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담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게 그저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이다. 따라서 민담은 우리 조상들의 유순하면서도 외롭고따스한 인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맥박과 호흡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1. 가난뱅이 모자(母子)옛날 어느 마을에 낮잠만 자는 게으름뱅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게으름뱅이 아들에게 나가서 빌어서라도 먹으라고 했더니, 아들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씨니 때만 되면 들어와 먹고 자곤 했다. 하루는 꿈에 스님이 나타나 커다란 수탉 한 마리를 주면서, “너는 생전 빌어먹을 팔자니까 아거나 가지고 가서 한 푼 나와라, 해서 먹고 살아라”고 말하곤 사라졌다.꿈에서 깨고 보니 커다란 수탉이 있었다. 너무 좋아서 얼른 집으로 가지고 가서 꿈속에서 스님이 시킨 대로 하였거니 정말 돈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돈을 게워 내는 것이 재미있어 나중에는 한 푼이 아니라 세 푼 네 푼 나와라 하며 자꾸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닭은 목이 막혀 죽고 말았다. 그 모자는 다시 그 전처럼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2. 가재와 굼벵이옛날 가재와 굼벵이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가재는 수염을 자랑하고 굼벵이는 눈을 자랑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러워하였고 마침내 그 둘은 자신이 자랑하는 눈과 수염을 바꾸기로 하였다. 먼저 굼벵이가 자신을 눈을 주었다. 굼벵이의 눈을 단 가재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멋지게 보이자 수염을 주기 싫어졌다. 그래서 하는 말이 “ 눈도 없는 놈이 수염은 달아서 무엇해?” 하고 돌아섰다.마침 옆에서 이 광경을 보던 개미는 굼벵이가 가재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하도 우스워 배를 잡고 웃다가 그만 허리가 끊어질 듯 가늘게 되어 버렸다고 한다.3. 김후직의 묘경주 공설운동장에서 북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진 한 마을에 김후직이라는 사람의 묘가 있다. 이 김후직이라는 사람은 신라시대에 많은 공을 세우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 그지없는 충신이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이를 시기한 간신의 무리들이 왕에게 김후직을 모함하여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후에 요양을 가있던 김후직이 죽게 되었는데 이때 자손들에게 남긴 말이 “내 마음은 아직도 나라를 위한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왕이 간신의 꾐에 빠져 나를 공직에서 쫓아냈다. 그러니 왕이 그대로 있으면 간신들에 의해 곤란을 격게 될 것 이니 내각 죽고 나서 왕이 자주 출입하는 길목에 나를 묻어주면 멀리서나마 왕의 혼이라도 보호해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자손들은 뜻을 받들여 행하였는데 그 후부터 왕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면 말이 묘 가까이에서 섰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이 미안하다 던지 절을 하면 비로소 말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왕이 그의 충성된 뜻을 알고 후에 직접 김후직의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4. 당산나무와 삼대독자옛날에 경상북도 달서군 성서 살간동이라는 마을 주변에 당산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 옛날부터 한두 아름이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다. 이 동네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1년 내내 편안히 지내기를 기원하는 뜻의 제사를 지냈다. 그 어느 해 한 집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되어있었다. 그 집은 삼대를 계속 외아들로 내려온 손이 귀한 집이었는데 제사를 치르기 위해 음식을 장만 해 놓은 것을 어린아이가 밤 한 개를 부모 모르게 먹었다. 그러자 그날 밤 아이는 원인 모르게 죽었다. 그 아이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슬퍼하며 당산나무를 찍어 넘어뜨렸다. 그 후 동네 사람들 또한 귀한 아들을 아무 연고 없이 죽였으니 그런 당산에는 제사를 치를 필요가 없다며, 일부러 당산나무를 없애버렸다고 한다.5. 머리 깎은 효부옛날 어느 마을에 늙은 홀아비와 아들 며느리 모두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조석의 끼니를 대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아버지의 환갑날이 닥쳐왔다. 며느리는 자신의 머리를 팔아서 그 돈으로 쌀과 반찬을 사서 상을 마련하였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춤을 추었으나 정작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원님이 이유를 듣고 그 효성에 감격해 쌀과 옷감을 상으로 후하게 주어 위로했다고 한다.6. 메뚜기와 개미와 물새옛날에 메뚜기와 개미와 물새가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개미는 밥을 메뚜기와 물새는 찬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개미는 지나가는 아낙네의 발을 물어 넘어트리게 해 밥풀을 주었고 메뚜기와 물새는 개울 옆에 풀에 올라 물고기를 잡아챘다. 서로 자신이 잡았다고 주장하다가 메뚜기와 물새는 서로 싸움을 하게 되었다. 다투는 꼴이 얼마나 웃겼던지 개미의 허리는 잘록해지고 물새는 메뚜기의 이마를 호되게 때려 뒤로 젖혀졌으며, 물새의 부리를 잡아당겨 물새의 부리가 길어졌다고 한다.7. 바보 며느리와 메뚜기옛날에 바보 같은 며느리ㅏ 있었다. 하루는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어디로 낳느냐고 물으니까 가랑이 사이로 낳는다고 했다. 어느 날은 며느리는 밭에 갔다 오는 길에 오줌이 마려워 풀밭에서 소변을 보았다. 그런데 풀밭에 있던 메뚜기가 놀라서 펄쩍 날아갔다. 이 모습을 본 며느리는 메뚜기가 자기 아들인 줄 알고, “ 아가아가, 네 부친 상면하고 가거라.” 쫓아가 잡아보니, 그 메뚜기 아들은 머리는 증조부 대머리 닮고, 입은 쭉 재진 장터거리 고모 닮고, 앞정갱이는 종조부처럼 길더라나.
다양한 맛의 나라 터키Ⅰ. 터키요리 선정이유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제 3세계요리는 베트남, 태국, 인도 정도의 요리가 전부이다. 현재 베트남과 태국, 인도 음식점은 체인점을 통하여 전국으로 분포되어있다. 그러나 터키 요리는 수도권 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터키 요리는 프랑스, 중국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로 꼽힌다. 동서양의 접점이라는 지리상의 이점, 풍부한 식재료, "기억나는 맛이라면 요리사를 죽이겠다." 고 공헌한 황제가 있을 만큼 호사스러웠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궁정문화가 만나 터키요리라는 꽃을 피웠다. 이러한 세계 3대 요리에 꼽히는 터키음식은 우리의 주식인 쌀을 이용한 요리가 다양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 3세계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대부분이 이슬람의 종교를 갖고 있는 터키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현재 웰빙으로 고기를 적게 먹고자 하는 한국인의 요리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강점에 적용된다. 이 리포트를 통해서 생소하지만 우리의 입맛에 맞는 터키요리를 소개하고자 한다.Ⅱ. 터키요리의 배경터키요리는 내륙아시아의 유목음식문화, 이란 서부 서아시아의 농경음식문화, 비잔틴제국·오스만제국에서 발달한 궁정요리 등의 융합으로 생긴 독특한 요리로 지역에 따라 그 내용도 다르다.? 역사적 배경유목생활을 하였던 터키민족은 휴대가 편리하고 보존이 잘 되는 식품을 준비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치즈와 요구르트이다. 특히 요구르트는 순수한 터키어로 8세기에 이미 문헌에 실려 있다.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풍토에서는 식품을 말려서 장기보존하였는데 치즈는 다량의 암염을 넣어 햇빛에 말린 것이 많다. 파스툴마도 소금과 향신료로 고기를 싸서 건조시킨 포(脯)이다. 10세기 무렵 시르다리야 유역으로 옮아간 터키인은 인접한 이란계 농경민과 접촉하면서 터키요리는 농경적 성격이 더해졌다. 예를 들면 수프(쵸르바)·버터밥(필라프)·파이프(보레키)·다진고기경단(쿄프테) 등을 뜻하는 터키어는 지하는 아시아에 속해 있는 중부의 고원과 산맥에서는 유목이 이뤄졌으며 북부와 서부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흑해와도 접해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다. 또 흑해부근은 지중해성 기후로 차, 레몬, 오렌지 등이 생산되며 지중해성 기후의 소아시아서부와 남부 평야는 벼농사가 행해지는 등 산과 평야, 바다 어디서라도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종교적 배경터키는 종교적인 색채가 음식문화의 정체성을 살리는데 한몫 하였다. 현재 터키는 종교자유의 국가지만 인구의 약 99퍼센트는 이슬람교도이다.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불결하다고 해서 먹지 않기 때문에 터키에서 돼지고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육류 ‘할랄’이라는 의식을 거친 고기만 먹는 특색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할랄’이라는 것은 이슬람교의 목사가 기도문을 외우며 소나 양, 닭 등을 잡는 종교의식이다. 술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잘 먹지 않지만, 음주를 절대 금하는 여타의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음주를 어느 정도 허용해 술 문화가 발달해 있기도 하다.Ⅲ. 터키요리의 특성터키요리의 특징은 유럽요리와 아시아 요리의 만남에 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소박한 요리로부터 중동지방의 섬세하고 신선한 야채, 과일, 그리고 육류와 해산물로 만들어진 터키의 모든 요리에는 몇 세기에 걸쳐 축적되어 온 요리에 대한 터키인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다양한 음식문화일반적으로 인도 요리하면 '카레'를 먼저 떠올리고, 베트남 요리는 '쌀국수'로 대표되지만, 터키 음식은 특정 음식으로 대표할 수 없을 만큼 그 종류도 지극히 많고 사용되는 재료도 대단히 다채롭다. 밥류, 곡물요리, 야채요리, 육류요리, 국물요리, 수프류, 올리브유 요리, 반죽요리, 조청류, 요구르트류, 후식류 등 터키 음식은 종류도 형태도 참으로 다양하다. 이렇듯 음식 종류가 다양하다보니 각자의 입맛에 따라 입에 잘 맞는 음식과 잘 맞지 않는 음식이 나뉘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터키 음식이 세계 3대 요리에 뽑히는 것도 이렇게 다양한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해, 흑해, 지중해, 마르마라해 4 곳의 대양과 접해있기 때문에 생선이나 해산물 요리가 많이 발달하였다. 터키에서는 생선이 고기보다 훨씬 더 비싼 편인데 터키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생선은 함씨 라는 이름의 생선이다. 생김새는 우리 나라멸치와 비슷하고, 크기는 약간 더 큰데 워낙 터키국민들이 좋아해 이 함씨 라는 생선을 응용한 요리가 무려 40 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해산물을 이용한 커리요리 등의 다양한 음식이 많다.? 디저트 문화터키는15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는 영토 확장 기간 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해 화려한 음식문화를 꽃핀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요구르트와 올리브 오일을 요리에 사용하는 방법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고 알려진 나라이기도 하다. 그만큼 디저트 음식 문화가 발달한 나라이다.터키어로는 디저트를 '타틀르(tatli)'라고 한다. 디저트를 자주 찾지 않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터키인들은 디저트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터키인들은 식사를 마친 뒤 꼭 디저트를 먹는다. 즉 터키인들은 수프, 샐러드, 메인 디쉬를 먹은 다음 차와 함께 디저트를 먹기 때문에 터키에는 디저트 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이러한 터키의 디저트 문화는 예전 오스만투르크 시절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시절부터 터키인들은 아기가 태어난 집을 방문할 때, 먼 곳을 찾아갈 때, 아이가 할례를 받을 때 등등 특별한 날에 특별한 디저트를 만들어서 선물하고 대접하고 나눠먹었다.터키의 대표적인 디저트 몇가지를 살며보면, 우선 터키의 디저트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가는 디저트로 '헬바(helva)'라는 게 있다. 헬바는 밀가루, 기름, 설탕, 우유로 만든 디저트이다. 장례식 때 문상객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터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하마터면 헬바 먹을 뻔했네.’하고 말한다.다음으로는 '아슈레(asure)' 역시 터키의 대표적인 디저트이다. 아슈레는 이집트 콩, 흰색 강남콩, 밀, 설탕, 말린 살구, 파스타치오 등의 견과류, 설탕 시럽 등을 얹어 만드는 아주 달콤한 과자이다. 라마단 명절, 희생절 등의 명절 때는 반드시 바클라바를 준비한다. 또한 생일 잔치, 집들이 잔치에 초대되어 갈 때도 손님들은 바클라바를 가지고 가며 가정에 따라서는 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 아들 손에 바클라바 보따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바클라바를 만들기 위해서는 패스트리 반죽을 준비하는 게 큰 일인데, 오늘날에는 가게에서 손쉽게 반죽을 구입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온 동네 여자들이 다 함께 모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한국 주부들이 김장철이 되면 함께 모여 김장 준비를 거드는 것처럼 말이다.터키에는 우유를 넣어 만든 디저트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무할레비(muhallebi), 수틀라치(sutlac), 카잔디비(kazandibi), 타욱괴우수(tavukgogsu), 케스큘(keskul), 귤라치트르(gullactir) 등은 모두 우유가 들어간 디저트들이다. 터키어로 ‘귤’은 장미를 뜻하는데 ‘귤’라치트르는 귤이 들어간 디저트가 아니라 장미꽃물(rose water)이 들어간 디저트 이다. 홍차는 흑해연안에서 자생하는 고유의 찻잎으로 만드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작은 잔으로 하루에 20여 잔씩 마시기도 한다고 한다. 손님에게 꼭 차를 내는데 이것을 마시지 않으면 인사를 받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니까 터키에 가면 꼭 챙겨 마시도록 해야한다. 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피는 덜 마시는 편이지만 대신 마실 때는 아주 진하게 마셔서 한잔만 마셔도 보통 사람은 잠을 못 이룰 정도다.Ⅳ. 터키요리의 종류? 현대의 터키요리전채(前菜)는 메제라 하며 흰 치즈, 베인 사라타스(양의 머리골 샐러드), <무르> 조개로 만든 순대, 절인 올리브, 얇게 썬 파스툴마, 치즈와 다진고기를 넣은 밀전병모양의 튀김(보레키) 등 수십 종류가 큰 접시에 나온다. 주식은 바게트모양의 프랑스빵으로, 시골에서는 집에서 유프카라는 얇은 무발효빵을 구워 먹는다. 아다나지방의 케바브(구운 고기)에는 이 유프카를 반드시 곁들인다. 수프인 탈하나다. 남부에서는 치 쿄프테(날고기 경단)라고 하여 신선한 양고기·쇠고기를 잘 다져 향신료와 드레싱을 얹어 먹는데 이것이 이른바 타르타르스테이크이며, 햄버그스테이크는 여기서 고안되었다고 한다. 타스 케바브는 토마토로 맛을 낸 양고기와 가지를 푹 끓인 것으로 가장 많이 먹는 요리다. 쌀은 필라프로 해서 즐겨 먹는다. 야채·콩류 요리는 양고기와 함께 오랫동안 푹 끓여 살챠로 맛을 낸다. 피망과 토마토 속에 쌀·다진고기 등으로 만든 소를 채운 것은 돌마(순대식요리), 포도·양배추잎으로 소를 싼 것은 살마(쌈요리)라고 한다. 오늘날 세계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 장수의 근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요구르트 등에서 터키요리가 세계의 음식문화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케밥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거리에서부터 멋진 식당에 이르기까지 터키는 먹거리로 가득하다. 터키음식은 향신료로부터 시작된다. 이집션 바자르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종류의 향신료들은 고기의 비린내를 없애주고 맛을 내는 중요한 요소다. 이 향신료를 바탕으로 터키의 유명한 요리인 케밥이 만들어진다. 케밥의 뜻은 ‘꼬챙이에 끼워 불에 구운 고기’라고 한다. 처음에 유목민이 간편하고 손쉽게 불에 구어 먹던 요리인 케밥이 시대를 넘어서 다양한 종류로 발전되었다. 각 지방마다 다른 종류의 케밥들이 있다. 양고기 외에도 닭고기나 생선을 넣는 등 케밥에 들어가는 내용물과 소스에 따라 종류가 100가지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되뇌르 케밥 (doner kebap)되뇌르 케밥은 길거리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다. 양고기 또는 소고기를 불에 구어 가늘게 썬 것으로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회전구이 고기이다. 주로 양고기, 닭고기 와 야채와 같이 터키빵에 넣어서 먹는다. 터키의 길 곳곳에서 전기 화덕 옆을 빙빙 돌며 익어가고 있는 이 케밥은 터키식 햄버거 할 수 있다. 겉이 익을 때마다 가늘고 긴 칼로 위에서 아래로 베어 내어 접시에 내어놓고, 양상추와 감자 튀김, 소금과 기름에 볶은 밥과 함께 즐기도록 한다. 얇게 구워낸
요령식 동검문화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 유물에는 무기가 많으며, 그 가운데 동검이 가장 많다. 그러므로 우리의 청동기문화를 동검문화로 일컬을 수 있다.중국의 요령성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요령식 동검문화는 지역별로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여 크게는 요서지방의 하가점상층문화, 요동지방의 요동 요령식동검문화, 길림성 길림 ?장춘지역의 서단산문화, 한국 요령식동검문화의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요령식 동검’이다.요령식 동검은 그 형태적 특징에 의해 ‘비파형동검’ 또는 ‘곡인 청동단검’으로 , 지역적 분포에 의해‘요령식동검’, ‘만주식동검’으로도 불리 운다. 이 동검의 특징은 날이 있는 부분이 S자형으로 휘어져 있고, 칼몸과 손잡이 그리고 손잡이 위에 달린 장식이 각기 따로 제작되어 결합하여 상용하게끔 되어 있는 조립식 동검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칼몸과 손잡이를 한꺼번에 부어 만든 중국 중원지역의 중국식동검 및 내몽고, 오르도스 지역의 북방계 오르도스식 동검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요령식동검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요령 지역에서 유입되면서 우리나라는 진정한 의미의 청동기시대로 들어서게 된다.관련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요동 반도 쪽에서 서해안을 통해 서북? 중서부 지역으로 먼저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며 일부는 육로를 통해 함경도 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라 추정된다.우리나라의 요령식동검문화는 요령 지방의 요령식동검문화에 비하여 비교적 단순한 내용을 보인다. 청동무기로는 동검 ? 투겁창 ? 동척이 있고, 청동 공구로는 손칼 도끼 끌이 있을 뿐 요령지방에서 보이는 마구류 ? 의기류 ? 장식류등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다량의 청동기가 함께 발견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동검만이 돌칼 ? 돌살촉 ? 돌도끼등이 지역의 무문토기 문화에서 보이는 석기들과 함께 출토되고 있다.유적과 유물제사 또는 퇴사 유적으로 여겨지는 돌무지 유적은 너덜겅(산비탈의 흘러내린 돌무지) 속에 청동 유물을 넣어 두거나 몰래 감추어 둔 것 같은 유적이다. 경북 청도 예전동 유적과 황해도 개풍 개평리 유적이 이에 해당하며, 경북 상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요령식동검 3점도 이러한 너덜겅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무기류1)요령식동검중국의 동북 지방 특히 현재의 요령성 관내에 집중분포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함경북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현재까지 약 60여 점이 발견되었다. 이 동검은 칼몸과 손잡이 그리고 손잡이 위에 붙이는 칼자루끝장식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를 함께 조립해서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이 동검의 전형적인 형태는 칼몸 양 날의 위쪽이 튀어나와 돌기를 형성하고 그 아래쪽은 좁아들다가 다시 둥글고 넓게 퍼져 전체적으로 형성하고 그 아래쪽은 좁아들다가 다시 둥글고 넓게 퍼져 전체적으로 비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등대라고 하는 칼몸의 중앙에 있는 등골뼈 같은 곳에는 튀어나온 부분이 있으며, 손잡이와 결합되는 슴베는 긴 편이고 옆면에 얕은 홈을 낸 것도 있다.이 가운에 슴베에 홈이 패인 형식은 요령 지방에서 보이지 않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중남 이남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특수 형식이다.2) 요령식 투겁창요령식동검에 비하여 발견된 수량이 적다. 몸체의 형태는 요령식동검과 일치하나 동검과는 달리 슴베 대신에 청자루를 꽂을 수 있도록 긴 투겁이 달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거푸집을 포함해 모두 14점 정도가 발견되었다. 주로 남방식 고인돌에서 출토되었다.3)동촉동검?투겁창에 비해 발견 예가 적다. 피홈이 나 있고 양 날개의 끝이 역자식을 이룬 형식의 동촉은 황해도 사리원시 상매리 돌널무덤에서 발견되었다.이 시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식동촉이 몇 점있는데 , 경주에서 발견된 뿌리나래살촉 중에는 중국 섬서성 장가파의 서주시대 집자리에사 출토된 동촉과 똑같은 형식의 것도 있다.4)중국식 동검손잡이에 마디 두 개가 나 있는 소위 유절병식기타1)단추동포라고 부르는 단추 모양의 장식품이다. 뒷면에 작은 고리가 부착되어 있어 가죽이나 천에 꿰매어 달 수 있다. 중국 심양의 정가와자 유적 등 요령 지방 유적에서 출토된 활집이나 장화 등에 이러한 단추가 부착되어 있다.2)종방울청동기시대의 종방울 자료로는 나진 초도 유적에서 출토된 것 1점과 영흥읍 유적에서 출토된 거푸집이 있다. 두 점 모두 같은 형식이며 전체적으로 절두원추형을 띤다. 아래쪽과 중앙 상부에 횡으로 M자 또는 톱날무늬의 문양띠를 돌린 것이다. 영흥읍 유적에서는 요령식투겁창의 거푸집이 함께 발견되어 이들 방울이 요령식동검문화기에 속하는 유물임을 알 수 있다.말종방울: 종 모양으로 생기고 위에 꼭지가 달린, 말에 다는 방울한국식동검문화와 일본의 교류한국식동검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일본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한국식동검 ? 투겁창 ? 꺽창 ? 거울 ? 거울 ? 종방울 등의 유물을 보아 잘 알 수 있다.일본의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세 가지 있는데 이것은 칼 ? 거울 ? 곱은옥이다.한국식동검문화에서 보이는 중요 일괄 유물이 일본 건국 신화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은 단순히 청동기 문화의 전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배 계급의 일본열도 진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강립신화에서 말하는 거울은 해의 신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태양무늬가 새겨진 고운무늬거울을 뜻한다고도 할 수있다. 중국에서 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기본의 한국식 동검문화는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청동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잔무늬거울은 한국식동검문화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청동기문화를 상징한다. 원형의 거울 뒷면 중앙에 두 개 또는 세 개의 고리가 달려 있고, 나머지 공간에 정교한 집선문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잔무늬거울은 단순히 거울 본래의 기능을 넘어 신성한 권위를 상징하였다. 특히, 거울과 함께 출토되는 청동방울도 제사와 같은 의식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이 유물들이 함께 출토된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최고 지배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1971년이다. 오늘날의 공주 송산리에는 백제시대의 왕릉들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 5호와 6호분이 장마철이면 침수되어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던 작업의 과정에서 우연히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은 처녀분으로 발견되어 미지의 백제사에 많은 연구의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 발굴조사는 모두 4차에 걸쳐서 이루어졌다.왕릉의 봉분은 오랜 시일동안의 변화로서 정연한 원형(原形)의 형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원형으로 판단하고 있다. 둘레돌(護石)의 통과선과 무덤방(墓室) 중심과의 거리, 봉토를 형성한 석회혼합토의 윤곽선과 무덤방과의 거리 등을 고려할 때 봉분의 직경은 20m 내외가 된다. 그리고 봉분의 높이는 널방(玄室)의 바닥에서 봉분의 최고치까지가 7.7m에 달하며, 봉분 주위의 기슭에서부터의 높이는 높은 동남쪽에서는 6.2m이나 낮은 동남쪽에서는 2m에 불과하다. 그리고 봉분의 동남쪽에서는 봉토의 유실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둘레돌열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형태가 불규칙한 잡석으로 4-5층의 높이로 쌓아서 그의 높이가 0.6- 0.7m 가량 되게 만든 것으로 빈약하게 만들었고 봉분의 극히 일부분을 돌렸다. 무덤방(墓室)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장방형(長方形)이며, 아치형의 천장을 하고 전면의 중앙에 널길(羨道)이 부설되어 있는 벽돌로 쌓은 외방식무덤(單室墳)이다. 내부의 규모는 남북이 4.2m, 동서가 2.72m이다. 무령왕릉의 바닥은 암반을 평탄하게 깍은 후 상면에 벽돌을 2겹으로 반듯하게 깔아서 완성하였는데 널방의 남측 1.05m를 제외한 나머지의 전부를 한단 높게 쌓아 널받침(棺臺)을 만들었다. 무덤방의 벽체는 벽돌로서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의 방법을 되풀이하여 4평1수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낙랑의 벽돌무덤(塼築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3평1수식과는 차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백제의 독특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무덤방의 벽면에는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모두 5개의 작은 등감(燈龕)을 설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래에는 가창이 시설되었다. 이들은 벽면에 대한 일종의 장식으로서 그중 등감은 서진과 육조시대의 특징적인 것이다. 널길은 무덤방의 남벽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길이, 너비, 높이가 2.9×1.04×1.45m이며, 천장은 완전한 아치형태를 하고 있다. 널길을 구축한 벽돌의 문양 역시 무덤방의 내부와 비슷한데 다만 천장 이하의 벽면에는 반절된 8판연화문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널길의 바닥은 벽돌을 삿자리문 모양으로 깔았는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무덤방의 바닥보다는 한층 높아져 널받침과 동일한 레벨을 이루고 있다. 또한 무덤방과의 경계가 되는 곳은 널받침의 전면처럼 벽돌을 세워서 배열하였다. 이 널길의 바닥 밑에는 중앙에 남북으로 벽돌로 쌓아 만든 배수구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널길의 밖으로까지 연장되어 있는데 배수구의 일단은 위에서 말한 무덤방과의 경계부분에 위치한다. 즉 이 경계지점의 중앙에 있는 5매의 벽돌은 이음새에 벽돌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두어 무덤방 내에 스며든 수분이 자연스럽게 이곳을 거쳐 배수구로 흘러 내려가게 하였다. 널길의 전면에는 풍화된 암반을 뚫어서 무덤길(墓道)을 설치하였다. 그 길이는 9.3m에 달하며, 널길에서 3.47m까지는 바닥이 평탄하나 그로부터 남쪽은 약간 경사져 있다. 무덤길의 폭은 바닥이 경사진 곳에서부터 차츰 좁아지기 시작하여 완전히 지상으로 나온 곳에서는 1.7m 밖에 안된다. 그리고 무덤길의 바닥 밑에는 중앙에 남북으로 길게 피트를 파고 그 내부에 벽돌로 만든 배수구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널길에서 시작된 배수구의 연장으로 무덤길의 길이 보다도 남쪽으로 9.4m나 더 연장되어 있다. 널길 밖에 시설된 무덤길만도 18.7m에 달한다. 구조는 하부에 2매의 벽돌을 포개서 가로놓이게 배열한 후 그의 상면에는 중앙에 약 5㎝의 간격을 두고 좌우의 양편에 길게 세로로 2매를 배열하였으며, 이음새는 토사가 새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시 그 위에 세로 1매의 벽돌을 놓았다.왕릉에서는 지석(誌石)과 왕, 왕비의 금제관식을 중심으로 다량의 백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왕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인 영락을 달았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이다. [구당서]에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으로 보면, 왕릉 출토의 관식은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생각된다.왕의 머리 부분에 있는 청동거울 위에서 발견되었다. 몸체부와 꽂이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을 닮았다. 몸체 윗부분에는 두개의 화문(花文)을 두드려 내고 아래쪽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새겼다. 뒤꽂이는 머리에 꽂아 머리모양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뒤꽃이 자체의 장식으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장식적인 용도를 함께 가진 장신구이다.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 고리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다. 큰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 장식이 달려있다. 끝 장식은 큰 심엽형 장식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 장식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투작구체 5개를 ‘0-0’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였다. 끝 장식은 담록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 모자를 씌운것으로 금 모자에 좌우대칭으로 2개의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과 일본 구마모토현의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왕의 허리부위에서 2벌의 금속제 허리띠장식이 출토되었다. 1벌은 띠고리와 띠끝장식, 과판, 드리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한 벌은 띠고리와 과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다.드리개를 갖춘 허리띠: 띠고리는 버섯모양을 띠며 띠연결부에는 7엽장식과 하트형 장식이 투조되어 있다. 과판은 표면이 오목하게 패인 타원형 금구로 크기에 따라 대, 소의 두 종류가 있는데 교대로 배열하였다. 띠 끝장식은 전체형태가 5각형에 가깝다.드리개는 금제 오각형판과 금제와 은제 타원형금구,금구 사각형판, 두꺼비무늬를 투조하였고 장방형 은판에는 백호,주작도를 끌로 새겼다. 귀면은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두꺼비무늬는 달의 상징이며,백호와 주작의 표현은 사신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드리개와 띠 끝장식이 없는 허리띠: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띠고리의 띠 연결부에 남아 있는 자색가죽으로 보아 전체를 가죽으로 만들고 그 위에 금속제 띠고리와 과판을 연결하였던 것 같다. 띠고리는 버섯모양이며 과판은 역 심엽형 장식에 물건을 매달 수 있는 둥근 고리를 붙였다. 역 심엽형 장식은 금판을 두드려 만들었는데, 네 개의 금 못을 끼워 혁대에 고정되게 하였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고고학 연구에서 연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러나 고고학의 주 연구대상인 과거 인류가 남긴 물질적인 자료, 특히 선사지대의 고고학의 주 연구대상인 과거 인류가 남긴 물질적인 자료, 특히 선사시대의 고고학 자료로부터 연대를 직접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 자료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석하여 연대를 알아내야 한다. 고고학 연대는 상재연대와 절대연대가 있다. 상대연대는 고고학 자료의 선후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절대연대는 서력기원으로 나태내는 것이다. 따라서 연대결정법도 상대결정법과 절대연대 결정법으로 나뉜다. 이 리포트에서는 절대연대결정법을 간단히 알아보고 절대연대결정법에 속하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절대연대 결정법은 고고학 자료의 절대연대를 제시하는 방법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지질편년법 또는 교차연대법 등이 사용되었고, 20세기 초 미국에서 나이테를 이용한 연륜법이 알려졌다. 절대연대결정법에 의해 얻어진 연대는 역사학의 연대와 달리 확률적인 연대일 뿐이지,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절대연대결정법은 자연과학적인 방법에 의한다는 뜻에서 절대연대측정법으로 불리는데 이는 4가지의 방법으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첫째, 방사성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 포타시움 ? 아르곤측정법, 피션트랙 측정법등이 있다. 둘째, 지질학적 연대를 고고학에 이용하는 지질편년법이 있다. 빙하점토층편년법과 화산회층에 의한 연대측정법이 대표적이다. 셋째, 동물상 ? 식물상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화분학, 연륜법 등이 있다. 넷째, 화학적 방법으로 아미노산측정법과 흑요석수화층측정법이 있다.4가지의 방법 중 구석기에 많이 사용되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은 절대연대측정법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196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월러드 프랭크 리비가 개발하였다. 리비가 착안한 원리는 간단하다. 생물이 죽으면 더 이상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 죽은 동물, 식물, 박테리아 안의 방사성탄소인 C14는 붕괴되어 그 양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C12또는C15는 방사성이 아니므로 유기체가 죽어도 그래로 남게 된다. 이것은 C14 대C12 ? C13의 비율은유기체가 죽은 뒤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하무로 일단 살아있었던 물질이라면 이 비율을 측정하여 생명체가 언제 죽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기본이론은 ?14N + n(중성자) → 14C + 1H? 우주선(cosmic ray)이 대기권에 돌입하면서 질소와 작용하여 14C를 생성시키고 생성된 14C는 지구 내의 다른 탄소 동위원소에 비교해서 1/1012 정도의 아주 작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원소는 대기권속에 들어오면 다른 동위원소와 같이 CO2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생물체는 호흡을 통해 계속적으로 14C를 내뱉고 받아들이므로 대기권 속의 14C 농도와 평행을 이룬다. 한편 대기권 중의 14C는 바다 속으로도 용해되어 들어가므로 해양의 생물체 역시 14C를 흡수하게 된다.그런데 일단 생물체가 죽으면 호흡을 중지하게 되어 그때부터 14C의 교환이 중단되고 내부에 축적된 14C는 붕괴하면서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즉 ?14C → 14+N + β-?β선을 방출하면서 14N로 되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잔존하는 14C의 농도를 측정한다면 그 물체의 죽은 연대를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물들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으므로 매우 유용한 방법이지만 1회 측정에 상당량의 탄소 시료가 필요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연대를 구하고자 하는 문화재 대부분이 매우 귀중한 것이라 측정을 위해 상당량의 탄소 시료를 떼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속기질량분석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불과 0.001그램의 탄소 시료도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곧 귀중한 문화재에서 떼어내어야 하는 양이 약1,000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이다.시료를 측정하는 방법은 지난 30년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다. 즉 최초의 측정방법은 고체탄소의 방사능을 측정하는 것이었으나, 기체시료측정법, 액체시료측정법 등이 개발되었고 측정가능 연대도 40000-50000년 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최근에는 측정오차를 줄이고 측정 가능한 연대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1977년에 처음 소개된 방법으로 지금까지 β선을 측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고도로 정밀한 질량분석기에 의해 원자를 직접 구분하는 방법이다. 시료를 취급하는 방법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서 가장 주의 깊게 취급해야 할 점이다. 오염된 시료로 측정된 C14년대는 오차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오차의 정도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염이 되는 주요원인은 자연발생적인 것과 시료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오염을 최대한 방지하는 바람직한 시료의 채집은 주거지에서 출토된 목탄이나 동물뼈, 패층의 패각, 무덤에서의 나무널이나 인골 등과 같이 유적과 직접 관련이 되어야 하고, 채집될 때 확실한 층위나 위치를 가진 것으로서 그 어떤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시료가 적합하다. 또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시에 필요한 시료의 종류나 양이 연구소나 측정장치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준비되어야하며, 시료가 채집될 시에는 가능한 한 노출을 피하고 불순물은 핀셋으로 모두 제거하고 바로 플라스틱 용기에 넣고 밀봉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불순물이 남아있을 경우 연대 측정하는데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