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주의구성주의 (Constructivism)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난 전위적인 추상미술운동. 그 이름이 나타내고 있듯이, 외계의 대상에 대한 재현을 일체 거부 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환원된 조형 요소의 조합으로써 작품을 구성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이 기하형태를 주된 표현양식으로 삼은 이유는 첫째, 기하추상이 합리적 질서의 표상이자 이상적 사회를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과학과 인민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이념이 상충될 수 있는 세계, 즉 이상세계인 유토피아를 나타내는 방법은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성이나 대상모방성을 배제한 단순하고도 실용적인 외형을 갖춘 것이어야 했다. 또한 기하추상 형태가 보편적 통용성과 간결한 내용으로 효과적인 이념전달의 기능을 수행 할 수 있으며, 대량 생산체재에 기능적으로 적용하기에 모양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유럽에 기하추상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본질적인 조형 요소를 중요시하여 쓸데없는 장식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즉 그것은 건축에 있어서는 기능주의로, 조각 회화에 있어서는 기하학적 추상주의로 이어진다. 특히 건축조각에 있어서는 금속, 우리, 그 밖의 근대 공업이 나은 새로운 소재를 구사하여, 참신한 공간 표현을 하였다. 특히 이 운동은 조형 활동에 의한 사회 건설의 참여를 주장하며, 정치성과도 적극적인 결합을 보인다. 1919년에 타틀린이 설계한 < 제 3인터내셔널 기념탑>계획안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체제가 경제적 위기를 타파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일에만 집중하게 되고, 레닌 당국이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일일이 간섭, 제작품의 성격까지 제약하는 등, 일종의 미술규격화를 시도하면서 추상미술과 같은 실험적인 것에는 등한시하게 됨에 따라 구성주의 작가들은 그 자유로운 예술활동에 한계를 느낀다. 결국, 이들은 서구 유럽으로 하나 둘씩 망명하기에 이른다.그밖에 절대주의의 화가 말레비치나 리시츠키, 조각가인 나움 가보와 페브스너 형제, 로드첸코 등이 그 대표적 작가이다. 이 구성주의 운동은, 1920년에 서유럽에 퍼졌고, 건축, 조각, 회화 뿐만 아니라 무대 예술, 상업디 자인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우하우스 운동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전해졌다.▶ 블라디미르 타틀린(1895-1956)러시아 구성주의가 탄생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작가이다. 1913년에 그는 베를린과 파리를 여행하게 되는데, 파리에서 피카소 화실을 찾게 된 그는 입체주의 작품들을 보고 새로운 조형예술에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피카소가 조각에서의 콜라주가 지니는 의미를 연구하고 있었던 구조물들을 본 타틀린은 자신의 이후의 작품들을 구성하는 데 피카소의 실험작품들을 참고하게 된다.러시아로 돌아 온 그가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1914-1917년경 작품인[부조]에서 볼 있는 석고, 판유리, 유리 조각으로 화면을 덮고 나무, 금속, 판자로 구성한 부조 시리즈였다. 구조물이든 주조물이든 간에 조각사상 첫 번째의 완전한 추상물로서 일컬어지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충실한 추종자였던 타틀린은 러시아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기계와 건축에 대한 본래의 관심을 당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구축물로서 제작해 내고자 하였다.이러한 그의 야심은 1920년경에 완성한 [제 3 인터내셔널 기념탑]의 모형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축소모형으로서, 이 작품이 애초에 의도한 대로 지어졌다면 높이 396m에 이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놓은 조각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 건축물은 원통과 입방체, 원추형 유리로 감싸 인 일정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 나선형 금속 구조물로 설계되었다. 수많은 유리로 겉면이 둘러싸인 부분들은 회합을 위한 장소를 제공함으로서, 일년에 한번, 한 달에 한번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완전한 변화를 보이면서 회전하도록 구상되었다.그는 이후 사회주의 정부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공리주의적 예술을 실현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많은 작품을 시도했지만 구상주의의 높은 이상과 그 상징이 되는 기하학은 러시아의 과학기술을 반영하지 못하였고 안탁까운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진술로서 그저 새로운 세계에 대한영감에 찬 찬미밖엔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도면상에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알렉산더 로드첸코(1891-1956)1916년에 타틀린과 같이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공리주의적 구성주의에 충실한 태도를 보인 미술가이다.1920년경 타틀린처럼 미술가가 공학이나, 건축, 선업 디자인에 예술을 실용적으로 적용하여 혁명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공리주의 사상에 접근하게 된다. 공리주의적 구성주의는 예술과 과학, 그리고 실제 생활이 서로 결합되어 예술과 과학이 실용적인 생활의 한 도구로 이용되기를 원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대 사회이념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구체적 모형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새로운 구성주의를 실제 건축술에 도입해서 이상세계의 현실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는 예술이 실용성 있는 대중 의 미술로서 역할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류보프 포포바(1889-1921)러시아 아방가르드 기수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그녀는 구성주의의 여성작가 중 예술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였다. 부유한 부르조아 집안의 딸로 태어난 포포바는 어릴 적 유럽 여러 곳을 여행 다니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키울 수가 있었다.1912년 파리를 방문하여 큐비즘 화가였던 르 포코니에와 메칭거에게 입체파를 전수 받았다. 1914년에 그린[이탈리아정물]과 1915년경에 그린 [앉아 있는 인물]는 이러한 그녀의 화업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들 작품은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가 성숙한 큐비즘적 미래주의 양식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하는 시기의 작업들이다. 러시아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작법을 발전시켰는데, 1914년 작인 [이른 아침]과 같은 작품에서 보듯이 서구의 회화 기법과 그녀자신의 개성적 어법이었던 동양적 색채, 러시아 문체와 같은 러시아 고유의 형태들을 혼합하여 원색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 구성주의적 강령이 확인되는 작업들도 한다. 1923년에 제작한 ['젬리아 디봄'의 무대 세트를 위한 디자인의 일부분]이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대 예술에 기하학적 추상을 접목시키는 실험을 통해 2차원 평면 미술이 3차원의 공간미술에 적용되는 예를 보여 주었다.▶ 엘 리시츠키(1890-1956)독일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러시아로 돌아와 로드첸코의 비대상주의와 타틀린의 구성주의와 관련을 맺으며 활동한다. 러시아 절대주의, 비대상주의, 구성주의를 함께 모아 결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네덜란드의 데 스틸, 독일의 바우하우스의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1923년의 [프룬 12E]를 비롯한 프룬 시리즈는 종합적 큐비즘 시기의 피카소와 후안 그리, 그리고 다른 입체파 화가들과 연결되는 기하형태의 추상적 요소를 다루고 있다.▶ 나움 가보(1890-1977)와 안톤 페브너스(1886-1962)형제
어렸을 때 자주 보았던 TV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 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풍경화를 그렸었는데, 어린 나는 항상 그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꼭 저렇게 그려야지.’란 맘을 품고 있었다. 몇 년이란 시간이 지나 다시 꿈을 그리게 한 사람은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다. 그의 작품은 정말 나에게 신선한 충격과도 같았다. 풍경화의 대가. 그의 그림은 하나의 흔들림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 사람을 알게 된 후 그의 스승인 루벤스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한 일부를 채웠던 루벤스. 나는 몇 년이나 미술을 하면서 그의 이름은 단지 미술재료의 한 상표였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한다.그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도였지만, 고향인 네덜란드는 카톨릭을 숭상했다. 그래서 종교적 박해와 정치적 혼란을 피해 그의 가족은 독일 북부로 왔고, 1577년 루벤스가 태어났다. 10년 정도 독일에서 자랐으나,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루벤스의 가족은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카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돌보기 위해 루벤스는 귀족의 시동이 되기도 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기에 곧 화가지망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3살의 나이에 루벤스는 이탈리아의 만토바 대공이라는 귀족의 도움으로 궁정화가가 되었고, 궁 안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최고의 예술과 문화를 접하게 되어 다른 화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특히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연구하면서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로 고대 미술 작품을 부활시켰고, 그가 그린 그림 속 인물들의 포즈는 대부분 고대 조각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루벤스는 화가로서의 명성만 쌓은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과 뛰어난 학식으로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25살 때에는 스페인의 왕에게 선물을 전달하기 위한 외교 사절로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그가 스페인으로 가는 도중 선물로 가지고 간 그림이 심하게 훼손되어 자신이 다시 그렸다가, 오히려 그 작품이 대공의 눈에 들게 된 일도 있었다. 그 대공은 루벤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여 스페인의 화가들에게도 루벤스 스타일의 영향이 시작되었다.8년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6개국어를 익히기도 했던 그는 외교관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었으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갔습니다. 그 뒤로 다시는 이탈리아에 가지 못하고, 네덜란드에서 지내게 되었다.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제자를 키우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루벤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원자를 되돌려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많은 도제를 거느리고 대형 아틀리에를 운영하였고, 그곳에서 루벤스는 구상만 하고, 대부분 조수들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린 후 그는 마무리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삼천 점이 넘는 루벤스의 작품들 중에서 몇 점까지가 그의 작품인지 논란이 되기까지 한다고 한다.루벤스는 평생 두 번 결혼을 했으며 아홉 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이었고, 친절한 아버지였다. 첫번째 아내를 흑사병으로 잃은 뒤, 루벤스는 외교관의 임무에 충실했다. 5년 뒤 그는 53살의 나이에 헬레너와 재혼을 하는 데요, 그녀는 첫번째 아내의 조카인 16살의 처녀였습니다. 하지만 루벤스는 젊은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고, 젊은 아내는 늙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되어주었습니다.1636년 루벤스와 젊은 아내는 시골의 조용한 저택에서 살면서 말년의 작품들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새로운 아름다운 부인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받아 신화적이고 육감적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노년의 눈으로 다채로운 풍경화를 그렸다. 루벤스는 자신의 미술을 판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널리 전파시켰으며 판화의 보급에 영향을 미치고 이루 로코코와 와토, 게인즈보로, 낭만주의 튤라크루이, 인상주의 쿠루아르까지 여러 작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63살의 생일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팔에 마비 증세를 가져온 통풍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결 성숙해진 예술가의 조용하고도 평안한 죽음이었습니다.루벤스-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 on the blessings of peace)내가 그의 작품 중에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은 란 제목의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갔던 것이라고 한다. 그 그림은 평화의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미네르바의 보호 아래 결실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평화와 기쁨이 내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작품 는 단순한 우의적인 의미의 것이라기보다 염원이 표현되어 담겨져 있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느 의미에서 기념적인 역사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평화에의 미련과 애착을 보이는 출전 용사가 가정, 풍요, 평화를 나타내는 정경에 눈길을 돌리면서 애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이 그림에서 보게 된다.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묘사와 생생한 대조들,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 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이러한 것은 루벤스. 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것이다.난 루벤스란 이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재밌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루벤스 - Bacchus그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진지하고, 진지하면서도 감동이 있다.특히 그의 그림 에서 그러했다. bacchus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신을 표현하려하면 이상적인 몸을 중심으로 신들의 특징을 그려내지만, 역시 루벤스는 실망 시키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정말 술의 신답게 풍만한 모습의 신과 그의 발밑으로 나무를 씹고 있는 사자, 소변을 보고 있는 아이, 술을 항아리 체 들고 먹는 사람의 모습이란 감히 상상 할 수 없는 신의 생활모습니다. 난 여기서 조금은 알 수 없었던 것은 왜 배경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처럼 좁은 길들이 놓여있느냐는 것이었다. 에선 그 길을 인간의 힘든 인생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그렇담 여기서 표현하고 싶었던 루벤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서 론르네상스 시대‘르네상스’ 란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 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재생’, ‘부활’, ‘부흥’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미를 좀 더 확장하여서, 당시대에 ‘르네상스’ 는 예술이나 학문의 전반적인 분야에 걸친 ‘재생’, ‘부활’, ‘부흥’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내면에는 고대에서 르네상스 사이의 긴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작용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한 뒷받침으로써,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 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설정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면서,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 라고 보았다. 그리고 문명의 재흥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 문학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16세기의 미술가 G. 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 (rinascita)’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여기에서 르네상스의 유래를 살펴볼 수 있다.사실 ‘르네상스’ 란 영어의 의미는 근래 학자들 사이에서 끝없는 논쟁의 한 주제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그것의 가치, 특징적 성격, 시간적 경계, 역사적 시대의 존재 자체 등을 토론해 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그 시대 혹은 그 전.후 시대의 특징이나 장점에 대한 어떤 선입견 없이, 대개 1300년부터 1600년에 이르는 서구 역사상의 시기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대단히 복잡하며 중세나 다른 시대와 동일하게 다수의 연대적, 지역적, 사회적 상이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데, 이에 대하여, 이탈리아와 북구간의 문화적 차이가 르네상스에 비해 중세 동안에는 현저하지 않았던 반면 15세기의 이탈리아는 저지대와 함께 이전에 누리지 못한 지적 중심으로 비잔틴 건통의 종교적 상징을 탈피하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관례이다.피렌체 회화는 격렬한 동세와 떨림이 강한 윤곽선을 유지하였으며 많은 작품이 고전 작품에의 제재를 따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15세기 말에 유행된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짐작할 수 있는 데, 그들은 고전 고대를 연구하면서 종교를 인간적인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그리스, 로마의 예술, 철학, 종교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을 꾀하였다. 이 변화를 일으킨 사람이 지오토로써, 그를 필두로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고전 세계의 재창조 작업이 일어났다.르네상스 회화의 특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투시도법에 의한 원근법의 성취이다. 이는 부르넬레스키에 의해 처음 알려졌는데, 이 기하학적인 원리는 마사치오의 작품에 의해 훌륭하게 회화에 구현된다. 15세기 초기임에도 마사치오는 이미 지배적인 국제 고딕양식의 유행을 물리치고 피렌체 화파 본래의 힘찬 조형성을 나타냄으로 르네상스의 회화는 막이 열렸다. 그는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3인의 혁신자로써, 건축에서는 부르넬레스키, 조각에서는 도나텔로, 회화에서는 마사치오를 말하는데, 가장 후배격인 마사치오는 나머지 두 선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 공기와 빛과 색채에 의한 엄격한 조형성을 바탕으로 주제의 본질을 추구한 1427년경의 카르미네 성당 브란카치 예배당의 ‘헌상의 동전’ 외에 5장면 정도의 벽화는 지오토의 조형적인 엄격성을 훌륭하게 재생 ·발전시킨 작품이며, 당대의 수준을 능가한 획기적인 양식이었다. ‘성모와 성요한이 있는 성삼위일체’ 는 지오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나텔로처럼 의복보다는 육체를 더 중시한 르네상스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르넬레스키의 고전적 건축과 과학적 원근법의 완벽한 응용이 잘 나타나 있다. 27세 요절하였으나, 15세기 회화 분야에 있어 경탄할 만한 작품을 남겼으며, 그가 피렌체 화파에 끼친 영향스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이루는 객관주의는 14세기에 태어난 세대의 미술가들에 의해 달성되었으나 완성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것을 지양하여 한층 더 높은 주관과 객관의 융합으로 형성된 전아한 고전적 예술로 향하는 길을 열게 된 시기를 전성기로 본다.이 시대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에 앞선 시대, 즉 14, 5세기 발견들의 꼬리를 물고 인간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사상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강대국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했으며, 이로 인한 식민지와 해상 무역을 위하여 힘의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잇따르게 되었다. 알프스 이북의 나라들에서 루터와 칼빈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이 나왔으며 대성당의 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던 교황의 힘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서 교황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좀더 시대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후에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는 계기는, 로마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15세기부터 무력해졌었던 로마교황의 지위를 다시 강화하게 된 교황청은 이 시대 예술의 최고 후원자가 되었고, 문화의 중심도 로마와 베네치아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앞서 말한대로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기에 해당된다.로마는 카톨릭의 중심이자, 고대 로마제국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고대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야심이 있는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 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 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 바티칸 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 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했다. 또한 궁안르게 된다.먼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물과 보는 이 사이엔 공기가 있으며, 자연의 관찰자 레오나르도는 이 공기의 존재를 우리에게 인식시켜주었다. 또한 인물의 행동과 표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고, 많은 드로잉을 보면 실제 인물의 행동을 관찰한 후 글로 써서 이론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탐구의 과정에 바탕이 되었다. 지적 호기심은 철저한 관찰과 과학적인 논리에 근거한 방법으로 발휘된다고 생각한 레오나르도는 공간에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기 위하여 미리 정확한 원근법의 스케치를 하고 이를 확대하여 패널에 옮긴 후 그 위에 비례에 맞게 인물을 배치하곤 했다.스푸마토 기법을 창안하였는데, 이것은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윤곽에 해당하는 부분을 미묘하게 문질러 맞은편으로 계속 이어지는 느낌을 주는 방법이다. 색채간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부드럽게 하여,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뒤섞여 들어가는 듯한 이 채색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상상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 이 기법을 그의 유명한 작품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대한 논의는 끊임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그림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놀라울 정도의 살아있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는다는 것이다. 피렌체의 한 부인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로는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을 이 작품을 유명하도록 만든 것이 스푸마토라는 채색법의 사용에 있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모나리자의 제작은 매우 오랜 시간을 공들여 극히 작은 점들을 통해 그리는 일종의 점묘법을, 완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반복적 덧칠과 겹칠을 통하여 그 입체감에 입체감을 더하였다고 말했다.스푸마토 기법 뿐만 아니라, 공기원근법 등을 창안하였으며, 평생 완성시킨 회화가 10점 내외로 독특한 회화적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또다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특징은 사물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은 음영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모습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겠다.1541년 만성절.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 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수십 년 째 완공이 지체되는 바람에 줄곧 여기서 의식을 치러왔으니 새삼스런 걸음은 아니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이윽고 창문을 가렸던 휘장을 걷어내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올려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후의 심판 날, 뭇 영혼들의 찬양과 울부짖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재림 예수가 하늘 복판에 앉았다.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성자와 성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퍼렇게 빛나는 하늘은 어떤 심판의 칼날보다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런데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이다!”그림 한 점을 두고 이단의 의혹을 천 가지 이상 꼽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를 달지 않은 것도 시빗거리였다. 예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첫 교황 베드로가 일군 천오백 년 역사의 카톨릭 교회가 그림 속 푸있었다.
헤드윅2006년 11월 26일공연일시: 2006년 10월 14일 ~ 2007년 1월 28일장소: 대학로 클럽SH배우: 헤드윅역 (조정석), 이츠학역 (안유진), Angry inch음악: Hedwig and the angry inch band제작감독: Malcolm Lim가장 최근 본 공연 11월 26일. 지난 사?비?타(사랑은 비를 타고) 공연을 보러가면서 지하철 안에 붙여있던 헤드윅 포스터를 보고 막연하게 ‘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공연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 이번 헤드윅 공연은 대학로 SH클럽에서 하는데 그곳은 주로 작은 콘서트나 클럽으로 운영되는 곳이었으나 이번엔 뮤지컬 장소로 지목되었다. 그 이유는 보면 알게된다. 헤드윅은 영화로도 나와 있는 작품인데 전에는 몰랐다. 이 공연을 보고 난 후부터 헤드윅에 대해 알게 된다.헤드윅을 알게된 이 날은 토미의 공연. 토미가 대형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때 헤드윅은 멀리서 토미의 공연대신 자신의 공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여러분이 좋아하건 말건 소개합니다~ 헤드윅~ ”헤드윅이 2층에서 내려온다. 화려한 그의 화장과 몸짓에 눈길이 간다. 큰 망토를 두르고 무대 위에서 한 바퀴 돌고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노래를 부른다. 'Tear me down' 이 노래에서 그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을 알수있다. 헤드윅은 동독에서 태어나 한셀이라는 이름을 갖은 소년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해 독일에는 베들린 장벽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그곳을 넘어 자유를 찾으려 한다. 한셀도 마찬가지 그는 어릴 때 듣던 미군 노래들과 미국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신에게 자유를 줄 것이라 확신한다. 26살. 자유를 찾아 가려 방법을 궁리하던 중 때마침 그에게 첫 번째 선택이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루터 장교를 만난 것. 그는 한셀에게 결혼하자 청한다. 미국시민권 신청서와 결혼반지와 그리고 가발을 주면서. 한셀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자기 사진을 때서 한셀의 사진을 붙이고 자기이름을 쓰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동독. 루터는 동독의 장교이고 결혼을 하려면 동독에서 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하기 위해선 신체검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 한셀은 머뭇거리나 엄마는 다 의사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말라한다.한셀은 장교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지만, 곧 장교는 그녀를 떠나고 만다. 그저 그도 미국으로 가기위한 방법으로 그녀를 이용한 것이다. 뮤지컬 중간이 “권력의 맛”이란 대사가 이 뜻이었나 보다."Angry inch" 란 노래는 그의 심정이 나타난 노래다. 자신의 신체적 결함. 그가 선택한 삶에 대한 분노. 이 노래를 한번 듣고도 귀에서 아직도 귀에 맴돈다.“나는 여자~이제 준비된 완벽한 여자~ 이제 돌아가요 모든 걸 다 잊고 ” 헤드윅이 잠깐 무대에서 사라진 사이 이츠학이 부르는 노래다. 사실 이 부분은 영화에도 나오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 뜻은 이츠학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인 듯하다. 극 중 이츠학은 헤드윅에게 무시당하는 남편이자 앵그리 인치 밴드의 백 보컬이다. 헤드윅을 만나기전엔 크로아티아의 드랙퀸이었으나 여장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헤드윅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온다. 이츠학도 헤드윅과 마찬가지도 희생양이란 느낌이 든다.기다리던 베들린 장벽이 무너지고, 엄마는 유고슬라비아로 떠났다고 한다. 연락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울고 싶지만 웃을 수밖에 없다. 강해야만 살 수 있기에..그가 전남편에게 버림받고 힘들어하면서 아무 일이나 막하며 살 때 쯤 그녀는 군부대 근처에 살던 장교의 애를 봐주기로 했다. 그 집에는 어린 애와 토미라는 애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애가 헤드윅이 잊지 못하는, 헤드윅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다. 토미와 헤드윅은 어느순간 마음이 맞자 함께 노래하고 공연을 하며 적지 않은 돈을 번다. 그러면서 헤드윅은 자신의 인생을 밴드에 걸어도 되겠다 싶어 밴드일에 열중하게 되고, 토미를 키우지만, 토미는 그런 헤드윅을 버린다. 헤드윅은 상처를 받고, 그런 토미에게 자신을 조금만 이라도 봐 달라고 하지만 헤드윅은 점점 지쳐가고 그의 남편 이츠학, 엥그리 인치 또한 지쳐간다.
맘마미아2006년 8월 31일 3시공연일시: 2006. 6. 18 ~2006. 9. 4장소 : 서울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배우: 도나역 (이태원), 소피역 (이정미)주최: 성남 문화재단, 신시 뮤지컬 컴퍼니음악: ABBA한소녀가 결혼식을 앞두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는 내용의 뮤지컬.뮤지컬을 보기전에 언제나 기대감을 갖고 뮤지컬을 보게된다. 그래서 가끔 내 기대에 못 미쳐 실망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 작품 에서는 실망감보다는 즐거웠다. 보는 내내. 많이 들어본 흥겨운 음악과 율동으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내가 뮤지컬을 보는 건 이번이 3번째.지난 방학 때 을 보았고, 전학기중에 를 보았다. 의 경우는 대 공연에다가 처음 보는 뮤지컬이라 보는 내내 한소절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긴장하며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 은 대학로 해서 했던 소공연으로, 에서 보았던 배우 배해선이 까미유 끌로델역을 맡아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난 이렇게 서서히 뮤지컬이란 장르에 다다가고 있었나 보다.이후 이번엔 공연을 택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던 . 내가 이 공연에 끌렸던 이유 중 하나는 어릴 적 내가 즐겨듣던 노래들을 불렀던 ABBA가 이 뮤지컬의 노래를 담당하였단 사실이다. 아마도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때 당시 사촌오빠의 영향을 받아 외국 팝송에 빠져있을 시기였다. 그 시기 난 외국 팝송모음집 등을 사서 학교를 오갈 때마다 들으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흥얼거리면서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보면 외국 팝송모음집엔 항상 ABBA노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노래가 여기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표를 알아봤다. 역시 대공연이라 그런지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학생신분이라 자금이 넉넉하지 않아 엄마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20%할인 날짜를 찾아 드디어 예매했다. 이때가 8월2일. 내가 예매한 날짜는 8월 31일. 그전엔 거의 모든 좌석이 매진되어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 앉느니 차라리 좀 늦게라도 좋은 자리 앉자는 생각이 들어 잘 보이는 2층 첫 째 줄을 예매하고는 무려 한 달을 기다렸다.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린 날.오늘 학교수업도 빠지고 서울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집에서 늦장을 부린 탓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여 자리를 찾았다. 2층 첫 번째 줄에 자리한 나는 자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걱정과는 달리 무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소피는 결혼식전 엄마의 일기장에 쓰여있는 남자들이 자신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아버지 가능성이 있는 사람 3명에게 소피의 엄마 도나가 쓴 편지처럼 위장하여 편지를 보낸다. 도나의 딸 소피의 결혼식에 와달라고. 그리하여 그들 3명은 소피의 결혼전날 도나가 운영하는 호텔에 도착하고, 사건은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결혼식이 전날이라 분주한가운데 소피는 자신의 결혼식 보다 아버지를 찾는데 여념이 없다. 누가 나의 아버지였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엄마와는 어떤 사이였을까? 소피는 그들을 만나가며 찾아간다. 그러나 결혼당일. 엄마 도나는 말한다 자신초차 알수 없다며, 소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소피는 그 말을 듣고 약혼자와의 결혼을 취소한다. 그리고는 약혼자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