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수*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6
검색어 입력폼
  • 인간학으로서의 수학 평가B괜찮아요
    수학-인간학으로서의 학문언젠가 학교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물어보신 적이 있었다. “과연 수학은 왜 배우는 걸까?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왜 단위수도 많은 주요 과목일까?” 나는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수학은 재미와 흥미를 유발하는 과목이었지만 보편적인 수학의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부끄럽지만 ‘형식도야설’에 근거한 지극히 단순한 대답만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때를 기억한다. 결국 ‘수학은 왜 배우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고 여전히 의문을 가진 채 「人間學으로서의 數學」)이란 책을 만났다.나는 저자가 ‘시간’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차 이 책에 빨려들었다. 저자는 시간을 객관화시킨 개념과 의식화시킨 개념으로 나누어 인간이 자연의 운동 현상을 관찰하고 시간을 어떻게 파악하기 시작했는지 수학기호로 간단히 표현하고 설명함으로써 조심스럽게 접근해간다. 그 중에서도 최후의 심판 그림 아래 덧붙은 ‘시간이 끊긴 날’)이라는 표현은 ‘종말’이라는 개념을 ‘시간의 끝’으로 해석하려는 독특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인의 시간관을 논하는 대목에서 우리나라가 동, 서양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식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죽음이 한국인에게는 지나버린 것이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자손과 함께 숨을 쉬고 살아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승과 저승이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가까운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사고방식은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의 시점에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동양과 서양의 사상의 발전과 수학을 연관시킨 것도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동양의 사상이 자연과의 합일점을 찾아가는 사상에서 출발하였다면, 서양에서는 자연과 나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고 의문점을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사상의 발전은 수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동양에서의 수학이 수치화하고 객관화하려는 서양의 기하학적인 탐구정신에 반(反)하였음은 사상의 출발점이 각기 다른 것에서 연유한다.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현세중심적인주체적 사고방식은 과거, 미래를 현실에 동떨어진 것이 아닌 연장선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앞, 뒤 관계의 철저한 규명을 요구하는 기하학적인 ‘동경’이 싹트지 않도록 작용하였다. 즉 이것은 현상(現想)과 현실(現實)을 혼동하여 ‘로고스(Logos)'적 사고를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며 수학의 발전이 동양에서 잠시 멈추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달리 서양에서는 일찍이 자연의 섭리도 객관적인 법칙성에 일치시키려는 끊임없는 사고의 작용을 하였으며 직선적인 인과법칙으로 무한의 계열(系列)을 만들어낼 정도로 앞선 사고를 가졌다. 서양의 인간은 보편적 진리인 ‘태양은 어김없이 동으로 뜬다.’와 같은 필연성 안에서 ‘자신의 삶의 길을 선택할 수 있으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고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서양의 ‘대결정신’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논리보다는 직관(直觀)이, 규칙보다는 정(情)이 앞선 사회를 오래토록 유지하였고 이렇게 철저한 자연주의적 관점이 직선과 수의 합리성(合理性)을 거부하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고 하겠다.수학은 출발점부터가 인간과 일상적인 자연현상에 관계하여 발전한 학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수학과 자연을 다소 동떨어진 관계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서양에서 눈부시게 발전한 수학이 개별적이고, 좀 더 구체적인 현상을 탐구하려는 사상에서 비롯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은 독자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의 논리학과도 관련이 있고 문화, 예술에서도 두루 수학의 색채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이상(李箱))이란 작가는 그의 저서에서 수학적 사고에 기초한 합리주의를 일체 부정하는 사고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포우(Edgar Allen Poe)라는 작가 역시 수학과 신비성을 연결하여 추리소설의 완벽성을 구현하였다. 이렇듯 수학은 다른 학문과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모든 학문이 수학과 동일한 출발점을 갖는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수학은 ‘인간’자체를 알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학문이었다.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사고는 수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이 ‘수학’이란 학문이 갖는 가장 큰 중요성이다. 인간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의구심을 알아가는 과정이 수학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수학을 ‘배우는’ 것이다.그러나 요즘 우리는 수학을 학문으로서만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수학이 ‘인간’을 파악하려는 기본정신에서 출발하였음에도 오늘날 우리는 수학이란 학문에서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학문’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상황에 봉착하였다. 모든 학문이 인간의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들이며 인간에게 이롭고자 함에도 그 중요성을 묻어두고 목적이 아닌 수단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단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수학을 왜 배우는지에 대한 물음을 잊고 있다. 앞으로의 수학은 이 근본정신을 되살리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7.10.25| 3페이지| 1,500원| 조회(242)
    미리보기
  •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의 예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예(禮)’에 대해 아주 민감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 말은 중국에서 흘러나온 말로 물론 우리나라에 대한 하대의 의미도 담겨 있다. 즉 중국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동반자적 국가가 아닌 그저 동쪽 오랑캐의 하나라는 의미도 내포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과감히 우리나라 예절의 표현이 중국의 성리학 수용?발전을 거쳐 ‘중흥기’에 이르렀을 때 최고조에 올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리나라의 성리학 수용은 수용 이전부터 지켜왔던 예절과 맞물려 중국과는 또 다른 ‘독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우리나라의 전통예절은 크게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로 표현이 가능하다. 조선 전기까지는 제가(諸家)의 설(說)이 구구하여 일정한 기준이 없었으나 영조(英祖) 때의 학자 이재(李縡)가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근거를 두고 여러 학설을 참작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예법을 만들어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지었고 이것이 옛날 사례의 표준이었다.관례(冠禮)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예법으로 전통사회의 성년식 같은 예법이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남, 녀를 불문하고 치르던 예법이었는데 차이가 있다면 남자에게는 ‘호’를 붙이지만 여자에게는 특별한 ‘호’를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성균관에서는 전통예법에 맞는 성년식을 해마다 거행하고 있으며 요즘은 보기 드문 차별화된 예법으로서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혼례(婚禮)는 말 뜻 그대로 혼인하는 예법이다. 옛날에는 부모들끼리 선을 보고 혼인 당사자들끼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결혼하였지만 요즘 세상에는 그런 예를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혼인 당사자 간의 의사가 중요해졌다. 물론 혼인 절차 역시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는 서양식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옛날에 비해서 훨씬 간소화되었다.상례(喪禮)는 상중(喪中), 즉 집안의 누군가의 죽음으로 행해지는 예법이다. 옛날에야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요즘은 장례조차도 3일로 간단하게 치루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화장을 권장하는 추세라 예전처럼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제례(祭禮)는 제사를 지내는 예법이다. 옛 사람들은 제사 때 상차림규칙을 아주 중요시 여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곤 하였다.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색과일은 서쪽)라든지 어동육서(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조율이시(제사에 쓰는 대추, 밤, 배, 감), 두동미서(생선 대가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등등의 상차림 규칙이 꽤 많다. 우리나라의 제사의식은 상에 위패나 지방도 써서 세워 놓고, 초상화도 걸고 하는 유교사상을 따른 것이다. 유교국가 중국에서 하던 제사의식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어서 지금까지도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흥미로운 것은 요즘 중국에서 우리나라 ‘성균관’으로 제례를 배우러 유학 오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전파는 분명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입지가 단단히 굳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실히 우리나라에서 예법 자체를 대단히 중요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옛날부터 내려오던 예법의 변화원인은 첫째 국가 통치 이념의 변화이다. 예전에는 주로 왕권 중심의 계층사상이 뚜렷했고, 이러한 차이는 지배층의 기득권 보장과 민(民)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그러나 천부인권이 확립되고, 평등사상이 널리 퍼짐에 따라 이러한 인식의 차이 역시 줄어들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기조로 삼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통치 이념의 변화는 국민의 여권 신장에도 기여했고 당연히 예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자리매김했다.둘째 남, 녀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이다. 옛날, 성리학이 수용되고 난 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곳은 남, 녀의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차별적이었다는 부분일 것이다. 고려 때만해도 이혼이나 호주제 같은 부분들에서 분명히 여성의 권리가 있었다. 여성의 지위는 남자와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권리는 인정되었는데, 조선 조 유교이념 하에서 여자의 지위는 사실 상 남성의 ‘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다. 유독 조선에서 ‘현모양처’와 같은 여성상의 구현이나 ‘열녀’의 칭송, ‘칠거지악’과 같은 덕목은 여성의 지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배를 거친 후 다양한 외래문물의 수용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확산된 ‘평등’이념은 그동안 억압당했던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셋째 국가이념이나 장벽을 뛰어 넘어 전지구적인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은 더 이상 먼 나라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어마어마한 커뮤니케이션의 장(場)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분명히 서양의 manner와 우리의 ‘예절’은 그 방식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예법’도 전 인류가 변화하여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예의 방식은 서로 간 시행착오를 거쳐서 점차 이해하는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마지막으로 정보와 과학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에 따라 빠르게 달라지는 국제정세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분별한 정보의 수용과 도덕적 해이로 인해 국가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미 경제적 가치가 인권이나 존엄성까지 짓밟은 지 오래되었고, 이로 인해 일어난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시대의 노예가 된 채 현대인의 삶을 매어버리고 있다. 심지어 자국기업의 핵심정보를 빼내 외국기업에 팔아넘기는 등 국가 정체성마저도 쥐고 흔드는 심각한 예의와 도덕의 타락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전통 예절인 관혼상제와 전통사회와 오늘날의 예절이 달라진 원인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예(禮)”는 본시 마음의 발현이다. ‘도(道)’를 새기는 정갈한 마음가짐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러 나오는 것이 예인데 요즘은 이러한‘마음’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전사회보다 오늘날의 사회가 물질적으로 좀 더 풍요로워졌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변화하는 시대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정신적 피폐함은 마음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사실 상 ‘예’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마음과 예절을 합치시킬 수 있는 움직임만이 앞으로의 예절에도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최근 들어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상에서 무명으로 악플을 다는 등 악플러들의 옳지 못한 행동에 네티즌들이 정면으로 나서고 있다. 이러한 악플러들을 네티즌이 나서서 처벌할 것을 주장한 점도 흥미롭지만 인터넷 상에서도 예외 없이 예절을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의 확산은 예절의 올바른 변화를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인터넷상의 예절을 중시하는 신조어인 네티켓(netiquette))이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 사회가 개방될수록, 교류의 장이 확대될수록 더욱 더 기본으로서 지켜야 할 예절로써 인간덕목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예절방식은 인간의 보편성에 입각하여 발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인간에게 사회라는 공동체가 있지 않았다면 예절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만 사는 세상에 예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예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켜야 할 상호존중이며 이것은 사회 안에서 구현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예절은 분명히 행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는 일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불편해하거나 타당한 보편적인 이념과 대립될 때 예로써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의 의미도 여전히 퇴색될 수밖에 없다.
    생활/환경| 2007.10.25| 4페이지| 1,500원| 조회(695)
    미리보기
  • 대국굴기 평가B괜찮아요
    대국굴기-역사 속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에 관한유명한 역사학자 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라고 말하였다.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고 인간역사의 끊임없는 변화는 저자의 가치와 관념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Carr 역사관의 핵심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Carr의 저서 후반부에는 ‘내가 지난번 강연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하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해석, 중요한 것과 적절한 것에 대한 선택은 새로운 목표를 서서히 출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으로 볼 때 역사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말미암아 미래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저서 ‘대국굴기’ 또한 과거 혹은 현재의 강대국들이 어떻게 하여 발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교훈으로 삼아야할 올바른 방향과 잘못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Carr의 사관과 매우 비슷한 역사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책은 오늘날 현대인이 역사를 해석하고 공부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 지향적인 방향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강대국들을 예로 들어 그 시사점을 고찰하고자 한다.대국굴기의 첫 번째 무대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이다. 이 두 제국들이 세계무대를 향해 뻗어나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사실 두 나라는 철저한 “식민지 정책”에 의해 세계를 점령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 발전은 반짝하는 순간에는 분명 뚜렷한 발전을 나타냈을지 몰라도 그 체제가 갖고 있는 내부적 약점에 의해서 결국 붕괴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그 시대의 사상을 뛰어 넘어 올바른 판단과 직관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냈으며 우리에게 시대를 앞서 나가는 사고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이 위대한 발견은 두 나라가 소국에서 세계로 향하려는 이념을 갖고서 국가정책적인 목적으로의 세계화를 시작하였고 온 국민의 지지를 얻어 온 국민의 염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실이었다. 온 국민들의 뜻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발전의 시발점이라는 것은 분명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일어난 참혹한 인디언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앞선 생각으로 발전을 향해 발을 서서히 내딛긴 했지만 여전히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다른 이민족들을 말살했던 정책은 발전에 있어선 커다란 오점을 남겼고, 곧 붕괴를 가져 왔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민족이 다른 이민족을 천시하고 미개하다고 생각하여 지배받아야 ‘마땅한’ 민족이라고 여겼다는 점은 오늘날 인간 사회의 다양성에 비추어볼 때 당연히 규탄 받아야 할 일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두번째 무대는 풍차와 튤립의 나라 ‘네덜란드’이다. 나는 여기서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열악한 자연조건에서도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부족한 지하자원에도 그야말로 피땀 어린 의지로 만들어낸 성과를 보여준 훌륭한 민족정신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춰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온갖 불리한 조건을 훌륭한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모든 걸 이뤄내기란 역부족이다. 어느 배가 목적을 설정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결국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가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네덜란드인들은 정확한 상황판단과 과감한 도전 정신으로 적절한 목표를 설정하여 그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진취력, 용기, 지혜를 발휘했고 특히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고 활용하여 철저한 계획 하에 경제이윤을 극대화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해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그러나 당시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주식,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은행, 신용대출, 어음, 상품거래소 등의 각종 경제 수단과 경제 시스템, 경제 공간은 모두 네덜란드인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이러한 경제 방식은 현대 시장 체제와 시장경제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으로 현대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7세기 네덜란드가 강자로 부상하였다는 사실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본받을만하다. 우선 네덜란드인은 정확히 현실을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을 가졌다. 17세기의 발전은 농업, 어업, 수공업과 관련이 있었고 네덜란드인들은 현실을 정확히 측정하였다. 오늘날 현대와 구별되었지만 그 당시 중요한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1차 산업을 근간으로 하여 동인도회사 같은 주식회사 성격의 무역이 발전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롤 모델로 손색이 없는 강대국으로 자연스레 급부상하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인이 목표로 삼은 것은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와 같은 식민사관에서 출발한 정신이 아니라 내부적인 결속에서 출발한 사상이 세계와 무역이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릇된 사상으로 출발된 방향 제시는 결국 붕괴의 위험을 내포한다고 역설했던 것처럼 네덜란드의 바른 사상은 대국으로 급부상한 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17세기의 황금기를 흘려보냈으나 오늘날 다시 세계 운송 대국, 무역 대국, 투자 대국, 수리(水利)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은 17세기 불굴의 정신을 발휘한 경제 대국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세번째는 산업혁명의 시발지인 ‘영국’이다. 해가지지 않는 대국으로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19세기 위대한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이러한 반쪽짜리 발전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영국편에 ‘최혜국 조약’에 관한 부분에서 미국의 태도였다.......영국은 프랑스의 주류 수입관세를 낮추고, 공산품 수입관세를 철폐했다. 이후 영국은 벨기에, 이탈리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터키와도 상호 관세 감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모두 최혜국 대우를 기본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이 유일하게 관세 감면 조약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 터키나 중국처럼 경쟁력이 약한 나라와 최혜국 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사실 상 약탈을 의미했다.)......)이 점이 흥미로웠던 까닭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일 때, 가장 먼저 최혜국 조약을 체결했던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분명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최혜국 조약이 약탈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영국과의 조약을 거부했다. 그런데 미국이 당시 조선이라는 약소국과는 최혜국 조약을 맺었던 사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강대국을 그대로 답습한 ‘모순’을 여실히 드러내었다는 점이다.그 다음무대는 시민혁명으로도 잘 알려진 나라 ‘프랑스’이다. 프랑스의 역사는 사실 그리 잘 알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저 시민혁명으로 유산자본계급(부르주아)이 귀족과 왕정의 봉건체제를 현대적으로 바꾸었다는 역사적 의의만을 알고 있었는데 시민혁명의 이면에는 부패한 왕정뿐 아니라 독자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귀족들의 강한 잔재가 한 몫 했다는 점에서 한층 의미가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 역시 강대국임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식민정책을 펴기도 했으나 지난날의 과오를 바로 잡고 체제와 사상의 변화를 단행하였던 나라 프랑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여전히 잔존하는 제국주의적 발상에 대항해 지난 2세기에 걸쳐 전세계 정치 민주화의 선구자 역할을 하여 크나큰 영향력을 세계로 발산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50년대 ‘드골’이라는 위대한 지도자의 행보는 전제 정치의 구현에서 민주적 사회로의 현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드골의 사상변화 역시 현실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미래를 예측하였던 데서 기인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통 농업 사회에서 현대 공업 사회로 탈바꿈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고 실제로 현대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독립을 권고히 하고 국제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 반패권주의적 행동은 오늘날에도 깨끗하고 안정된 정치와 활력 넘치는 경제 속에서 엿볼 수 있다.우리나라가 일본의 36년 지배를 벗어났을 때, 가장 단적으로 감행해야 할 부분은 친일파의 제거, 숙청이었다고 과감히 얘기할 수 있다. 지난날의 잘못을 그냥 덮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우리나라의 행보는 세계에서 강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일제의 총, 칼에 대항한 선조들보다 친일적 행보가 두드러진 자들의 안위를 계승시켜 기득권을 지켜줌으로써 발전적 사고의 흐름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국문학사에서 널리 알려진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와의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왜 일제 식민지 시절 친일행위를 하셨나요?” 라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서정주는 씁쓸한 웃음을 띄며 “난 그 때, 일본의 지배가 200년은 갈 줄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위의 대화에서 서정주는 이미 우리나라의 독립을 포기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 앞으로 200년 후에나 온다면 일제에 친일행위를 하면서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고 편히 살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단 이러한 예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정치가 처음부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보다 강대국들의 발전에만 초점을 두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마구잡이식의 눈에 띄는 발전만을 추구하였다는 오점을 벗어나기는 어렵게 되었다.
    독후감/창작| 2007.10.25| 5페이지| 1,500원| 조회(464)
    미리보기
  • 신라중대사회연구 평가A+최고예요
    新羅中代社會硏究-‘남북국시대’고찰Ⅰ. 서론유명한 역사학자 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라고 말하였다.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고 인간역사의 끊임없는 변화는 저자의 가치와 관념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Carr 역사관의 핵심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Carr의 저서 후반부에는 ‘내가 지난번 강연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하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해석, 중요한 것과 적절한 것에 대한 선택은 새로운 목표를 서서히 출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으로 볼 때 역사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말미암아 미래를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한국사 개설 시간에 들었던 역사관에 관한 강의는 하나의 과거의 사실도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왜 중요한가?’의 물음은 곧 잘못된 역사 해석의 오류가 자칫 다가오는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인과적 사고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잘못된 역사해석을 바로잡는 일은 건설적인 미래를 위한 초석으로서의 발걸음이 될 것이다.「신라중대사회연구」의 제고는 분명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신라중대의 역사는 총체적 관점에서 해석되기 보다는 몇 가지 사실만을 바탕으로 한 왜곡된 나열에 지나지 않았기 때을 바탕으로 나는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7C, 한반도와 만주에 걸친 역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의 재해석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몇 가지 우리의 잘못된 역사 논리에 대해 논의해보기로 한다.Ⅱ. 본론역사인식의 논리로서 ‘통일신라론’은 말의 함의에도 언급되어 있듯 신라를 삼국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의 주체는 신라였으며 고구려와 백제는 객체로서 신라 중심의 서술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의 통일의 요인으로는 원대한 통일의지 및 탁월한 외교능력과 당 세력의 축출 등을 언급한 반면, 도덕적 성격이 강한 백제의 부패 및 무능과 고구려의 내분은 멸망의 원인으로 거론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 이용과 영역 축소의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민족형성과 민족문화의 기반 조성이 역사적 의의로 강조되었다.)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역사는 위의 관점이 사실인 것처럼 인식하였으나 위의 관점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추측과 근시대적인 이념이 가진 한계를 분명 내포하고 있다. 그 한계점은 우리나라가 주체적으로 근대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식민지 시대를 겪음으로 인해 잘못된 역사 인식이 빚어낸 근본적인 오류에 있다.이러한 한계는 크게 세 가지 문제로 집약하여 볼 수 있다. 우선 근대사학에서 신라삼국통일론과 남북국성립론의 변주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국 근대사학에서 단재 申采浩 선생의 유가사학과 일제 식민사학의 비판을 통해 좀 더 본질적인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 다음으로는 중대사회의 성립 계기로서 7C 동아시아의 국제전에 대한 이해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의 사회가 성립하는 데는 대체로 대내적인 요인과 대외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이 두 가지 요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7C 역사의 실제적인 의미의 파악을 가능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중대의 정치체제로서 중앙집권과 지배윤리로서 유가윤리의 관계이다. 특정 사회 구성의 이해에서 정치체제와 통치이념의 상관성 파악은 역사 해석의 유용한 방법이다. 결국 전근대와 근, 시대구분 등 다중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으로 오늘날 현 시대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 시대가 과거의 사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역사학의 근본적 물음에 기인한다.신라삼국통일론의 역사인식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찍이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서부터 대두되었다. 이들은 신라가 주체적으로 한반도를 통일하였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백제를 흡수한 남쪽의 신라와 고구려를 이은 북쪽의 발해로 ‘남북국론’의 사상적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근대적인 구시대적 발상에 머문 조선 후기 체제에서 이러한 주장은 일부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으며 그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더 이상 이러한 주장은 펼 수 없게 되었다.구한 말, 일제의 식민지 아래 민족주의자들은 역사 인식을 바로잡음으로써 일제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민족말살책으로 뿌리까지 뽑아내려고 한 전략적 시도에 대항하기 위한 일종의 정신적 움직임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채호 선생은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깊숙하게 인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신라통일의 주역인 통일무열왕 ‘김춘추’를 외세와 손잡고 민족을 처단한 봉건적 사대주의의 시초로 보았으며 그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김유신’을 대세와 국면에 순응하는 음모가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말의 ‘연개소문’에 의한 내정통일로서의 정변과 전제정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남수서진책의 효과적 수행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파악하고 있다. 그 당시 연개소문의 행적에 관해 당 태종의 침입을 두 차례나 물리치고 심지어 중국대륙으로 진출을 모색하려는 주체적 영웅으로서 칭송하고 있다.물론 신채호의 역사인식 논리는 분명 일제의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예로 연개소문이나 을지문덕 같은 영웅론을 펼침으로써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방향을 이러한 영웅들의 행적에서 모색하고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통일론을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또한 발해의 건국을 중요한 역사로 인식한 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왕통을 ‘만주’의 문제이다. 지금껏 우리는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만으로 국한시켜 인식하였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은 만주가 일제의 압박을 벗어난 한민족의 집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라 예상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로서 역할을 기대하였다. 발해사에 대한 현실적 기초에서 출발한 적극적 인식이었던 셈이다.일본의 다이스케가 “조선사(朝鮮史)”라는 책을 통하여 조선시대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식민사관과 만선사관의 맹아를 움트게 하고 있었을 무렵, 한민족의 정신에 끊임없이 일침을 가했던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이 있었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은 오늘날 역사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바로 선 역사 인식의 주체적 사관을 지닌 분이었으며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지 않도록 노력한 사학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채호 선생의 신념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동아시아의 7C는 국내체제와 국제질서를 개편하려는 격동의 시기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통일을 수립하기 위해 서로 간 세력각축전을 벌였으며 수와 당이 통일제국으로 등장하여 중국중심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주변 국가의 국내정치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영역다툼으로서 전쟁의 발발은 필수적이었다. 물론 각국의 변화에 대응하는 자세는 서로 달랐겠지만 그 출발점은 항상 수와 당이 끊임없이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분열기를 거쳐 통일왕조를 수립한 ‘수’는 대내적으로 정통성의 확립과 대외적으로 중화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 이미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수의 원정은 번번이 고구려의 효과적인 방어에 가로막혀 실패하였고 외정으로 인한 내란이 일어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 가운데 다시 중국을 통일한 ‘당’은 수와 동일한 맥락에서 안정을 꾀하려고 하면서 수의 멸망을 교훈삼아 더욱 더 조심스럽게 고구려에 대한 침략 의지를 다졌다.그 당시 고구려는 무단정변을 통해 영류왕을 축출하고 보장왕을 즉위시킨 연개소문에 의해문’에 의하여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고구려에서 내분을 조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이것은 고구려 자체 내의 움직임 보다는 이미 두 번의 전쟁에서 참패한 당의 고구려 방어 와해 공작에 의한 움직임이 더 컸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20년 동안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한 보장왕과 당의 은밀한 협약이 있었음도 추측해볼 수 있는 태산 봉선의 참석과 같은 사료들이 고찰되고 있다. 결국 당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고구려의 멸망을 식민사학에 근거하여 연개소문의 아들들에 의한 ‘내분론’으로만 규정지었다. 이것은 명백히 연개소문의 독재정치로 인한 내분이 아니었음에도 고구려가 한민족으로서 갖는 의의를 축소시키기 위한 일제의 계책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최근 들어 신라의 중대 성립 배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국제적인 정세와 관련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동향은 일제시대의 식민사학적 잔재를 없애고 올바른 역사인식의 긍정적 움직임이다. 이와 같은 시도가 확산될 때 비로소 역사적 주체성을 확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신라가 필요에 의해 훌륭한 외교전술을 이용하여 당나라와 연합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흡수하였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면적 의미를 살펴보면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과 신라의 백제 멸망 기원의 역사적 모략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앞서 살펴보았듯이 당과 고구려의 적대적 관계는 당과 신라의 연합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꿔 말하면 신라가 필요에 의해 외교전술로 당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의 필요에 의해 이용을 당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요동공략이 실패하자 당은 고구려 아래에서 당의 세력을 지지해 줄 지원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때마침 신라의 김춘추가 백제 정벌의 뜻을 밝히자 백제를 거점으로 삼고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백제 정벌의 계획은 성공하였고 신라는 백제를 흡수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주체적인 통일이 아니란 것은 당이
    독후감/창작| 2007.10.25| 7페이지| 2,000원| 조회(824)
    미리보기
  •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의 역사
    병자호란-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의 역사경기 광주에 위치한 약 53만 평방미터의 남한산성은 이제 병자호란의 옛 기억을 씁쓸히 간직한 채 오늘날에도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1636년 겨울, 그 시리고 추웠던 47일간의 참담했던 날들은 그저 역사에 묻혀 대대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나 가늠해 볼 수밖에.『남한산성』에서 김훈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여 이제는 까마득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대어 이 작품을 완성했다.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고 말했던 저자는, 이렇게 다시 조국의 가장 치욕적인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얽혀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1636년 병자년겨울.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오고, 조선 조정은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을 담았다.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채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주전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무섭도록 끈질긴 질감을 표현해낸다. 단지 극의 서사가 그의 전작에 비해 시원스럽게 흐르지 않고 캐릭터들의 내면에 머물러 정체된 듯한 느낌은 남한산성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시 인조를 비롯한 조정신료들의 심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현실에 가정한 작가의 위트가 넘치는 대목이다.'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소설은 작가 특유의 냉혹하고 뜨거운 말로 치욕스런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또한 지도층의 치열한 논쟁과 민초들의 궁핍한 삶을, 연민을 배제한 객관적 시각으로 돌아보고 있다.무참하다는 글자를 찾아보면 ‘더 없이 참혹하다는 뜻과 매우 부끄럽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분명 다른 한자를 쓰는 것임에도 남한산성의 역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 마디라는 생각을 했다.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이 대목에서 우리는 조선의 우유부단함과 역사의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성 안에서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그들이 진정 나라를 위한다는 조정의 신료들이요, 결단의 순간에도 그저 고뇌하기만 하는 임금의 답답함은 조선이 그토록 천대하던 ‘오랑캐’의 왕에게도 한심한 몰골로 비춰질 수밖에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소설에서는 크게 묘사되지도 혹은 그리 잔혹하게도 묘사하진 않지만 조선왕조와 청의 행동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이 소설의 대미는 370년 전 조선의 왕이 ‘오랑캐’의 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절을 올리게 만든 역사적 치욕을 정교한 프레임으로 복원한 것이다.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는 그 곳, 삼전도. 그곳에서의 ‘화의’는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주전론자였던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을 인질로 보내기까지 했던 굴욕적이고 가혹했던 항복이었다. 울분이 터질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항복이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상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청’의 칸은 정말 대단한 전략가였다. 군사를 모으기만 했을 뿐, 남한산성 내부에서 큰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조선왕의 굴복을 받아 냈으니 고도로 치밀한 군사 작전과 전략전술을 구사한 비범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모름지기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독후감/창작| 2007.10.03| 4페이지| 1,500원| 조회(398)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3
3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2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6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8:32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