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 소비 행위에 대한 나의 견해과시적 소비 [誇示的消費, conspicuous consumption]-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소비.자기가 특정한 사회계급, 특히 상류계급이나 보다 특수한 유한계급(有閑階級)에 속해 있는 것을 상징(象徵)하기 위해서 재화나 서비스를 아낌없이, 또한 헛되게 소비하는 행위를 말한다. T.B.베블런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현재의 우리는 엄청난 소비 문화의 공간에서 살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심히 벌고 최대한 아끼는 문화가 칭찬받았던 얼마 전까지의 사회분위기는 이제 아주 진부한 협의의 경제 진리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물질의 원활한 순환을 위한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야기되는 문제가 바로 과시적 소비 행태이다. 지나친 소비행위로 인한 주변 사회의 상대적 빈곤감을 불러옴으로서 사회 계층적 이질화를 발생시키고 있다.한국은 전쟁이라는 극한 악재를 극복하고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일궈낸 특수한 나라이다. 그러한 급속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근검 절약이라는 국민적 단결력이 숨어있다. 절대적 절약과 검소함이 지금의 경제 규모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한 배고픔이 80년대 이후의 2세대들에게 보상적 소비심리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결론적으로 과시적 소비행태로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청소년 및 젊은 층까지 유지되고 있다.실제로 나라의 경제는 어렵지만 해마다 백화점의 명품관 소비는 느는 추세이고 중산층의 사람들까지도 돈을 모아서 명품 하나 사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명품을 구입하고는 그 안에서 자신은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고 특별하다고 느낀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짝퉁 제품 소비문화 역시 과시소비의 적당한 예가 될 것이다. 짝퉁 제품이라도 명품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모든 소비재들의 브랜드화를 지향하는 젊은 층의 성향은 경제적 기반이 미약한 빈곤층에게는 극심한 소외감을 야기시키고 그들이 경제적 빈곤을 해소했을 때 또 다시 보상적 소비행위, 즉 과시 소비를 하게 하는 심리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현대의 개인주의적 사회 하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소비는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사회통합적 차원에서 생각해 봤을 때 한 나라의 구조를 경제력이라는 일편의 가치로 이분화시키고 이질화시키는 분명한 악재이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도의적 차원의 비판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소비심리가 심화될수록 그 사회의 이질화 또한 심화되고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훈 초등학교 영어수업과 열린교육 참여관찰영훈 초등학교는 영어수업과 한글수업이 반반 이루어지는 열린 교육을 실천하는 보기 드문 학교다. 영훈 초등학교 참여관찰에 앞서, 영훈 초등학교를 논문 주제로 삶아서 연구 해 왔던 학생이 수업시간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영훈 초등학교에 가서 참여관찰 하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알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생각하신 교수님의 배려였다. 영훈초등학교의 한반 인원은 38명 이었고 수업은 19명 씩 나누어서 한다고 한다. 교실은 카펫이 깔려있고 복도와 교실은 벽이 없는 하나의 큰 공간이며 교사들을 위해 차나 간식들이 준비 되어있는 휴식 공간도 따로 있다고 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자유로운 편이며, 학생에 대한 체벌은 격리를 시킴으로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식이었다.- 영훈 초등학교의 참여관찰에 앞서서 학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미리 들어서 좋았다. 기초지식을 갖게 되어서 ‘오~ 과연 얼마나 좋을까?’ 좀 더 관찰에 대한 기대감도 생겼고 관찰하는 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도 조금은 방지되었다.영훈 초등학교 현관에 도착했다. 아주머니 두 분이 검은 비닐봉지를 주면서 신발 신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다. 비닐은 그냥 일반 검은 비닐봉지가 아니라 바닥에 하드보지를 댄 것 같은 느낌의 비닐 양말 같았다. 현관에는 나 말고 엄마들도 꽤 많았다. 엄마들은 ‘미끄러진다. 넘어진다.’ 하면서 비닐을 신었고 ‘오늘 청소한다더니 미끄럽네 ~’ 하면서 웃었다. 나도 옆에서 비닐을 신었다. 눈앞에 보이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예사롭지 않은 둥글게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영훈 초등학교는 현관부터가 남달랐다. 2년 전 방문했었던 내 남동생의 초등학교가 떠올랐다. 남동생의 학교는 일반 공립초등학교이며 시설은 보통의 초등학교와 같다. 남동생의 학교도 그랬고 보통 학교들은 그냥 신발신고 들어갔었는데 다르다. 나중에 청소하기 힘들어서 그런가? 그리고 오늘은 엄마들이 와서 깨끗한 것인가? 했었는데 한 엄마의 ‘오늘 청소한다더니 미끄럽네’ 에서 평상시에도 과 책과 수업 준비물들이 많이 있었다. 1학년의 다른 반에 비해 좀 더 시끌시끌했던 1-4반을 집중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반이 왜 4반 까지 밖에 없을까? 소수정예 이다보니 그럴 것 같았다. 건물을 늘려서 많은 학생들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만 조금 밖에 받지를 않나? 궁금했다. 가뜩이나 인원도 다른 학교에 비해서 적은 것 같은데 반까지 적다니... 이런 수업이 진행되는 학교가 적은 만큼 소수정예라는 것이 아쉬웠다. 정말 책과 수업 자료들도 많았고 복도와 교실 사이는 벽이 없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있어서 여건이 참 좋아 보였고 부러웠다. 교실과 복도의 벽을 튼 것은 좋았지만 교실2개의 공간을 합쳐놓은 것은 별로였다. 공간이 넓은 것은 좋으나 이따가 언급하겠지만 너무 터져있어서 수업이 동시에 진행되니까 선생님 두 분의 목소리가 들려서 수업에 방해되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들까지 와서 그런 것인지 좀 산만했다.아이들은 18명이었고, 모두 카펫에 앉아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외국인 여자 분이었고, 화이트보드를 사용하였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편한 자세로 수업을 하셨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굉장히 많이 들었다. 다들 집중하는 듯 보였고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의자에 앉아서 조용하게 참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쉬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서로 하려고 ‘어어~’ 소리까지 내면서 손을 들었고, 한 아이가 지목되면 자신이 지목되지 않은 것에 대한 허탈감으로 ‘허~’ 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학부모들은 웃었다. 1학년인데도 영어를 잘했다.- 외국인 선생님이 수업을 하는 것에 부러웠다. 영어를 빨리 접하고 있는 것이니까... 아이들은 외국인 선생님에 대한 거부감 없이 편하게 수업을 하고 있었고 선생님도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선생님이 아무리 편하게 수업 한다고 해도 학부모 참관 수업인데 다리를 꼬고 앉아서 수업을 진행한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외국인 선생님이 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저학년은 수업할 때 적극적이nt e' 를 적었고 아이들에게 발표를 시켰다. 아이들은 손을 많이 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앞에 앉아있는 조부터 발표를 한명씩 시키기기 시작했다. 한아이가 ‘true’했더니 한 엄마가 매우 웃으며 좋아했다. 자신의 아이인 것 같았다. 시작부터 손을 안 들고 있었던 어떤 아이는 자신의 조 차례가 되자 손을 들었다. 미리 손들고 있기가 팔 아프고 귀찮았던 모양이다. 어떤 아이들은 손은 들었으나 막상 시키면 머뭇거리기도 했고 그때는 앞이나 옆에 앉은 아이들이 살짝 가리켜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너무 발표를 하기를 원했고 서로 시켜달라고 또 ‘어어’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교사는 달래느라 애먹었고 아이들은 손도 들지 않고 단어를 말하기도 했다.칠판 :Silent e칠판이 어느 정도 채워지자 선생님은 부모들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하며 아이들을 관찰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팀플레이를 하고 엄마들은 책장의 자료를 꺼내보기도 하고 아이들과 얘기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조별로 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선생님과 수업을 진행 할 때 보다 소란했다. 연필을 깎는다고 왔다 갔다 하며 친구들끼리 영어로 놀리고 장난을 쳤다.- 1학년 엄마들이라 그런 건지 부모들이 호기심이 많아 보였다. 아이들은 대체로 수업에 집중하며 높은 참여를 보였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했다. 영어를 못하는 아이는 없었다. 1학년이니까 벌써 학교를 9개월째 다닌 셈인데 영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이렇게 매일매일 수업을 영어로 하면 정말 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런 환경에서 초등학생 때부터 수업 받는 것이 부러웠다. 3월의 초반 수업 모습을 보고 싶었다. 과연 초반부터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어느 정도 되는 가? 궁금했다. 내가 이반에 처음에 왔을 때 영어를 하나도 못했었더라면 9개월 후에 어떤 모습일까? 예상되는 결과는 잘할 꺼 같다. 매일매일 수업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또 다른 아이들처럼 되기 위해서 수업시간 외에도 학원을 다니는 등의 따로 애를 썼을 것리지 않아 답답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스티커 붙이는 거 있잖아. 집에서 스티커를 동생이 잃어버렸는데 문구점에서 사다가 붙였어. 호호호.’ ‘집에 오면 바로 학원가고 바빠.’ ‘이따가 점심 어디서 해?’ 또 다른 옆쪽은 1-3반 이었는데 같은 1학년인데도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조용히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수학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설명하다가 아이들이 조용한데도 ‘선생님이 설명하는데 손으로 만져요.’했다. 아이들이 모두 손을 책상 아래에 놓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6학년들은 가장 조용했다. 확실히 부모도 1학년보다 적게 왔다. 아이들이 떠드는 반도 없었다. 조용한데 내가 지나가니까 날 쳐다보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1학년들은 좀 소란스러워서 누가와도 그렇게 주의가 집중되지도 않았지만 누가 와서 보든 말든 자신의 수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1-4반의 외국인 선생님은 딱히 행동에는 제재를 가하지 않고 조용히 하라고 주의만 주었는데, 1-3반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책상 밑으로 내리게 함으로서 행동에 제재를 가했다. 아이들은 수업에 좀 더 집중을 잘했고 조용히 했다. 뭔가를 못 만지고 선생님만을 보게 함으로서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학년이 올라갈 수 록 아이들이 조용한 것 같았다. 그런데 수업에는 1학년이 좀 더 집중하는 듯 해보였다.하나의 수업이 끝났고 아이들은 각자 엄마를 찾아와 안기기도 하고 물건이나 옷을 엄마에게 주기도 했다. ‘엄마 나 이거 옷 더워’ ‘네가 가져다놔야지’ 반을 이동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1-4반 아이들은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한국인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이동하여 책상에 앉았고 이 교실의 전체적인 구성은 아까의 외국인 교수님 수업시간의 교실과 비슷하다.칠판:은행잎① ? A 사자② 친구 P.S③ 내 얼굴 따따삐B 영훈마리오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좀 전 외국인 선생님 시간 보다 더 떠들기 시작했다. ‘①번 알겠다. 알겠다.’ 떠들면서 신나했다. ‘아 시끄러 하였다.- ‘열중쉬어. 차렷.’ 처럼 아이들에게 짧은 행동 제재를 가할 때는 아이들은 제재를 가할 당시에만 잠깐 조용히 할 뿐이었다. 심하게 떠드는 아이들은 아까의 1-3반처럼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 할 때처럼 아예 대부분의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행동제재를 가하는 것이 좀 더 효과 적이지 않은가 생각했다. 칠판의 조이름 옆의 동그라미 자석들과 아이들을 살펴보니 파랑색이 좋은 것이고 노랑색은 경고 정도이고 빨강색은 안 좋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것에 연연하며 ‘선생님 사자 조 조용히 했어요.’ 하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파랑색들이 모이면 선생님이 상을 내리지 않을 까 싶었다. 하지만 동그라미 떼고 붙이는데 시간도 꽤 소비 되었고 아이들은 저걸 바꿀 때만 잠깐 조용했다가 금세 소란해졌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얼마나 많이 말했는지 모르겠다. 엄마들도 덩달아 ‘쉬~’하면서 조용히 하게 시켰지만 소용없었다. 소란한 가운데 수업은 계속 진행되었다.선생님은 박지성 사진을 꺼내보였다. ‘자 선생님 남자친구예요.’ ‘에이~’ 아이들은 박지성 사진을 보자마자 흥분하며 더 심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박수 세 번 시작’ 하니까 아이들이 일제히 ‘짝짝짝’ 박수를 친다. 선생님이 ‘손 머리’ 하자, 아이들이 모두 손 머리를 한다. ‘차렷.’ 조용해졌다. 선생님이 ①에 들어갈 내용 발표를 시켰다. 곧이어 아이들은 손을 들며 ‘저요. 나요. 꼭 해야 되요.’ 의자를 삐걱거리며 장난치고 난리가 났다. 준비물인 거울 까지 들고 일어나서 방방 뛰었다. 자신이 호명 되지 않자 매우 실망들을 했다. 선생님은 또 다른 질문을 시작하셨고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또 하겠다고 난리가 났다. 발표를 한 아이도 또 하겠다고 난리다. 아이들의 발표수업이 끝나고 자가 학습이 시작 되서야 좀 조용해졌다. 엄마 한분이 참관 록을 적기 시작했더니 나머지 엄마들도 우르르 적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빠 한분이 계셨는데 영어로 참관 록을 적으셔서 슬쩍 보고 깜짝 놀랐다보냈다.
공무원이 되고 싶니? 서울 노량진 공시촌과 공시생들의 생활 연구문화인류학 03022069 전 소 정 문화인류학 03022247 박 혜 원순 서l. 서론 ll. 노량진 공시촌 1. 노량진으로서의 역사 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lll. 노량진 공시생 1. 대한민국 공시생 현황 2. 공시생의 이야기 lV. 종합 논의l.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노량진 공시촌과 그 안의 공시생들의 생활연구 ☞ 본 연구에서는 공시촌 생활을 선택한 공시생들의 의미화 과정 을 살펴본다.2. 연구 내용1) 공시촌 공간의 특성은 어떠한가? 공시촌의 대명사가 되기까지의 노량진은 어떤 시간을 겪어왔을까? 노량진을 공시촌으로 만드는 요인은 무엇이 있을까? 2) 공시생의 일상생활은 어떠한가? 공시생들은 공시촌을 어떻게 생각할까? 공시생이 보는 공시생은 어떤 모습일까?3. 연구 방법 - 1) 연구대상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학원가와 공시촌 공시촌에서 수험공부를 하는 공시생3. 연구 방법 – 2) 자료의 성격- 공식적 자료 : 책과 뉴스에서 비춰지는 공시촌과 공시생의 분석 - 비공식적 자료 (1) 설문조사 : 좀 더 많은 공시생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통계를 통한 경향 분석. (2차례 58부) (2) 심층면담 : 솔직한 의견을 지향한 면대면 대화로 공시생들의 의식 탐구. (노량진 7명, 비노량진 3명)4. 연구의 의의와 한계공시생 밀집지역인 공시촌의 사례로 노량진동을 지목하여 연구 대상 활동범위를 한정하기는 했으나 연구 대상 내부의 다양성에 의해 특정 사례가 수집되어 연구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가 노량진동 공시촌의 이야기라고 나아가 전국의 모든 공시생들의 이야기라고 일반화 할 수 없는 원천적인 한계를 명시하는 바이다. 치열한 자유경쟁체제 속에서 '신이 내린 직장'이라며 공무원을 미래의 직업으로 추구하는 현상이 흔한 일상이 된 지금, 본 연구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어느 주제보다 집중되리라 예상된다. 이에 이 연구는 연구자와 독자의 흥미라는 가치를 통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첫 번째 논의Ⅱ. 노량진 공시촌 1. 노량진의 역사 1) 서울의 부도심이 되기까지 2) 공시촌이 되기까지 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1) 교육 공간 2) 생활 공간 3) 정보의 장으로서의 공간 3. 논의1. 노량진의 역사 1) 서울의 부도심이 되기까지노량진동 행정구역1. 노량진의 역사 2) 공시촌이 되기까지노량진 1동의 모습 대부분 고시원과 하숙집, 독서실들이다.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1) 교육공간[1] 고시학원 노량진을 고시촌으로서 발돋움하게 한 고시학원은 현 약 20개가 성업 중이다. 노량진 학원가 지도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1) 교육공간[2] 서점, 복사집 - 시내의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으로 인해 동네 서점들 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이곳 노량진의 서점들은 오프라 인에서도 인터넷과 같은 비 율의 할인과 함께 다양한 고 시 전문서적을 구비하여 그 수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1) 교육 공간[3] 독서실 - 일반 독서실의 기능을 하지만, 그 규모나 시설 은 좀 더 전문적이다. 내부에도 장시간 공부하 는 수험생들을 위한 맞춤 편의 시설이 마련되고 있 다.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2) 생활 공간[1] 고시원 및 자취방 /하숙 - 노량진 1동에만 140여개가 밀집해 있다. 고시원은 책 상과 침대만 있는 1.5평짜 리부터, 개인 샤워부스와 전용세탁기를 갖춘 5평짜 리 '호화 고시원'까지 다양 하다.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2) 생활 공간[2] 식당, 분식 및 노점 수험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식당들은 저렴한 가격과 함께 식권을 발행한다. [3] 패스트푸드점 및 카페 원래 음식이나 커피를 주문하면 가게 직원들의 눈치를 받지 않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가게의 특성에 의해 수험생들의 스터디 모임 장소로 선호되는 것 이다. [4] 유흥(호프집, 만화방, 노래방, 당구장) 실제 수험생들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역할을 한다.2. 공시촌으로서의 노량진 3) 정보의 장으로서의 공간[1] PC방 노량진 피씨방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신기하게도 게임폴더 이외에 '드라마 영화 쇼프로' 라는 폴더가 따로 자리 잡고 있다. [2] 웹사이트 동작구는 올해 '동작구 고시포탈 홈페이지'를 운영을 시작했다. [3] 공무원 신문, 길거리 학원 전단지 - 노량진역에서 육교를 건너 학원가 인도로 오면 학원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아주머니들을 1m간격으로 만날 수 있다.3. 노량진 공시촌에 대한 논의노량진의 공간을 교육 공간, 생활 공간, 정보의 장으로서 나누어 보았다. 이러한 공간들은 다른 동네의 공간과는 다른 노량진만의 수험생들을 위한 공간들로 변화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역할 면에서 특징적인 것이 많다고 볼 수 있다.두 번째 논의Ⅲ. 노량진 공시생 1. 대한민국 공시생 현황 2. 공시생의 이야기 1) 공시생이 본 공시촌 2) 공시생이 본 공시생 3. 논의1.대한민국 공시생 현황* 청년층 취업 준비생 2명 가운데 1명 공무원 시험 * 서울시 공무원 임용시험은 올해 약 145,000명 지원 경쟁률 83:1통계청 http://www.nso.go.kr/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결과(2007.5 실시)2. 공시생의 이야기 1) 공시생이 본 공시촌[1] 고비용과 불쾌.불편한 환경 “비싼 곳 아니면 살만한 곳이 못 된다.” “위생에만 신경 써 준다면, 고시촌으로써 자리를 잡고, 취업준비생을 위한 체계적 고시촌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고시촌이 밀집되어 있어 분위기가 칙칙하다.” “동네가 너무 후졌다. 식당이 조미료를 너무 많이 사용한다. 노량진은 다른 고시촌(신림동)보다 월등히 가격이 비싸고 시설도 열악합니다.” “고시원, 독서실, 식비 등 금전적인 부담이 크다.2. 공시생의 이야기 1) 공시생이 본 공시촌[2] 학원과 가까운 곳 “집이 서울이 아니라 학원을 다니려면 노량진에서 살아야 하니깐.” [3] 긴장감의 유지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더욱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2. 공시생의 이야기 2) 공시생이 본 공시생2. 공시생의 이야기 2) 공시생이 본 공시생[1] 공부의 정도 열공 하는 공시생 VS 노는 공시생 신참 공시생 VS 장수 공시생 [2] 공부 방식 스터디 하는 공시생 VS 홀로 하는 공시생 학원 다니는 공시생 VS 혼자 공부하는 공시생 PMP 있는 애 VS PMP 없는 애이상적인 공시생의 하루2. 공시생의 이야기 2) 공시생이 본 공시생[3] 생활 방식 혼자 웃는 공시생 VS 혼자 안 웃는 공시생 혼자 밥 먹는 공시생 VS 같이 먹는 공시생 안 씻는 공시생 VS 씻는 공시생 [4] 생물학적 조건 젊은 공시생 VS 늙은 공시생 20대 공시생 VS 30대 공시생 여자 공시생 VS 남자 공시생2. 공시생의 이야기 2) 공시생이 본 공시생[5] 사는 곳 방 얻어서 사는 공시생 VS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공시생 수도권 학생 VS 지방 애들 [6] 시험 종류 9급 VS 7급 [7] 기타 연고대 VS 연고대 아님3. 노량진 공시생에 대한 논의노량진하면 고시의 메카로 인지되지만 실제 수험 생활을 하면서 불편과 실망을 겪기도 한다. 합격을 위한 이상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노량진이라는 이미지는 학원과 공시촌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상술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공시생이 보는 공시생의 다양한 유형화는 공시촌에서의 생활과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공시생이라면 가져야 할 합격에 대한 강한 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의식은 노량진 생활의 불편과 만나 수험생활을 단축시키기 위해 학업에 매진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Ⅳ. 종합 논의노량진 공시촌이 다른 동네와는 달리 수험생들 위주로 운영되면서 공간적인 역할 면에서 변화된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노량진에서 생활한 공시생들이 노량진을 공시촌으로서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공시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학원가의 형성과 수험 관련 업종들이 모여 있어서가 아니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향한 생활과 관심은 공시생들에게 불편한 노량진은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야만 하는 촉매제가 되어 더욱 공부에 매진하게 되는 역발상으로 공시촌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지하생활자의 수기(주인공이 일생동안 추구하고자 했다고 주장하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 왔는지 그것에 대한 집착이 현실에서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게 되었는지 고찰해 보자.)1부에서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그의 사십 년 동안 생애를 지배해왔고, 그가 동경해온 것이다. 2부에서도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분명히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 같다.첫째는 1부에서 그가 “구속받지 않기 위해서는 변덕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대서 찾을 수 있다. 변덕은 인간에게 가중 귀중하고 유익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덕을 통하여 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것이라고 말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둘째는 2부 앞부분에 나온 말을 보면 알수 있다. “그러나 음탕의 시간이 끝나면 나는.... 나한테는 모든 것을 체념케 하는 도피처가 있었다. 이를테면 모든 ‘아름답고 고귀한 것’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리면 되는 것이다.... 공상만을 계속했다.” 여기서 주인공은 그가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도피처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보는 현실은 추악하고 저속한 곳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현실에서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이런 추악하고 저속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현실세계보다 오히려 더 저속하고 추하다.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공상을 택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도피처로 삼으며, 이러한 도피처로 들어가기 위해 공상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상 속에서, 이와 같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의 도피 속에서 아아, 나는 얼마나 풍부한 애정을 경험했던가....”라는 부분은 그가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의 도피를 위해 공상을 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공상의 도피는 신기하게도 음탕함에서 찾아든다. 그는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의 도피의 방법으로 공상을 택할 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책도 읽는다. 그러나 그는 공상만을 계속하지는 못한다.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서 택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변덕을 부려 공상에서 빠져 나와 사람을 만나려 하는 것이다.
일본 문화론2. 일본의 근대호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약술하고, 그 호적의 가장 중요한 특징에 대해 살펴 본 후,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 어떻게 도입되었는지에 대해 논하시오.에도 시대의 ‘이에’ 는 봉록으로 유지되던 ‘무사의 이에’ 와 가업으로 유지되던 ‘서민의 이에’ 가 있었는데, 메이지 초에도 무사에게는 녹제가 있었으므로 무사와 서민 사이에는 친족법 상 상속법 상으로 취급을 달리했다. 그런데 메이지10(1877)년에 녹이 금록공채증서로 전환되어 양자 사이에는 실질적인 구별이 없어지고 양자는 대체적으로 통일된다. 정부는 메이지4(1871)년에 호적법을 제정한다. 이것은 국세 조사 적인 부랑인의 근절을 기한다는 정치적 경찰적인 목적을 가졌고, 신분을 밝힐 목적도 가졌다. 신분상의 변동은 호적으로 기록했는데, 신분법에 관한 통일법전이 없었으므로 그 취급은 부현마다 각각이었다. 그러나 호적에 관한 내무성(메이지20년 이후는 사법성)의 지령은 어느 정도 이것을 통일하는 기능을 가졌고, 메이지 초년에 신분법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메이지19(1886)년 호적에 관한 내무성령(호적취급 절차) 및 내무성 훈령(호적등기서식)에 의해 호적제도는 크게 정비된다. 메이지31(1898)년에 민법과 함께 호적법이 시행된다. 이것은 개인본위의 신분등기부와 ‘이에’ 본위의 호적을 병용한 것이다. 호적제도는 율령제에 따라 ‘국민’ 의 법적 편성과 통치기구 정비를 통해 국민 통합의 이념과 실체를 창출해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양대 정치적 도구는 천황제와 율령제이다. 호적 편성은 ‘주거지의 호(戶)’ 를 단위로 하고 있어, 개인을 단위로 하는 구미 제국의 신분증서 제도와 구별됐다. 호주에게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우고 사회 정책적 기능의 일부를 떠맡김으로써 천황에서부터 가족까지 수직적 위계질서로 짜인 가부장적 국가주의의 면모를 갖췄다.식민강점기 일제가 조선에 들여온 호적제도와 창씨개명 강요는 근대 국민국가가 전제적 통치구조를 확립하고 조선인 징병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징병 대상은 17살 이상 ‘내지인(일본인)’ 남자에 한정돼 있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나 대만 등의 식민지 민적자들은 일본인을 적대시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1937년 전쟁이 대륙으로 확대되자 일본 육군성은 ‘징병제도 시행을 위한 시험적 제도로서의 지원병제도’ 를 도입한 데 이어, 1942년 전황이 악화되자 징병제 시행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육군성이 관할한 ‘호적 정비’ 는 징병 적령자의 현황과 소재를 파악하는 중요 수단이 됐다. 1907 ‘민적법’ 이 만들어지고 ‘조선호적령’ (1921년 공포 1923년 7월1일 시행) 으로 인해서 조선에 일제의 호주제가 완전히 이식된다. 이 조선호적령은 1914년 개정된 일본호적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모든 조선인이 호적등록 의무를 지게 되었고, 1941년 ‘창씨개명’ 을 강요당했다. ‘창씨개명’ 은 우리 고유의 이름표기법인 성·명(姓·名) 앞에 일본식 호칭 ‘씨(氏)’ 를 새로 만들어 붙이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다. 일제에게 조선인은 생활인으로서의 동질적 정체성보다 호적상 동일성이 우선되는 존재였고, 일제는 식민지 동화정책을 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조선인을 ‘내지인’ 과 구별해 철저한 차별정책으로 일관했다. 성씨는 한국의 가족제도와 혈연관념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어왔고, 이러한 가족제도와 씨족, 혈연관념은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기저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호적은 조선의 가계전통을 근원적으로 뒤엎어 민족성을 짓밟고 조선인의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한 일본의 책략이었고, 한민족의 개인프라이버시를 절단시키는 것이었으며 징병자원으로 끌고 가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