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ㅗ고서제 목 : 삶과 온생명과 목 명:동양의 생명사상학 과:철학전공학 번:20210463이 름:박찬영제 출 일:5월 1일담당교수:유병래 선생님생명의 시작과 성장사실 현대 과학으로 추적해 나가 보면 이 생명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하는 것을 대략 알 수가 있다. 대략 35억 년 전에, 아주 쉽게 얘기하면, 초보적인 세포 한 개가 우연히 생겨났다. 그런데 그 세포는 어떤 성질이 있느냐? 잠시 존속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곧 깨어져 없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없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태양과 지구라는 여건 아래서는 자기와 비슷한 걸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없어지기 전에 최소한 자기와 비슷한 것이 하나 이상 만들어질 수 있도록 영양을 끼친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가 생기고 그 하나가 미처 없어지기 전에 또 하나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 만들어진 것 또한 처음 걸 그대로 본받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그런 기능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다시 또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새로운 것이또 생기고, 이렇게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여기서 이런 기능을 지니게 될 물리적 특성을 우리가 `정보`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대를 이어 정보가 전해지면서 생명이 존속해 나가게 된다.이것이 우리 지구 생명의 최초의 상황이다. 그런 여건이 대략 35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둘이 되고, 넷이 되면서 물론 중간 중간 변화되기도 하고 단절된 것도 많지만, 그래도 역시 살아남은 것이 계속 있어서 35억년 간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한테까지 내려왔다. 여기 모든 분이 그걸 거꾸로 추적해 볼 수가 있다. 추적을 해 보면 결국 하나로 가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 한번도 단절이 없었다. 단절이 있었다면 우리가 여기 존재치 않는다. 35억 년 동안 죽 한번도 끊이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또한 놀랄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 고립적으로 있는 지구 초기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 연속된 이 큰 전체도 또 어떤 실체인데, 그럼 이건 뭐라고 부르느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이름이 없다. 아무도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의미있게 생각하고 이름을 붙여 놓지 않았던 것이다. 도리 없이 제가 이름을 붙였죠. 그래서 영어로 global life라고 했다. 영어로 먼저 이름을 지은 이유는 제가 그 논문을 영문으로 먼저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한 10여 년 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있었던 과학철학 모임에서 그렇게 발표를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말로 번역을 하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지구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좀 답답하고, 우주 생명이라는 표현도 써봤는데 이건 너무 크고,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다가 `온생명`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내고, 그 후에는 그렇게 부르고 있다.우리 지구 초기의 그 어느 때 최초로 발생해서 지금까지 쭉 성장해온 그 존재, 그것이 온생명이고, 좀 전에 말씀드린 생명의 진정한 단위이다. 다른 태양 근처에도 다른 계열의 것이 있다면 그건 또 하나의 온생명이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보통명사이다. 전 우주에 하나의 온생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우주 안의 생명을 통틀어 온생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한 생명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갖추어진 생명의 한 거시적인 기본단위라고 얘기하면 될 것이다. 우리 지구상에서 여러분과 나는 같은 온생명의 부분들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려 할 때, 온생명이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비로소 무리 없이 생명의 전체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온생명 자체의 생리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얘기해야 할 것이 많고, 또 온생명이 겪어 온 역사를 보면 아주 재밌는 게 많다. 가령 우리에게 언제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겼느냐, 또 어느 시기에 왜 본능이라는 것이 생겼느냐 하는 것도 지금은 추적을 해나갈 수가 있다. 어느 시기에 왜 생겼는지를 알면, 우리가 지금 본능을 어느 정도 왜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지,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하는 람은 이기심이 있으면서도 이타심이 있다. 자기들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또 다른 사람도 생각한다. 왜 이런 이중적 성격을 가질까 하는 생각들을 오래 전부터 해 왔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온생명 생리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 못한 것은 다 도태가 된다고 얘기할 수 있다.온생명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온생명 안에 존재하게 된 낱생명들 가운데서도 아마 가장 중요한 존재가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독특한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온생명에서 거의 최종적으로 나온, 상당히 늦게 태어난 존재인데 역시 온생명의 다른 개체들과 공존하면서, 또 그것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 존재이다. 사람이야말로 사람만 닥 추려 놓으면 전혀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다른데 의존을 대단히 많이 하면서도 또한 매우 특징적인 묘한 존재이다. 물론 그 선조를 추적해 나가면 다른 생물종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의식`이라는 것을 차츰차츰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정신구조를 추적해 보면 사람에게 와서 이 의식이 굉장히 선명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의식도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나`라는 것을 아는 자아의식이 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우리`라는 것을 느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기 혼자뿐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의식을 지닌 존재는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낱생명 중 사람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의식을 지닌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약 자기를 의식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불행한일인가?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식물인간이라 말하죠. 불행하게도 그렇게 돼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정말 딱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생명을 생각해 볼까? 온생명이라는 것을 보면 하나의 큰 생명의 단위인데, 이것이 태어난 이후 35억 년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나타남으로 해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사람 자신이 온생명의 한 부금 설혹 인류의 99%가 이 중요한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들에게 말을 걸 수가 있고 이들 또한 말을 듣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발 이 시점에 온생명의 의식 구실을 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점,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깨어 있는 1%에 속해 있어서 온생명의 무서운 질환을 치유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우주사적 소명-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자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고차적 의식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만일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그 어떤 집합적 지성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온생명이라고 하더라도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자아를 의식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인간의 이러한 온생명 의식이 객체로서의 온생명 의식뿐 아니라 주체의 연장선에서의 온생명 의식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객체로서의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체로서의 자아에 이르게 되는 것은 기와의 주체인 작은 `나`를 그 중심에 놓이면서 자신의 의식을 내부로부터 온생명 전체로 확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새로운 생명가치관우리가 일단 생명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이 안에서 생명가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생명, 즉 자신에게 부여된 낱생명을 그 어떤 절대적 의미를 지닌 기본 가치로 인정한다면 이를 포함하는 본원적 생명인 온생명에 대해서는 최소한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상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마치도 내 손가락 하나의 안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몸 전체의 안의는 그것보다는 한 차원 더 중요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일단 온생명의 본원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낱생명들의 집합적 그리고 개별적 가치 또한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온생명이 가치롭다는 판단에니라 더 큰 `나`의 일부로 인정되므로, 이 두 가치는 분리된 두 개의 가치가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이는 별개의 두 가치 사이의 가치 종속적 상황이 아니라 동일 가치의 구성상에 나타나는 내적 구획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은 예컨대 한 유기체의 경우 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으로 인정되면서도 이들은 도한 유기체의 정상적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에 따라 그 상대적 가치를 부여받게 됨과 흡사하다. 온생명의 경우 각각의 낱생명들은 생명으로서의 기본적 가치를 부여받음과 동시에 온생명의 `건강한` 전체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또 하나의 판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만일 우리가 온생명의 건강한 존재양상 더 나아가 이것의 이상적인 존재양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한 각 개체생명들의 기여도를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하나의 좋은 상대적 가치 척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온생명에 그 어떤 이상적인 존재양상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있다면 이를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선험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위해 불완전하나마 그 어떤 최선의 추정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닌 최선의 지식, 예컨대 온생명의 역사적 성장과정과 온생명의 생태적 존재양상 등에 관한 지식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볼 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온생명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온생명은 풍요롭고 다채로운 생명현상들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으며, 특히 인간을 비롯한 영특한 지적 존재들을 빚어내어 그들을 통한 또하나의 창조작업을 이루어 나가는 실로 경탄해 마지 않을 그 어떤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만일 우리가 온 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온생명의 바람직한 존재양상이란 최소한 이러한 창조적 다양성을 지속시켜 나가는 방향이한다.
ㅂㅗ고서제 목 : 인간적 문화에서의 영생과 목 명:학 과:학 번:이 름:제 출 일:담당교수:1. 사생과 귀신사람은 언제나 스스로를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된다고 생각하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과 차별점을 두어 불멸의 정신이나 영혼을 기능적으로는 그것을 지닌 이성적 사고력이나 영성(靈性)을 들어 왔다. 죽음을 필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방식도 또한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자신의 의미를 내세우기 위해 그러한 것이다. 아를 다른 존재자 뿐만 아니라 타인과도 분명히 구별 될 수 있는 절대적인 단위로 상정 죽음에 대한 초월적 의미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성을 쉽게 확보될 수 있는 단서로 영원히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동아시아 역사를 이끌어 갔던 유가철학 내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해보다는 개체정신이나 영혼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인 그 영원한 실재성에 대해 고찰한 것에 중점을 맞췄다. 유가의 여러 의식가운데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나 사회적 삶에서의 높은 도덕성에 기인한다고 볼 때 영혼과 정신의 실재성에 관심을 가졌을 것 같기 때문이다.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혼동되기 쉬운 귀신의 의미를 유가적으로 풀어보려한다. 한마디로 간추리면 유가의 영혼론은 바로 귀신론이다. 하나의 존재자가 생겨나오거나 사라져 가는 현상을 설명하는 복합개념으로서 음과 양처럼 존재의 변화나 운동방식을 설명하는 기능개념이다. 그리고 귀(鬼)를 명명함에 있어 사람이 죽어서 되는 특수 존재를 신(神)은 천신(天神) 등 오묘한 공능을 지닌 보편존재를 뜻하는 역시 복합개념이다.정신은 유가 이외의 동양철학 속에서는 육체에 대립하는 비공간적 실체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보편적 실재개념인 기가 현상화 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3단계 혹은 3실재의 준말이다. 즉 일기(一氣)가 현상와 해서 나타나는 정(精), 기(氣), 신(神)의 준말이다. 정은 육체적 정신, 신은 정신적 정신에 해당되어 데카르트식 이분법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 논의해야할 위해서이다. 공자는 귀신과 죽음에 관한 예화에서 현실자체를 중시했다는 것이 보여진다. 이는 원시 종교적 신앙대상으로서의 귀신의 실재성에 대한 호기심이 엷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이치가 다르다는점은 경험세계의 이치에 어긋나는 괴이한 실체나 현상으로는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양상은 당연히 사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이란 유학적 철리산문이 특이하게 발달하였다. ‘귀신’이라면 지금은 민간의 미신으로 저질스러운 사상으로 무시당할 것에 틀림없지만 과거에는 고급사상이었고, 귀신론은 우주론의 일환이며 사생관의 철학이었다. 신유가의 이기론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양상을 띄지 않고 소박하게 실제로 다른 세RP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도 좋다.공자는 신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근본 뜻은 그러한 의식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심성을 가꾸게 하려는데 있었다. 유교를 현세적 종교로 만들었고, 이후 중국의 귀신신앙은 차츰 인본주의 철학체계 속으로 끌어들여 가면서 약화했다. 가지(可知)의 산사람과 현실세계를 관심의 영역으로 확정시켜 준 것이다.귀신론은 드디어 주역에 이르러 철학적 문제로서 봉착하게 된다. 내세와 현세, 죽음과 삶, 귀와 신 어느 것도 자연의 큰 법칙으로서 음양의 변역논리(變易論理)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동양의 보편정신에 연유하게 된다. 유교는 天帝라는 관념을 死後나 死靈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신은 사람이나 자연의 펴나오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묘한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지 천신과 같은 실체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후 사상체계 내에서는 도덕적 사람으로서의 삶을 자율적으로 이룩하려고 함에 따라 우주 안에 귀신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죽어 정기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사람의 생각과 상상력이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 결론짓게 된다.훗날 신유가가 이러한 것을 채용해 가는데 (1) 사람은 앎의 기능을 가진 정기체이다. (2) 정기는 혈맥에 의해 성립된다. (3) 혈맥이되어 일원기로 돌아감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일원기 뿐인 것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3. 신유가(新儒家)의 인간론정이 정호형제, 장재 그리고 주자설에 의하면 귀신은 사생(사람이 죽어면 귀신이 생긴다)론이다. 연이나 이상의 주장들은 미흡한 자연의 주치설에 불과하다. 어떤 현상을 인용하고 끌어당겨 설명을 하여도 긍정할만한 것은 없고, 불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의 학자들간에도 경험되어진 사실이다. 나중에 학문적 소득을 얻는다고 가정하면 하나가 아니면 둘일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아주 작은 좁쌀 만한 것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정이 보이지 않게 생긴 것이라고 추론한다. 옛날부터 귀신 이야기는 천년 전부터 내려온 것이지만, 정이의 말을 빌리면 사람이 죽은 뒤 생기는 것이 귀신이라 했다. 하나 아니면 둘이고, 둘 아니면 하나다. 아무리 귀신 이야기를 해도 결론은 없다. 나 역시 사람이 죽은 뒤 귀신이 되는 현상을 이해한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기가 모이고 흩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의 본체는 무엇인가? 기하나가 맑고 세차게 흐르다가 가라앉지 못하고 밖에서 허하게 있을 때이다.기가 크게 모여 뭉치면 지구가 되고, 기가 작게 뭉치면 만물이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세력의 현상일 뿐이다. 기가 아주 미세하고 적다면 속도가 빠르고 오래오래 지속되고, 기가 크게 모여 뭉쳐 지구나 태양이 되던 기가 아주 작게 모여 뭉쳐 동식물이 되든 간에 기가 모였다가 흩어지면 태허이다. 태허(우주)란 크게 비어있는 상태이다. 크게 모여 지구가 되든 작게 모여 사람이 되든 간에 기가 허해지면 죽는다. 기가 모여 풀이되던 나무가 되든 그 기는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 모여 뭉쳐 사람의 정신이 됨을 알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기가 모여 커지면 오래오래 간다. 사람은 죽어 정신의 혼과 백은 흩어진다, 흩어지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모여 뭉치기 때문이다. 혼과 백은 어느 곳이나 있고 모두 가지기들은 끝까지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흩어져도 그 기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는 심하게 하나로서 맑고 허하기 때문이다(태허). 그러므로 없는 것 같아도 있고, 없는 것은 처음이 되고, 처음은 없는 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세상의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영구 불멸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와 기가 있는 곳에는 극히 묘함이 밑바닥(에너지 영점인 상태, 우주, 태허)이다. 이 글의 주제인 사람의 죽음은 결국 정기나 혼백이 분리되어 다시 일원기로 돌아가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즉 펴나오고 생겨 가는 과정의 반대과정이 죽음이다.4. 신유가의 사생관신유학은 세계를 기(존재)와 리(존재의 질서)라는 두 개의 원리로 재편하면서, 역대의 유교가 모호하게 해 두고 있었던 귀신의 세계를 지식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니까 이런 주자의 귀신론의 취지는 공자가 불가지론으로 말했다고 생각되는 죽음 뒤의 세계, 귀신의 세계를 앎의 대상으로 끌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중용장구 에서는 宋學의 선배인 程子와 張子가 말한 바, “귀신은 天地의 功用"이고, “造化의 자취"(程子)이며, 또 “二氣의 良能"(張子)이라는 명제를 이끌어 사생귀신설의 해명을 감행했던 것이다. 宋儒들은 우주 천지의 문제는 음양으로, 사람의 문제는 귀신론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다.여기서 장자가 “귀신이 천지의 공용"이라 한 말은 “신이 천지의 묘용"이라 한 것과 구별된다. 정자는 하늘의 성정을 가리켜, “그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면 帝라 하고, 그 공용으로 말하면 귀신이라 하고, 그 묘용으로 말하면 신이라고 한다"고 했다. 여기서 귀신과 신을 공용과 묘용으로 나누고 있지만, 모두 ‘용’의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이기의 양능”이라 한 장자의 귀신관은 음양의 두 기운이 저절로 떠오르고 가라앉으며, 모이고 흩어지는 성능으로 설명되고 있다.귀신은 두 기운의 양능이다. 천도는 막힘이 없으니, 추위와 더위며, 모든 움직임이 막힘이 없으니 굽힘과 폄이 그것이다. 귀신의 실상은 이 두 끝을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민간에서 제사받는 존재, 통속적 의미의 귀신의 존재는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부정된다. 程子의 경우도 이기는 다 같이 형이상학적 본체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특히 ‘氣'를 器나 귀신이나 음양 등 유형의 뜻으로 풀어서 귀신을 곧 氣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기의 취합으로 이루어졌고, 사람이 죽으면 다시 기로 흩어져 버릴 뿐이므로, 死靈이 존재로서의 귀신으로 해석될 여지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고시대에 길흉화복의 주재자였던 귀신, 제사의 대상이었던 귀신의 존재는 도가의 기계론적 기론과 주역 의 음양론적 철학의 개념을 이은 송학에서 이렇게 자연철학적 개념으로 탈바꿈했던 것이다.그런데 교과서적인 주자의 귀신론이 “귀신은 음양 二氣의 消長일 뿐"이라 하여 을 표방하면서, 한편으로는 제사의 고대적 전통과 귀신을 理로 설명해야 했던 고민 속에서 해석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혼란은 주자의 우주 본체론이 이기론과 귀신론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곧 주자의 이기론은 氣 쪽이 강조되어 있고, 이것을 인간의 사생의 문제에 적용할 때 이기론은 곤란을 겪게 된다. 실제로 중용장구 에서는 귀신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고 하고, 또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畏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면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듯하며 좌우에 있는 듯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제사 풍속에서 보는 귀신제사와 그 제사에 있는 듯한 조상의 영혼의 來格도 물론 부정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주자의 중용장구 와 중용혹문 의 각각의 에서 모두 보이고, 그의 귀신론의 착종은 주자어류 에 자주 보이는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구체적인 문제로 중용 제16장에 보이는 바 음양의 귀신과 귀신의 덕이라는 문제는 귀신을 이기론에 적용할 때 생길 수 있는 해석상의 가장 큰 혼란이었다. 이기론과 관련한 주자의 中庸章句 에서는 張載의 이다.
잠재적 교육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육과정’이란 용어의 다양한 개념정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교육과정이란 용어는 국가 및 사회, 학교 또는 교사의 ‘계획’과 ‘의도’에 관계되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교에서 경험하는 것에는 이러한 의도와는 관련이 적거나 없는 경험들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특성들의 학습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학교나 교사가 의도한 바와 관련된 경험으로 구체화된 부분이 교육과정의 한 측면이라면, 구체화되지 않는 부분 역시 교육과정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최근에 대두된 잠재적 교육과정의 개념은 대체로 교육과정의 이러한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근 학교에 관한 다양한 연구들이 이루어지면서 학교에서 의도한 바와 관련된 경험과 학교에서 의도한 바와 관련하지 않는 경험을 구분할 필요가 생겼으며 전자를 표면적 교육과정, 후자를 잠재적 교육과정이라 부르게 되었다.1. 표면적 교육과정표면적 교육과정은 학교가 계획적으로 의도했던 학습의 결과를 초래하는 교육과정으로 교과목이 문서화된 공식적인 과정을 말한다. 이 교육과정은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가의 강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가시적?표면적인 면이 짙으며, 지적인 영역을 주로 다루고 있다.2. 잠재적 교육과정1) 잠재적 교육과정(latent curriculum)의 배경(1) 학교의 역기능을 분석하고 이를 계획 속에 표현화 시킴으로써 학교교육의 순기능을 확대?강화시키려는 교육적 노력에서 비롯되었다.(2) 학교생활을 통해 아동들은 단편적 지식이나 무용지식을 배우는 반면, 가치관이나 도덕관의 확립을 올바르게 하지 못해 인간교육에 실패하고 있다는 각성과 함께 교육이라는 제도 자체 속에 인간교육을 해치는 요소가 있으므로 학교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일리치(I. Illich)의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상급학년으로의 진급이라는 교육으로 졸업증서를 개인의 능력으로 혼적 교육과정의 개념(1) 잠재적 교육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는 많으며, 이것은 머튼(R.merton)이 사회제도의 적응에 관련된 의도되지 않았던 결과를 '잠재적 기능'이라고 부른 것에 기인한다.(2) 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에서는 계획한 바 없으나 학교의 물리적 조건 ?제도 및 행정조직, 사회적?심리적 상황을 통하여 학생들이 은연중에 가지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3) 김종서는 '교육과정이라는 용어는 종래는 주로 교과서에 의도한 바와 관련된 경험과 교과에서 의도하지 않은 바와 연관되지 않은 경험을 구별할 필요가 생겼으며 전자를 표면적 교육과정, 후자를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3) 잠재적 교육과정의 장(場)김종서는 학교사태 전체를 일단 잠재적 교육과정의 장으로 보고 이를 물리적 조건, 제도 및 행정조직, 사회?심리적 상황으로 분류하였으나 이러한 분류는 어디까지나 개념상의 분류이며 실지로 잠재적 교육과정이 나타나는 장은 세 가지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물리적 조건학교의 규모, 교실의 공간, 책상과 의자의 치수, 기타 시설설비 등의 조건이 선 경험에 영향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제도 및 행정조직학년조직, 담임조직, 교내장학 등을 위한 여러 행정절차가 학생경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사회?심리적 상황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과정이나 결과)이 학생경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뜻한다.잠재적 교육과정의 원천인 목적성, 강요성, 군집성, 위계성이 잠재적으로 교육과정의 장에 작용할 때는 원천 자체가 통제의 기능을 지니게 된다. 예를 들면 사회적인 목적관보다 개인적인 목적관이 학부모나 교사에게 우세한 경우에는 개인적인 목적관이 사회심리적 상황에서의 상호작용을 통제한다고 보아야 한다. 강요성은 심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며, 군집성 때문에 나타나는 통제는 허다하고 위계성에 있어서의 권위는 통제의 용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적응은 아동의 학습기재이다. 적응의 학습기재는 인간교육의 긍정적 측면이나 부정적 측면에 모두 작용한다.3. 표면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토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표면적 교육과정은 일시적?단기적으로 배우는 데 반하여, 잠재적 교육과정은 장기적 ?반복적으로 배운다는 점이다.* 표면적 교육과정이 주로 바람직한 내용인 데 반하여, 잠재적 교육과정은 바람직한 것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표면적 교육과정은 학교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직되고 가르쳐지는 반면에, 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에 의하여 의도되지는 않았지만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 은연중에 배우게된다.* 표면적 교육과정은 주로 교사의 지적?기능적인 영향을 받으나, 잠재적 교육과정은 주로 교사의 인격적인 감화를 받는다.* 표면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이 서로 조화되고 상보적인 관계에 있을 때 학생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표면적 교육과정은 확실한 지식을 직접 전달할 수 있으며, 체계화되고 문서화된 형태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생활과 상관없는 지적 영역의 내용만을 다루어, 가식적이고 표면적인 지식만을 전달하게 되며, 학습내용이나 지식에만 치우치게 되면, 유아가 학습에 흥미를 잃어버리기 쉽다. 또한 유아들간의 개인차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같이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여 혼동이 올 수 있다.잠재적 교육과정의 경우는 학교교육의 역기능에 의해 나타났으며, 비교과적인 생활 속의 여러 가지의 내용을 폭넓게 다룸으로써, 학교, 가정, 사회 모든 곳이 학습의 장이 될 수 있으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러운 학습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잠재적 교육과정은 무의식적으로 학습되어지는 것으로서, 바람직한 내용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못한 교육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유아가 스스로 거르지 못하고 그대로 흡수하여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4. 영(null) 교육과정1) 영교육과정의 개념학교에는 두 가지 교육과정이 존재한다. 하나는 학교에서 공개적으로 그 의도성을 밝히는 표면적 교육과정이고 또 하나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존재하는 혹은 학교교육에서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는 사고의 빈곤, 즉 비판적 사고의 결여와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학생이 어떤 문제나 사태에 있어서 알지 못하거나 편견에 찬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학생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교육과정, 즉 프로그램에 있어 심각한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학교가 의도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적극적으로 무관심함’이란 곧 어떤 목적을 위한 의도적 배제라는 뜻으로 설명된다.학교에서는 가르치는 교과영역, 사고영역이 있는 반면에 의식적으로 혹은 관례적으로 가르쳐지지 않는 교과영역, 사교영역들도 많다. 에를 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性)이나 약물 중독, 우리와 다른 이념체계를 가진 이론이나 이념교육 등은 학교수업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학생들은 이러한 영역에 대해 중립적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어떤 현상을 볼 때 혹은 문제를 해결할 때 고려해 볼 수 있는 대안의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편협한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쉽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특정 교과내용이나 교과영역 그리고 사고영역들은 가능한 대안들에 대한 충분한 숙의를 통해서 선택된 최선의 것이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가르쳐 왔기 때문에 교육과정에 포함되는 수가 많다고 주장하였다.2) 잠재적 교육과정과 영 교육과정잠재적 교육과정이 단지 의도되지 않는 경험의 총체를 지칭하는 반면에 영교육과정은 교육과정이 반드시 명시화되고 표면화된 내용 외에도 은연중에 작용하여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갖는 교육과정이다. 잠재적 교육과정은 어떤 점에서 통제가 불가능하여 교육의 자연적 결과로써 존재하는데 비해 영 교육과정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나 교육과정 입안자들의 가치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외되는 교육과정으로서, 인위적인 성격을 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목과 그 내용의나 영 교육과정은 기능면에서는 분명히 근본적으로 잠재적 교육과정과 다른 개념이다. 우선 영 교육과정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문맹이 된다는 것, 즉 배울 기회의 박탈에 문제의 초점을 둔 대신, 잠재적 교육과정은 교육환경의 잠재적 ‘기능’에 초점을 둔다.3)영 교육과정의 의의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육과정을 영 교육과정이라고 한다면 교육과정분야에서 그것을 논의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아이즈너가 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학교에서의 과목의 선택, 시간의 배정문제가 피교육자의 능력과 자질을 결정하며 그들의 생의 방향을 이끌어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아이즈너는 학생들에게 주는 교육적 영향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학습할 기회’를 들면서 학교교육의 내용에서 ‘포함되는 것’과 ‘포함되지 않는 것’에 대한 심각성을 제기하였다. 학교에서 선택되어지는 과목을 통해서 학생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만으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 방향으로 훈련되도록 길들여지게 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학교교육과정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길러질 수 있는 중요한 지식과 능력들이 전혀 개발되지 못하고 그 결과 인류문화는 한 방향으로만 결정된다는 것이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학교에서 가르쳐지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제외’의 책임이 ‘포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영 교육과정에 대한 문제가 교육과정 분야에서 논의되어져야한다.잠재적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일선교사들은 교육과정의 잠재적 기능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얻게된다. 반면 영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는 과목선택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시킴으로써 교육과정 개발에서의 실질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교육과정 연구분야에서 두 개념은 각각 다른 시사점을 준다.표면적, 잠재적 교육과정과 함께 제3의 교육과정으로써 영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는 학교교육이 부주의로 인해 빠뜨린 영역이 없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학교교육의 내
행동주의- 행동주의의 배경행동주의 심리학은 20C 초에 성립되었으며 20C 중반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론적 난점 때문에 오늘날에는 심신문제에 관한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난 상태이다.1. 물리학의 성공행동주의 심리학이 대두된 배경에는 19C 말과 20C 초의 천재들에 의해 이루어진 물리학의 성공이 자리잡고 있다. 19C 초까지만 해도 물리학이라는 용어는 자연세계에 대한 탐구 일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물리학과는 달랐다. 당시에는 정역학, 동역학, 천체역학, 열역학, 광학, 전기학, 자기학 등이 별개의 학문분과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이들 분야들과 함께 화학과 생물학이 모두 자연에 대한 탐구분야로서 물리학이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즉 당시의 물리학은 오늘날의 자연과학에 해당한다. 나뉘어져 있던 분과학문들이 물리학으로의 통합은 역학 분야에서 먼저 이루어진다. 이 분야들(정역학, 동역학, 천체역학, 열역학)은 모두 힘 또는 에너지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고, 각 분야들의 법칙들이 다른 역학 분야의 법칙들을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역학이라는 명칭으로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서로 별개의 현상으로 간주되던 전기와 자기가 실제로는 하나의 현상임이 밝혀짐으로써 전자기학이 성립했고, 빛이 일종의 전자기 현상임이 밝혀짐으로써 광학이 전자기학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코펜하겐 학파의 양자역학에 의해 전자기 현상에 대한 역학적 설명이 가능해 짐으로써 이 모든 분야들이 물리학이라는 단일 분야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화학적 변화가 미시적인 수준에서는 물리학의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생물에 대한 탐구에서도 화학과 물리학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물리학은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으며, 많은 학문분야들이 물리학의 방법론을 모범으로 삼기 시작했다.2. 논리실증주의: 검증원리물리학자인 M. 슐릭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엔나 서클의 논리실증주의는 물리학을 학문의 모범으로 보고, 모든 학문을 물리학으로 통합하려는 통일과학운동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유의미한 명제)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들에 따르면 유의미한 명제는 논리적 명제와 경험적 명제 이외에는 없다. 논리적 명제는 논리학의 법칙에 따라 참과 거짓이 결정되는 필연적 명제로서 동어반복적이며 세계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명제이다. 반면에 경험적 명제는 우연적 명제로서 세계에 대해 알려주는 명제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논리적 명제와 경험적 명제 이외의 모든 명제는 형이상학적 명제로서 세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경험적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방법으로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의 검증방법이다”라는 의미의 검증원리를 내세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어떤 명제는 그 명제를 검증할 수 있는 경험적 방법이 최소한 원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다.)- 행동주의의 종류행동주의는 1920년대에 왓슨과 스키너에 의해 이론의 형태를 갖추었고, 1960년대까지 인간의 마음에 대한 대표적이고 지배적인 이론이었다.1. 방법론적 행동주의인간의 마음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자료는 입력으로서의 자극과 출력으로서의 반응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관찰 가능한 반응은 신체적 행동과 언어적 행동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과학적 심리학이 다루어야 할 것은 인간의 신체적 행동과 언어적 행동이다.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심리학의 연구 방법론으로서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다. 행동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할 때,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포함되지 않는다. 방법론적 행동주의의 연구 성과가 실제로 적용되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2. 논리적 행동주의헴펠에 의해 주장된 이론으로 모든 심적 술어는 행동적 술어로 번역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한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사랑한다”는 심적 술어이다. 헴펠은 심적 술어가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술어가 아니기 때문에 심적 술어를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적 술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만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한다”라는 명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헴펠에 따르면, 이러한 번역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어,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한다”라는 심적 술어 “사랑한다”를 포함하는 명제는 “로미오는 줄리엣을 봤을 때,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선물을 주고, 기타 등등의 행위를 한다”라는 행동적 술어만이 포함된 명제로 바꾸어 쓸 수 있다.3. 형이상학적 행동주의방법론적 행동주의와 논리적 행동주의와 달리, 형이상학적 행동주의는 마음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마음이라는 내적 상태가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마음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행동이라고만 주장한다. 그리고 논리적 행동주의 역시 내적 상태로서의 마음이 존재하는지 여부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즉 방법론적 행동주의와 논리적 행동주의는 심신이원론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행동주의는 마음이라고 불리는 내적 실체나 상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심신이원론으로부터의 완전한 탈피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관련하여, 언어적 행동과 신체적 행동은 공적으로 알려질 수 있고, 내적 상태는 공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언어적 행동과 신체적 행동에 대해서는 공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내적 상태로서의 마음은 공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한다.- 행동과 행동성향행동주의가 초기에 직면했던 문제는 은폐된 행동의 문제였다. 즉, 사람들은 특정한 심적 상태와 연관된 행동을 언제나 실제로 행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울 때 몸을 움츠리면서 신음소리를 낸다. 그러나 고통을 매우 잘 견디거나 고통을 감추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츠리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몸을 움츠리고 신음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반론에 직면하여 행동주의자들은 행동이 아닌 “행동하려는 성향”을 문제삼는다. 유리는 깨어진다. 그러나 유리가 언제나 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리는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경우에만 깨어진다. 그러나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유리가 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유리는 언제나 “깨어질 수 있음”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란 특정한 경우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성향”이다. 비록 고통을 참고 있을지라도 그 고통을 참으려 하지 않거나 참을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고통과 관련된 특정한 행동을 할 것이다. 그리고 연기자도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면 고통스럽지 않은 경우에 고통과 관련된 행위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연기자도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고통과 관련된 행동을 할 것이다.
윤리학제 5 장 윤리적 형식주의20210463 철학과 박찬영제 1 절 목적론적 윤리학과 의무론적 윤리학목적론자들의 관심은 행동의 결과에 있다. 이들에게 도덕규칙은 ‘어떤 것을 해야 결과를 좋게 만드는가?’에 대한 기준으로 일종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의무론자들의 관심은 행동의 유형에 있다. 도덕규칙은 행동 유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의무론적 윤리체계의 관점에서는 일단 여러 행동유형에 어떠한 도덕규칙을 적용할 것인가를 알고 또 한 개별적 행위가 어떤 규칙에 해당되는 행동유형을 예시하는가를 알면, 우리는 그 개별적 행위의 결과의 좋고 나쁨을 아는 것과 관계없이 또는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해 어떤 것을 아 는 것과 관계없이 문제의 행위가 옳은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의무론적 윤리체계의 근본 규범은 도덕법칙이다. 바로 이러한 궁극적 원리가 어떤 구체적인 행위의 규칙이 모든 사람 에게 그것을 따르도록 하는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제 2 절 임마누엘 칸트의 윤리학*선의지선의지란 양심과 같은 것으로 선하려는 의지, 오직 옳다는 이유만으로 행하려는 의지를 말 하며 칸트의 윤리학에서 핵심개념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구 체적인 행위가 옳은지 도덕적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옳은 행위”와 “도덕적 의무”라는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선의지를 갖는 것은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선 의지의 인간은 의무에 맞게 행위 할 뿐 아니라 의무 자체를 위해 행위한다. 이것은 그가 옳은 행위를 하는 유일한 동기는 그 행위가 옳은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임을 의미한 다.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 는 좋은 의도를 가져야 될 뿐만 아니라 의지력과 결단을 모두 기울여 우리의 의무인 바의 행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의지는 무조건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 문에재한다고 할 수 있다.*정언명령정언명령이란 무조건적 명령으로 한 사람이 어떤 행위를 자신의 도덕적 의무로 받아들일 때 그가 의식적으로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이 원리이다. 도덕법칙은 보 편적, 필연성을 가진 것, 즉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의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려면 반드시 정언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며 가언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규칙은 어떠한 목적이나 결과를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규정한다. 그런데 가언적 규정은 만약 우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할 뿐 이다.*정언명령의 세가지 형식첫째 형식-어떤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려면 그것은 일관성 있게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의 근거는 결코 경험적인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의존한다면 그 것은 선한 인간이 존경하는 대상이 될 수 없고 또한 그의 모든 성향 및 목적과 관계없이 그를 동기유발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둘째 형식-어떤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기 위해서는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따른다면 그들은 서로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 자체로서 대하게 될 규칙이어야 한다. 도덕규칙 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구속력을 갖는다. 이성적 존재는 그가 자신을 대하는 것과 똑 같이 항상 다른 이성적 존재를 대할 것이다. 모든 이성적 존재는 자신이 목적으로서 절대 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규정 된 어떠한 행위규칙도 타인을 단지 수단으로서 대하는 행동을 규정할 수 없다.셋째 형식-어떤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려면 각자가 그 규칙을 보편적으로 입법화할 때 각 자의 의지에 의해 자신에게 부과될 수 있는 규칙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인정해야만 도덕규칙인 것이다. 만약 어떤 행위의 규칙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 한 사람에게 부과된다면, 그 규칙은 그 사람 자신에 의해서 정당하게 부과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도덕규칙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인정이 없다는 것은 그 규칙을 따르도 채 방치하는 것은 욕망에 따라가는 것이므로 자유가 아니고, 도덕적 선택일 때 그 선택의 영역 안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칸트는 항상 “실천적인 관점에서”라는 제한적 구절을 함께 사용하여 인간은 자유롭다는 주장을 한다는 점이다. 비록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자신들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줄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는 자유를 부정할 어떠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칸트를 형식주의라 부르는 세가지 이유칸트를 형식주의라고 부르는 데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보편화 가능성의 개념 이 도덕적 의무의 충분조건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칸트는 이것을 순전히 형식적인 척도 나 기준으로 생각했는데 그 까닭은 보편화 가능성의 개념을 진술하는 것은 실제 세계에서 의 행동이나 그 결과를 경험적으로 기술한 것에서 추상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 덕법칙의 형식과는 달리 도덕법칙의 선천적인 기초나 그 기원과 관계된다. 칸트는 도덕법 칙을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내용이나 주제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선천적 보편성과 필연성에 관한 고찰을 통해 이끌어낸다.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법칙은 모든 도덕행위자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며 또한 그들의 본성이나 환경상의 우연적인 사실과는 독립적으로 적용된다. 세 번 째 이유는 칸트의 이론에 의하면 도덕은 근본적으로 실천이성을 가진 존재자들 사이에 성 립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실천이성을 가진 모든 존재는 목적의 왕국에서 입법자와 신민 의 이중역할을 함에 있어서 똑같은 의무와 똑같은 권리를 가지기 때문에 평등하다. 도덕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형식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 개념이 도덕공동체의 구성원들 이 갖는 개인적 특성이나 그들이 인생에 있어서 갖는 다양한 관심이나 목표를 전혀 언급하 자기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갖고 또 거기에 따라 행위 할 때 의도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둘째, 존재가 수행하는 행위들은 행위의 도덕규칙의 기반위에서 적절하게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칸트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그 존재가 실천이성 또는 이성적 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도덕적 근거 위에서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또는 수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형식주의 윤리체계는 도덕행위자의 본성에 관해 네 번째 규약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원리 위에서 행위 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의 성향, 욕구 또는 이익과 무관하게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칸트는 이러한 능력을 선의지를 가진 사람이 의무로부터 또는 의무 자체를 위해 행위하는 능력이라고 표현하였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행위자는 항상 도덕적 행위를 하는 존재(즉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항상 옳은 행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도덕행위자는 그렇게 행위하고 또 그러한 이유 때문에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따라서 어떤 도덕규칙을 어김으로써 비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그 도덕규칙의 제한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 규칙을 위반할 때 자신의 의무를 어겼다고 생각하는 한 여전히 도덕행위자인 것이다. 비록 그 규칙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도 그는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그 규칙에 의해 구속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도덕행위자는 양심 즉 의무감을 가진 존재이며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를 가지고 있다.제 4 절 보편화 가능성(1)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은 주어진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는 도덕적 추론의 기초로 사용될 수 있다.예를 들어 사람 A가 사람 B에 일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행동을 보면, A가 B에게 X하는 것은 옳다. A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B에 입장에 있는 누구에게나 행동 X를 하는 것이 옳다.만약 A와 B의 입장이 서로 바뀌면, B가 A에게 행동 X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은 에 의해서를 하는 것은 옳으나 B가 자기에게 X를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논의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먼저 A는 자신과 B사이에 적합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이 역시 보편화 가능해야만 한다.논리적 보편가능성에 근거한 A와 B의 논의의 한계점을 언급하면, 우리 모두는 행동에 관한 가치판단을 할 때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함의하는 모든 명제나 판단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한 그의 추론에 있어서 어떠한 결함도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만으로는 밝혀질 수 없다. 그리고 행동에 관한 모든 가치판단은 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하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판단 인지 아닌지 구분하기는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으로 찾아내긴 힘들다. 또한 그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 판단함에 있어 어떠한 한계도 두지 않는다. 즉 이것은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 그 자체만으로서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 규칙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보편화가능성의 두 번째 의미는 행위의 규칙의 범위와 관계된다. 규칙의 범위란 그 규칙에 의해 제한받는 사람들의 부류와 그 규칙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허용하고, 또는 금하는 행동의 유형에 의해 한정되는 그 적용범위이다.그 적용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다른 두 가지 형태의 행위규칙으로는 첫째, 어떤 게임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게임의 규칙과 둘째,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운용’의 규칙이 있다.적용 범위에 있어서 무제한적이거나 보편적인 행위규칙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러한 규칙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특정조직에서의 역할, 일정한 국가의 국민자격, 게임과 같은 규칙에 의해 좌우되는 일에 참여하려고 선택하는 것 그리고 추구하는 목적에 관계없이 그에게 적용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실제로 그러한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행위규칙이 있다고 하는 주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