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오만,그에 대한 성찰-현대 과학 문명에 대한 비판《삶은 기적이다》웬델 베리 저‘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처음에 이 책의 부제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이라는 말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떠한 형태의 미신일지 조금 생각해 보았다. 보통 미신이라 하면 무교나 특정 종교의 특이한 교리, 아니면 그 효력이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 미신은 앞에서와 같은 미신이 아니었다. 바로 인간의 오만, 인간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해석하고 알 수 있으며, 지배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환경오염과 같은 문제가 대두되면 많은 사람들이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지구상의 대부분의 어류종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에도 그들은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맹신, 그것이 부제의 미신이다. 과학 기술의 순수성은 사라졌다. 이제 과학 기술은 종교로서 군림하고 있다.“Life is miracle.”삶은 기적이다. 이는 삶은 어떠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이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신비한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를 강하게 역설하는 웬델 베리의 주장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러한 당연한 이야기가 과연 지금의 우리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분석하고 쪼개는 것을 공부하지 않았던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의 의미는 찾았지만 정작 그 글의 내용은,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간과하지 않았을까? 쪼개면 쪼갤수록 점점 더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생각. 전체는 그 나누어진 조각의 합에 불과하다는 생각. 이것이 현대의 과학자, 그리고 그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사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너무나도 명쾌하고 논리적인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말한다. 윌슨의 《통합》에 대한 반론은 사람들이 《통합》에서 느꼈던 불쾌감을 대변하듯 날카롭고 예리하다.정신=뇌=기계 그리고 부품뇌를 엔진가동의 문제로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윌슨의 서술은 납득할 수 없었다. 정신=기계라는 이 말도 안 되는 공식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이 기계적으로, 마치 프로그래밍 된 컴퓨터처럼 작동한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저자가 타잔이론이라고 부르는 그 이론은 얼마나 과거의 것인지 몰라도 황당하다. 우리가 인간의 뇌를 가졌기 때문에 인간으로 행동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지만, 누군가 돼지의 뇌를 이식 받을 수만 있다면, 그는 돼지처럼 행동할 것인가? 또한 인간의 뇌를 가졌기 때문에 인간사회가 아닌 가령 원숭이 사회나, 늑대 사회에서 자란다고 해도 저 논리대로라면 인간다운 행동을 하며 인간의 정신으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명백하다. 늑대무리에서 자란 여자 아이는 결국 인간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1년도 안 되어 죽어버렸다.정신은 멀리 고향을 떠나도 정신인가? 자신과 아무것도 연관이 없는 전혀 생소한 공간에 떨어진다면, 완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엔진은 연료만 있다면 끊임없이 작동한다. 엔진이 작동하는 것에 있어 익숙한 곳이냐 모르는 곳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윌슨이 정신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뇌는 산소와 적절한 영양분, 그리고 신선한 피가 있다고 해도 그와 그가 존재하는 세계가 연결되어있지 않는 한 이미 죽어버린 것과 다름없다.현재의 과학기술, 그리고 환원주의의 문제점은 모든 것을 하나의 기계부품처럼 본다는 것이다. 환원주의의 영향으로 뭐든지 쪼개고 쪼개어 의미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 조각의 합이 과연 완성된 하나의 의미 있는 무엇일 수 있을까? 조각의 합은 그대로 잘게 나누어진 조각의 합일뿐이다. 환원주의의 아래에서 인간은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힘들다. 현대 의학에서 의사는 환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 질병의 성향을 띤 하나의 객체일 뿐이다. 현대 의학의 외과적 수술 또한 그렇다. 환자의 전반적인 몸의 균형을 알려 하지 않고 그저 부분 부분을 나누어서 비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을 제거할 뿐이다. 그들은 환자의 병은 알지만 환자는 알지 못한다.불가피한 일‘불가피한’ 이 단어를 본 순간 과거 논술학원을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정말로 시험이 치러지던 때의 모범답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로 환경과 개발이나 세계화에 대한 문제가 나왔을 때 답안에 자주 등장하던 단어였다. 우리가 개발을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성장을 하기 위해서 개발은 불가피한 일이다. 세계화는 시대의 조류로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화에 발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문장을 쓰는 법을 배우고, 이것을 정답이라 배웠기에 한 번도 그를 의심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불가피한 일이라고 못 박아 놓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가피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웬델 베리의 저술은 큰 충격이었다.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정말로 불가피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과 개발을 논할 때 개발은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에 그 부작용은 최소화 하되 자연의 어느 정도의 훼손은 어쩔 수 없다는 논지로 전개된 글도 있었다. 그리고 개발을 하지 않고, 자연환경의 훼손을 막는 것을 위해서 차라리 원시시대로 돌아가라고 한다.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줄이라는 것은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극단적인 글이 아닐 수 없다. 개발된 현재의 반대는 원시시대인 것이다. 그 때 의문을 가졌지만 차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을 이러한 방식의 새로운 사고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불가피한 일이라는 말로 사고를 제한하고 묶어서는 안 된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인상 깊은 이야기이다.보통 사람과 훌륭한 사람일본이라는 나라를 별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다. 바로 3, 4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다. 작은 라면가게지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그들은 그 라면가게를 지켜왔다. 라면가게의 주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보기엔 별거 아니고 하찮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우리나라도 과거엔 그랬다. 장인정신이라고 불리는 우리 조상들의 흔적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자신의 자식만큼은 더 좋은 일, 더 훌륭한 일을 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부모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 현재 자신의 일은 좋지 않고, 훌륭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물려주고 싶지 않은 일인 것이다. 높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의 사원. 대부분의 대학생이 꿈꾸고 있는 일이 아닌가? 각종 언론, 매체들은 그러한 일이 정말 대단한 일이고 가장 훌륭한 일이라는 것처럼 보도를 한다. 블루칼라라고 불리는, 육체노동자, 농부, 공장에서 조립하는 사람들은 3D업종이라는 말과 함께 비천한 일처럼 취급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직업에 또 다시 귀천이 생기는 것이다.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일을 해나가는 보통의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공부, 공부, 공부를 외친다. 더 많은 임금을 위해 자신을 높은 가격에 팔기 위해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농업을 포기하고 공업 분야에서 이득을 얻는 것이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에 더 좋은 일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는 농업은 공업보다 열등한 산업, 경제적 가치가 떨어지는 산업이기 때문에 포기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한 사고가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데 누가 그런 일에 종사하려 할까. 청년 실업이 매년 증가한다. 그러나 제조업 공장에는 일손이 언제나 부족하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불법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따갑다. 그들이 불법 입국한 외국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불법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 소위 공장에서 힘든 일을 하는 공돌이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무언가 뛰어난 업적을 해낸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애착을 갖고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이다.지금의 직업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은 지루한 사람을 찍어내는 학교를 만들어냈다. 틀에 박힌 논술, 학원, 고액과외 이 모두가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 내겠다는 이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창의적인 사람이 각종 직장에서 환영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창의성마저도 우리는 학원에서 강의에서 찾고 배우고 있다. 대학은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과만이 성업하고 있다. 공고를 나온 사람에게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다. 바로 취업할 수도 있었는데 왜 대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 하냐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거냐고. 그가 피나는 노력으로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간 것은 공부에 대한 욕심이 아니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 취급받고 월급도 적게 주기 때문이었다. 한 제조업 공장은 전문대졸 이상의 학력만을 뽑는다고 한다. 사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일을 수행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고등학교에서 내내 배운 것이 바로 그러한 일 처리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에게 전문대졸을 요구했다. 진정으로 무식한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전태일, 그는 70년대 노동 운동의 선구자이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 남겨진 인물. 그 말 속에는 어떠한 의미가 들어있는 것일까? 전태일을 가장 극적으로 해석해 낸 인물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영래라는 사람이다. 조영래의 작품인 「전태일평전」에서 전태일은 한 사람의 철학자로, 사상가로 태어났다. 우리가 그 당시의 전태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이 책에서 세상에 대한 슬픔과 연민을 지닌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으로 어느 정도 그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과연 전태일은 철학가이며, 사상가였던 것일까, 그렇게 언제나 인생을 끊임없이 회의하고 사색하며 살아갔던 것일까?우선 우리는 역사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 대한 수많은 정의 중 필자가 가장 동의하는 것은 ‘역사는 역사가의 역사이다.’라는 정의이다. 역사는 이미 한 사람의 머리를 거쳐서 기록된 것이다. 과연 역사가는 얼마나 냉정하고 공정하게 사실만을 기록할 수 있을까? 아니 설령 그가 기록한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의견을 전적으로 배제한 100% 순수한 사실이라고 해도 그는 이미 자신이 기록할 역사를 골라내는 작업을 거쳤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이 역사가 아니라 그 중의 몇몇이 역사로 기록되는 것을 볼 때 이미 절대적인 객관성은 상실된 것이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역사가에게 달려있다. 그렇기에 역사를 해석하는 것에 있어 반드시 고려하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 바로 역사가이다.따라서 어떤 한 인물이 역사에 그려진다면 그 인물을 표방하는 수백, 수천의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 전태일이 만약에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신라시대라면? 조선시대의 유교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한 유학자가 그를 기록했다면 어떻게 기록했을 것인가? 만약 위의 사람이 전태일을 기록했다면 어쩌면 그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즉, 민중을 선동해 나라에 반역을 일으키게 하는 내란의 주동자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선량하고 무지몽매한 민중들에게 동요를 일으켜 감히 나라에 대들도록 하는 역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악덕 기업주들의 대변인이 전태일을 말했다면, 전태일은 일도 제대로 안하면서 돈만 받아가는 월급도둑이며, 여공들을 꼬여내고 멀쩡한 직원들을 유혹해 선동하는 사기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전태일은 역적이었을 수도, 사기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전태일은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그리고 사회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목숨마저 바친 한 아름다운 청년이다. 왜, 누가 그를 그려냈기에 그는 아름다운 청년일 수 있었는가?「전태일평전」의 저자인 조영래는 서울대 재학 시절 반독재, 반체제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어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부정한 사회에 저항했던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렇게까지 한 사람의 노동자를 극한으로 몰고 나간 정부를 더욱 원망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시절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전태일과 같은 사람의 용기가 더욱 간절해졌다거나 자신의 힘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 뭔가 버팀목이 필요했던 시기는 아니었을까?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저자는 수년간의 고민과 작업을 거쳐 한 사람의 인물을 재창조해냈다. 그 속에서 전태일은 단순히 노동운동을 했던 한 노동자가 아니라 우수에 찬 비운의 사상가였다. 물론 60년대에서 70년대를 살아갔던 전태일이라는 사람과 책 속의 전태일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떠한 책에서든 저자가 완벽하게 전태일을 재현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역사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누가 그 책을 썼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누가 어떠한 배경에서 그 인물을 보았는가, 동시대의 사람인가 혹은 후대의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저자의 주인공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전태일평전」의 전태일은 60년대에서 70년대를 살아간 그 때의 전태일이 아니라 조영래가 본, 조영래가 생각하는 전태일이다.후대의 전태일과 지금의 전태일과 그 당시 70년대의 전태일은 각각 다른 인물일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절실했던 그 시기에는 선구자적인 인물 혹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시작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지금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 혹은 현재와는 달리 절실했던 70년대 운동의 상징일 수도 있고, 노동운동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먼 후대에는 그저 과거의 한 자락, 옛날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페이지의 빛바랜 흔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과거의 만적이나 묘청을 보듯이. 전태일은 70년대에는 영웅이었는지 모르지만 -전태일을 따라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 지금의 전태일은 영웅이기 이전에 시대에 몸을 바친 비운의 청년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정치성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푹 빠져 살았다. 다른 판본으로만 세권이 있었고, 그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신들의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다나에에게 스며드는 황금 빗방울로 화한 제우스. 그 속에 담겨 있는 어떠한 성적인 뉘앙스나, 일방적인 애정의 강요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순수하게 수용만 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신화를 다시 읽는 나는 그 때 느끼지 못했던 모순,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갖지 않았던, “왜?” 라는 의문을 계속 던지면서 책을 읽어보았다. 그 속에는 수없이 많은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익히 우리가 그리스 사회에서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시초라는 도시국가의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여성과 노예는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고 전적으로 차별하는 사회였다. 그러한 신분제적인(신과 인간의 대립) 면과 남녀 차별의 모습들은 신화에서도 드러나고 있다.『『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몇 가지 주제어를 놓고 그와 관련된 신화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쓰인 책이다. 2, 3권에서는 다양한 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예를 들어 동성애라던가- 어느 정도 열린 시각을 제공하려 한다고 하지만, 그의 결과물 역시 남성적 시각이 다분하다. 아프로디테에 대한 서술과 제우스에 대한 서술의 차이를 보면 저자의 시각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프로디테는 ‘음탕한 아프로디테’라는 제목으로 서술되며 그녀의 남성편력은 결국 헤파이스토스의 계략에 의해 응징된다는 결말로 끝난다. 하지만 종종 등장하는 제우스의 경우 아내 헤라가 질투심이 많다는 말 한마디로 종결된다. 남성의 여성편력은 여성의 질투일 뿐이며, 여성의 남성편력은 남편에 의해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음탕한 아프로디테’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예전에 읽었던 김원익 저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문화』라는 책에서는 아프로디테 포르네라는 별칭이 기독교인들로 인해 붙여졌다고 한다. 중세의 억압적인 기독교 윤리 아래서 아프로디테의 자유분방함은 음탕함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보면 아프로디테 포르네, 라는 말은 이미 정설이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생길 그 당시부터 있었던 말이라도 되는 양, 아프로디테는 음탕한 여자라는 공식이 많은 이들의 글 속에서 보인다. 이것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베스트셀러의 영향력이다. 여러 판본의 책을 읽었던 나지만 한 번도 음탕한 아프로디테의 언급은 본 적이 없다. 이는 성균관대의 이재호 교수가 비판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의 해석은 고대의 자유분방함을 현대의 가치로 억누르는 행위일 뿐이다.『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어디에도 색다른 해석은 없다. 다만 작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제시되는 이름, 이름, 어원, 파생어. 이 단편들로 신화를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남성의 시각으로 남성에 의해 쓰인 신화라는 것은 남성 이윤기에 의해 그대로 전해질 뿐, 전혀 새롭지 않았다. 다만 구성을 달리했다는 것, 내용이 무겁지 않고 가볍다는 것에서 독자들에게 읽기 편하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 외에는 큰 의미를 두기 힘들지 않을까, 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 인터넷 서점의 서평을 읽어보았다. 대부분 찬양이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쉽고 좋았다. 상상력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상력은 과연 신화의 해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상상력인가, 아니면 저자가 제시한 그림과 서술에 의한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 정도의 상상력인가? 대부분 자신을 그 이미지 속에 대입시키면서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된 것 같아, 혹은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즐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찬사 속 어디에도 그 내용 속에 담긴 저자의 생각, 저자의 시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없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종종 있었다. ‘지나치게 가벼워서 정확한 지식을 주는 대신 단편적인 이미지를 줄뿐이다. 남성 중심적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저자의 시각이 너무 노골적이고 내용이 주관적이다.’ 하지만 대 다수 독자들은 정작 이 속에 담긴 저자의 주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기 때문에, 이 책만을 읽었기 때문이다. “처음 신화를 접하는 이들에게 추천합니다.” 라는 말은 “신화는 이렇게 이해하세요.”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강조했던 편역이라는 타이틀은 독자들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고갑희의『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타난 변신의 성정치』라는 논문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여성들이 느꼈을 불편함을 대변하고 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본 그리스 로마 신화는 불평등의 신화나 다름없다. 저자는 대부분의 분량을 신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 유피테르, 아폴로, 퓌그말리온 등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의 일방성과 폭력성을 서술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소유=사랑이라는 공식과 주체적인 사랑의 행위자는 남성이며, 여성의 거부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일방적인 사랑.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입맛대로 이상향의 여자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는 퓌그말리온의 신화를 보여주며, 이들의 남성 중심적 사고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된 폭력을 대부분의 신화 작가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성들의 수동성과 나약함. 그리고 그 여성들을 핍박하는 또 다른 여성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 그리스 신화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신들의 질투심은 끝이 없다. 신 크로노스에서 아들 제우스로의 승계는 가부장제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신화의 서열구조는 태어난 순서대로, 정확하게는 다시 토해내진 순서대로이며 이는 가부장제의 장남 승계와도 연결된다. 남신들의 역할에 비해 여신들이 맡고 있는 직책들은 대개 부수적이고 가정적이다. 저자의 해결책은 바로 텍스트에 대한 재해석, 다시 쓰기 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신화는 아닐까?이렇게 그리스 로마 신화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은연중에 이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된다. 남성들의 성적인 억압과 여성에 대한 집착과 소유, 그를 위한 폭력들은 은유적으로 신화 속에 숨겨져 여과 없이 청소년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는 신화에 그려진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왜곡된 성적 표현의 모습은 제대로 수정된 역사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에서도 제우스나 아폴론의 성적인 소유욕은 그대로 드러나며, 여신들은 질투하는 존재, 여성들은 유혹의 대상일 뿐이었다. 과연 그러한 신화의 모습들이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까? 이러한 식의 남녀의 분리는 결국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주도하고 누가 지배당하는가. 대부분의 건국신화는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도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배어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와 대조적인 우리 민족의 신화를 보면 모계 중심적인 한민족의 고대 사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박제상의 부도지에서는 우리 민족의 창세신화를 마고라는 여신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거인들의 세계, 힘의 논리로 축약되는 그리스 신화와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신의 탐욕을 보여주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달리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세계의 분화를 설명하며, 그 중심에는 지모신인 마고여신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고 신화는 잊혀져가고 있다. 만약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부계 중심의 신화 대신 마고 신화와 같은 모계 중심의 신화가 더 잘 알려졌다면 어땠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미적 태도의 환상, 혹은 실재필자는 지난 학기에 ‘서양 음악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수업시간의 절반정도는 음악사적인 이론과 작곡가에 대해 배우고, 나머지 절반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그리고 각 시험은 감상시험이 있어서 들려주는 음악을 듣고 제목이나, 작곡가, 양식을 기입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그 음악을 mp3플레이어에 넣어 다니며 통학할 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수시로 들었었다. 그리고 시험 날 교수님이 들려주시는 음악을 들으면서 답안지에 답을 기입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은 수업시간에 음악을 들을 때와 동일한 음악을 평소에 들을 때와 시험을 보기 위해 음악을 들을 때 그리고 평소에 감상을 위해서 들을 때, 그때 마다 다른 태도로 각각의 음악을 듣고 있었나? 음악을 미적 태도로 들었나? 라는 질문을 한다면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 목적은 각각 다 달랐지만, 그 때의 태도도 달랐는가? 라는 것은 좀 더 고려해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미적 태도를 지니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진정으로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와 미적 태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부류가 있다. 전자의 대표는 스톨니츠이고 후자의 대표가 디키이다. 스톨니츠는 ‘무관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미적 태도를 정의하며, 디키는 그것을 신화라고 부르며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말한다.미적 태도는 미적 태도는 어떠한 한 개인의 특정한 심리적인, 마음의 상태를 규정하여 미적인 것을 설명한다. 스톨니츠가 정의한 미적 태도란, 무관심적으로 공감적으로 주목하고 관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지각과 반대되는 것으로 수단, 목표, 효용으로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무관심하게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관심은 비관심과 다르며, 오직 작품에게 관심을 가지는 류의 지각을 의미한다. 공감적은 대상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적대적, 분리적 감정은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이나 도덕적,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해, 과연 무관심하다는 것은 판단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딕키는 스톨니츠의 미적 태도를 환상이라고 단언한다.딕키는 미적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미적 태도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거리’ 이론의 벌로프와 ‘무관심성’을 중심 개념으로 삼은 스톨니츠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먼저 미적 태도가 환상이라는 것은 미적 태도가 지닌 주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스톨니츠와 같이 미적 태도를 주장하는 벌로프의 심적 거리이론을 생각해보자. 그는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과 조명기사가 [오델로]를 보고 있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그것에서 필자는 우선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연극인지를 묻고 싶다.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은 [오델로]를 보면서 극중 인물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사건 전개를 무시하고 부정한 아내로서만 극중의 인물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미 남편의 마음이 극 보다는 자신의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연극을 보고 아내를 의심했던 것을 그 순간 이미 남편은 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극을 감상하고 있다면 점차 부정한 아내에 대한 의심이 풀리는 편이 옳다. 남편이 극을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술 작품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비 미적 태도라고 남편의 태도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남편이 극을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지 그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이 아니다.또한 조명기사가 보고 있는 것은 연극이라기보다는 조명이다. 그것은 건물을 지을 때 건축가가 주변 환경을 고려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건축가는 주변의 산과 강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건물을 짓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산과 강은 그 건물을 위한 부수적인 고려 대상일 뿐이다. 조명기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조명이지 배우의 대사나, 내용이 아닌 것이다. 물론 조명은 연극의 내용전개, 상황-가령, 결투라던가, 애정신이라던가-을 고려하여 선택해야 하지만 조명기사가 결투의 완성도나, 배우의 두 사람 모두 작품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은 데 굳이 그들의 태도를 비 미적인 태도로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구분을 해야 한다면 미적 태도, 비 미적 태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지각하는 상태와 지각하고 있지 않은 상태로 나누어야 적절한 것이다. 또한 거리로 미적 태도와 비 미적 태도로 구분하는 것은 관객과 작품의 거리가 들쑥날쑥한 예외적인 상황을 간과한다. 예를 들면, 최근 많아지고 있는 관객 참여형 연극이라던가, 한국의 판소리, 탈춤과 같이 관객의 역할이 큰 작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식별해 낼 수 있는 주목’ 이라는 말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가 말하는 식별해 낼 수 있는 주목과, 그와 구별된다고 주장하는 비평은 비평의 가시적인 목적을 제외하고는 동일하다고 보인다. 작품의 개별성을 인지하는 주목과 비평가의 주목은 동기를 제외하고 어떠한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가? 한 비평가가 전시회를 보러 가게 되었다. 그는 일체의 비평과 관련된 기고 의뢰를 받은 적이 없으며 비평을 쓸 의도가 없었다. 전시회를 감상하면서 그는 자신이 지닌 지식을 동원하여 작품을 감상했다. 그러나 그 전시회를 보고나니 그에 대한 비평을 쓰고 싶어졌고, 그래서 비평을 썼다. 그렇다면 그는 미적 태도로 전시회를 관람한 것인가, 아니면 비평이라는 의도를 지닌 비 미적 태도로 전시회를 관람한 것인가. 이렇게 스톨니츠가 특정한 인식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평이라는 행위는, 어떤 부분에 특별히 더 주목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은 미적 태도로서의 주목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비평가에 따라 그 주목하는 부분은 달라질 것이며, 그것은 감상자에 따라 주목하는 부분이 달라지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스톨니츠에 의하면 미적 태도는 작품에 대해 완전히 자신을 개방한 채 작품의 내적인 것을 주목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작품의 내적인 특성만을 주목하는 것과 같다. 결국은 미적 태도로서의 주목은 다른 주목과 차별화된, 제한된 주목을 정의하고 있지만, 미적 태도태도를 위해서는 공감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습득하거나 기술적인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자는 작품의 감상에는 다른 가치나 편견을 주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다르게, 개인의 가치관에 크게 영향을 받거나 편견과 유사한 개인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 있다. 어찌 보면 공감적 태도와 지식의 습득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중국의 도자문화를 한국의 도자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지식 습득은 그러한 쪽으로 편중될 것이다. 혹은 그러한 가치관을 가진 스승에게 배운다면 유사한 가치관을 가지기 쉬울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을 떠나서 순수하게 작품만을 보고, 그 작품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은 감상자, 혹은 지각자의 미적 판단, 지식이 편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또 누구에게 판단을 맡겨야 하는가. 또한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작품에 대해 그것이 없이도 충분히 멋지며 그 당시의 문제란 우리와 소원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예술작품의 감상을 위해서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지식과 함께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것 이상의 배경적 지식 역시 필요하다. 스톨니츠의 관조란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부여하되 제한된 창으로 기회를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밀톤의 소네트, 「최근의 피몽 대학살에 관해서」라는 시는 시를 쓰기 직전의 사건에 대한 항거라고 말하면서도 그 시 속에 담긴 종교적, 정치적인 문제는 우리와 소원하다는 말로 그것을 무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록 그 종교적, 정치적 문제가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약간은 생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고려와 지식 없이는 온전히 소네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대해 쓰인 시가 있다면, 단순히 그 시가 운율적으로 어떤 아름다움을 지녔는가, 시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보다 한국전쟁은 어떤 것이며, 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가가 시를 감상하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독교 작품에 대한 반감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기독교도가 기독교적인 작품에 느끼는 아름다움은 진정한 미적 태도가 아닌가? 작품과 분리적인, 그리고 그에 대한 반감 역시 작품에 대한 미적 반응일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더 감동을 느끼고, 덜 감동을 느낄 수는 있지만 같은 기독교적 작품을 보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둘 사이의 감상은 달랐다고 할 수 있지만 미적인 태도에서 어떠한 차이를 보였는가는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어떤 독자가 작품을 읽기 불편하다고 느낀 것은 그가 미적 태도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미적 대상은 무조건 좋다, 라는 생각을 옹호하는 스톨니츠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읽기가 거북했지만 끝까지 읽었다고 해도 미적으로 고려할 자격이 없을까? 작품에 대한 반응이 대상과 항상 일치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예술작품을 보고 그에 대한 반응을 할 때 꼭 그와 동일하게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관객은 혐오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하고 추하다고 판단된 그림이 작가에게 있어서는 미적인 경지의 최고라면, 그것이 아름답다고 동조하지 못하는 관객은 모두 비 미적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어야 한다. 스톨니츠는 미적 인지가 항상, 긍정적이며, 선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미적 경험이라는 것이 헛된 감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즐거움이라는 주관적인 감정을 미적 인지와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하고 추한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고, 혐오감을 느낌 것 역시 즐거움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뿐이다. 스톨니츠의 생각은 미적경험 = 즐거움이라는 공식과 함께 즐겁지 않다고 생각한 것을 미적경험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혐오스러운 것은 미적이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그러나 즐겁다? 라는 묘한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이론화하기엔 부족하다. 위의 논의는 윤리적인 작품은 미적이지 않다는 스톨니츠의 생각과도 연관된다. 스톨니츠는 어떤 소설이 개인의 도덕적인 신념과
전통적 유교 국가에서 교육은 지식의 탐구이자 인격수양의 길이었다. 반면에 현대는 교육을 공공서비스, 즉 국민에게 누려야 할 복지의 일부로 규정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교육을 경제논리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 학교는 돈벌이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교육을 받기위해서는 돈이 필수적이며 내는 돈에 따라 다른 교육을 제공받는다. 신성한 교육의 장이 사적 이익 추구의 장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교육은 아직 공적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교육이 전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방지하는 유일한 제한선이다. 하지만 한미 FTA로 인해 우리는 교육의 완전한 상품화를 곧 목격하게 될 수도 있다.현 FTA 협상안에서 정부는 의무교육인 초중등교육에 대해서는 개방하지 않으므로, 공교육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라고 국민들을 설득하려 한다. 고등교육은 공교육의 영역이 아니라고 정부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등학교 학생들의 약 80%가 대학교로 진학하고 매년 약 12만 명이 졸업 후 재수를 해서 대학교에 입학하고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대학교육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대학교육을 외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현재 FTA 협상안 중 교육부문에는 SAT의 도입과 고등교육의 개방이 들어가 있다. 만약 이대로 한미 FTA가 체결된다면 한국의 교육 현실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먼저 대학교들의 기업화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고등교육이 개방될 경우 들어오게 될 미국의 교육단체들은 우리나라에 자선사업을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는 합법적으로 대학의 장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대학에 대한 역차별이고 따라서 한국의 많은 사학재단들도 영리법인을 설립하게 될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곧 교육의 양극화를 의미한다. 지금도 높은 대학 등록금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삼보일배를 하고 삭발식을 하며 등록금 인상을 저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마당에, 영리법인이 설립된다면 등록금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대학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가장 차별 없이 본인의 노력에 따라 주어져야 할 교육의 기회가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이 국민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져야할 권리라는 현대 복지 사회의 논리와 어긋나는 일이다.또한 FTA는 한국의 교육주권을 약화시킬 것이다. 미국의 교육기관들이 들어오게 되면 한국의 제도로는 그들을 통제하기 힘들다. 교육기관들이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미국식의 자체 학생선발 기준과 교육과정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교육기관들의 잇따른 자율화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묶여있는 초중등교육과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고등교육 사이의 괴리는 국민들의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더 크게 하고, 대신 사교육에 치중하게 할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공교육 대신 SAT와 미국교육기관 입학을 돕는 사교육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돈 있는 부유층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이다. 그리고 자율화된 학교들은 서열화를 가속화시키고, 학생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경쟁과 피라미드식 서열체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좀 더 좋은 학교를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하고 좀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