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 대원군정권의 쇄국정책과 민씨정권의 개항정책 -한국근현대사- 대원군정권의 쇄국정책과 민씨정권의 개항정책 -역사교육과200512478 이 충 영목 차Ⅰ. 머리말Ⅳ. 위기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 - 민씨정권Ⅱ. 위기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 - 대원군정권 1. 민씨정권의 등장1. 대원군의 등장 2. 강화도 조약2. 대원군의 개혁정치 3. 구미제국과의 수교3. 대원군의 쇄국정책 4. 민씨정권의 대내적인 개혁정치4. 洋擾(양요) 5. 민씨정권의 개항정책에 대한 평가5. 대원군정권의 쇄국정책에 대한 평가 Ⅴ. 맺음말Ⅲ. 통상개화론의 대두Ⅰ. 머리말19세기 이후 조선은 내 ? 외적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전 분야에 걸친 사회변동과 더불어 세도가문들의 정치적 독점 그리고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위기’로 대두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그들의 통상요구가 ‘위기’로 대두되었다.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집권을 한 두 정권이 바로 본 발표에서 다룰 대원군정권과 민씨정권이다. 먼저 두 정권에 대해 시기구분을 하면 다음과 같다. 대원군정권은 철종 사후 고종이 즉위를 하고, 그의 생부인 이하응이 대원군으로서 실권을 잡게 된 1863년부터 대원군이 하야를 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된 1873년까지 약 10년간의 기간을 대원군정권의 집권이라고 하겠다. 민씨정권은 대원군 하야 이후, 1873년 고종의 친정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으로 조선이 몰락 할 때까지, 약 20년간을 민씨정권의 집권이라고 하겠다. 이 두 정권이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시한 것은 분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특히 외부적인 ‘위기’에 대해 두 집권층은 ‘쇄국’과 ‘개항’이라는 각기 다른 방식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그 평가가 극명하게 대조된다.본문에서는 대원군정권과 민씨정권의 위기의 대응에 대해 개괄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볼 것이며, 특히 발표주제인 대원군정권의 ‘쇄국’과 민씨정권의 ‘개항’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쳐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룩한 열강들이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확보하기 위해 군함을 앞세워 아시아 여러 나라에 경쟁적으로 침입해오고 있었다.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의 문호를 개방시켰고(1842), 이어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였으며(1860), 이를 기화로 러시아는 연해주 일대를 그 영토로 확보하였다. 또 미국도 일본을 위협하여 문호를 개방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1854).)이와 같은 서양세력의 물결은 조선에도 미쳐오고 있었다. 서양의 선박은 이미 18세기부터 우리나라 연해에 나타나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통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이양선의 출몰은 조선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특히 1840년대 아편전쟁으로 청이 쇠락해가고 1860년에 영 ? 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조선의 조정을 한층 긴장시켰다.)전통질서를 재정비하고 조선왕조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있어서 서양세력의 통상요구는 일단 저지해야 할 대상이었다. 더욱이 대원군의 집권 이전부터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잠입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천주교 신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또한 의주 ? 동래 등지의 국경무역을 통해 서양화물이 들어옴에 따라 당시 조선에서는 이러한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따라서 천주교를 금압하고 양화의 유입을 엄금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여론에 힘입어 대원군은 통상거부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수하여 서양의 통상요구에 불응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하였다.당시 조선에는 1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고 신도가 2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인 편이었으며, 1860년 이후 두만강을 넘나들며 위협적인 대상이 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와의 연결을 계획함에 있어서 프랑스인 선교사를 이용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유생과 양반들의 강력 갖는 적대감을 똑같이 가지고 척양과 함께 척왜를 표방하였다.이와 같이 조선은 그 자체의 복고적 체제강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서양세력의 문호개방에 대해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새로이 펼쳐지는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책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었다.5. 대원군정권의 쇄국정책에 대한 평가))대원군 정권의 쇄국정책에 대한 평가에는 상반되는 두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세계대세에 눈이 어두운 시대역행적인 정책이었다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인 민족적 위기에 즈음하여 과단성 있게 대응한 정책이라는 평가이다. 대체로 전자는 종래 지배적인 견해이며, 후자는 광복이후 남북한의 일부 학자들의 견해라 할 수 있다.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전통적 쇄국정책과는 다른 외세 침공에 대한 새로운 대응방식으로서, 광범한 민중들의 반침략적 지향과도 부합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뒷받침)으로 쇄국정책의 계속적인 강행은 대내적인 전통질서의 강화책)과 더불어 객관적으로 역사발전의 방향과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구미 제국과의 직접적이고 자주적인 개항의 기회를 스스로 봉쇄 ? 차단한 한계성이 바로 대원군정권의 정치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Ⅲ. 통상개화론의 대두)대원군의 강경한 척양 ? 척왜의 정책이 추진되고 있을 때 정계 일각에서는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고 통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통상개화론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실학파의 북학론에서 제기되었던 것으로 특히 박제가는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에게 유용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동남아 또는 서양과도 통상을 하여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그 후 19세기에 들어와서 이규경이나 최한기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다시 박규수) ? 오경석) ? 유홍기(유대치)) 등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이들이 부국강병의 방편으로 주장한 통상개화론은) 그 후 개화사상의 형성과 개화정책의 추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종래의 척양정책을 그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서양의 여러 나라가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왔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세계정세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형성되면서 서양과의 교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신미양요 때 강화도에서 퇴각한 미국은 조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으나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자 조선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1878년 미국의회에서 조선과 평화적인 수단으로 수교를 맺도록 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고 미국정부는 조선과의 수교 임무를 슈펠트 제독에게 부여하였다. 이 때 미국은 이미 조선과 수교관계에 있는 일본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슈펠트는 1880년(고종 17)에 부산항에 입항하여 그 곳에 있는 일본인 관리를 통해 국서를 조선정부에 전달하려 하였으나 조선의 지방관이 접수를 거부하자, 다시 일본정부로 하여금 국서접수를 알선하도록 하였으나 이 역시 조선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 일본은 조선을 개항시킨 후에 다른 나라가 조선과 수교를 맺어 일본의 독점적 위치에 지장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미국의 수교 알선 요청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때 청이 중재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당시 청의 실권자인 이홍장은 일본이 조선에서 세력을 키우고, 또한 러시아의 세력 침투가 예견되는 가운데 조선에 대한 종래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조선과 수교를 하는 것이 청에 유익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슈펠트는 천진으로 가서 이홍장과 조선과의 수교 문제를 논의하고 1882년 제물포(인천)에 입항하였다.이 때 조선에서도 구미제국과의 수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개화사상의 성립에 따라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 위협에 대해 미국과의 수교의 필요성을 제시한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국내에 소개되어 미국과의 수교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응책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이전의 대원군 정권과 다른 ‘개항’이라는 대응책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두 정권의 정책은 ‘쇄국과 개항’이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하지만 쇄국과 개항, 이 둘은 극명한 차이점을 보이는 동시에 같은 목적을 지녔다고 말하고 싶다. 대원군정권이나 민씨정권은 모두 내 ? 외적인 ‘위기’를 가지고 등장한 정권이었고, 그들은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그들은 같은 목적의식을 가진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정권 모두 내 ? 외적인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대원군정권은 ‘쇄국’이라는 대응방식을 제시하였고, 민씨정권은 ‘개항’이라는 대응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목적은 같은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방식의 차이가 대조적으로 표출된 것이다.참고문헌강민길, 《한국사 11》, 한길사, 199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7》, 국사편찬위원회, 1996.권오영, 〈척사와 개화〉, 《한국사 연구 입문》, 지식산업사, 2008.김태웅,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솔, 2003.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7.최덕수, 〈서구 열강의 침략과 동아시아 각국의 개항〉, 《한국사 연구 입문》, 지식산업사, 2008.최희재, 〈중화제국질서의 동요〉, 《강좌중국사 Ⅴ》, 지식산업사, 1997.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3》, 경세원, 2007.) 고종은 혈통 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궁인 숙빈 임씨의 피를 이었으나, 조대비의 아들이 됨으로써 익종을 아버지로, 순조를 할아버지로, 정조를 증조로 모실 수 있게 되었다.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3》, 경세원, 2007, 59P.) 하지만 당시 왕가의 계보로 보아 고종이 왕위계승 후보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순번에 있었음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결정은 별다른 반대를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강좌 중국사 스터디제 1차 국공합작과 북벌이 충 영제 1차 국공합작과 북벌서론● 중국현대사 시기구분중국현대사1912년-1916년민국초기1916년-1928년군벌시기cf. 1924년-1928년 : 국민혁명기1928년-1937년남경국민정부시기1937년-1945년항일내전1945년-1949년국공내전● 국민혁명의 의미① 제 1차 국공합작의 성립(1924년 1월)㉠ 연아 ? 용공 : 공산당의 국민당 입당 허용㉡ 반제국주의 ? 농공부조 표방② 국공합작의 목적 : 국민혁명의 실현㉠ 군벌과 군벌에 의지한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실행방법 : 북벌(1926-1928)③ 국민혁명 결과㉠ 북양군벌 통치의 종식㉡ 남경국민정부의 수립 : 집권적 권력체제Ⅰ. 국민당의 개진과 소련의 중국혁명에의 접근1. 러시아 혁명과 중국공산당의 창립①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1917년 10월)㉠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카라한 선언 : 중국에 親소련, 친사회주의적 분위기 제공② 코민테른)의 창설(1919년 3월)㉠ 후진민족의 자결권㉡ 식민지 ? 반식민지의 해방㉢ 세계 赤化③ 중국 공산당의 창립㉠ 1920년 보이틴스키 중국파견㉡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립㉢ 1922년 국민당과의 합작방침 결정2. 손문의 노선변화와 국민당의 개조① 5 ? 4 운동 이후 손문의 사상적 변화㉠ 대중운동에 대한 자각㉡ 사회주의 이론 수용㉢ 1919년 중국국민당 개칭㉣ 삼민주의 체계화(민생, 민권, 민족)② 국민당의 개진과 개조㉠ 손문과 마링)의 만남(1921년 12월/ 1922년 8월)㉡ 국민당의 개진) : 1923년 1월 1일 ‘중국국민당 선언’ 발표㉢ 1923년 1월 26일 손문 ? 요페의 공동선언㉣ 1924년 1월 국민당 개조 : 민주집중제소련 측의 입장손문 측의 입장① 군사적 기반 필요 : 당군 필요(황포군관학교)① 소수 중국 공산당 확장을 위함② 국민당의 대중적 지지 필요(대중과 당 연결)② 중국 내 소련 세력의 확대③ 소련의 경제적 원조 기대● 손문과 소련의 입장(국민당 개진의 정치적인 원인)1894년흥중회1905년동맹회1912년국민당1914년중화혁명당1919년중국 국민당1922년-1924년중국 국민당의 개진 ? 개조● 국민당의 변천● 남방혁명세력의 정치적 추이1차 광동군 정부? 1917년 9월 - 1918년 5월? 중화혁명당과 서남군벌의 연합cf. 1차 광동군 정부 수립 이후 서남군벌은 손문을 곧 실각시킴, 이후 손문은 칩거 ⇒ 5 ? 4 운동에 인식하기 시작2차 광동군 정부? 1921년 4월 - 1922년 6월? 광동군벌 진형명과 연합cf. 진형명과 손문이 연합을 하나 연성자치와 북벌을 두고 갈등, 진형명의 쿠데타로 손문이 실각, 이 시기에 소련이 손문에 접근하기 시작3차 광동군 정부? 1923년 2월- 1925년? 허숭지 광동군과 호남 ? 광서 ? 운남 객군의 도움cf. 1925년 3월 손문이 사망중화민국 국민정부? 1925년 7월 1일 중화민국 국민정부 수립? 집단지도체제(위원제)cf. 중화민국국민정부는 광동에 위치남경 국민정부? 1928년 10월 북벌의 완성? 수도 남경 : 집권적 권력체계의 창출Ⅱ. 국민당의 개조와 국민혁명의 전개1. 국민당일전대회의 개최와 국공합작의 성립① 1차 국공합작의 성립㉠ 원칙 : 용공연아, 농공부조㉡ 국민혁명의 목표 설정 : 반제국주의, 반봉건㉢ 新삼민주의 (⇒민생주의가 보강)㉣ 중국 공산당은 공인부와 노동부 장악, 대중운동의 조직을 통한 당내 세력의 확장-총리-상무위원(일상당무)-중앙집행위원회(정책결정기구) cf. 대표대회 휴회시-전국대표대회(당의 최고기관)-성 ? 현 ? 구 구분구● 국민당 조직 개편- 개조에 있어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은 보로딘- 손문이 초대 총리2. 상단사건과 국민회의운동① 상단사건㉠ 군사력 부재로 인해 광동군 정부의 재정적인 어려움 심화㉡ 재정적인 압박을 타개하기 위해서 광동군 정부는 광주에서 重稅㉣ 상인들의 반발과 이를 막기 위해서 광동군 정부는 농민과 노동자를 조직㉢ 상단과의 대립을 통해 대중의 힘을 현실화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점이 의의② 국민회의 운동㉠ 1924년 9월 18일 “중국국민당 북벌선언” ⇒ 북방 군벌들의 정세 변화와 관련㉡ 북방의 정세변화ⓐ 1924년 10월 21일 제 2차 북경정변ⓑ 11월 10일 (풍옥상의 요구에 의해)손문의 북상선언 발표 : ‘국민회의 개최요구’국민회의선후회의전인민을 대상으로, 대중주의적, 민주적 지향군벌적인 성격 多, 군벌수령, 소수민족 최고자, 명망자ⓒ 1924년 11월 10일 : 단기서 임시 집정 추대 ‘선후회의 요구’㉢ 국민회의 개최운동의 전개ⓐ 1924년 11월 20일 국민회의촉성운동 전개ⓑ 1925년 3월 1일 북경개막 : 국민회의 촉성회 전국대표 대회㉣ 국민회의 운동의 의의ⓐ 민중운동의 전개 기반 제공ⓑ 공산당의 노동운동에 대한 조직적 기반 확대3. 5 ? 30 사건과 민중운동① 노동운동의 성장㉠ 국민당의 노동정책ⓐ 공인부 설치ⓑ 1925년 5월 중화전국총공회의 설립㉡ 상해의 5 ? 30 사건(1925년 5월 30일)㉢ 광주 ? 홍콩 파업(1925년 6월 23일 - 1926년 10월)※. 5 ? 30 사건을 계기로 광주가 홍콩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짐※. 5 ? 30 사건과 광주 ? 홍콩 파업을 계기로 대중을 기반으로 국민당이 성장② 농민운동의 전개과정㉠ 국민당의 농민정책- 농민부의 설치- 1924년 6월 19일 대어농민운동선언 발표 - 국민당의 농민운동 방침이 구체화㉡ 농민협회 조직㉢ 농민운동의 급진화Ⅲ. 국민정부의 성립과 왕장연합체제① 집단지도체제의 형성(1925년 7월 1일) cf. 1925년 3월 12일 손문사망㉠ 중앙집행위원회㉡ 국민정부위원회 : 정부주석 왕정위/ 군사부장 허숭지/ 재정부정 요중개/ 외교부장 호한민② 군사 ? 재정의 통일: 군사, 재정통일 문제는 집단지도체제의 수립 이후 가장 시급한 문제㉠ 군정의 통일ⓐ 건국군 + 당군 = 국민혁명군으로 통합ⓑ cf. 건국군 = 광동군 허숭지, 호남군 담연개, 복건군 이복림ⓒ cf. 당군 = 장개석㉡ 재정의 통일ⓐ 군벌세력 재원 박탈ⓑ 요중개를 중심으로 진행됨※. 군사, 재정통일은 허숭지 휘하 광동군이 가장 반발을 함 ⇒ 요중개 암살㉢ 요중개(재정부장) 암살사건의 발생(1925년 8월 20일)ⓐ 국민당의 집단지도체제 붕괴ⓑ 왕정위 ? 장개석 연합체제의 성립● 요중개 암살사건의 처리특별위원회 구성고문 : 보로딘왕정위, 장개석, 허숭지① 광동군 주요 지휘관 구속⇒ 왕장연합체제● 정치적 ; 왕정위 측면 - 호한민 등 구국민당 세력 축출● 군사적 ; 장개석 측면 -당군(장개석)의 세력 확장② 외교부장, 대원수직 대리인인 호한민 소련 방문 결정③ 손과, 추로, 임상 북상외교대표④ 허숭지 군대 무장해제와 상해축출③ 왕장연합체제의 성립㉠ 1925년 12월 광동전역에 대한 지배권확립ⓐ 국민혁명군 편성ⓑ 진형명 잔여부대 완전진압㉡ 재정적 안정ⓐ 광주 ? 홍콩 파업의 장기화 : 홍콩의 경제적 지배를 단절ⓑ Why? 광동의 화폐가 중앙 화폐가 됨㉢ 당 지도권의 정통성 확립 ; 서산회의파 진압④ 왕장연합체제의 붕괴㉠ 중산함 사건(1926년 3월 20일)ⓐ 당내 공산당의 활동제한ⓑ 장개석의 권력 강화⇒ 각 군의 통합과정에서 장교들의 불만 多⇒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1군) 군내 공산당 세력을 억제하기 위함
이 충 영스터디 자료《강좌중국사5》〈중화제국질서의 동요〉중화제국질서의 동요 - 요약)Ⅰ 머리말① 전통적인 중국인들의 세계관은? = 중화사상(中華思想)과 그 위에 기초한 중화제국의 세계질서, 조공질서(조공책봉관계) cf.화이사상, 지대박물 등② 중화제국 질서의 조정과 변용 ; 전통적인 세계관이 조정되고 변용되어지기 시작함㉠ 19세기 중반 서구인의 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이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됨㉡ 제 1? 2차 중영전쟁 이후 1860년대(양무운동시기)에는 동치중흥(?) → ‘오인’㉢ 1870년대부터 조공국들의 ‘울타리’가 무너지기 시작을 함㉣ 유구, 월남, 조선 등이 중국의 지배권에서 이탈을 하게 됨㉤ 청일전쟁 이후 중화제국의 체제는 결정적인 붕괴를 맞이하게 됨③ 중화제국 질서의 동요의 의의(필자의 주장)㉠ 양무운동의 시기와 중첩되는 근대사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Ⅱ. 1860~1870년대 변경의 위기와 대응논의1. 1860년대의 ‘신외교’와 그 한계① 1860년 북경점령 이후 ‘새로운’ 외교관계가 정립이 됨㉠ 서구열강과 교섭업무를 전담할 새 외교기구로서 총리아문이 설립㉡ 3구통상대신과 남양통상대신이 외교업무를 보조㉢ 북경에 각국 외교관이 상주하는 공사관 개설이 허용(북경조약)㉣ 북경의 문호인 천진이 개방됨② 새 외교체제의 성립배경㉠ 신유정변을 통한 서태후 정권의 성립㉡ 서구의 이른바 ‘협조정책’으로 대내외적인 ‘안정’③ 중국인들의 대외인식이 점차 확대되기는 하나, 아직까지는 전통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개변한 것은 아니었음!!④ 새 외교체제로 서양인들을 ‘양인’으로 공식 인정(기존에는 이적(夷狄))⑤ 1866년 판리각국중외교섭사무대신이 최초로 공식적인 외교사절 활동을 함㉠ 어느 정도 대가를 지불하면 외국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각이 됨㉡ 초기 서양에 대한 우려가 약화됨 → 신외교를 위한 후속조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함⑥ ‘신외교’의 한계(총리아문의 한계)㉠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세계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 대외관계가 호전됨에 따라 능동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중국의 이권을 확보하려는 자세가 약화2. 일본의 접근과 대만사건① 일본의 조약요구 → 청일수호조규와 통상장정㉠ 명치유신을 단행 후 곧 일본은 중국과 관계를 새롭게 설정코자 조약을 요구㉡ 중국 내에서는 찬반양론이 제기됐지만, 결국 조약을 찬성하는 입장㉢ 1871년 청일수호조규와 통상장정이 체결 ? 조인됨㉣ 상호 외교사절의 교환 및 영사의 주재, 쌍무적 영사재판권, 유사시의 상호원조 등을 규정, But 일본이 주장했던 최혜국 대우와 일방적 영사재판권은 인정되지 않음㉤ ★ 일본이 이젠 중화제국체제와는 무관함을 명백히 한 일 ★ (대등한 조약 체결)㉥ 정한론의 전제로, 중국관계의 동등성 내지의 우위권을 확인하려는 욕구가 작용② 대만사건㉠ 1871년 청일양국에 조공을 바치던 유구의 표류민 54명이 대만 토착민들에게 살해됨㉡ 일본에서 유구민 피살에 대해 청조의 책임을 거론하는데서 대만사건이 시작㉢ 청조는 일본에 항의에 적극적인 책임 인정을 회피㉣ 일본측에서는 직접 대만민들을 징벌하겠다고 의사를 표시 → 1874년 일본 대만 진출㉤ 중국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세라고 판단하고, 양보에 의한 和局의 유지를 건의㉥ 중국이 (중국을 침략한)일본에게 오히려 배상금을 지불함③ 대만사건의 영향㉠ ★ 중국의 무력함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됨 ★㉡ 양무운동에 대한 반성이 제기㉢ ‘중흥’의 허상이 분명히 드러남, 대외적으로 중화제국체제에 대한 도전이 더욱 강화 됨㉣ 일본은 대만사건이후 유구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여 결국에는 중국의 동아시아 지배질서에서 유구가 완전히 이탈하게 됨(유구 → 일본의 오키나와가 됨)㉤ ★청조의 유구에 대한 종주권상실은 조공관계를 축으로 한 중화제국체제 동요의 표징3. 서북 ? 서남의 회란과 영 ? 노의 변경압박① 서북 ? 서남의 회란㉠ 서남지역의 회란ⓐ 1854년 운남성에서 회민탄압을 계기로 회민의 반란이 일어남ⓑ 이족, 장족 등 소수민족도 반란에 참여를 하게 됨㉡ 서북지역의 회란ⓐ 1862년 섬서성, 감숙성에서 한족과 회족들의 마찰로 회민들이 반란이 일어남㉢ 1870년 초가 되면 서남 및 서북의 반란에 대해 청조가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섬㉣ 1870년 중반이 되면 대부분의 회민반란이 평정됨㉤ But 평정 후에 곧바로 주변지역에 대한 청조의 영향력이 회복된 것은 아님② 서북지역에서의 러시아 세력 확대㉠ 서북지역에 청조의 세력이 약화 된 틈을 타서 러시아와 영국이 세력을 확대(신강지역)㉡ 중국내지에 반란을 1873년까지 모두 평정한 청조는 이제 신강수복작전이 주요 과제㉢ 러시아와의 1881년 페르스부르크조약을 맺고 신강의 대부분 지역을 회복함㉣ 러시아와 1884년까지 7차례 국경조약을 맺고 중앙아시아의 주요 국경지역을 확정㉤ 1884년부터는 신강성을 설치하고 순무를 둠③ 서남지역에서의 영국 세력 확대㉠ 1850년대 이후 영국이 미얀마에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기 시작함㉡ 미얀마는 본래 청의 조공국으로, 영국의 세력신장으로 인해 청의 종주권이 위협받음㉢ 영국은 미얀마를 발판 삼아 중국 서남내륙지방을 진출코자 함㉣ 마가리 사건 발생 ; 미얀마와 운남을 잇는 통상로 개발을 위한 탐험대가 운남에서 살해㉤ 영국 측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이권을 확대하기 위해 청조에 대한 압박을 강화㉥ ‘지부조약’이 체결되고 영국 측이 요구해온 이권을 대폭적으로 인정을 함㉦ 이로써 ★청조는 조공국인 미얀마에 대한 영국의 사실상의 지배를 공인★함4. 대응논의의 분기① 海防과 塞方(육방)의 논의(1874-1875)㉠ 청조의 ‘새로운’ 외교관계가 확대되고, 1880년대까지는 세계질서 속에 포섭되기 시작㉡ 이 과정에서 전통적 세계관의 조정과 변용을 둘러싼 대응논의가 전개됨㉢ 그 대응논의로 대표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이 ‘해방과 새방(육방)의 논의’② 새방(육방)의 주장㉠ 1860년대 중반 이후 청조는 내부의 여러 반란을 진압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음㉡ ‘동치중흥’이라는 의식이 나타나기 시작㉢ 이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세계관과 가치의 재건을 강하게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남㉣ ‘중흥’ 의식은 전통적 세계관과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을 강하게 요구하는 의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 → So!! 중흥의식은 보수적인 주장을 강화시키는데 작용㉤ ‘중흥’을 인식하고 있던 보수적인 세력들의 입장은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입각하여 서북지역의 방위 문제에 대한 긴급성을 강조한 것 ⇒ 육방을 강조하는 주장과 연결㉥ 육방을 주장하는 입장이 강화되어 신강수복작전이 우선적으로 실행이 됨㉦ 육방을 주장하는 입장은 대체적으로 중흥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보수 관료)cf. 양무운동 관료들 역시도 중흥에 입장에 서 있기도 함 ex. 좌종당③ 해방의 주장㉠ 확대되는 대외관계와 변경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세계질서를 수용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추진해야한다는 주장을 반영한 것㉡ 중흥에 비해 이홍장은 대외적인 위기를 강조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외교 전개 주장㉢ 복고적인 중흥에 비판으로서 이홍장의 경우 變局론을 제시함(해방과 연결)㉣ 중흥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추진 중이던 신강수복작적을 잠시 중지하고, 해방우선론을 이홍장이 강력하게 주장함→ 양무확대론에 보수적인 입장에 선 반대론자들이 규합㉤ 양무운동 내에서도 신강수복작전을 담당하던 좌종당의 경우에는 육방을 강조(해방을 강조하는 이홍장과의 정치적인 이유도 고려되어야 할 것)㉥ 새방을 더 중요시하는 선에서 해방 ? 새방의 절충안이 나오긴 하지만, 이후 해방강화 측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해군의 발전이 이뤄질 수 없었음④ 중흥의식의 확대 및 명분을 중시하는 전통적 세계관으로 해방우선론자들이 주장한 획기적인 양무운동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못함 ★Ⅲ. 청불전쟁과 그 영향※ 청불전쟁(1884)①. 제 1차 사이공 조약(1862)㉮. 프랑스 선교사 살해를 구실로 사이공 침략㉯. 코친차이나 획득㉰. 조약 이후 송코이 강에 대해 관심 → 중국과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
5 ? 4 운동강좌 중국사 스터디5 ? 4 운동Ⅰ. 머리말① 5 · 4 운동의 시기구분㉠ 협의의 5 · 4 운동- 1919년 5월 4일 친일매국노 타도와 파리강화조약 조인을 목표로 전개된 애국적 민중운동- 일본 산동 이권침탈 반대, 7월 4일까지 두 달에 걸친 민주운동㉡ 광의의 5 · 4 운동 = 신문화운동- 1915년(新靑年잡지 출간)부터 시작된 계몽적 문화운동(윤리개혁 · 사상개혁)- 중국 공산당의 창립(1921)과 국민당의 개혁(1924)에 이르는 상황적 변화② 5 · 4 운동의 가치- 실재 가치 탐구 과정(제 2차 민국혁명으로써의 의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기점으로서 민중 · 대중의 역량 발견( 모택동의 시기구분)Ⅱ. 신문화운동1. 新靑年 잡지의 창간과 추진세력의 결집① 1915년 9월 상해 창간- 진독수- 청년의 사상개혁 시도- 주요 집필진 : 진독수, 노신, 호적, 이대교② 채원배의 총장 취임(1917년 1월)- 북경대학의 변화 : 학생들의 정치활동 참여 보장(5·4운동 활동의 중심지가 북경대학)- 학생 자치 및 학생 단체의 설립 인정- 진독수, 이대교, 호적 북경대학교수취임●배경- 원세개 : 제제운동- 장훈 : 복벽운동(1917)- 강유위 : 공교국교화 운동(1919)●신문화운동의 흥기- 진독수(1879~1942) : 新靑年 잡지 발간- ‘청년들에게 고함’ → 정신개조, 윤리 혁명 → 개인의 독립과 개성의 해방, 청년의 이념적 각성을 통한 신중국의 건설- ‘新靑年’ 잡지 : 정신적 지향은 과학과 민주, 민주주의 · 자유주의 · 개인주의 · 사회주의, 전통의 비판과 재평가- 진독수, 이대교 : 사회 · 정치 개혁에 관심 → 문제VS 호적, 노쉰 : 문학·교육 개혁에 관심 → 주의 ⇒ 문제 - 주의 노선갈등●신문화운동의 중심지 : 북경대학- 전신 1898년 경사대학당- 1912년 중화민국성립 이후 북경대학으로 개칭- 채원배(1869~1940), 중화민국 초대 교육 총장, 1917년 북경대학 1학장 취임2. 신문화운동의 주요내용① 윤리의 개혁 : 타도 모색(봉건적 윤리관계는 이제 그만)- 여성해방 : 전통적인 정조관념의 비판, 자유연애 추구, 경제적 투입② 신사상의 수용- 전제, 미신의 타파 → 민주주의, 과학정신의 고취- 호적 : 서구식 부르주아 민족주의 · 자유주의 · 개인주의 가치 표방- 유사복 : 무정부주의 사조의 확산③ 신문학운동(문학혁명)- 백화운동 : 단순히 문어체에서 구어체로의 변화가 아님, 정신적 측면의 개조- 귀족문학 → 고전문화 타도 → 국민문학 → 통속적 사회 문학의 건립cf. 인형의 집 :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 ; 가정주부인 노라가 남편과의 마찰 속에서 ‘자신이 남편의 인형에 불과하가’는 사실을 자각하고 가정에서 뛰쳐나와 독립적 인격체로 살아간다는 내용의 희곡, 여성들의 정치적 자각·독립으로 연결됨, but 노쉰은 이를 비판● 1920년대 무정부주의 사조① 무정부공산주의파(실사, 진화사)② 무정부개인주의파(분투사)③ 무정부공단주의파(공여사, 호조사, 민성)⇒ 교육을 통한 개인의 도덕적 개조노동과 호조 : 공독주의(노동하면서 공부하자, 공학주의), 노공주의라 하여 확산의미 : 지식인과 노동자의 결합을 전제로 한 사회혁명 사조의 디딤돌⇒ 사회혁명의 목표를 달성● 노쉰- 광인일기(1918년 5월, 신청년에 발표)- 형식 : 백화문 사용- 내용 : 반전통·반유교의 사상혁명의 표현3. 신문화운동의 시기구분① 1915~1918년 전반 : 문화 혁명적 운동단계(《新靑年》중심) → 윤리 · 사상 · 문학의 개혁② 1918년~1919년 전반 : 직접적 정치투쟁의 준비단계ⅰ. )의 발간- 군벌의 반동성 폭로- 러시아 10월 혁명 소개- 마르크시즘과 무정부주의 사상 전파- 노동문제ⅱ. 평민교육강연단(1919)의 성립- 민중 계몽을 통한 배일운동ⅲ. 소년중국학회의 건립●① + ② ⇒ 반봉건의 문화운동 + 구국운동 내지 반제국주의 정치운동●5 ? 4 운동 정리시작의 상징물1915년 대표 인물진독수, 이대교(이대조), 호적, 노신지도 사상민주, 과학사상선전의 주요 출판물활동의 중심지북경대학Ⅲ. 5 · 4 사남북대립- 북경정부 내부의 권력 투쟁 : 안휘파 군벌(단기서-국무총리, 정치적 실권 장악)과 직예파 군벌(풍국장-부총통)의 대립- 광주 : 호법군정부 혁명세력(임시약법 수호하자)② 일본의 중국에 대한 지배권 확장- 1914년 산동성에서의 군사행동- 21개조 요구 : ‘산동성의 권인에 대해 독일과 일본의 협정에 따른다’ → 원세개에게 요구, 원세개가 승낙③ 단기서 정권과 일본의 결탁- 서원차관 : 1917~1918, 1억 4천 5백만엔의 차관제공 → 일본으로 경제적 예속화- 1918년 중일공동방적협정 체결 : 중국군의 일본군에 대한 예속화 초래공동의 적인 러시아 혁명세력 남하에 중일이 공동으로 대응하자 → 일본이 중국내에 마음대로 군사기지 설치가능④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 개최- 4월 21일 산동 ‘21개조’ 요구의 승인- 파리강화회의 : 1차 대전 이후 독일 이권을 나누는 외교적 각축장, 독일 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2. 경제적 배경① 국내산업 발전-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민족산업의 급속한 발전- 무역구조의 변화 : 수출입 상품의 다양화, 국제 수지 안정화- 중국 산업자본의 ‘황금시대’② 노동자 계급의 성장- 노동자 수의 증가 : 1913년 약 65만명 → 1919년 야 200만명- 노동단체의 설립 : 중화공업협회, 중화공회총회- 실업구국의 목적 하에 실업발전, 노동자 교육 및 노동자 복지 주장●5·4운동의 배경- 정치 : 이권침탈, 남북대립- 경제 : 산업발전, 노동자계급 성장- 문화(도화선) : 유교비판, 민주와 과학Ⅳ. 5·4 사건의 전개* 파리강화회의 결의안 통과 → 21개로 요구의 승인(1919년 4월)- 4월 30일 전보 도착- 5월 1~3일 산동문제에 관한 뉴스 보도 : 1918년 중일협약 혼연동의, 영·불간의 밀약* 5·4운동을 거치면서 반제국주의의 구체적인 방안이 일본상품배척으로 실천됨, 동포들이여 국치를 잊지 말자1. 북경중심의 학생운동① 전 북경학생결기대회의 개최(5월 3일)- 국민잡지사, 신조사, 북경대 평민교육강연단원 주도②5%③ 시위의 극렬화와 정부의 탄압- 조여림의 집 습격, 방화 및 주요학생의 체포 → 이후 채원배와의 협상으로 학생 석방조여림 : 외교 차장, 21개조 요구 사인, 서원 차관 도입친일파 매국노 : 조여림, 육종여, 장종상④ 5월 19일 시위의 재시작- 국산품 이용, 조약 조인 거부, 매국노 징벌을 요구⑤ 새로운 운동의 국면 전개 : 6·3운동- 가두 연설의 시작- 상인, 기업가, 노동자, 학생의 연대 국면 대두- 6월5일 단기서 정부의 포기 → 학생들의 시위 성공2. 5·4운동의 전국적인 확산① 산동- 학생계 : 강연과 일본상품배척운동, 5월 23일 총수업거부(총동맹휴학 형태)- 상계 : 6월 10일 철시② 천진- 천진여계애국동지회 결성 : 배일의식 고취, 국산품 애용 운동- 각계연합회의 성립 : 30여계 단체가 결합하여 대중운동 전개- 여성참여와 학생참여가 특징적③ 무한- 학생연합회의 성립 : 6월 1일 수업거부·가두연설- 국산품애용운동의 전개- 호북독군 왕점원의 탄압정책(수업거부 탄압) : ‘6·1 대참안’의 발생- 6월 초 노동자 파업, 상계 철시●5·4운동의 진행방식- 학생연합회의 총동맹수업거부, 가두연설- 상계의 철시와 일본상품판매거부●투쟁 구호- 매국노 처벌- 일본상품의 배척3. 상해에서의 ‘삼파’ 투쟁① 5월 7일 국치기념대회 개최- 산동반환, 매국노징벌, 체포자 석방 요구② 5월 11일 상해학련의 성립- 5월 26일 수업거부돌입- 일본상품배척운동 전개③ 5월 13일 국민대회상해사무소 설립 → 5·4운동 중심추진세력④ 6월 5일 철시의 실현 : 매국노처벌이 일차적 투쟁 목표(반제국주의적 성향)- 상점은 물론 공공시장, 전장, 은행공소의 영업정지⑤ 노동계의 파업- 6월 5일 상무인서관, 중화서국의 인쇄공과 부두 노동자 파업- 6월 8~9일 대규모 파업 실행 : 도시기능 마비●상해의 삼파투쟁- 학생들의 동맹 수업거부(파과)- 상계의 철시(파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노동 · 상업 발달 지역과 연해지역에 집중적으로 발생4. 5·4운동의 정치적 성과- 6월 10일 조여림, 육종상, 장종여 파면② 베르사유조약의 조인 거부- 6월 16일 전국학생연합회, 각계연합회 : 조약조인거부운동을 벌림- 6월 28일 파리의 중국대표단 베르사유조약의 조인 거부- 베르사유조약 : 파리강화회의, 1차 대전 이후 독일 이권 분할③ 한계- 단기서 세력의 건제- 산동 권인도 회수하지 못함 → 1922. 9 ‘워싱턴 회의’를 통해 회수(청도반환, 주둔군 철수, 산동철도 반환)Ⅴ. 5 · 4 운동의 확산1. 문제와 주의 논쟁① 급진파(사회주의파) → 주의, 이즘- 대표인물 : 남공무, 이대조(이대교)- 주장 :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없이 중국의 문제들이 따로 해결될 수 없다- 개혁의 방안 : 사회·경제·정치적 변혁을 통해 중국문제의 총제적 해결② 자유주의파 → 문제- 대표인물 : 호적- 주장 : 주의는 실제문제의 해결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의 방안 : 교육·문화방면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기초의 형성* 이 논쟁은 민주와 과학의 기치에는 동의하니, 이 방법에 따라 두 개의 분파로 나뉨2. 마르크스주의의 확산(마르크스주의가 이상적 대안으로 떠오름) ← 주의① 사회주의 이론의 소개와 전파- 제 6월 제 5호 : 마르크스주의 특집호- 북경대 사회주의연구회(1919.12) 성립- 이대조 북경대학생 마극사(마르크스)학설연구회 발기② 공산당의 성립- 코미테른의 보이틴스키 파견 : 공산당의 결성 추진- 1921. 7월 중국공산당 성립- 공산당 기관지로 개편 (자유주의파들은 불리, ‘노력주보’(1922.5) 발간, 결별 본격화)③ 국민당의 개조- 손문의 사회주의적 영향과 국민당의 개조- 1914년 중화혁명당 → 1919 중국 국민당 개칭- 제1차 국공합장의 혁성(1924.1~1927.7)원칙 : 용공연아●5 · 4 운동의 정치적 성과 : 초보적 정당으로의 공산당 형성, 국공합작을 통해 반제국주의적 노력●국민당의 변천- 1894 흥중회, 1905 동맹회, 1912 국민당, 1914 중화혁명당, 1919 중국국민당3. 문화운동① 시)
이슬람의 팽창)역사교육과200512478 이 충 영- 목 차 -머리말Ⅰ. 이슬람교⑴. 이슬람교의 흥기⑵. 이슬람교의 교리⑶. 이슬람교의 교파와 왕조Ⅱ. 이슬람 세력의 팽창 - ‘영토적 팽창’⑴. 이슬람 세력의 영토적 팽창⑵. 이슬람 세력의 팽창 원인Ⅲ. 이슬람 세력의 팽창 - ‘문화적 팽창’⑴. 과학⑵. 철학⑶. 문학⑷. 역사⑸. 지리⑹. 미술⑺. 음악⑻. 상업Ⅳ. 이슬람 세력 팽창이 유럽에 끼친 영향⑴. 유럽으로 문화전달⑵. 중세의 봉건사회 형성에 영향맺음말머리말우리는 기독교인들이 食前에 예배를 하거나, 주말아침에 교회에서 예배를 하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슬람 여성들의 차도르를 보거나, 이슬람교도들의 예배의식을 보면 편견 내지는 호기심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이슬람문화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가는 사회학의 논의로 차치하더라도, 이슬람문화(내지는 이슬람에 기원을 둔 것)가 우리생활 주변에서 흔히 발견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알코올, 탬버린, 《아라비안나이트》, 代數學 등등 열거하자면 너무 많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이슬람 상인들이 한반도를 다녀갔다는 점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이렇게 일상 저변에 발견되는 이슬람문화를 우리가 직접 수용을 했다고 하기 보다는, 근대 이후 서양문화 수용과 함께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 문화는 어떻게 서양에 영향을 미친 것인가? 그 기원을 찾는다면 당연 서양의 중세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보는 서양의 중세’ 무렵)에 이슬람 세력이 팽창)을 했고, 그 팽창기를 이후로 이슬람문화가 서양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슬람문화의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할 수가 있다.)본보고서는 서양 중세사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서양의 중세와 관련된 이슬람의 팽창시기를 살펴 볼 것이다. 먼저 이슬람교의 흥기와 관련하여 이슬람 교리의 특성을 살펴 볼 것이다. 다음으로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서양를 완전히 기록한 것이라 주장을 한다.이러한 이슬람 교리의 가장 큰 특징은 교리가 간결하다는 것이다. 알라를 믿고 그 가르침에 따르는 자에게만 복된 내세가 약속 되었을 뿐이라든지,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내용은 그 간결한 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교리로 인해서 그리스도교와 같은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도 평가를 받는다.교리와 관련하여 이슬람 신자를 가리키는 ‘무슬림)’에게는 의무사항이 있는데, 이슬람에서는 이를 가리켜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는 매일 아랍어로 반복하여 “알라 이외의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메카를 향해 다섯 차례 기도하는 것, 세 번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布施)하는 내용, 네 번째는 라마단(이슬람 달력의 아홉 번째 달) 동안은 단식한다는 것, 다섯 번째는 가능하면 일생에 한 번 이상 메카를 순례한다는 것이다. 또 신자들이 믿어야할 ‘육신’을 제시하는데, 유일신, 알라, 천사, 계전(《코란》), 예언자, 내세, 천명(신의 뜻은 인간의 행동으로 구현 됨)을 제시한다. 또 聖戰(Jihad)이라 하여 이슬람 보호와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확실한 길이라고 교리에서는 말하고 있다.⑶. 이슬람교의 교파와 왕조)무함마드는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 통치체제 확립에 문제가 생겼다. 632년 무함마드의 죽음으로부터 661년 이르기까지 약 30년간 무함마드의 측근이 통치를 책임지게 되었다. 무함마드를 대신하는 지도자를 가리켜 칼리프라 하였는데,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대변자’, ‘후계자’, ‘대리자’란 뜻을 가진 ‘칼리파(Khalifah)’란 말에서 유래하였다. 칼리프는 코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절대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정치와 종교의 최고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칼리프들은 무함마드의 측근세력들로써, 무함마드 가문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랫동안 무함마드 가문 출신 칼리였다. 통일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대외로의 팽창을 시작하였다. 후술 하겠지만 이슬람의 기후조건상 아라비아 반도의 통일이후 대외적 팽창이 당연한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먼저 이슬람 세력이 진출을 한 곳은 비잔틴이었다. 비잔틴은 지리상으로도 아라비아 반도와 접해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세력이 가장 먼저 진출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이슬람 세력은 이미 638년에 당시 비잔틴의 영향에 있던 시리아 점령하였고, 계속해서 비잔틴에 압박을 가한다. 비잔틴의 동쪽으로 진출을 했던 세력은 644년에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한다.이와 동시에 서쪽으로 진출했던 세력들은 북아프리카를 점령한다. 643년에는 이집트를, 698년에는 튀니지를, 705년에는 모로코를 점령하는데, 북아프리카의 점령은 훗날 서유럽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 아프리카 정복과정에서 ‘베르베르인’에 대해 주목해 볼만 하다. 베르베르인은 북아프리카에 분포했던 민족으로 이슬람의 침입으로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서부의 이슬람 개종에 공을 세웠고, 이후 이베리아 반도로 이슬람 세력이 진출하게 했던 중심세력들이었다.중앙아시아로도 이슬람 세력은 진출을 하였는데,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출한 세력들은 인도가 이슬람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는 이후 인도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751년에는 중국과도 탈라스 전투를 통해 접촉을 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제지술이 유럽으로 전파 되는 계기가 되었다.8세기에 들어서는 이슬람 세력이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71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로 이슬람 세력이 진출을 하는데 西고트 왕국 점령하고, 이곳에 이슬람의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슬람 세력의 유럽진출과 함께 유럽에서의 이슬람 팽창의 저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 세력의 유럽진출 저지는 이후 유럽 역사전개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서양의 중세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먼저 동유럽에서 저지를 살펴보면, 비잔틴의 레오 3세는 717-718년연한 논리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척박한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승전으로 획득할 전리품과 비옥한 땅을 위해 진출을 한 것이다. 만약 아라비아 반도가 척박하지 않고 비옥하고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면, 이슬람 세력들은 대외적인 팽창보다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정착과 발전’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 팽창의 가장 큰 원인은 기후조건과 관련된 경제적 요인이라 하겠다.Ⅲ. 이슬람 세력의 팽창 - ‘문화적 팽창7세기에 흥기하기 시작한 이슬람 세력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후 영토적으로 급속한 팽창을 하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진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세력의 영향 하에 여러 곳에서는 칼리프들에 의해 국가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화가 창출되기 시작하였다. 창출된 문화 역시 영토적 팽창만큼이나 ‘팽창’을 하였는데, 그 분야를 세분화하여 보면, 과학, 철학, 문학, 역사, 지리, 미술, 음악 등 거의 全분야에 걸쳐 ‘팽창’을 거듭하였다. 또 이와 관련하여 그들의 ‘상업적 팽창’을 이룩하기도 하였다.이들의 공통점은 여러 문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문화로 창출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과학과 철학의 분야에서는 큰 성과를 거뒀는데, 과학과 같은 경우는 현대과학에서도 여전이 그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고, 철학과 같은 경우는 이후 유럽사회에 고대 철학을 전수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이슬람의 문화가 서양 중세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하여는 후술하겠고, 먼저 문화의 ‘팽창’을 분야별로 살펴보겠다.⑴. 과학이슬람의 과학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현재에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슬람의 영향 하에서 특히 발전을 거듭했던 과학의 분야는 의학, 천문학, 수학, 화학이다.의학과 같은 경우는 먼저 살펴볼 것이,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이 아랍어로 번역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문화적 팽창의 공통점으로 언급했던, 여러 요소의 문화를 혼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는 점이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이를 바탕으로 질병연구, 인체해부, 임상금도 이슬람 문화의 힘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뿐만 아니라 우마르 하이얌(1050-1123)의 시〈루바이야트〉(4행시)는 《아라비안나이트》와 함께 세계문학사에 확고한 지위 차지하고 있다.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던 후기 옴미아드 왕조에 영향으로, 에스파냐에서 발달한 문학은 프랑스와 독일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⑷. 역사역사학에서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븐할둔(1332-1406)을 들 수가 있다. 그의 저서《역사서설》에서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국가, 사회 및 문화의 발전을 연구하고 그 법칙 제시하고 있다. 이는 歷史觀에 대한 새로운 지표를 제시한 것으로써, 그의 다른 저서 《이바르의 책》과 함께 세계적인 명저로 평가를 받는다.⑸. 지리이슬람 문화와 관련하여 지리학의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중세 이슬람 여행가 이븐바투다(1304-1368)는 30년간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여행하고 《이븐바투다 여행기》를 저술하였다. 《이븐바투다 여행기》는 이후 유럽으로 전해져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도 했다.지리적으로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이, 여러 지명의 어원이 아랍어에 있다는 것이다. 지브롤터는 ‘타리크의 산’을 뜻하는 아랍의 말로써, 타리크(Jebel Tariq)는 이베리아로 건너간 최초의 이슬람군의 지휘관을 뜻하는 것이다. 트라팔가(Trafalgar)는 ‘동굴의 곶’을 뜻하는 아랍의 말(Tara al-Ghar)에서 유래가 되었고, 이슬람 세력 하에서 코르도바의 가죽제품이 유명하였기 때문에 영어의 가죽을 뜻하는 코도반이나 불어의 제화공을 뜻하는 코르도니에가 생겨났다.⑹. 미술미술 분야에서는 아라베스크(arabesque)) 양식이 특징적이다. 아라베스크는 이슬람 풍의 무늬로써, 이슬람 문화의 한 상징이다. 그 모양은 현란한 채색 타일을 벽면에 붙여 꽃무늬와 기하학적 무늬를 복잡하게 디자인 한 것으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장식한 것이다.미술과 관련지어 이슬람의 건축양식 또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는 이슬람 영향 하에 있었던 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