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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화의이해-중간고사시험정리
    중국문화의 이해 박혜숙교수님1.중국의 차의 종류를 설명하시오.중국은 오랜 세월 동안 차의 재배와 제조등을 개발하는등 차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왔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차종과 재배방식, 가공방식, 찻잎을 음료로 마시는 법 등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중국에서 전파되어 나간 것으로, 중국차가 세계 차 문화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차의 기원은 신농씨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당나라때 육우가 지은 《茶經》의 기록에 근거로 한다. 또한 서주(西周)설에서 ‘차’기록이 있으며, 진한(秦漢)설에서는 한나라때부터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한나라 때부터 차를 마셨다고 명시한다. 또 육조(六朝)설이 있는데 이는 달마대사 고사와 관련이 있다. 이는 불교수련중 잠을 쫓기 위해 눈썹을 뽑아서 날렸더니 차나무가 생겼는 내용인데 이 때는 불교문화가 전파되고 있는 시기와 일치하여 차가 불교수행에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차의 종류에는 제품의 형태에 따라 산차, 말차, 편차, 병차등이 있다. 대표적인 차로는첫째, 흑차(黑茶)가 있다. 흑차는 찻잎을 건조시키기 전에 발효시킨 차이다. 찻잎은 흑갈색이며 찻물을 갈황색이된다. 특이한 곰팡이 냄새가 있어 마시기 나쁜 점이 있지만 익숙해지면 독특한 풍미와 감칠맛에 반하게 된다. 보이산차와 보이긴압차, 운남의 칠자병차등이 유명하다.둘째, 황차(黃茶)가 있다. 황차는 찻잎의 색과 우려낸 물색, 찌꺼기 색이 모두 황색인 것이 특징이다. 녹차를 만드는 과정이 잘못되어 생겼다는 황차는 송대에는 하등 제품으로 취급되었으나, 연한 색과 맛 때문에 중국 고유의 차 대열에 들게 되었다. 황차는 애호가가 좋아하는 차로 군산은침차, 곽산황대차등이 유명하다.셋째, 백차(白茶)가 있다. 백차는 찻잎에 흰털이 많은 특징이 있으며 발효도가 10-20% 정도인 가벼운 발효차이다. 제조 방법은 인위적으로 볶지 않고, 천연의 햇빛으로 건조시킨다. 차잎은 새하얗고 찻물은 연한 색을 띠며 향이 맑다. 백호은침차, 백목단차20-60% 정도의 반 발효차이다. 보통 우롱차(烏龍茶)라고 하는데, 녹차의 산뜻함과 홍차의 깊은 맛을 합친 중국 특유의 차다. 철라한차, 철관음차, 황금계차, 동정오용차, 백호오용차등이 유명하다.다섯째, 홍차(紅茶)가 있다. 홍차는 발효가 80-90%로 완전 발효차이다. 찻잎과 찻물의 색이 모두 붉은 빛이다. 현재 전세계인이 즐겨마시는 홍차는 중국 송나라 때 처음 생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오늘날의 홍차와 비슷한 제조법으로 제조된 것은 17세기 중반이다.안휘의 기홍차, 운남의 전홍차가 유명하다.여섯째, 녹차(綠茶)가 있다. 녹차는 잎을 딴 후 발효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찌꺼나 볶는다. 정통 중국식으로 볶아 떫은 맛과 쓴 맛이 진하고 향기와 맛이 상쾌하다. 녹차는 미 발효차이고 동시에 덜 익히는 차이기 때문에 차 본래의 영양분이 많이 남아있다. 항주 서호의 용진차, 강소의 벽라춘차 안휘 황산의 모봉차가 유명하다.일곱째, 화차(花茶)가 있다. 화차는 찻잎에 꽃의 향기를 넣어 만든 차이다. 화차는 향이 좋고 약효가 많아서 건강에 좋고 기분을 편안하게 해준다. 꽃의 향기가 풍부해서 냄새 있는 요리에 어울린다. 모리화차등이 있다.2.중국어의 특징을 설명하시오(발생학적, 유형학적 특징 2가지 모두 서술하시오.)발생학적 특징발생학적 특징은 역사적인 근원을 찾아 중국어의 특징을 살펴보는 방법이다. 현재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들을 분류해보면 세계의 5대어족에 속하는 언어가 다 나타난다. 이는 중국내 다양한 소수민족이 많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한장어족, 알타이어족, 남아어족, 남도어족, 인도-유럽어족 5개의 특징이 다 포함되어 있다. 중국어는 모든 언어의 특징이 다 포함되어 있지만, 그중에 ‘한장어’에 속한다.유형학적특징(=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국어의 특징)유형학적 특징은 중국어의 어법, 음운, 어순등 중국어 자체만을 가지고 공통점을 찾아 중국어의 특징을 알아보는 방법이다.중국어가 지니는 유형학적인 특징은 다섯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첫째, 중국어는 단나의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두 번째로 중국어는 성조어이다. 영어는 악센트 한국은 단?장음이 있듯이, 중국어는 성조어가 있다. 그러나 중국어는 성조가 달라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성조가 중요하다. 예를들면이렇게 음은 똑같으나 성조가 다름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세 번째로 중국어는 고립어이다. 중국어는 영어의 과거형처럼 기존형태에 -ed가 추가하는등 낱말의 내적변화로 인해 형태가 변화하지 않는다. 去 처럼 개별적인 어법 어조사를 활용하여 의미를 나타낸다.넷째로 중국어는 양사의 필수불가결성을 지니고 있다. 三人처럼 고대한자는 양사없이 단독으로 써도 가능했으나, 현재 중국어는 三?人처럼 수사가 명사를 수식할 때 반드시 양사가 필요하다.다섯째로 중국어의 어순은 SVO라는 점이다. SVO, SOV, OSV도 있지만, SVO가 50%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중국어 어순의 특징을 S-V-O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어가 이 세가지 어순이 모두 존재하는 이유는 발생학적 특성에서 보면 다른어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주족, 몽골족 이민족침입으로 인한 영향)3.중국어 어휘에 나타나는 문화의 유형에 관하여 설명하시오.색체어휘에 보이는 문화적 함의중국어에 보이는 음식문화중국어에 보이는 친족관4. 한자의 기원에 관하여 논하시오.문자의 기원은 “近取諸身,遠取諸物”의 구절로 알 수 있다. 이는 문자가 먼저는 가까운 신체 대상에서 시작하여 먼 곳에서 대상을 취했다는 뜻으로, 이렇게 가장 먼저 문자를 만드는데 삼는 기준은 가장 가까이 있는 신체부터였다. 후에 점점 먼 곳도 점점 취하면서, 한자도 곧 단순한 상형으로 시작해서 점차 복잡한 상징적인 문자로 변모해감을 알 수 있다.한자의 기원은 전설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고찰할 수 있다.먼저 전설부분에서는 첫 번째로 결승설이 있다. 결승설은 새끼를 꼬아서 묶는 방법으로 끈에 매듭을 생기게 함으로써 사건의 기억을 도우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갑이 을집에 돈을 빌려줬는데 얼마인가를 새끼에 매듭지어서 서로 적인 글자는 그림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물을 그림으로 따온 것은 일부분일 수도 있으나 전부를 차지한다고 보기는 힘들다.세 번째로 팔괘기원설이 있다. 이는 팔괘를 기초로 필획을 새겨 문자를 대신한 방법이다.네 번째로 창힐설이 있다. 이는 황제의 사관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한나라 때는 창힐의 모습을 눈을 네 개로 그리는 등 신격화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자는 어느 한 시기에 한사람이 갑자기 창조할 수는 없다. 당시 통용되던 사회적인 약속으로 쓰인 수많은 단어나 어휘등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정리 한사람은 창힐일 것이다. 따라서 창힐이 한자를 제창한 것이 아니라, 이전 시기의 문자들을 정리했을 것이다.언어를 표현 할 수 없는 것은 문자가 아니다. 아직까지는 중국 문자의 기원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문자는 ‘가다’라는 뜻을 사회구성원 모두 알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약속되어야 하는데, 도화기원설과 결승설등은 언어를 표현하는 문자가 없다. 때문에 그 당시 기억을 돕는 수단일 뿐이지 그것을 한자의 기원이라고 보기 힘들다.그 다음으로 실존유물을 가지고 한자의 기원을 찾는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로 반파기호 기원설이 있다. 이 설은 반파기호(6000년전)가 중국 문자의 기원이라고 보는 한 학설이다. 그러나 도자기에 생긴 기호들은 문자가 아닌 ‘표식’이며 이것을 문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글자가 나타내는 의미와 발음이 있어야 하는데 반파기호는 어떻게 읽는지 또한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문자가 아니라고 본다.두 번째로 대문구 문자(4500년전)가 있다. 이 설도 역시 대문구 문자를 한자의 기원으로 보는 한 학설이다. 반파기호는 소수학자가 주장하는 것에 반해 대문구문자를 한자의 기원으로 보는 학자는 70~80%를 차지한다. 대문구문자는처럼 반파기호보다 의미전달 부분에서 더 구체적이고 현재 쓰이는 한자와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한자의 기원은 대문구 문자로 보기도 한다.5.한자의 조자 원칙 - 육서에 관하여을 여섯가지 유형으로 분류되어졌다. 이것이 육서이다.여섯가지 유형중 첫번째로 상형이 있다. 상형은 자연을 본으로 사물의 형상을 본뜬 글자이다. 사물은 각기 나름대로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으로 윤곽이나 특징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기가 유용하다. 木 水 등이 있다.두 번째로 지사가 있다. 지사는 부호로써 추상적인 글자를 나타낸다. 상형보다 형상성이 감소하고 사회 구성원끼리 약속한 부호적인(약정부호) 성격이 강한 문자이다. 지사는 다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순수 약정 부호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一, 上, 下등이 있다. 이러한 표식은 사회적으로 ‘하나, 위, 아래’ 라고 약속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약정해야한다. 둘째는 기존의 상형자에서 추가적으로 지시성의 부호를 덧붙인 것이다. 본래 나무의 뜻에서 을 추가하면 ‘근본 본’이라는 문자가 탄생하게 된다.세 번째로 회의가 있다. 회의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두 요소가 모여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사람과 나무 → 休 ‘쉬다’라는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 또한 가장 의미가 가까운 상징적인 글자를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손톱爪으로 나무를 따다.라는 의미로 ‘따다’라는 의미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네 번째로 형성이 있다. 형성은 의미와 같은 문자와 소리가 같은 문자의 결합을 뜻한다.江은 은 물을 뜻하며, 工은 당시 양자강이 흐르는 소리가 ‘工’거렸기 때문에 생겨난 글자이다. 마찬가지로 황허의 河은 은 물을 뜻하며, 소리가 ‘可’거렸기 때문에 생겨난 글자이다.다섯째로 전주가 있다. 전주는 어느 학자도 확실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각각 의견이 분분하다. 학설중 하나는 水가 물인지 강인지 혼동되기 때문에 江이라는 글자로 의미가 변화되는 것을 전주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주라는 사람이 있으며, 또 다른 학자는 →其 의 키가 나중에는 키 혹은 3인칭 대상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는데 후자가 더 많이 쓰임에 따라 기존의 키를 잃어버리 있다.
    인문/어학| 2009.03.22| 6페이지| 2,000원|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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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구와 사림에 대한 역사적 인식 평가B괜찮아요
    훈구와 사림에 대한 역사적 인식史 20050284 변영은훈구와 사림에 대한 인식은 이미 16세기 후반에 간행된 『해동야언』)에서 언급하고 있을 만큼 빠른 시기에 그 대립상과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정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이 선조대에 들어서 사림의 승리로 귀결되고, 이후의 정치적 관심이 붕당의 전개양상에 집중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다.사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20세기에 들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는 일본인들에 의해 부정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을 병탄한 일본인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영속화하기 위해 한민족이 가지는 능력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한국사를 서술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는 역사로, 정치적으로 분열과 정쟁만을 일삼아온 혼란한 역사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한민족의 정치적 무능을 증명하기 위해 사화와 당쟁을 그 사례로 제시했다. 즉, 일본인들은 조선중기의 훈구와 사림 대립과정의 소산인 사화와 조선중후기 사림집권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정치운영 형태인 붕당정치를 분열과 정쟁이라는 부정적 측면에서만 주목하였다.이러한 주장은 역사학의 기본조건인 사실에 대한 실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였으며, 더욱이 역사학을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었으나 주장의 파장은 매우 컸다. 해방 이후 분단과 군사독재하의 왜곡된 정치현실에서 이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의 정치능력에 대한 회의를 심어주는 심각한 해악으로 작용했다.1. 붕당정치론의 제기와 사화에 대한 관심이태진은 붕당정치론을 조선중기 정치를 일컫으며, 그 내용을 ‘학문적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상호 비판을 원리로 하는 정치’라고 보았다. 또한 조선중후기 정치의 변화와 발전과정을 붕당정치, 탕평정치, 세도정치로 나누어 그 역사상을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제시하였다.당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사림과 훈구의 갈등에서 나타나는 사화에 대해서도 새로운 설명이 모색되었다. 기왕에는 사화를 붕당의 일부로 이해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붕당정치에 대한 이해가 축적되고 붕당의 내용과 구조등이 밝혀지면서 사화는 붕당정치와 전혀 다른 정치구조에서 나온 현상으로 이해되었다.그러므로 훈구와 사림의 갈등에 대한 이해에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였고, 연구자들은 붕당연구의 연장선에서 붕당정치 형성과정에 관심을 두면서 별도의 정치구조 변동과정으로서 사회를 바라보게 되었다.사화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사화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밝히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당쟁을 “극한적인 빈곤상황에서 나타난 사욕으로 인한 분열된 정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경제적 배경을 해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둘째는 사화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아 가는가, 그들이 어떻게 사림이 주도하는 정치구조를 만들어 갔는가의 문제였다.2. 사림과 훈구 대립의 경제적 배경먼저 사화 발생의 경제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는 일본인들이 주장한 정체성론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고, 내재적발전론이 제기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본인들이 한국경제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농업과 상업의 미발달과 수공업의 영세성(零細性))등을 제시했던 만큼, 그 극복을 위한 연구 역시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농업영역에서는 토지사유의 실제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농업생산력발전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극복되었다. 먼저 상품유통 경제의 발전이 연구되면서 다양한 상인들의 존재형태, 상품유통 시장과유통권, 나아가 국제적 교역체제 등이 밝혀졌다. 또한 도고행위가 보편적 상행위로 정착되면서 상업자본의 축적, 상인자본의 수공업지배, 생산부문에 대한 상인자본의 투자등이 확인되었다.이러한 조선후기 농업과 상업연구의 성과 위에서 사회의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들은 16세기의 경제적 변화에 주목했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 완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제적 변화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거나 발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상업에서도 농민이 주축이 되는 장시가 16세기 걸쳐 확대되고 있었고, 장시를 묶는 유통망도 형성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중국, 대일 무역도 활성화되었다.이러한 연구성과들은 16세기가 경제적으로 적극적인 변동기였고, 일본인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사화가 극빈상황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였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3. 훈구의 비리16세기의 경제적 변화가 사림과 훈구의 정치적 갈등에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고 연구자들은 밝히고 있다. 즉, 사림이 훈구를 비판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정경유착에 의한 경제적 비리였다. 그 중 수취체제의 운영에서 그 부담을 양인들에게 지웠다. 이로 인해 양인들의 부세부담이 늘어나면서, 일부는 도산하였고, 일부는 훈구에 투탁함으로써 부세체제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구들은 불법적으로 많은 투탁인을 거느리게 되었고, 이들을 자신의 농장경영에 이용하였다. 또한 훈구들은 지방의 수령과 결탁하여 둔전이나 주인이 있는 민전을 진황지(陳荒地))로 보고하고 이를 입안하는 방식으로 양인들의 토지를 점탈했다.또한 훈구는 고리대의 이식에 의해 축적된 부를 확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령들이 권세가의 개인적 사채 관리자를 자임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비리는 매우 빈번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훈구들은 부의 재생산을 위해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유통체제를 적극 이용했다. 이들은 권력을 바탕으로 부상대고(富商大賈))들과 결탁하여 미곡운송이나 방납(防納) ) 등에 관여하거나 중국무역 등 대외무역에도 참여했던 것이다.4.훈구의 탄핵과 언론기능의 강화사화의 경제적 배경과 경제적 변화에 연루되어 비리를 행하는 훈구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정치과정 속에서 이를 제어하려 한 사림들의 동향에 대한 연구도 추진되었다. 사림은 향촌의 주도층으로서 훈구들의 비리가 결국 향촌사회에 부담이 전가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러므로 사림은 자신들의 재생산 기반인 향촌의 건강한 운영을 위해 또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에게 미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훈구의 비리를 견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사림은 중앙정치에 적극 진출했고, 중앙정치에서 서민의 어려움과 몰락상황을 제시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훈구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당시의 정치는 권력에 참여하는 고위관직 관료들에 의해 장악될 수 있는 중앙집권적 구조였다. 이 권력구조는 훈구라는 정체세력 자체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사림은 집중된 권력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구조를 추진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여론을 바탕으로 하는 언론정치의 실현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사림은 공론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질 때 국가가 바르게 다스려지는 것으로 이해했다.사림은 여론정치를 이상시하여 이를 추진하면서 여론을 형성하려고 노력했으나, 이를 정치권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림을 기반으로 한 권력구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당시 여론을 수렴할 수 있는 기구는 사헌부와 사간원이었다. 조선초기에는 대간의 지위에 대한 보장이 취약하여 언론기능이 상당히 제한받고 있었다. 그러나 사림은 권력구조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론활동체제를 보강해 갔다. 특히 성종 중엽부터 홍문관이 언론기능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홍문관은 경연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나, 사림이 장악하면서부터 사림은 공론을 수용하여 정치에 반영하는 언론정치를 할 수 있었고, 또 훈구를 적극 견제할 수 있었다.5.무오사화의 발생사림에 의해 추구된 언론기구의 강화는 기득권자인 훈구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주었다. 훈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림을 견제했고, 이로써 정국운영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사화의 발생이다. 조선중기에 이르러 수차례의 사화를 보게 되는데, 이는 사림의 개혁추진 고비마다 발생하여 사림이 추구했던 권력구조의 변화를 늦추고 있었다.가장먼저 일어난 연산군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사림이 언론권을 강화하여 훈구를 적극 견제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양자의 갈등상황에서 연산군은 훈구의 입장을 지원했기 때문에 사림은 왕과의 갈등 속에서 훈구를 견제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되었고, 결국 왕과 재상이 결속하여 사화를 일으키자 막대한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사화 직후 훈구는 자신들을 견제하는 삼사)의 언론활동을 비난하고 언론기구를 장악하려고 노력했으나, 훈구는 언론정치가 갖는 이념적 정당성을 극복할 수가 없었으므로 언론삼사체제는 유지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공론정치 역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6.낭관의 정치적 지위 강화사림은 중종반정을 계기로 정치에 재등장하면서 언론기관을 바탕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언관기구만으로 훈구를 견제하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반성하게 되었다.) 이에 훈구를 더 적절히 견제하기 위해 정책결정 과정에서 공론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구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인문/어학| 2009.03.22| 4페이지| 1,000원| 조회(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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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옹정제 독후감
    엄격한 황제, 자애로운 황제의 두 얼굴, 옹정제과 목 : 동양근세사담당교수 : 하정식 교수님제 출 자 : 변영은(사학3)제 출 일 : 2008. 6. 19여러 왕자들의 살벌한 황태자 쟁탈전에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옹정제, 그는 요란스럽게 정치활동을 벌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제 3자의 입장에 서서 비교적 냉정하게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남몰래 꾸준히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 즉, 학문에 정진하였고, 그가 원하는 중국적인 독재군주가 되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이를 향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하였다.어느 역대 왕보다 천명사상을 굳고 믿고 있던 옹정제는 자신 이외의 모든 만민은 모두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짐이 최고 이다”라는 오만함 보다는, 천명을 가지고 만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하는, 그의 투철한 정신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의 이러한 강력한 독재군주체제 아래 형제사이도 없었다. 황제권력에 위협이 되는 팔아거, 십사아거를 단칼에 죽이기 보다는, 서서히 궁지로 몰아가면서 벼랑 끝까지 이르게 했을 때 그때 떨어트렸다. 얼마나 지독하고 끈기가 있는 황제인가. 그도 사실은 괴로웠는지 자신의 아래대에서부터는 황제권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자 안에 미리 태자 이름을 적어서 황제 승하시 바로 꺼내어 계승자를 볼 수 있게 하는 태자 밀건법을 시행한다.옹정제는 당?송?원대 이래 자기 당파가 부정을 일으켜도 서로 감싸주고 혹은 같이 부패를 저질러가는 붕당정치와 사업가들이 정치 보스에게 상납하는 보스정치)로 인해 점점 폐해가 심해져간 관리 정치를 비판하면서 관리들 사이의 부패의 끈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먼저 그는 관리의 됨됨이를 판별하여 과연 양심적인 정치를 해나갈 인물인지, 아니면 입으로 떠드는 것처럼 실제로 행동할 능력이 있는지, 번거롭더라도 한사람 불러 시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근처에서 그 관리를 지켜보는 밀정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밀정정치는 잘못 쓰면 독과 같아서 명대의 환관을 이용한 밀정정치로 인해 명이 망한 것처럼 위험부담이 컸다. 그러나 옹정제는 머리를 한번 더 굴려, 밀정의 계통을 종횡십자형으로 겹쳐놓아 관료 서로가 스파이 역할을 하게 하였다. 그러면 스파이를 위해 새로운 인재를 많이 뽑을 필요도 없고, 여러 계통으로 밀정이 들어오니, 객관적으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또한 그는 인재를 발탁할 때 공정한 기준을 세워서 성적을 올리는 자는 승진시키고 무능하고 삐뚤어진 자는 가차 없이 면직시키면 관료사회의 기풍도 점차 일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是是非非의 원칙을 표방하였다.옹정제는 또한 백성의 생활, 치안의 확립여부, 경제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방관에게 명령해서 매년 주접이라는 형식의 문서로 천자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였다. 즉, 주접은 관리 일개인이 비공식적으로 천자 개인에게 보내는 친필편지이다. 이렇게 때문에 중간에 총독 혹은 명대의 환관에 사이를 개입이 없기 때문에 황제의 권력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 넓은 중원의 전국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주접을 황제가 일일이 답장하고, 보고의 내용을 분석?비판과 동시에 보고의 질에 관리의 인물됨을 관찰하는 그의 끈질기고 지독한 부지런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관리와 밀정들에게 보고를 받음으로써 전국의 정보력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옹정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정무를 지휘하고 남들이 자는 밤 시간에 주접을 보고 답장을 쓰는데, 그는 이러한 바쁘고, 고달픈 생활을 오히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며, 이 한 몸을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궁전의 방 한칸도 늘리지 않았으며, 지방관이 하례장을 올리면서 비단을 사용하면 왜 이런 낭비를 하냐고 꾸짖으면서 종이를 쓰게 하였다. 천하의 정치를 위해 13년을 하루같이 일하고 또 일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천명에 대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였다.옹정제는 특히 3명의 지방관을 무척 아끼었는데, 天文?(ti?n wen jing)과 利衛(l? wei )과 오르타이 세사람이였다. 먼저 티엔원징에 대해 소개하자면, 당시 세입도 지출도 될 수 있는 한 기본급을 낮게 책정하는 것이 좋은 정치라고 간주되어 왔었다. 그리하여 지방에서는 재정상황이 열악하자 법규로 정해진 국세에 지방관의 자유재량에 따라 몇 할의 부가세를 매길 수가 있었다. 지방관의 자유재량에 맡겨지다 보니 그에 따른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티엔원징은 이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양렴은만 부가세로 인정하고 이외의 것은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조세를 체납하는 유력자들에게 강제 징수하였다. 이렇게 지방 유력자들이 가졌던 기존 특권을 무시하고, 부하 관리에 대해 가차 없는 태도를 취해서 격렬한 여론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지만, 옹정제는 오히려 비난의 목소리가 높을수록 티엔원징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졌다. 그가 관리한 허난성에는 불초한 관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력자의 불만과 하층 백성의 편안한 생활이 있을 뿐이였다. 이리하여 옹정제는 티엔원징의 업적을 지켜보고 하나의 모범적인 예로 만든 뒤 그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심산으로 허난성의 톈원징 휘하에서 훈련을 받은 관리는 옹정제에게 발탁되어 전국의 요소에 배치되었다.오르타이는 만주인이라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유별났다. 황제는 오르타이에게만은 어떤 일이라도 안심하고 털어놓았다. 옹정제가 오르타이에게 쓴 편지는 쓰는 방식부터 다른것과 달랐는데, 가령 “눈물을 흘러내렸다”와 같이 나약함을 드러내는 표현은 다른 신하에게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르타이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서너 번씩이나 쓰고 있다. 그가 오르타이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만주인이였다.그가 강한자에게는 강하게, 약한자에는 타이르는 상반된 사건이 있는데, 전자는 녠겅야오 사건이며, 후자는 쩡징 사건이다. 녠겅야오는 옹정제 즉위하면서 십사아거가 베이징에 소환되자 십사아거를 대신하여 대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그의 누이는 옹정제의 후궁이였고, 황제의 총애를 입어 귀비의 지위에 올라 황후 다음 가는 고귀한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옹정제가 베이징에서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점점 안정시켜가면서 녠겅야오의 권력이 너무 강대해진 것이 곤란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옹정제는 녠겅야오가 상주문을 보내는 사건)으로 그를 가차없이 탄핵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를 파멸시키고 자살을 권하자, 녠경야오의 누이인 녠귀비가 병환에 걸리게 되었다. 옹정제 자신도 괴로웠겠지만 독재군주는 가정 생활조차도 희생받을 수밖에 없었다. 녠겅야오가 탄핵된 죄목 중 가장 무거운 죄인 대역죄에 왕징치와 연좌되어있었는데, 왕징치는 녠겅야오의 개인 서기로 강희제의 학문이 유치하다고 폭로한 글이 발견되어서 왕징치는 참수되었다.쩡징사건은 일부 중국인들 사이에 反滿思想이 박혀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인데, 쩡징이 모반을 권하다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일개 왕이였으면 그냥 목을 치면 되는 일을 옹정제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27개조의 비난항목을 받아 옹정제는 각 조항 하나 하나가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조목조목 설명한 뒤 여기에 대한 쩡징의 의견을 물었는데 쩡징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옹정제가 가장 역점을 두어 주장한 것은 청조가 이민족 왕조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으며, 따라서 중국 백성은 청조에 대하여 충의를 다할 의무가 없다고 하는 쩡징의 논리에 대한 반박이였다. 이에 대해 천명을 받은 군주라면 중국인인지 이민족인지 따질 필요가 없으며, 또한 명이 스스로 망해버린 뒤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을 지배해준 것이 청조라고 반문하고 있다. 또한 주비유지 중에서 수십통을 골라 쩡징에게 읽게 하였는데, 이는 황제가 얼마나 천하를 열심히 다스리고 부지런한지 알게 한 목적으로 쩡징의 오해를 풀게하려고 하였다. 쩡징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자 그는 죄를 사면받았다.
    독후감/창작| 2009.03.22| 3페이지| 1,5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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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친족제도
    고려(조선)의 친족제도Ⅰ.서론친족제도 연구는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친족제도와 관련된 현상들을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연구이다. 이 분야의 연구는 매우 다양하여 주제를 한정하기 어렵지만 대표적으로 부처(夫妻) 형태, 상속제도, 가족?친족규모 등에 관한 연구를 꼽을 수 있다.둘째는 친족의 조직원리를 규명하는 연구로 친족형태에 대한 연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사회상을 거시적으로 규명하는 연구로 귀결된다.Ⅱ.본론1.친족제도 관련 분야의 연구⑴부처(夫妻)의 형태조선시기의 부처 형태는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일처다첩제(一妻多妾制)였다. 조선 태종 때 처첩을 분간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게 한 이래 처는 1명만 인정되었고, 첩 소생인 서얼(庶孼)은 처 소생인 적자에 비해 사회적으로 현격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에 반해 고려시기의 부처 형태에 대한 연구에서 첩제도는 매우 적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첩을 얻는 것을 예외적인 행위이며, 첩제도를 보편적인 부처 형태로 설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견해가 일치하는 듯하다. 이렇듯 고려시기의 부처 형태에 대한 주요 쟁점은 일부다처제설과 일부일처제설이다. 그럼 두 논쟁의 근거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하자.①일부다처제설한 왕이 여러왕후를 둔 왕실의 사례로, “부유한 집은 서너 명의 처를 얻는다”라고 한 고려전기 중국 사신의 기록과 “고려말에 두세 명의 처를 거느리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라는 『태종실록』의 기록은 다처제설의 중요한 논거가 된다. 또한 사료에 나타나는 ‘후취(後娶)’라는 표현을 전처가 생존한 상태에서 후처를 맞아들인 것으로 보았다.②일부일처제설이에 반해 일부일처제설에서는 왕실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예외로하면, 고려의 전형적인 부처 형태는 일부일처제였다고 파악한다. 다처제는 고려후기에 원나라의 영향으로 확산되어 조선 태종 때 처첩제로 이행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지배층에서 유행했다고 본다. 고려후기에서 조선초기에 작성된 호구자료에 나타나는 부처형태가 대부분 일부일처제라는 점이다.)한편 사료에 나타나는 ‘후시기의 분재문서(分材文書))에서 남녀차등, 장차남의 차별은 17세기 이후에야 나타나며, 그 이전에는 자녀 균분상속이 관행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친족제도와 관련이 깊은 제사상속의 경우 초기에는 윤회봉사)가 일반적이었고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봉사(外孫奉祀))가 행해졌으나, 17세기 이후에는 장자가 단독으로 방사하게 되었고 외손봉사 대신에 양자제(養子制)가 일반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는 조선후기 종법제의 정착, 문중조직의 성립, 동족촌의 형성 등에 대한 연구와 결합되어 조선시기의 사회상을 규명하는데 큰도움을 주고 있다.조선시기 상속제 연구가 이처럼 큰 진전을 보인데 반해 고려시기 상속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일본인 학자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연구에서 노비는 자녀간에 균분상속되었으나 토지는 적장자가 단독으로 상속했고 고려말에 이르러 균분상속으로 이행했다고 보았다.즉, ‘族’의 미분화와 토지의 개인소유 미발달이라는 두 요인이 작용하여 토지를 단체적으로 소유하는 형태를 띠었고, 국가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적장자 단독상속제를 제정했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적장자 단독상속설에 대한 반론은 여러방면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반론을 논자와 함께 한눈에 보기 좋도록 표로 정리하여 나열하겠다.최재석토지의 자유로운 매매?탈점?소송 등에 대한 기록과 균분상속을 시사하는 기록에 근거하여, 고려시기에는 노비뿐만 아니라 토지도 균분하였다는 견해신호철토지의 적장자 단독상속설과 자녀 균분상속을 모두 비판하였으며, 토지에 관한 한 적자들 간에 균등하게 상속되었으나, 여자는 기본적으로 상속권이나 소유권을 가질 수 없었다고 보고, 고려시기의 토지 상속형태를 ‘적장자 우선의 직자간(直子間)분할 상속제’로 제시했다.노명호고려시기의 토지 상속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설정되는 ‘전정(田丁)’의 상속과 사유지인 ‘민전(民田)’의 상속으로 나누어서 봐야하며, 사유지의 상속은 자녀 균분상속이 원칙이었다고 주장하였다.홍승기위의 여러견해를 절충하여 사유토지인 경우 자녀간 균등상속과 적장자 우대상속이 일반적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만 ‘공전(公田)’의 상속원칙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려시기 상속제대 대한 견해가 다양한 것은 자료부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렇듯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 때문에 상속제도에만 한정하지 말고 가족?친족제도와 관련된 여러 요소들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고려시기 상속제도의 실제 모습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3. 가족?친족규모고려시기의 가족규모에 대한 견해는 대가족제설과 소가족제설이 대립하고 있다.먼저 전자, 그다음 후자 견해 순으로 살펴보겠다.①대가족제설대가족제를 주장하는 견해는 기본적으로 고려시기의 호구자료에 근거하였다. 호구자료 중에는 호주의 여러 자녀 및 그들의 배우자와 소생이 기록된 경우가 확인된다. 따라서 호구자료에 기재된 인물들이 동거한 것으로 보면 고려시기의 가족규모는 대가족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또 다른 논자는 “부모 생전에 호적을 달리하고 재산을 분할하는 것(別籍異財)”을 금하는 고려의 법률조항에 착안하여 부모 생전에 자식들이 동거하는 형태를 국가에서 권장하였다는 견해도 제시되었으며, 또한 대가족제를 유지하게 되는 원인으로는 경제규모의 확대나 노동력 확보와 같은 요인이 제시되었다.②소가족제설소가족제설의 주요 논거는 혼인 후의 거주율이다. 친영제(親迎制))는 조선후기에 정착하였고, 고려에서 조선전기에 걸친 시기에는 남편이 처가로 가거나 부인이 시가로 가는 것이 모두 가능했으므로 대가족제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직역의 대가로 준 전정을 회수할 경우 처와 딸들의 생계를 위해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는 규정도 소가족제에 부합하는 사례로 간주된다.) 그리고 대가족제설의 주요 근거인 호구자료의 기재형태는 혈연관계를 표시하는 것으로서 거주형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4. 친족의 조직 원리와 형태에 대한 연구친족의 조직원리는 기준점에 따라 ‘조상’을 중심으로 하는 원리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원리로 나뉜다. 조상중심의 원리에 의거한 친족조직은 특정인물(시조후기에는 고조(高祖)를 공동조상으로 하는 동성(同姓) 8촌 내의 인물들이 핵심 친족집단을 이루고, 이것이 확대된 형태로서 특정 인물을 시조로 하는 동성 인물들이 대규모 문중조직을 형성했다. 이것은 부계 단계의 원리로 조직된 친족집단이다.비단계(非單系) 집단으로는 ‘양측적(兩側的)’ 계보로 구성되는 친족집단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시조가 되는 인물의 내외 자손들이 결합하는 형태로서 부계나 모계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순서로 이어지는 모든 계보들을 포괄한다. 따라서 집단은 상호 중첩되고 개인은 동시에 복수의 집단에 소속하므로 특별한 유인력이 없는 한 친족집단으로 기능하기 어렵다.이상의 조직원리와 대별되는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친족조직 원리이다. 이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친족조직은 ‘양측적’ 계보관계에 입각하여 ‘나’를 정점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를 띤다. 이러한 ‘친속’은 ‘나’를 매개로 성립하고 ‘나’의 관점에서만 일정한 범위를 형성하며, 대개 ‘나’의 사망과 더불어 의미를 잃게 된다.이렇듯 친족조직은 전혀 다른 두 원리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어느 원리가 우월한가에 따라 친족 조직의 형태가 달라지며, 이는 사회상의 변화로 이어진다.5.부계 친족집단을 전제한 연구1970년대 이전에는 대개 부계 친족집단의 존재를 전제하고 고려사회를 연구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친족조직은 통시적으로 성씨집단이 핵심을 이루었다는 일제시기 이래의 선입견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초조사의 일환으로 조선의 상속관행, 취락형태 등을 광범하게 조사하여 조선후기 이래의 전형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는 조선후기의 친족형태를 조선전기나 고려시기까지 적용하는 경향 속에서 진행되었다.외손봉사(外孫奉祀)는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부계 친족집단의 존재를 당연시 하였으며, 동선동본이 25%이상 차지하는 경우를 ‘동족부락’으로 인정하여, 부계 혈연집단을 전제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나말려 영향을 끼쳤다.6. 친족조직 원리 및 친족형태에 대한 실증적 연구⑴최재석 연구1600년대 전반의 산음장적을 분석하여 이 지역에는 동족집단 내지 동족부락이 존재하지 않으며, 가족형태는 부부가족이 대부분이고 직계와 방계가족은 10% 미만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는 부계 친족집단의 존재를 의심하는 단서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족보와 동족조직의 관계를 살펴 이른 시기의 족보일수록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다양한 계보를 끝까지 기재했고, 17세기까지는 자녀를 출생순서대로 기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합의 범위도 부계에 국한되지 않는 가족적 규모의 단결에서 점차 부계 8촌 범위로 확대되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동성동본의 문중조직이 성립하는 것으로 판단했다.또한 고려말의 호적을 분석하여 고려시기의 가족은 기혼녀, 사위, 장인, 장모 등이 동거하는 유형이 다수라고 파악하였으며, 이에 근거하여 ‘쌍변적 방계가족)’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설정하고, 이러한 형태의 가족유형으로 미루어 ‘족’단위의 단체적 소유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종(宗), 종자(宗子)와 같이 동성 친족조직에 입각한 용어가 소수 확인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법제상의 쓰임일 뿐, 실제로 그러한 집단이나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이상의 연구를 통해 17세기 이전에는 집단이나 조직을 이루는 부계혈연의 강한 결합은 있을 수 없었다고 밝히고, 고려의 친족조직 형태를 ‘부계 우위의 비단계(非單系)’로 규정했다.⑵노명호의 연구고려시기의 친족조직 형태를 ‘양측적 친속’으로 파악하였다. 우선 산음현 촌락 거주자들의 혈연관계를 추적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규명하였다.17세기 초 사음현 촌락 내의 혈연관계망은 부계에 편중되지 않고 本族?外族?妻族으로 뒤얽혀있었다. 거주자들은 대개 8촌 범위의 친속관계를 갖는 소혈연군을 형성했고, 소혈연군들은 서로 중첩되며 연결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같은 성씨일지라도 폐쇄적 집단을 이루지 못하고 소혈연군들에 나뉘어 섞여있었다.) 이에 따라 17세기 초 다.
    인문/어학| 2008.11.20| 6페이지| 1,500원| 조회(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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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5권 원의 간섭
    2.원의 간섭과 정치체제의 변동무신정권의 종식은 곧 국왕권의 회복과 왕정의 복구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원의 간섭이 시작됨으로써 고려의 정치체제는 무신정권 이전으로의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편성되었다. 그 것은 원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고려의 국왕이 측근세력을 육성하여 이를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측근정치(側近政治)의 형태였다.1. 여원관계의 성립과 측근정치의 전개⑴麗 -元관계의 성립①몽고와의 강화 : 고려의 국왕과 문신관료들이 정치적 입장이 신장하였다.②원종의 복위 : 임연)이 원종을 폐위했으나, 원이 다시 원종을 복위시켰다. 원종의 복위 가 왕실의 독자적인 외교와 원의 압력에 이해 이루어짐으로써 문신관료들의 입장이 약화되고, 국왕이 원에 의존하는 자세가 점차 심화된다.)국내에서는 문신관료들을 대신할 수 있는 왕권기반으로 원종이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총신(寵臣)’을 육성하거나 환관?내료(內僚)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형태로 나타났다.⑵원의 간섭①다루가치 : 원은 고려에 다루가치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내정에 간섭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별초 진압과 뒤이은 일본원정)을 직접 지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부원세력 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②부원세력 : 고려인들이 원의 관리가 되어 고려의 정치에 관여하였다. 이 때문에 홍다구 를 중심으로 부원세력이 형성되었고, 이들의 위치는 오랫동안 몽고와 전쟁관계에 있었 던 어느 정치세력보다 우월하였다.-> 왕권이 안정된 후에 원의 직접적인 간섭이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⑶충렬왕?①원의 간섭 배제 : 충렬왕은 자신이 원의 부마라는 점을 활용)해 당시 고려에 파견되 어 있던 원의 관리와 부원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원종이후 소외되었던 문무관료들과 관 계를 개선하여 왕권을 확립하고 원의 직접적인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②친원정책 : 충렬왕은 원에 충성하는 번왕(藩王)으로써 원제국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에서의 국왕권을 강화하였다.->원의 간섭은 고려의 국왕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고려의 국왕은 원의 지원을 바탕으로 국내에서의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고려가 원의 간섭을 벗어날 때까지 두나라 관계의 전형이다.⑷측근정치의 전개①측근정치의 형성원인 : 고려의 국왕이 왕권의 기반을 일차적으로 원의 후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 정치형태이며, 취약한 국내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측근정치를 육성 하여 정치를 운영하였다. 또한 원의 후원을 받는 대신 정치적 책임을 직접 부담하여야 했 으므로 국왕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정치집단이 필요하였다.②측근세력의 육성 : 즉위하기전 세자로서 원에서 시종하였던 관리들과 환관?내료?역관과 왕비의 사속인(私屬人)인 겁령구(怯怜口))를 중심으로 육성하였다.이들에게 관직과 노비를 주어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정방?순군(巡軍))?응방(鷹坊))? 정동행성등 권력기관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국왕이 측근세력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과 병권, 그리고 대원외교의 창구등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한다.③측근정치의 전개왕위가 교체될 때마다 새로이 즉위한 국왕을 중심으로 ‘개혁’이 표방되었고, 새로운 국왕 측근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왕의 ‘폐행(嬖幸))’들을 대거 숙청하였다.④측근정치의 폐단소수의 국왕 측근세력에게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그에 따른 폐단이 적지 않았다. 국왕 측 근세력이 정방을 통해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이들이 관행을 무시하고 고 위관직에 오르는 일이 많았으며, 관직을 둘러싼 뇌물이 오가는등 정치기강이 문란해졌다.또한 토지탈점에 의한 대토지 소유 경향이 심화되었는데, 사급전(賜給田))과 모수사패 (冒受賜牌)) 이용하여 토지를 탈점하기도 하였고, 남의 토지를 억지로 뺐는등 소유지를 확대해 나갔으며, 이로인한 당시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켰다.⑤측근정치의 한계정치세력으로서의 재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구조적인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2.정치세력의 재편⑴문무관리무신정권 붕괴 후, 무신들이 축출되고 왕권이 회복되었으며, 이 과정에 참여한 문신관료들 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들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무신붕 괴와 동시에 원의 간섭이 시작되어 측근정치가 성립되면서 그들의 기대는 무너졌다.원의 간섭으로 인한 그들의 지위가 불안정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문무관료들은 충렬왕 초에 국왕을 중심으로 원의 직접적인 간섭을 배제하는데 협조하였다. 충렬왕은 측근세력육성을 통한 권력독점을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문무관료들은 측근정치라는 정치현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국왕 측근세력과 혼인 등을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적극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충렬왕 중기에 이르면 이들이 고려 후기사회의 유력한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權門勢族)으로 자리잡게 된다.⑵신진관료지방의 향리들이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한 신진관료들은 원의 간섭과 측근정치의 전개에 의해 문무관리보다 더욱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되었는데,) 측근세력에 의한 인사권의 독점은 신진관료의 정치적 지위마저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그러나 이들은 측근정치의 권력구조 속에 편입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진관료 가운데 일부가 국왕 측근세력과 타협하면서 정치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충렬왕 초에 신진관료들은 정방이나 정동행성등의 권력기관에 참여시키거나 전시(殿試)를 실시하여 국왕과 신진관료 사이에 의제적(擬制的)인 좌주(座主)-문생(門生)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을 왕권의 기반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그 결과,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역시 권문세족으로 성장해나갔다.그러나, 신진관료의 권문세족화가 모든 신진관료들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였으며, 대부분의 신진관료들은 국왕 측근세력의 성장과 그로 인한 폐단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측근 정치의 구조 자체를 부정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현상적인 폐단만 비판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들은 원의 간섭을 사대론으로 합리화 하는 가운데 단지 그 안에서 국왕 측근세력에 이한 불법행위를 근절시켜 고려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국왕 측근세력과 대립하다가 제거되는 등 국왕 측근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인해 공민왕 때 측근정치의 구조가 극복된 뒤에야 비로소 이들이 정치세력을 갖는 신진사대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문/어학| 2006.12.10| 3페이지| 1,000원| 조회(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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