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9Brokeback Mountain- 정반합(正反合)사회화는 '사적인 존재가 공적인 존재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정제되지 않은 욕망이나 선호가 그가 속한 사회적 제도와 규범에 알맞게 조정되어가는 일이다. 모든 사회는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행위규범을 제시하며 개개인은 불가피하게 각각의 사회에 놓여진다. 사회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가치 기준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사회에 속해있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동일한 행위도 자연스러운 것 혹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다르게 평가받게 된다.에니스와 잭이 속한 사회는 가부장적 가치 규범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2세로서 남아를 선호하고, 경제적 양육은 가장인 남성의 역할이다. 또한 무력으로 상대를 억누르는 행위나, 욕설 등은 철저하게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된다. 잭과의 관계를 차치한다면, 에니스는 위의 열거된 특징들에 전형적으로 들어맞는 캐릭터이다. 그는 딸보다는 아들을 원했으며 (“I used a want a boy for a kid,"), 가장으로서의 책무 때문에 잭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늘 제압 또는 진압이었다.반면에 잭은 가부장적 가치 규범에서 상대적으로 한 발 짝 떨어져있는 모습들을 보인다. 그는 아이를 원하지 조차 않았고 (“I didn't want none a either kind,"), 부유한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경제적 속박에서 자유롭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화되지 않은 욕망 성취를 위해 에니스와의 도피를 꿈꾼다. 사회의 진보(合)라는 것을 기성 가치(正)에 대한 이의(反)가 축적되어 새로운 행위 규범이 자리 잡는 과정이라 본다면, 잭은 기존 가치에 반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캐릭터이다.에니스와 잭은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내면화했고, 이를 넘어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사회화 과정이 반드시 학교에서의 고등교육이나 활자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님을 의미한다.
journal 10Brokeback Mountain (Movie)- 어디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한 인간의 후회잭과 에니스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동성애 코드를 다소 희미하게 그려낸다. 대신에 동성애 작품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서의 후회 측면에 비중을 실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중심에는 에니스가 있고, 그의 후회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응집되어 드러나 있다. 해당 씬은 소설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결혼식에 와달라는 딸에게 (‘I was hoping you will be there.’)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거절하던 에니스는 잠시 후 생각을 바꿔 참석을 약속한다. ('My little girl getting married.') 딸은 곧 떠나고, 그는 딸이 실수로 두고 간 코트를 옷장에 넣다 잭의 옷을 발견하고 독백한다. (‘Jack, I swear.’).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가 짊어져야하는 사회적 책임의 굴레를 의미하고, 그 지렛대의 반대편에는 개인적 열망을 의미하는 잭이 있다. 즉, 에니스는 ‘해야 하는 일’ 과 ‘하고 싶은 일’ 이 분리된 삶을 살게 된다. 이 간극에서 그가 겪는 내적 갈등은 아내 알마와의 성관계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 알마와의 관계는 애정표현의 수단이 아닌 일종의 번식을 위한 작업이다. (‘If you want me no more kids, I will have to leave you alone.’) 잭과 했던 체위를 알마에게 시도하는 에니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양 극단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표류하는 듯하다.이렇듯 그가 둘 중 무엇 하나 제대로 잡거나 놓지 못했던 이유는 양 쪽 모두 사람과의 연(聯)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가정과 잭은 결단이나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둘 다 짊어져야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버거운 일이었고 누구에게도 충실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양 쪽 모두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 역사의 종교‘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 되니라.’ (성 코란 2:256)이슬람의 성서인 코란에서 발췌한 구절이다. 애초부터 신의 의지는 인간에 대한 ‘믿음 강제’ 에 있지 않았다. 다만, 어떤 길이 정답인지는 이미 정해져있으니 분별 있는 자는 옳은 방향을 따를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적 확신뿐이다.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흔히들 이슬람 교단을 과격 종교 전파 집단이라 여긴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의 중심에는 위 문장이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전 세계 인구의 약 20%가 믿는 유서 깊은 기성종교의 교리가 타종교 혹은 타민족에 폭력적일 리 만무하다. 십자군의 이슬람 토벌 원정은 종국에는 파멸의 최후를 맞게 되고 그 와중에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위의 구절을 설파함으로써 이슬람교를 비난한 것이다. 이슬람 문명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려왔던 중세 유럽인들의 심리가 그대로 투영돼 있는 문장이다.이슬람 = 테러 집단?그렇다면 테러와 납치 등으로 얼룩진 이슬람의 왜곡된 이미지는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광신적 원리주의자들에서 찾는다. 사실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존재는 범종교적인 현상이다. 자신들의 존립 목적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낀다면 여느 종교의 여느 종파든(비단 종교 집단에만 국한된 예는 아니다.) 급진적, 폭력적 양태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든다. 여기에서 종교는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불어 넣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보인다. 물론 저자는 원리주의자들의 급진적 행동 양상이 종교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슬람 원리주의’ 의 사전적 정의가 이슬람의 근본인 코란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임을 주지할 때, 그들은 결코 진정한 원리주의자들은 아닌 듯하다. 일종의 자기 모순적 딜레마에 빠지는 셈이다.어찌 보면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생존 메커니즘을 존중하지 않는 서구의 강압성이 만들어낸 비극일 것이다. 이슬람권의 대다수 국가들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 구조이다. 이는 이슬람권 사람들에게 이슬람교는 개인적 신념을 넘어 일상생활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정책 노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서구의 자본 및 정치력은 이슬람의 총체적 삶의 노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들의 독자성을 위협하며 그들만의 특수한 경계를 침범하려 한다. 이른 바 근대화라는 무시무시한 잠식의 논리를 전제한 채 ‘침략’ 의 음모를 꾀하는 것이다.때문에 원리주의 딜레마는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파괴하는 미 제국주의에 맞서 생존하기 위한 이슬람의 필연적 선택이 낳은 결과이다.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멸한다는 명목 하에 중동의 국가들을 공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수많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숨어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이다.제3세계의 이슬람?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보면 이슬람권의 입지는 갈수록 작아져가는 형국이며 이제는 ‘제3세계’ 라고 통칭된다. 우리가 사는 곳과 매우 동떨어진 이방이고 세계에서의 입지를 보자면 영향력 없는 황폐한 지역쯤으로 인식하게 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신의 존재를 찾는다는 이슬람의 교리답게, 그들은 인류사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오랜 시기에 걸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코란의 가르침대로, 타종교를 배척하거나 멸살하기보다는 공존과 조화를 중시했다. 덕분에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의 훌륭한 문화들이 이슬람과 융합된 형태로 오늘날까지 계승,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측면에서도 지대한 업적을 일궈냈는데 서구 기술 문명의 근본 뿌리가 되는 수학, 측량술 등이 모두 이슬람 문명의 한 축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증(考證)을 통해 진실을 보다필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과격 행동을 모두 서구의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는다. 분명 무슬림 세계 내에서의 구조, 정치적인 곪음도 원리주의자들의 비(非)성서적 행동에 기여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 이슬람 종교 분파 형성의 많은 원인이 서양에 있다는 것 역시 묵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이슬람 역사에 대한 고증(考證)적 고찰을 통해 객관적 진실을 규명하고 세계와 이슬람의 관계에 어떠한 역학 관계가 숨어있으며, 또 이를 통해 타종교와 타민족을 바라보는 주체적 시각을 가지자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안타까운 점은,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감상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서구 열강 중심주의적인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이슬람을 바라보길 원했다. 그렇다면 역사적 전개 과정 나열에 따른 종단적 접근 방식보다는 기독교(=서구)와의 비교 분석, 문제 인식에 대한 서구권의 시각과 그에 따른 이슬람권의 반발 등에 지면을 조금 더 할애하는 편이 흥미를 자극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이 저서는 역사 개론서의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나, 저자의 의도를 고려할 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과 사례들은 이슬람 입문자에게 그다지 친절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한 종교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현재 시점의 종교 상황이나, 사상과 교리 체계 등을 선지(先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美의 본질에 대해(I) 서론칸트의 주요 저서 중 한 권인 은 , 의 집필 후에 마지막으로 쓰인 저작이다. 에 등장하는 용어들은 부연 설명 없이 이전의 저서들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이 많다. 즉 기존 개념의 선행된 이해 없이 을 소화하기란 불가능하며 그 내용 자체도 굉장히 난해하고 또 방대하다. 크게 양 부분 (미적 판단력비판 + 목적론적 판단력비판) 으로 나뉘는데 디터 타이헤르트의 『쉽게 읽는 칸트 , 판단력비판』에서는 미적 판단력비판에 주안점을 둔다. 이 부분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칸트에게 있어서 미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중점적으로 생각해보았다.(II) 칸트가 말하는 美의 본질이란?우리는 경이로운 자연 현상이나 혹은 미술 작품들을 보고 ‘아름답다.’ 고 말한다. 칸트가 보기에 이러한 취미판단 (미를 판단하는 능력 즉 미적 가치 판단) 은 대상이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쾌’를 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쾌’란 곧 만족이며 미적인 대상은 곧 만족의 대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여기에서의 만족은 철저하게 순수한 심미적인 만족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눈앞에 미모의 나체 상태인 여성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녀를 보고 성적인 ‘쾌’를 느낄 수도 있고 나의 옛 연인과 닮은 탓에, 추억을 곱씹으며 또 다른 형태의 ‘쾌’를 느낄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성형외과 의사라면 수술 대상으로서의 직업적 ‘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앞의 세 사례 모두 칸트의 미적 ‘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름답다는 개념이 성립되려면, 지각되는 것 그 자체로서 즐거워해야한다. 즉, 몸의 곡선이라든지 흰 살결 등의 시각적인 형태 자체를 보며 만족을 얻어야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관찰 대상의 내재적인 미적 표상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때 칸트는 이것을 ‘미적 무관심성’ 이라고 불렀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대상에 결부된 외적인 상황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신경을 차단해야한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으로 치자면 외재적 접근법을 지양하라는 셈이다. 미의 판단 기준은 대상의 형식과 형태에만 있다.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취미 판단이나 미적인 가치관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를 통해 본다면 칸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개인적 타당성에만 국한된 개념이다. 객관적 정당성이 결여된 것이다. 칸트는 이 논제의 해답을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선험적 지각 능력’에서 찾는다. 누구나 판단력의 저변에는 공통 감정이라는 것이 깔려 있고 따라서 타인들 역시 ‘나’의 취미판단과 일치한 미적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름다움은 타인을 설득하거나 현혹해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미적 만족을 주는 어떤 것’ 이다.(III) 비판특정 분야의 권위자를 넘어서 거장의 학문적 성과를 논평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논리적 비판을 위해서는 해당 영역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그 선결 조건으로서 행해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저자의 재반론에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비록 나는 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해했지만, 나름대로 재해석과 이해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II) 의 해석에 대해 판단력에 관련된 설명과 칸트의 여타 주장을 통해 반박을 시도했다.이는 ‘미적 무관심성’에 관련된 부분이다. 사실 그 자체로 순수한 무관심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칸트가 이러한 무관심성을 주장한 데에는 그의 기독교적 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즉, 칸트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사람 쪽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순수이성’ 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순수이성만 갖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실천이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결국 ‘실천이성’ 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가를 ‘실천이성’ 만으로 알 수는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일 따름이다. 사탄도 하나님으로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둘 사이의 판단이 ‘실천이성’ 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의 실재만큼은 실천이성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사탄과 하나님의 구별은 ‘실천이성’ 의 단계에서는 역시 가능하지 않다. 영적 존재가 하나인지 둘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도 ‘실천이성’의 단계에서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판단력이 요청되는데 이 판단력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美적 판단력이다. 미적 판단력이란 바로 창세기 첫 구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고 쓰여 있는 절대적인 그 판단력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미적 판단력을 사람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사탄의 뜻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부여돼 있는 (신에 의해 부여 받은) 미의식이 무관심하고 절대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