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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한국의 간화선에 대하여 평가A좋아요
    목 차1. 간화선이란?2. 간화선의 성립배경3. 한국 간화선의 형성과 변화 과정4. 간화선은 최고의 수행법인가5.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과 대안1. 간화선이란?간화선이란 우주 인생의 근원을 철저히 구명(究明)해 가는 데 있어서 화두(話頭)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불교의 참선법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라고 하는 정형화되어 있는 어떤 사항을 참구하면서 수행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간(看)은 본다는 것이고, 화(話)는 공안(公案)이라는 것으로, 즉 공안을 보고 그것을 참구하여 마침내 크게 그리고 철저하게 깨닫는 선(禪)이다. 여기서 화두란 공안 또는 고칙(古則)이라고 하는데, 공정하여 범치 못할 법령, 옛 어른들이 남겨 놓은 법칙이란 뜻이다. 즉 진리를 깨친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이기도 하고, 몸짓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는 견줄 수 없는 부처님의 깨달은 법, 진리 그 자체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참선 공부에 있어서 문제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無)자 화두가 그 것이다. 이러한 간화의 방법은 화두를 어미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 참구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가는 수행법이다. 이 간화선은 중국 송나라 말기 조동종(曹洞宗)의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묵조선(默照禪)을 표방하고 나오자, 임제종의 대혜 종고(大慧宗)선사에 의해서 제창되었는데, 현재 우리 나라 선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선법은 이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2. 간화선의 성립배경1. 무사선(無事禪)의 병폐간화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간화선의 성립배경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학자들은 간화선의 성립배경을 대체적으로 다음의 셋을 들고 있다.첫째, 남종선의 돈오가 무사선으로 오해된 폐풍을 들고 있다. 돈오를 주장하는 남종선의 기본입장은 김호귀의 “본래 자성청정불自性淸淨佛이므로 모든 행주좌와行住坐臥의 행위는 다 본래부터 깨침의 현현이다.”는 명제로 분별로 본자청정이라 여기고 그 경지를 좌선으로 확인하려는 발상자체가 미혹에서 나온 분별망상일 뿐이라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대혜의 묵조선에 대한 공격은 묵묵히 좌선하는 坐의 형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잘못 망상에 빠져 그것을 깨달음의 현성이라 간주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곧 화두話頭없이 바로 그 당체를 위음나반威音那畔의 일과 공겁이전空劫已前의 마음자리로 대신하여 무사적정無事寂靜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때문이다. 항상 어디서나 일행삼매一行三昧와 일상삼매一相三昧로 일관해야 할 치열한 구도심을 접어둔 채 현실을 무시한 안이한 모습의 부정이라 할 수 있다.3. 한국 간화선의 형성과 변천 과정1. 지눌의 선사상과 간화선의 수용한국불교에서 간화선이 처음으로 수용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3∼1210)에 의해서였다. 원래 간화선 자체가 지눌보다 두 세대 정도 앞서는 남송의 대혜종고(大慧宗┳:1088∼1163)에 의해서 처음 체계가 잡힌 것이었으므로 한국의 간화선 수용은 그렇게 시기적으로 늦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에서도 간화선이 일반화된 것은 원나라 이후이므로 지눌의 간화선 수용은 오히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지눌의 간화선 수용은 대혜종고나 그 제자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눌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던 과정에서 얻게 된 것이었다. 지눌의 비문에 의하면 지눌이 십여 년 간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무언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대혜어록》을 보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도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參禪)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라는 구절을 보고서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편안함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지눌은 대혜의 어록을 중요하 수행법과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의 수행법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었을까. 그의 저술에 의하면 지눌은 이 수행법들의 차이를 우선 근기상의 차이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간화선법은 최상근기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초심(初心)의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에 의하면 이 열 가지 알음알이의 병도 진성연기(眞性緣起)로서 취하고 버릴 필요가 없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말로 가리키고, 지시하고, 듣고 헤아리는 바가 있으므로 처음 발심한 공부인들도 믿고 배워서 행할 수가 있다.(그러나) 경절문(徑截門)은 직접 비밀한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 말도 없고 가리키는 것도 없어 듣고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법계가 막힘 없이 연기한다는 이치조차도 곧 말하고 이해하는 장애(說解之碍)가 된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밝게 알고 완전하게 알게 되겠는가. (《간화결의론》)이 내용만으로 보면 원돈신해문과 간화경절문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완전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성적등지문에 대하여 별도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성적등지문이 원돈신해문에 의한 頓悟에 자연히 따르는 漸修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은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수행법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수행법인 것이다.) 이 경우 당연히 간화선의 경절문이 완전한 가르침이고 원돈신해문은 불완전한 가르침이 된다. 그리고 근기에 따른 것이라면 두 가르침은 교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지눌은 두 근기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 것 같지는 않다. 원돈신해문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가 다시 경절문의 방편 즉 간화선에 의해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앞에서 제시한 법문은 모두 언어에 의하여 이해함으로써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을 위하여 (깨달음의 대상인) 법(法)에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의 두 가지 뜻이 있고 (깨닫는 주체인) 사람(人)에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다양한 수행의 길을 추구해보고 많은 후학들을 지도한 선사로서 간화선이라는 가르침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할 수 있기 난해한 따라서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타당한 이해가 아닐까 한다.2. 원 간섭기 불교계의 간화선 유일주의지눌에 의해 수용된 간화선은 이후 고려 불교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그의 사상을 계승하는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하여 간화선 사상이 꽤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지눌의 후계자인 혜심(慧諶)은 대혜종고의 간화선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자무불성간화론(狗子無佛性看話論)》을 저술하여 화두 참구법을 논하였고, 화두 참구를 위한 공안집(公案集)으로 《선문염송》을 편집하였다.또 그가 수선사의 주법(主法)으로 있는 동안에 대혜종고의 저술인 《정법안장》이 수선사 승려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지눌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된 간화선법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수선사의 간화선 사상은 지눌의 입장을 계승하여 간화선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화두 이외의 이론에 의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혜심은 스승인 지눌의 가르침으로 간화경절문 이외에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원돈신해문의 가르침을 얘기하는 《원돈성불론》을 간화선 이론서인 《간화결의론》과 대등하게 간행하였다. 또 여러 수행법을 종합하고 있는 영명연수(永明延壽)의 《만선동귀집》을 절요하였는데, 연수의 가르침은 간화선법의 수행과는 무관한 것이었다.그런데 원 간섭기를 전후하여 고려에는 이러한 수선사의 간화선 경향과는 다른 새로운 간화선 경향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원 간섭기 초기에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활약하던 몽산덕이(蒙山德異)는 모든 이론적 가르침을 부정하고 오로지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것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상이 중국에 갔던 왕실과 일부 승려들을 통해 수용되면서 고려 후기 불교계의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무자’ 화두의 참구는 이미 대지는 않았다. 다양한 선수행법이 공존하고 있었고, 화두 참구의 방법도 다양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널리 읽힌 간화선 관련 서적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고려에서는 몽산 덕이의 저술을 제외한 다른 간화선 관련 서적은 거의 읽힌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앞 시기에 널리 읽혔던 지눌의 저술도 원 간섭기에는 거의 간행되지 않았고, 당시 중국의 간화선을 대표하는 승려로 중국과 일본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고봉원묘(高峰原妙)와 중봉명본(中峰明本)의 저술도 이 시기에 유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심지어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선종 서적으로 인정되던 《무문관》조차도 이 시기 고려에서는 읽혀지지 않고 있었다. 고려의 불교계는 오로지 몽산덕이의 저술을 통하여 간화선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사상 경향만을 유일한 간화선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3. 조선시대 간화선의 성격원 간섭기의 간화선 사상은 조선 초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몽산덕이의 사상에 기초하여 무자 화두를 참구하고 본분종사에게 인가를 받는 것이 선수행의 주요한 방법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사상 경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변화되었다. 간화선 이외의 선 수행법도 다시 주목되었고 몽산덕이의 저술 이외의 책들이 읽혀지면서 간화선의 내용도 단순한 무자 화두의 참구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인데,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지눌 사상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었다. 고려 중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지눌의 사상은 원 간섭기 이후에는 거의 잊혀 지고 있었다.이 시기에 그의 저술이 간행된 흔적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승려들의 행적에서도 지눌의 사상에 대한 관심과 주목은 보이지 않는다. 간화선 절대주의의 분위기에서 간화선만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 지눌의 저술들 특히 간화선 이전의 사상을 담고 있는 저술들은 주목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잊혀졌던 지눌의 사상은 조선왕조 개창 다.
    인문/어학| 2006.12.10| 13페이지| 1,000원| 조회(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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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문화
    목 차I. 불상이란1. 불상의 출현2. 불상의 종류II. 삼국시대의 불상1. 고구려의 불상2. 백제의 불상3. 신라의 불상4. 통일신라의 불상I. 불상이란1. 불상의 출현불교조각의 중심은 불상이다. 불상의 의미는 넓은 의미로는 여래상뿐 아니라 보살상?신중상?조사상 등 불교 상형의 제반 조각물을 일컫는 말이며 좁은 의미의 불상이란 불의 상, 즉 여래상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발생하게 된 것은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 즉 불멸 5백여년 전후의 일이다. 이 때에 이르러 불상이 출현하게 된때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에 기인한다.첫째로는 내부적 사정으로 교조인 석존에 대한 예배의 종교적 감정이다. 석존 재세시에는 석존이 때때로 예배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생신의 석가 이외에는 귀의 예배의 대상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석가의 입멸에 의하여 귀의예배의 대상을 잃어버린 교도들은 석존의 생신에 대신하여 무엇인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선 사리나 유물 등 석존 육신의 일부나 생전의 소지품 및 유적지(탄생처?성도처?전법륜처?입열반처)등 석가의 일생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들에서 추모예배의 대상을 삼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석존에 대한 추모의 정으로 석존의 모습을 조성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불상을 제작할 가른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여건이란 불상을 만드는 불상제작 기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석존에 대한 신성감에서 석존을 인간적으로 형상화함을 주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둘째로는 외부적 사정으로 인도 조각계에 미친 희랍, 로마의 영향이다. 서기 후에 비로소 불상이 출현하였다고 앞에서 말하였으나 이는 인도 전역에서의 일이 아니고, 다만 서북인도지역의 간다라 부근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간다라 지방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침입 이래, 희랍?로마와 인도와의 교섭지대였던 관계로 이 지방의 불교도들은 다른 지방의 불교도들보다 이국문화에 접촉할 기회가 많았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들은 신이나 국왕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光背)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는데, 그 때 만들어진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이라고 하며 전체 높이는 16.2㎝이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고,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종목 : 국보 제85호분류 :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수량 : 1구지정일 : 1962.12.20소재지 :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시대 : 삼국시대소유자 : 이건희관리자 : 호암미술관景四年在辛卯比丘道共諸善知識那婁賤奴阿王阿据五人共造无量壽像一軀願亡師父母生生心中常値諸佛善知識等値遇彌勒所願如是願共生一處見佛聞法1930년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호암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으로 높이 15.5㎝이다.하나의 커다란 광배(光背)에 본존불과 좌우보살상을 조각한 형태의 삼존불(三尊佛)로 현존하는 같은 형식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좌우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6각형의 대좌(臺座)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지고, 그 위에 활짝 핀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을 올려 놓은 모습인데, 잎이 넓고 부드러운 연꽃잎은 백제시대 특유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보살상 전체에 녹이 많이 슬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금색이 찬연하며 백제 불상 특유의 유연함을 보여주고 있다.종목 : 국보 제72호분류 :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수량 : 1구지정일 : 1962.12.20소재지 :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시대 : 삼국시대소유자 : 전성우관리자 : 전성우커다란 하나의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중앙에 본존불과 양 옆에 협시보살을 배치하고 있는 삼존불(三尊佛)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불상 전체 크기에 비해 크고 높게 표현되었다. 미소를 띤 갸름한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으며, 어깨와 가슴은 약간 좁은 듯 하지만 둥글고 강인하게 처리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정면으로 V자형 옷주름이 있으며, 좌우로는 새의 깃같은 옷자락이 뻗치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이 위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고 손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손가락 2개를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양 옆에 배치한 협시보살은 광배의 끝에 매달리듯 표현하였으며, 3가닥으로 올라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신체 표현은 본존불과 비슷하지만, 앞면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옷주름과 손모양이 다르다.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가는 선으로 장식한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배(舟) 모양으로, 본존 주위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도드라지게 새기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쿨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바닥이 밖으로 퍼진 원통형이며 연꽃이 새겨져 있다.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의 양식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불상은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글에 의해 백제 위덕왕 10년(56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종목 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 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3. 신라 시대의 불상종목 : 국보 제127호지정일 : 1968년 12월 19일소장 : 국립중앙박물관소재지 :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시대 : 삼국시대 말기크기 : 높이 20.7cm종류 : 불상1968년 12월 19일 국보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7cm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아래 양쪽 옷자락이 약간 떨어져 나간 것 외에는 모양이 완전하며 황금색 도금(鍍金)도 잘 보존되었다. 건장한 신체, 긴 목, 통통하면서도 갸름한 얼굴, U자형으로 길게 내려온 옷주름 등의 양식적인 특성으寶甁)을 쥐고 있다.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쪽면에도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서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면에는 40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북쪽 바위면에는 모두 7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아래쪽에는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한 공양상 2구와 스님 한분이 새겨졌는데,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始原)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4. 통일신라시대불상종목 : 국보 제79호분류 :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수량 : 1구지정일 : 1962.12.20소재지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시대 : 통일신라소유자 : 국립중앙박물관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1934년 경주구황리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구황리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준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다.
    인문/어학| 2006.12.10| 20페이지| 1,500원| 조회(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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