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와 운동의 결합! 댄스스포츠!?댄스스포츠의 정의17세기 유럽의 궁중무도회에서 사교를 목적으로 남녀가 서로 원형을 이루고 파트너를 바꾸어 추는 춤인 사교댄스(social dance)에서 시작하여 볼룸댄스(ballroom dance)로 불려 졌다. 그 후, 각종 국제경기대회에서 경기댄스로 발전하면서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목표로 창설된 ICAD(현재, 국제댄스스포츠연맹; IDSF)가 1995년 IOC에 가입이 되면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고, 댄스스포츠라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다.세계 각 나라에서는 그 나라마다 민속무용이 있으나 댄스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도법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춤으로 남녀가 한 쌍을 이루어서 음악의 리듬에 맞추는 가운데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예술의 미적 가치를 창조하는 스포츠라고 정의할 수 있다.우리나라에서 Sports Dance라 불려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정식명칭은 Dance Sport이다. 댄스스포츠를 통한 레크리에이션은 연령과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휴식 및 개선된 사회생활과 더불어 많은 기쁨과 활력을 제공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에너지의 재충전을 시켜준다. 긴장과 스트레스가 많고 오래 앉아있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가벼운 운동과 다양한 오락들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는데 이상적인 방법으로서 댄스스포츠가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댄스스포츠는 사교적 목적보다는 신체단련을 위한 운동이라는 측면에 더욱 비중을 두어 생활체육의 한 분야로 대학에서의 교양과목과 각급 학교의 특별활동, 문화센터나 사회교육원 등에서의 강좌로 채택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다.?댄스스포츠의 역사댄스스포츠는 역사적으로 원시적인 구애(求愛)의 춤이나 사교적인 종류의 춤에서 발달한 것으로 광의(廣義)로는 포크 댄스나 종교적 또는 의식적이 아닌 원시 댄스스포츠, 궁정(宮廷) 댄스 등도 포함되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이 종류의 춤을 중세부터 추기 시작하였다. 파반 ·볼타 ·쿠랑트 ·미뉴에트 등은 17세기 중엽부터함시키기 위한 여러 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관계 당국과 그 당시 유일한 허가단체였던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에 대한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특히, 프로 무도인들은 한국무도교육협회가 ICAD와 ICBD 모두에 가입한 사실에 대해서 큰 불만을 표출하였다. 결국, 한국무도교육협회 김종기 회장은 아마추어 회원들을 중심으로 1990년 2월 한국 아마추어 댄스 스포츠협회 (Korea Amateur Sport Dance Committee: KASDC)를 조직하고, 유우봉 회장이 대표가 되어 ICAD에 가입하였다.반면, 프로 무도인들은 1990년 5월 한국무도평의회 (Korea National Council of Ballroom Dancing)를 조직하고 천정태 회장을 대표로 ICBD에 가입하였다. 이 중 현재 한국 댄스 스포츠 연합회(Dance Sport Federation of Korea) 박효 회장부부는 유일한 모던 챔피언이며 유력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은퇴를 선언했지만 본인들의 자녀를 직접 선수로 키워 한국 아마츄어선수권 결승 1위를 계승시키고 있으며 미국 네바다주 아마추어 선수권 결승 진출(1997년 8월), 미까사배(전일본) 스포츠댄스 선수권대회 월드오픈 결승진출권을 따내는 등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사단법인 한국무도(댄스스포츠)교육협회 박영택 회장은 한국 최초의 라틴 챔피언으로 후계자 양성에 유력한 일인자로 알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는 1991년 풍속영업규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다음 무도계의 지원 육성보다는 무도학원 및 무도장의 설립과 운영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무도인들은 프로와 아마추어 모두 댄스 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 KASDC는 1996년 IDSF 제3회아시아태평양지역 무도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아시아 댄스 스포츠연맹의 창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KASDC는 서울 총회에서 단체의 명칭을 한국의 특유한 바운스와 전후의 힙 무브먼트(Hip Movement)를 가미한 피겨와 내츄럴 롤(Roll)이나 리버스 턴 그리고 프레이트(plait) 등의 매끈한 무브먼트를 바탕으로 한 포르투갈의 이질된 두 댄스가 혼합되어 발전하였다. 그것은 최초의 이민자로서 계속하여 브라질에 이주한 유럽의 포르투갈민의 춤이 후자인 것이고, 그 옛날 노예로서 수입된 아프리카 흑인들의 거친 바운스가 전자인 것이다. 브라질에서는 카톨릭교 4순절의 직전, 3일에서 1주일간에 걸친 '삼바 축제일'로 제정된 국·공일에 모든 브라질인들이 이 "삼바 대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브라질의 옛 수도인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가장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는 "리우 카니발"은 전 세계에서 이 "삼바 대축제"를 보고자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어 여기에 참가하고 또한 이를 배워서 돌아갈 정도로 유명한 댄스가 바로 브라질의 유일한 민속무용인 삼바 춤이다.삼바음악의 대부분은 이 리우시의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으며, 제일 처음으로 소개된 삼바음악의 대표작은 돈가(Donga)의 작곡인 펠로텔레폰(Peroteretone)이고 삼바어의 모태는 흑인여자란 잠바(zamba)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바는 20세기초에 세계적으로 유행을 하였으나 일단 잊혀졌다가 근래에 다시 유행하고 있는 것은 지구촌 사회화의 영향에 따른 해외관광 여행의 붐에 편승, 브라질의 "삼바 축제"에 많은 세계인의 참가가 그 원인이 아닐까 한다. 물론, 1923년에 개최되었든 국제무도강사들의 모임에서 이 삼바의 사교적 인기를 인정한 후 1960년에서 1970년까지 이의 학술적 이론정립을 위하여 노력한 영국의 무도연구가인 월터 레이드(Walter Laied)씨와 ISTD 개정기술 제정과 활발한 국제무도경기대회를 통한 보급사회에 힘입은 바 큼은 부인할 수 없다. 삼바도 역시 무도강사자격시험규정에 적응하여 그 자격시험을 실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무도강사자격시험에 포함되어 있다.그림 자이브▼자이브자이브란 재즈음악에 맞추어 추는 격렬한 춤을 말한다. 이 는 음이 "차차"이나 제1박의 1박자까지 연속적으로 마치 "차차차"로 들려서 우리는 흔히 이 춤을 "차차차"라고 한다.영국의 무도계에서 이 차차차의 발전을 위하여 표준 피겨의 전반적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세밀히 연구하고 검토하기를 1960년경에서 1970년경까지 무려 10여년의 세월을 거쳐, 드디어 1972년 10월 영국 ISTD가 심사위원의 공식적인 지도서 및 무도강사자격시험용의 참고서로서 출간하였다. 차차차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것과 무도강사자격시험 및 무도경기대회에서나 또는 메달 테스트에 사용하는 인터내셔널 스타일이 있다.차차차의 음악차차차 음악의 타임은 2/4. 4/4박자이며 시험이나 또는 무도경기대회에서의 표준템포는 1분간에 32-34소절의 속도로 연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식의 음악에서는 각각의 소절 사이에 매우 분명한 리듬의 연속음을 들을 수가 있다. 따라서 전체를 통해서 1, 2, 3, 4, 8, 1, 2, 3, 4, 8, 1 이라는 리듬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차차차를 출때에는 2, 3, 4, &, 1(박자가치는 1, 1, ½. 1/2, 1박자)의 리듬에 발의 동작을 맞추어서 연출하여야 한다.▼룸바룸바는 쿠바의 토인들로부터 시작한 민속무용이다. 룸바는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까지 오는 데는 실로 4세기의 세월이 흘렀으나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되어 온 것도 룸바가 아닐까 생각한다.카리브해의 쿠바 섬 원주민들에게는 일찍부터 이 섬의 특유한 음악이 있었다. 크고 작은 온갖 타악기로써 이루어진 흑인들의 복잡한 리듬과 스페인 사람들의 정열적인 멜로디가 융합하여 연주한 이상야릇하고도 매혹적인 것이 룸바 음악이다. 룸바음악이 영국에 처음소개된 것이 "땅콩장수"라는 음악이었고 이와 함께 룸바의 도법이 소개된 것은 1931년 무렵이다. 이 후 영국무도강사협회의 무도연구가들이 이 새로운 댄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여 오늘의 모양을 갖춘 것이 1948년 경 이었으며 그 후 1950년이 지나서 영국의 라틴아메리카댄스의파소도블레는 투우사가 출장하여 소와 싸우는 동작으로 시종하고 있으며, 투우와 투우사의 긴장된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절묘하고 드라마틱한 연기는 우리를 마타도어와 함께 희열감을 느끼게 하고도 남는다. 이 음악이 갖는 박진감과 함께 연출하는 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반인에게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파소도블레는 스페인에서 발생하였지만 그것에 관계없이 피겨의 명칭은 프랑스어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파소도블레는 영국 ISTD에서 10여년 이상의 세월을 거쳐서 세밀한 연구와 점검 끝에 무도강사자격시험의 정식과목으로 확정하여 그 요강을 1973년 3월에 단행본으로 출판하였으며, 무도경기대회 및 메달테스트에서도 채택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강사자격시험규정에 포함하고 있다.▶모던댄스▼왈츠왈츠는 프랑스의 보르타(Volta)란 춤에서 기원하였다는 학설이 있으며 1178년 11월 9일 파리에서 처음 추어졌다고 문헌에 남아 있으므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듯 하나, 실제로 파리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보르타란 원래가 「돌다」라는 뜻으로서 그 때의 춤은 원무(Round Dance)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의 어원은 프랑스의 봐르세(Volse), 독일의 왈저(Walser), 이태리의 왈즈(Walz), 영국의 왈츠(Waltz)등 모두가 빙빙돈다는 뜻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왈츠가 유럽의 전 지역에서 전성기를 이루게 된 것은 슈베르트나 스트라우스등 그 외의 많은 음악 대가들이 불멸의 왈츠 명곡들을 작곡한 것에 있다. 19세기 무렵부터 이러한 빠른 템포(1분간 60소절)의 왈츠는 라운드 턴(Round Turn : 360도의 회전)을 사용하는 로타리 왈츠(Rotary Waltz)였다. 19세기 중엽에는 요한 스트라우스 풍의 비엔나왈츠(Vienna Waltz)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에서 시작하여 대중화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에선 보스톤왈츠(Boston Waltz)란 것이 발생하여 많은 유행을 하.
이 글은 정치에 있어서 정조가 취했던 일련의 논리와 그의 정치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치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조는 현실정치에서 대단히 논쟁적 주제이면서 정치가들이 특정 정치적 행위나 정책을 옹호하거나 비판할 때 사용했던 이론적 무기로서 권도론을 사용했다.임금도 신하와 마찬가지로 삼강과 정치윤리인 구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신하들에게 정치세계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국왕의 폭넓은 통치권을 주장했고, 사도세자 문제와 토역의 의리에 휩쓸려 희생되는 종친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경도가 아닌 권도를 강조했다.그리고 춘추의 의리를 재해석하여 그것의 핵심이 존왕론에 있다 하였고, 권도를 발휘할 수 있는 주체는 국왕 자신뿐이고 신하는 충성의 의리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도는 그것을 발휘하는 주체의 인격성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만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에 정조의 공적 태도에 대한 의구심은 국왕의 정당성에 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개혁정책 추진에도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했다.정조는 권도론 이외에도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가 바로잡히고, 시비의 판명자이자 정치세력의 중재자로서 국왕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성왕의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고 붕당이 공론을 형성한다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자 탕평정치론을 폈다. 그러나 탕평정치는 다종다양한 정치세력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언로를 활짝 열어 공론의 정치를 활성화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정조는 군사의 위상을 적극적인 존재로 재해석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비판이 용납되지 않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전환시킴으로써 국왕의 위상을 절대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정치를 기능적인 것으로만 간주하였고, 비판과 변화에 취약하며 구성원들의 책임의식이 실종된다는 문제점을 가져왔다. 그리고 정조는 천주교 문제에 있어서 공론정치 차원에서 진지하게 개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급히 차단하고 순전히 정치기술적 차원에서 대응하였다.이러한 정치가정조를 평가하자면 왕권강화와 공론정치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하지만 끝내 두 마리 다 잡지 못했던 정치가라고 말하고 싶다. 정조가 행했던 일련의 정책과 정당성의 근거로서 제시한 것들을 살펴보면 모두 왕권강화의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집권초기 불안했던 왕권과 당파들 간의 분쟁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경도론에 입각한 원리원칙에 따른 문제 해결보다 권도론으로서 유연한 태도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문제 해결을 했다. 그리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통합된 정치체계를 구현하기 위해서 탕평론을 펴고, 군사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