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오류에서 탈출하기(《아담의 오류》 서평)1. 들어가며2. 아담의 오류는 무엇인가?3. 음울한 학문4. 가장 엄격한 비판5. 한계주의자들6. 허공의 목소리7. 나가며 - 아담의 오류에서 탈출하기1. 들어가며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미국의 월가(街)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이른바 ‘99%의 시위’를 벌였고, 각국에서도 현재의 금융 시스템에 대한 손질을 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한편, 점증하는 복지 문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다. 하지만 한동안 세계를 지배했고, 또 지금도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여기에서 나는 ‘신자유주의가 무조건 나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의 뿌리를 탐색해 보면서 어떠한 이론 내지 사상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살펴 앞으로의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함이다.지금부터 살펴볼 『아담의 오류』라는 책은 아담 스미스로부터 슘페터에 이르기까지의 (정치)경제학자들의 논의들을 담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담 스미스의 견해가 가지고 있는 오류, 그리고 이를 발전시키거나 비판해 가는 여러 학자들의 논의들을 살펴보며 저자의 관점대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가급적이면 저자의 비평에 함몰되지 않고, 나름의 관점으로 (정치)경제학자들의 논의를 비평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이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세계,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어떠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또 어떠한 길을 가야 할지 서투르게나마 생각을 밝혀 보고자 한다. 책 속에서 저자는 “종합이 가능할까 의심하고 있고, 어떤 한 측면만을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곳곳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저자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간략하게나마 나의 의견을 밝히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2. 아담의 오류는 무엇인가?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담의 오류는 과연 무엇일까? 이른바 『국부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생각을 살펴보고, 오류는 무엇인지, 은 노동이 시장교환에서 그 상품을 획득할 수 있는 노동의 양이 곧 상품의 가치라는 의미인데, 이는 뒤에 나올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노동자들이 투입노동과 동일한 수준의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시장에서 투입노동의 비율대로 교환된다는 보장도 없다(‘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도록 하자).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은 이후 상품 가격이 임금, 지대, 이윤으로 결정된다는 구성가치론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임금의 경우 분업의 과정에서 임금을 최저생계비 이상으로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임금 흐름을 보면 어느 정도 맞는 측면이 있다. 특히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나라들의 임금 상승을 보면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최근의 중국 노동자 인건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윤의 경우 경쟁으로 인해 산업 간 이윤이 점차 균등화될 것이며, 자본축적이 지속될수록 이윤율은 점차 하락할 것이라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후대 (정치)경제학자들이 대체로 인정하는 전제였지만, ‘이윤율의 하락’은 아직 극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아담 스미스의 구성가치론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지대 부분이다. 시장가격은 자연가격 주위에서 구심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지대의 경우에는 자연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독점가격이다. 여기에서 아담 스미스는 지대가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임금, 이윤, 지대로 인해 구성된다고 하는 가격은 무엇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인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이와 같이 아담 스미스의 견해에는 여러 오류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들은 완전히 기각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형되어 살아 남았고, 오늘날의 경제학 교과서에도 계속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담 스미스가 말한 ‘개인의 이기심 추구가 가져오는 사회적 이로움’ 자체는 국민경제 전체로 보았을 때는 틀린 말이 아니다. 『국부론』이라는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개개인의 소득분배 문제가 아닌 국가경제를 분석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리카도의 주장이다. 바로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비교우위론’이라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노동의 투입 정도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고, 그 결과 나라별로 비교우위를 갖는 상품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인데, 문제는 비교우위론 자체가 아니라 비교우위가 어디에서 발생하는 지일 것이다. 리카도는 주로 지리적, 기후적 차이에서 비교우위가 발생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경제정책을 통해 비교우위를 ‘만들어’ 냄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설명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자유무역 이론의 핵심이자, 최근 우리나라가 세계 각국과 추진하고 있는 FTA의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교우위론 역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비교열위에 놓여 있는 산업에 속해있던 투입요소들이 비교우위에 있는 산업으로 제대로 이전되지 못한다면 오히려 후생 악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경제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물론 분배의 문제까지 접근한다면 논의는 더욱 복잡해 질 것이다.다시 노동 가치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노동 가치론에 의해 결정된 상품의 가치는 임금, 이윤, 지대로 분할된다. 임금은 사망률과 출생률에 따라 결정되는 곡물 임금에 따라 ‘자연 임금’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지대는 지주의 토지가 한계토지구역에 대해 갖는 상대적 비옥함에 따라 차액지대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윤율 역시 한계토지에 의해 결정되는데, 앞의 차액지대 설명에 따르면 한계토지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지대도 발생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한계토지에서 발생하는 잉여생산이 전체 경제의 이윤율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윤율은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결국 0으로 떨어지게 되고, 축적이 중단되는 ‘정상상태’가 도래한다는 것이 리카도의 주장이다. 이는 해외무역과 기술변화를 통해 ‘지연’될 수는 있지만, 영원한 지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여기에서 두펴보자.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교환가치에 대한 이론인데, 여기에서 교환가치란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가치이다. 노동을 통해 상품의 형태로 생산된 가치는 화폐의 형태로 그 가치가 드러나는데, 노동자는 자신이 투입한 가치의 일부만을 얻는다는 것이 마르크스 주장의 핵심이다.자본주의적 착취를 설명하면서, 마르크스는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다. 노동은 노동자가 실제로 들이는 노력이고, 노동력은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역량 내지는 잠재력이다. 앞에서 말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노동’인데,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입해 ‘노동’으로부터 얻는 잉여가치를 영유하게 되고, 바로 이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가져감으로써 착취가 일어난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착취 메커니즘은 지금의 주류경제학 관점에서 볼 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 자체가 이미 인정하기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대로 계급 대립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노동자 계층이 ‘착취’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투입한 자본의 몫에서 나오는 이윤, 화폐 대부자들의 기여 등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노동가치론’이 맞는다고 할지라도, (이후에서 설명하겠지만) 잉여가치를 사회적으로 통제해 버린다면 자본가들의 투자 유인은 사실상 사라지게 될 것이 틀림없다. 다만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로 나누어 볼 때 오늘날의 사회에도 유효한 점들을 밝혀낼 수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일의 연장을 통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이고, ‘상대적 잉여가치'는 필요노동시간을 축소(실제 소비를 줄임으로서 가능)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이다. 여기에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대립양상을 찾을 수 있다. 근로시간을 늘리려는 자본가와 이를 막으려는 노동자 간의 대립 속에서, 많은 나라들은 근로기준법을 제정해 근로 시간을 규제하고 있고, 초과근로에점에서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자신들의 자원을 특정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순이익이 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하이에크의 말이 바로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마르크스의 주장이 용도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가 입증해낸 자본주의의 모순적인 생산양식은 상당 부분 오늘날의 현상을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당장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고, 또 그것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자본주의가 나름의 통제와 개혁을 거쳐 변화해 온 것만으로도 마르크스의 분석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말한 대대적인 형태의 혁명은 비록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투쟁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이다.5. 한계주의자들리카도 이전의 (정치)경제학은, 이후 ‘한계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들이 형성한 학문적 토대가 바로 ‘신고전파 경제학’이자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이 되었다. 이전의 (정치)경제학이 철학 내지는 정치와 결합하여 주로 동적인 측면을 설명했다면, 신고전파 경제학은 공리주의 철학에 근거하되 주로 개인적 행동과 그 조합에 초점을 맞춘, 정태적 측면의 설명이 주를 이룬다. 이 과정에서 수학을 활용한 객관적인 설명이 시도되었고, 생물학(진화론)적 관점에서 적자생존과 적응의 논리를 활용하였다.한계효용 이론은 미적분학을 활용한 개념이다. 합리적인 개인은 여러 가지 용도에 따라 고정된 자원을 할당하는데, 서로 다른 부문에서 얻을 수 있는 한계효용 수준이 동일할 때까지 자원배분을 함으로써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의 핵심을 이루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이론이다. 경제학은 가정의 학문이라고 불릴 만큼, (때로는 비현실적인) 여러 가정들에 기반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합리적 개인’이라는 가정 자체에 대한 도전이 최근 매우 거세다. ‘행태경제이다.
아편을 통해 본 중국 근대사(『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서평)1. 들어가며2. 중국 내부에서 찾아본 아편의 확산 원인3. 아편의 맥도날드화4. 정치세력 그리고 아편5. 나가며1. 들어가며중국 근대사를 설명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아편전쟁’이다. 교과서 등에 등장하는 통설에 의하면 아편전쟁의 원인은 영국이 지속적인 대중 무역적자를 반전시키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의 은 유출이 심각해졌고, 아편 중독자가 날로 늘어나자 아편 금지론이 힘을 얻었고, 임칙서가 광주 지역에서 아편을 몰수하는 등 강경책을 펼쳤다. 이에 영국이 전쟁을 도발하여 남경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이러한 설명을 듣고 보면 마치 이전의 중국에는 아편 흡연자가 많지 않았는데 영국의 아편 밀수출로 인하여 중국 내의 아편 중독자가 증가하였고, 결국 아편 문제의 원인은 중국보다는 영국에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한 측면이 있다. 거대한 중국 영토에 아편이 그렇게 쉽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또 영국이 아편을 밀수출했다고 해도 중국인들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는데, 과연 아편 문제가 영국만의 책임이었을지와 같은 의문들을 제기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중국사에 있어서 아편이라는 존재는 단지 아편전쟁 시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명대 이래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역사를 설명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저자는 아편을 두고 ‘중국의 역량과 복잡성을 바라보는 효과적인 렌즈’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이 책에서는 아편이 어떻게 중국으로 도입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중국 내부에서 확산될 수 있게 되었는지, 또 아편이 중국인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고 아편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저자가 아편을 ‘렌즈’라고 지칭했던 것처럼, 아편의 확산과 소비 양상은 명청 중국 내부에서 찾아본 아편의 확산 원인저자는 중국에서 아편이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을 문화사적, 혹은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주로 분석하고 있다. 아편은 동남아시아를 오가는 상인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조공무역 과정에서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하지만 아편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 이미 확산되어 있었던 연(煙)문화 덕분이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담배를 발견했고, 이후 불과 60여년만에 중국으로 담배가 유입되었다. 담배는 이후 중국 곳곳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중국의 고유 문화와 결합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빈부에 관계없이 흡연 과정에서의 미적 가치를 중시하였다. 상류층들은 담배를 피울 때 쓰는 병(비연호)을 수집하였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파이프를 보석과 상징적 요소로 장식할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은 아편 흡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여기에다가 중국의 차(茶)문화 역시 아편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차를 마시려면 불을 피우는 등의 조리 과정이 필요한데, 아편 역시 정제 과정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중국의 주방 전통은 아편 흡연의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 셈이다.하지만 이러한 설명에는 다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아편의 확산 배경으로 담배의 보급을 지적하였지만, 담배가 어떻게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부족하다. 저자는 담배 재배의 수익성이 상당히 높았고, 당시 명나라 화폐를 매개로 한 시장경제 체제가 발달해 있어 이를 더욱 수월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담배의 ‘공급’측면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담배에 대한 ‘수요’가 그렇게 급격히 증가할 수 있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는지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담배의 확산이 아편 확산의 기반이 되었다면, 왜 서양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아편이 확산되지 못했을까? 물론 중국인들의 흡연에 대한 고유 의미부여, 차 문화와 같은 기반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후 서양에도 차 문화가 전파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19세기까지 중국으로의 아편는 ‘구별짓기(distinction)'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설탕이 서양으로 처음 도입되었을 때, 귀족과 부유층들은 이를 사치품으로 인식했었는데, 이후 점차 확산되면서 노동자계층이 생활 필수품처럼 소비하게 되면서 설탕 소비를 통한 ’구별짓기‘가 허물어졌다. 이는 중국에서의 아편 소비 양상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당시 중국의 상류층들에게 있어 아편 소비는 곧 지위의 상징이었다. 특히 지방 각지의 학자들과 관료들의 아편 흡연은 하층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일종의 ’명품‘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상류층의 아편 흡연을 따라하고 싶었고, 상인들은 이러한 수요를 놓치지 않았다. 광둥과 푸젠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내륙으로 아편 판매망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아편이 하층 계급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청조에서는 점차 이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아편 흡연은 당시 황족들과 관리들이 먼저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편 문제의 원인을 하층민들에게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아편 전쟁의 한 원인, 즉 아편을 사회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던 원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청조의 이러한 인식은 자기모순적인 측면이 강했다. 아편 확산의 배경을 제공했던 것은 청조였다. 특히 기존의 연구에서 아편 흡연으로 인한 은의 대규모 유출이 지적된 바 있었는데, 저자는 이 역시도 청조의 관리, 부유층의 문제가 더 크다고 지적한다. 당시 은은 하층민이 아닌, 부유층들이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하층민들은 당연히 가진 돈이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아편을 넉넉하게 피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담배나 남은 재 등을 섞어 피웠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즉, 아편의 확산은 청조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상당히 크다는 결론이 가능해진다.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자칫 아편의 확대 과정에서의 영국의 역할을 과소 평가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물론 저자도 두 차례의 아편 전쟁을 거치면서 소비가 급증하였다을 보인다. 저자의 논리를 받아들여 중국이 아편 흡연이 확대될 수 있는 여건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편의 대량 공급이 없었더라면 아편이 전국민적으로 확산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편이 중국 내에서도 재배되기는 하였지만, 재배가 시작된 것은 1850년대 이후로,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다. 즉, 중국에서의 아편의 확대 양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중국 내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기존의 관점대로 영국의 아편 밀무역으로 인한 공급 확대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3. 아편의 맥도날드화아편은 19세기 말에 들어 완연한 대중문화의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서술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두 장에 걸쳐서 여성의 삶과 문학에 있어서의 아편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흡연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일상생활과 여가 활동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매춘에 이용되기도 했다. 당시 아편굴에서 여성의 역할은 아편 흡연을 보조해주는 역할이었다. 아편 흡연 준비는 물론이고 계속해서 파이프를 채우는 등의 정교한 작업을 해야 했다. 당시 아편굴의 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자연히 필요로 하는 여성의 수도 많았을 것이고, 여기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당시 중국 여성들에게 아편이라는 존재는 일상생활과 여가의 일부분이기도 하면서,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아편을 당시 중국 여성들의 삶과 관련지어 분석함으로서, 중독이나 제국주의적 침략과 같은 관점에서 벗어나 ‘가족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아편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아편은 고전문학과 백화문학의 생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문학에는 아편을 찬양하는 것들도 있었고, 비난하는 것들도 있었다. 아편을 찬양하는 문학의 경우에는 아편이 가져다주는 쾌락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였고, 청년들의 사회반항을 담기도 했다. 비난하는 경우에는 아편의영향을 끼쳤는지는 명확한 서술이 부족한 반면 당시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당시 문학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아편은 이제 중국인과 중국 문화의 동의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와 같은 최하층 사회 구성원들까지 아편 흡연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중국인의 삶과 아편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아편의 맥도날드화’라고 명명하였다. 실제로 당시 아편은 더 이상 아편굴에서 여유롭게 드러누워 피우는 사치품으로서의 의미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하층민들을 겨냥하여 국내산 아편이나 담배, 혹은 찌꺼기를 재활용한 형태의 아편을 싸게 팔았다. 위로는 서태후부터, 아래로는 일용직 노동자들까지 아편 흡연을 할 정도의 상황이었기에, 이제 아편은 ‘화폐’로서의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당시 아편의 가치가 중국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보다 안정적인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화폐가치의 변동이 심할 때 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것처럼, 당시 아편은 금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당시 아편이 하층민들에게까지 확산되어 가는 모습과 그 양상을 여성, 문학 등을 분석함으로써 풀어냈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편이 중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인 특유의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중국인들의 체면 중시 문화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는 아편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려고 하거나, 접대를 하기 위해 아편을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편의 정착을 사회문화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이기도 하고, 그 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기층민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자칫하면 아편 흡연을 일종의 ‘나쁜 문화’로 인식하게 할 소지도 있다. 11장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의 아편 흡연은 서양인들에게 편견을 심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중국인들의 아편 흡연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를 부추겼던 것은 과연 든다.
남북경협, 미래의 한반도를 위한 준비대북정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마다, 이성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보다는 감성적, 혹은 이념 대립 위주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대북정책은 특히 다른 어느 사회적 쟁점보다도 의견 대립이 극심하여 늘 사회적 논란이 되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논의가 이념대결로 변질되면서 제대로 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대북 퍼주기’를 한다느니, ‘전쟁 선동’을 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매도하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결론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통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논의 중 하나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면 사실상 상호 교류가 단절된 상황이나 다름없다. 연평도 사건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호 대립의 정도가 매우 극심하다. 여기에서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이전 정부(김대중 ? 노무현)때의 대북 정책을 잠시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대북정책은 큰 틀에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현 정부에서는 이전 정부들과는 달리 ‘북핵 문제’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으며,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이른바 ‘비핵 ? 개방 ? 3000’구상을 견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이러한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남북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며, 최근에는 국무총리가 “오늘날까지 성과가 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을 정도로 지지부진하다.) 하지만 이전 정부의 ‘햇볕정책’ 역시 ‘대북퍼주기’라는 비판에 직면하였고, 최근에는 햇볕정책의 결과가 북한의 핵미사일 생산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주로 지적되고 있다.과연 어느 쪽의 말이 맞는 것일까?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햇볕정책을 좀 더 지지하는 편이다. 우선 햇볕정책이 일방적인 ‘퍼주기’라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기 힘든 면이 많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대북지원의 댓가가 핵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의 경우에, 남북교류를 통해 북한이 벌어들인 돈 중 관광수입(금강산 관광 등)과 개성공단 노동자 임금은 전체 수입의 10%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돈이 핵개발로 전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히 밝혀진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핵문제는 햇볕정책이 등장하기 이전인 90년대부터 시작된 문제인데, 이를 가지고 단순히 ‘햇볕정책→북핵’이라고 도식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햇볕정책이 전쟁의 위험을 줄인 측면이 더욱 강하다.햇볕정책의 핵심중 하나가 바로 남북간의 경제협력으로, 이 결과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었고, 개성공단이 생겨났다. 개성공단의 경우를 보면, 판문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남한의 기업이 대거 진출하여 북한의 노동자들을 고용해 운영을 계속하고 있는데, 최근의 남북관계 경색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계속되는 관계 악화에도 개성공단만은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북한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2010년 현재 4만 명이 넘는 근로자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갑자기 폐쇄할 경우 이들 근로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버릴 것인데, 북한 당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남한 입장에서도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을 갑자기 철수시키면 기업주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는데다가, 현재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북교역창구인 개성공단마저 폐쇄하면 북한과의 관계 회복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개성공단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경제협력은 상호간의 무한 단절을 어느 정도 차단해 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휴전선 코앞에 대규모 공단이 있는 상황에서 쉽사리 전쟁이 벌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일단 경협을 시작하면 (제한적이나마) 기업인들을 비롯한 민간 부문 인력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렇게 서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가는 상황에서 무력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서로에게 손해를 가져올 것이다.남북경협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해줄 수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지만, 남북경협은 사실 통일을 대비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통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북한 내부의 급변사태로 인해 국제사회가 개입해 통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남북이 합의를 통해 통일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성은 제일 낮지만 전쟁을 통한 통일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경우를 배제하면 사실 앞의 두 시나리오가 실현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경제협력이다. 우선 어떠한 이유로 북한 정권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통제력을 잃어 가는 상황을 상정해 보자. 이 때 우리나라는 당연히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때 북한 문제에 개입할 나라는 우리뿐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특히 북한의 ‘혈맹’인 중국은 어떠한 형태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지금 당장 북한 정권이 붕괴한다고 해서, 남북한이 곧바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북한은 중국의 영향권 하에 들어갈 수도 있다. 현재 북한의 대외교역구조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도는 2009년 현재 무려 50%가 넘는다. 반면 남한에 대한 의존도는 30%대에서 머무르고 있다. 특히 최근 남북교류가 사실상 중단된 사이, 중국의 북한 진출이 상당히 활발해지고 있다. 자원 개발권을 획득하고, 접경지역 개발 사업에 뛰어드는 등의 형태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의 대중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짐에 따라 북한의 경제가 점차 중국에 종속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도 전혀 기우는 아닌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기 - 유사점과 그 원인 탐색1. 들어가며2. 어떻게 군사독재가 등장하게 되었는가?3.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기의 유사점들3.1. 전체주의의 만연3.2. 정치문화의 유사성3.3. 전통의 부정 혹은 개조3.4. 경제정책 - 경제개발 모델4.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기의 유사성의 원인4.1. 집권층의 경험4.2. 구조적인 원인5. 나가며1. 들어가며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기. 이 두시기는 단순히 따로따로 놓여져 있는 시기가 아니다. 일제강점기를 빼놓고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 두 시기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가 많지 않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가장 민감한 부분일수도 있고, 또 편향된 시각에서 바라보기 쉬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어려운 주제임을 알게 되었고, 조금은 후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기가 약간 다른 일제 강점기와 군사정권 시기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은 마치 어렵지만 결과가 궁금한 커다란 퍼즐을 푸는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식민지 경험이 군사정권의 형성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며, 군사독재하의 한국과 식민통치하의 조선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첫 번째로 왜 군사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단순히 ‘군사독재는 식민통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일제 치하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토양이 싹트지 못했고, 이로 인해 군인들이 실권을 잡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식민통치가 군사독재와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군사정권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유사성인데, 군사정권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유물론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정치 참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는 지방에서 일부 선거제를 실시하였는데, 세금을 일정액 이상 납부한 사람들에 한해 제한적으로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는 보통선거와는 거리가 먼 형태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자유로운 정당활동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해방을 맞아 정치활동이 가능해지면서 정국은 극도의 혼란을 낳았고, 이러한 상황은 이승만, 박정희 등의 독재자가 나타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나라들 가운데 여러 나라에서 독재체제가 등장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3.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기의 유사점들지금부터는 구체적으로 군사독재기와 일제 강점기가 어떠한 형태의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엄밀히 말하면 전두환 ? 노태우의 신군부 역시 ‘군사독재’임에 틀림없지만, 여기에서는 박정희 시기의 군사독재와 일제 강점기의 유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정권의 공통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으며, 신군부의 경우 여기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일본보다는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이 많다는 점 역시 신군부 독재를 논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이유이다. 두 시기의 유사점으로 크게 네 가지 - 전체주의, 정치문화, 전통에 대한 부정, 경제정책 - 을 찾아보았는데, 이들 가운데는 일정부분 중첩되는 부분도 존재하기도 할 것이고, 저 네 가지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크게 본다면 앞에서 말한 것들 정도로도 두 시기의 공통점을 찾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에서는 유사점들을 찾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하고, 다음 4장에서 왜 이러한 유사점들이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도록 하겠다.3.1. 전체주의의 만연두 시기의 가장 ‘결정적인’ 공통점이자 ‘발견하기 쉬운’ 공통점이 바로 전체주의라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병영국가’ 라는 표현을그대들 신민과 더불어 이를 항상 잊지 않고 지켜서 모두 한결같이 덕을 닦기를 바라는 바이다.)내용을 읽어 보면 개인은 국가 혹은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적 시각이 짙게 배어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의 구절,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에는 의용을 다하며...무궁한 황운을 부익해야 한다’는 교육칙어의 구절 등을 보면 쉽게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을 만들 때 교육칙어를 참고하여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쨌든 그 내용이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내용의 유사점도 문제이지만, 군사정권 하에서나 일제 치하에서나 두 헌장(칙어)에 대한 강조는 참으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는 물론 정부 행사의 시작에 앞서 국민교육헌장이 낭독되었고, 교과서의 맨 앞에 실렸으며, 학생들에게 암기를 강요하였다. 심지어 국민교육헌장 암송대회가 개최되었을 정도로 당시 국민교육헌장의 위상은 대단하였다. 일제치하에서의 ‘교육칙어’ 역시 국민교육헌장 못지 않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을 찾아보면 당시 각급 학교에서 교육칙어 봉독식을 개최하였던 기사가 등장한다.)이 외에도 ‘애국조회’,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은 그동안 숱하게 일제치하 교육의 잔재로 비판받아온 것들이다. 사실 학교 조회라는 것 자체가 일제 잔재는 아니다. 조회는 구한말 때부터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월요조회’ 혹은 ‘아침조회’로 불렸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군대처럼 정렬’하고 ‘기율’을 잡고 ‘충성을 다짐’하는 식의 조회는 일제 때 틀이 잡혔다. 일왕이 있는 곳을 향해 요배를 하고 황국신민 서사를 달달 외우는 식의 행사가 학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 이후 ‘황국신민 서사’가 ‘국민교육 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 암송으로 바뀌어 ‘애국조회’의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이 외에도 한홍구의 경우 유신시대의 한국사회는 40여년 전의 만주국의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로 점심시간의 혼식검사, 들은 육군성, 참모본부, 국회 수상관저 등을 점거하고 ‘국가개조’의 단행을 요구하였으나, 천황이 원대복귀 명령을 내리자 반란세력은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이 2.26 사건을 통해 실제로 많은 것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다니던 시절, 간노 히토시라는 교관이 있었는데, 그는 2.26 사건에 가담했다가 만주로 쫒겨가 있던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그에게 각별한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실제로 박정희는 2.26 사건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몇 차례 하였다. 2.26사건을 일으킨 일본군 장교들을 '우국군인'이라 칭하기도 하였고, 1960년 무렵에는 "장교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하는데 일본이 망한 게 뭐냐, 지금 잘해나가고 있지 않냐?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한다"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과 2.26 사건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는 5.16을 일으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하지만 정치문화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다른 유사성에 비해 그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료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유사성의 원인을 분석할 때 좀 더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3.3. 전통의 부정 혹은 개조각기 그 이유는 조금 달랐지만, 일제나 군사정권 모두 전통을 부정(혹은 경시)하였던 점은 비슷하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이라 불리는 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을 일본화하고자 하였고, 군사정권은 ‘근대화’를 명분으로 전통을 ‘대체로’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시도는 이미 교과서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30년대 이후 만주침략 등 전체주의,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하면서 전통문화 말살 시도도 활발해진다.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불리는 이러한 정책은 한글교육 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 이외에도 여러 면에서 전통문화에 손을 뻗쳤다.일제는 조선인들을 ‘미개한 민족’이라고 반영되었다. 우선 전통문화유산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문화공보부(문공부)를 발족하여(1968),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이 당시 중점적으로 복원 혹은 조성된 유적들은 호국문화유적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신격화하였다. 이 두 인물은 박정희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했던 인물들이었고, 국민들에게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신격화를 위해 현충사 개 ? 보수 및 중건(1966~1975), 이순신 동상 건립(1968), 충무공 탄신 기념제 실시(1962), 한글날 국경일 제정(1970), 한글 전용화 정책(1970년부터 초?중?고등학교에서 한문 교육 중지) 등을 추진하였다.)‘가정의례준칙’ 이나 새마을 운동 모두 결국 국가가 개인의 일상생활에 깊이 간섭하고 통제함으로써 기강을 확립하고 통치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면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가정의례준칙’을 통해 과도한 허례허식을 근절하고자 하였고 새마을운동의 경우 농촌지역 소득 향상에 기여하였다는 점 등의 순기능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기 모두 통치체제의 공고화를 위해 전통에 대한 ‘가위질’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위의 사례를 들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60년대 말부터 취했던 (우호적인 모습의) 전통문화정책 역시 (1절에서 이미 간략히 설명한 바와 같이) 국내외의 환경이 변화하면서 상당히 변화하였는데, 결국 이러한 변화 역시 민족주의 의식의 고조, 자주국방정신 고취, 친일정권이라는 비판에 대한 의구심 해소를 통해 통치체제를 공고화하여 이후 유신독재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3.4. 경제정책 - 경제개발 모델두 시기의 경제정책은 크게 보아 공업화를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일제 강점기의 경제정책(30년대 이후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록 하겠다)을 살펴보면, 일제의 대륙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 건설’을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금융질서 변화양상과 한국의 대응1. 서론2.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3.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질서의 변화 양상3.1. 규제의 강화3.2. 신흥국들의 위상 강화4. 금융질서의 변화와 한국의 대응4.1. 민간차원의 대응 - 금융산업4.2. 정부차원의 대응5. 결론1. 서론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이제 3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2011년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은 이제 금융위기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12월 정부차원에서 개최해오던 ‘위기관리대책회의’를 ‘경제정책조정회의’로 환원하며 사실상 경제 비상상황을 종료한다고 밝혔으며, 미국에서도 경기침체의 시작과 종료시점을 선언하는 전미경제조사국, NBER이 지난 2007년 12월 시작된 경기침체가 2009년 6월로 끝났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이렇듯 이제 금융위기도 끝난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는 이제 금융위기는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위기상황은 끝났지만,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 특히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해야만 하였고, 이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도 2008년의 금융위기와 일정 부분 연관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 이외에도, 금융위기는 세계의 금융질서를 상당히 바꾸어 놓고 있다. 본론에서 살펴보겠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파생금융상품의 남용이었다. 이러한 원인을 인식한 각국 정부는 금융위기 발생 이후 앞다투어 이러한 금융상품에 대한 규제책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특징적인 모습은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들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금융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에서 촉발되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금융선진국들이 금융위기의 책임을 상당 부분 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중밖에 없었던 요인으로는 월가의 단기 실적 위주의 보상체계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본인-대리인 문제’로 설명할 수 있는데, 경영진들이 자신들의 보상에 관련된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면서 리스크 관리보다는 수익률을 높이는 데에 몰두하였고, 이는 과도한 레버리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익이 나면 엄청난 보너스를 챙기면서도, 손실이 나면 단지 사표를 내는 것으로 해결하면 되는 시스템 하에서, 경영진들이 이익 극대화에만 매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두 번째로 정부의 실패를 들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발점이 미국이라는 점을 감안해 미국의 정부 실패를 주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클린턴과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주택보급정책을 지적할 수 있는데, 특히 부시의 경우 이른바 ‘소유자 사회(Ownership Society)’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오면서 모든 미국 시민들이 집을 소유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미 행정부는 각종 대출 규제를 완화해 주었는데,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집값은 폭등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자신의 능력을 초과해 돈을 빌려 집을 산 사람들이 하나둘씩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집값 거품은 꺼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저소득층(혹은 저신용층)이 집을 쉽게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FRB 의장이었던 그린스펀의 초저금리 정책도 한몪 하였다. 실제 미국의 정책금리는 2001년 12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약 3년여 동안 2% 미만의 수준을 유지하였다.) 또 다른 정부의 실패는 앞에서 언급했던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사실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를 안한 탓도 있겠지만, 상품의 구조가 워낙 복잡해 못한 탓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금융회사들이 부실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더 심각한 사실은 감독업무를 맡아야 할 금융감독 당국이 업체와 결탁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저축은행 사태와 관련하여 금융감독원 직원안도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유동성 비율 규제 방안으로, 단기유동성비율(LCR), 중장기유동성비율(NSFR)의 최소기준을 100%으로 설정해 놓아 유동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기순응성 완화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현재의 자본규제는 호황시에 과도한 신용이 창출되도록 하고, 불황시에는 이를 지나치게 축소시켜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완충자본을 추가 적립하게 하고, 고정목표(Fixed buffer)와 변동목표(Time varying buffer)를 함께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다음으로, SIFI(Systemically Important Financial Institution)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금융위기 당시 거대 보험사였던 AIG가 부실화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AIG를 살리기 위해 약 1800억 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던 일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 거대 금융회사들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 AIG 사태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인데, 이들 SIFI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제를 가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살펴보자면, 우선 SIFI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SIFI 규제 대상을 2010년 말까지 정하기로 지난 해 11월 FSB 서울총회에서 합의하였다.) 또한 이들 거대 금융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다국적 금융회사를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축소하기 위한 공통의 기준과 원칙을 검토 중에 있다. 또한 대형 다국적 금융회사의 효과적 감독을 위해 각국의 감독기관간 협력체계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AIG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SIFI에 문제가 생길 경우 시장기능에 의해 그냥 도산하게 놓아 둔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과 연관된 금융회사들이 워낙 많아서 자칫하면 금융시스템 전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세 미국은 G20 재무장관회의 참가국 정상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국제 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G20 정상회의였다. 이후 런던, 피츠버그, 토론토, 서울에서 각각 개최되었으며,) 올해에는 프랑스 칸에서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게 기존 선진국들의 힘만으로는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에 많은 나라가 공감하였고, 특히 최근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이 논의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일이었다. G20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적인 협의체가 등장함으로써, 신흥국들은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서울 G20 정상회의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서울 회의 당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이른바 ‘환율전쟁(Currency war)’ 이었다. 서울 회의 몇 달 전부터 미국과 중국의 환율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는데, 미국은 중국의 위안화가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계속해서 위안화 절상을 압박하였지만, 중국은 이를 줄곧 막아 왔다. 서울 회의의 성패는 환율 문제에 달려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환율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이슈였는데, 결과적으로 ‘환율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합의문에는 비록 ‘경쟁적 평가절하(devaluation)를 자제’하자는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합의문 초안에 있었던 중국의 통화정책을 가리키는 ‘경쟁적 저평가(competitive undervaluation)’라는 문구에 비해 훨씬 약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과도한 경상수지 흑자를 지적하며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경상수지 적자와 흑자폭을 국내총생산(GDP)의 4% 이내로 제한하자는 안을 제시하였지만, 뚜렷한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경상수지 가이드라인을 다음 회의에서 논의하기로 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미국 언론들은 회담 직후 일제히 서울 회의를 ‘중국의 승리, 미국의 패배’로 보도한 것이다.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IMF의 쿼은행산업의 경우 세계 100대 은행(기본자본 기준)에 세 개의 은행이 포함되고 있으며.(국민은행 69위, 우리금융지주 71위, 신한금융지주 87위)) 생보산업의 경우 미국의 약 1/4, 증권산업의 경우 약 1/8 수준이다(자기자본 기준). 수익성 측면을 살펴보면 은행산업의 수익성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이다. 총자산순이익률(ROA)을 살펴보면 2005년에는 1%를 웃돌았지만, 점차 하락하여 2009년에는 0.41%에 그쳤다. 증권산업의 ROA는 변동성이 매우 높고, 주요국가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싱가포르 3.87%, 일본 0.98%, 미국 0.88%, 한국 0.46%). 생보산업의 경우에도 수익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수익구조의 경우를 보면 은행산업의 수익은 철저하게 예대마진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무려 90%의 수익이 이자수익에서 나오고 있다. 이는 20%에서 최대 30% 이상의 수익을 수수료이익으로 창출하는 미국, 싱가포르, 영국 등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증권산업의 경우 위탁매매업무, 즉 거래수수료로 벌어들이는 돈이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약 60%, 미국 35%, 미국 24%) 생보산업의 경우에도 보험료수익이 약 3/4를 차지하고 있다(미국 59%, 영국 41%). 정리하자면, 전반적으로 수익 창출 분야가 특정 분야에 치중되어 있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수익률 자체도 전반적으로 높지 않은 구조이다.그렇다면 지금 금융산업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 수익창출’을 최우선순위에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본금 규제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돈을 쌓아두어야 하고, 이렇게 되면 자연히 공격적인 경영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최근 은행과 증권사들이 부동산 경기침체와 맞물려 프로젝트파이낸싱대출(PF)의 회수에 나서기 시작한 것 역시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금융산업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수익성은 다소 악화될 수 있다.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