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외교정책의 교훈목차Ⅰ. 서론Ⅱ. 본론1.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1) 인구2) 지리와 자연환경3) 정치4) 외교5) 군사2. 핀란드의 역사1) 스웨덴령 시대2) 러시아령 시대3) 독립공화국 시대3. 핀란드의 외교정책 고찰1) 핀란드화2) 핀란드 외교의 부정적 인식3) 핀란드 외교의 긍정적 측면Ⅲ. 결론 (한국이 핀란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Ⅰ. 서론우리나라에서 핀란드라는 나라는 북유럽에 위치한 한 나라로 자작나무와 자일리톨껌과 우수한 교육환경 정도가 널리 알려져 있고, 좀 더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노키아라는 글로벌 휴대폰 기업을 가진 나라로 인식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나라가 특수한 정치 역사를 가졌으며 그것도 우리나라 대한민국과 유사한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핀란드는 과거 유럽의 변방국가로 자리했으나 현재는 뛰어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국가 경쟁력 1위에 꼽히고 있다. 과거 주변의 강대국들과의 관계에서 핀란드라는 그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취할 수 있는 외교력을 보여주었고 위기의 시간들을 극복해왔다. 이는 수년전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정치 외교적으로 난해한 환경에 처해있는 나라들에게 하나의 좋은 사례로 연구되고 있다.하지만 핀란드라는 이 나라의 외교가 성공적인 면만 지니고 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지난 역사에서 보여준 핀란드 외교의 부정적 측면은 무엇이며 긍정적 측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한국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핀란드는 역사적으로 600여년간 스웨덴의 지배와 100여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와중을 틈타 독립했다. 핀란드는 1939년 독-소간 비밀 협약에 의해 인근 발틱 3국과 함께 소련에 병합될 운명이었으나, 용케도 독립을 지켰다. 핀란드의 저명한 외교관 학자 막스 야콥은 그 이유로 핀란드의 민주정치제도 발달로 소련이 핀란드 내에서 괴로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점, 20만에 달하는 핀란드 군대의 대소 결따라 핀란드가 스칸디나비아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문화적인 것에 기인한 것이지 지리적으로 볼 때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포함되지 않는다.핀란드의 지정학적 위치는 러시아 스웨덴 노르웨이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자 사회 배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고 지금에 와서는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여러나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3)정치현재 핀란드는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국제투명지수가 세계 1위(2000, 2001년)로 부패가 없기로 유명한 것이 특징이다.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면서 정치를 해나간다는 것이 핀란드 정치의 장점이다. 핀란드는‘대통령 중심제+내각책임제’의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외교는 대통령이 내각과 협조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4) 외교핀란드는 약 1,300km에 걸쳐 러시아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외교적 입장이 복잡 미묘하다. 1948년 우호불가침·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친러 중립정책을 유지하였으며, 1982년 3월 대통령 코이비스토가 소련을 방문, 우호노선 계속을 확약하였다. 구소련 붕괴 후인 1992년 1월에 우호불가침·상호원조 조약을 대신하는 기본조약을 러시아와 체결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석유 수입의 2/3를 소련에 의존하기 때문에 소련과의 장기 에너지협정(1976∼1985)을 체결하였다.기본 외교방침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국가들과 협조하는 평화외교이다. 1955년에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및 북유럽이사회에 가맹하였고 1961년에는 EFTA(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유럽자유무역연합)에 참가하였다. 한편 1973년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함과 동시에 COMECON(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경제상호원조회의)과도 경계·과학·기술협력원조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75년에는 전유럽 안보협력회의를 개최, 헬싱키선언이 이루어졌다. 1995년 EU(European Union교가 전파된 것은 12세기였다. 핀란드는 가톨릭 교세의 확장과 동시에 스웨덴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여 13세기에는 스웨덴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스웨덴은 관대한 지배체제를 유지하여 핀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지주귀족을 중심으로 민족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또 종교개혁시대에는 루터파의 프로테스탄트가 전국에 고루 보급되었다. 그 후 17세기 스웨덴의 전성기에는 핀란드 자치의회가 설치된 데 이어 오보(현재의 투르쿠)에 핀란드대학(헬싱키대학교)이 설립되었다.이와 같이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핀란드에 침략의 눈길을 돌린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의 눈에는 스웨덴이 힘을 갖고 있는 한 도시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위태로울 것으로 여겨졌다. 18세기 중 핀란드의 인구는 1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스웨덴이 강국으로서의 지위가 점차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핀란드 땅과 그 주민의 가치는 러시아에 점점 더 명백해졌다. 여러 차례 병합을 기도하다가 북방 전쟁의 결과 체결된 1721년에 뉘스타트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핀란드 남부의 영토였던 카렐리야 지협을 탈취하고 나폴레옹전쟁이 한창이던 1809년에 전국토를 병합하였다.2) 러시아령 시대1809년부터 1917년까지 108년동안 지속된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 통치방식은 여타 국가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 방식과 성격도 본질도 달랐다. 러시아는 엄격한 지배정책을 실행, 1835년에 핀란드 의회의 입법권을 정지시키고, 1902년에는 핀란드군을 러시아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정하는 등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핀란드는 대공국이라 명명되었으며, 러시아의 차르가 핀란드의 대공을 겸하였고 총독이 핀란드를 다스렸다. 또한 핀란드의 수도가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옮겨진 것도 이때이다. 수도를 스웨덴에서 더 멀면서도 러시아가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 영토에서 떨어진 곳에 옮기게 되면서 사실상 핀란드의 국가적 정체성은 더욱 강해졌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민족 서사시인 칼레발민족 출간과 루네베리가 스웨덴어로이를 모하는완수하여 1952년에는 제15회 올림픽½9덄회를 헬싱키에서 개최하는 등 국력을 신 후 다.소련과의 하는차례에 걸친 전쟁갼독일의 침력과츠른 대가는 컸다. 6만 5000명이 사망했으며, 15만 80000명이 부상당했다. 인구 규모력과작러시아의 와 다른 북기게 국가들은 이런 인명피해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갼독일겈국 거대 이웃인 소련과 공존의 이들은선택하였다. 만네르헤?지방파시키비는 1944-1948년의 기간에 소련과 협소하여 핀란드력과방00능력을 어느정도은선에서라 옮기지해야 소련욱 옮기리하다컠다.득하였다. 즉 제3국이 공격할 때 핀란드를 교두보독일이부흥는 것을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방0트해상필요하다는 솃 사다. 1948년에 소련과 핀란드 됕었웠호·협댥일혏의상호원조의상호둴는체결되면서 이러한 논리가 명문화되었다. 핀란드에서는 파시키비 노선갼독일불리는 로 쀱호 때문에 독일 정치인들은 핀란드력과소련의 요구에 복했다는 뜻을 담아 ‘핀란디지룽(핀란드의 동구화)’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였다. 1948년의 쀱호쥀불하였에서 불운한 상호둴라 하겠실로 교해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권방, 발에 넘어됕었것을 고려하면 로 보 핀훨숬웨나 최대안름 틀림없었다. 94롭던 냉전기간에 핀란드는 소련과 웠호적 관계평화유지,면서도 , 페트북기게국을 포함하여 다른 서구 국가들과 정치적드와 소련드와문화적 연대를 강화흥는 것덴일이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다.*참조주재국 약사- 12세기 중엽 이전 : 정치적으로 일종의 진공상태- 1155 : 스웨덴 십자군에 정복되어 스웨덴 일부로 병합- 1809 : 나폴레옹 전쟁기간 중 스웨덴이 러시아에 패배함으로써 러시아에 할양되어 러시아의 대공국으로서 자치령이 됨.- 1917 : 핀란드 독립- 1919 : 헌법 제정- 1939-40 : 소련과의 전쟁(Winter War)- 1941-44 : 소련과의 전쟁(Continuation War)- 1948 : 핀·소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양국 기본관계 정립 및 중립외교정책확인)- 1992 : 핀· 않는 등 소련의 안전보장상의 여러 이익을 손해 보지 않는다는 원칙을 관철, 대국에 간섭, 관여하지 않은 「관여의 중립」으로 전환해서 국가안전보장을 달성해 왔다. 이와 같은 소국의 상황을 핀란드화라고 호칭하는데, 그 불명예인 영향이란 이면에 핀란드 정부는 국민에게 안전을 보장한다는 국가의 책임을 지난한 조건하의 소국에서도 정책적 영지와 타협에 의한 실현되는 것을 시사하고 또다시 전구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하는 등 동서 긴장완화에 공헌해 왔던 것이다.특수한 조건하의 소국의 더욱 더 극단인 안전보장 정책으로서는 쇄국을 들 수가 있다.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태리, 독일 등 강대한 세력에 의해 관심지역이었던 알바니아는 전후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면서도 소련과는 외교를 단절하고 유일한 우호국이었던 중국과도 1970년대의 미중 접근에서 관계가 악화돼서, 사실상 정치적으로도 쇄국에 가까운 정책을 취하여 왔다. 쇄국정책은 일시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지는 선택이라 하더라도, 장기에 걸친 외부세계와의 교류의 차단은 여러 세력과 뒤떨어져서 현실의 구속 속에서 살아 뻗는 기와 영지의 상실에 연결되는 것이다. 국가와 시민의 안전보장은 무엇보다도 우선 세계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2) 핀란드 외교의 부정적 인식핀란드화라는 말이 실제로 쓰인 것은 1960년대에 독일 정치학자들이 미군이 독일에서 철수할 경우에 나올 상황을 논의할 때였다. 1966년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모든 군사적 동맹을 없앨 것을 제안하자 독일에선 그런 상황이 독일의 핀란드화로 이어질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핀란드화는 본질적으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존재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힘에서 비대칭적이면 강대국은 지배적 정책을, 약소국은 묵종적 정책을 선택하게 된다. 묵종적 정책을 고른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영향력에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하나는 아예 대응하지 않는 것이고 이 방식은 작은 나라의 역량이 조직화 되지 못하는 경우에 나온다. 둘째는 엘리트집단이 큰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
남북한의 정부수립 과정의 비교목차1. 서론2. 본론1)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의 배경(1) 북한 정부수립 배경(2) 남한 정부수립 배경2)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의 과정(1) 북한 단독정부 수립의 과정(2)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과정3. 결론1. 서론현재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고, 서로의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남한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사회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국가이다. 이는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점령하에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다른 형태의 정부가 세워진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평등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를 세웠으며, 이 시기 김일성의 권력욕과 맞물려 남한과는 체제, 이데올로기가 전혀 다른 국가를 형성하였다. 소련의 도움으로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김일성은 중국의 동북항일연군에서 함께 활동했던 당시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원들로 하여금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게 했고 비합법적인 선거방식을 통하여 해방 후 3년만에 비교적 수월하게 북한의 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한편 해방 이후 남한사회가 겪은 변화 또한 격렬했다. 해방과 함께 식민지 권력의 핵심이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강력권은 붕괴되었으나 한국사회가 곧바로 새로운 민족 국가체제로 복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혼란과 대립 속에 새로운 기대와 변화의 물결이 출렁거리기는 했지만 스스로 전쟁에 참여했던 전투집단도 없고 혁명을 주도했던 혁명세력도 없이 맞이한 해방공간의 상황은 해방의 의미를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일본의 항복이후 미국은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떼어내어 독립하게 한다는 전략을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독립하게 될 시기와 상태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지녔다. 따라서 미국의 관점에서 한국은 장차 독립국가가 될,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못한 사회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해방 후 3년의 시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특이한 시기였다. 해방 후 3년간 남북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코민테른이 조직한 오르그뷰로가 해체되고 나서 김사국, 최창익, 이정윤 등이 결성한 고려공산동맹과 북풍회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홍명희, 홍증식, 윤덕병 등이 중심이 된 화요회와 북풍회의 멤버들이 1925년 3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두 조직 모두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게 된다. 화요회파가 주도하던 제 1차 조선공산당은 1925년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은 6?10만세운동으로, 제3차와 제4차 조선공산당은 격심한 주도권 다툼과 파쟁으로 인해 검거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조직은 사실상 소멸되었고, 국내에서 이루어진 일제식민지 하의 조선공산당 활동은 끝이 났다.② 해방과 분단,해방이 되자,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목으로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소련군은 우리 민족의 내부 사정에 어두웠고 북한 지역 점령에 대해서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김일성이 지도자로 선택된 것은 당시 소련이 잘 알고 있는 조선공산당 지도자가 없었던 점, 소련군의 훈련을 받은 점, 항일독립투쟁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는 점 등이 고려된 결과일 것이다. 김일성이 입국했을 당시 북한에는 김일성이 경쟁해야 할 네 개의 공산주의 집단이 있었고, 이들의 연합에 의해 북한 정국이 이끌어졌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국내 공산주의자들로 이루어진 국내파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과 같이 항일투쟁을 했던 조선인들인 빨치산파, 중국 연안지역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를 갖고 독립운동을 벌인 김두봉 등의 연안파, 소련에 살고 있다가 소련군의 요청으로 북한에 온 조선인들인 허가이 등의 소련파가 그들이다. 해방 직후에는 이들 네 집단이 잠재적인 정치 집단이었지만 아직 중심 권위가 형성되기 전이어서 어느 집단도 상대방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하고 그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소련의 지지를 배경으로 김일성은 다른 세 집단을 제압하고 그를 정점으로 협상의 핵심적 주제가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세우는 일에 어느 정당과 어느 단체를 세우느냐에 관한 일인데 이것은 즉 장차 세워질 통일정부의 성격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5월 8일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휴회에 들어가 버렸다. 모스크바 결정이 전제했던 미국과 소련의 협력은커녕 대립만이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스크바결정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기구인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합의에도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평소부터 마음속에 지녔던 남한 단정 수립론을 공개적으로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이 독재적 방법으로 모든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앞잡이’ 김일성을 내세워 소비에트 국가를 만들고 있으며 이 소비에트 국가를 수단 삼아 남한마저 공산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막으려면 지금이라도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군정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반감을 나타낼 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견제했다.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단독정권이 착착 형성되어가고 있음에 비해 남한에서는 여러 갈래의 정치운동이 격렬한 내전적 성격을 보이면서 펼쳐지자 하지 사령관은 이렇게 가다가는 한반도에서 내란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열어 어려운 국면을 타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본국과 협의하여 소련에 협상을 제의했다. 소련은 미국의 협상에 응했으며 그리하여 5월 21일 서울에서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켰던 의제 인 남북한 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협의 문제에 대해 합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동위원회가 막상 협의 대상자의 명부를 작성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토의하기 시작하자 다시 쌍방의 이견이 표면화 됐다. 미국은 소련에게 우호적인 정부가 서는 것을 기어코 막으려고 했고 소련은 소련대로 미국에 우호 적인 정부가 서는 것을 철저히 막으려 한데서 결렬이 온 것이었. 남북모두에서 외국군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외국군 철수 후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정치회담을 연 후 조선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남한의 분단 정부 수립을 반민족적 행위로 비난하고 북한의 분단 정부 수립을 정당화하는 정도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보아왔듯이 남북은 분단정부의 기초를 착실히 만들어와 이 시점이면 상이한 두 개의 정치기득권층과 체제가 사실상 형성되어 있었다. 임박한 정치일정을 남한 정부 수립의 사실상 소외세력인 김구 김규식과 북한의 남북협상만으로 통합의 길을 연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남한의 5.10선거가 치르진 후 북한은 평양에서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줲 제[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를 열었다. 이들은 남한의 국회의 정당성을 거부한 후, 남북의 선거를 통해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한 뒤 이 기관의 조선의 중앙정부를 세우며 이 정부가 외국군대의 동시철군을 실현하도록 결의하였다. 북한에서는 8월 25일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을 뽑는 선거가 흑백함 투표 방식으로 치르졌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서도 지하 비밀 선거가 치르져 총유권자 8,681,746명의 77.5%가 투표에 참가해 대표자 1800명을 선출하였다선최고인다. 남한의 상황멄을 려할 때 실현불가능한 주장이지만 이들이 해훼단체월북해 [남조선 인민대표자 회의]를 열고 360명의 남한측 대의원을 선출하였다고 북한은 주장덜자 협의 해훼대회에선최43사건의 주역인 김달삼도 월북하여 참석하였다. 이렇게 선출인다[조선최고인민회의]가 월북하 참석개최되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한의헌법을 채택하였다.의 헌법에 의거하여 태극기 대신 인공기가 사용되고 애국가가 사실상의 국가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였다.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고 박헌영 홍명희 김책이 부수상으로 하였다. 이 정권의 내각과 인민회의, 당, 군의 인사들을 살펴보면 김일성의 만주파가 주도적 역할을 하되 남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5도 행정국의 기능을 계승하게 되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최고 집행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임시법령을 제정하고 공포할 권한을 함께 가지고 있는 기관이었다. 소련점령군 당국은 김일성을 통치자로 만드는 작업과 함께, 1946년 11월에 북한의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토록 하고, 1947년 2월에는 면?리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였다.선거를 통해 도?시?군 인민위원회를 개최, 최고입법기관으로서 북조선인민회의 설치를 결의하고,1947년 2월 21일 북조선 인민회의를 통해 '북조선 인민위원회 가 공식 출범하였다.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1948년 4월 29일 북조선 인민회의는 특별회의를 통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승인했다.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9월 2일부터 9월 10일까지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에서 헌법을 채택(9. 8)한 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을 승인함으로써 소련의 위성국이 한반도 북쪽에 탄생하게 되었다. 정권수립 이후 1949년 6월 24일 남로당과 북로당 제1차 전원합동회의를 개최하여 합당을 함으로써 오늘날 북한의「조선로동당」이 창당되었고,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선출되었다.(2) 남한 단독정부 수립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준비한국 원조안의 미 의회 상정, 미소공위의 결렬, 대규모 좌익검거, 한국문제의 4개국 회담 회부제안 및 유엔으로의 최종 이관 등 1947년 후반부의 숨가쁜 사태진전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안은 구체화?현실화되어갔다. 통일정부 수립이 미?소간의 긴밀한 협조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소의 협조가 결렬되고 좌익의 검거로 이 점이 분명해 졌을 때 분단정부수립의 가능성은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다.이승만은 자신의 미국 내 로비집단을 통하여 미 국무부내에서의 사태진전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7월에 이르러서는 분단정부 수립이 미국의 거의 공식적인 목표라는 것까지도 파다.
러시아의 대 한국 외교정책: 옐친시기를 중심으로1. 서론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 양국의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이래로 양국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소련체제가 완전히 붕괴한 후 한국과 러시아 간에는 양국 경제의 상호보안성 등 양자관계 발전을 촉진시키는 긍정적 요인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러시아의 정치, 경제상황, 북한요인, 정세 등의 여러 제약요인으로 인해 격변기를 겪어왔다. 러시아연방 출범 이후 옐친과 푸틴 그리고 현재 메드베제프 대통령까지, 모두 3명의 통치자가 등장하였고 외교 노선에도 소연방 시기와 달리 줄곧 변화가 있었으며 신생 러시아의 새로운 전략적 이익을 가져다줄 외교노선을 수립하기 위한 고심은 계속되어왔다. 그러한 격변의 과정 속에서 주변국에 속하는 한국도 러시아에 있어선 수정하고 보완해야 할 중요한 외교관계를 가지는 국가였다. 특히 소련해체 이후 초기에 심각한 경제적 상황을 지속해오던 러시아로서는 한국과의 경제적 실리 와 새로운 동북아국가들 내에서의 질서에 기반한 외교노선 수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특히 옐친 집권 2기 후기에 자리 잡은 대 한반도 균형정책은 뒤에 이어지는 정권에 있어서도 계속 이어지는 노선이기 때문에 현재 한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적 상황을 고찰하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소련해체 후 옐친의 정책노선을 살펴보고 옐친시기의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외교 정책을 중심적으로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2. 본론1) 옐친시대의 외교정책옐친시대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크게 3단계의 진전과정을 거쳤다. 첫 번째 1단계(1991-1994)는 러시아 연방 출범 초기이며 경제발전전략을 최우선으로 하던 시기이다. 이당시를 주름 잡던 세력은 신 개혁세력들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서구적 가치관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국가정체성을 유럽에 일치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철저히 유럽 지향적 성격의 친서방적 외교성향에 치우쳤던 기간이다. 이 시기 서구적 개혁였던 아시아 국가들과의 독자적인 관계 확대를 통해 국익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펼쳐나가고자 했다.제3단계(1996-1999)에는 전방위 강대국노선을 핵심으로 삼은 시기였다. 2단계에서 펼쳤던 러시아 지도부의 의도와는 달리 동-서간 대외정책의 불균형을 수정하여 실리적 국익 극대화를 목표했던 지정학적 실용주의 노선도 러시아 외교의 취약성을 벗어나게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오히려 동과 서 모두로부터 고립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서 국제관계의 확장을 통한 다변화된 자율적 강대국 외교전략, 즉 전방위 강대국노선을 대외정책의 핵심주제로 삼았던 기간이다.2) 옐친시기 러시아의 대한반도 외교 정책앞서 언급한 옐친집권시기의 외교정책노선의 변화는 한반도와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와 한국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처음 1기는 1991년 소련이 완전히 해체한 후부터 1994년까지를 말하며 옐친의 집권 1기 전반기이다. 이 시기는 한국중시정책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두 번째 시기는 집권 1기의 후반을 나타내며 친 한국 정책의 사실상 실패와 대 한반도 정책의 수정으로 그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옐친의 집권 2기이며 한국·북한 균형정책의 성격을 지닌다. 이 글에선 옐친 집권1기와 1기 후기·2기 이렇게 두 시기로 분류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① 옐친의 집권 1기- 관계정상화의 시기 (1991-1994)1990년 한국과 소련의 수교 이후 러시아는 한국으로부터 대규모 투자와 경제지원을 기대하고 남한중심 정책을 수행하였다. 이어 양국정상의 상호방문을 통하여 외교 및 국가관계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이 시기의 전반에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롭게 출범한 러시아의 외교정책 목적과 인식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따라서 러시아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기보다는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세계질서 대두와 급격한 변동의 국문화되었으며’를북한에 공격용 무기 공급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그는 1983년 사할린 상껵로 갈피격러 KE-007기의 블랙박스- 나중에 아무내용이 없는 공박스임이 밝혀짐-를 전달했고, 북한조약러 개발을 지지하지 않L을 천횅의 시기1993년 북한조약러확산 금지조약(NP왔이 탈퇴 이후에는 한국조약북한에 대한 관계적 제궬적 력에 한국과 서방조약입장에 동챰 냉각협력하였으며’를이어 행해진 유엔 안보리 밝혀북 결의에도 찬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한반도 정책을 재평가하고 남한중심 정책으로부터 남북한 관계에서 균형적 입장을 취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한반도 정책의 의도를 살펴보면, 러시아는 냉전시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계승국으로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원했고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계속적으로 하며 그 사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급격한 체제 전환의 시기에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국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한국·북한과 각각의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 러시아는 미국처럼 한반도에 대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지역 참여와 협력 등을 통해 지역 강대국으로서의 예전처럼 영향력을 가지고 중요한 역할을 하길 원했다.)이 당시 러시아의 대 한반도 정책의 의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러시아는 안보·군사적 관점에서 냉전의 해체로 북한과의 이념적·군사적 관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개혁, 민주화와 시장화를 지향하는 러시아에게 북한은 오히려 이질감의 대상이었다. 둘째로는 근본적으로 러시아의 경제개혁에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원했다. 반면, 북한은 러시아에게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러시아의 의도적인 변화의지는 곧 다시 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90년 9월30일 한국과 소련의 수교 이후 러시아 정부는 대남북한 관계에서 한국 중심의 외교를 수행하였는데, 장애 요인들의 작용으로 한때는 급속하게 한·러관계가 냉각되는 시기도 맞이했다. 이 당시 나타난 대 한반도에 대한 외교정책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첫째, 1기 후반·2기에는 비록 옐친의 초기 정권이 한반도에서 보다 많은 러시아의 정치·경제·안보적 이익을 위하여 ‘적극적인 동반자 정책’을 시도하였지만, 일정 시기가 지난 후 러시아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수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러시아 내에서는 고르바초프 이후로 비교적 일관적으로 추진되어오고 있었던 친 서방정책에도 괄목할 만한 결실을 얻지 못해 반감이 날로 높아져 갔으며, 1993년 12월 선거에서 보수파가 일정 정도 득세를 하여 목소리는 내기 시작했는데, 1995년 12월 두마(하원) 선거에서 보수파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고 러시아 지도부에 입성함으로써, 그들의 의견이 옐친 정권이 추구하던 외교 정책에 상당부분 반영되었다. 보수당의 성장은 옐친 정권과 그의 정책에 대한 주요한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압력이 되었다. 보수파의 득세로 러시아의 기득권층 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되기 시작했다. 보수파 사이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한국과의 관계를 지속시킬 필요는 없다는 회의론이 등장함과 동시에 1994년 상당히 위험한 수준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북한 핵 긴장으로 인해 러시아는 친한국적인 정책의 빈도를 다소 줄이고, 한반도 내에서의 균형을 꾀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또한 1996년 러시아의 첫 대선을 앞두고 옐친 정부는 과거 냉전 시기 같은 진영에 있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을 여전히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대내적 요구와 현실이 결합하여 남한관계 개선 당시 북한을 외면했던 태도를 고쳐 전보다 북한에 대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둘째는 차관문제는 양국관의 관계를 냉각시키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는 한국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시도했지만, 그 성과가 양국이 당초 기대했던 당초 러시아와 적극적으로 수교를 원했던 것은, 북한과 친교를 맺고 있는 국가를 통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러시아보다 오히려 중국이 이러한 점을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주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한·중간 교류가 활발해졌고 서로 상대 국가에 경제, 정치, 안보 등 여러 분야에 있어서 혜택을 주고받았다. 이는 경제적 관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러간 무역규모와 한·중간 무역규모의 차이를 보면 알 수가 있는데, 한·중 교역은 매년 50% 이상의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준 반면, 러시아는 이에 5할에도 못 미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결국 외교 정책을 통해 신생 러시아의 국익 증대를 꾀하던 옐친 정부와 보수파 입장에서는 이런 한국에 대한 호혜적인 혜택 제공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친한국 정책으로 한반도 균형을 꾀하던 원론적인 목표가 흔들림을 느꼈다. 러시아는 한국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미·중·일과 더불어 한반도 문제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길 희망했으나, 한국은 중국에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영향력은 상당히 감소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넷째로 러시아가 태도를 바꾸는데 작용한 큰 이유로 북한 핵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소외로 인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축소,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미국과 일본의 대북 영향력 증대 가능성,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러시아를 배제한 4자회담에서 지역 강대국으로 한반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희망했던 러시아로선 실망감과 크게는 배신감까지 느끼게 했던 것이다. 4자회담에 대한 러시아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양국간의 실질협력은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는 답보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1999년 12월 말 옐친 대통령이 조기 사임할 때까지도 한·러 및 북·러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4월 한국
조선의 국권상실 원인목차Ⅰ. 서론Ⅱ. 본론1. 성리학적 정치 이념의 정치사회적 의미2. 국가의식의 결핍3. 대외인식의 한계4. 국가권력의 이중적 분해5. 도학적 정치이념Ⅲ. 결론Ⅰ. 서론19세기 말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할 시점에서 우리의 조선은 붕괴되어 갔다. 비운의 황제 고종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국민국가로 탈부꿈하려는 노력을 전개했지만 국운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이미 늦은 때였다. 그렇다면 조선의 국운이 그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되었기에 조선은 국권상실의 비운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는가?지금까지 적지 않은 연구들이 조선의 국권상실 원인에 대해 설명해왔으며, 이는 크게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외인론의 핵심은 조선사회에 근대적 발전가능성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내인론은 조선 지배엘리트의 이념적 정치성과 정책적 무능함에서 그것이 대외정책적 차원이든 국내 통치적 차원이든 조선 붕괴의 원인을 찾는다.이 글에서는 조선이 근대 국민국가로 발돋움하지 못하고 국권을 상실하게 원인으로 성리학적 정치이념 그리고 국가 의식의 결핍, 대외인식의 한계 그리고 국가권력의 이중적 분해와 도학적 정치이념으로 보고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성리학적 정치이념조선 초 지배엘리트의 의식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성리학은 17세기 중반 이후 정교한 체계를 갖춘 조선사회의 국가이념으로 발전하면서 지배엘리트의 정치의식과 행위를 규정하는 이념적·실천적 준거로 작용하게 되었다. 성리학적 정치이념이 조선의 국가이념으로 정착되는 시기를 17세기 중반으로 설정하는 것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성리학의 도학적 정치이념을 내면화한 사림이 정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향교, 향약, 서원 등의 사회교육제도를 통해 사대부와 일반서민들의 일상적 삶에까지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간략하게 정의 내릴 수가 있는데 서인 천도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하늘이 비를 뿌려 대지를 풍요롭게 만들 듯이 위로부터 덕을 실천하고 아래 백성들이 이를 보고 교화됨으로써 사회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예치는 천도와 합치하는 차서윤리를 외적으로 드러냄으로 인간이 지켜야할 규범을 통한 통치를 의미하며 약소국이 강대국에 사대의 예를 다하는 것도 이에 속하고 실용주의 노선이라 할 수 있다.17세기 중반 성리학적 정치이념의 완성과 국가이념으로서의 내면화는 20세기 초반 국권상실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대주의 대외인식과 국가무능에 대한 인식론적 기원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고 있다.2. 국가의식의 결핍성리학적 정치이념이 국가이념으로 안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권력구조의 성격을 규제하는 정치원리로서 작용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대외인식과 정책을 제어하는 이념적 지침으로 기능했다. 통치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적 정치이념은 조선의 국권상실의 주원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선의 통치엘리트가 사대주의적 외교론에 함몰되어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관계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거나 국가통치에 있어 무능했기 때문이다. 국가행위의 측면에서 볼 때, 성리학적 정치이념은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현실적 효율성, 즉 국가동원능력을 극도로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이 이미 이러한 사상에 물이들어 있어 자아준거적 국가의식을 갖지 못했다. 근대국민국가들간의 식민지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7세기, 조선의 국가의식은 채 발아조차 되지 못한 상태에 처해 있었으며, 근대적 국가의식 마저도 구조적으로 제약되었던 것이다.3. 대외인식의 한계조선 지배엘리트의 대외정책의 성격과 내용을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 우선 그들의 상황인식과 정책, 그리고 인식론적 차원의 세계관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시적 차원에서 주어진 시점의 상황인식과 대응전략이 중요하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상황인식과 대응전략의 마련 역시 정책결정자의 세계관과 대외관계 인식에 의해 규정받기 때문이다. 기존의 많은 연구들층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현실정치에서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받아들이면서 국체를 보존코자 하였다. 이후 북벌론이 제기되었지만 구체적 추진영역에 있어서는 관념적인 도학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청과의 사대관계 수립은 ‘외교적 방식’으로 국가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대주의적 국제관계인식은 외세가 조선의 주권을 넘나보던 한말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양왜일체론을 내세우며 결연히 의병운동을 일으킨 위정척살파를 제외한다면, 한말의 집권파와 개화파는 기본적으로 사대외교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집권파의 동도서기론과 개화파의 근대화론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대외정책적 차원에서 보면 국체의 보존을 위해 외세에 의탁하는 무기력한 외교주의 방식임에는 차이가 없었다.문제가 되는 것은, 사대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최소한의 물리력조차 갖지 못한 채 외교주의 방식에 의탁하여 외부의 압력을 회피하려고 했던 데에 있다. 조선의 국가물리력은 극히 미약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변방에서 일어나는 수백 명 규모의 폭동마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이나 청에 저항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일이라는 것을 조선시대 엘리트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대국의 물리적 압력을 사대관계의 재조정을 통하여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이러한 현상은 조선 지배엘리트의 정치적 정체성이 세계적 차원의 중화와 집단적 차원의 문벌로 양극분화된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발생·심화 되었다. 대외정책의 패턴이 군사적 대응이든 사대적 외교이든 자아준거적 국가의식이 존재할 때, 대외정책에 있어 자주성은 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사대주의 외교는 국권상실의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 국가권력의 이중적 분해국가행위 차원에서 국가존립 문제를 생각할 때, 조선이 하나의 국가로서 대외적 압력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국가능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한말국가상실의 결정적 이유가 된다. 조선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서북 무인세력과 혁신 사대부 계층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개국초기부터 왕권과 신권과의 대립이 전개되었다. 결국 이방원의 왕권세력이 정도전 등 신권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절대적 군주로서 왕권강화의 기틀을 잡았지만 유교관료제 국가라는 체제적 성격으로 인해 전제적 패권행사가 어려웠다. 전제군주로서 조선군왕의 권력도 양반 관료제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료사대부의 충성과 협력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조선 같은 봉건 관료제 국가에서 실질적으로 인사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는 권력의 행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조선은 군왕의 전제적 권한 아래 중앙과 지방의 관료기구에 의해 운영·관리되는 체제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상당부분 제약되어 있었고 대신들이 천거권을 통해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였다.정책결정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권한 분리가 발견된다. 태조나 세조에 의해 군왕이 직접 정무를 챙기는 6조직계제를 실시한 적도 있지만, 16세기 중반 중종반정 이후 조선의 정무는 의정부 또는 비변사를 중심으로 한 서사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서사제는 대신중심의 합의체적 정무수행방식으로, 신료들이 특정 정책이나 대처방안을 미리 마련한 다음, 왕에게 보고하여 시행여부에 대한 최종판단을 요청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서 신료들은 대신을 중심으로 정책 건의 및 조정권을 행사했으며, 군왕은 그 시행 여부를 승인하는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 하에서 군왕의 이해와 신료들의 이해는 일치하지 않는 때가 많았다. 왕실과 양반사대부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나 상호경쟁적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권력 또한 절충적으로 분점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오아실을 비롯한 지배층 내부의 권력분점은 조선사회 민주적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국가동원능력의 해체로 귀결되었다.이 체제는 17세 중반 숙종연간의 경신대출적 이후 노론계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고착화되는데, 여기에을 독점하면서 신료들 사이의 경쟁기능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갈수록 당파간 경쟁은 치열해져 갔고 각기 지방 근거지를 중심으로 정치력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양반지주들은 지방 수령이나 향리집단과 결탁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켜 갔으며 수령들은 양반지주세력과 연합하여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에만 급급했다. 중앙권력이 지방정치의 이러한 행태를 방관했던 것은 이들 양반지주계층의 이해관계를 보호해 주는 것이 사회질서유지와 체제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양란이후 국가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재정위기에 시달렸기 때문에 지방세력을 통제할 힘이 없었던 이유도 있다.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이들 지방관료들의 대부분이 부정한 방식으로 중앙의 권력가문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관리는 부정부패의 먹이사슬을 통해 권력가문과 연결되었고 그들에 의해 조장·방조되었다. 이들 부패한 탐관오리에 대한 어떠한 통제장치도 작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권력의 자율성은 강화되었고 중앙과 지방간의 권력분해는 이중적으로 심화되어갔다. 그리하여 당시 조선의 관료기구는 사실상 국가적 차원의 약탈적 수취기구로 존재했으며, 수탈된 자원은 국고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일선 관리들의 사적 축적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국가동원능력을 극도로 취약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조선에 있어 국가권력의 이중적 분해현상은 조선말기 더욱 심각해졌으며, 한말 시기 대외적 압력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능력 조차 확보할 수 없는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조와 대원군에 의한 왕권강화와 권력집중 노력이 전개되었지만, 기존의 권력구조에서 상당한 정치경제적 자율성을 누려왔던 지배층의 저항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이념적 차원에서나 권력구조적 차원에서 중앙권력의 강화는 수용되기 어려운 요구가 되어버린 것이다.5. 도학적 정치이념조선 군왕들이 신료와 사림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그저 상징적 왕도로 전락하게 된 원인에 대한 의문이 들 것이다. 조선의 군왕도 하나의 정치행위자란 관점에서 볼
1. 서론[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제목의 이 책의 저자는 인문 분야를 공부한다면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인 그는 자신의 학문분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정치, 사회 분야에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이다. 수십 년을 정부의 잘못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집회에서 연설을 하거나 글들을 써오면서 진정한 지식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 세계의, 특히 강대국인 미국 정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끈끈하게 연결고리를 가지고 이익을 챙기는 기업인들과 그러한 권력기반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보단 지지를 보내는 현대의 많은 지식인들에 대해 쓴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리고 정치라는 그럴듯하고 합법적인 것 같은 도구를 가지고 기득권층의 이익을 증대시키려고 선전을 하며 결국 국민들은 안타깝게도 그 선전에 속고 있음을 주장한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촘스키를 통한 ‘지적인 자기 방어법- 왜곡된 선전에 세뇌당하지 않을 최상의 방책’을 전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약 2시간 가량의 인터뷰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며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한 촘스키의 대답에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분야를 시원하게 말해주고 있다.2. 본론촘스키가 말하는 지식인과 언론인터뷰 내용 중 촘스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많이 언급을 한다. 촘스키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정의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식인들은 무지한 민중들보다 소위 더 교육받고 계몽된 사람들의 계층이므로 자신의 지식을 제대로 바르게 민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는 또한 지식인을 마음가짐으로 정의하고, 정보를 수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내린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말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지식인도 있다는 뜻도 된다. 즉 촘스키는 많은 지식인들이 수천년 전부터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로 엘살바도르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상극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에선 저명한 연구소 소장을 포함한 6명의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이 살해당했는데 미국 땅에서 훈련받은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이슈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체코에서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하벨이라는 인물이 투옥 되었을 때는 세상이 떠들썩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촘스키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많은 지식인들은 글을 씀에 있어서 어려운 단어들을 골라 쓰며 대중에게 거리감을 주면서 특권층에 군림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글이나 강연에서 알맹이는 찾아보기 힘들며 허세일 뿐이다. 그들은 쉬운말로 풀어 설명함으로써 대중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이런 흐름을 꿰뚫어보았을 것이다. g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종속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왜냐면 그것이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이다.언론 역할도 마찬가지다. 촘스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굵직굵직한 사건과 사고들은 언론과 정치의 연계를 통해서 걸러진 내용이 전해지는 것이며 일부 정부에 위해가 될 수 있는 사건들은 보도조차 하지 않는 것을 촘스키는 많은 예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언론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작된 동의라는 말은 사실은 아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를 둘러써고 서로가 동의하는 조작을 말하는 것이다. 그 예로 그가 들어준 예는 리비아 폭격 사태이다. 1986년 4월 16일, 레이건은 트리폴리 공습을 명령했는데 이곳은 CNN 지국이 없었음에도 폭격되는 장면을 마치 기다린 듯이 생생히 담아 전 세계에 전달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말하는 진실은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였고 완벽하게 연출된 선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선전에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노출되어서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 폭력에 언론이 어느정도 순응하고 있는 가를 보여 준 단적인 사례인 것이다.촘스키는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광고에 의존해야 하므로 제도적인 근본적 한계를 가지며 이런 한계 안에서 언론은 단지 시청자를 민간 기업에게 파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언론이나 매체가 다 자신들의 사명을 저버렸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고 말한다. 또한 대중은 인터넷이나 매일매일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매체를 통한 정보 획득에 있어서 무비판적으로 의식이 노출되어 있으며 얕은 피상적 수준의 커뮤니케이션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촘스키가 말하는 정치촘스키는 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좋은 체제이며 바람직한 체제라고 굳게 믿는다. 다만 그는 이러한 체제가 일부 민주주의를 제한하려 하는 힘에 의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특히 이미 널리 알려진 미국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이다. 국민은 몇 년에 한번씩 투표만 할뿐 그 밖에 시간은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꺼주는 것이 바람직하며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국가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상황도 미국과 비슷하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들은 어떻게 해서든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리려고 노력하며 대중의 결집된 힘이 모여 저항운동을 벌이는 것에 대해 늘 노심초사한다. 그가 예로 제시한 삼각위원회는 과도한 민주주의를 지양하고 위기라고 단정하면서 극복을 위한 절제된 민주주의를 역설했다고 말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젊은층을 교화하여 순종의 미덕을 심어줘야 함을 지적했다고 한다.그에 의하면 미국의 유명한 명언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틀은 이제 의미가 없는 허울좋은 껍데기일 뿐이다. 지배계층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대중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뇌시키려 하며 그 방법은 가면 갈수록 교묘하고 치밀해지고 있다. 그 예로 군부에 대한 특별대우를 들 수 있다.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지배계급은 공포심을 조장해서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면서 의지할 곳은 정부라는 생각을 심는다. 이런 식으로 국민의 심리까지 조종함으로서 정부는 국민들의 손과보산업이 미국과 영국에서 월등히 발전한 점도 여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익당들은 끊임없이 위기감을 적절히 이용하여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줌으로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들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다.정부가 선전효과를 이용할 땐 국민에게 무력한 존재이고 세상에서 단절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엘리트계급이 우려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대중은 각자의 삶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저 피상적이고 순간적인 유행이나 흥밋거리에 집중하게 될 것이고 정치에는 점차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엘리트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정부의 국민에 대한 위선적인 행위는 미국의 역사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촘스키가 미국인이기도 하지만 미국이라는 자유주의를 최고의 이상으로 꼽는 이 나라는 수도 없이 많은 만행을 저질러 왔고 이것을 국민들에게 숨기거나 왜곡된 사실을 알려왔다. 베트남 전쟁, 소말리아 사태에서 미국이 독재자를 지원한 일이나, 코소보 사태에서 미국이 개입할 경우 상황이 악화될 것을 알면서도 개입한 사건,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인종청소의 문제 등 많은 부분에서 미국은 겉으로는 그럴듯한 이유와 명분을 들며 해결사 내지는 중재자의 역할이라 미화시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적인 이유로는 정부가 군수업체의 로비로 대외정책을 결정한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국민들에게도 널리 인식되고 있는 사실이다.그에 의하면 노동조합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왔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단결할 수 있는 집단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언론이 앞장서서 그들의 조합을 매도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이 계급간의 갈등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져 왔고 특정집단의 이해 관계, 지배관계, 사회의 계층구조, 의사 결정의 단계 등하다고순이 계급간의 갈등을 낳는다고 생각터 지금까렇다고 까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옹호자는 아니 지금까는 필요하다면 받아들일 점은 수용본 지금혁명급간의 서는 다국적 기업이나 잘못된 길이 단고 있는 정부의 횡포급간의항하는 실천적인 의지는 중요호자는강조터 지금국민들에게서 이런 생각을 떨쳐 내려는 다양한 정부의 선전에 넘어가서는 안되며 의식있는 국민으로서 단결할 때는 해 옹한다는 것이다. 까렇다고해서 내란이 정당화 된다는 법칙은 없다. 왜냐하면 초기 미국의 정착 당시 내란은 미국인들에게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이었으나 인디언과 흑인에게는 끔찍한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즉 건설적인 방향을 룴듯이 듯 하나 파괴적인 방향으로 운영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정치체제와 내란을 나계를 규정해줄 선험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 갈등을국민들은 값비싼간의가를 치러 옹호자는알기 때문에 쉽게 혁명세력으로 합을하질 못 갈등을기존 질서를 바꾸는 데엔 큰다고신과 의가지 따르고 그에 맞는 각오가 있어 옹한다. 이것은 지식인들에게도 규정되는 사항이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을 소리를 신경 쓰지 말아 옹할 것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치체제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어 옹할 것이다. 까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혼자의 도한다아닌 조직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들의 조힘은 25년 전부터 미국에서 들의 조압력이 하원에 발휘되기 시작하였으며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권다.으로도 설명이 혠명세력으로 합또한 조직화된 들의 조합단과 노력으로, 여성의 인권이 상당히 신장된 것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촘스키가 말하는 현대의 자본주의촘스키가 이 인터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오늘날 권력의 중심에 서있는 부자들 즉 다국적 기업에 있다. 최강대국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과 국제기관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 강력하고 전제적인 힘을 지닌 소수 집단이 초강대국을 등에 업고, 국가의 정책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일부 경제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그가 비판 하고 있는 기업은 세계무역기구이다. 그 이유는 그 기구의 목표가 기업의 경영자들에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