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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소설 [프랑켄슈타인] 감상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소통얼마 전까지도 내 머릿속의 프랑켄슈타인은 조각조각 짜깁기한 녹색 피부에 나사를 목 양쪽에 박은 덩치 큰 괴물. 그 이상은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다. 평소 공상과학 종류는 좋아하지 않던 터라 프랑켄슈타인을 다룬 숱한 영화들 중 내가 본 것은 단 한편도 없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처음으로 펼쳐들었을 때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이 아닌 그 창조주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에게 낯설었던 「프랑켄슈타인」. 그러나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도록 한 존재가 되었다.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내 미간을 찌푸리게 한 것은 괴물의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의 이기심이었다. 생명의 원인을 발견하고, 새로운 종(種)을 창조해낸 위대한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프랑켄슈타인. 그러나 그는 단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의 외모가 볼 수 없이 흉측함에 공포와 역겨움을 느끼고 외면해버렸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인간의 한 단면인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파괴되어버린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갔다. 잘못은 전적으로 프랑켄슈타인에게 있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은 자신의 잘못은 회피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대한 증오만을 표출하고 있어 더욱 화가 났다.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았어야 하나 인간의 이기심으로 탄생된 생명체. 그는 소설의 곳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고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타인과 분리된 채 홀로 삶을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고독과 멀어지기 위해 쉴 새 없이 타인과 소통하기를 원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러므로 원하지 않는 고독에서 애초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생명체가 느끼게 될 고통이 얼마나 극심할지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낯선 생명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과 소통할 대상을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소통’이라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내가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 누군가를 알고, 그 누군가도 나를 알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한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고, 그 가치를 인정해 줄 때에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생명체는 인간처럼 느끼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인데도 소통할 상대를 단 한 명도 가지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은 외모 때문에 그를 괴물로 칭했지만,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영원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진짜 ‘괴물’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내동댕이쳐졌다고 할 수 있다.우리는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생명체와 같이 쳐다만 보아도 오싹함이나 역겨움을 느낄 정도의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타인과 접촉할 수 있고, 또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종종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느끼곤 한다. 나는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을 만큼 활발한 성격이다. 이런 내가 타인을 대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하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늘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일을 종종 경험하며, 그때마다 난감함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잔뜩 움츠러들고 만다. 이러한 경험이 비단 나뿐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감정이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변화하는 감정을 가진 수많은 인간들이 부딪치다보면 언제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타인과의 소통이란 쉬운 것 같다가도 한없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이렇게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우리는 가끔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을 의도적으로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 사람과 소통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내 주변에서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왕따’라는 것은 그 극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 사람을 둘러싼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와의 소통을 한꺼번에 끊어버리는 ‘왕따’는 그 네트워크 안에서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아예 무시해 버림으로써 그 사람이 그 안에 존재해야 할 이유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다.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소통을 끊어버림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된다.「프랑켄슈타인」 속의 생명체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능력,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난 신체적 능력과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으로도 볼 수 있는 그 존재가 흉측한 외모 때문에 인간들과 섞일 수 없게 되면서 진짜 ‘괴물’이 되고 만다. 만약 소설 속에 그 생명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따스한 마음으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는 더 이상 괴물로 남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 생명체의 요구대로 자신과 똑같은 또 다른 생명체일 필요는 없다. 프랑켄슈타인만이라도 그의 이야기에 따스하게 반응해 주었더라면 그는 결코 클레르발과 엘리자베스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소통의 통로를 찾지 못하고 괴물이 되어버린 생명체는 자신의 창조주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에게 그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존재 자체에 극심한 위협을 받고 있으니 그는 자신을 존재하게 한 창조주를 원망하고, 심지어 살인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7.06.08| 2페이지| 1,000원| 조회(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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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연극 [산소] 감상문
    연극 『산소』를 보고- 쉘레의 편지, 그 행방은?산소, 그 중요성이야 어린 아이들이라도 모두 알고 있을 만큼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산소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라고 확실히 말 할 수 없으며, 게다가 산소를 발견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세 명이나 된다니 의외였다. 그러한 과학적 사건을 연극의 소재로 다루어 극적인 재미까지 곁들인 연극 ‘산소’는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매우 흥미로운 연극이었다.연극 ‘산소’에 나오는 세 명의 과학자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은 라부아지에 한 명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연극을 보는 내내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발명한 사람으로 결론 내려지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먼저 실험을 해서 얻어냈다 하더라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발견자가 될 수 있겠어-’ 연극 속 라부아지에의 주장을 떠올리며 그가 산소의 발견자로 판명될 수 있을 근거를 찾기 위해 골몰해 있었다.그런데 연극을 보다보니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하였다. 쉘레가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물질에 대해 라부아지에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라부아지에의 부인이 그 편지를 ‘사랑 때문에’ 남편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장면이었다. 사랑,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흔히 가장 흔히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사랑이다. 이 연극의 주제가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부인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높은 비중을 가지고 등장한다. 아마도 소재가 일반인들이 어렵게 느낄 수 있는 과학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관객들이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도록 연출자가 손을 쓴 부분 같다.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과학적 발견 혹은 발명에서 부각되는 것은 과학자 한 사람 뿐이다. 그 빛에 가려져 그림자로 남게 되는 것은 그를 위해 내조를 잘 한 부인들뿐만이 아니다. 위대한 과학적 발견, 발명을 위해 과학자와 함께 노력한 사람들 모두가 과학자의 큰 이름 앞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다. 쉬운 예로 얼마 전 국제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던 ‘황우석 사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우리 사회 전체의 신드롬으로까지 얘기되었던 황우석. 그런 그의 연구가 성공적인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우리는 줄기세포 연구라고 하면 무조건 황우석을 떠올리며 그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길이길이 예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우석 신드롬’은 ‘황우석 사태’로 변해버렸다. 그와 함께 연구했던 김선종 연구원이나 미즈메디 등이 갑작스레 등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민적 영웅으로까지 추대되었던 황우석이 모두를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했었다. 허나 나는 여기서 조금 다른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줄기세포 연구에는 황우석 한 사람만이 아닌 아주 많은 연구원들과 아주 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혀있다는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더라면 우리는 황우석 한 사람만을 기억하게 되었겠지만 그 안으로 파고들수록 그 연구와 관련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줄기세포 연구는 결코 황우석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과학적 발견, 발명의 뒤편에는 위대한 과학자의 이름 아래에 우리가 주목하지는 못하였으나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연극 ‘산소’에 과학자가 아닌 과학자의 부인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관객들에게 위대한 과학적 업적 뒤편에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도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그나저나 그 이유가 사랑이었든 다른 무엇이었든 간에 쉘레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증거로 남아 있는가? 극적인 흥미를 돋우기 위해 설정된 장면인지 아니면 그것이 사실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산소의 최초 발견자에 대한 논의는 그 편지의 존재 여부가 결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데 말이다. 나는 라부아지에가 최초 산소 발견자로 판명되기를 바랐으나 그 편지가 증명될 수 있다면 산소 최초 발견자는 아마 쉘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쉘레는 라부아지에보다, 프리스틀리보다도 훨씬 먼저인 1771년에 실험을 통해 새로운 기체의 존재에 관해 알아내었다. 이 논의가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 공기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1771년에 그 공기를 얻어냈다는 주장을 증명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는 그 편지가 사실이며, 그것은 라부아지에의 부인에 의해 감춰졌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편지는 라부아지에 부인의 서랍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그 편지를 증명할 수만 있다면 쉘레가 최초의 산소 발견자로 지목되는 데에는 거의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연극 안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최초 발견자’이다. 라부아지에는 ‘최초로 산소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밝힌 것은 아니나 그 성질을 이해했다. 쉘레와 프리스틀리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최초로 산소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밝힌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최초 발견자라는 것은 그것의 성질과 특성을 알아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존재를 처음으로 만들어내고 처음으로 확인한 사람이 바로 최초 발견자인 것이다.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초 발견자 논의에서 약점이 될 수 없다. ‘최초’이기 때문에 그 성질까지 모두 파악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최초 발견자는 ‘발견’ 그 자체로 이미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산소의 최초 발견자 논의에서 라부아지에는 이미 탈락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쉘레와 프리스틀리는 그 기체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나 그것이 이전에 존재하는 기체들과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 않은가.
    독후감/창작| 2007.06.08| 2페이지| 1,000원| 조회(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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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굿바이, 레닌 평가A좋아요
    Good Bye, Lenin!영화 의 포스터는 전체적으로 붉고 무거운 분위기이다. 게다가 포스터의 맨 윗줄에는 ‘새빨간 거짓말의 사랑’이라는 문구가 새빨간 글씨로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어딘지 모르게 스릴러 영화를 연상시키는 시키는 효과를 의도한 것 같다. 물론 그 새빨간 색의 문구는 분명 영화의 내용과 어긋남이 없다. 은 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을 보여주며 그 거짓말이 조금도 현실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까맣게 속이려고 하였다는 점에서는 분명 ‘새빨간’이라는 수식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포스터에 나타난 무거운 분위기처럼 자칫하면 무거울 수 있는 이념의 문제에 대해 훨씬 가볍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포스터보다 영화를 먼저 보게 되었던 나는 포스터 속에서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주인공 알렉스를 보며 영화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알렉스와 그의 가족은 통일 이전의 동독에서 살아오다가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겪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알렉스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혼수상태가 되어 8개월간 깨어나지 못하는데 그 동안 독일은 통일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깨어나게 되었으나 알렉스가 의사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어머니가 또다시 충격을 받으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통일 이전 사회주의의 서독에서 당의 열성적인 일꾼이었던 어머니에게는 통일이, 그것도 서독의 자본주의에 의한 통일이 되었다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알렉스는 어머니를 위해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를 조금씩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알렉스가 만든 세상에서는 파란 스카프를 맨 어린 소년들이 옛 동독의 노래를 부르고,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피클 병은 훌륭한 동독 산 피클로서의 역할을 해내게 되며, 어머니가 보는 TV는 서독은 동독에게 흡수되고, 동독 최초 우주비행사인 지그문트 얀은 당수가 되었음을 알린다. 알렉스의 여자친구인 라라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만두라고 하지만 어머니를 위하는 그의 순수한 마음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어머니가 꿈꾸는 사회에서 마음 편히 살게 해드리고자 하는 것이었다.이쯤 하면 알렉스는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보자면 효자(孝子)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효자. 어머니를 위해 통일 후 그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서독식으로 바뀌었던 집안을 어머니가 들어서자마자 ‘변한 게 없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8개월 전과 똑같이 만들어 놓던 모습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동독 때의 피클 병과 커피를 찾아내고는 너무나 기뻐하고, 영화감독이 꿈인 친구와 함께 터무니없는 뉴스를 만들어내지만 어머니가 의심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알렉스는 오직 어머니에게 만들어 보여드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생각만 하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이므로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알렉스의 사랑을 보고 나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스의 누나는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살게 되면서 어머니에 대한 거짓말이 한없이 커져만 가는 것을 보고 결국 포기하게 된다. 그의 누나는 어쩌면 나와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습일 것이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보다 현실에서의 어려움을 더욱 많이 고려하게 되는,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모습. 이런 기회가 주어져 부모님에 대해 생각을 할 때마다 그 미안함과 고마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이것을 적극적인 실천으로 옮긴 알렉스의 모습은 그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아야 할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생각된다.알렉스는 영화의 안에서 진실이란 모호한 것이다 보니 어머니에게 맞게 각색하기도 쉽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알렉스가 말한 진실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에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또는 사회적인 현실을 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와 그의 가족은 사회주의가 진실이 되던 세상에서 살다가 개인이 원했건 원하지 않건 자본주의가 진실이 되는 세상으로 내몰려진다. 단순히 동독 산 피클의 자리를 네덜란드 산 피클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는 대체의 의미로서는 충족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8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에 겪게 된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겠는가.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제껏 자신이 믿어왔던 진실이 순식간에 거짓으로 뒤바뀌어 버린 현실에 대한 충격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름대로 적응을 하며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 충격에 대한 보상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 때의 진실은 개인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많이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접촉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제한할 수 있는 알렉스는 어머니에게 ‘만들어진 진실’을 보여주어 그것을 믿고 따르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알렉스가 ‘만들어낸’ 진실은 어머니를 위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보면 알렉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겉으로 표현해 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코카콜라 광고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 그 안에서는 본질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 시장에서의 교환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은 본질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가치전도가 일어나게 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알렉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훨씬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이상적인 세계는 서독을 흡수 통일하는 가상의 동독이며, 그 안에서는 서독의 난민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주고, 사회주의로 우주를 개척하겠다는 어린시절 알렉스의 영웅인 지그문트 얀이 그 열정을 가지고 당수가 되는 세계이다. 현실은 서독과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지 못해 상대적으로 동독의 국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것을 자각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알렉스의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이는 서독과 동독이 하나의 독일로 통일을 이루어낸 후,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더욱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영화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작은 반전으로 아버지가 등장하게 된다. 알렉스와 그의 누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알렉스 오누이를 버려두고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서독으로 떠났다고 알고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통일 후 학교를 그만둔 알렉스의 누나는 버거킹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고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할 수 없이 사무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수도, 자신을 알아봐달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던 영화는 그 장면에서 만큼은 매우 슬픈 분위기를 자아낸다. 분단의 아픔을 겪은 나라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우리의 분단 현실과 떼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런 ‘같은 아픔’을 겪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던 그 때에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자식들에게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서독의 새로운 여자 때문이 아닌 당원이 아니기 때문에 당하는 차별 때문에 망명을 하였으며 어머니 또한 함께 망명할 예정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아이들과 함께 망명 하는 것은 불가능 했기에 어머니는 망명대신 동독 내에서 당에 자신의 온갖 열정을 다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꾸준히 보내온 편지들은 부엌의 찬장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까지 덧붙여졌다. 그것이 비록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어머니로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거짓말이었긴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만으로 살아왔던 자식들에게는 어머니의 그 거짓말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버거킹 앞에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보내야만 했던 딸은 울면서 찬장을 뜯어내 그리운 아버지의 편지를 찾아내고, 어머니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던 아들은 편지의 주소를 보고 아버지를 찾아가게 된다. 어머니의 그 같은 거짓말은 알렉스가 어머니에게 했던 거짓말과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알렉스가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드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면, 어머니는 앞으로 아버지가 없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어린 자식들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좀 더 강인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그런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했던 것이지 아버지를 미워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자식들은 서로를 원망할 수 없다. 자식은 자신이 어머니에게 한 거짓말을 통해, 어머니는 자신이 자식들에게 한 거짓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렉스의 누나가 알렉스에게 아버지의 주소를 알려주며 가보라고 한 것과 알렉스가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를 모시러 간 것은 자식들이 어머니에 대해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어머니가 알렉스의 여자친구를 통해 그 간의 사실에 대해, 그리고 진짜 현실로서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만들어온 녹화 테이프를 보면서 TV가 아닌 아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장면은 어머니가 자식들을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독후감/창작| 2007.06.08| 4페이지| 1,000원| 조회(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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