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분석2012년은 한국 영화산업에 있어서 최다 관객 수, 최대 매출액, 최대 수익률의 기록을 세운 말 그대로 기록적인 해였다. , 가 1,200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 , , 등의 영화들도 기획력의 힘을 보여주며 400만 이상 관객을 모았다. 더불어 김기덕 감독의 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흥행에서 수위를 차지한 한국영화들은 단순한 흥행 성적만이 아니라 여러 사회적, 정치적 현상과도 긴밀하게 맞물려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온라인시장의 규모 또한 높은 상승률을 보였고, 한국영화 수익률 역시 13%라는 경이적인 결과를 내놓았다.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총제작비 10억 원 미만의 저예산영화 편수가 대폭 증가했다는 점이다. 2008년 이후 한국영화 극장 개봉작 중 저예산영화 편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데, 2012년에는 전년에 비해 증가폭이 더욱 확대되었다. 총제작비 10억 원 미만의 영화가 109편으로 전체 한국영화 개봉작의 62.6%를 차지하여 편수나 비중의 부분에서 최대 수치를 기록하였다. 이렇게 저예산영화의 제작 편수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된 배경은 한국영화 산업 흐름에 기반을 둔다. 2000년대 초반,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었던 영화산업의 득과 실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제작비 규모가 하향 조정되고, 기존의 평균 제작비 규모의 영화제작 편수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파악된다. 결국 창작 주체들은 스스로 제작 규모를 축소하기 시작하였고, 순제작비의 규모는 하향 조정되었다. 또한 2012년에는 고 예산 영화의 제작비 추가 상승과 저예산 영화의 제작비 하향 조정이라는 양극화 현상이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저예산영화들은 몇 가지 한계점을 드러낼 수 있다. 대부분의 저예산영화들이 완성도가 낮고 상업적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극장 개봉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평균 관객 수도 낮고, 순제작비와 더불어 마케팅, 배급 비용에서도 한계가 있어 경쟁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내포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통한 새롭고 의미 있는 영화적 창작활동에서 비롯된 콘텐츠이기에 저비용으로 고효율의 상품가치를 극대화시켜 한국영화산업에 이바지할 가능성도 동시에 안고 있다. 물론 2012년 한 해 한국 상업영화가 대내외적으로 활기를 띠면서 2013년까지 그 흐름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저예산영화야말로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 산업 전반의 시장성 악화를 극복하기 위한 근원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선하고 대안적인 내용으로 만들어지는 저예산영화는 창작물로서,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서, 가능성 있는 작품으로서 영화계와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산업적 위치를 명백히 인지하여 한편으로는 보다 다양한 영화를 양산해 내고, 또 한편으로는 주류 영화계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한 건강한 창작 활동을 펼쳐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예산영화가 창작성을 지켜 나가면서 다양한 색깔의 영화를 생산해 나갈 때 한국영화산업이 건강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저예산영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한국 기업의 문화마케팅Ⅰ. 기업 문화마케팅의 개념1. 문화마케팅의 배경과 정의프랑스의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은 경제 교류가 상품과 서비스 뿐 아니라 문화적 가치도 주고받는 것이라면서 ‘문화적 부가가치’를 강조했다. 사회의 중심 활동 주체로서 기업은 기능이나 기술적 우위에 의한 제품의 차별화를 넘어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문화마케팅으로 소비자들을 설득하고 사회적 책임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즉, 기업의 문화마케팅은 기업의 이미지 제고와 감성적 서비스 및 예술과 연계한 브랜드 관리 등 제품의 품격을 높이고자 문화를 매개로 하여 소비자를 설득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김민주 외(2005),『컬덕 시대의 문화마케팅』(서울: 미래의창), p. 189.새로운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기업은 무엇보다 창의력이 필요하므로 앞서 가는 예술에서 미래를 읽고 준비할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기업이 제공하는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문화예술계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여건에서 순수한 창작 활동에 몰두하며 기업에게 창의력의 열쇠를 제공하는 몫을 담당한다.2. 메세나협의회의 출현과 그 역할일반명사로도 사용될 만큼 기업의 문화마케팅과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개념이 바로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 메세나이다. ‘메세나’(mecenat)는 프랑스어로, 그 어원은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 시인인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여 예술진흥에 기여했던 마에케나스(Maecenas)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곧 예술, 문화, 과학에 대한 두터운 보호와 지원을 의미한다.이번 학기 수업시간에 영화 를 토대로 하여 살펴보았듯이, 문화에 대한 후원은 보다 세세한 방법과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필랜스로피(philanthropy), 패트로니지(patronage), 스폰서십(sponsorship), 파트너십(partnership)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필랜스로피는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헌납 또는 박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선이 주된 개념이다. 패트로니지는 아버지라는 로마어, 파테르(Pater)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문화에 대한 후견인 입장으로서의 보호자, 후원자를 의미한다.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스포츠 경기와도 밀접하게 행해지고 있는 스폰서십은 기업이나 상품을 선전할 목적으로 문화예술계에 기업이 지원하는 금전, 현물 또는 서비스의 제공을 의미한다. 반면 파트너십은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한 상호이익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의 문화예술에 대한 수직적 지원의 틀을 벗어나 동등한 관계에서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형태로 문화마케팅의 지향점과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앞 글, p. 191.메세나의 기원은 앞서 살펴봤던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가로 알려져 있다. 타일러 코웬은 르네상스시기 미술에 있어서는 메디치가의 영향력이 과장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의 지원으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거장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통설이다. 공식적으로 문화예술지원 관련 협의회를 가장 먼저 구성한 미국에서는 록펠러를 중심으로 1967년 예술지원기업위원회(BCA: Business Committee for the Art)가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늦은 1994년에 한국 기업메세나협의회가 발족되어 문화예술에 대한 국민의식 함양과 경제와 문화예술의 균형 발전에 이바지하는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3. 문화마케팅의 전략과 유형1) 문화판촉(sales)문화예술을 광고나 판촉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PPL 기법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속한다. “Think New LG !” 라는 브랜드 슬로건의 시리즈 중 하나인 2005년 기업광고에서 LG는 여성 무용수가 아닌 남성 무용수들을 백조 역에 기용하는 파격적인 연출을 통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영국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를 소재로 채택하였다. LG는 고정관념을 깨고 새롭게 변화하는 LG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전달함으로써 항상 새로운 모습을 추구하는 도전적인 기업으로의 변화를 강조하는 데 성공하였다.2) 문화지원(sponsorship)기업이미지 제고를 위한 문화예술 분야 지원형식을 띠고 있으며 문화마케팅의 가장 일반적인 방식인 동시에 가장 전통적인 방식이기도 하다.3) 문화연출(synthesis)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문화이미지를 담아 차별화를 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스타벅스의 매장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타벅스는 단순히 마시는 커피를 판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한 잔의 이미지’를 판다는 목표에 맞게 커피에서 추출해낸 색상을 기조로 한 인테리어 디자인과 음악에 의한 분위기 연출로 집이나 직장과는 다른 차별화된 제3의 장소로 포지셔닝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힘입어 스타벅스는 대중 매체의 광고 없이 매장 자체를 통한 문화마케팅으로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쌈지의 ‘딸기가 좋아’, 프라다의 ‘에피센터’와 같은 개념의 매장이 문화연출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Ⅱ. 한국 기업의 미술시장 지원 현황우리나라에서 메세나 활동은 1994년에 한국메세나협의회가 설립되면서 지난 근 20년간 외형적으로 성장해 왔다. 메세나 운동이 사회공헌의 새로운 축으로 중요하게 자리 잡아가면서 단순한 후원협찬이나 문화마케팅을 넘어서 ‘가장 선진적인 사회공헌활동’의 주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업의 문화예술지원은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다. 현재 국내 미술시장에 있어서 기업 문화마케팅의 긍정적인 측면과 문제점 및 한계를 분석해본다.1. 긍정적 측면: 삼성 ‘리움’의 사례2004년 10월 13일, 세간의 이목은 삼성이 오픈한 한남동의 리움에 모아졌다. 삼성 일가의 성인 ‘Lee’와 ‘museum’의 합성어인 리움은 그동안 미술문화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삼성의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 장 누벨(Jean Nouvel), 램 쿨하스(Rem Koolhaas)가 설계에 참여하여 이미 화제에 오른 리움은 삼성이 세계적인 문화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리움은 3인의 건축가가 각기 다른 세 개의 레벨에 3색의 건축물이 모여 만들어낸 장소다. 우리 시대를 대표할 만한 3인의 건축가 선정과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글로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온 삼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장 누벨은 건축을 “공간을 구성하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할 만큼 기업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독창적인 건축물을 통해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축가다. 앞 글, p. 202.일각에서는 리움이 한국 건축가의 참여가 배제된 상황에서 외국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삼성은 출신이 각기 다른 세 명의 건축가가 이미 쌓아놓은 명성과 인지도를 적극 활용하여 세계 건축계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다지고 동시에 건축가 선정에서 비롯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운영에 있어서는, 어른은 만 원, 청소년은 6천 원의 관람료를 받고, 이상적인 관람환경 조성을 위하여 일일 관람객 수 제한, 사전 예약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다. 책정된 관람료에 대하여 일부 언론에서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라고 국내외 다른 미술관들과 비교해가며 거론하기도 했다. 지적대로 미술 애호가 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선뜻 접하기 어렵다는 것은 문화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기본적인 취지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의도를 지닌 방문객에게 최선의 관람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삼성의 고민이 낳은 결과이기에 일정한 관람료는 미술 작품과 제대로 된 미술관에 대한 후원의 의미이자, 관람객들에게 소장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관람료 수익은 또 다른 문화마케팅을 통해 환원된다.2. 문제점 및 한계[기고] 기업과 문화예술, 뉴 파트너(New Partners) 사업유유미 emlew@mecenat.or.kr한국메세나협의회 기획홍보팀장매년 증가하는 우리나라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금액과 관심에 비해 지원 패턴은 많지 않으며 그 지원도 지속적이지 못하다. 특별한 특징 없이 유사 업종 기업들이 비슷비슷한 지원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기업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보 부재와 전문성 부족에서 기인한다. (중략)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준조세 또는 필요악적 비용으로 여기며 마지못해 지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원을 통해 양측이 상호 발전할 수 있는 협력 사업을 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효과는 광고처럼 단기적이고 직접적이기보다는 장기적이고 간접적이기 때문에 기업 호응이 낮을 수밖에 없다. (중략)
재외 한국문화원 연구주제어: 한국문화원, 한류, 소프트파워, 국가이미지, 문화마케팅, 문화후광영국의 유명트렌드 잡지 『모노클』(Monocle)이 지난 19일 발표한 '소프트파워' 국가별 순위 조사에서 영국이 1위, 한국은 11위에 올랐다. , ≪조선닷컴≫, 2012.11.2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20/*************.html.한국은 최근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K팝 돌풍 등에 힘입어 전년 조사 때보다 3계단 뛰었다. 소프트파워(soft power)란 강제력보다는 매력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을 의미한다. 군사력으로 행사하는 하드파워(hard power)와 달리 외교 · 문화 · 교육 · 스포츠 등을 통해 자발적 공감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다. 1990년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Nye) 교수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한 국가의 매력을 상징하는 지표로 흔히 활용된다. 이러한 소프트파워는 한 국가의 문화마케팅 및 문화후광효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해외 각국 현지에 주재한 한국문화원은 국가 차원에서 가장 중심적인 문화마케팅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국가이미지 혹은 소프트파워 측면의 국가경쟁력과 관련하여 문화원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현재 몇몇 국가에 주재해 있는 한국문화원의 현황을 조사 분석하려 한다.Ⅰ. 이론적 검토1. 문화콘텐츠가 국가이미지에 미치는 영향1) 국가이미지(country image)의 정의국가 이미지란 “어떤 국가 혹은 그 나라 국민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지적 묘사” 혹은 “어떤 국가 또는 그 나라 국민들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채지영(2012), 한류 확산을 위한 재외 한국문화원 활용 연구,『예술경영연구』, 22, p. 241.국가이미지의 형성에는 그 국가의 사람, 기업, 자연환경, 정부, 정치형태, 경제수준, 상품 등 그 국가와 관련된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뿐 아니라, 어떤 국가에 대한 소비자들책 기조로 설정하였다. 프랑스의 문화외교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 아래 대외 문화정책이 곧 외교정책이라는 입장을 보여 왔으나 최근에는 사적 기금이나 메세나를 이용하고 전문가 풀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등 민간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로 변모하고 있다.영국의 문화외교는 영국문화원(the British Council for Relation with Other Countries)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국가적 이익을 옹호하고 타국 정부와 타국 민에 대해서 영국에 대한 신뢰감을 조성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수행하고 있다. 독일은 괴테 인스티튜트로 대표되는 비정부 기구를 통해 독일어, 독일의 정보와 문화교류, 독일문화와 문명의 전파라는 3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소프트파워 강화가 시대적인 트렌드가 되면서 세계 각국은 자국이 가진 소프트파워 자원을 활용하고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춰 우리나라도 소프트파워 강화에 나서고 있다. 과거 해외에 파견되는 우리 문화예술 공연단은 주로 전통춤과 음악이 중심으로, 공급자의 관점에서 우리가 멋있다고 느끼는 것, 우리 전통의 것을 고집했다. 그러나 문화교류가 현지의 문화수요, 문화욕구와 연결되지 못하면 관심을 유발하기도 어려우며 지속성을 갖기도 힘들다. 한국 문화의 고유성만큼이나 보편성 차원에서도 관심을 환기시켜야 하며, 현재의 한국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주제들을 발굴하여 프로그램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상품, 트렌드, 교류관계 설정방식, 고유의 생활양식 등에 입각해서 문화교류의 방법과 내용이 재설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증대되었다. 마침 한류 열풍을 타고 현지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영화, 드라마, 대중가요 등이 좋은 대안으로 떠오르며, 문화현상을 뛰어넘어 한국의 문화외교를 이끌어 나갈 핵심 소재로 부상하고 있다. 한류의 확산은 한국의 문화외교 파워를 강화하고 국가이미지를 제고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임을 인식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류의 장을 이뤄내고 있다. 영화는 주영 한국 문화원 사이트에서 예매 하고 관람할 수 있다.3) 공연 및 행사: 작가들의 회고전, 한국영화포럼 등의 행사와 사라 장과 같은 유명한 한국인 연주자들의 독주회 등의 음악 공연과,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한국 보물찾기 등의 다양하고 유익한 공연과 행사들을 개최 하고 있다. 특색 있는 행사로는 한류 서포터즈를 모집해서 K-POP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매주 한국역사, 한글, 한국음식, 한국음악 등 한류콘텐츠의 다양한 주제를 포함하여 참여형 교육방식, 맞춤형 강사를 통한 차별화된 커리큘럼으로 K-Pop Academy는 문화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4) 세종학당 운영: 세종학당이란 한국정부가 공인하는 한국어교육기관의 브랜드명이다. 세종학당은 현지에 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강좌는 물론 한국어교육사업 실시와 그에 대한 지원, 또는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각종 문화강좌의 실시 및 지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이 밖에도 런던시가 주관하는 템스페스티벌에 매년 참가하면서 태권도, 국악 공연, 한식 등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주영한국문화원은 위와 같은 다채롭고 지속적인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서 한국을 사랑하는 영국인들에게 우리 문화를 가르치고 홍보하면서 교류의 장을 넓히고 한국과 영국의 문화적 친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런던시가 주최한 제16회 런던시 템스 페스티벌(The Mayor's Thames Festival)에 주영한국문화원은 2012 런던 패럴림픽 폐막을 맞아, 9월 8일(토), 9일(일) 양일간 한국문화예술축제 ‘All Eyes On Korea @ Thames Festival’을 선보였다. 런던의 랜드마크이자 연간 500만 명의 방문객을 이끄는 테이트모던 갤러리 앞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이 축제는 100일간의 런던올림픽 한국문화축제 ‘오색찬란’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올해로 여섯 번째 무대이자 매년 수준 높은 공연을 다채롭게 준비해온 주이 주관한 2012 런던올림픽 한국문화축제 ‘오색찬란’은 지난 6월부터 약 3개월간 사우스 뱅크센터,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등 런던 내 주요 문화기관과의 협력 하에 한국음악, 패션, 미술, 클래식, 음식, 문학 장르를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일련의 행사를 성황리에 치렀다. 더불어, 런던올림픽서 보여준 한국의 선전은 한국을 향한 세계인의 관심을 스포츠를 넘어 한국문화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직접 체험과 참여가 가능한 야외축제로 런던시민과 관광객을 찾아간 것이다. 템스 페스티벌은 런던시 주최로 매년 9월 둘째 주 주말 이틀간 템스 강변에서 개최되는 런던 최대의 야외 축제이며, 올해 75만여 명의 런던 시민과 관광객이 축제에 참가했다. 이로써 한국문화축제 '오색찬란'은 장애인올림픽의 폐막과 함께, 뜨거웠던 2012년 런던의 여름을 마무리했다.2. 파리 주불한국문화원1980년 12월 16일 개원한 주불한국문화원은 파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프랑스에 한국문화를 소개함으로써 한국과 프랑스 양국 간의 문화 예술 교류를 증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불한국문화원은 다양한 문화 행사 및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프랑스인들이 한국문화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로,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열린 문화 공간 운영과 현지 사회 특성을 반영한 문화 사업 추진으로 한국 문화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1) 문화행사: 문화원 내 외부에서 프랑스 내 파트너와 협력하여 전시, 콘서트, 영화 상영, 연극, 컨퍼런스, 문학행사, 전통음악 무용 인턴십, 한국문화축제 등을 기획, 개최한다.2) 한국어수업: 총 15개반 (초급 7개반, 초중급 4개반, 중급 2개반, 고급 1개반, 영화로 배우는 한국어 1개반)에서 매주 28회 수업을 진행한다.프랑스에 부는 한국어 열풍최근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지난 2011년 문화원 한국어 수업에 등록한 학생은 300명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문화원은 기초반을 세 반으로 만들고 고급반을 신설해 한국어 강의 횟수를 주당 10행: 1981년부터 한국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프랑스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출판되기 시작한 잡지로 영화, 무용, 문학, 미술, 언어, 패션(한복 등), 사회, 역사, 음식 등을 주제로 오늘날까지 약 700여개의 기사가 소개된 바 있다. (현재 83호) 연중 여름호, 겨울호 2회 발행되며, 회마다 5000부를 발행, 2000부는 한국문화잡지 정기독자들에게 우편으로 송부된다. 2009년부터는 그간 발간된 잡지 중 중요한 기사들을 모아 소개하는 인터넷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 기사주제, 발행 연도 등으로 기사를 검색하여 볼 수 있는 이 인터넷 아카이브는 30년 한국문화 잡지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돼 있다.주불한국문화원 홈페이지 메인화면3. 베이징 주중한국문화원주중한국문화원은 한 · 중 수교 15주년 되던 지난 2007년 3월 22일 북경시 조양구 광화로 광화서리 1번지 단독건물(지하 3층, 지상 4층, 6302m²)에 새로 둥지를 틀어 한국문화 소개의 장으로서, 한중문화교류의 핵심 거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1992년 수교 이래 한중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예술, 체육, 관광 등 모든 분야에서 빠른 발전을 이루어왔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대상국으로서 2011년 양국의 무역액은 2,400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2015년 3,000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양국의 인적교류 또한 획기적으로 늘어나 지난해 양국의 교류인원이 650만 명에 달하였고 양국에서 13만여 명의 학생들이 유학을 하고 있는데, 주중한국문화원은 문화를 통하여 중국인들이 한국을 더 잘 이해함으로써 양국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고 양국민간의 우의를 증진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각 층별 차별화된 디자인과 각종 첨단 IT로 구성된 상설전시장과 문화상품전시장 등은 한국문화의 최신 트렌드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문화 체험의 현장으로서 한국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있다.특히, 한국문화교실은 우수한 교수진으로 구성된 한국어 교실, 한국요리 강좌, 국악 강좌, 태권도 강좌 등다.
1980년대 마당극Ⅰ. 마당극의 개념마당극은 이름 그대로 마당에서 하는 연극이다. 연극을 극장무대가 아닌 확 트인 마당에서 한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서구적 연극개념과 상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당극은 그 장소적 의미만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임진택의 정의: “개발된 연극 즉 연희자와 관중이 한 덩어리이고, 연희마당과 관중석이 서로 통하며, 관중이 주인이 되는 연극“ (임진택, 「새로운 演劇을 위하여」, 『민족극 정립을 위한 자료집』 제2권)- 김우옥의 정의: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미학을 위한 미학을 추구하는 연극이 아니라 민중의 고통과 민중의 억울함을 파헤치어 민중들에게 그것들을 인식시키고 그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공동대처를 유발시키는 일종의 목적극” (김우옥, 「마당극의 본질과 현장성」, 『예술과 비평』 제15호)Ⅱ. 1980년대 마당극의 배경1970년대는 엄격한 유신체제 하의 국가정책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민족문화 복원작업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따라서 허규가 주도하는 극단 민예의 활동과 같이 제도권 안에서의 마당극은 활발히 행해졌으나, 워낙 현실의 벽이 두터운 데다가 대중의 인식부족으로 마당극 공연은 대학이라든가 교회 또는 특수현장 등에 국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1026이라는 유신종말의 정치격변이 갑자기 일어났고, 자유화 물결과 함께 마당극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1980년 3월 개학을 맞은 대학들에서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억압받던 과거를 풍자하는 마당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은 자유였기 때문에 미처 새로운 레퍼토리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다가 몇 년 동안 해온 마당극도 형태에 있어서 아직 확고한 틀을 마련 못했기 때문에 대학가에서 시도한 것은 그 동안 다른 곳에서 했던 것을 재공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Ⅲ. 1980년대 마당극의 두 흐름그 동안 사건이 있는 곳과 대학가에서만 거의 음성적 활동을 하던 마당극은 두 방향에서 부상하게 된다. 하나는 제작팀 ‘마당’과 극단 ‘연우무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성연극의 한 부분으로 마당극을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과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아마추어 마당극 단체들의 활동이다.1. 제도권 마당극운동1) 극단 연우무대(演友舞臺)1978년 창단한 연우무대는 1980년 마당극전문극단으로 방향선회를 하게 된다. 연우무대는 마당극을 마당이 아닌 극장무대로 들여오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은 바로 놀이패 한두레와 공동으로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 (황석영 작, 임진택 연출, 1980년 4월)다. 이 공연은 전통극과 현대극을 융합시켜 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공연이었다. 특히 소위 공동창작이라 하여 여러 사람이 손을 대었기 때문에 통일성이 약했다. 에 이어 (1981년 4월), (1982년 1월), (1982년 5월) 등을 문예회관, 국립극장 등 기성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연우무대가 1984년 7월에 드라마센터 무대 위에 올린, 임진택 연출의 공해문제극 은 심의된 대본과 다르게 올려졌다는 이유로 한국연극사상 초유로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6개월 공연 정치 처분을 받았다. 우리의 탈춤과 판소리가 바탕을 이루었지만 서양의 서사극 방식이라든가 코메디아 델 아르테 등의 다양한 기법이 부분적으로 차용되었다. 이 공연은 공연 정지 처분뿐 아니라 기성 평단의 냉엄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2) 제작시스템 마당두 번째로 무대에 진출한 마당극인, 제작시스템 마당의 (안종관 작, 임진택 연출, 1980년 5월)으로 해서 마당극은 비로소 무대극으로서도 대중의 주목을 끌 수가 있었다. 전래 판소리 를 민중적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다시 신파극의 과장됨을 가미시킨 은 번역극 위주의 상업주의적 기성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면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2. 재야 마당극운동재야마당극 단체는 중앙보다 오히려 지방에서 활기를 띠어갔다.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전남 광주에서 놀이패 ‘광대’가 등장하여 1980년 3월에 라는 농축산정책의 과오를 비판한 마당극을 공연하였다. 광주에 이어 제주도에서 ‘수놀음’이라는 마당극 전문단체가 1980년 11월에 발족되어, 19세기 후반의 제주민란을 소재로 한 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처럼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마당극 단체들은 자기 고장에서 일어난 역사, 정치, 사회, 경제 문제 등을 소위 민중항거의 몸짓으로 표출함으로써 하나의 개성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방의 마당극은 향토의식이 지나치게 강하다 못해서 국수적이고 배타적이기까지 했다.Ⅳ. 1980년대 마당극의 특성 정진수, 「민중의 허와 실」, 『예술과 비평』 15권.- 복잡한 내용과 난해가 기교를 배척 (반지성주의)- 민족의 정체성 내지 주체성 수립 지향 (반외세, 반서구, 반미)- 연극을 통하여 민중의식 고취와 사회변혁 주도 (교훈주의 연극)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의 사회경제적 지위Ⅰ.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서양미술사에서 한 번도 두각을 나타낸 바 없던 네덜란드에서 17세기 들어 미술의 황금시대가 출현했다. 내용 면에서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전시대뿐만 아니라 동시대 다른 유럽미술과 명확하게 구별되었다. 이전의 네덜란드 미술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장르는 신화, 종교, 역사의 주제를 취급한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말하자면 문학을 그 속에 담은 그림이다. 역사화는 그리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이 신화, 종교, 역사에 관한 인문학적 교양을 지녀야 하므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가장 고상한 장르로 인식되었다. 17세기 프랑스의 미술가들은 회화에 일정한 위계를 부여했다. 역사화를 맨 위에 두고 그 다음에 초상화를 두었고 가장 바닥에는 현실의 주제를 다루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 ‘고상하지 못한 미술’을 두었다. 1664년에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역사화를 전공하지 않는 화가는 교수가 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렇듯 17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화가들은 대체로 역사화가였는데, 유일하게 네덜란드에서는 풍경화를 비롯하여 현실의 주제를 다루는 화가가 다수였다. 미술사적으로 역사화가 전근대미술을 대표한다면 풍경화는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장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풍경화가의 주도성이 정립된 것으로 보아, 네덜란드를 근대미술이 최초로 발전한 나라로 간주하는 미술사학자들도 있다.역사화 대신 풍경화 등이 주도하게 된 것은 네덜란드 미술시장의 특성, 무엇보다도 미술 수요자의 근대적 특성을 반영한다. 중간계급 수요자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선호했다. 감상을 위해 상당한 교양을 요구하는 역사화는 미술시장에서 대중적이지 않았다. 반면에 풍경화는 경제활동에 필요한 지리적 정보를 나타내고, 자신의 토지를 쉽게 확인해주고, 지도보다 더 생생하게 그것들을 입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오랜 독립전쟁 끝에 확보한 공화국의 국토에 큰 애착을 가졌다. 17세기 내내 국토를 범람이나 홍수로부터 지키고 면적을 의 요구에 종속시킨다는 것은, 실제 풍경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우리가 그 풍경 속을 돌아다닐 때,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즉각적인 영향)이 거의 표현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은 풍경화 외의 것은 거의 그리지 않았으며, 대지에 대한 사랑과 그 대지의 늘 변화하고 있는 외관에 대한 자연적인 호기심(당시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던 외관에 대한 몰두) 등에 직접적으로 고취되었다. 베르메르의 작품 은 그의 고향 델프트시를 둘러싼 물가에서 그린 그림이다. 베르메르는 지붕 선들에서 수평선들이, 삼각 박공벽에서 작은 사선들이, 건물 입구들과 다리들에서 곡선 아치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관찰했다.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은 현실풍경을 직접 관찰하여 표현했다. 사실에 충실하고 대상을 이상화하지 않은, 실제풍경에 접근한 풍경화였다.한편, 정물화도 풍요로워지는 도시 주민들의 물질적 만족을 표현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비싸고 진귀한 물건들을 그림으로 그려 거실이나 식당에 걸었다. 그려진 대상의 경제적 가치는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꽃의 빛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하고 군대 계급과 같은 서열을 붙였다.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는 튤립은 ‘황제’라고 불렀고, 이어 ‘총독’ ‘제독’ ‘장군’ 등으로 이름이 붙었다. 그림으로 그려진 튤립은 그냥 꽃이 아니라 보물이었다. 이처럼 17세기에 등장한 풍경화나 정물화는 작품 속의 대상이 지닌 경제적 가치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관심과 관점을 표현했다. 또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가정적인 일들을 묘사한 그림을 집안에 걸어놓고 싶어 했다. 이러한 그림들은 풍속화(혹은 ‘장르화’)라고 불리는데,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 사회에서 종교화보다는 풍속화가 인기 있었다.역사화의 일부였던 풍경, 정물, 풍속이 독립된 장르로 돼가는 미술사의 발전과정은 당시 네덜란드 시장의 사회적 분업화가 진전되는 맥락과 동일하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근대 사회가 공유하는 미술에 대한 위계적 인식 태도 즉, 역사화를 맨 위에 두고 다음에 초상화를,축하고 있었다. 정물화 가운데 1620년대에 크게 유행한 바니타스(vanitas, 라틴어로 ‘덧없음’이라는 뜻)에서는 죽음의 불가피함, 세속적 성공과 쾌락의 덧없음 등을 상징하는 소재를 다루었다. 17세기 전반은 네덜란드가 근대경제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서, 의식면에서 경제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가 충돌하는 시기였다. 칼뱅주의 개신교의 자본주의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윤추구를 죄악시하는 사상에서 벗어나게 해줌과 동시에, 절제와 자선을 통해 경제적 풍요를 통제하게 함으로써 부와 도덕을 모두 성취하도록 했다. 절제의 미덕을 중시하는 중간계급의 취향은 17세기 전반에 단색조 회화의 발전을 지지했다.하지만 부의 축적과 풍요가 계속되고 시장경제와 개인주의 원리가 정착하면서, 개인의 부는 더 이상 괴로워할 것이 아니었다. 중간계급의 새로운 의식은 회화 취향의 변화를 가져왔다. 부의 귀족적 과시를 피하려는 검소한 취향이 퇴색하면서 17세기 후반 미술에서는 도덕적 교훈적 요소나 절제의 미덕은 모두 제거되었다. 풍경화는 웅장하고 화려해졌다.유럽 미술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도시의 시민단체나 공공기관의 그룹초상화 주문은 황금기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주문은 대부분 길드에 위촉되었지만, 드물게는 렘브란트의 경우처럼 직접 화가에게 의뢰되기도 했다. 물론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여전히 그룹 초상화보다는 개인 초상화를 선호했다. 막 결혼한 장인조합의 장들, 상인, 무역업자 등은 일단 어느 정도 생활이 되면 자신들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그러나 고객의 수는 제한되었고, 점차 한 사람이 일생에 한번 또는 충분한 돈이 있을 때에만 초상화를 주문하게 되어, 화가가 초상화로 고정적인 수입을 올리는 기회는 점차 감소했다. 공공 의뢰 작품들은 주로 시청이나 기타 집회소에다 걸 군상 초상화들이었다. 렘브란트는 ‘야경꾼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콕크 대령의 명령을 받은 중대가 시청 정문에서 행진해 나오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들을 질서정연한 무리로서가 아니라 급히 집합하여 행진하려고 할 때80% 이상을 중간계급 즉 시민의 수요에 의존했다. 영화 의 루이벤이 그러한 수요자 계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네덜란드 미술 수요의 특성은 두 측면에서 형성되었다. 첫째로, 네덜란드는 1609년에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이룩했는데, 그 이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경제적 번영은 중간계급에 막대한 부와 소득을 집중시켰다. 둘째, 네덜란드 종교개혁의 흐름 속에서 1560년대 신교도들이 일으킨 성상파괴운동으로 교회에서 미술작품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전근대 사회에서 양대 미술 수요자로서 역할을 했던 궁정과 교회가 네덜란드에서 몰락하게 되면서, 중간계급이 종래의 미술 수요자 역할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전근대의 미술 수요자가 소수의 특권층인 데 비해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 수요자는 다수의 보통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중간계급 수요자들은 프랑스나 스페인의 왕처럼 막대한 돈을 미술에 낭비할 여력이 없었다. 자연히 건축과 조각 같은 기념비적인 미술 대신 소규모의 회화가 미술의 중심이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중간계급 구성원으로 미술 수요자가 확대되면서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근대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미술 수요자들이 작품을 구입한 주요 동기는 투자 목적이었다.미술생산의 확대는 단순히 생산자의 양적인 증가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나 생산조직 등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이루어졌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미술 수요자는 상층계급 귀족인 반면, 미술가는 중간 및 하층계급 출신으로 사회적 지위가 달랐고, 미술가 직업은 흔히 가업으로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승되었다. 하지만 17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화가들 가운데 출신계층이 파악된 96명을 비교해 보면, 상층 부르주아나 전문직의 비율은 네덜란드가 다른 지역, 특히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절대주의 국가에 비해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이재희(2003),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시장,『사회경제평론』, 한국사회경제학회, Vol.- No.21, p. 드에서 일어난 좀 더 의미 있는 지위 변화는, 이러한 절대적 지위의 상승이 아니라, 미술 수요자에 대한 상대적 지위의 상승이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미술가는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상층계급 미술 수요자의 주문에 따라 작품을 생산했고, 대개는 후원자에게 하인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미술 수요자가 중간계급으로 구성되면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수요자보다 낮은 신분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도 베르메르 내외는 루이벤 부부와 서로 동등하게 겸상을 하며 비즈니스적인 만찬을 갖기도 한다.미술가의 전문화도 크게 진전된다. 후원제도하의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술 수요층이 확산되고, 다양화 세분화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최대 미술가인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생각해 조각에만 전념하려 했지만, 후원자의 명령에 따라 화가, 건축가의 일까지 모두 수행했다. 17세기에도 유럽 다른 지역에서 궁정과 귀족, 교회에 고용된 화가는 잡다한 일을 수행했다. 스페인의 위대한 화가 벨라스케스는 왕의 방을 정리하고 왕이 여행할 때면 숙소를 보살피는 시종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같은 17세기에, 후원자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미술가들은, 화가가 조각가나 건축가를 겸임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회화 가운데서도 한 장르에 평생 매달렸다. 그들은 그냥 화가가 아니라 정물화가, 동물화가, 풍경화가, 해양화가, 초상화가였고, 정물화가라도 그냥 정물화가 아니라 꽃이나 식탁 장면 등 한 가지 주제만 그렸다. 베르메르 역시 이례적인 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내화나 장르화만을 그렸다. 영화에서도 작품 매매와 관련한 경영적인 부분은 베르메르의 장모 마리아가 전담하고 있다. 마리아는 루이벤과 같은 고객을 상대하면서 그의 주문을 받아 베르메르에게 전달하고, 베르메르가 완성한 작품을 루이벤과 흥정한다. 베르메르는 상대적으로 작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이렇게 네덜란드 미술가들은 시장생산을 통해 후원자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비싼 대가를 수반하였다. 상업성과 예술성의 불일치라는 문제를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