자의 승인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각 계급에 가해지는 제한은 컸지만, 그 대신 질서와 보증이 있었던 것이다.3. 메이지 유신메이지 유신의 가장 큰 배경은 ‘천황을 복벽하고 이적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일본을 외국에서 짓밟히지 않게 하는 것과 함께, 또 천황과 쇼군의 이중 통치 속에 있었던 14세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메이지 정부의 개혁은 대중의 뜻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기본적으로 대중들로부터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1871년에서 1873년에 걸치는 조선 침략론이었다. 사이고 다마코리를 우두머리로 한 재개혁파들은 이를 두고 정한론이라 불렀다. 조선 침략 계획은 철회되었지만 개혁은 단행한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당시의 정부는 특수한 일본의 여러 제도가 이미 봉건 시대부터 육성시켜 온 하층 사무라이 계급과 상인 계급과의 특수한 연합 세력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시책은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목표란 일본을 세계열강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놀라운 성과를 거둔 메이지 유신 속에서도 일본의 계층제는 배척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제 복고는 천황을 계층제의 정점에 두고 쇼군을 제거함으로써 계층적 질서를 단순화 했다. 왕제 복고 이후의 정치가들은 번을 폐지함으로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체에 대해서 인간이 지고 있는 큰 채무를 공인 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또 다른 사람과 매일매일 접촉하는 것까지도 현재에 있어서의 그의 채무를 가증시킨다. 중국어에도 일본어에도 영어의 ‘Obligation’을 의미하는 여러 가지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며, 그 말이 표현하고 있는 관념을 정확하기 이해하기란 어렵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 지고 있는 채무를 나타내는 일본말은 온〔恩〕이다.온은 첫째의 그리고 최대의 채무, 즉 천황의 온에 대해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항상 무한한 헌신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채무로서 사람들은 황은을 무한한 감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때에는, 언제나 동시에 이것들은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라고 느낀다. 일본 역사의 모든 시기를 통해 일본인들이 빚을 지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 속에 최고의 한 인간은 그들의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 이었다. 그리고 근대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감정을 천황에게 집중하도록 해왔다. 가미카제 조종사는 누구나, 일본인의 말에 따르면 황은에 보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집단적 귀속의식이 매우 강하다.미국에서는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어떤 부속물이 붙어 있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에 한층 존중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드시 부속물이 붙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온을 받는 데에는 더할 수 없을 만큼의 너그러움을 요구한다”라는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일본인들이 온을 주고받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해 준다.5.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온이란 부채이기 때문에 갚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 보은, 은혜 갚음은 온과 아주 별개의 범주에 속한다. 사람의 채무, 온은 덕행義)를 행한다는 것은 최상층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결코 덕으로서 요구되지 않았다. 즉 자선 사업에 기부를 청하거나 범죄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이한 경우이다.일본의 정치가들은 천황을 신성한 수장으로 받들고, 세속적 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니 천황은 일을 행할 필요로 없으며, 피지배자의 반란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단순히 천황을 국민의 아버지로 삼는 것에서 벗어나, 일본인의 최고의 덕인 천황에 대한 충절, 즉 충은 속세와의 접촉에 의하여 더렵혀지지 않는 하나의 환상적인 아버지를 무아경적인 정관(靜觀)으로 받들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와 지도자들은 켜켜이 쌓인 구름 속에 깊숙이 은거하고 있는 천황, 따라서 그 풍모를 각 사람이 각각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이상화하여 그릴 수 있는 천황에게 충을 바쳐야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1세기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와 싸웠던 것이다.메이지 유신은 이 존왕파의 승리였다. 천황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림자로 물러났다. 천황은 각하들에게 권력을 부여하였다. 스스로 정부나 군대를 지휘하여 그때그때의 정치 방침을 지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지식 계급 조차 천황에게 충을 바치는 것에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았다. 황족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이기 때문에 그 어떤 변혁에서도 결코 그 사회 조직이 지리멸렬하게 파괴된 일이 없어 항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져 왔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천황은 ‘침범될 수 없는 것’이었고, ‘폐하의 마음을 편안하시게 하기 위해’한 몸을 희생했고, 그것에 천황 그분에 대한 보은이었다.천황의 목소리가 방송되기 전까지 일본은 패배했다고 믿지 않았다. 적어도 일본인은 그것이 항복의 명령이라 해도 그 명령을 내린 것은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다. 패전에 있어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천황을 향한 충에 있었던 것이다.6. 오명을 씻는다이름에 대한 의미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독후감/창작| 2010.06.24| 7페이지| 1,5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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