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의 비극, 비시 프랑스2차 대전의 발발과 독일의 프랑스 침공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 제 2차 대전의 막이 올랐다. 독일군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술. 즉, 전차와 같은 기갑차량과 보병이 함께 돌격하는 전격전 (Blitzkrieg)을 펼쳐 폴란드를 단 5주 만에 무력화시켰다. 프랑스는 접경지역인 마지노선(Ligne Maginot) 요새를 더욱 견고히 구축하는 등 독일의 기습 침공에서 프랑스를 방어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9개월 동안 거의 휴전상태에 가까운 거짓 전쟁(Sitzkrieg)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느슨해져 있었다. 1940년 5월 10일에 나치 독일군(국방군;Wehrmacht)은 프랑스군이 침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경로로 진격하여 프랑스군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또한 총지휘본부의 우유부단함, 일관성 없는 명령체계, 부적절한 전략과 부족한 훈련 또한 독일군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거듭된 후퇴 속에서 수도를 투르로 천도했다가 후에 보르도로 천도하였다. 수백만 명의 프랑스 시민들이 피난을 가고, 공공기관이 마비되는 등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다. 당시의 총리였던 레노는 독일의 공세에 지친데다, 협박까지 받아 결국 사임하게 되고, 당시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르브룅은 필리프 페탱 원수(Marshal Philippe Petain)에게 새로운 정부의 구성을 맡겼다.비시 프랑스의 수립과 독일과의 휴전협정1940년 6월 16일, 페탱을 대통령으로 하고, 꺄미유 쇼땅(Camille Chautemps)을 총리로 한 임시 정부가 비시(Vichy)라는 조그마한 온천 휴양도시에서 세워졌다. 페탱은 도덕적으로 붕괴된 국회에 의해 569대 80으로 새 헌법 초안의 권한과 무제한적인 행정, 입법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았고, 7월에 선포된 ‘제헌법령’은 페탱에게 대통령과 수상의 권력을 집중시켰다. 이 임시 정부가 세운 국가는 보통 비시 프랑스(France de Vichy) 또는 비시 정권(Regime de Vichy)으로 불렸다. 이 정권이 존속되던 시기에는 프랑스국(國)(L'Etat Francais)이라고 불렸다. 이 정권은 ‘노동, 가족, 조국(Travail, Famille, Partie)’ 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것은 공화정의 ‘자유, 형제애, 평등(Liberte, Fraternite, Egalite)’을 대체하였다. 새로 대통령으로 취임한 페탱 원수는 17일 라디오를 통해 “비장한 마음으로 여러분께 고합니다. 전투는 중지되어야 합니다.” 라는 선언을 통해 침략자인 나치 독일군과 전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내비쳤다. 한편 르노와 드골(Charles de Gaulle)은 정부를 프랑스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나 동맹국인 영국으로 옮기고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였다.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은 프랑스 국민위원회를 수립하였고, 18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프랑스 저항의 불은 꺼지지 않아야 하며,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연설을 통하여 침략자에 대해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그러나 1940년 6월 22일. 1918년에 프랑스가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었었던 르롱드에 있던 열차에서 비시 정부는 히틀러와 협상을 벌여 결국은 침략자 나치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 휴전협정 조건은 가혹하였다.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의 3개 도(都)는 다시 독일의 제 3제국(Drittes Reich;히틀러 치하 나치 독일의 공식 국명)에 병합되어 독일화되었으며, 수만 명의 알자스-로렌지방의 프랑스 젊은이들이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Waffen-SS) 제 33사단 샤를마뉴로 징병되었다. 또한 점령자들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인구밀도가 높고 생산성이 높은 지역은 독일의 점령지로 전락했다. 군은 10만 명으로 감축되고 국내 질서를 보장할 정도의 최소한의 장비만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의 함대는 해산되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프랑스군은 점령군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비시 프랑스의 경제비시 프랑스의 경제는 철저하게 점령국인 독일의 이익에 종속되었다. 2차대전 동안 독일은 전쟁으로 획득한 점령지마다 혹독한 경제적, 인적 착취 정책을 펼쳤었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는 점령군의 끝없는 그리고 가혹한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하였으며, 점령군의 전쟁 수행에 막대한 기여를 해야만 했다. 1943년에는 농업 생산량의 15%와 공업 생산량의 40%가 독일에 수출되었고, 교환 목적으로 과대평가되었으며, 점령 비용이라는 목적으로 프랑스인이 대부분 부담하였다. 그 해 프랑스가 독일에 지불한 액수는 전체 국민소득의 36,6%에 달하는 액수로서, 전전(戰前) 독일 국민총생산량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또한 수많은 프랑스의 기업들이 비행기 엔진, 트럭, 자동차, 타이어 등을 점령군을 위해 제작해야 했으며, 독일의 생산량의 6%에 가까운 양을 제조했다. 1943년 2월에는 강제노동국을 설치하여 62만~70만 명의 프랑스 청년들을 독일에 노동자로 보냈다. 또한 공업 생산량을 증대를 위해 1940년 노조연맹이 금지되었고, 1941년 5월에는 노르 광산노동자 파업과 같은 파업들이 일어났지만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한편 농업 생산성을 늘리기 위한 조치로 소농장 합병이 권장되었다. 그리고 추산에 의하면 1940년에서 44년까지 프랑스는 독일에 1조 1천억 프랑을 지불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18세기 이후까지 없었던 필수품의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기근이 다시 나타났다. 수많은 어린이들은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통 받았으며, 배급권은 하루 1,200칼로리 이상을 보장하지 못했다. 천문학적인 물가의 암시장이 성행하였고, 석탄과 휘발유는 턱없이 부족하여 사람들은 가스로 자동차를 운행하거나 대중교통수단, 자전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비시 프랑스의 정치비시 프랑스의 정치 또한 독일의 종속을 피할 수 없었다. 1942년 11월 11일, 점령군이 비점령지역으로 진군함에 따라 비시 프랑스는 점점 독일이 시키는 대로 하는 괴뢰정부(傀儡政府)가 되어갔다. 독일은 소련의 공산주의에서 서유럽 사회의 문명을 보호한다는 명목(“독일의 승리는 유럽의 자유다,”라는 구호를 내세움.)으로 프랑스의 정치적 협력도 강력히 요구하였다. 1941년 5월, 정부 수반인 다를랑 제독은 독일군이 시리아와 튀니지에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허용했고, 유태인을 자발적으로 탄압하였는데, 1940년 10월 30일에 독자적인 법령을 정하여 프랑스에 거주하는 30만 명의 유태인을 천민으로 간주, 모든 유태인들을 경찰서에 등록, 신분증에 “유태인”이라 표기하였으며, 금지된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유태인들을 감시하였고, 파리 지하철에서는 마지막 객차에만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7만 6천명의 유태인이 체포되어 독일의 집단수용소로 이송되는 것을 방조하였으며, 심지어 그것을 돕기도 하였다. 1942년 5월에는 유태인들에게 노란색 다윗의 별(유태인의 상징)을 패용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라발은 1942년 7월 16~17일에 파리에서 “벨 디브(Veld'Hiv)”의 일제 소탕령을 내려 어린이 4,051명을 포함한 1만 2,884명의 유태인들이 체포되어 독일의 집단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3천에서 4천명의 프랑스인들이 게슈타포(Gestapo;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의 보조원으로 복무하여 항독 운동가들과 유태인을 추적하는 일을 도왔으며, 다를랑(Darlan)이 이끄는 1만 5천에서 4만 명의 민병대원들도 같은 일을 수행하였다. 이들로 인해 전체적으로 약 4만 명의 레지스탕스 단원들이 살해당했고, 6만 명이 ‘드골주의, 마르크스주의 또는 체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10만 명이 인종적 이유로 독일의 집단수용소로 압송되었다.레지스탕스 운동과 프랑스의 해방결국 이와 같은 강압적이고 잔혹한 대독협력(對獨協力)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비시 정권에 발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내적으로는 대도시에서 전투, 해방, 의용병, 시민 군사조직, 국민전선과 같은 항독(抗獨) 지하단체(Les maquis)들이 나타났고, 독일의 소련 침공(1941년) 이후에는 공산당이 대거 항독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연합군을 위한 정보 수집, 격추된 연합군 항공기의 조종사의 은신, 전단과 지하신문 인쇄, 점령군 병사나 협력자에 대한 테러를 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대내적 무장운동은 1944년 3월 대내 프랑스군(Les Forces francaises de l'interieur)으로 통합되었고, 쾨니그의 지휘를 받았다. 대외적으로는 영국의 도움을 받아 “자유 프랑스” 라는 소규모의 저항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르클레르크와 쾨니그의 지휘하에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 대항해 싸웠다. 특히 르클레르크 사단은 1944년 8월 대내적 항독 운동의 지원을 받아 연합군 도착 이전에 파리를 해방시켰다.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 장군인 폰 콜티츠(von Koltiz)는 파리를 불태우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였다. 드골은 파리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26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드디어 프랑스는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과 점령국인 독일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 배경1968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은 당 제 1서기인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를 해임했다. 후임으로는 슬로바키아의 알렉산더 두브체크(Alexander Dub?ek), 대통령에는 스뵤보다 장군이 지명되었다. 4월에는 정부 내부 구조의 개조가 행해졌고, 레나트로를 대표하여 국가 계획 위원회 의장인 체르니크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중앙 당 위원회 총회에서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행동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등에 업고 개혁 운동은 지식인의 운동에서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메스컴은 활발하게 이데올로기 논쟁을 게재하였고, 체제의 과오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개념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개혁이 추진되어 기업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노동자 평의회의 설치가 제창되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온건 개혁파가 주축이 되어 국가, 경제, 사회, 문화, 조직에의 당의 독단적 개입의 억제, 당 내 민주주의를 강화함으로서 큰 진전을 보였다. 이들은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족적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강조하여였다. 6월 27일에는 루드빅 바쿨릭(Ludvik Vaculik)에 의해 ‘2000어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선언은 많은 사람들을 개혁에 동참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은 내정 지향형으로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Facts Organization)의 가맹국들은 당초 비 개입(非 介入)의 자세를 취했지만, 개혁의 급격한 진전으로 인해 점차 초초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8월 3일,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소련,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는 브라티슬라바 선언에 함께 서명했다. 이 선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흔들릴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주의를 부르주아 사상, 그리고 반공군(反共軍)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이 선언에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가맹국들 사이에서 다당제(多黨制)가 채택되는 것을 방해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소련이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위성국들을 필요하다면 군사적 무력동원도 불사하여 그들의 요구를 강요하는 소련의 대외 정책을 흔히 ‘브레즈네프 독트린’ 이라고 한다.) 브라티슬라바 회담 이후 소련군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서 물러났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여전히 집결해 있었다.2.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1968년 8월 20일, 깊은 밤에 바르샤바 조약군 중 소련,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의 군사 약 20만 명이 불시에 체코슬로바키아 영내로 침입했다.(동독군은 영내 침입 3일만에 다시 동독으로 철수함. 이유는 2차대전 이전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텐(Sudeten) 지역을 빼앗기면서 나치 독일군(국방군;Wehrmacht)이 침입해서 온 나라를 점령당한 악몽을 체코슬로바키아인들에게 상기시켰기 때문임.) 이에 대해 당 간부회는 항의성명을 발표하였고, 동시에 시민들에게 무저항을 외쳤다. 이로 인해 침입군은 단기간 내 전 영토를 점령했다. 소련군은 8월 21일에 두브체크 제 1 당 서기, 체르니크 수상, 스무르코프스키 국민 의회 의장 등 정부 유인 다수를 포박하고 소련으로 납치했다.스뵤보다 대통령 주재 하에 22일 소집된 국민회의는 프라하 교외의 비소차네이 지역에서 비밀리에 개최된 제 14회 임시 회의에서 의결된 소련의 군사개입을 비난하고, 현 정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민간단체도 여기에 보조를 맞추었다. 이에 소련 정부는 친소련파로 구성된 신정부 수립이라는 당초의 계획을 단념하고, 현 정권과의 교섭을 택했다. 스뵤보다 대통령과 석방된 당과 정부 지도자는 23일부터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서기장, 코시긴 수상 등 소련측 수뇌와 교섭을 벌였고, 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정세의 ‘정상화’를 목적으로 하는 조처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3. 개혁의 퇴보, ‘정상화’ 조치8월 말부터 9월 초에 걸쳐 부수상 미크(Meak)를 비롯한 몇 명의 개혁파 지도자들이 정부의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9월 중순부터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이 가결되어 검열 제도가 부활되었다. 많은 신문, 잡지가 정간되었고, 언론 기관에서도 많은 개혁파 당원들이 추방당했다. 10월 중순에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 사이에 주둔 협정이 맺어졌다. 이로서 침입군의 주둔이 합법화되었으며, 11월에는 외국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이 동안 당 상층부에서 세력 재편성이 진행되었고, 중도파가 등장하였다. 8월 말 슬로바키아 당 제 1 서기에 선출된 후사크는 중도파의 지지자가 되었다. 중도파는 지나친 개혁을 비판하였고, 당의 지도적 역할의 강화를 호소하였다.외국군에 의한 점령과 개혁의 후퇴는 일반 국민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주었다. 이로 인해 10월에서 11월에 외국군 철수 요구 시위, 11월에 학생들의 시위, 1969년 1월 카렐 대학 학생인 파라후의 항의 분신자살 등을 유발했으며, 저항 시위는 군중에 의해 프라하의 민간 항공회사 사무실 습격으로 파급되었다. 소련은 다시 바르샤바 조약군의 합동 훈련을 실시하여 군사적 압력을 증강하였으며, 정상화 조치를 철저히 시행할 것을 요구하여 1969년 4월 17일, 두브체크는 해임되고 후사크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서 1968년에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약 1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블록화 현상(Pillarisation - Verzuiling)블록화 현상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비 다민족적인 다양한 문화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사회는 다른 종교, 이데올로기에 따른 조그마한 블록화 된 조직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각의 조직들은 별개로 운영된다. 이러한 블록들은 그들만의 사회적인 시설, 예를 들면 자신들만의 신문, 방송국, 학교, 정당, 회사, 병원, 대학교, 스포츠클럽 등을 가지고 있다. 몇몇 회사들은 특정한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원을 고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블록의 사람들과 전혀 개인적 접촉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을 야기하기도 한다. 네덜란드에는 최소 3개의 블록(개신교, 카톨릭, 사회민주세력)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카톨릭 신도들은 카톨릭 블록에 있다. 동방정교회나 기타 개신교 신도들은 개신교 블록에 있으며, 사회민주세력 블록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블록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들은 주로 중상류층의 광교파(교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기독교 신자)나 무신론자들인데, 이들은 일반 블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블록 현상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완전 주권 철학을 기초로 한 반 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 때문이다.아래의 표는 블록별로 가장 중요한 시설들에 대한 표이다.개신교카톨릭사회민주일반정당 (1945년 이전)ARP, CHURKSPSDAPVDB, LSP정당 (1945년 이후)ARP, CHUKVPPvdAVVD방송국NCRV, VPROKROVARAAVRO연합체CNVNKVNVVANWV고용주PCWNKW없음VNO신문TrouwVolkskrantHet Vrije VolkNRC, Handelsblad학교기독교 학교로마 카톨릭 학교자유학교, 공립학교공립학교대학교Vrije대카톨릭대주립대학주립대학병원녹색/오렌지 십자흰색/노랑 십자녹색 십자녹색 십자여가 (예)토요 축구 클럽일요 축구 클럽민속춤춤 교습소2차 대전 이후,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개신교나 카톨릭 블록 쪽에서도 블록화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연합 시민단체인 Nederlandse Volksbeweging이라는 단체를 창설하였고, 이 단체 안에서 모든 블록의 급진파들이 모였다. 그들은 정치 시스템을 돌파(doorbraak)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블록화 현상은 네덜란드 사회에 이미 정착되었고, 쉽게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1960년대에서야 이러한 블록들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D66당과 PvdA 내의 신좌익 그룹의 정치적 비판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어 개신교 방송인 VPRO는 일반 블록에까지 영향을 뻗쳤다. 또한 젊은이들은 이러한 블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블록간의 이동성이 증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블록 사람들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높은 부의 창출과 교육 수준은 사람들을 블록화된 기관으로부터 해방시켰다. 21세기 들어, 블록화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 영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영 방송들은 각각의 블록별 방송국이 있다. 또한 아직도 조그마한 블록들이 남아있는데, 개혁교회는 그들만의 학교와 대학, 신문 등을 가지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무슬림 이민자들의 단체인 양방향 사회 또한 블록화 현상의 일부로 취급되기도 한다.
1. 민족주의에 대한 정의민족주의(民族主義)라 함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옮긴 말로, 기본적으로 국민, 민족 또는 국민적 정체성을 사회 조직의 근본적인 단위로 삼는 이념이며 이에 기반을 두어 몇 가지 정치적 주장을 한다. 제일 중요한 것으로는 "국민이 국가를 합리화하는 유일무이한 근간"이라는 주장과 "개별 국민은 국가를 형성할 권리가 있다"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형태를 갖출 때 국민주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또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의 특수 이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민족주의는 특정 국민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민족주의는 인류의 활동 대부분을 그 특징에 있어서 민족주의적으로 파악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국민은 고유한 국가 상징, 국민적 특성, 국민적 문화, 국민 노래와 국민 문학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적 신화와 소수 사례의 경우 국민 종교 또한 가지고 있다. 개인들은 국민 가치관과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며 국민 영웅을 우러러보고 국민 음식을 먹으며 국민 스포츠를 즐긴다. 그리고 자신을 국민의 일부로 파악하며 국민국가들이 정통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형식적으로 "국민주의자"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수동적 국민주의자이다. 그러나 현대의 생활 언어에 있어서 "민족주의"는 국민주의적 요구를 지지하는 정치적 (그리고 가끔 군사적) 행동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분리주의, 국민병합주의(Irredentism), 군사주의 등을 포함할 수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민족청소의 형태를 취한다. 정치학자들(그리고 언론 매체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발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18세기 이후 민족주의는 미국의 독립 등에도 큰 기여를 하는데, 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국가는 침략해도 된다는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의 국가주의로 발전되어, 서구에서는 부정적으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2. 독일 민족주의의 형성독일(Deutschland)은 신성 로마제국(Heiliges Romisches Reich) 이래로 수백 개에서 많게는 수천 개의 나라로 쪼개져 있었던 영방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는 국가였다. 하지만 하나의 민족주의는 중세 때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독일 국민(Deutsche Volk)은 유럽에서 오래되고 규모다 큰 국민들 중에 하나다. 초창기에는 ‘독일어(Deutsche Sprache)’를 사용하는 부족들(그러나 유럽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방언과 지역문화를 지닌 채로 항상 여러 국가에서 거주했다.)의 고위 귀족들이 형성한 이익공동체에 기초를 두었다. 이 귀족 공동체는 동 프랑크 제국(Ostfrankenreich)에서 자신들의 국왕을 선출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었고, 로마제국의 재건과 독일 국왕들의 대제국 건설계획을 함께 분담하였는데, 이는 수 세기에 걸쳐 독일 국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문화적 언어 공동체인 독일 민족은 어떤 공통의 국민형성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 독일의 핵심지역에서는 ‘독일 국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였다(하지만 국민에 대한 정의는 독일사(Deutsche Geschichte)의 딜레마로 계속 남아 있었다). 근세 초의 모든 국가에서들처럼 독일에서도 국민과 민족 간의 구분은 있었다. 초기에는 제국 귀족들만이 국민을 이루었지만, 정치적 해방의 과정에서 민족은 비로소 국민으로 여겨지게 된다. 즉, 독일인의 국민 형성은 인접 국가와 민족의 유사한 사건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수행되었으며, 따라서 독일 국민 형성은 그 각각의 단계 모두 단지 유럽적인 테두리 내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으며, 독일인과 그 국민 형성의 역사에서 인종적으로 정의된 언어 공동체와 정치적으로 정의된 국민 사이의 차이점이 간과될 수 없다는 것이다.2. 독일 민족주의의 발전, 잘못된 발전과 쇠퇴독일 민족주의는 처음에는 독일의 통일을 이루어 낸 긍정적인 요소로 평가되었다. 프로이센(Preußen)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의 주도하에 통일을 이루어, 황제(Kaiser)가 지배하는 절대 왕권의 중앙집권적인 제국(Kaiserreich)이 되는데, 이러한 통일의 배경에는 모든 독일인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민족주의(Nationalism)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세계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현대에 와서 독일의 민족주의는 위험한 요소로 취급받게 된다.세계 제 1차 대전 이전에 비스마르크는 철혈(Eisen und Blut)정책을 펼쳐 독일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독일 민족을 세계에서 제일 강한 민족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고, 결국 이러한 시도는 세계 제 1차 대전의 발발로 이어지게 된다. 세계 제 1차 대전에서 독일은 프랑스를 꺾고 전선을 확대해 나갔으나 무리한 전선의 확장으로 인해 패배하게 된다.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영토의 일부도 잃게 되었으며 군비도 제한되었다. 그리고 이후 전 세계를 휩쓸었던 대공황의 광풍에 독일도 휩쓸리게 되었다. 식민지가 있었던 영국, 프랑스 등을 비롯한 승전국들은 광풍에 살아남았지만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은 독일로서는 광풍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로 인하여 결국 독일 민족주의는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그 선봉장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 당(NSDAP). 이하 나치당)이었다.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독일 민족주의를 반유태주의와 결합시켰다. 독일 민족주의는 점점 광기를 띄어갔고, 독일 민족의 순수성에 집착하였다. 이로 인해 2차 대전 이전에 수정의 밤(Kristallnacht;유태인 상점들의 깨진 유리들이 마치 수정처럼 빛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때 많은 독일인들과 돌격대(SA;Sturmabteilung)는 유태인들의 상점을 습격해 부수고 유태인들을 거리에서 폭행하거나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2차 대전 도중 벌어진 유태인 대학살(Holocaust)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독일은 유태인뿐만이 아니라 집시 등의 소수민족, 그리고 장애자나 노약자들도 수용소에 보냈는데 이러한 인권유린 범죄는 ‘독일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이라는 이름 아래에 묵인되었다. 또한 독일인의 우월성을 밝히기 위해 나치 독일에서는 우생학(優生學)이 발전하였다. 이 시기 진정한 독일인의 표본은 ‘금발에 키는 170cm 이상이며 흰 피부를 가진 사람’ 이었다.
카프카의 변신(Franz Kafka - Die Verwandlung)[작품 소개]1912년에 집필하여 1916년에 출판하였다. 평범한 독신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 자기가 한 마리의 기괴한 갈색 벌레로 변신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결근하면서 회사에서 해고당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결근을 수금 대전(收金代錢)의 횡령 때문이라고 추측한 회사의 지배인이 찾아온다. 그레고르는 변명하기 위해 벌레의 모습으로 지배인과 가족 앞에 나타난다. 이 거대한 벌레를 보고 지배인은 도망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통곡하며 졸도한다. 그레고르는 사람의 말은 알아듣지만, 그들은 벌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고독과 불안의 생활이 시작되는데, 날이 갈수록 열등감·불면상태·식욕부진에 빠져들어 쇠약해진 끝에 결국 어느날 아침에 죽고 만다. 이 작품은 카프카 생전에 간행된 소수의 작품 중의 하나이며, 변형기담(變形奇譚)에 특유한 유머와 이상한 사건을 예사로운 일처럼 묘사하는 작자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실존(實存)의 차원과 부조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박력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인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세계 속에 유폐된 소시민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카프카 문학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왜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시켰는가?]카프카는 평범한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잠자를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시킴으로서, 문명사회에서 분리된 한 인간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결국 문명사회와 완전히 격리된 그레고르는 일도 하지 못하고 방에만 틀어박힌 채로 있다가 쇠약해져 결국 죽고 만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된 계층에게 일어나는 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사건을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느 누군가 실직 후에 직장을 잃고, 직장을 다시 잡지 못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는 것이다.[카프카와 인간 소외]변신이란 작품은 20세기 초반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주제를 담고 있다. 그 당시에도 인간 소외는 상당한 문제였을 것이다. 기계문명이 발달해 가던 유럽 사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일했던 영역을 기계가 빼앗아 가게 되고, 실업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되는 현상은 산업혁명 이후로 계속되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들이 느끼는 소외감 또는 절망감을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 속에 나타내려 한 것 같다.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카프카 자신에 대한 소설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작품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양동이 기사 (Der Kubelreiter)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 중 석탄을 얻기 위한 사람들의 열망, 그리고 노력의 비참함을 한 편의 짧은 소설로 잘 나타내었다. 카프카의 소설이 현재까지도 사랑받고, 널리 읽히는 이유는 우리가 카프카의 소설에 큰 공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잠의 의미]책의 맨 첫 장을 보면,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잠을 자고 나니 갑충이 되어 있었다는 건데. 여기서 잠 (Schlaf)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잠은 인간에게는 필수불가결적인 요소다. 잠을 자지 않으면 인간은 다음 날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잠을 자지만, 무언가 근심 하나씩은 안고 자게 된다. 예를 들어 “내일은 무슨 일이 있을까?”, “오늘 쓴 레포트의 평점이 어떻게 될까?”, “시험을 어떻게 봐야하지?”, “주식 시세가 오를까?” 등등의 고민을 하면서 자게 된다. 현대 사회는 상당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 말이 된지 오래다. 자고 일어나면 큰 사건 하나 둘 씩은 터져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영향을 미쳐, 나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런 현상을 그레고르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갑충이 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변신의 의미]그레고르가 평범한 세일즈맨이었을 때, 가족들은 그를 모두 떠받들고, 신선한 음식을 식사로 주었으나, 그레고르가 흉측한 해충 (ungeheueren Ungeziefer)이 되어 돈도 벌지 못하고 흉측하게 되자 그를 그의 방에 가둬두고 상한 음식을 주고, 쇠약해진 그레고르가 죽어버리자 기뻐하며 가족 여행을 떠나는 장면에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능력이 있을 때는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를 요구하며 혹사시키다가, 능력이 떨어지거나 또는 정년이 되면 그 때는 그 사람을 해고해 버리는 현대 사회의 매정한 한 단면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음식의 의미]음식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위에서 말했던 잠과 같은 필수불가결적인 요소이다. 그레고르가 가족들을 부양하면서 일을 할 때는 가족들이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 하지만 그레고르가 갑충이 되자 가족들의 태도는 돌변하여 상하고 썩은 음식을 그에게 준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능력에 따른 차별 대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 격리되게 된다.또한, 음식은 그에게 오히려 절망감을 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음식의 질이 나빠짐으로서 그레고르가 느끼는 절망감은 매우 컸을 것이고, 그로 인해 식음을 전폐하여 결국 쇠약해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