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형식윤리학적인 면에서 교과의 의미를 드러낸 ‘지식의 형식’의 내용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제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 사회는 누구나 노동과 스콜레를 함께하는 사태에서 그 양자를 각각 별도의 집단에 분담시키는 사태로 나아왔어야 마땅하다. (중략)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왜 스콜레와 노동을 다른 사회 집단에 분담시켜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스콜레도 중요하고 노동도 중요한데 이것을 한 집단이 동시에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한 방향에만, 구체적으로 실생활에 유용한 노동에만 열심을 다하기 때문에 스콜레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스콜레가 소홀해지기 쉽다고 하여 별도의 집단에만 분담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즉 고대 희랍처럼 한 집단은 일만 한 집단은 스콜레에만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지식의 형식은 교육내용으로는 보는 지식, 교육방법으로는 이해를 위한 교육으로 대표된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형식도야이론, 지식의 구조와는 달리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내용들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중요시한 생활적응교육과는 달리 교과의 내재적인 가치를 중요시하였다. 여기서 피터즈는 ‘교육은 문명된 삶의 형식에로의 성년식’이라고 표현하였다. 사회화의 정의와 비슷한 주장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교육을 내재적으로 가치 있는 내용을 전수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내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은 한 개인의 관심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형식이라는 공적 전통 또는 공적 유산에 사람들을 입문시킴으로써 그 전통과 유산이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져 나가도록 하는, 종족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영위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의 연장선상으로 자유교육을 보자면 자유교육이란 고대 희랍에서와 같이 노예가 아닌 자유민을 위한 교육을 뜻한다. 자유교육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은 7자유학과였다. 피터즈는 이 7자유학과를 ‘인간경험의 상이한 측면을 드러내는 지식의 형식’을 추구한다고 말함으로써 공적 전통이나 유산에 바탕을 두지 않는 교육을 비판하였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지 않은 ‘공적 전통, 공적 유산’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또한 ‘공적’인 전통과 유산을 포괄하는 것이 세계적인지 아니면 그 국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다.피터즈는 형식도야이론을 비판한 듀이와 주장을 같이 하고 있어서 비교?대조하기 좋았다. 둘 다 모두 7자유학과를 비판하며 삶과 괴리감있는 내용의 교육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피터즈는 자유교육(피터즈가 말하는 지식의 형식이 그 원래의 성격에 가장 충실한 형태로 전수될 때의 교육의 모습)과 직업교육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두개의 교육을 구분하는 것이 스콜레와 ‘비천한’ 활동의 구분을 없앰으로써 자유민의 이상을 낮추어서 누구나 다소간 노예로 살도록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직업교육을 ‘비천한’활동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현대인은 스콜레와 비천한 활동을 함께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도 스콜레와 비천한 활동을 구분지어가며 자유교육을 받는 집단과 직업교육을 받는 집단을 분리해야 하는 것일까? 이 의문은 첫 문단에서 제기한 의문과 이어진다. 꼭 스콜레와 생활에 종사하는 일을 하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야하는지 의문이 든다.
교사의 수업 전문성사회과교육과20061325 정소영교사의 수업 전문성이란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방법’에서의 전문성과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지녀야할 ‘마음가지’의 전문성이다. 이 책에는 ‘기술로서의 수업 전문성’과 ‘이해로서의 수업 전문성’으로 나와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교사의 수업 전문성이라 함은 수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지녀야할 기술과 지식을 일컫는다고 오해한다. 이것은 수업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가르치느냐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수업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뿐이다. 또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사는 기술을 동원하여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것은 본래 교사의 지위를 높여주기 위해 ‘전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도와는 전혀 반대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대로 된 ‘교사의 수업 전문성’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저자는 이 용어를 ‘수업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전문 지식과 기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히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파악한 관점을 비판한다. 위에서 밝혔듯이 이 주장에는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교사의 역할이 빠졌다. 이러한 지식과 기술은 교사가 전문성을 지녀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의 궁극적인 목표가 빠진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저자는 전문성과 윤리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략) 그 지식과 기술이 더욱 고도의 것으로 발전할수록 수업 윤리성 또한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지식과 기술이 고도의 것으로 발전할수록 윤리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중간 설명이 빠진듯하다. 또한 이러한 윤리성의 함양을 위한 별도의 조취를 취하는 것이 교사의 수업이 주어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전문 지식과 기술을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왜 분명히 해주는지도 모르겠다.이 논의의 결론으로 저자는 기술로서의 수업 전문성은 수업의 지말이며 이해로서의 수업 전문성은 수업의 근본임을 강조한다. 이 논의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술로서의 수업 전문성을 비판하고 암기위주 교육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수업해야함을 주장한다. 물론 나도 이 주장에 동의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해로서의 수업 전문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 전문성은 ‘심성함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로 발휘하게 되는 교사의 능력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또한 ‘수업의 실제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간다면 즉, 수업의 근본을 충분히 갖추었지만 실질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없어서 그 심성 등을 학생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즉, 수업의 지말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는 교사는 수업의 전문성을 갖춘 교사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수업이란 것은 교사와 학생이 관계를 맺는 사태라고 하였는데 교사가 자신의 심성만 수련하느라 기술을 갖추지 못하여 학생과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이미 가치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암기위주 교육의 폐해는 학습자가 단편적인 지식을 이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심성을 함양했다고 해서 그러한 단편적인 지식을 학습자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물론 저자가 이러한 기술들을 간과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이해로서의 수업 전문성에 가려서 비교적 적게 강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책에는 암기위주 교육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암기위주 교육의 문제는 암기 대상이 단편적 지식이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이 지식이 죽은 지식인지 산 지식인지에 관한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논의는 선인들이 말하는 심성함양을 위한 공부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인’이라는 것은 동양의 선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서양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여 지식의 축적만을 강조하였는데 그렇다면 서양의 교육은 그릇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들면서 지금 말하고 있는 ‘교사의 수업 전문성’이라는 것이 한국의 교육상황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것인가에 관한 의문도 들었다. 그리고 이해로서의 수업 전문성은 기술로서의 수업 전문성 보다 암기위주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하였다. 단지 자신의 수업을 심성함양이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게 하는 소극적 계기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업이 암기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논의는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더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반성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성에서 그친다면 문제를 파악한 의미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 해결책이 책에는 ‘교과교육의 가능성과 위험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추상적인 듯 하다. 물론 개인이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생각들이나 시도하는 방법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일일이 서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심도깊이 연구한 학자들이 방향을 제시해주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