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사무라이(たそがれ清兵衛)를 보고 = 1 * ROMAN I. 요약주인공 세이베이는 연봉 50석을 받는 가난한 사무라이다. 가족은 아내가 병으로 죽고 난 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와 두 딸이 있다. 그러나 연봉 50석으로는 이 세 가족의 생활비를 모두 감당할 수가 없어 텃밭을 가꾸고 벌레 상자를 만드는 등 부업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항상 일이 많아 자신의 몸단장에 신경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꾀죄죄한 냄새가 나는데다가 일이 끝난 후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고 곧바로 집을 가버리는 그를 동료 사무라이들은 칼퇴근(제목과 같이 황혼의 세이베이지만 한국어 자막에는 칼퇴근이라고 표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이베이는 두 딸이 나날이 커가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다.그러던 어느 날 세이베이는 예전에 자신이 짝사랑했던 토모에가 남편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이혼하고 마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토모에가 세이베이의 집에 찾아온 날, 토모에를 집까지 데려다 준 세이베이는 그곳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던 토모에의 전 남편과 마주치게 된다. 토모에의 오빠를 대신하여 토모에의 남편과 결투를 하게 된 세이베이는 목검을 들고 나가 토모에의 남편을 쓰러뜨린다. 세이베이가 사실은 엄청난 실력의 검사라는 소문이 성 안에 퍼진다.그로부터 얼마 후 번주가 죽고 치열한 세력다툼이 벌어진다. 죽은 번주에게 충성을 바치던 사무라이들은 모두 할복을 강요당하고 죽어간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의 사무라이만이 할복을 거부하고 목숨을 직접 거두러 오라며 집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성에서는 세이베이를 불러 할복을 거부한 사무라이를 죽일 것을 명령한다. 세이베이는 그 집에 들어가 사무라이와 결투를 벌이고 승리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도착한 세이베이는 토모에가 결혼하지 않고 자신의 두 딸을 보살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이후 둘은 행복하게 살다가 세이베이는 메이지 유신 때 죽고 토모에는 두 딸을 잘 키워낸다. = 2 * ROMAN II. 배운점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이베이의 생활을 보면서 나는 조선 후기의 몰락한 양반들의 생활을 떠올렸다. 본래 조선의 양반은 글을 읽고 학문을 수양하는 것이 본분이기에 농사를 짓거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고 양반 사이에도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서 몰락한 양반들은 텃밭을 일구거나 고리짝 만들기 등 부업을 해서 근근이 살아가게 된다. 조선의 양반과 같이 무산계급에 속하는 사무라이인 세이베이가 밭을 일구고 벌레 상자를 만드는 모습은 조선의 몰락 양반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일본 역시 근대 사회로 이동하면서 사무라이 간에도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세이베이와 같이 가난한 사무라이는 생활을 위해 일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또한 가문 이름 앞에 연봉을 붙여 부르는 것도 놀라웠다. 우리나라는 천석꾼이나 만석꾼이라는 말은 있지만 성씨 앞에 그 가문의 일년 수입을 붙여 부르지는 않았는데 영화 속에서 사무라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50석의 세이베이’와 같이 다른 가문의 이름 앞에 수입을 붙여 부른다. 원래 전통적으로 그렇게 불러왔던 건지 아니면 근대 사회로 이전하는 시기에 자본주의가 확대되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건지 궁금했다. = 3 * ROMAN III. 느낀점영화가 시작되면서 등장한 세이베이의 모습은 어딘가 꾀죄죄하고 멋진 사무라이와는 좀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칼퇴근이라는 번역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심각한 장면인데도 칼퇴근이라는 말 한마디만 나오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더불어 세이베이가 참으로 매력적인 남편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여럿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세이베이와 딸들이 나오는 부분들이 인상 깊었다. 큰 딸이 벌레상자를 만드는 세이베이 옆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다가 서당의 선생님이 앞으로는 여자에게도 학문이 필요할 거라 말했다며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묻는다. 세이베이는 공부를 하면 세상을 알게 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여자도 학문을 해야 한다며 딸이 배운 부분을 함께 외어준다. 그리고 밤에 번주가 부르던 날 작은 딸이 현관 앞에서 나가는 세이베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라며 들여 보내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세이베이는 정말 가정적이고 좋은 아버지상을 보여주었다.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들었을 때는 예전에 개봉했었던 라스트 사무라이와 비슷한 내용의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한 사무라이가 황혼을 배경으로 할복 자살을 하거나 두 명의 사무라이가 역시 황혼을 배경으로 비장한 결투를 벌이는 장면으로 끝을 맺을 것 같은 제목이었다. 그렇기에 과연 이 영화가 얼마나 재미있을지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자 곧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스토리 자체도 너무 좋았고 지루해지지 않게 군데군데 등장하는 유머도 너무 좋았다. 이 감독의 다른 영화도 챙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재미있는 영화였다.PAGE PAGE 1
20세기 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20세기의 동아시아는 큰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프랑스 혁명의 기치였던 자유, 혁명, 박애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문화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사이에 급격히 퍼져나가고 각종 무기와 진보된 과학 기술이 수입된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각 국가들은 각자 나름대로 쇄국이나 개방 등의 정책을 펴고 전쟁을 치르고 혁명이 일어나는 등 혼란과 변화를 겪는다. 특히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 가장 빠르게 개항의 과정을 거친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이 강한 제국주의 성향을 보이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러한 일본의 야욕은 20세기 동아시아 전체를 휩쓸었으며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일본이 빠르게 개항과 근대화의 과정을 겪고 제국주의 성향을 띄게 된 것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으나,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하는 그 당시 일본의 사상가의 영향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일본에 빛의 시대를 가져다주었다고 찬양받으나 그와 동시에 한국과 중국으로부터는 제국주의 침략을 선동하였다고 비난받는 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20세기 동아시아의 세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며 그 흐름이 현재까지 어떻게 각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목차Ⅰ. 왜 후쿠자와 유키치인가Ⅱ.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1.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의 배경2. 평등과 실력주의의 설파3. 제국주의의 주장Ⅲ. 후쿠자와 유키치의 양면성Ⅰ. 왜 후쿠자와 유키치인가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텐보 5년)에 태어나서 1901년(메이지 34년)에 사망한 일본의 사상가이자 교육가이다. 현재까지 일본의 명문 사학으로 손꼽히고 있는 게이오 기쥬쿠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메이지 시대의 육대 교육가 가운데 하나로 칭송받고 있다. 1984년부터 일본 화폐 1만엔 권에 그의 초상이 쓰여지고 있으며 2004년쥬쿠 대학의 三田 캠퍼스 안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현대 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그가 꼽히는 것은 그가 훌륭한 교육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내적으로는 근대화를 촉진시킨 중요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일본은 이미 근대화가 충분히 진행되어 있으므로 제국주의 열강들과 발맞춰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을 무력을 사용하여 점령하여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담긴 탈아론脫亞論은 일본 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는데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게 된다.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기에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각 나라의 평가는 놀라울 만큼 상반되어 있다. 이러한 각 나라의 입장은 현재 각 나라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20세기 동아시아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인식하는 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Ⅱ.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1.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의 배경후쿠자와 유키치가 태어났을 때는 한창 동아시아에 서구 열강들의 진출이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는 19살 되던 해 나가사키에 난학을 공부하러 가게 된다. 그 당시 나가사키에는 페리 호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네델란드 어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그 역시 네델란드어를 공부하는 데 집중한다. 개항의 물결이 빠르게 들이닥쳤던 나가사키에서 그는 서구 문물을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삼국의 각 나라에서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개항이 빠르게 이루어져서 서구문물을 접하는 것이 용이했던 곳에서 거주한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민중들이 최초로 근대화를 요구했던 태평 천국 운동을 일으켰던 홍수전 역시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항이 되었던 항주 출신이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다양한 서구문물을 접하며 일본도 어서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가지고 있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책을 저술하고 게이오 기쥬쿠 대학을 세워 가르치면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2. 평등과 실력주의의 설파그는 몇 차례 미국과 유럽등을 방문한 후 『서양사정』이라는 책을 펴낸다. 이 책은 후쿠자와 유이치의 사상을 기록했다기 보다는 철저히 그 당시 서양의 경제사정을 경제서적등을 참고하여 번역하여 객관적으로 서양의 사정을 전달한다. 이 책에 그의 근대화 논리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나 당시 해외에 대해 관심이 높아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이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후쿠자와 유이치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다.그 이후 그는 『학문의 권유?問のすすめ』로 더욱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따온 이 책의 첫 구절인 하늘은 사람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天は人の上に人を造らず人の下に人を造らずといえり는 아직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책에서 사람의 인권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신분이나 남녀와 같은 것이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신분 등에 의해 그 인생의 우열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학문을 닦았느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평민들도 아무리 현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열심히 학문을 닦아야 하며 지식이 그들에게 부와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이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책에서 서구 열강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학문을 닦아 힘을 키우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동안 일본의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평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써 큰 인기를 끌게 되며 근대 서구 문명 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여론을 이끌어 내게 된다. 또한 그의 근대화에 대한 주장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한국의 개화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3. 제국주의의 주장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가 대표작인 『학문의 권유?問のすすめ』에서 단지 교육의 중요성만을 주장한 것은 아키치는 이 책에서 국가와 국민은 계약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쌍방의 의무를 주장하였던 서구의 개념과는 달리 국민은 국가의 법을 준수하겠다는 계약 상태에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의 명령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민은 항상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를 위해 일해야만 하며 국가의 법이나 명령이 부당하더라도 계약을 맺은 이상 반드시 그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후에 천황을 절대적인 신의 자식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마음과 맞물려 후에 카미가제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광기를 보여주는 집단의 타당성을 사상적으로 뒷받침 하게 된다.또한 그는 『탈아론脫亞論』에서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의 국가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 나라들을 점령하여 서구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에 비해 한국과 중국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훨씬 뒤떨어진 상태이며 이러한 한국과 중국을 개명시켜 우수해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점령하고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시아 전체를 위한 옳은 선택이 될 것이라 말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일본의 국민과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향후 메이지 유신의 방향을 결정할 만큼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이 주장은 20세기 동아시아 전체를 전란으로 끌고 갔던 일본의 대동아 전쟁, 제국주의 침략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을 바탕으로 행해졌던 일본의 한국과 중국 침략은 20세기 동아시아를 형성하는데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어 있지 않다.Ⅲ. 후쿠자와 유키치의 양면성동아시아 삼국는 각자 나름대로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해왔으며 따라서 서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놓고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로 인해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완전한 이 교육에 있어서도 근대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훌륭한 지도력, 정치력 등만을 가르친다. 따라서 그 당시 '일제의 식민 정책에 불만을 갖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위대한 인물을 죽인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과 중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악독한 일제 총독으로 취급되고 안중근을 의사라 부르며 경의를 표하는 것과는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의 결과 각 나라의 국민들은 각 나라의 평가가 일치 하지 않는 경우 특정한 인물의 한 면만을 인식하게 되었다.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의 사상이 20세기 동아시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체적으로 놀라울 만큼 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동아시아 전체의 올바른 평가와 이해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후쿠자와 유키치는 분명 시대를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신념을 글로 호소력있게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지성과 문장력의 소유자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시의 문벌 지식인, 귀족 계층으로서는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평등과 실력주의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으며 앞으로 이 두 가지가 중요해질 것이라 역설했다. 도를 알고 정신을 수양하는 유교적인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갈수록 글씨를 쓰는 법, 장부를 기입하는 법, 물건을 사고 파는 법, 무기를 제조하는 법 등 실질적인 지식이 중요해지고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며, 평민이나 귀족이라는 신분이 아닌 지식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도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력주의는 지나치게 지식 습득을 강조하여 육체적 노동을 경시하였다는 점에서는 비판받을 만하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분명 천부인권론을 제시하였으며 평등의 가치를 내세웠으나 그가 주장한 평등은 신분과 남녀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식의 축적 정도를 기준으로 또 다른 차별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